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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이탈리아가 사랑하고 밀어낸 10번

비첸차부터 브레시아까지 공식전 643경기 291골, 아주리 56경기 27골. 로베르토 바조의 기록과 등번호를 정리하고, 왜 이탈리아 축구가 최고의 판타지스타를 필요로 하면서도 매번 다시 밀어냈는지 읽는다.
파란 훈련복 차림의 로베르토 바조와 이탈리아 국기를 편집한 삥이FC 썸네일
‘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조. 썸네일 편집: 삥이FC.
이탈리아 국기
ITALIA이탈리아 공화국Repubblica Italiana
이탈리아 축구 연맹 문장
NAZIONALE ITALIANA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Nazionale di calcio dell'Italia | Azzurri(아주리)
편집자 평가

이탈리아는 물론 전 세계 축구계의 위상·인기·실력·파급력, 그라운드 안의 퍼포먼스와 외모·인성까지 한 시대의 판타지스타를 규정한 초레전드다. 그 명성에 비해 클럽에서의 입지는 유독 불안정했다. 유벤투스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됐고 밀란에서도 우승했는데, 볼로냐에 가서는 월드컵에 나갈 자격부터 다시 증명해야 했다. 인테르에서는 떠나기 직전 팀의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따냈다. 이 정도로 잘하는 선수가 왜 가는 곳마다 자기 자리를 걱정했을까. 바조의 플레이를 보고 감탄하다가도, 그가 뛰었던 팀들을 돌아보면 자꾸 그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먼저 알아보게 되는 것은 얼굴보다 땋은 머리다. ‘신성한 꼬리머리’라는 별명은 바조의 플레이와 인물을 한 실루엣으로 묶었다.

삥이FC 로베르토 바조 평가

  1. 바조는 이탈리아 역대 공격수의 최상단에 놓인다. 주세페 메아차·잔니 리베라·루이지 리바가 만든 계보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프란체스코 토티가 이은 계보 사이에서, 그는 판타지스타라는 이탈리아어가 세계 축구의 보통명사처럼 들리게 만든 선수였다.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함께 받은 1993년은 그 평가의 공식적인 정점이었다.

  2. 필자가 바조의 플레이에서 눈여겨보는 대목은 공을 받은 직후의 여유다. 수비와 미드필드 사이에서 공을 잡고도 곧장 속도를 올리지 않는다. 반 박자 늦춘 터치로 수비수를 끌어낸 뒤 패스를 찌르거나, 직접 빠져나가 슈팅한다. 수비수 입장에서는 참 곤란하다. 붙으면 뒤가 열리고, 기다리면 바조에게 고를 시간을 주는 셈이니 말이다. 공을 잡은 쪽은 느긋한데 보고 있는 수비수가 먼저 급해진다.

  3. 물론 바조가 중앙과 왼쪽을 오가면 주변 선수들의 움직임도 달라져야 했다. 누군가는 측면에 남고, 누군가는 앞으로 뛰어 수비수를 데려가야 했으며, 공을 잃으면 벌어진 간격도 메워야 했다. 아리고 사키(Arrigo Sacchi;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46-), 마르첼로 리피(Marcello Lippi;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48-), 파비오 카펠로(Fabio Capello;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46-)처럼 선수 사이의 거리와 역할을 세밀하게 정하는 감독들에게는 고민이 생길 만했다. 바조에게 맞춰 주변을 바꿀지, 바조가 맡을 일을 좁힐지. 그 선택을 놓고 선수와 감독이 여러 번 부딪혔다.

  4. 그런 갈등 속에서도 기회를 얻었을 때의 활약은 상당했다. 볼로냐에서는 리그 30경기 22골, 인테르에서는 파르마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 결정전 두 골을 남겼다. 브레시아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고 안드레아 피를로가 더 낮은 위치에서 공을 보내 줬다. 특히 브레시아 시절은 흥미롭다. 바조도 피를로도 가운데서 공을 다루고 싶어 하는 선수였는데, 앞뒤로 거리를 벌려 놓으니 둘의 장점이 한 번의 공격에서 이어졌다.

  5. 그에 비해 1994년 월드컵을 둘러싼 기억은 마지막 실축에 지나치게 쏠려 있다. 바조가 고개를 숙인 장면은 익숙한데, 그 결승까지 이탈리아를 데려간 토너먼트 5골은 상대적으로 덜 이야기된다. 승부차기에서는 프랑코 바레시와 다니엘레 마사로도 앞서 실패했다. 필자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0-1로 끌려가던 나이지리아전의 88분을 함께 떠올린다. 당시 바조의 동점골이 없었다면 이탈리아의 월드컵은 16강에서 끝났을 터다.

로베르토 바조 프로필

이탈리아 국기이탈리아 공화국Repubblica Italiana이탈리아 축구 연맹 문장
본명
Roberto Baggio
등록명
로베르토 바조
출생
1967년 2월 18일
출생지
이탈리아 칼도뇨
신장
174cm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 세컨드 스트라이커
주요 등번호
10번 · 18번 · 15번
대표 국적
이탈리아

본명은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 이탈리아 축구선수·공격수, 1967-)다. 베네토주 칼도뇨에서 태어나 비첸차에서 프로 선수가 됐고, 피오렌티나·유벤투스·밀란·볼로냐·인테르·브레시아를 거쳐 2004년 은퇴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땋은 머리에서 나온 일 디비노 코디노(Il Divin Codino; ‘신성한 꼬리머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피오렌티나 이적 직전에 다친 무릎

비첸차의 어린 바조는 1984-85 시즌 세리에 C1에서 29경기 12골을 넣었다. 피오렌티나 이적이 결정되던 1985년 5월, 오른쪽 무릎의 인대와 반월상연골을 크게 다쳤다. 새 구단은 계약을 철회하지 않았고 바조는 긴 수술과 재활을 거쳐 1986년 9월 세리에 A에 데뷔했다. 최상위 리그에 첫발을 내디딜 무렵부터 무릎의 손상을 안고 있었던 셈이다. 어린 시절의 플레이를 볼 때도 그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피오렌티나에서 바조는 패스와 돌파로 공격의 속도를 바꾸며 사랑받았고, 1989-90 시즌에는 리그 17골과 함께 UEFA컵 결승 진출을 이끌었다. 공교롭게도 그해 여름 그를 영입한 팀은 결승 상대였던 유벤투스였다. 당시 세계 최고액으로 불린 250억 리라가 오갔지만, 피렌체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팬들로서는 이제 막 유럽 결승까지 함께 간 선수를 그 결승에서 만난 팀에 넘기는 상황이었다. 거액의 이적료로도 그 상실감까지 달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88년 피오렌티나 훈련복 차림으로 공을 차는 젊은 로베르토 바조
1988년 피오렌티나의 바조. 큰 부상 뒤 돌아온 이 선수를 피렌체는 오래 지켜보고 있었다. 사진: Wikimedia 이탈리아어판.

그 감정이 얼마나 오래 남았는지는 이듬해의 한 장면이면 알 수 있다. 1991년 4월 6일, 유벤투스 선수가 되어 피렌체로 돌아온 바조는 페널티킥을 차지 않았다. 대신 찬 루이지 데 아고스티니의 슛은 막혔고, 교체되어 나오던 바조는 관중석에서 날아온 보라색 머플러를 주워 들었다. 유니폼은 흑백인데 손에는 보라색. 팬들이 이 장면을 잊을 리가 있나.

그렇다고 페널티킥까지 ‘친정팀을 차마 찌르지 못한 사랑’으로 단정하면 썰이 사실을 앞질러 간다. 바조는 훗날 상대 골키퍼가 자신의 습관을 너무 잘 알아 감독과 미리 키커 변경을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머플러를 집어 든 행동과 페널티킥을 넘긴 이유는 나눠 봐야 한다. 그래도 선수의 소속이 바뀌었다고 도시와의 관계까지 이적 계약서대로 정리되지는 않는다는 것, 그건 이 사진에 그대로 남아 있다.

1991년 피렌체 원정에서 유벤투스 유니폼 차림으로 피오렌티나의 보라색 머플러를 든 바조
1991년 4월 6일. 흑백 유니폼과 보라색 머플러가 한 몸에 걸렸다. 이적은 끝났지만 피렌체와 바조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사진: Wikimedia 이탈리아어판.

유벤투스, 10번의 정점과 다음 10번

유벤투스에서 바조는 5시즌 동안 공식전 200경기 115골을 기록했다. 1992-93 UEFA컵에서는 12경기 6골을 넣어 우승을 이끌었고, 그해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미셸 플라티니가 입었던 유벤투스의 10번을 등에 달고, 바조도 세계 최고의 선수로 불리게 됐다.

다만 그 정점에 이르기까지는 아름다운 플레이에 걸맞은 우승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따라붙었다. 1993년 4월 6일 PSG와의 UEFA컵 준결승 1차전은 그 질문에 대한 꽤 직설적인 답이었다. 조지 웨아에게 먼저 실점한 뒤 바조가 페널티지역 밖 슈팅으로 동점을 만들었고, 막판에는 직접 프리킥으로 2-1 역전승을 완성했다. 패스로 풀어낼 공간이 없으면 자신이 마무리할 수 있는 10번. 바조의 창조성은 골을 넣는 능력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1993-94 시즌 우디네세전에서 골키퍼를 넘어 득점하는 유벤투스의 10번 바조
1993-94 시즌 우디네세전의 바조. 득점과 창조를 나눌 수 없는 10번이 유벤투스 공격의 중심에 있었다. 사진: Wikimedia 이탈리아어판.

그러나 1994년 말 무릎 부상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Alessandro Del Piero; 이탈리아 축구선수·공격수, 1974-)가 성장했다. 리피의 유벤투스는 잔루카 비알리와 파브리치오 라바넬리의 활동량, 델 피에로의 침투를 앞세워 더 반복 가능한 전방 움직임을 만들었다. 복귀한 바조는 1994-95 시즌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 우승에 기여했지만, 구단은 연봉 삭감을 제시했고 다음 10번을 선택했다.

바조 입장에서는 섭섭할 만하다. UEFA컵을 안겼고 부상에서 돌아와 국내 더블에도 힘을 보탰는데, 돌아온 제안은 연봉 삭감이었다. 반면 구단에는 더 젊고 부상 부담도 적은 델 피에로가 있었다. 리피의 공격진은 이미 그와 함께 우승했고, 유벤투스는 그 조합을 이어가려 했다. 그렇게 바조는 스쿠데토를 들고도 토리노를 떠났다.

밀란에서 우승하고도, 볼로냐에서 증명해야 했던 선수

바조는 1995년 밀란으로 옮겨 첫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경험했다. 유벤투스의 1994-95 시즌에 이어 서로 다른 두 구단에서 연속으로 스쿠데토를 든 셈이다. 연속 우승과는 별개로 팀 내 경쟁은 만만치 않았다. 카펠로의 밀란에는 데얀 사비체비치와 즈보니미르 보반, 조지 웨아가 있었다. 바조가 선호하는 자리에도 이미 좋은 선수들이 몰려 있었다. 1996-97 시즌에는 오스카르 타바레스에 이어 사키가 지휘봉을 잡았고, 그다음인 1997년 여름에는 카펠로가 돌아왔다. 바조는 끝내 확고한 자리를 얻지 못한 채 공식전 67경기 19골을 남기고 밀란을 떠났다.

1995-96 시즌 밀란 더비에서 나란히 선 바조와 인테르의 폴 인스
밀란 더비의 바조와 폴 인스. 바조는 밀란에서도 스쿠데토를 들었지만 공격진의 선발 경쟁은 계속됐다. 사진: Wikimedia 이탈리아어판.

유벤투스에서 밀란, 그리고 1997년에는 볼로냐였다. 구단의 위상만 놓고 보면 내리막이었고, 볼로냐에서도 감독과의 갈등은 이어졌다. 렌초 울리비에리(Renzo Ulivieri;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41-)와 공개적으로 충돌했고, 유벤투스전을 앞두고 선발 제외를 통보받자 소집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시즌 기록은 30경기 22골에 달했다. 바조 자신의 세리에 A 한 시즌 최다 득점이었다. 볼로냐는 8위로 UEFA 인터토토컵 출전권을 얻었고, 바조는 31세에 1998년 월드컵 대표팀으로 돌아갔다.

볼로냐의 공격진을 보면 바조가 어디서 골을 넣을 여유를 얻었는지 조금 더 잘 보인다. 케네트 안데르손이 전방에서 공을 받아 버티고, 이고리 콜리바노프가 측면과 전방을 오갔다. 바조는 그 뒤로 내려와 공을 연결한 다음 다시 골문 쪽으로 들어갔다. 안데르손에게 수비수가 붙어 있으면 그 옆에서 받아도 되고, 패스를 건넨 뒤 빈틈으로 들어가도 됐다. 동료에게 한 번 맡기고 다시 받는 사이, 바조는 수비수를 정면에 둔 자리에서 슈팅할 수 있는 자리로 옮겨 갔다.

1997-98 시즌 볼로냐 유니폼을 입고 짧은 머리를 한 로베르토 바조
볼로냐에서는 꼬리머리도 잘랐다. 상징은 달라졌지만 리그 22골은 그대로 바조의 발에서 나왔다. 사진: Wikimedia 이탈리아어판.

인테르가 밀어낸 선수가 인테르를 구하다

1998년 인테르는 호나우두와 바조를 함께 세웠다. 이름만 보면 가장 자유로운 공격 조합이지만, 실제 두 시즌에는 감독이 네 차례 바뀌었다. 바조는 부상과 선발 경쟁, 리피와의 갈등 속에서 공식전 59경기 17골에 그쳤다.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한 1998년 UEFA 챔피언스 리그의 두 골처럼 최고 수준의 장면은 있었지만, 팀은 그 장면을 매주 재현하는 구조를 만들지 못했다.

1998년 8월 인테르 유니폼을 함께 입은 로베르토 바조와 호나우두
1998년 8월, 바조와 호나우두. 이 둘을 같은 유니폼에 담는 데는 성공했다. 둘의 재능을 매주 이어 주는 팀을 만드는 일은 또 다른 숙제였다. 사진: Inter / DFP.

같은 팀에서 뛰었어도 바조와 호나우두가 수비수를 지나가는 모습은 꽤 달랐다. 호나우두가 긴 거리를 폭발적으로 뚫고 나갔다면, 바조는 짧은 보폭으로 공을 몸 가까이에 두고 어깨와 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다음 터치와 어긋나게 만들었다. 수비수는 몸을 따라 발을 옮겼는데 공이 반대로 빠져나가는 식이다. 특히 중앙에서 왼쪽으로 비껴 받은 뒤 오른발로 안쪽을 향할 때가 까다로웠다. 감아 차는 슈팅을 막으러 붙으면 동료에게 패스가 들어갈 수 있고, 패스 길을 지키면 직접 찰 여유가 생겼다. 수비수의 발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보면서도 자기 선택은 꽤 늦게까지 숨겼다.

인테르에서의 마지막 경기는 유난히 역설적이다. 2000년 5월 23일, 인테르는 파르마와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놓고 단판 승부를 치렀다. 시즌 내내 주변으로 밀렸던 바조가 두 골을 넣어 3-1 승리를 만들었다. 35분에 앞서가는 골을 넣었고, 69분 동점을 허용하자 73분에 다시 리드를 가져왔다. 동점이 된 지 4분 만에 바조가 또 해결한 것이다. 덕분에 인테르는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얻었는데, 정작 바조는 그 경기 뒤 계약이 끝나 떠났다. 이 마지막 장면까지 보고 나면 인테르에서의 두 시즌이 더 아깝게 느껴진다.

인테르의 바조가 팔을 휘두르며 환호한다.

브레시아에서 만난 피를로와 바조

승격팀 브레시아의 카를로 마초네(Carlo Mazzone;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37-2023)는 바조를 공격의 기준점으로 삼았다. 2000-01 시즌에는 원래 트레콰르티스타였던 피를로를 후방 레지스타로 내리고, 바조를 다리오 휘브너 뒤에 배치했다. 둘 다 가운데서 공을 받고 싶어 하니 마초네는 그 사이를 앞뒤로 벌렸다. 피를로가 아래에서 멀리 보고 패스하면 바조는 상대 골문 가까이에서 받을 수 있었다. 브레시아는 그 시즌 구단의 세리에 A 최고 순위인 8위에 올랐다.

그 둘이 이어진 장면 중에서도 2001년 4월 1일 유벤투스전 동점골은 몇 번을 봐도 좋다. 피를로가 후방에서 길게 띄운 공을 바조가 따라간다. 골키퍼 에드빈 판 데르 사르가 나오는데, 바조는 내려오는 공을 첫 터치로 그의 바깥쪽에 놓고 그대로 따라가 빈 골문에 넣는다. 저 긴 패스를 받으면서 골키퍼까지 한 번에 지나가 버린다.

여기서 공을 놓는 거리가 참 절묘하다. 너무 짧으면 판 데르 사르에게 걸리고, 너무 길면 바조도 따라가기 어렵다. 바조는 골키퍼의 손이 닿는 곳을 벗어나면서 자기 다음 걸음에는 닿을 자리에 공을 보냈다. 착지 이후에는 공을 다시 조정할 필요 없이 슈팅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2002년에는 왼쪽 무릎 십자인대 재건 수술을 받았다. 시즌 종료가 예상됐지만 76일 만에 돌아와 피오렌티나전에서 두 골을 넣었고, 최종전까지 브레시아의 잔류를 도왔다. 그러자 월드컵에 데려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수술 뒤 이렇게 빨리 돌아와 골까지 넣으니 마지막 월드컵을 기대할 만했다. 하지만 조반니 트라파토니는 프란체스코 토티와 델 피에로가 있는 명단에 바조를 넣지 않았고, 네 번째 월드컵은 끝내 오지 않았다.

바조는 브레시아에서 네 시즌 연속 잔류했고 공식전 101경기 46골을 남겼다. 마지막 2003-04 시즌에는 세리에 A 26경기 12골과 11도움을 기록했다. 은퇴하는 시즌, 나이 37세에 남긴 숫자다. 브레시아가 잔류를 걱정하며 골이 필요할 때면 여전히 바조의 득점과 마지막 패스에 기대고 있었다.

2003년 11월 브레시아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선 로베르토 바조
2003년 11월, 마지막 시즌의 바조. 이 시즌에도 리그 12골과 11도움을 남겼다. 사진: Wikimedia 이탈리아어판.

1994년, 실축보다 먼저 있었던 다섯 골

잠깐 아주리의 시간을 되돌려 보자. 월드컵의 바조가 처음부터 고개 숙인 뒷모습이었던 건 아니다. 1990년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는 주세페 잔니니와 공을 주고받은 뒤 수비진을 뚫고 골을 넣었다. 패스로 출발해 드리블로 수비를 흔들고 직접 끝내는 공격수. 세계의 관객이 만난 젊은 바조는 그런 선수였다.

1990년 월드컵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이탈리아의 바조가 골문을 향해 슈팅하는 장면
1990년 체코슬로바키아전. 잔니니와 공을 주고받으며 출발한 바조가 직접 골문까지 들어왔다. 사진: Wikimedia 이탈리아어판.

반면 1994년 대회는 초반부터 난항이었다. 사키의 이탈리아는 선수 사이의 거리를 통제하고 공이 없는 움직임을 반복하는 팀이었다. 조별리그 아일랜드전에서 침묵한 바조는 노르웨이전에서 일찍 교체됐다. 골키퍼 잔루카 팔리우카가 퇴장당하면서 루카 마르케자니를 넣으려면 필드 선수 한 명을 빼야 했는데, 사키가 고른 선수가 바조였다. 막 세계 최고의 선수상을 받은 바조 입장에서는 자신이 나가야 한다는 결정이 달갑기 어려웠을 것이다.

토너먼트에 들어서자 그 선수를 뺄 수 없는 경기가 이어졌다. 나이지리아전에서는 0-1로 뒤진 데다 잔프랑코 졸라까지 퇴장당한 상황에서 88분 동점골을 넣고 연장 페널티킥으로 승부를 뒤집었다. 스페인전 결승골, 불가리아전 두 골까지 합쳐 결승까지 5골. 이탈리아가 결승까지 가는 동안 바조는 토너먼트 매 경기에서 득점했다.

브라질과의 결승은 120분 동안 0-0이었다. 승부차기에서 이탈리아는 바레시, 마사로, 바조가 실패했다. 마지막 키커 바조의 슛이 크로스바 위로 떠오른 순간 경기가 끝났기 때문에 그 장면이 모든 앞 장면을 삼켰다. 하지만 바조가 성공했어도 브라질은 다음 킥으로 우승을 확정할 기회를 갖고 있었다. 패배의 책임을 바조 한 사람에게 묻기에는 앞선 두 번의 실축과 결승까지의 기여가 함께 남아 있다.

그는 1990·1994·1998년 세 차례 월드컵에서 모두 득점한 최초의 이탈리아 선수로 남았고, 월드컵 통산 9골을 기록했다. 아주리 전체 기록은 56경기 27골이다. 세 차례 월드컵에서 9골. 결승의 실축 장면을 지나 그의 대표팀 경력을 되짚으면, 자꾸 이 득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1993년 발롱도르를 든 바조. UEFA컵을 들어 올린 그해, FIFA 올해의 선수상도 함께 받았다.

“이탈리아만 바조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은 맞을까

“바조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탈리아뿐이다.” 지네딘 지단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원문 인터뷰와 발언 시점이 확인되지 않는 문장이다. 지단의 직접 발언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팬들이 왜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지는 알 만하다. 이렇게까지 잘했는데, 왜 가는 곳마다 자기 자리를 다시 설명해야 했을까 싶은 것이다.

실제 경력에 비춰 보면 이탈리아에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평에는 무리가 있다. 피오렌티나는 중상을 입은 18세의 계약을 지켰고, 유벤투스는 세계 최고액으로 그를 샀으며, 밀란과 인테르도 영입했다. 대표팀은 세 차례 월드컵에 데려갔고, 1993년에는 이탈리아 클럽에서 뛰며 세계 최고의 개인상을 받았다. 바조를 원했던 구단도,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팬들도 분명 이탈리아에 있었다.

문제는 영입 당시의 기대가 감독 교체 이후에도 이어지느냐였다. 유벤투스에서는 델 피에로가 성장했고, 밀란에서는 사비체비치·보반·웨아와 자리를 나눠야 했다. 인테르에서는 감독 교체와 부상이 겹쳤다. 사정은 팀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바조에게 돌아오는 일은 비슷했다. 새 감독 앞에서 어디서 어떻게 뛸지 다시 이야기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결정적인 경기에서 골을 넣었으니, 팬들로서는 거듭되는 입지 논란이 답답했을 법하다.

THE COST OF A FANTASISTA

다섯 팀이 바조의 자유를 계산한 방식

같은 ‘10번’도 주변의 과업과 구단의 시간표에 따라 전혀 다른 자리가 됐다.

유벤투스

정점 UEFA컵·발롱도르

변화 리피의 활동량과 델 피에로의 성장

결말 국내 더블 뒤 이적

밀란

정점 첫 시즌 세리에 A 우승

변화 챔피언 스쿼드의 다중 경쟁

결말 2시즌 뒤 볼로냐행

볼로냐

정점 리그 30경기 22골

배치 전방 파트너가 깊이와 몸싸움 담당

결말 월드컵 대표팀 복귀

인테르

정점 파르마전 두 골

변화 잦은 감독 교체와 선발 경쟁

결말 진출권을 만든 뒤 계약 종료

브레시아

정점 공식전 101경기 46골

배치 피를로를 내리고 바조를 전방에

결말 네 시즌 잔류 뒤 은퇴

역대 클럽·국대 기록

LR 비첸차 문장LR 비첸차1982-1985공식전 47경기 · 16골
ACF 피오렌티나 문장ACF 피오렌티나1985-1990공식전 136경기 · 55골
유벤투스 FC 문장유벤투스 FC1990-1995공식전 200경기 · 115골
AC 밀란 문장AC 밀란1995-1997공식전 67경기 · 19골
볼로냐 FC 1909 문장볼로냐 FC 19091997-1998공식전 33경기 · 23골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문장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1998-2000공식전 59경기 · 17골
브레시아 칼초 문장브레시아 칼초2000-2004공식전 101경기 · 46골
이탈리아 축구 연맹 문장이탈리아 대표팀1988-200456경기 · 27골

클럽 카드는 정규 리그뿐 아니라 국내 컵과 유럽 대항전을 포함한 성인 공식전 합계로, 통산 643경기 291골이다. 과거 시즌의 도움은 대회와 제공처마다 소급 집계 범위가 달라 클럽 통산 카드에서는 제외했다. 국가대표팀은 FIGC가 공개한 A매치 56경기 27골 기준이다.

역대 등번호

클럽

소속팀확인 시즌등번호
ACF 피오렌티나1985-1990년 경기 자료10
유벤투스 FC1990-1995년 경기 자료10 · 16
AC 밀란1995-96 · 1996-979 · 10 · 15 · 16 · 18
볼로냐 FC 19091997-9810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1998-200010
브레시아 칼초2000-200410

국가대표팀

대표팀확인 대회·기간등번호
이탈리아1990 FIFA 월드컵15
이탈리아1994 FIFA 월드컵10
이탈리아1998 FIFA 월드컵18
이탈리아그 밖의 확인 경기10 · 11 · 15 · 16 · 18

세리에 A가 시즌 고정 등번호를 의무화하기 전에는 같은 선수가 경기별로 다른 1-11번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피오렌티나·유벤투스의 10번은 대표 번호이고, 밀란에서의 여러 번호와 국가대표 친선 경기 번호는 확인 가능한 경기 기록을 함께 적었다.

대표 우승 경력

세리에 ASerie A

우승: 1994-95 · 유벤투스, 1995-96 · AC 밀란

준우승: 1991-92 · 1993-94 · 유벤투스

코파 이탈리아Coppa Italia

우승: 1994-95 · 유벤투스

준우승: 1991-92 · 유벤투스, 1999-00 · 인테르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Supercoppa Italiana

준우승: 1996 · AC 밀란

UEFA컵Coupe UEFA

우승: 1992-93 · 유벤투스

준우승: 1989-90 · ACF 피오렌티나, 1994-95 · 유벤투스

UEFA 인터토토컵UEFA Intertoto Cup

결승 진출: 2001 · 브레시아

3개 결승 중 파리 생제르맹과의 결승에서 원정 다득점으로 패배

FIFA 월드컵Coupe du Monde de la FIFA

준우승: 1994

3위: 1990

로베르토 바조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국가 수훈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훈장 · 기사장Cavaliere · 5등급 · 1991년

  • 발롱도르1990년 8위 · 1993년 수상 · 1994년 2위 · 1995년 23위 · 1998년 후보 · 2001년 25위
  • 발롱도르 시상식 유럽 올스타팀1994년
  • FIFA 올해의 선수1993년 수상 · 1994년 3위
  • 옹즈도르옹즈 몽디알 선정 유럽 올해의 선수1993년 1위 · 1994년 3위 · 1995년 2위
  • 옹즈 드 옹즈옹즈 몽디알 선정 유럽 베스트 111993년 · 1994년 · 1995년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영국 축구 전문지 선정1993년
  • 브라보상게린 스포르티보 선정 유럽 무대 최우수 유망주1990년
  • 게린도로게린 스포르티보 선정 세리에 A 최우수 선수2000-01 시즌
  • FIFA 월드컵 실버볼1994년
  • FIFA 월드컵 올스타팀1994년
  •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득점왕1990-91 시즌 · 9골
  • 세리에 A 도움 1위2003-04 시즌 · 11도움
  • AC 밀란 명예의 전당 헌액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2011년
  • 이탈리아 스포츠 명예의 거리 헌액2015년
  • 가에타노 스키레아상모범적인 선수 경력과 페어플레이를 기리는 상2001년
  • FIFA 월드컵 역대 드림팀FIFA 공식 사이트 팬 투표2002년
  • FIFA 100FIFA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펠레가 선정한 125인의 축구선수2004년
  • IFFHS 48인의 축구 전설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선정2016년
  • 골든풋2003년
  • 라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독자 투표이탈리아 역대 최고 선수2015년 · 1위

바조의 첫 터치를 다시 보게 된다

바조가 공을 잡는 순간에는 축구가 예술처럼 느껴진다. 수비수와 같은 장면을 보고도 혼자 다른 답을 아는 듯한 그 여유가 좋다. 특히 브레시아에서 피를로의 패스를 받는 장면은 끝을 알아도 다시 보게 된다. 공은 아직 내려오고 있고 골키퍼는 다가오는데, 바조의 다음 터치는 그 둘이 만날 자리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그 짧은 동작 안에 얼마나 많은 판단이 들어 있었을까 싶다.

여기에 유벤투스와 밀란, 볼로냐와 인테르를 거쳐 브레시아에 이른 경력까지 겹쳐 보면 감상은 한층 복잡해진다. 발롱도르 수상 이후에도 정착할 팀을 찾아야 했다는 사실은 아쉽다. 그럼에도 브레시아에서 피를로와 남긴 장면들 덕분에 말년의 경기를 거듭 찾게 된다. 필자는 바조를 이탈리아 역대 공격수의 첫 줄에 놓는다. 기록을 다 보고 나서도 결국 다시 재생하게 되는 건, 그 생각을 들게 했던 발끝이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