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 · 코파 아메리카

1919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스페인 독감이 지운 1918년, 150분 우승 결정전과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의 결승골로 브라질 축구의 첫 대륙 정상과 첫 슈퍼스타가 탄생한 1919년의 기록.
1919 코파 아메리카와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를 기록한 표지
코파 아메리카 트로피

제3회 남미축구선수권대회

Campeonato Sudamericano de Fútbol 1919

대회 기록

개최국
브라질 브라질 국기
대회 기간
1919년 5월 11일-29일
참가국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 브라질 브라질 국기 · 칠레 칠레 국기 · 우루과이 우루과이 국기
방식
단일 리그전 + 우승 결정전
경기장
이스타지우 다스 라랑제이라스, 히우지자네이루

최종 순위

순위 국가 리그 전적 득실
1 브라질 브라질 국기 통산 첫 번째 우승 2승 1무 11득점 3실점
2 우루과이 우루과이 국기 통산 첫 번째 준우승 2승 1무 7득점 4실점
3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1승 2패 7득점 7실점
4 칠레 칠레 국기 3패 1득점 12실점

브라질과 우루과이는 리그에서 승점뿐 아니라 골득실까지 같았다. 위 순위는 5월 29일 브라질이 별도 우승 결정전에서 우루과이를 1-0으로 꺾은 결과를 반영한다.

흰색 대표팀 셔츠를 입고 경기장을 달리는 브라질 선수들
흰 셔츠와 짙은 하의를 입었던 초기 브라질 대표팀의 모습. 사진의 정확한 경기와 선수 구성은 현존 자료만으로 특정하지 않는다.

개인 기록

최우수 선수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브라질 브라질 국기
공동 득점왕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4골 · 브라질 브라질 국기
공동 득점왕네쿠4골 · 브라질 브라질 국기
브라질 대표팀 셔츠를 입은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Arthur Friedenreich. 칠레전 해트트릭과 우루과이와의 우승 결정전 결승골로 1919년의 얼굴이 됐다.

여담

1918년 대회가 목록에 없는 이유

1917년 다음 기록은 1918년이 아니라 1919년이다. 대회 하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브라질에서 1918년에 열릴 예정이던 제3회 남미축구선수권대회가 스페인 독감 때문에 연기됐기 때문이다. 1918년 하반기 히우지자네이루를 덮친 유행병은 도시의 일상과 스포츠 일정을 함께 멈췄다. CONMEBOL의 대회 연표도 세 번째 대회를 별도의 ‘1918년 대회’로 세지 않고 Brasil 1919로 기록한다.[2]

연기는 개최 준비의 시간도 바꿨다. 브라질축구협회 기록에 따르면 그 사이 히우지자네이루의 이스타지우 다스 라랑제이라스(Estádio das Laranjeiras; 플루미넨시의 경기장) 공사가 마무리됐다.[1] 1919년 5월의 관중은 단순히 축구대회 하나의 개막을 본 것이 아니었다. 전염병으로 멈췄던 국제 스포츠가 새 경기장과 함께 돌아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따라서 1918년의 빈칸은 오기가 아니다. 1919년 대회의 출발점 자체가 그 빈칸이다.

세 경기로 끝나지 않은 단일 리그

브라질은 5월 11일 칠레를 6-0으로 꺾었다. 프리덴라이히가 세 골, 네쿠가 두 골, 아롤두가 한 골을 넣었다. 일주일 뒤 아르헨티나전에서는 에이토르, 아미우카르, 미용의 골로 3-1 승리를 거뒀다.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 역시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이겼다. 마지막 맞대결은 사실상 결승처럼 보였지만 5월 26일 경기는 2-2로 끝났다. 우루과이가 먼저 두 골을 넣자 네쿠가 두 골을 돌려놓았다.[1]

당시는 승점이 같을 때 곧바로 골득실로 우승국을 정하지 않았다. 브라질과 우루과이는 나란히 2승 1무가 됐고, 공식 기록상 골득실도 +8로 같았다. 그래서 사흘 뒤 같은 경기장에서 한 번 더 만났다. 리그의 마지막 경기가 우승국을 만들지 못하면서, 1919년 대회는 초창기 코파 아메리카에서 가장 기이한 결승을 갖게 됐다.

두 번의 연장, 150분의 우승 결정전

5월 29일 정규시간 90분은 0-0이었다. 첫 30분 연장도 득점 없이 끝났다. 승부차기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고, 두 팀 주장은 다시 30분을 더 치르기로 합의했다. 정규시간과 두 차례의 연장을 합쳐 150분. 브라질축구협회는 이 경기를 축구사에서 가장 길었던 경기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가장 긴 경기’로 소개한다.[1] CONMEBOL의 공식 대회사 역시 150분간 이어진 역사적인 결승으로 기록한다.[2]

두 번째 연장이 시작되고 5분 뒤 프리덴라이히가 공을 밀어 넣었다. CONMEBOL이 전하는 장면은 화려한 독주보다 집요한 마무리에 가깝다. 우루과이 골키퍼 카예타노 사포리티가 어렵게 쳐낸 공을 프리덴라이히가 다시 골문 안으로 보냈다.[3] 전염병 때문에 한 해 미뤄진 대회, 리그에서 가리지 못한 우승, 한 차례로도 모자랐던 연장. 브라질의 첫 남미 정상은 끝까지 한 단계씩 더 가야 완성됐다.

네쿠의 네 골과 프리덴라이히의 한 골

득점 숫자만 보면 1919년은 프리덴라이히 혼자 만든 대회가 아니다. 네쿠도 네 골을 넣었다. 칠레전 두 골과 우루과이와의 리그 경기 두 골은 브라질이 우승 결정전에 도달하게 한 직접적인 득점이었다. 프리덴라이히의 네 골은 칠레전 해트트릭과 우승 결정전 한 골이었다. 하나는 대회를 열었고, 다른 하나는 대회를 끝냈다.

이 차이가 1919년의 주인공을 설명한다. 네쿠는 브라질을 결승까지 살려냈고, 프리덴라이히는 누구도 끝내지 못하던 150분의 마지막 문장을 썼다. 공식 득점왕은 두 명이지만 대회사의 표제는 프리덴라이히를 ‘득점왕이자 주역’으로 남겼다.[2] 최우수 선수라는 후대의 정리는 단독 득점왕이라는 오해가 아니라, 같은 네 골 중 마지막 한 골이 차지한 역사적 무게에 가깝다.

브라질의 첫 번째 축구 스타

프리덴라이히는 독일계 상인의 아버지와 흑인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브라질 축구가 백인 상류층의 사교 공간에서 대중의 경기로 넓어지던 시기, 그의 경력은 경기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종차별의 장벽과 겹쳐 있었다. 브라질 축구박물관은 그를 ‘브라질 최초의 크라키(craque; 특출난 스타 선수)’로 소개하면서, 1921년 남미선수권에는 백인 선수만 데려가려는 결정 때문에 빠졌다고 기록한다.[4]

그렇다고 1919년 한 경기가 브라질 축구의 차별을 끝냈다는 식으로 읽을 수는 없다. 오히려 반대다. 대표팀의 중심이 된 뒤에도 배제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당시의 경계를 보여준다. 다만 1919년 라랑제이라스에서 그 경계가 감출 수 없는 이름 하나가 생겼다. ‘엘 티그레’ 프리덴라이히는 백인 엘리트의 경기로 출발한 브라질 축구가 누구의 열광을 먹고 국민적 문화가 될 것인지를 먼저 보여준 선수였다.

우승 트로피보다 먼저 도시를 돈 이름

우승 직후 사람들은 프리덴라이히의 진흙 묻은 축구화를 보석상 진열창에 전시했고, 브라질의 영웅을 기념했다는 일화가 남았다. 세부 표현은 자료마다 달라지지만 그 장면이 뜻하는 바는 선명하다. 국가대표팀의 우승이 처음으로 한 선수의 얼굴과 이름을 대중적 상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1958년의 펠레보다 수십 년 앞서 브라질 축구에는 이미 ‘한 나라가 기억하는 축구선수’가 있었다.

브라질은 1914년 코파 로카에서도 아르헨티나를 꺾었으므로, 1919년을 아무 조건 없이 ‘국가대표팀 최초의 국제 우승’이라고 부르면 대회의 범위가 흐려질 수 있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남미 네 나라가 모인 대륙선수권의 첫 우승, 자국에서 개최한 첫 대형 국제 스포츠 대회의 정상이라는 의미는 분명하다. 1919년은 브라질이 처음으로 코파 아메리카의 주인이 된 해였고, 프리덴라이히는 그 순간을 개인의 신화로 바꾼 최초의 슈퍼스타였다.

출처와 기록 기준

  1. «29 de maio de 1919: a primeira estrela da Seleção Brasileira», Confederação Brasileira de Futebol.
  2. «Historia de la CONMEBOL Copa América», CONMEBOL.
  3. «La CONMEBOL Copa América se juega con el corazón», CONMEBOL Copa América.
  4. «Arthur “O Tigre” Friedenreich, o primeiro craque brasileiro», Museu do Futebol.
  5. «1919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MVP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삥이의 축구 기록.

‘최우수 선수’ 표기는 대회 당시 별도의 공식 MVP 시상식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CONMEBOL의 후대 대회사가 프리덴라이히를 1919년의 득점왕이자 핵심 인물로 소개한 기준에 따라 이 기록의 표제 인물로 삼았다. 득점왕은 공식 기록에 따라 프리덴라이히와 네쿠의 공동 4골로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