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 LEGEND

존 구달(John Goodall)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프레스턴 무패 우승과 풋볼 리그 첫 득점왕

1888-89 시즌 프레스턴 노스 엔드의 무패 우승과 더블, 풋볼 리그 첫 득점왕 존 구달. 프레스턴 56경기 56골, 더비 카운티의 10년과 스티브 블루머, 아일랜드 대표가 된 동생 아치까지. 클럽·잉글랜드 대표 기록과 우승 경력을 정리한다.
흰 셔츠 가슴에 세 사자 문장을 달고 모자를 쓴 콧수염의 존 구달과 잉글랜드 국기, 56경기 56골 문구
잉글랜드 대표팀 셔츠를 입은 존 구달.
FIFA 로고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영국 국기
UNITED KINGDOM영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잉글랜드 국기
ENGLAND잉글랜드England
UEFA 로고

유럽축구연맹Union des Associations Européennes de Football창설 전

세 마리 사자와 장미가 그려진 잉글랜드 축구 협회 문장
#FA잉글랜드 축구 협회The Football Association
별 하나 아래 세 마리 사자가 그려진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
#ENG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England national football team | Three Lions (스리 라이언스; 세 마리 사자)
편집자 평가

풋볼 리그가 처음 열린 1888-89 시즌, 프레스턴 노스 엔드는 리그와 FA컵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다. 그 무패 팀의 최전방에서 리그 첫 득점왕에 오른 선수가 존 구달이다. 런던에서 태어나 스코틀랜드에서 공을 배웠고, 잉글랜드 대표로 14경기 12골을 넣었다. 더비 카운티에서는 골보다 동료를 만드는 쪽으로 무게를 옮겨 다음 세대의 골잡이를 길러 냈다. 필자에게 구달은 축구가 아직 규칙과 리그를 만들어 가던 시절, 공격수라는 자리의 첫 교본을 쓴 사람이다.

삥이FC 존 구달 평가

  1. 1888-89 시즌 리그 21경기 20골. 숫자만으로도 대단하지만 필자가 먼저 보는 쪽은 그 골이 나온 팀이다. 프레스턴은 리그 22경기를 18승 4무로 마쳤고 74골을 넣는 동안 15골만 내줬다. FA컵 다섯 경기에서는 한 골도 허용하지 않았다. 구달은 이 팀에서 공격을 짜는 일까지 맡았던 센터 포워드다. 득점왕 타이틀은 그 역할의 일부였을 뿐이다.

  2. 구달의 이름 앞에는 흔히 ’최고의 센터 포워드’가 붙는다. 그런데 잉글랜드 대표로 뛸 때는 오른쪽 인사이드 포워드(inside right; 2-3-5 대형에서 센터 포워드 오른쪽에 서는 공격수)로 나선 경기가 많았고, 센터와 왼쪽 인사이드까지 오갔다. 오늘의 말로 옮기면 최전방과 2선을 오가며 마무리와 연결을 함께 맡은 세컨드 스트라이커에 가깝다. 사망 직후 나온 부고 기사도 같은 점을 짚었다.

제 생각에, 그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센터 포워드라 할 만합니다. 국가대표 경기 여러 번을 인사이드 라이트로 뛰었지만, 지략가이자 섬세한 피니셔, 더없이 신사적인 선수로서의 자질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입니다.

He can be described, I think, as the finest centre forward in history, although he played in a number of his international matches as inside right, and his qualities as a schemer, a subtle finisher, and a scrupulously gentlemanly player are universally acknowledged.

- 「랭커셔 이브닝 포스트」가 존 구달의 부고에서
  1. 필자가 이 부고에서 가장 오래 붙드는 단어는 ’지략가(schemer)’다. 더비 카운티 시절 구달의 리그 득점은 1893-94 시즌 12골에서 이듬해 4골, 그다음 해 1골로 떨어진다. 그런데 바로 그 1895-96 시즌에 더비는 당시까지 구단 최고 성적인 리그 2위에 올랐다. 같은 시기 앞선에서 골을 몰아넣던 선수가 구달이 직접 이끌어 준 스티브 블루머였다. 득점이 줄어든 시즌을 쇠퇴로만 읽으면 이 그림이 맞지 않는다. 필자는 이 몇 해를 공격의 무게중심을 후배에게 넘긴 시간으로 본다.

  2. 구달은 동생 아치와 함께 서로 다른 나라의 대표로 뛴 최초의 형제로 꼽힌다. 같은 집에서 자란 형제가 태어난 곳에 따라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로 갈렸다. 국적과 출생지, 성장한 곳이 하나로 겹치지 않던 시대의 축구를 이 두 사람만큼 잘 보여 주는 사례도 드물다.

존 구달 프로필

잉글랜드 국기ENGLAND잉글랜드England
본명
John Goodall
등록명
존 구달(John Goodall)
출생
1863년 6월 19일
출생지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망
1942년 5월 20일 · 향년 78세
사망지
잉글랜드 왓퍼드
대표 국적
잉글랜드
포지션
센터 포워드 · 인사이드 라이트
선수 경력
1880-1913년
대표팀
1888-1898년 · 14경기 12골

런던에서 태어나 킬마녹에서 자란 형제

구달의 아버지 리처드는 스코틀랜드 연대의 군인이었다. 1863년 6월 19일, 부대가 런던에 머물던 때 웨스트민스터에서 첫아들 존이 태어났다. 이듬해 가족은 벨파스트로 옮겼고 1865년 그곳에서 동생 아치 구달(Archibald Lee Goodall; 훗날 아일랜드 대표로 뛴 하프백, 1865-1929)이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스코틀랜드 에어셔의 킬마녹(Kilmarnock)에 정착했다. 1871년 인구 조사에는 일곱 살 존과 여섯 살 아치가 킬마녹 글렌케언 광장의 한 집에 함께 적혀 있다.

학교를 마친 구달은 쇠를 깎는 선반공으로 일하며 공을 찼다. 훗날 그는 어린 시절 맨발로 고무공을 차며 놀았던 것이 공을 다루는 감각을 키웠다고 돌아봤다. 1880년 9월에는 킬마녹 애슬레틱(Kilmarnock Athletic) 1군에 데뷔했고, 1881-82 시즌 스코티시컵 1회전 에어전에서는 혼자 네 골을 넣었다. 1882년 2월에는 스코틀랜드 축구의 최강이던 퀸스 파크(Queen’s Park; 글래스고의 아마추어 명문)와 스코티시컵 준결승을 치러 2-3으로 졌다. 패배 속에서도 구달의 경기력은 좋은 평을 받았다.

이 시절 스코틀랜드는 공을 짧게 주고받으며 전진하는 패스 축구로 잉글랜드를 앞서 있었다. 공을 몰고 혼자 밀고 들어가는 드리블 축구가 주류이던 잉글랜드 구단들은 그 축구를 아는 스코틀랜드 선수를 데려오려 애썼다. 런던 태생이지만 킬마녹에서 공을 배운 구달은 그 흐름 한가운데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레이트 레버를 거쳐 프레스턴으로

1883년 12월, 킬마녹 애슬레틱은 랭커셔 원정을 떠났다. 22일 볼턴의 그레이트 레버(Great Lever; 볼턴 근교의 구단)를 3-1로 꺾었고, 24일에는 딥데일(Deepdale; 프레스턴 노스 엔드의 홈구장)에서 프레스턴에 1-4로 졌다. 이 경기가 구달이 킬마녹 유니폼을 입은 마지막 경기다. 그는 팀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지 않고 랭커셔에 남아 그레이트 레버에 들어갔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렇게 남쪽으로 내려온 스코틀랜드 선수들을 ’스카치 프로페서(Scotch Professors; 잉글랜드 구단에 영입된 스코틀랜드 출신 선수들)’라 불렀다.

그레이트 레버에서 구달은 금세 랭커셔 최고의 공격수라는 말을 들었다. 1884년 9월에는 더비 카운티를 상대로 네 골을 넣었고, 1885년 1월 월솔 스위프츠전에서도 네 골을 넣었다. 축구 협회가 프로 선수를 공식으로 인정한 것이 1885년 7월이다. 그때까지 랭커셔 구단들이 스코틀랜드 선수에게 주던 돈은 대부분 일자리나 수당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1885년 여름, 구달은 볼턴 원더러스와 계약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구단 사무실에 있었다. 그때 그레이트 레버 동료가 들어와 잠깐 밖에서 이야기하자고 불러냈다. 밖에는 프레스턴 노스 엔드(Preston North End Football Club) 사람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구달을 마차에 태워 가장 가까운 역으로 데려갔고, 블랙번을 거쳐 프레스턴까지 데려갔다. 뒤늦게 사정을 안 볼턴 쪽은 엉뚱한 역으로 쫓아갔다고 한다. 구달은 그렇게 1885-86 시즌 개막과 함께 프레스턴 선수가 됐고, 8월 22일 첫 경기 7-0 승리에서 바로 골을 넣었다.

1888-89 프레스턴, 무패 우승과 리그 첫 득점왕

프레스턴은 1887-88 시즌 FA컵 결승까지 올랐다. 그해 FA컵 1회전에서는 하이드를 26-0으로 이겼다. 1888년 3월 24일 케닝턴 오벌(Kennington Oval; 당시 FA컵 결승이 열리던 런던의 경기장)에서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에 1-2로 지며 준우승에 그쳤지만, 구달은 이 결승에 센터 포워드로 나섰다. 그보다 앞선 2월에는 웨일스전에서 잉글랜드 대표로 데뷔해 골도 넣었다.

같은 해 봄, 잉글랜드 중부와 북부의 열두 구단이 맨체스터에 모여 풋볼 리그(The Football League)를 만들었다. 컵 대회와 친선 경기만으로는 일정이 들쭉날쭉하니 정해진 상대와 정기적으로 맞붙는 리그를 꾸리자는 것이었다. 축구 협회와는 별개의 조직이었다. 1888년 9월 8일 개막일, 프레스턴은 딥데일에서 번리를 5-2로 이겼고 구달도 이 경기로 리그에 데뷔했다.

FA컵 트로피와 프레스턴 문장 그림 아래 흰 셔츠와 짙은 바지 차림으로 앉고 선 프레스턴 노스 엔드 선수들
1888-89 시즌 FA컵과 풋볼 리그를 함께 차지한 프레스턴 노스 엔드를 그린 기념 판화. 앞줄 가운데 앉은 선수가 존 구달이다.

구달은 리그 22경기 가운데 21경기에 나서 20골을 넣었다. 자료에 따라 21골로 세기도 한다. 10월 27일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전과 11월 3일 노츠 카운티 원정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두 골을 넣은 경기도 네 번이다. 9월 15일 울버햄프턴 원정 4-0 승리의 득점자 명단에는 존과 아치의 이름이 나란히 올라 있다. 그해 아치도 프레스턴 유니폼을 입고 리그 두 경기를 뛰었다.

구달의 짝은 스코틀랜드 출신 공격수 지미 로스(Jimmy Ross; 프레스턴의 스코틀랜드 출신 인사이드 포워드)였다. 둘이 넣은 리그 골이 팀 전체 74골의 절반을 넘는다. 프레스턴은 18승 4무, 승점 40점으로 리그를 마쳤다. FA컵에서는 부틀, 그림즈비 타운, 버밍엄 세인트 조지스,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을 차례로 무실점으로 꺾었고, 1889년 3월 30일 결승에서 울버햄프턴을 3-0으로 이겼다. 구달은 다섯 경기에 모두 나서 두 골을 보탰다. 첫 리그 시즌에 리그와 FA컵을 한 번도 지지 않고 함께 차지한 이 팀을 사람들은 ’인빈시블스(The Invincibles; 무적의 팀)’라 불렀다. 그 이름이 다시 잉글랜드 최상위 리그에 붙은 것은 2003-04 시즌 아스널이 프리미어 리그를 무패로 우승했을 때다.

프레스턴에서 구달이 남긴 공식전 기록은 56경기 56골이고, 그중 리그는 21경기 20골이다. 그는 이 팀의 공격을 조직하는 일을 맡아 다른 선수였다면 꺼내지 않았을 여러 수를 공격에 더했다고 전한다. 경기당 한 골이라는 숫자와 무패 팀의 공격 설계자라는 평가가 같은 사람에게 붙어 있다.

더비 카운티의 10년, 블루머를 키운 선배

명성이 정점에 있던 1889년, 구달은 더비 카운티(Derby County Football Club)로 옮겼다. 아치도 함께였다. 형은 앞선에서, 동생은 센터 하프로 같은 팀을 지켰다. 구달은 1890-91 시즌부터 세 시즌 연속 리그 13골, 15골, 13골을 넣으며 더비의 공격을 이끌었다.

1892-93 시즌, 열여덟 살의 스티브 블루머(Steve Bloomer; 더비 카운티와 잉글랜드의 공격수, 1874-1938)가 1군에 올라왔다. 구달은 이 신인의 스승 노릇을 했고, 블루머는 자신의 초창기 성장을 구달의 공으로 돌렸다. 블루머는 이후 더비와 잉글랜드에서 한 세대를 대표하는 골잡이가 된다. 둘이 앞선을 함께 쓰는 동안 더비는 리그 3위를 두 번, 1895-96 시즌에는 2위를 차지했고 FA컵에서도 준결승을 두 번 밟았다. 1898년에는 FA컵 결승에 올랐으나 노팅엄 포리스트에 1-3으로 졌다.

평가에서 말했듯 이 시기 구달의 리그 득점은 크게 줄었다. 그러나 팀 성적은 오히려 이때가 가장 좋았다. 서른을 넘긴 공격수가 결정을 후배에게 맡기고 자신은 공을 만들고 나르는 쪽으로 옮겨 간 흔적으로 읽힌다. 구달의 더비 마지막 경기는 1899년 4월 8일 리버풀 원정 0-4 패배였다. 지역 신문은 그가 알렉스 레이스벡(Alex Raisbeck; 당시 리버풀의 스코틀랜드 출신 하프백) 같은 빠른 선수들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적었다. 일주일 뒤 열린 FA컵 결승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다. 더비에서 10년 동안 리그 211경기 76골을 남겼다.

형은 잉글랜드, 동생은 아일랜드

구달 형제의 부모는 둘 다 스코틀랜드 사람이었고 형제는 킬마녹에서 자랐다. 그러나 당시 영국 네 협회의 대표 선수 자격은 태어난 곳을 따랐다. 런던에서 태어난 존은 잉글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난 아치는 아일랜드 대표가 됐다. 둘은 서로 다른 나라 대표로 뛴 최초의 형제로 꼽힌다.

구달은 1888년 2월 4일 크루에서 열린 웨일스전에서 잉글랜드 대표로 데뷔해 5-1 승리 속에 골을 넣었다. 다음 달 17일 글래스고 햄프던 파크(Hampden Park; 스코틀랜드 대표팀의 홈구장)에서는 스코틀랜드를 5-0으로 꺾는 경기의 네 번째 골을 넣었다. 자신이 공을 배운 나라를 상대로, 그 나라 한복판에서 넣은 골이다.

1898년까지 잉글랜드 대표로 14경기에 나서 12골을 넣었다. 상대는 스코틀랜드 일곱 번, 웨일스 여섯 번, 아일랜드 한 번이다. 당시 국가대표 경기는 영국 네 협회가 해마다 치르는 홈 인터내셔널이 전부였다. 그 안에서 센터 포워드와 좌우 인사이드 포워드를 모두 맡았다. 경기 수는 적어도 경기당 득점은 0.86골에 이른다.

왓퍼드의 첫 감독, 마흔넷의 마지막 경기

더비를 떠난 구달은 1899년 10월 뉴 브라이턴 타워(New Brighton Tower; 위럴 반도의 풋볼 리그 구단, 1896-1901)에서 여섯 경기를 뛰었고, 1901년 1월에는 2부 리그 글로솝(Glossop North End; 더비셔의 구단, 당시 풋볼 리그 2부)에 선수 겸 감독으로 들어갔다. 1903년에는 서던 리그(Southern League; 잉글랜드 남부의 리그) 소속 왓퍼드 FC(Watford Football Club)의 첫 선수 겸 감독이 됐다. 왓퍼드는 첫 시즌 서던 리그 2부를 한 번도 지지 않고 우승했다. 구달은 1904-05 시즌 42경기 18골로 팀 최다 득점자였다.

마지막 왓퍼드 경기는 1907년 9월 14일 브래드퍼드 파크 애비뉴전이다. 마흔네 살 87일로, 왓퍼드 역사상 최고령 출전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10년 왓퍼드를 떠난 뒤에는 프랑스의 RC 루베(Racing Club de Roubaix; 프랑스 북부의 구단)에서 코치를 맡았고, 1912년부터 웨일스의 마디 AFC(Mardy AFC; 웨일스 론다 계곡의 구단)를 이끌었다.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는 1913년 1월 18일 스완지 타운 원정이었다.

구달은 크리켓 선수이기도 했다. 1895년과 1896년 더비셔 카운티 크리켓 클럽(Derbyshire County Cricket Club) 소속으로 카운티 챔피언십 두 경기에 나섰다. 더비셔에서 크리켓을, 더비 카운티에서 축구를 한 선수는 손에 꼽히며 구달은 그중 한 사람이다. 왓퍼드 시절에는 하트퍼드셔에서도 다섯 경기를 뛰었다. 프레스턴에서는 컬링 챔피언이었고 골프와 볼링, 낚시까지 즐겼다고 1903년 「왓퍼드 옵저버」는 전한다.

말년의 구달은 왓퍼드의 웨스트 허츠 스포츠 클럽에서 그라운드 관리인으로 일했다. 1942년 5월 20일 왓퍼드에서 세상을 떠났고, 비커리지 로드 묘지의 표지 없는 무덤에 묻혔다. 76년이 지난 2018년 5월, 왓퍼드 FC가 구단 문장과 그의 업적을 새긴 묘비를 세웠다. 첫 리그 시즌의 득점왕이 자기 이름이 새겨진 묘비를 갖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역대 클럽·국대 기록

어린 양과 PP 글자가 그려진 1889년 판화 속 프레스턴 문장프레스턴 노스 엔드 FC1885-188956경기 · 56골
더비 카운티 FC 문장더비 카운티 FC1889-1899211경기 · 76골
글로솝 노스 엔드 AFC 문장글로솝 노스 엔드1901-190335경기 · 8골
왓퍼드 FC 문장왓퍼드 FC1903-190762경기 · 14골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잉글랜드 대표팀1888-189814경기 · 12골

프레스턴은 리그와 FA컵 등 1군 공식전 기준(리그 21경기 20골)이며, 기록에 따라 66경기 56골로 적기도 한다. 더비 카운티는 풋볼 리그, 글로솝은 풋볼 리그 2부, 왓퍼드는 서던 리그 기준이다. 대표팀은 성인 A매치 기준이다. 이 밖에 뉴 브라이턴 타워(1899-1900)에서 리그 6경기 2골을 남겼다. 풋볼 리그 출범 전에 뛴 킬마녹 애슬레틱(1880-1883)·그레이트 레버(1883-1885)와 코치·선수 겸 감독으로 있었던 RC 루베(1910-1911)·마디 AFC(1912-1913)는 정리된 공식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프레스턴 문장은 1889년 우승 기념 판화에 실린 것이다. 더비 카운티·글로솝·왓퍼드는 구달이 뛰던 때 구단 문장이 없어 현재 문장을 쓴다.

역대 등번호

클럽

소속팀확인 기간등번호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1885-86~1888-89 시즌등번호 도입 전
더비 카운티 FC1889-90~1898-99 시즌등번호 도입 전
뉴 브라이턴 타워 FC1899-1900 시즌등번호 도입 전
글로솝 노스 엔드 AFC1900-01~1902-03 시즌등번호 도입 전
왓퍼드 FC1903-04~1907-08 시즌등번호 도입 전

국가대표팀

대표팀확인 대회·기간등번호
잉글랜드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등 1888-1898년등번호 도입 전

구달이 뛴 1880년대부터 1910년대 초까지는 셔츠에 번호를 달지 않았다. 잉글랜드 축구에서 등번호는 1930년대에 들어 쓰이기 시작했고, 풋볼 리그가 모든 경기에 의무화한 것은 1939년이다. 그 전에는 경기 기록에 포지션 순서대로 이름을 적어 누가 어느 자리에 섰는지를 남겼다.

대표 우승·준우승 경력

풋볼 리그The Football League

우승: 1888-89

준우승: 1895-96

FA컵FA Cup

우승: 1888-89

준우승: 1887-88, 1897-98

서던 리그 2부Southern League Division Two

우승: 1903-04

존 구달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 풋볼 리그 득점왕1888-89 시즌 · 20골 (자료에 따라 21골)
  • 풋볼 리그 100인의 레전드1998년 · 풋볼 리그 100번째 시즌 기념 선정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