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 · 코파 아메리카

1927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 마누엘 세오아네

리마에서 처음 열린 남미선수권, 아르헨티나의 첫 원정 우승과 마누엘 세오아네의 두 번째 대회 대표 선수 선정, 암스테르담으로 이어진 1927년의 기록.
1927 코파 아메리카와 마누엘 세오아네를 기록한 표지
코파 아메리카 트로피

제11회 남미축구선수권대회

Campeonato Sudamericano de Football 1927

대회 기록

개최국
페루 페루 국기
대회 기간
1927년 10월 30일-11월 27일
참가국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 볼리비아 볼리비아 국기 · 페루 페루 국기 · 우루과이 우루과이 국기
방식
4개국 단일 리그전
개최 도시
리마

최종 순위

순위 국가 전적 득실
1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통산 세 번째 우승 3승 15득점 4실점
2 우루과이 우루과이 국기 통산 두 번째 준우승 2승 1패 15득점 3실점
3 페루 페루 국기 통산 첫 번째 3위 1승 2패 4득점 11실점
4 볼리비아 볼리비아 국기 통산 첫 번째 4위 3패 3득점 19실점

개인 기록

대회 대표 선수마누엘 세오아네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득점왕로베르토 피게로아4골 · 우루과이 우루과이 국기
대회 성적3전 전승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여담

리마가 남미선수권의 지도를 넓혔다

1927년 대회는 페루가 개최한 첫 남미선수권이었다. 개최지는 리마의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한 곳이었다. 페루도 이 대회에서 처음 본선 무대에 섰다. 1916년부터 대회를 주도한 리오데라플라타와 브라질·칠레의 바깥으로 개최 지도가 넓어진 순간이었다.[1]

페루는 개막전에서 우루과이에 0-4로 졌지만 볼리비아를 3-2로 꺾어 첫 출전 첫 승을 남겼다. 볼리비아도 1926년에 이어 참가했다. 두 나라의 합류로 남미선수권은 단순히 기존 강호끼리 돌려 치르는 대회에서 대륙 전체의 대회로 조금씩 형태를 바꿨다.

7-1, 3-2, 5-1

아르헨티나의 세 경기는 대회의 서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첫 경기 볼리비아전은 7-1이었다. AFA의 대회 회고는 세군도 루나와 ‘Seiabem’을 두 골씩, 마누엘 페레이라·움베르토 레카나티니·알프레도 카리카베리를 한 골씩 기록한다. ‘Seiabem’은 세오아네를 잘못 옮긴 표기로 읽히지만, 같은 협회의 다른 통계와도 득점자 집계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합계와 승패는 분명하되 개인 득점은 자료 충돌을 남겨둔다.[2]

두 번째 경기는 사실상의 결승이었다. 상대는 1924년 파리 올림픽과 1926년 남미선수권을 차례로 제패한 우루과이였다. 엑토르 스카로네가 전반 33분과 후반 79분에 두 골을 넣었지만, 아르헨티나는 레카나티니와 루나의 골로 따라붙었다. 88분 아데마르 카나베시의 자책골이 승부를 갈랐다. 26,000명이 지켜본 3-2였다.[3]

마지막 페루전은 5-1. 페레이라·라이문도 오르시·후안 호세 마글리오·세오아네·카리카베리가 차례로 득점했다. 세 경기 15골, 승점 6점, 전승. 1921년과 1925년의 우승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나왔다면 1927년은 아르헨티나가 국경 밖에서 차지한 첫 남미 정상이라는 차이가 있었다.[2]

1927년 리마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남미선수권 경기
1927년 11월 20일 리마,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를 3-2로 꺾은 경기. AFA 도서관에 전하는 대회 기록 사진이다.

득점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오아네

AFA는 1925년에 이어 1927년에도 세오아네를 대회 최고의 선수로 기록한다.[4] 한편 같은 협회의 대회별 득점 통계는 로베르토 피게로아를 4골 득점왕으로 적고, 아르헨티나 선수 중에서는 카리카베리와 루나의 3골을 별도로 꼽는다.[5] 볼리비아전 회고의 오기까지 겹쳐 세오아네의 정확한 경기별 합계는 자료마다 달라진다. 대표 선수 선정의 근거를 단순 득점 순위와 동일시하면 안 되는 이유다.

당시의 세오아네는 문전에서 마지막 발만 대는 공격수가 아니었다. 큰 체격으로 공을 지키고, 양옆의 카리카베리와 루나를 살리며, 안쪽으로 들어오는 페레이라와 공격의 간격을 묶었다. 볼리비아전의 대량 득점, 우루과이전의 역전, 페루전의 다섯 득점자가 서로 다른 사실은 한 명에게 마무리를 몰아주지 않은 구조를 말해준다. 불완전하게 남은 개인 득점표보다 공격 전체에 남은 그의 무게가 컸다.

아르헨티나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마누엘 세오아네
아르헨티나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마누엘 세오아네. 1923년 《엘 그라피코》 포스터에 실린 공공 영역 사진이다.

피게로아의 네 골과 숫자의 충돌

우루과이는 페루를 4-0, 볼리비아를 9-0으로 꺾었다. 피게로아는 페루전 한 골과 볼리비아전 세 골을 합쳐 4골을 기록했다. CONMEBOL과 AFA의 대회별 득점왕 표는 그를 단독 득점왕으로 적는다.[5]

다만 AFA의 다른 회고에는 카리카베리·루나·피게로아·스카로네·페트로네를 3골 공동 선두로 묶은 기록도 남아 있다. 100년 가까이 지난 경기의 통계는 한 기관 안에서도 충돌한다. 이 글은 대회 전체 통계표에서 반복 확인되는 피게로아 4골을 본 기록으로 삼되, 서로 다른 집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함께 남긴다.

암스테르담으로 이어진 예선

1927년 남미선수권은 대륙 최강을 가리는 동시에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아르헨티나는 우승으로 출전권을 얻었다. 이듬해 결승에서는 다시 우루과이를 만났고, 첫 경기 1-1 뒤 재경기에서 1-2로 져 은메달을 차지했다. 리마의 3-2는 끝이 아니라 두 나라가 세계 무대에서 다시 만나는 예고편이었다.

우루과이는 리마에서 준우승했지만 올림픽에서는 두 대회 연속 금메달을 완성했다. 1927년의 순위만 보면 아르헨티나의 완승이고, 1928년까지 연결하면 우루과이의 반격이다. 이 시기의 남미선수권을 단일 대회로만 읽기 어려운 이유다.

아르헨티나에 남은 실제 트로피

아르헨티나축구협회 도서관에는 1927년 우승 뒤 연맹에 수여된 트로피의 사진이 남아 있다. 오늘날 익숙한 코파 아메리카 본 트로피와는 별도로, 특정 대회의 우승을 기념해 전달된 물건이다. ‘세 번째 우승’이라는 추상적인 숫자가 실제 금속과 명판의 형태로 남은 기록이다.[6]

아르헨티나축구협회에 수여된 1927년 남미선수권 우승 트로피
1927년 우승 뒤 아르헨티나축구협회에 수여된 트로피. AFA의 1927년 연차 보고서에 실린 공공 영역 사진이다.

세오아네는 1925·1927·1929년 세 차례 남미 정상에 올랐다. 1925년에는 6골로 대회를 지배했고, 1927년에는 득점왕이 아니어도 공격의 중심으로 평가받았다. 같은 선수가 연속 두 대회의 표제 인물이지만, 두 우승의 방식은 같지 않았다.

출처와 기록 기준

  1. «Campeonato Sudamericano 1927», Wikimedia Commons의 대회 사료 목록.
  2. «Un campeón invicto e inolvidable», AFA.
  3. «Argentina 3-2 Uruguay», AUF.
  4. «El recuerdo de Manuel Seoane», AFA.
  5. «Toda la información de la Copa América», AFA; CONMEBOL 대회 기술 자료와 대조.
  6. «Trofeo Sudamericano 1927», AFA 도서관 《Memoria y Balance 1927》 수록 사진.

AFA는 세오아네를 1925·1927년 대회의 최고 선수로 회고한다. 이 명칭은 당시 오늘날과 같은 별도 MVP 트로피가 수여됐음을 뜻하지 않으므로 본문에서는 ‘대회 대표 선수’로 구분했다. 득점왕은 CONMEBOL·AFA의 대회별 통계에 따라 피게로아 4골을 기준으로 삼고, 다른 AFA 회고에 남은 3골 공동 선두 기록도 본문에 병기했다. 인명은 스페인어권 원음을 우선해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