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 · 코파 아메리카
1926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
우루과이의 4전 전승과 여섯 번째 우승,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의 중원 지배, 다비드 아레야노의 7골이 교차한 1926년의 기록.

제10회 남미축구선수권대회
Campeonato Sudamericano de Fútbol 1926대회 기록
- 개최국
- 칠레
- 대회 기간
- 1926년 10월 12일-11월 3일
- 참가국
- 아르헨티나
· 볼리비아
· 칠레
· 파라과이
· 우루과이
- 방식
- 5개국 단일 리그전
- 개최 도시
- 산티아고
최종 순위
| 순위 | 국가 | 전적 | 득실 |
|---|---|---|---|
| 1 | 우루과이 |
4승 | 17득점 2실점 |
| 2 | 아르헨티나 |
2승 1무 1패 | 14득점 3실점 |
| 3 | 칠레 |
2승 1무 1패 | 14득점 6실점 |
| 4 | 파라과이 |
1승 3패 | 8득점 20실점 |
| 5 | 볼리비아 |
4패 | 2득점 24실점 |
개인 기록
여담
볼리비아가 넓힌 열 번째 대회
1926년에는 볼리비아가 처음 참가했다. 남미축구연맹 창립국 네 나라에서 시작한 대회가 안데스 내륙까지 넓어진 순간이었다. 브라질은 불참했지만 다섯 나라가 모여 1922년과 함께 당시 최대 규모를 이뤘다. 볼리비아의 첫 성적은 4패, 2득점 24실점이었다. 출발은 가혹했으나 참가 자체가 대회의 지리적 경계를 바꿨다.
경기는 산티아고의 캄포스 데 스포츠 데 뉴뇨아에 집중됐다. 칠레가 1920년 비냐델마르에 이어 두 번째로 대회를 열었고, 이번에는 2승 1무 1패로 처음 3위에 올랐다. 개최국의 성적과 득점왕 배출이 동시에 이뤄진 첫 성공적인 홈 대회였다.
세계 챔피언의 골 폭풍
우루과이는 칠레를 3-1, 아르헨티나를 2-0, 볼리비아를 6-0, 파라과이를 6-1로 꺾었다. 네 경기 17골 중 엑토르 카스트로와 엑토르 스카로네가 각각 6골을 맡았다. 마지막 파라과이전에서는 카스트로가 네 골, 소일로 살돔비데가 두 골을 넣었다.[1]
화려한 공격 기록 옆에는 대회 2실점이라는 수비 기록도 놓여 있다. 안드라데가 하프백으로 공을 회수하고 전진을 시작했으며, 나사시가 뒤를 지켰다. 1924년 파리 올림픽 금메달의 골격에 카스트로와 로렌소 페르난데스가 더해졌다. 우루과이는 남미 챔피언인 동시에 당대가 인정한 세계 챔피언의 경기력을 한 대회 안에서 증명했다.[2]
안드라데가 만든 중원의 기준
안드라데는 오늘날의 한 포지션으로 가두기 어려운 선수다. 당시의 하프백은 수비와 공격의 접점을 맡았고, 그는 태클·운반·패스·템포 조절을 한 몸에 결합했다. 1924년 파리 관중과 언론은 그의 유연한 움직임과 기술에 주목했고 ‘검은 경이’라는 수식이 유럽까지 퍼졌다. 1926년은 그 명성이 일회성 이국적 관심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경기력이었음을 보여준 대회였다.
후대의 ‘최우수 선수’ 평가는 공식 트로피 하나로 증명되는 기록이 아니다. 하지만 4전 전승의 중심을 득점왕 두 명만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 안드라데의 이름이 남는다. 나사시가 최후방의 질서를, 스카로네와 카스트로가 골을 맡았다면 안드라데는 그 세 구역을 연결했다.
개최국의 일곱 골, 다비드 아레야노
득점왕은 우승팀이 아니라 칠레에서 나왔다. 다비드 아레야노(David Alfonso Arellano Moraga; 칠레 공격수, 1902~1927)는 볼리비아전 네 골, 파라과이전 두 골, 아르헨티나전 한 골로 7골을 넣었다. 우루과이전에는 득점하지 못했지만 나머지 세 상대에게 모두 골을 넣었다. 칠레가 기록한 14골의 절반이었다.[3]
그는 단순한 대표팀 공격수가 아니었다. 기존 구단의 운영 방식에 반발한 젊은 선수들과 1925년 콜로콜로를 창립했고, 선수이자 지도자로 팀의 축구를 설계했다. 오늘날 콜로콜로의 홈구장 이름이 에스타디오 모누멘탈 다비드 아레야노인 이유다. 1926년 득점왕은 한 시즌의 개인상이 아니라 칠레 최대 구단의 기원과 연결된 기록이다.
25세에 멈춘 유럽 원정
아레야노는 1927년 콜로콜로의 유럽 원정 중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열린 경기에서 복부를 다쳤고, 며칠 뒤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스물다섯이었다. 콜로콜로 유니폼 문장 위의 검은 띠는 그의 죽음을 기리는 표식으로 남았다.[4]
1926년의 7골은 그래서 선수의 전성기를 예고한 기록이 아니라 완성된 마지막 대표팀 대회가 됐다. 우루과이의 세계적 세대가 정점으로 향하던 같은 경기장에서 칠레 축구의 설계자는 자신의 가장 큰 국제대회 기록을 남겼다.
노래가 된 여섯 번째 우승
우루과이의 4전 전승은 뉴뇨아의 디아나스(Dianas de Ñuñoa; ‘뉴뇨아의 승전가’)라는 노래로 이어졌다. “아메리카와 세계의 챔피언 우루과이인들”이라는 첫 구절은 1924년 올림픽 금메달과 1926년 남미 우승을 하나의 국가적 기억으로 묶었다.[2]
이 대회는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과 1930년 초대 월드컵으로 이어지는 중간 지점이었다. 나사시·안드라데·스카로네의 세대는 이미 완성돼 있었고, 카스트로와 페르난데스가 새로운 힘을 보탰다. 1926년은 우루과이 왕조의 반복이 아니라 다음 세계 정상으로 넘어가는 재편이었다.
출처와 기록 기준
- «Uruguay campeón de América 1926», AUF.
- «Rumbo al centenario», AUF·AHIFU.
- «Toda la información de la Copa América 2021», AFA.
- «La fundación del club: 1920-1930», Club Social y Deportivo Colo-Colo.
- «1926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MVP '다비드 아레야노',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 삥이의 축구 기록.
‘대회 대표 선수’는 당시 공식 MVP 트로피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 기록에서는 우승팀 중원의 중심 안드라데를 표제 인물로 삼고, 공식 득점왕은 아레야노의 7골로 구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