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 · 코파 아메리카
1925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 마누엘 세오아네
세 나라만 남은 이중 리그에서 6골을 넣은 마누엘 세오아네와 아르헨티나의 두 번째 남미 정상, 그리고 결손 대회의 명암을 기록한다.

제9회 남미축구선수권대회
Campeonato Sudamericano de Fútbol 1925대회 기록
- 개최국
- 아르헨티나
- 대회 기간
- 1925년 11월 29일-12월 25일
- 참가국
- 아르헨티나
· 브라질
· 파라과이
- 방식
- 3개국 2회전 리그
- 개최 도시
- 부에노스아이레스
최종 순위
| 순위 | 국가 | 전적 | 득실 |
|---|---|---|---|
| 1 | 아르헨티나 |
3승 1무 | 11득점 4실점 |
| 2 | 브라질 |
2승 1무 1패 | 11득점 9실점 |
| 3 | 파라과이 |
4패 | 4득점 13실점 |
참가국이 세 나라뿐이어서 각 팀이 같은 상대와 두 번씩 맞붙었다. 불참한 우루과이와 칠레는 최종 순위에 포함하지 않는다.
개인 기록
여담
세 나라만 남아 두 번씩 만났다
1925년 대회에는 우루과이와 칠레가 오지 않았다. 직전 두 대회를 연속 우승한 우루과이의 부재는 특히 컸다. 참가국이 아르헨티나·브라질·파라과이 셋으로 줄자 단일 리그 한 바퀴만으로는 경기 수가 너무 적었다. 그래서 각 상대와 두 번씩 만나는 방식이 채택됐다. 여섯 경기 전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 주니어스 경기장과 스포르티보 바라카스 경기장에서 열렸다.[1]
결손은 우승의 사실을 지우지 않지만 평가의 조건은 된다. 아르헨티나 언론 일부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 우루과이가 없는 우승의 가치를 낮게 봤다. 반대로 남은 팀들이 치른 경기를 모두 ‘쉬운 대회’로 줄이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브라질은 네 경기에서 11골을 넣었고 마지막 날 아르헨티나를 2-0에서 따라잡았다. 참가 규모와 경기 강도는 별개의 문제였다.
네 경기 모두 골을 넣은 세오아네
아르헨티나는 11월 29일 파라과이를 2-0으로 꺾었다. 세오아네는 수비수 둘을 제치고 공과 함께 골문 안까지 들어가는 장면으로 첫 골을 만들었다. 12월 13일 브라질전에서는 세 골을 몰아쳐 4-1 승리를 이끌었다. 아르헨티나축구협회가 훗날 브라질전 해트트릭의 계보를 정리할 때도 세오아네의 1925년 경기를 별도로 꼽는다.[2]
두 번째 파라과이전에서도 한 골, 브라질과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한 골을 보탰다. 네 경기 6골, 모든 경기 득점. 득점왕이라는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특정 약체전 한 번에 숫자를 몰아넣은 것이 아니라 두 상대와의 네 경기에 빠짐없이 개입했다는 점이다.
크리스마스의 2-2와 무패 우승
아르헨티나는 파라과이를 두 번, 브라질을 한 번 꺾어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이미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12월 25일 브라질전에서는 전반 2-0으로 뒤졌다. 세오아네가 추격골을 넣고 후안 비안치가 동점골을 보태 2-2. 18,000명의 관중 앞에서 아르헨티나는 패배 없이 두 번째 우승을 확정했다.[1]
첫 우승이었던 1921년에는 세 경기 무실점이 핵심이었다. 두 번째 우승은 반대였다. 네 경기에서 네 골을 내줬지만 11골을 넣었다. 같은 테소리에레가 골문을 지켰어도 대표팀의 우승 방식은 수비에서 공격으로 이동했다.
테소리에레의 마지막 대표팀 대회
1921년 무실점 우승의 상징이었던 아메리코 테소리에레는 1925년 우승 뒤 대표팀 경력을 마쳤다. 네 경기 네 실점은 나쁜 수치만은 아니지만, 당시 평가는 냉정했다. 영웅의 지위가 영구 보증되지 않던 시대였고, 골키퍼 한 명에게 실점의 책임이 집중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축구협회의 후대 자료에는 그가 1925년 대표팀을 지휘한 감독으로도 적혀 있다.[3] 선수와 선발위원, 주장과 지도자의 경계가 오늘처럼 고정되지 않았던 아마추어 시대의 흔적이다. 1925년은 세오아네가 대표팀 공격의 얼굴이 된 동시에 테소리에레의 시대가 끝난 대회였다.
‘엘 네그로’ 세오아네가 남긴 세 번의 우승
세오아네는 큰 체격에도 공을 세밀하게 다뤘고, 득점과 연계를 함께 맡았다. 아르헨티나축구협회는 그를 1920년대 자국 축구를 대표한 공격수로 소개하며 1925년과 1927년 대회의 최고 선수로 평가한다.[4] 그는 1925·1927·1929년 남미선수권 우승을 모두 경험했고, 훗날 1937년에는 감독으로 다시 정상에 올랐다.
그러므로 1925년을 단지 ‘우루과이가 빠진 대회’라고만 적으면 주인공의 이후 궤적이 사라진다. 세오아네의 6골은 작은 대회에서 나온 큰 숫자였으며, 아르헨티나가 1920년대 후반 남미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출발점이었다.
출처와 기록 기준
- «Un título muy festejado», AFA.
- «Claudio Echeverri, el pibe que entró en la historia», AFA.
- «Entrenadores campeones de la Copa América con la Celeste y Blanca», AFA.
- «El recuerdo de Manuel Seoane», AFA.
- «1925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MVP '마누엘 세오아네'», 삥이의 축구 기록.
‘대회 대표 선수’는 당시 별도의 공식 MVP 트로피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AFA의 후대 회고와 이 기록의 선정 기준에 따라 세오아네를 표제 인물로 삼았다. 득점왕 6골은 CONMEBOL·AFA 통계에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