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 · 코파 아메리카
1942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 옵둘리오 바렐라
우루과이가 센테나리오에서 6전 전승으로 여덟 번째 남미 정상에 올랐다. 마라카낭보다 여덟 해 먼저 중원을 장악한 옵둘리오 바렐라의 첫 대륙 우승을 기록한다.

제17회 남미축구선수권대회
Campeonato Sudamericano de Football 1942대회 기록
- 개최국
- 우루과이
- 대회 기간
- 1942년 1월 10일-2월 7일
- 참가국
- 우루과이
· 아르헨티나
· 브라질
· 파라과이
· 페루
· 칠레
· 에콰도르
- 방식
- 7개국 단일 리그전
- 개최 도시
- 몬테비데오
- 전 경기 개최지
-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최종 순위
| 순위 | 국가 | 전적 | 득실 |
|---|---|---|---|
| 1 | 우루과이 |
6승 | 21득점 2실점 |
| 2 | 아르헨티나 |
5승 1패 | 21득점 6실점 |
| 3 | 브라질 |
3승 1무 2패 | 15득점 7실점 |
| 4 | 파라과이 |
2승 2무 2패 | 11득점 10실점 |
| 5 | 페루 |
1승 2무 3패 | 5득점 10실점 |
| 6 | 칠레 |
1승 1무 4패 | 4득점 15실점 |
| 7 | 에콰도르 |
6패 | 4득점 31실점 |
개인 기록
여담
월드컵 경기장에 남미 전체를 밀어 넣다
1942년 대회에는 남미선수권 사상 처음으로 일곱 나라가 모였다. 모든 경기는 센테나리오 한 곳에서 열렸다. 오늘의 기준으로는 이동 부담이 없는 개최국의 이점부터 떠올리기 쉽지만, 우루과이 사람들에게 이 콘크리트 경기장은 단순한 홈구장이 아니었다. 1930년 첫 월드컵을 위해 세웠고, 그곳에서 아르헨티나를 꺾어 세계 챔피언이 된 국가적 기념물이었다. 열두 해 뒤 같은 상대와 다시 마지막 날 우승을 다투게 되면서 대회는 자연스럽게 1930년의 기억을 불러냈다.[1]
처음 두 경기는 축제에 가까웠다. 칠레에 6-1, 에콰도르에 7-0. 그러나 세 번째 상대 브라질은 도밍구스 다 기아가 수비를 지휘하고 피릴루와 치임이 공격하는 팀이었다. 약 6만 명이 들어찬 센테나리오에서 우루과이는 전반 33분 단 한 번의 연쇄로 차이를 만들었다. 옵둘리오의 패스를 받은 로베르토 포르타가 왼쪽으로 움직이며 아폰시뉴를 끌어냈고, 브라질 수비가 그쪽을 닫는 순간 반대편을 달리던 세베리노 바렐라에게 공이 건너갔다. 골키퍼 카주가 뛰쳐나왔지만 세베리노의 짧은 슈팅이 먼저였다. 당시 신문 《El Bien Público》의 경기 묘사가 패스의 출발점을 굳이 옵둘리오부터 적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2]
팀의 경첩이 된 센터하프
1942년의 센터하프를 현대식 수비형 미드필더라고만 부르면 절반이 사라진다. 2-3-5의 가운데에서 상대 센터포워드와 직접 부딪치면서, 공을 되찾으면 좌우 하프나 다섯 명의 공격수에게 첫 패스를 보내는 자리였다. 수비수와 미드필더의 경계라기보다 팀 전체가 앞뒤로 접히는 경첩에 가까웠다. 옵둘리오는 여섯 경기 모두 그 중앙에 섰다.
그는 칠레전에서 직접 한 골을 넣었지만, 우루과이는 한 선수에게 득점을 몰아주지 않았다. 세베리노 바렐라와 로베르토 포르타, 루이스 에르네스토 카스트로, 아니발 치오카, 비비아노 사피라인이 서로 다른 경기에서 해결했다. 공격수 다섯 명이 번갈아 안쪽으로 들어와도 팀의 가운데가 비지 않았던 것은 옵둘리오와 슈베르트 감베타가 뒤의 질서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21득점만 보면 전방의 화력이고, 2실점까지 함께 보면 그 화력을 되돌려 세운 중앙의 경기다.
1930년 결승의 두 득점자가 감독석에서 다시 만나다
아르헨티나는 에콰도르를 12-0으로 무너뜨렸다. 모레노가 다섯 골, 에르미니오 마산토니오가 네 골을 넣었고 두 선수는 결국 일곱 골씩 공동 득점왕이 됐다. 마지막 날을 앞두고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나란히 5전 전승이었다. 우루과이는 다섯 경기에서 한 골만 내줬고, 아르헨티나는 한 경기에서 그 열두 배를 넣었다. 결승전이 따로 없는 단일 리그였지만 일정이 만들어낸 결승이었다.
감독석에도 역사가 겹쳤다. 우루과이의 페드로 세아(José Pedro Cea; 우루과이 공격수·감독, 1900-1970)와 아르헨티나의 기예르모 스타빌레는 1930년 월드컵 결승에서 서로 골을 넣었던 선수들이었다. 스타빌레가 아르헨티나를 2-1로 앞서게 했고, 세아가 동점을 만든 뒤 우루과이가 4-2로 뒤집었다. 1942년 2월 7일 두 사람은 유니폼 대신 감독의 자리에서 다시 센테나리오를 마주봤다. 남미 축구에서 선수 세대와 지도자 세대가 얼마나 촘촘히 포개졌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7]
약 7만 명 앞에서 전반은 득점 없이 흘렀다. 공식 경기 기록상 57분, 치오카의 패스를 받은 비비아노 사피라인이 왼쪽에서 대각선으로 안쪽을 파고들어 강한 슈팅을 날렸다. 세바스티안 구알코가 막지 못한 그 한 골이 우승을 갈랐다. 열두 골을 넣었던 아르헨티나는 마지막 90분에는 한 골도 만들지 못했고, 우루과이는 대회 세 번째 1-0 승리로 6전 전승을 완성했다.[3][8]
마라카낭의 전설이 생기기 전에도 그는 중앙에 있었다
옵둘리오를 말하면 이야기는 대개 1950년 7월 16일로 곧장 건너간다. 마라카낭을 가득 채운 브라질 관중 앞에서 주장으로 우루과이를 세계 정상에 올린 사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2년의 그는 이미 완성된 전설의 예고편이 아니라, 자기 시대의 가장 큰 대륙대회에서 팀의 구조를 책임진 스물네 살 주전이었다. 더구나 당시 소속팀은 훗날 그를 상징하게 되는 페냐롤이 아니라 몬테비데오 원더러스였다.[4]
1950년의 옵둘리오가 경기 중단과 주장 완장, 상대 관중의 압력을 다루는 인물로 기억된다면 1942년의 옵둘리오는 공이 움직이는 방향을 다루는 선수로 보인다. 브라질전 결승골의 첫 패스를 내보내고, 아르헨티나의 모레노와 마산토니오가 들어오는 중앙을 닫았다. 후대의 대표 선수 목록이 공동 득점왕 두 명 대신 그의 이름을 고른 까닭은 통계 바깥의 신비에 있지 않다. 우루과이의 21득점과 2실점이 같은 전술적 중심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데 있다.
출처와 기록 기준
- «Copa América 1942», AUF.
- «Copa América 1942», AUF·남미선수권 역사 아카이브.
- «Aniversario Copa América 1942», AUF.
- «Obdulio Varela», AUF.
- «Southamerican Championship 1942», RSSSF.
- «Obdulio Varela.JPG», 《El Gráfico》 1943년 사진, Wikimedia Commons, 공공영역.
- «Uruguay 4-2 Argentina», FIFA.
- «Uruguay 1-0 Argentina», AUF.
옵둘리오 바렐라는 RSSSF의 후대 대회별 대표 선수 목록을 따르되 당시 공식 MVP 트로피 수상자로 서술하지 않았다. 전 경기 출전, 브라질전 공격 전개와 우승 결정전의 역할은 AUF 경기 기록으로 대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