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 · 코파 아메리카
1945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 도밍구스 다 기아
아르헨티나가 무패로 우승하고 89골이 쏟아진 산티아고에서 대회의 대표 선수는 브라질 수비수였다. 도밍구스 다 기아와 1945년 남미선수권의 공격과 수비를 기록한다.

제18회 남미축구선수권대회
Campeonato Sudamericano de Football 1945대회 기록
- 개최국
- 칠레
- 대회 기간
- 1945년 1월 14일-2월 28일
- 참가국
- 아르헨티나
· 브라질
· 칠레
· 우루과이
· 콜롬비아
· 볼리비아
· 에콰도르
- 방식
- 7개국 단일 리그전
- 개최 도시
- 산티아고
최종 순위
| 순위 | 국가 | 전적 | 득실 |
|---|---|---|---|
| 1 | 아르헨티나 |
5승 1무 | 22득점 5실점 |
| 2 | 브라질 |
5승 1패 | 19득점 5실점 |
| 3 | 칠레 |
4승 1무 1패 | 15득점 5실점 |
| 4 | 우루과이 |
3승 3패 | 14득점 6실점 |
| 5 | 콜롬비아 |
1승 1무 4패 | 7득점 25실점 |
| 6 | 볼리비아 |
2무 4패 | 3득점 16실점 |
| 7 | 에콰도르 |
1무 5패 | 9득점 27실점 |
개인 기록
여담
세계축구가 멈춘 동안에도 산티아고에는 공이 굴렀다
1945년 1월, 유럽에서는 아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지 않았다. 월드컵은 1938년 프랑스 대회 이후 달력에서 사라졌고 다음 대회의 개최국조차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남미선수권은 산티아고로 돌아왔다. 콜롬비아가 처음 참가해 일곱 나라가 모였고, 대회는 45일 동안 이어졌다. 당시의 코파 아메리카 트로피를 직접 걸지 않은 ‘특별 대회’였지만, 그 구분은 조직 형식의 문제였다. CONMEBOL과 각 협회는 지금도 아르헨티나의 일곱 번째 우승으로 계산한다.[1]
그라운드에서는 전시의 위축을 찾기 어려웠다. 개최국 칠레가 에콰도르와 6-3으로 문을 열었고, 아르헨티나는 첫 출전한 콜롬비아를 9-1로, 브라질은 에콰도르를 9-2로 꺾었다. 스무 경기 89골, 한 경기 평균 4.45골이었다. 노르베르토 ‘투초’ 멘데스와 엘레누 지 프레이타스가 여섯 골씩 넣고, 아데미르가 다섯 골, 리날도 마르티노와 레네 폰토니가 네 골씩 보탰다. 이렇게 많은 공격수가 골을 나눠 가진 대회의 대표 선수로 수비수 도밍구스 다 기아가 회고된다는 사실부터가 1945년의 흥미로운 역설이다.
몬테비데오와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먼저 알아본 브라질 수비수
도밍구스의 축구는 브라질 국내에서만 완성되지 않았다. 그는 1933년 우루과이 나시오날로 건너가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디비노 메스트레’, 신성한 거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우루과이 신문은 그를 “수비의 정제된 완벽함”이라고 평했다. 1935년에는 보카 주니어스가 그를 데려갔다. 아르헨티나 《El Mundo》는 데뷔 직후 그가 힘을 들이지 않는 듯한 침착함으로 공격을 끊고, 더 좋은 위치의 동료에게 공을 내준다고 썼다. 보카도 그해 리그 챔피언이 됐다.[2]
1945년 산티아고에서 그가 상대해야 했던 축구는 이미 낯설지 않았다. 우루과이식 정면 승부는 나시오날에서, 아르헨티나 공격수의 위치 교환은 보카에서 몸으로 배웠다. 플라멩구에서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구단 최초의 주립리그 3연패를 완성한 뒤 코린치앙스로 옮긴 참이었다. 흑인 선수가 리우의 부유한 지역을 대표하는 대형 클럽에서 중심이 되는 일조차 당연하지 않았던 시대에, 그는 먼저 두 이웃 나라의 명문에서 우승하고 돌아와 브라질 수비의 기준이 됐다.
‘도밍가다’에는 찬사와 조롱이 함께 들어 있다
당시 좋은 풀백의 첫 덕목은 공을 위험 지역 밖으로 멀리 걷어내는 것이었다. 도밍구스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공을 가슴으로 받아 발밑에 내려놓고, 자기 페널티 지역에서도 달려드는 공격수를 드리블한 뒤 정확한 패스로 공격을 시작했다. 1931년 우루과이전에서는 파블로 도라도가 압박하자 공을 차내지 않고 드리블로 벗겨냈다. 수비수가 공을 소유하면 관중이 불안해하던 시대에 그는 침착함 자체를 수비 기술로 만들었다.[2]
브라질 언론이 처음 ‘도밍가다’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런 장면이었다. 공을 빼앗은 수비수가 자기 진영에서 성급히 걷어내지 않고, 공격수를 한 명쯤 더 끌어들인 다음 드리블과 패스로 압박을 풀어내는 행위였다. 이름 뒤에 붙은 포르투갈어 접미사 ‘-ada’까지 고려하면, 본래 의미는 ‘도밍구스다운 한 수’에 가까웠다. 위험한 위치에서만 가능했기에 대담했고, 그 위험을 기술로 통제했기에 찬사였다.[9]
그 뜻이 뒤집힌 경기가 1938년 6월 16일 마르세유에서 열린 월드컵 준결승이었다. 브라질이 이탈리아에 0-1로 뒤지던 후반, 공과 직접 관계없는 페널티 지역 안에서 실비오 피올라와 도밍구스가 충돌했다. 도밍구스의 설명에 따르면 피올라가 먼저 걷어찼고 자신은 경기가 멈춘 줄 알고 보복했다. 심판은 그 보복 동작을 반칙으로 판정했다. 영상이 남지 않아 도발과 경기 중단 여부는 확정할 수 없지만, 페널티킥이 선언됐고 주세페 메아차가 이탈리아의 두 번째 골을 넣었다. 브라질은 레오니다스 없이 치른 준결승에서 1-2로 탈락했다.[2][9]
그 뒤 ‘도밍가다’에는 정반대의 두 뜻이 겹쳤다. 하나는 수비수가 압박을 우아하게 벗어나는 최고 수준의 기술이고, 다른 하나는 하지 않아도 될 행동으로 경기를 망치는 치명적인 실수다. 오늘날 후자의 뜻만 남겨 ‘수비수의 뻘짓’ 정도로 번역하면, 원래 그 말이 왜 당대 최고의 수비수에게서 태어났는지가 사라진다. 도밍구스는 실수가 많아서 자기 이름을 남긴 선수가 아니라, 보통 수비수에게는 무모한 선택을 반복해서 성공시켰기에 단 한 번의 실패가 더욱 거대한 언어로 남은 선수였다.
다섯 번 이기고도 한 번의 전반전에 우승을 내주다
브라질은 콜롬비아·볼리비아·우루과이·에콰도르·칠레를 모두 꺾었다.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도 3-0으로 눌렀다. 엘레누와 지지뉴, 자이르, 아데미르, 테소리냐가 앞에서 상대를 몰아붙이고 도밍구스가 뒤에서 다음 공격을 시작했다. 다섯 승만 떼어놓고 보면 우승팀의 전형적인 행보다.[3]
그러나 2월 15일의 전반 40분이 대회 전체를 바꿨다. 아르헨티나의 멘데스가 14분과 20분에 연속골을 넣었고, 아데미르가 33분 한 골을 돌려놓자 멘데스가 40분 해트트릭을 완성했다. 브라질이 대회에서 진 경기는 이것 하나뿐이었다. 단일 리그라 결승전이라는 이름은 없었지만, 두 우승 후보의 직접 대결에서 생긴 승점 차는 끝까지 복구되지 않았다.[4]
아르헨티나는 칠레와 1-1로 비긴 뒤 우루과이를 마르티노의 한 골로 꺾어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1946년, 1947년에도 우승해 대회 역사상 유일한 3연패를 완성했다. 스타빌레가 지휘하고 멘데스·마르티노·폰토니가 전방을 나눠 맡은 1945년은 전후 아르헨티나 대표팀 왕조의 첫 장이었다.[5]
도밍구스를 당시 공식 MVP 트로피의 수상자라고 적을 수는 없다. 후대의 대표 선수 목록이 보존한 선택이다. 그럼에도 89골이 나온 대회에서 우승팀 공격수도 공동 득점왕도 아닌 준우승팀 수비수가 남았다는 사실은 설명할 가치가 있다. 그는 모든 경기를 이긴 선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남미 세 나라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검증했고, 단 한 번의 패배 뒤에도 수비수가 공을 다루는 방식의 기준으로 지워지지 않은 선수였다.
출처와 기록 기준
- «Southamerican Championship 1945», RSSSF.
- «Domingos da Guia», Museu do Futebol.
- «Seleção Brasileira 1939-1946», RSSSF.
- «Invictos y campeones», AFA.
- «Copa América: las quince conquistas argentinas», AFA.
- «The Copa América Archive - Best Players», RSSSF.
- «Domingos da Guia, Estadio, 1945-01-12 (87).jpg», 《Estadio》 1945년 사진, Wikimedia Commons.
- «Domingos da Guia», Ludopédio.
- «Um personagem carioca na Copa de 1938 - Domingos da Guia», Veja Rio.
도밍구스 다 기아는 RSSSF의 후대 대표 선수 목록에 근거한다. 현대적 공식 MVP 트로피 수상자로 단정하지 않았으며, 대회 성적과 출전 명단은 RSSSF·AFA 기록으로 별도 대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