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 · 코파 아메리카

1946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 아돌포 페데르네라

아르헨티나가 전승으로 대회 2연패를 이룬 부에노스아이레스. 라 마키나의 중심 아돌포 페데르네라가 센터포워드의 위치를 바꾸고 디스테파노 이전 세대의 축구를 완성했다.
1946 코파 아메리카와 아돌포 페데르네라를 기록한 표지
코파 아메리카 트로피

제19회 남미축구선수권대회

Campeonato Sudamericano de Football 1946

대회 기록

개최국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대회 기간
1946년 1월 12일-2월 10일
참가국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 브라질 브라질 국기 · 파라과이 파라과이 국기 · 우루과이 우루과이 국기 · 칠레 칠레 국기 · 볼리비아 볼리비아 국기
방식
6개국 단일 리그전
개최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

최종 순위

순위 국가 전적 득실
1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통산 여덟 번째 우승 5승 17득점 3실점
2 브라질 브라질 국기 3승 1무 1패 13득점 7실점
3 파라과이 파라과이 국기 2승 1무 2패 8득점 8실점
4 우루과이 우루과이 국기 2승 3패 11득점 9실점
5 칠레 칠레 국기 2승 3패 8득점 11실점
6 볼리비아 볼리비아 국기 5패 4득점 23실점

개인 기록

대회 대표 선수아돌포 페데르네라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득점왕호세 마리아 메디나7골 · 우루과이
우승 성적5전 전승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여담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라 마키나

1946년의 아르헨티나를 선수 명단으로만 읽으면 스타의 집합처럼 보인다. 앙헬 라브루나, 펠릭스 로우스타우, 노르베르토 멘데스, 비센테 데라마타가 있었고 기예르모 스타빌레가 벤치에 앉았다. 그러나 이 팀의 문법은 이미 리버 플레이트에서 몇 해 동안 실험된 것이었다. 1942년 《El Gráfico》의 보로코토가 6-2 승리 뒤 ‘기계처럼 경기했다’고 쓴 데서 라 마키나(La Máquina; ‘기계’라는 뜻의 리버 플레이트 전설적 공격진)라는 이름이 굳어졌다. 후안 카를로스 무뇨스·호세 마누엘 모레노·페데르네라·라브루나·로우스타우가 나란히 적히지만, 이 다섯 명의 위력은 정해진 칸을 지키는 데 있지 않았다.[1]

그 중심에서 페데르네라는 센터포워드의 상식을 거슬렀다. 당시 9번은 상대 풀백 사이에서 크로스를 기다리는 선수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는 중원으로 내려와 공을 받고 수비수를 끌어냈다. 비어 버린 중앙으로 라브루나가 파고들고, 양쪽의 로우스타우와 윙어가 안으로 접었으며, 인사이드 포워드가 다시 패스의 각도를 만들었다. 현대 전술어를 무리하게 소급해 그를 최초의 ‘폴스 나인’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골문에서 멀어지는 움직임으로 골문 앞의 공간을 늘린 9번이었다는 설명은 정확하다.

득점표에 다 적히지 않는 공격수

아르헨티나의 첫 두 경기는 페데르네라가 왜 대표 선수로 기억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파라과이를 2-0으로 꺾을 때 그는 선발 명단에 없었다. 볼리비아전에서는 중앙에 섰지만 일곱 골 가운데 자신의 골은 없었다. 대신 멘데스와 라브루나가 두 골씩, 후안 카를로스 살비니가 두 골, 로우스타우가 한 골을 넣었다. 중앙 공격수가 득점하지 않았는데도 전방 전체가 열렸다면, 그의 위치를 득점 숫자만으로 평가하기 어렵다.[2]

득점이 필요할 때는 직접 끝냈다. 칠레전 65분, 라브루나의 두 골 뒤 세 번째 골을 넣었고, 우루과이전에서는 32분 선제골을 기록했다. 그날 상대 골문은 1930년 월드컵 우승 골키퍼 로케 마스폴리가 지켰고, 중원에는 훗날 마라카낭의 주장으로 남을 옵둘리오 바렐라가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후반 시작과 함께 라브루나가 두 번째 골을 넣고 3-1로 이겼다. 페데르네라는 다섯 경기 두 골로 대회를 마쳤지만, 아르헨티나는 그가 선발로 들어간 네 경기에서 15골을 넣었다.[2]

마지막 날, 브라질은 무승부로도 부족했다

2월 10일 모누멘탈에 들어선 브라질은 반드시 이겨야 했다. 아르헨티나는 이미 네 경기를 모두 이겼고, 브라질은 파라과이와 비긴 탓에 승점 하나가 아니라 승리 자체가 필요했다. 브라질의 전방에는 지지뉴·엘레누·자이르가 있었고 수비에는 도밍구스 다 기아가 섰다. 1945년 산티아고에서 아르헨티나에 우승을 내준 핵심들이 1년 뒤 다시 마지막 문 앞에 선 셈이었다.

경기는 화려한 공격진의 이름보다 거칠게 기억됐다. 전반 30분을 전후해 아르헨티나의 호세 살로몬과 브라질의 자이르가 충돌했고 살로몬은 큰 부상을 입어 교체됐다. 양 팀 선수와 관계자까지 뒤엉키며 경기가 장시간 중단됐다. 다시 시작된 뒤 멘데스가 38분 선제골을 넣고 후반 10분 두 번째 골까지 만들었다. 아르헨티나는 계산을 위해 비길 필요조차 없이 2-0으로 이겼다. 5전 전승, 17득점 3실점. 1945년부터 시작된 왕조의 가운데 장이었다.[3]

리버의 9번이 하나의 계보가 되기까지

1946년의 페데르네라는 아직 라 마키나의 중심에 있었지만, 이듬해 리버의 전방에는 세대교체가 시작됐다. 페데르네라가 아틀란타로 떠나고 우라칸 임대에서 돌아온 스물한 살의 알프레도 디스테파노가 중앙을 맡았다. 디스테파노는 27골로 곧바로 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리버는 아르헨티나 챔피언이 됐다. 한 선수가 비운 등번호를 다른 선수가 물려받았다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었다. 수비수 사이에 고정되지 않는 센터포워드가 리버 공격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발상 자체가 다음 세대로 넘어간 것이다.

두 사람의 축구는 같은 문법에서 서로 다른 문장으로 나왔다. 페데르네라는 한 걸음 내려와 동료가 들어갈 통로와 패스의 순서를 먼저 설계했고, 디스테파노는 그 공간을 훨씬 넓은 활동 반경과 연속적인 득점으로 점령했다. 1949년 선수 파업이 아르헨티나 축구의 질서를 흔든 뒤에는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에서 두 움직임이 한 팀 안에 포개졌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완성될 디스테파노의 축구를 유럽의 돌연변이처럼 읽을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보다 앞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페데르네라가 9번의 출발 위치를 바꾸고, 골을 넣지 않는 순간에도 공격 전체를 움직이는 법을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

출처와 기록 기준

  1. «Historia de River Plate», Club Atlético River Plate.
  2. «Southamerican Championship 1946», RSSSF.
  3. «Un campeón con todas las letras», AFA.
  4. «Copa América: las quince conquistas argentinas», AFA.
  5. «The Copa América Archive - Best Players», RSSSF.

페데르네라는 RSSSF의 후대 대표 선수 목록에 근거한다. 현대적 공식 MVP 트로피 수상자로 단정하지 않았으며 경기별 명단·득점과 최종 순위는 RSSSF와 AFA 기록으로 대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