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 · 코파 아메리카

1947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 호세 마누엘 모레노

과야킬에서 아르헨티나가 대회 역사상 유일한 3연패를 완성했다. 라 마키나의 호세 마누엘 모레노와 스물한 살 디스테파노가 한 팀에서 두 세대를 연결한 마지막 장면을 기록한다.
1947 코파 아메리카와 호세 마누엘 모레노를 기록한 표지
코파 아메리카 트로피

제20회 남미축구선수권대회

Campeonato Sudamericano de Football 1947

대회 기록

개최국
에콰도르 에콰도르 국기
대회 기간
1947년 11월 30일-12월 31일
참가국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 파라과이 파라과이 국기 · 우루과이 우루과이 국기 · 칠레 칠레 국기 · 페루 페루 국기 · 에콰도르 에콰도르 국기 · 볼리비아 볼리비아 국기 · 콜롬비아 콜롬비아 국기
방식
8개국 단일 리그전
개최 도시
과야킬 · 에스타디오 조지 캡웰

최종 순위

순위 국가 전적 득실
1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대회 유일의 3연패 6승 1무 28득점 4실점
2 파라과이 파라과이 국기 5승 1무 1패 16득점 11실점
3 우루과이 우루과이 국기 5승 2패 21득점 8실점
4 칠레 칠레 국기 4승 1무 2패 14득점 13실점
5 페루 페루 국기 2승 2무 3패 12득점 9실점
6 에콰도르 에콰도르 국기 3무 4패 3득점 17실점
7 볼리비아 볼리비아 국기 2무 5패 6득점 21실점
8 콜롬비아 콜롬비아 국기 2무 5패 2득점 19실점

개인 기록

대회 대표 선수호세 마누엘 모레노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득점왕니콜라스 팔레로8골 · 우루과이
우승 성적6승 1무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여담

멕시코에서 돌아온 ‘엘 차로’

모레노는 1947년에 갑자기 등장한 선수가 아니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리버 플레이트와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공격을 이끌었고, 1942년에는 무뇨스·페데르네라·라브루나·로우스타우와 라 마키나를 완성했다. 그는 안쪽과 바깥쪽을 오가며 패스를 만들었고, 공중볼과 몸싸움, 슈팅까지 갖췄다. 유려한 기술만으로 설명되는 남미의 10번이 아니라 경기의 속도와 충돌을 함께 감당하는 인사이드 포워드였다.[1]

1944년 멕시코의 클루브 에스파냐로 떠났을 때 얻은 별명이 ‘엘 차로’(El Charro; 멕시코 전통 기마인을 가리키는 별칭)였다. 2년 뒤 리버로 돌아오자 복귀전을 치른 페로의 경기장이 관중을 다 받지 못할 만큼 사람이 몰렸다. 그리고 1947년 리버는 다시 리그 챔피언이 됐다. 모레노 옆에는 라 마키나의 옛 동료 라브루나와 로우스타우가 있었지만, 중앙에는 새로운 얼굴 알프레도 디스테파노가 들어왔다. 과야킬로 향한 대표팀은 한 시대의 마지막과 다음 시대의 시작을 같은 비행기에 태웠다.[1]

모레노가 시작하고 디스테파노가 들어오다

12월 2일 파라과이전 10분, 대회의 아르헨티나 첫 골은 모레노가 넣었다. 로우스타우와 르네 폰토니, 멘데스가 뒤를 이으며 6-0이 됐다. 이 선발 명단에는 디스테파노가 없었다. 이틀 뒤 볼리비아전에서 폰토니가 다치자 30분에 스물한 살의 디스테파노가 들어왔고, 62분 자신의 대표팀 첫 대회 골을 넣었다. 모레노가 이미 공격의 질서를 잡아 놓은 자리에 다음 세대의 9번이 교대로 들어온 장면이었다.[2]

페루전은 두 세대가 동시에 득점한 경기였다. 아르헨티나는 전반에 모레노와 마리오 보예의 골로 앞섰지만 발레리아노 로페스와 루이스 구스만에게 따라잡혔다. 후반 19분 결승골을 넣은 선수가 디스테파노였다. 콜롬비아전에서는 그가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대표팀 경력이 여섯 경기로 끝날 디스테파노가 그 짧은 시간에 여섯 골을 넣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모레노·로우스타우·멘데스처럼 이미 국제 경기의 간격을 알고 있던 선배들이 있었다.[3]

일곱 경기에서 한 번만 멈춘 공격

아르헨티나는 파라과이와 볼리비아를 상대로 13골을 넣은 뒤 페루를 3-2로 꺾었다. 유일하게 이기지 못한 상대는 칠레였다. 12월 16일, 디스테파노가 40분 선제골을 넣었지만 페르난도 리에라가 후반 동점을 만들었다. 이 1-1은 아르헨티나가 1945년부터 이어 온 세 번의 남미선수권에서 마지막으로 허용한 승점 손실이었다.

콜롬비아에 6-0, 개최국 에콰도르에 2-0으로 다시 속도를 올렸다. 에콰도르전 선제골도 모레노의 것이었다. 그는 득점왕 경쟁에서는 세 골에 머물렀지만, 첫 경기의 첫 골과 개최국을 무너뜨린 골을 넣었다. 무엇보다 스타빌레는 모레노를 선발에서 빼지 않았다. 전방의 조합이 폰토니에서 디스테파노로 바뀌어도 왼쪽 안쪽에서 패스와 압박의 기준을 유지하는 선수였기 때문이다.[2]

유일한 3연패, 그리고 흩어지기 직전의 세대

12월 28일 우루과이와의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아르헨티나는 승리나 무승부면 우승할 수 있었다. 우루과이는 반드시 이겨야 했다. 멘데스가 전반 30분과 후반 시작 직후 두 골을 넣었고, 훌리오 브리토스가 한 골을 돌려놓자 85분 로우스타우가 3-1로 닫았다. 모레노는 득점하지 않았지만 보예·멘데스·폰토니·로우스타우와 함께 선발 공격선을 구성했다. 28득점 4실점, 6승 1무. 1945·1946·1947로 이어진 3연패는 지금도 대회에서 유일하다.[4]

이 우승을 영원히 지속될 왕조의 출발로 읽으면 이후의 역사를 놓친다. 아르헨티나는 1950년 월드컵에 참가하지 않았고, 1948년 선수 파업 뒤 페데르네라와 디스테파노를 비롯한 정상급 선수들이 콜롬비아로 떠났다. 모레노도 칠레·우루과이·콜롬비아를 거쳤다. 과야킬의 공격진이 월드컵 무대에서 한 팀으로 증명될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1947년은 더 귀하다. 라 마키나를 만든 모레노와 유럽 축구의 다음 시대를 바꿀 디스테파노가 아르헨티나 유니폼으로 함께 우승한 처음이자 마지막 대회였다.

출처와 기록 기준

  1. «José Manuel Moreno, un ídolo de época», AFA.
  2. «Southamerican Championship 1947», RSSSF.
  3. «A 75 años del debut de Alfredo Di Stéfano», AFA.
  4. «¡Tricampeones!», AFA.
  5. «The Copa América Archive - Best Players», RSSSF.

모레노는 RSSSF의 후대 대표 선수 목록에 근거한다. 현대적 공식 MVP 트로피 수상자로 단정하지 않았으며 경기별 명단·득점과 최종 순위는 RSSSF와 AFA 기록으로 대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