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 · 코파 아메리카
1953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 에리베르토 에레라
경기장 문제로 파라과이가 개최권을 가진 채 페루 리마에서 열린 1953년 남미축구선수권대회. 브라질을 두 번 꺾고 첫 우승을 차지한 파라과이와 수비수 에리베르토 에레라를 기록한다.

제22회 남미축구선수권대회
Campeonato Sudamericano de Football 1953대회 기록
- 개최 주체
- 파라과이
- 개최지
- 페루 리마
- 대회 기간
- 1953년 2월 22일-4월 1일
- 참가국
- 파라과이
· 브라질
· 우루과이
· 칠레
· 페루
· 볼리비아
· 에콰도르
- 방식
- 7개국 단일 리그전 · 동률 시 우승 결정전
- 경기장
-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 리마
최종 순위
| 순위 | 국가 | 리그전 | 득실 |
|---|---|---|---|
| 1 | 파라과이 |
3승 2무 1패 | 11득점 6실점 |
| 2 | 브라질 |
4승 2패 | 15득점 6실점 |
| 3 | 우루과이 |
3승 1무 2패 | 15득점 6실점 |
| 4 | 칠레 |
3승 1무 2패 | 10득점 10실점 |
| 5 | 페루 |
3승 1무 2패 | 4득점 6실점 |
| 6 | 볼리비아 |
1승 1무 4패 | 6득점 15실점 |
| 7 | 에콰도르 |
2무 4패 | 1득점 13실점 |
순위표는 우승 결정전 이전의 단일 리그 성적이다. 파라과이와 브라질은 승점 8로 같았고, 4월 1일 별도 결정전에서 파라과이가 3-2로 승리해 우승했다.
개인 기록
여담
파라과이가 주최하고 페루에서 열린 대회
1953년 대회의 개최국을 한 단어로 적으면 역사가 사라진다. 남미축구연맹은 파라과이를 개최 주체로 정했지만, 파라과이 축구 당국은 대회를 치를 만한 경기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모든 경기는 페루 리마의 에스타디오 나시오날에서 열렸다. 파라과이는 안방의 관중과 익숙한 환경 없이 자신들이 조직한 대회에 참가했다.[1]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가 불참하면서 일곱 팀이 단일 리그를 치렀다. 우루과이는 1950년 세계 챔피언이었고 브라질은 월드컵 준우승 뒤에도 지지뉴·니우통 산투스·자우마 산투스·줄리뉴·디디를 데려왔다. 파라과이의 우승은 강팀이 빠진 빈자리를 차지한 결과가 아니었다. 직전 월드컵 결승의 두 나라가 모두 있는 대회에서 브라질을 두 번 꺾어 얻은 첫 별이었다.[2]
2-2로 끝났지만 패배가 된 페루전
파라과이는 칠레를 3-0으로 꺾으며 시작했지만 에콰도르와 0-0으로 비겼다. 3월 8일 페루전에서는 루벤 페르난데스와 앙헬 베르니의 골로 2-2를 만들었다. 경기장 위의 결과는 무승부였다. 그러나 허용 범위를 넘긴 선수 교체가 문제 됐고, 교체로 들어간 밀네르 아얄라가 심판을 걷어찬 사건까지 벌어졌다. 경기는 페루의 승리로 처리됐고 아얄라는 장기 징계를 받았다.[1]
이 몰수패가 파라과이의 리그전 유일한 패배였다. 우루과이와 2-2로 비긴 뒤 볼리비아를 2-1로 꺾었지만, 두 경기만 남았을 때 우승을 장담할 위치는 아니었다. 경기 규율을 잃어 승점을 내준 팀이 다시 우승 경쟁으로 돌아오려면 공격력보다 먼저 수비의 질서가 필요했다. 그 중심에 에레라가 있었다.
에레라가 지킨 왼쪽, 레기사몬이 통제한 중앙
마누엘 플레이다스 솔리치(Manuel Fleitas Solich; 파라과이 축구선수·감독, 1900-1984)의 팀은 당시 표기상 두 명의 풀백과 세 명의 하프백을 두는 2-3-5 대형으로 출발했다. 에레라는 후안 올메도와 최후방에 섰고, 빅토르 레기사몬(Víctor Leguizamón; 파라과이 미드필더, 1922-2007)이 그 앞 중앙을 지켰다. 에레라는 골문 앞에 머무는 수비수라기보다 측면으로 끌려 나간 뒤 다시 중앙을 닫는 선수였다. 빠른 공격수를 따라갈 속도와 공중볼 판단을 함께 갖췄다.
후대의 대표 선수 목록이 에레라를 1953년의 이름으로 남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파라과이의 앙헬 베르니와 루벤 페르난데스는 각각 네 골을 넣었고, 브라질의 줄리뉴와 칠레의 프란시스코 몰리나는 더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우승팀이 두 차례 브라질전을 버티는 동안 수비의 기준을 유지한 선수는 에레라였다. 이 평가는 현대식 공식 MVP 트로피를 소급한 것이 아니라 후대 자료가 대회를 대표하는 선수로 정리한 결과다.[5]
브라질을 닷새 사이 두 번 꺾다
3월 27일 리그 마지막 브라질전에서 파라과이는 전반 12분 니우통 산투스에게 선제골을 허용했다. 후반 4분 아틸리오 로페스가 동점을 만들었고, 정규시간 종료 직전 루벤 레온이 역전골을 넣었다. 2-1. 파라과이는 브라질과 승점 8로 같아졌고, 닷새 뒤 같은 경기장에서 우승 결정전을 치르게 됐다.[1]
결정전은 정반대로 흘렀다. 아틸리오 로페스가 14분에 첫 골, 마누엘 가빌란이 17분에 두 번째 골을 넣었다. 전반 41분 루벤 페르난데스의 골까지 더해져 파라과이가 3-0으로 앞섰다. 브라질은 후반 11분과 20분 발타자르의 연속골로 한 골 차까지 따라왔다. 남은 25분 동안 에레라와 올메도, 레기사몬은 더 이상 중앙을 열지 않았다. 파라과이는 1949년 우승 결정전에서 브라질에 0-7로 패한 지 네 해 만에 같은 상대를 꺾었다.[1]
첫 별을 만든 수비수, 유럽에서 ‘두 번째 HH’가 되다
파라과이 축구는 1922·1929·1947·1949년 준우승 뒤 마침내 첫 남미 정상에 올랐다. 플레이다스 솔리치가 1947년부터 다듬은 세대는 후안 앙헬 로메로의 기술, 베르니와 페르난데스의 득점, 에레라의 수비를 하나로 묶었다. CONMEBOL의 대회 회고가 이 팀을 거칠면서도 좋은 축구를 한 강력한 팀으로 설명하는 이유다.[2]
에레라는 이후 스페인으로 건너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뛰었고 스페인 대표팀에도 한 차례 출전했다. 지도자가 된 뒤에는 엄격한 규율로 ‘철의 중사’(El Sargento de Hierro; 강한 규율에서 나온 별명)라 불렸으며 유벤투스와 인테르를 지휘했다. 엘레니오 에레라와 구분해 이탈리아에서 ‘HH2’로 불린 감독의 출발점에는, 골 없이도 대회의 대표 선수로 남은 1953년 리마의 수비가 있었다.[4]
출처와 기록 기준
- «Southamerican Championship 1953», RSSSF. 경기별 명단·득점·몰수 처리와 리그 순위.
- «1953 Paraguay: Su primer gran festejo», CONMEBOL. 파라과이의 첫 우승, 개최지와 우승 결정전.
- «Seleção Brasileira 1953-1956», RSSSF. 브라질전 명단과 득점 기록.
- «Herrera Udrizar, Heriberto», Memoria Digital de Elche. 에레라의 선수·지도자 경력과 1953년 평가.
- «The Copa América Archive - Best Players», RSSSF. 대회별 후대 대표 선수 목록.
에레라는 후대의 대회 대표 선수 목록에 근거하며 현대적 공식 MVP 트로피 수상자로 소급하지 않았다. 프란시스코 몰리나의 득점은 RSSSF 경기별 기록을 합산하면 7골이지만 CONMEBOL 회고 자료는 8골로 적는다. 본문 카드는 검증 가능한 경기별 합계 7골을 사용하고 자료 간 차이를 함께 남겼다. 파라과이-페루전은 경기장 결과 2-2와 공식 몰수 결과를 구분했고, 우승 결정전은 리그 성적에 합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