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 · 코파 아메리카
1949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 아데미르
브라질은 파라과이에 패해 우승을 놓칠 뻔한 뒤 사흘 후 재경기에서 7-0으로 뒤집었다. 결승 해트트릭의 아데미르와 1950년 월드컵 직전 브라질 공격의 탄생을 기록한다.

제21회 남미축구선수권대회
Campeonato Sudamericano de Football 1949대회 기록
- 개최국
- 브라질
- 대회 기간
- 1949년 4월 3일-5월 11일
- 참가국
- 브라질
· 파라과이
· 페루
· 볼리비아
· 칠레
· 우루과이
· 에콰도르
· 콜롬비아
- 방식
- 8개국 단일 리그전 · 동률 시 우승 결정전
- 개최 도시
- 히우지자네이루 · 상파울루 · 산투스 · 벨루오리존치
최종 순위
| 순위 | 국가 | 리그전 | 득실 |
|---|---|---|---|
| 1 | 브라질 |
6승 1패 | 39득점 7실점 |
| 2 | 파라과이 |
6승 1패 | 21득점 6실점 |
| 3 | 페루 |
5승 2패 | 20득점 13실점 |
| 4 | 볼리비아 |
4승 3패 | 13득점 24실점 |
| 5 | 칠레 |
2승 1무 4패 | 10득점 14실점 |
| 6 | 우루과이 |
2승 1무 4패 | 14득점 20실점 |
| 7 | 에콰도르 |
1승 6패 | 7득점 21실점 |
| 8 | 콜롬비아 |
2무 5패 | 4득점 23실점 |
개인 기록
여담
마라카낭이 열리기 전의 브라질
1949년의 브라질 대표팀을 마라카낭의 전주곡이라고 부르기는 쉽다. 실제로 바르보자·아우구스투·다닐루 아우빙·지지뉴·자이르·아데미르처럼 이듬해 월드컵의 중심이 될 선수들이 이미 모였다. 그러나 이 대회가 열린 동안 마라카낭은 아직 공사 중이었다. 브라질의 중요한 경기는 바스쿠 다 가마의 홈 상자누아리우와 상파울루의 파카엥부에서 열렸다. 1950년의 거대한 국립 서사가 생기기 전, 대표팀의 뼈대는 클럽과 지역 경기장의 축구에서 먼저 만들어졌다.[1]
특히 상자누아리우의 주인은 ‘익스프레수 다 비토리아’(Expresso da Vitória; ‘승리의 특급열차’라는 뜻의 바스쿠 다 가마 황금세대)였다. 바스쿠는 1948년 산티아고에서 남미 클럽 챔피언십을 제패했고, 그 선수단은 대표팀의 골키퍼·수비·중원·공격을 넓게 공급했다. 당시 그 대회에서 아데미르는 우루과이 나시오날전 도중 발을 다쳐 일찍 이탈했지만, 팀은 리버 플레이트와 비기며 우승했다. 1년 뒤 대표팀에서 그는 다치지 않은 채 마지막 경기까지 남아 결승을 끝냈다.[2]
39골을 넣고도 결승을 한 번 더 치른 이유
브라질은 에콰도르를 9-1, 볼리비아를 10-1, 콜롬비아를 5-0, 페루를 7-1로 꺾었다. 숫자만 보면 우승 경쟁이 존재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리그 일곱 경기에서 39골을 넣었고, 자이르가 대회 최다인 아홉 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파라과이도 조용히 여섯 경기를 이겼다. 두 팀의 리그 최종전이 사실상의 결승이 됐고, 브라질은 무승부만 거둬도 단독 우승할 수 있었다.
5월 8일 상자누아리우에서 테소리냐가 33분 선제골을 넣었다. 75분 아틸리오 아발로스가 동점, 85분 헤수스 베니테스가 역전골을 넣었다. 2-1 파라과이. 브라질은 대회에서 처음 졌고 두 팀은 6승 1패, 승점 12로 같아졌다. 골득실이 압도적이어도 당시 규정은 브라질을 챔피언으로 만들지 않았다. 우승 결정전을 다시 치러야 했다.[1]
그 패배의 브라질 선발에는 아데미르가 없었다. 플라비우 코스타는 오타비우를 중앙에 놓았다. 사흘 뒤 같은 경기장에서는 아데미르가 9번 자리로 돌아왔다. 전술 변화의 효과를 과장해 한 선수만의 승리로 만들 필요는 없지만, 두 경기의 가장 분명한 차이가 중앙 공격수였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다.
17분, 27분, 48분
5월 11일의 재경기에서 아데미르는 17분 만에 첫 골을 넣었다. 10분 뒤 두 번째 골, 전반 종료 직전 테소리냐가 세 번째 골을 보탰다. 후반 3분 아데미르가 해트트릭을 완성했을 때 점수는 4-0이었다. 파라과이는 사흘 전에 같은 수비로 브라질을 한 골에 묶었지만, 이번에는 31분을 남기고 이미 네 골을 허용했다. 테소리냐가 한 골을 더 넣고 자이르가 두 골을 보태 7-0이 됐다.[1]
아데미르의 별명은 ‘케이샤다’(Queixada; 도드라진 턱에서 나온 별칭)였다. 외모에서 시작된 이름이지만 축구는 정면 돌파에 가까웠다. 짧은 도움닫기 뒤 빠르게 치고 나가며 양발로 마무리했고, 중앙에만 머물지 않고 오른쪽에서 안으로 파고들었다. 1949년 대회 전체 득점은 일곱 골로 자이르보다 두 골 적었다. 그러나 우승을 실제로 결정한 단 한 경기에서 세 골을 먼저 몰아넣은 선수는 아데미르였다.
1950년의 비극이 가린 9번의 전성기
브라질은 1919년과 1922년 뒤 27년 만에 남미 챔피언이 됐다. 우승 결정전까지 포함하면 여덟 경기 46득점 7실점이었다. 이 공격력은 이듬해 월드컵에서도 이어졌다. 아데미르는 1950년 대회에서 아홉 골을 넣어 득점왕이 됐고, 브라질은 스웨덴에 7-1, 스페인에 6-1로 이겼다. 우리가 그 팀을 기억하는 방식은 마지막 우루과이전의 1-2에 붙잡혀 있지만, 직전 1년 동안의 브라질은 상대를 압도하는 법을 가장 잘 아는 대표팀이었다.[3]
그래서 1949년 아데미르는 1950년의 피해자나 예고편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파라과이전 패배로 홈 우승이 무너질 수 있었던 순간, 사흘 만에 선발 중앙으로 돌아와 전반 27분 안에 두 골을 넣고 해트트릭으로 결승을 끝낸 선수였다. 마라카낭의 침묵은 세계축구의 신화가 됐지만, 그보다 13개월 앞선 상자누아리우에는 같은 공격수가 만들어 낸 55,000명의 환호가 있었다.
출처와 기록 기준
- «Southamerican Championship 1949», RSSSF.
- «Primeiro título Sul-Americano do Vasco», CR Vasco da Gama.
- «Brasil nas Copas: 1950», CBF.
- «Seleção Brasileira 1947-1952», RSSSF.
- «The Copa América Archive - Best Players», RSSSF.
아데미르는 RSSSF의 후대 대표 선수 목록에 근거한다. 현대적 공식 MVP 트로피 수상자로 단정하지 않았으며 리그전과 우승 결정전은 구분해 표기했다. 경기별 명단·득점은 RSSSF의 대회·브라질 대표팀 기록으로 대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