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 FIFA 월드컵™
1950 FIFA 월드컵 베스트 11: 마라카낭이 조용해진 날
12년 만에 다시 열린 월드컵, 열세 나라만 도착한 대회, 그리고 결승이 없는 최종 리그전. 우루과이의 두 번째 우승과 1950년 브라질 월드컵의 당대 베스트 11을 WM의 언어로 다시 읽는다.
열두 해 만에 다시 열린 대회
- 개최국
- 브라질
- 대회 기간
- 1950년 6월 24일-7월 16일
- 본선 참가
- 13개국
- 경기 수
- 22경기 · 88골
- 우승
- 우루과이 두 번째 우승
- 득점왕
- 아데미르 · 9골
1942년과 1946년 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문제는 남았다. 유럽 대부분이 아직 재건 중이었고, 각국 정부는 축구 대회보다 급한 곳에 자원을 써야 한다고 판단했다. 유럽에서는 개최 신청이 한 건도 나오지 않았다. 1946년 7월 25일 룩셈부르크 총회에서 브라질이 나섰고, 1949년이 아니라 1950년에 치른다는 조건을 붙여 곧바로 승인받았다.[1]
도착하지 않은 나라들
열여섯 자리를 채우지 못한 이유는 하나가 아니었다. 스코틀랜드는 본선 자격을 얻고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가지 않았다. 프랑스는 조별리그 경기장 사이의 이동 거리를 문제 삼아 빠졌다.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축구협회와의 분쟁 끝에 불참했다. 터키도 오지 않았다. 대체 팀을 부를 시간이 없어 대회는 열세 나라로 시작됐고, 프랑스가 빠진 4조에는 두 나라만 남았다.[2]
인도의 불참은 오랫동안 다른 이야기로 전해졌다. 맨발로 뛰겠다는 요구를 FIFA가 거부해서 물러났다는 설명이다. 사실이 아니다. 축구화 착용을 의무화한 규정은 1953년에야 생겼고, 인도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맨발로 경기를 치렀다. 실제로는 개막 열흘 전 인도축구연맹이 준비 기간 부족, 정보 전달 지연, 선수 선발에 관한 이견을 이유로 전보를 보냈다. 독립 3년차 국가가 지구 반대편까지 선수단을 보내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연맹은 월드컵보다 올림픽을 우선했다.[3]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는 왔지만 1938년의 팀이 아니었다. 1949년 5월 4일, 대표팀에 여덟에서 열 명의 주전을 공급하던 그란데 토리노(Grande Torino; 1940년대 이탈리아 리그를 다섯 시즌 연속 제패한 토리노 FC의 세대) 선수단 전원이 수페르가 언덕의 성당 옹벽에 항공기가 충돌하며 사망했다. 이듬해 이탈리아 대표팀은 비행기 대신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고,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4]
공사장에서 열린 대회
마라카낭은 1950년 6월 16일에 문을 열었다. 개장 경기는 히우 선발과 상파울루 선발의 대결이었고 첫 골은 지지가 넣었다. 개막 여드레 전이었다. 노동자 1만 명이 22개월 동안 지었지만 화장실과 기자석이 아직 없었고, 겉모습은 여전히 공사장에 가까웠다. FIFA는 그 상태로 경기를 허가했다. 완전한 준공은 1965년에 이뤄진다.[5]

이 경기장은 대회 내내 숫자로 존재감을 증명했다. 6월 24일 개막전에 8만 1,649명, 7월 1일 브라질-유고슬라비아전에 14만 2,429명, 7월 13일 브라질-스페인전에 15만 2,000명이 들어왔다.
최종 순위
| 순위 | 국가 | 전적 | 득실 |
|---|---|---|---|
| 우승 | 우루과이 |
3승 1무 | 15득점 5실점 |
| 준우승 | 브라질 |
4승 1무 1패 | 22득점 6실점 |
| 3위 | 스웨덴 |
2승 1무 2패 | 11득점 15실점 |
| 4위 | 스페인 |
3승 1무 2패 | 10득점 12실점 |
이 대회에는 준결승도 결승도 없었다. 네 조의 1위가 다시 리그전을 치러 승점이 가장 높은 팀이 우승하는 방식이었고, 월드컵 역사에서 이 형식은 1950년 한 번뿐이다. 우루과이가 승점 5, 브라질이 4였다.[6]
잉글랜드가 처음 온 대회
잉글랜드는 이 대회에서 월드컵에 처음 참가했다. 6월 29일 벨루오리존치의 이스타지우 인데펜덴시아에서 만난 상대는 직업 선수로 채워지지도 않은 미국이었다. 런던의 도박사들은 미국의 승리에 500 대 1을 걸었다. 조 게이첸스(Joe Gaetjens; 아이티 출신 미국 공격수, 1924-1964)가 다이빙 헤더로 넣은 한 골이 그날의 유일한 득점이었다. 관중은 약 1만 명이었고, 결과를 전달받은 영국의 일부 편집자는 오타를 의심해 10-1로 읽었다.[7]

1950 월드컵 베스트 11
1950년에도 오늘날의 골든볼이나 공식 팀 오브 더 토너먼트 시상 체계는 없었다. 아래 명단은 폐막식에서 발표된 수상자 목록이 아니라, 후대의 월드컵 회고와 통계 자료에서 공통으로 반복되는 열한 명이다. 1930·1934·1938년 기록과 같은 기준으로 다뤘다.[8]
명단을 읽는 법
대회의 포르투갈어 명칭은 제4회 세계축구선수권대회(IV Campeonato Mundial de Futebol; 제4회 세계축구선수권대회)였다. 이 명단을 1930·1934·1938년과 같은 2-3-5로 읽으면 안 된다. 1950년의 기본 대형은 이미 WM(WM; 세 명의 백과 두 명의 하프백, 두 명의 인사이드 포워드, 세 명의 최전방으로 나뉘는 3-2-2-3 대형)이었다.
브라질은 여기에 자기 해석을 붙였다. 감독 플라비우 코스타(Flávio Costa; 브라질 감독, 1906-1999)는 하프백 한 명을 뒤로 내리고 인사이드 포워드 한 명을 앞으로 밀어 대형을 비스듬히 기울였고, 이를 디아고나우(diagonal; ‘대각선’이라는 뜻의 브라질식 WM 변형)라고 불렀다. 공격에서 수적 우위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고, 수비 전환의 빈틈은 감수했다. 이 시스템이 남긴 문제의식이 훗날 4-2-4로 이어진다.[9]
그러므로 이 열한 명을 오늘날의 포백과 미드필더로 옮기면 두 번 틀린다. 1958년 이후의 4-2-4로 소급해도 마찬가지다. FB는 풀백(full-back), CB는 WM에서 뒤로 내려선 센터하프(centre-back), CH·RH는 중앙과 오른쪽 하프백(centre·right half), IL·IR는 안쪽 공격수(inside left·right), OR는 오른쪽 바깥 공격수(outside right), CF는 센터 포워드(centre-forward)를 뜻한다.
IL스키아피노우루과이 · 4경기 3골
CF아데미르브라질 · 6경기 9골
OR알시데스 기지아우루과이 · 4경기 4골
IL자이르브라질 · 5경기 2골
IR지지뉴브라질 · 4경기 2골
CH옵둘리오 바렐라우루과이 · 4경기 1골
RH바우에르브라질 · 5경기
FB에리크 닐손스웨덴 · 5경기
CB호세 파라스페인 · 5경기
FB로드리게스 안드라데우루과이 · 4경기
GK로케 마스폴리우루과이 · 4경기 3실점이 배치는 서로 다른 대형을 쓰던 네 나라의 선수를 하나의 그림 안에 세우기 위한 회고적 구성이다. 좌우 위치는 매 경기의 실제 선발 자리를 그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다. 다만 앞의 셋과 안쪽의 둘, 하프백 둘과 백 셋으로 나누는 뼈대는 1950년 경기표가 실제로 쓰던 언어에 가깝다.

우루과이 · 4경기 3실점

스웨덴 · 5경기

스페인 · 5경기

우루과이 · 4경기

우루과이 · 4경기 1골 · 주장

브라질 · 5경기

브라질 · 4경기 2골

브라질 · 5경기 2골

우루과이 · 4경기 4골

브라질 · 6경기 9골

우루과이 · 4경기 3골
네 경기만 치른 우승팀의 골문
로케 마스폴리(Roque Gastón Máspoli; 우루과이 골키퍼, 1917-2004)는 대회 내내 네 경기만 뛰었다. 우루과이가 조별리그에서 한 경기밖에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빠진 4조에는 우루과이와 볼리비아만 남았고, 두 팀은 단 한 번 만나 우루과이가 8-0으로 이겼다. 다른 조의 팀들이 세 경기씩 치르며 몸을 만드는 동안 우루과이는 한 경기를 치르고 최종 리그전에 올랐다.
준비 부족은 곧바로 드러났다. 최종 리그 첫 경기에서 스페인에 2-2로 비겼고, 두 번째 경기에서는 스웨덴에 두 골을 먼저 내주고도 3-2로 뒤집었다. 마스폴리가 네 경기에서 내준 골은 다섯이다. 마지막 경기 전까지 우루과이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팀처럼 보였고, 실제로 브라질과 만나기 전 승점은 3이었다.
뒤로 내려간 센터하프와 내려가지 않은 센터하프
WM이 자리를 잡으면서 2-3-5 시대의 중앙 하프는 두 풀백 사이로 내려가 세 번째 백이 됐다. 스페인의 호세 파라(José Parra Martínez; 스페인 수비수, 1925-2016)와 스웨덴의 에리크 닐손(Erik Nilsson; 스웨덴 수비수, 1916-1995)이 그 시대의 뒷선을 대표한다. 스페인은 조별리그에서 미국·칠레·잉글랜드를 차례로 꺾고 3전 전승으로 올라왔고, 그 세 경기에서 내준 골은 하나였다.
우루과이의 중앙은 달랐다. 옵둘리오 바렐라(Obdulio Jacinto Muiños Varela; 우루과이 센터하프, 1917-1996)는 뒤로 완전히 내려가지 않은 옛 방식의 센터하프였다. 상대 공격수와 직접 부딪치면서 공을 되찾으면 앞으로 첫 패스를 보내는 자리, 팀이 앞뒤로 접히는 경첩이다. 스페인전 동점골도 그의 발에서 나왔다.
여덟 해 전 1942년 남미선수권에서 우루과이가 6전 전승으로 우승할 때, 스물네 살의 바렐라는 이미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그는 몬테비데오 원더러스 소속이었고 대회의 대표 선수로 기록됐다. 1950년의 그는 페냐롤의 선수이자 주장이었다. 여덟 해 사이에 달라진 것은 소속팀과 완장이지 역할이 아니다.
마라카낭보다 여덟 해 먼저 중원을 장악한 스물네 살 →
안쪽의 두 사람
지지뉴(Thomaz Soares da Silva; 브라질 인사이드 포워드, 1921-2002)는 부상에서 회복 중이라 브라질의 첫 두 경기에 나오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와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돌아왔고, 아데미르의 골을 만들어준 뒤 직접 한 골을 넣어 팀을 최종 리그로 올렸다. 인사이드 라이트 지지뉴, 인사이드 레프트 자이르, 센터 포워드 아데미르로 이어지는 삼각형이 처음으로 완성된 경기였다.[10]
반대편의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Juan Alberto Schiaffino; 우루과이 인사이드 포워드, 1925-2002)는 스물네 살이었다. 볼리비아전에서 네 골을 넣었고, 마지막 경기에서는 우루과이의 동점골을 기록한다. 두 사람 모두 윙어가 아니라 안쪽에서 경기를 읽는 자리의 선수였다는 점이 이 대회 공격의 성격을 보여준다. 폭을 만드는 일은 바깥의 몫이었고, 결정을 만드는 일은 안쪽의 몫이었다.
아홉 골의 9번
아데미르(Ademir Marques de Menezes; 브라질 공격수, 1922-1996)는 여섯 경기에서 아홉 골을 넣어 득점왕이 됐다. 스웨덴을 7-1로 이긴 경기에서만 네 골이었다. 짧은 도움닫기 뒤 양발로 마무리했고, 중앙에만 머물지 않고 오른쪽에서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 활약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열세 달 전 1949년 남미선수권의 우승 결정전에서 그는 파라과이를 상대로 전반 27분 안에 두 골을 넣고 해트트릭으로 경기를 끝냈다. 그때 브라질이 우승 결정전을 치른 경기장은 마라카낭이 아니라 상자누아리우였다. 마라카낭은 아직 공사 중이었다.
파라과이에 지고 사흘 만에 7-0으로 뒤집은 우승 결정전 →
오른쪽 끝의 한 명
알시데스 기지아(Alcides Edgardo Ghiggia; 우루과이 공격수, 1926-2015)는 스물세 살이었고, 네 경기에 모두 나와 네 골을 넣었다. 그의 자리는 오른쪽 바깥이다. 이 사실은 마지막 경기의 두 골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우루과이의 동점골도 결승골도 모두 오른쪽 터치라인에서 시작됐다.
7월 16일, 마라카낭
경기 시작 전 히우의 시장 앙젤루 멘지스 지 모라이스(Ângelo Mendes de Morais; 히우지자네이루 시장, 1894-1990)가 마이크를 잡았다. 아직 한 경기가 남아 있었다.

Vós, brasileiros, que em poucas horas sereis aclamados campeões por milhões de compatriotas… vós que não tendes rivais em todo o hemisfério… vós que eu já saúdo como vencedores.
몇 시간 뒤 수백만 명의 동포들로부터 챔피언으로 환영받을 브라질인 여러분… 이 반구 전체에 적수가 없는 여러분… 내가 이미 승자로서 경례하는 여러분.
1950년 7월 16일 마라카낭, 경기 시작 전 히우지자네이루 시장 연설브라질은 비기기만 해도 우승이었다. 최종 리그에서 스웨덴을 7-1, 스페인을 6-1로 이긴 팀이었다. 우루과이는 반드시 이겨야 했다.
전반은 득점 없이 끝났다. 후반 2분, 프리아사(Albino Friaça Cardoso; 브라질 공격수, 1924-2009)가 브라질의 선제골을 넣었다. 비기기만 해도 되는 팀이 앞서 나갔으니 남은 43분은 지키기만 하면 되는 시간이었다. 66분, 오른쪽에서 기지아가 올린 공을 스키아피노가 마무리해 1-1이 됐다. 이때도 브라질은 여전히 우승이었다. 79분, 다시 오른쪽을 파고든 기지아가 크로스 대신 직접 슈팅을 골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공식 유료 관중은 17만 3,850명이었다. 무단으로 들어온 인원까지 더한 추정치는 20만에서 22만 사이이고, FIFA와 위키피디아 계열 자료는 총원을 19만 9,954명으로 적는다. RSSSF는 아예 20만으로 기록한다. 어떤 숫자를 쓰든 그때까지 축구 경기가 모은 가장 큰 군중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그 군중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일치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리우 필류는 주심의 종료 휘슬 이후의 마라카낭을 거대한 초상집에 비유했다.[11]
같은 시각의 다른 곳
이 대회의 개막과 폐막 사이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두 사건의 시간 관계는 대충 겹치는 정도가 아니라 시계로 맞출 수 있다.
1950년 브라질은 6월과 7월에 서머타임을 쓰지 않았다. 그해 서머타임은 4월 16일에 끝났고 12월 1일에 다시 시작된다. 따라서 히우지자네이루는 UTC-3이었다. 한국은 UTC+9였다. 표준시가 UTC+8:30으로 바뀌는 것은 1954년의 일이다. 두 도시의 시차는 열두 시간이다.
개막전 브라질-멕시코는 6월 24일 오후 3시에 시작했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은 시각은 한국 시간 6월 25일 오전 4시, 히우 시간으로는 6월 24일 오후 4시다. 마라카낭에 8만 1,649명이 앉아 있었고, 경기는 후반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12]

마지막 경기도 마찬가지로 오후 3시에 시작했다. 한국 시간으로는 7월 17일 오전 3시다. 마라카낭이 조용해진 그 두 시간 동안 한반도의 달력은 이미 다음 날이었다.
최종전 킥오프 하루 전, 그러니까 한국 시간 7월 15일의 금강에는 이런 장면이 남아 있다.

7월 16일 새벽 3시, 북한군 항공기가 조명탄을 떨어뜨려 신호를 보냈다. 금강 도하 총공격이 시작됐고, 대평리 일대를 맡고 있던 미 24사단 19연대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강변에 배치돼 있던 약 900명 가운데 이튿날 대전 지역에서 복귀 신고를 한 인원은 434명이었다. 도로를 따라 물러나던 차량 행렬이 차단선에 막히자 병사들은 길을 버리고 소규모로 흩어져 남쪽으로 이동했다.[13]
같은 날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을 떠나 대구로 옮겼다. 대전이 실제로 함락되는 것은 나흘 뒤인 7월 20일이다.[14]

낙동강 방어선은 아직 없었다. 미 8군이 낙동강 동안으로 물러나는 것은 8월 1일에서 3일 사이이고, 방어선을 놓고 벌어진 전투는 8월 4일에 시작된다. 정부가 부산으로 다시 옮기는 것은 8월 18일이다. 7월 16일의 한반도는 방어선을 지키던 중이 아니라 방어선을 만들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밀려나던 중이었다.
브라질에서 그날 밤 사람들이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반복된다. 확인된 근거는 없다. 《Dossiê 50》을 쓴 제네통 모라이스 네투는 이를 도시전설로 정리했고, 당대 신문에 막연한 언급은 있어도 확인된 사망자 수를 남긴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15] 같은 주 한반도에서 남은 숫자는 소문이 아니라 미 육군 공식 전사에 적힌 900과 434다. 두 사건의 무게를 견주자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날짜에 남은 기록의 종류가 이만큼 다르다는 뜻이다.
여담: 남은 사람들
브라질의 골키퍼 모아시르 바르보자(Moacir Barbosa Nascimento; 브라질 골키퍼, 1921-2000)는 기지아의 슈팅을 막지 못한 사람으로 남았다. 그와 함께 책임이 집중된 주베나우, 비고지도 흑인 선수였다. 주장 아우구스투를 포함한 네 명은 다시 대표팀에 뽑히지 않았다.
1993년 바르보자는 이듬해 월드컵을 준비하던 대표팀 훈련장을 찾았다가 선수들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섰다. 불운을 부른다는 이유였다. 2000년 그는 브라질의 최고형이 30년인데 자신은 책임지지 않은 일로 50년째 복역 중이라고 말했다. 브라질 대표팀이 다시 흑인 골키퍼를 세우기까지 43년이 걸렸다.[16]
사라진 흰 셔츠
책임은 사람에게만 물어지지 않았다. 언론과 축구 행정가들은 그날 브라질이 입고 있던 흰 셔츠를 지목했다. 국기의 색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아 애국적이지 않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 셔츠를 찢어 불태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실제로 그런 소각이 있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일어난 일은 화형식이 아니라 퇴출이었다. 흰 셔츠는 조용히 쓰이지 않게 됐고, 다시 등장하지 못했다.[19]
이 판정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 브라질은 그 흰 셔츠를 입고 1919년과 1922년 남미선수권에서 우승했고, 1949년 상자누아리우에서도 같은 색으로 파라과이를 7-0으로 꺾었다. 마라카낭의 열네 달 전까지 흰 셔츠는 브라질이 안방에서 이길 때 입던 옷이었다. 90분 만에 같은 옷이 불운의 원인이 됐다.
1953년 《Correio da Manhã》가 국기의 네 가지 색을 모두 쓰라는 조건으로 새 유니폼 공모전을 열었다. 당선자는 열아홉 살의 신문 삽화가 아우지르 가르시아 슐레이(Aldyr Garcia Schlee; 브라질 삽화가·작가, 1934-2018)였다. 노란 셔츠에 초록 깃, 파란 바지, 흰 양말. 대표팀이 이 옷을 처음 입은 것은 1954년 3월 칠레전으로, 패배로부터 네 해가 지난 뒤였다.
슐레이는 우루과이 국경에 붙은 자구아랑(Jaguarão; 우루과이와 국경을 맞댄 브라질 남부 도시) 출신이었고, 평생 우루과이를 응원했다. 브라질과 우루과이가 맞붙는 날이면 자신이 만든 노란 셔츠 대신 하늘색 셔츠를 입고 국경을 넘어가 경기를 봤다. 우루과이가 벗겨낸 셔츠의 후임을 우루과이 편인 사람이 그린 셈이다.[20]
흰색이 다시 대표팀에 돌아온 것은 예순아홉 해 뒤다. 2019년 6월 15일 코파 아메리카 볼리비아전에서 브라질은 1919년 첫 우승 100주년 기념 유니폼으로 흰색과 파란색 셔츠를 입었다. 1950년 이후 처음이었다. 다만 그것은 한 대회를 위한 특별판이었지 원래 색의 복귀는 아니었다. 노란 셔츠는 그대로 남았고, 흰 셔츠는 기념할 때만 잠깐 꺼내는 옷이 됐다.[21]
한국은 이 대회에 없었다. 첫 월드컵 참가는 네 해 뒤 1954년 스위스 대회이고, 첫 상대는 매직 마자르(Aranycsapat; ‘황금 팀’이라 불린 1950년대 헝가리 대표팀)였다. 결과는 0-9였다. 그 팀이 왜 그렇게 강했는지는 다음 대회의 기록에서 다시 다룬다.
출처와 기록 기준
- 「1950 FIFA World Cup」. 1946년 룩셈부르크 총회의 개최지 결정과 대회 형식.
- 「World Cup 1950 finals」, RSSSF. 기권 국가, 조 편성, 경기 결과.
- 「Not barefoot, but cold feet」, Scroll.in. 인도축구연맹의 실제 기권 사유와 맨발 전승의 형성 과정.
- 「70 years on from the Superga air disaster」, FIGC. 그란데 토리노와 1950년 이탈리아 대표팀의 선박 이동.
- 「Maracanã Stadium」. 1950년 6월 16일 개장과 미완공 상태.
- 「1950 FIFA World Cup final round」. 최종 리그전 순위와 승점.
- 「Glorious Gaetjens upsets old order」, FIFA. 미국 1-0 잉글랜드.
- 「FIFA World Cup All-Star Team」, FBref. 후대에 정리된 1950 올스타 명단.
- 「1950 FIFA World Cup」·플라비우 코스타의 디아고나우에 관한 전술사 자료. WM 변형과 4-2-4로 이어지는 경로.
- 「Zizinho: the master who preceded the king」, FIFA. 부상 복귀와 유고슬라비아전.
- 「Uruguay's stunning upset of Brazil」, FIFA. 최종전 진행과 경기 후 마라카낭.
- 「Korean War begins」.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남침 개시.
- 「Kum River」,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7월 16일 금강 방어선 붕괴와 19연대의 손실.
- 「6·25 전쟁 연표」, 국가기록원. 1950년 7월 16일 정부의 대전-대구 이전.
- 「1950 El Maracanazo」. 《Dossiê 50》의 자살 전승 검증.
- 「Moacir Barbosa」. 1993년 훈련장 방문과 2000년 발언.
- 한반도 사진 두 장은 미국 정부 저작물로 퍼블릭 도메인이다. 1950년 7월 15일 금강 인근의 미군 포반은 미 육군 통신대 촬영이고, 1950년 여름의 피란민 행렬은 미 국방부 자료다.
- 브라질 본문 사진 네 장은 브라질 국립문서보관소(Arquivo Nacional)와 《El Gráfico》의 퍼블릭 도메인 자료다. 프리아사의 골, 개막식, 멘지스 지 모라이스 초상, 잉글랜드-미국전.
- 「Azarada? A história da camisa branca da seleção brasileira」, 《Placar》. 흰 셔츠가 희생양이 된 과정과 퇴출.
- 「Aldyr Schlee, designer of Brazil's famous yellow jersey, dies」, BBC. 1953년 공모전 당선과 자구아랑 출신 배경, 우루과이 응원.
- 「Seleção's return to white kits」, ESPN. 2019년 코파 아메리카 100주년 기념 흰색 유니폼.
-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당대 베스트 11」, 삥이N스포츠_Official. 최초 구성과 표지, 선수 사진, 마라카낭 항공사진.
1950년에는 오늘날과 같은 공식 베스트 11 시상이 없었다. 명단의 성격과 실제 출전·득점 기록을 분리해 검증했으며, WM 배치의 좌우 위치는 서로 다른 대형을 쓰던 네 나라의 선수를 한 그림에 세우기 위한 회고적 배열이다. 관중 수는 공식 유료 인원과 총원 추정치가 자료마다 다르므로 본문에 모두 적었다. 사진은 1950년 전후에 공표된 당대 자료다. 브라질 저작권법은 사진 저작물을 공표 이듬해부터 70년까지 보호하므로 이 시기의 사진은 원산지에서 보호기간이 끝났다. 개별 촬영자를 특정하지 못한 자료가 있으며, 권리자의 정정·삭제 요청은 문의 페이지로 접수한다. 본문의 프리아사 득점·개막식·멘지스 지 모라이스 초상·잉글랜드전 사진은 Wikimedia Commons에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된 브라질 국립문서보관소와 《El Gráfico》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