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한 시즌을 보낸 팀은 어디였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버려야 할 습관이 하나 있다. 2020년대의 축구 지도를 들고 1960년대의 축구를 보는 습관이다.

지금은 남미에서 열여덟 살짜리 특급 선수가 등장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드리드, 맨체스터, 런던, 파리로 향한다. 유럽에는 막대한 방송권료와 자본이 집중됐고, UEFA 챔피언스 리그(UEFA Champions League)는 오늘날 사실상의 세계 최고 클럽대항전으로 기능한다.

펠레(Edson Arantes do Nascimento, 브라질 축구선수·공격수, 1940-2022)와 가린샤(Manuel Francisco dos Santos, 브라질 축구선수·오른쪽 윙어, 1933-1983)가 뛰던 시대에는 세계 최고의 남미 선수가 자국 클럽에서 전성기를 보내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UEFA의 집계상 1982 FIFA 월드컵 이전까지 브라질의 월드컵 본선 명단에는 유럽 클럽 소속 선수가 한 명도 없었다. 유럽으로 건너간 선구자도 있었지만, 최정상급이면 어린 나이에 유럽으로 이동하는 오늘날의 경로가 아직 법칙은 아니었다.

이 한 가지 차이만 놓쳐도 1962년 산투스 FC(Santos FC)의 브라질 국내대회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Copa Libertadores de América; 남미 각국의 최상위 클럽들이 겨루는 대륙선수권)는 실제보다 작아 보인다. 오래된 팀을 비교하는 일은 기록을 현재의 서열표에 끼워 넣는 작업이 아니라, 그 기록을 만든 축구의 지도를 먼저 되찾는 작업에 가깝다.

대회 방식도 지금과 달랐다. 당시 유러피언컵(European Cup;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은 현재처럼 여러 강호가 하나의 리그 페이즈를 거친 뒤 토너먼트로 들어가는 구조가 아니었다. 참가 자격부터 매우 좁았고, 대부분의 단계가 홈 앤드 어웨이 녹아웃 방식이었다.

반대로 남미에서는 다른 종류의 난도가 있었다. 긴 이동거리와 서로 다른 기후, 고도, 경기 환경을 넘나들어야 했고, 오늘날처럼 대륙의 최상급 선수 대부분이 유럽으로 빠져나간 뒤 치르는 대회도 아니었다. 20세기의 유럽대항전과 남미대항전 가운데 어느 쪽이 일률적으로 ‘더 어려웠다’고 단정하는 것보다는, 어려움의 종류가 달랐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그래서 이 글은 승률 하나로 팀을 줄 세우는 대신 다음 다섯 항목을 함께 평가한다.

평가 항목 판단 기준
통계적 지배력 승률, 패배 수, 득실차, 대회별 기록
트로피 완성도 참가한 주요 대회 가운데 얼마나 많은 대회를 우승했는가
상대 난이도 우승 과정에서 만난 상대가 당시 어느 수준이었는가
세계 검증 다른 대륙의 챔피언과 직접 경쟁할 기회가 있었는가
역사적 의미 전술·선수육성·지역축구·후대에 무엇을 남겼는가

비교에는 일정 체계의 차이라는 문제도 있다. 유럽은 1966-67처럼 하나의 시즌이 비교적 명확하게 나뉘지만, 20세기 남미에서는 국내대회와 리베르타도레스, 인터콘티넨털컵(Intercontinental Cup; 남미 챔피언과 유럽 챔피언이 맞붙던 세계 클럽 정상 결정전)의 일정이 겹쳤고 일부 대회는 다음 해까지 넘어갔다.

1962 타사 브라질(Taça Brasil; 당시 브라질 전국 챔피언을 가리던 대회)이 대표적이다. 이름은 1962년 대회인데 최종 결정전은 일정 문제로 1963년까지 넘어갔다. 남미 클럽은 달력을 기계적으로 자르지 않고, 공식 귀속 연도와 실제 경쟁 사이클을 함께 보았다.

완전히 다른 시대에 축구를 했던 팀들을 하나의 숫자로 환원하는 대신, 한 축구팀은 자신에게 주어진 한 계절 동안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었는가를 물었다. 그 질문에 가장 설득력 있는 답을 남긴 열 팀이 아래의 순위다.


TOP 10 │ 한눈에 보기

순위 시즌 대표 성취
1 브라질 브라질 국기 산투스 FC 1962 주·전국·남미·세계 4단계 제패
2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AFC 아약스 1971-72 공식전 48경기 42승 5무 1패·트레블
3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국기 셀틱 FC 1966-67 참가한 5개 대회 전부 우승
4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AFC 아약스 1994-95 에레디비시·UEFA 챔피언스 리그 모두 무패
5 독일 독일 국기 FC 바이에른 뮌헨 2012-13 공식전 3패·독일 최초의 트레블
6 독일 독일 국기 FC 바이에른 뮌헨 2019-20 UEFA 챔피언스 리그 11전 11승·트레블
7 브라질 브라질 국기 상파울루 FC 1993 연간 97경기·국제대회 4관왕
8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CA 보카 주니어스 2000 리베르타도레스·아페르투라·세계 정상
9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CA 리버 플레이트 1986 아르헨티나·남미·세계 챔피언
10 스페인 스페인 국기 FC 바르셀로나 2008-09 스페인 축구 최초의 대륙 트레블

10위 │ 2008-09 FC 바르셀로나

B팀 감독이 1군에 올라와 첫 시즌에 트레블을 했다

2008-09시즌 스페인 최초의 대륙 트레블을 완성한 FC 바르셀로나 선수단
2008-09 FC 바르셀로나.

시즌 기록

경기 득점 실점 득실차
62 42 13 7 158 55 +103

우승

라리가(La Liga)
코파 델 레이(Copa del Rey)
UEFA 챔피언스 리그

핵심 인물

인물 국적 포지션·직군 역할
펩 과르디올라 스페인 스페인 국기 감독 1군 첫 시즌에 전술 구조 재편
세르히오 부스케츠 스페인 스페인 국기 DM 1군 첫 시즌부터 후방 연결
차비 에르난데스 스페인 스페인 국기 CM 경기 속도와 패스 방향 조절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스페인 스페인 국기 CM / AM 압박 탈출·전진 연결
리오넬 메시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RW / CF 오른쪽과 중앙을 오가며 공격 중심
사뮈엘 에토 카메룬 카메룬 국기 CF 득점·전방 압박
티에리 앙리 프랑스 프랑스 국기 LW / CF 왼쪽 침투·득점

2008년 여름, 과르디올라는 증명된 감독이 아니었다

2008년 여름의 바르셀로나는 우리가 지금 기억하는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가 아니었다. 직전 시즌 주요대회 무관이었고, 호나우지뉴와 데쿠를 내보냈다. 과르디올라는 직전 1년 동안 바르셀로나 B를 맡았던 것이 감독 경력의 전부에 가까웠는데, UEFA도 그가 1부 리그 감독 첫 시즌에 트레블에 도전했다는 사실을 당시부터 큰 이야기로 다뤘다.

시작도 썩 좋지 않았다. 라리가 개막전에서 CD 누만시아(CD Numancia)에 0-1로 졌고 두 번째 경기에서는 라싱 산탄데르(Racing de Santander)와 1-1로 비겼다. 훗날의 역사를 모른 채 당시 신문만 읽었다면 ‘B팀 감독을 너무 빨리 1군에 올린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출발이었다.

과르디올라는 메시를 오른쪽 윙어에 고정하지 않았다. 특히 중요한 경기에서는 메시가 중앙으로 내려가며 상대 센터백의 기준점을 흐렸고, 차비와 이니에스타가 그 주변에서 패스 선택지를 늘렸다. 폴스 나인(false nine; 명목상 최전방 공격수가 미드필드 방향으로 내려와 상대 중앙수비의 판단을 어렵게 만드는 역할)이 당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도 이 팀의 영향이 컸다.

2009년 5월 2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이 구조가 가장 잔인하게 드러났다. 레알 마드리드가 먼저 득점했지만 바르셀로나는 메시가 중앙으로 사라질 때마다 수비의 기준점을 빼앗았고, 원정 전광판에 2-6을 남겼다. ‘B팀 감독을 너무 빨리 올렸다’던 의심은 이 밤을 지나며 전술사의 질문으로 바뀌었다. 상대는 메시를 윙어로 막아야 했을까, 중앙 공격수로 막아야 했을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훨씬 더 까다로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 클럽은 유럽대항전에서 강력했다. 준결승에는 바르셀로나를 제외하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Manchester United FC), 첼시 FC(Chelsea FC), 아스널 FC(Arsenal FC)가 올라왔다. 결승 상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전년도 챔피언이자 UEFA 챔피언스 리그 시대 최초의 2연패를 노리던 팀이었다.

알렉스 퍼거슨 경(Sir Alexander Chapman Ferguson, 스코틀랜드 축구선수·감독, 1941-)에게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Cristiano Ronaldo dos Santos Aveiro, 포르투갈 축구선수·공격수, 1985-), 웨인 루니(Wayne Mark Rooney, 잉글랜드 축구선수·공격수, 1985-), 리오 퍼디낸드(Rio Gavin Ferdinand, 잉글랜드 축구선수·센터백, 1978-), 네마냐 비디치(Nemanja Vidić, 세르비아 축구선수·센터백, 1981-)가 있었다.

로마 결승의 첫 10분은 오히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거칠게 밀어붙였다. 에토가 선제골을 넣자 경기의 공기가 바뀌었고, 후반에는 169cm의 메시가 퍼디낸드와 비디치 사이에서 헤더로 쐐기를 박았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클럽 최초의 리그·국내컵·유러피언컵 동시 우승팀이 됐다. 몇 달 뒤 슈퍼컵 두 개와 FIFA 클럽 월드컵까지 가져가 2009년 6관왕으로 불렸지만, 이미 5월의 로마에서 과르디올라가 1군 감독 첫해에 무엇을 바꾸었는지는 충분히 끝난 이야기였다.


9위 │ 1986 CA 리버 플레이트

아르헨티나의 거인이 처음으로 남미의 거인이 된 해

1986년 국내와 남미, 세계 정상에 오른 CA 리버 플레이트 선수단
1986 CA 리버 플레이트.

주요 3대회 기록

대회 경기 득점 실점 결과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36 23 10 3 74 26 우승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3 9 3 1 23 8 우승
인터콘티넨털컵 1 1 0 0 1 0 우승
합계 50 33 13 4 98 34

리베르타도레스 13경기 9승 3무 1패, 23득점 8실점은 대회 결과 자료에서 확인된다.

핵심 인물

인물 국적 포지션
엑토르 베이라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감독
네리 품피도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GK
오스카르 루헤리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CB
넬손 구티에레스 우루과이 우루과이 국기 CB
엑토르 엔리케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CM
노르베르토 알론소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AM
후안 힐베르토 푸네스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CF
안토니오 알사멘디 우루과이 우루과이 국기 FW

1986년이라는 숫자를 보면 대부분 마라도나부터 떠올린다. 그런데 클럽 축구에서도 아르헨티나는 특별한 해를 보냈다. 리버의 품피도, 루헤리, 엔리케는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FIFA 월드컵을 우승한 뒤 소속팀으로 돌아와 리베르타도레스까지 차지했다.

리버 자체에도 오래된 숙제가 있었다. 국내에서는 이미 아르헨티나 축구의 거인이었지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은 없었다. 구단 공식 역사도 1986년을 리버가 처음으로 남미 정상에 오른 해로 기록한다.

결승 상대 아메리카 데 칼리(América de Cali)도 설명이 필요하다. 이 팀은 1985년에 이미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 올라왔고, 1986년 리버에게 진 뒤 1987년에도 다시 결승으로 돌아왔다. 3년 연속 남미 최종 무대에 오른 콜롬비아의 강호였다.

리버는 칼리 원정에서 2-1로 이겼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푸네스의 골로 다시 1-0 승리를 거뒀다. 첫 리베르타도레스였다.

그 뒤 도쿄에서 만난 상대를 ‘루마니아 팀’이라고 적으면 역사를 거의 지워버리는 셈이다.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FC Steaua București)는 그해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FC 바르셀로나를 꺾은 동유럽 최초의 유러피언컵 챔피언이었다. 헬무트 두카담(Helmut Duckadam, 루마니아 축구선수·골키퍼, 1959-2024)은 승부차기에서 바르셀로나의 네 차례 킥을 모두 막았다. UEFA가 지금도 따로 ‘기적’으로 다룰 만큼 충격적인 우승이었다.

도쿄에서는 알사멘디가 골키퍼를 넘긴 공을 끝까지 따라가 머리로 밀어 넣었고, 리버는 1-0으로 이겼다. 리그 우승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던 구단의 빈칸이 한 해에 연달아 사라졌다. 첫 리베르타도레스, 첫 세계 정상. 더구나 마지막 문을 지키고 있던 팀은 이름 없는 동유럽의 복병이 아니라, 몇 달 전 바르셀로나의 승부차기 네 번을 모조리 막아 유럽을 뒤집어 놓은 챔피언이었다.


8위 │ 2000 CA 보카 주니어스

유럽으로 돈이 몰리기 시작한 시대에도, 세계 최강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00년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세계 정상에 오른 CA 보카 주니어스 선수단
2000 CA 보카 주니어스.

연간 기록

경기 득점 실점
61 34 18 9 127 63

주요 우승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아르헨티나 아페르투라(Apertura)
인터콘티넨털컵

핵심 인물

인물 국적 포지션
카를로스 비안치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감독
오스카르 코르도바 콜롬비아 콜롬비아 국기 GK
호르헤 베르무데스 콜롬비아 콜롬비아 국기 CB
마우리시오 세르나 콜롬비아 콜롬비아 국기 DM
후안 로만 리켈메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AM
기예르모 바로스 셸로토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FW / RW
마르틴 팔레르모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CF

2000년 11월 28일 도쿄. 마르틴 팔레르모가 레알 마드리드의 골문에 첫 골을 넣기까지 3분도 걸리지 않았고, 두 번째 골까지 더해졌을 때 경기 시계는 아직 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상대 명단에는 피구, 라울, 호베르투 카를루스, 마켈렐레, 카시야스가 있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이 자기소개를 시작하기도 전에 보카가 두 골을 앞서 있었다.

루이스 피구(Luís Filipe Madeira Caeiro Figo, 포르투갈 축구선수·윙어, 1972-), 라울 곤살레스(Raúl González Blanco, 스페인 축구선수·공격수, 1977-), 호베르투 카를루스(Roberto Carlos da Silva Rocha, 브라질 축구선수·왼쪽 수비수, 1973-), 클로드 마켈렐레(Claude Makélélé Sinda, 프랑스 축구선수·미드필더, 1973-), 이케르 카시야스(Iker Casillas Fernández, 스페인 축구선수·골키퍼, 1981-)가 있었다.

남은 시간은 후안 로만 리켈메의 것이었다. 그는 상대가 달려들기 전에 공을 처리하는 대신, 달려오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몸으로 한 번 가리고 반대편을 열었다. 호베르투 카를루스를 향해 50m 가까운 패스를 떨어뜨려 팔레르모의 두 번째 골을 만든 장면과, 피구를 등진 채 공을 빼앗기지 않던 장면은 같은 능력의 두 얼굴이었다. 레알은 한 골을 만회했지만 경기의 속도만큼은 끝내 리켈메에게서 되찾지 못했다.

이 도쿄의 2-1을 보기 전에 보카가 무엇을 통과했는지도 빼놓기 어렵다. 22년 만의 리베르타도레스 도전에서 8강 상대는 리버 플레이트였고, 결승에는 디펜딩 챔피언 SE 파우메이라스(SE Palmeiras)가 기다렸다. 보스만 판결(Bosman ruling; 1995년 유럽사법재판소 판결로 계약 종료 선수 이동과 EU 역내 선수 국적 제한에 큰 변화를 가져온 판결) 뒤 돈과 선수는 빠르게 유럽으로 몰리고 있었지만, 세계 최강을 가리는 마지막 대답까지 유럽의 소유가 된 것은 아니었다.


7위 │ 1993 상파울루 FC

97경기를 뛴 팀에게 22패를 먼저 묻는 것은 조금 가혹하다

1993년 네 개의 국제대회 트로피를 차지한 상파울루 FC 선수단
1993 상파울루 FC.

1993년 연간 기록

경기 득점 실점
97 47 28 22 163 95

상파울루 구단이 집계한 1993년 전체 경기다. 유럽식 단일 시즌과 집계 단위가 다르므로 승률의 직접 비교보다 일정의 크기를 읽는 자료에 가깝다.

국제대회 4관왕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레코파 수다메리카나(Recopa Sudamericana)
수페르코파 수다메리카나(Supercopa Sudamericana)
인터콘티넨털컵

상파울루 공식 우승 기록에도 1993년 네 국제 타이틀이 확인된다.

핵심 인물

인물 국적 포지션
텔레 산타나 브라질 브라질 국기 감독
제치 브라질 브라질 국기 GK
카푸 브라질 브라질 국기 RB
레오나르두 브라질 브라질 국기 LB / LM
토니뉴 세레주 브라질 브라질 국기 CM
하이 브라질 브라질 국기 AM
뮐레르 브라질 브라질 국기 FW

1993년 9월 26일, 상파울루와 크루제이루는 한 경기를 치르고 기록지 두 장에 이름을 올렸다. 브라질 전국리그 경기이면서 동시에 레코파 경기였다. 국제대회 결승을 위한 빈 날짜조차 찾지 못해 한 경기에 두 대회의 의미를 겹쳐 놓았을 만큼, 텔레 산타나의 팀은 한 해에 97번 경기장으로 나갔다. 수페르코파도 이름만 보고 단판 슈퍼컵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역대 리베르타도레스 우승팀들을 다시 모아 치른 별도의 토너먼트였다.

원래 1992-93 유럽 챔피언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Olympique de Marseille)였으나 프랑스에서 발생한 승부조작 사건의 여파로 인터콘티넨털컵에 출전하지 못했고, 유럽 준우승팀 AC 밀란이 대신 나왔다.

‘준우승팀이 대신 나왔다’는 말에도 함정이 있다. 그 밀란은 바레시, 말디니, 코스타쿠르타, 드사이, 알베르티니, 도나도니, 파팽을 선발로 내보냈고, 1993년부터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세 시즌 연속 오른다. 이듬해에는 크라위프의 바르셀로나를 결승에서 4-0으로 부순 팀이다.

도쿄의 결승골은 86분에 나왔다. 뮐레르가 골키퍼와 충돌하듯 공을 밀어 넣어 3-2를 만들었다. 97경기의 마지막 국제무대에서도 상파울루는 다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이 팀의 22패는 흠을 세는 숫자가 아니라, 달력이 감당하지 못한 축구의 양을 먼저 묻게 만드는 숫자다.


6위 │ 2019-20 FC 바이에른 뮌헨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비기는 법조차 잊었다

2019-20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전승 우승과 트레블을 달성한 바이에른 뮌헨 선수단
2019-20 FC 바이에른 뮌헨.

시즌 기록

경기 득점 실점
52 43 4 5 159 50

우승

분데스리가(Bundesliga)
DFB-포칼(DFB-Pokal)
UEFA 챔피언스 리그

핵심 인물

인물 국적 포지션
한지 플리크 독일 독일 국기 감독
마누엘 노이어 독일 독일 국기 GK
다비드 알라바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국기 CB / LB
요주아 키미히 독일 독일 국기 DM / RB
티아고 알칸타라 스페인 스페인 국기 CM
토마스 뮐러 독일 독일 국기 AM / SS
세르주 그나브리 독일 독일 국기 RW / LW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폴란드 폴란드 국기 CF

2019년 11월 한지 플리크가 지휘봉을 잡았을 때 직함은 정식 후계자보다 임시 소방수에 가까웠다. 니코 코바치(Niko Kovač, 크로아티아 축구선수·감독, 1971-)가 떠난 뒤 잠시 벤치를 맡길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잠시’가 유럽대항전에서 한 번도 비기지 않는 팀을 만들었다. 코로나19로 대회가 중단되고 8강부터 리스본 단판 토너먼트로 바뀐 특수한 시즌이었지만, 형식이 바뀌었다고 11경기를 모두 이겨야 한다는 규칙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첼시와의 16강 두 경기를 모두 이긴 바이에른은 리스본에서 바르셀로나를 만났다.

경기 시작 31분 만에 스코어가 4-1이 됐다. 2020년의 바르셀로나가 2009년의 팀은 아니었어도 메시, 수아레스, 부스케츠, 피케가 선발로 서 있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에서 그 이름들을 상대로 여덟 골을 넣은 순간, 이 경기는 승리라기보다 한 시대의 강제 종료처럼 보였다.

결승에서는 파리 생제르맹의 네이마르(Neymar da Silva Santos Júnior, 브라질 축구선수·공격수, 1992-)와 음바페(Kylian Mbappé Lottin, 프랑스 축구선수·공격수, 1998-)를 노이어가 막았고, 파리에서 태어나 PSG 유소년팀에서 자란 킹슬리 코망이 친정팀의 골문에 결승골을 넣었다. 8-2 같은 폭발과 1-0 같은 인내를 모두 통과한 뒤에도 바이에른의 유럽 성적표에는 승리 말고 다른 단어가 없었다.


5위 │ 2012-13 FC 바이에른 뮌헨

세 번의 준우승을 당한 뒤, 거의 모든 기록을 부수고 돌아왔다

2012-13시즌 독일 클럽 최초의 대륙 트레블을 달성한 바이에른 뮌헨 선수단
2012-13 FC 바이에른 뮌헨.

시즌 기록

경기 득점 실점
54 46 5 3 151 33

분데스리가

29승 4무 1패리그 성적
승점 91당시 최고 기록
98-18득점-실점
+80득실차
25점2위와의 격차

핵심 인물

인물 국적 포지션
유프 하인케스 독일 독일 국기 감독
마누엘 노이어 독일 독일 국기 GK
필리프 람 독일 독일 국기 RB / LB
단치 브라질 브라질 국기 CB
하비 마르티네스 스페인 스페인 국기 DM / CB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독일 독일 국기 CM
토마스 뮐러 독일 독일 국기 AM / SS
프랑크 리베리 프랑스 프랑스 국기 LW
아리언 로번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RW

이 시즌의 출발점은 2012년 8월이 아니라, 홈구장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첼시와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을 치른 2012년 5월 19일이다. 바이에른은 선제골을 넣고도 동점을 허용했고, 연장전에서는 로번의 페널티킥이 막힌 끝에 승부차기로 패했다. 분데스리가에서는 도르트문트에 왕좌를 내줬고 DFB-포칼 결승에서도 같은 상대에게 2-5로 졌다. 한 시즌에 리그, 국내컵, 유럽대항전에서 모두 준우승한 실패가 다음 시즌의 기준점이 됐다.

그리고 국내에서 바이에른의 왕좌를 빼앗은 팀은 위르겐 클로프(Jürgen Norbert Klopp, 독일 축구선수·감독, 1967-)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Borussia Dortmund)였다. 도르트문트는 분데스리가를 2연패했고, 2012 DFB-포칼 결승에서는 바이에른을 5-2로 이겼다.

그 다음 시즌 바이에른은 리그에서 한 번만 졌고, UEFA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에서는 2012-13 라리가를 승점 100으로 우승한 바르셀로나를 만났다. 상대를 이미 황금기가 끝난 팀으로 축소해서는 이 준결승의 충격을 설명할 수 없다.

웸블리 결승에서는 전년도 국내 왕좌를 빼앗았던 도르트문트를 다시 만났고, 89분 로번의 결승골로 2-1 승리를 거뒀다. UEFA가 이 경기를 2010년과 2012년의 결승 패배를 끝낸 순간으로 기록하는 이유다. 이어 DFB-포칼까지 들어 올리면서 바이에른은 독일 클럽 최초의 대륙 트레블을 완성했다.

이 팀은 성적도 무섭지만, 바로 전 시즌에 어디에서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알고 볼 때 훨씬 재미있는 팀이다.


4위 │ 1994-95 AFC 아약스

밀란을 세 번 만났고 세 번 모두 이겼다

1994-95시즌 에레디비시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무패를 기록한 아약스 선수단
1994-95 AFC 아약스.

시즌 기록

경기 득점 실점
49 37 11 1 134 35

핵심 인물

인물 국적 포지션
루이 판 할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감독
에드빈 판데르사르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GK
다니 블린트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CB / SW
프랑크 레이카르트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DM / CB
에드하르 다비츠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CM
클라렌서 세이도르프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CM
야리 리트마넨 핀란드 핀란드 국기 AM / SS
마르크 오베르마르스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LW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CF

1995년 5월 24일 빈. 결승 상대 밀란은 전년도에 크라위프의 바르셀로나를 4-0으로 부순 디펜딩 챔피언이었고, 3년 연속 이 무대에 올라온 팀이었다. 그런데 아약스에는 낯설 이유가 없었다. 같은 시즌 조별리그에서 이미 밀란을 두 번 만나 두 번 모두 2-0으로 이겼다. 결승은 세 번째 시험이 아니라, 앞선 두 승리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밤에 가까웠다.

0-0이 이어지던 70분, 루이 판 할은 열여덟 살 파트릭 클라위버르트를 투입했다. 84분 레이카르트의 패스를 받은 클라위버르트가 발끝으로 공을 밀어 넣었다. 노장 레이카르트가 친정팀 밀란의 수비 사이로 패스를 찔렀고, 아약스 유소년팀에서 올라온 십 대가 유럽 챔피언을 끝냈다. UEFA가 이 결승을 ‘세대교체’로 읽는 이유를 한 장면이 전부 설명한다.

더 기묘한 후일담은 반년 뒤에 온다. 12월 보스만 판결이 내려지면서 유럽 선수시장의 국경은 빠르게 느슨해졌고, 아약스처럼 자국 유소년을 중심으로 만든 팀이 전성기의 선수를 오래 묶어두기는 훨씬 어려워졌다. 보스만 하나가 아약스의 이후를 전부 설명하지는 않지만, 판결 직전 마지막 유럽 챔피언이 하필 이 팀이었다는 사실은 너무 절묘하다. 1995 아약스는 미래를 예고한 젊은 팀인 동시에, 다시 만들기 어려워질 클럽 구조가 남긴 마지막 걸작이었다.


3위 │ 1966-67 셀틱 FC

영국 클럽이 유러피언컵을 처음 들어 올린 날, 그 팀은 잉글랜드 팀이 아니었다

1966-67시즌 참가한 다섯 대회를 모두 우승한 셀틱 FC 선수단
1966-67 셀틱 FC.

시즌 기록

경기 득점 실점
62 51 8 3 196 48

참가한 다섯 대회, 다섯 우승

스코틀랜드 1부 리그(Scottish Division One)
스코틀랜드컵(Scottish Cup)
스코틀랜드 리그컵(Scottish League Cup)
글래스고컵(Glasgow Cup)
유러피언컵

국내리그·주요 국내컵·유러피언컵을 동시에 우승한 대륙 트레블(continental treble; 국내 최상위리그·주요 국내컵·대륙 최고 클럽대항전을 같은 시즌에 우승하는 것)의 최초 사례이며, 여기에 리그컵과 글래스고컵까지 붙었다. UEFA 역시 1971-72 아약스를 설명할 때 셀틱을 앞선 트레블 사례로 취급한다.

리스본 라이언스

인물 국적 포지션
조크 스타인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국기 감독
로니 심프슨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국기 GK
빌리 맥닐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국기 CB
토미 게멀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국기 LB
보비 머독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국기 CM
버티 올드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국기 CM
지미 존스턴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국기 RW
보비 레녹스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국기 FW
스티비 차머스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국기 CF

1967년 5월 25일, 리스본

셀틱이 처음 오른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만난 팀은 헬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 아르헨티나 출생 프랑스 축구선수·감독, 1910-1997)의 인테르였다. 1964년과 1965년 유럽 챔피언, 1967년 다시 결승. 산드로 마촐라(Sandro Mazzola, 이탈리아 축구선수·공격형 미드필더·공격수, 1942-)와 자친토 파케티(Giacinto Facchetti, 이탈리아 축구선수·왼쪽 수비수, 1942-2006)가 있던 ‘그란데 인테르’는 이 대회의 마지막 경기를 이미 너무 잘 아는 팀이었다.

시작 7분 만에 마촐라가 페널티킥을 넣었다. 하필 인테르에게 가장 먼저 주면 안 되는 골이었다. 에레라의 팀은 카테나초(catenaccio; 이탈리아어로 ‘빗장’, 최후방 수비수와 조직적 수적 우위를 이용해 위험 지역을 통제하는 전술 체계)라는 한 단어보다 훨씬 정교하게, 앞선 뒤 상대가 조급해지는 시간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셀틱은 그 시간을 인테르에게 주지 않았다. 계속 전진했고, 계속 슈팅했고, 토미 게멀이 동점을 만든 뒤 84분 스티비 차머스가 방향을 바꾼 공이 골문으로 들어갔다.

유럽의 왕조를 꺾은 선수들의 출생지를 지도에 찍으면 이야기는 더 이상해진다. 결승에 나선 열한 명은 모두 셀틱 파크에서 30마일 안쪽에서 태어났다. 세계 각지에서 완성된 선수를 데려온 팀이 아니라, 글래스고와 그 주변에서 자란 선수들이 유럽 챔피언이 됐다. 그날 이후 이들은 팀명이 아니라 ‘리스본 라이언스’라는 별개의 이름으로 불렸다.

영국 클럽의 유럽 정복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역사였다. 토트넘이 1963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European Cup Winners’ Cup)으로 첫 문을 열었고 웨스트햄도 1965년 같은 컵을 들었다. 그러나 가장 큰 트로피를 처음 영국으로 가져온 도시는 런던도 맨체스터도 아닌 글래스고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잉글랜드 최초 우승은 그다음 해에 왔다.

1971년 암스테르담의 조크 스타인
AFTER LISBON · 25 MAY 1967

“John, you're immortal now.”

“존, 이제 자넨 불멸이야.”
빌 섕클리가 조크 스타인에게
조크 스타인, 1971년 암스테르담. Anefo·네덜란드 국립기록원, CC0.

경기가 끝난 뒤 빌 섕클리(Bill Shankly, 스코틀랜드 축구선수·감독, 1913-1981)가 조크 스타인에게 건넸다고 전해지는 말이다. 훗날 알렉스 퍼거슨은 스코틀랜드 대표팀에서 스타인을 보좌했고, 1985년 스타인이 경기 도중 쓰러졌을 때도 곁에 있었다. 셀틱의 리스본을 따라가다 보면 리버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역사까지 한 줄로 이어진다. 참가한 다섯 대회를 모두 우승했다는 표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 시즌의 진짜 크기다.


2위 │ 1971-72 AFC 아약스

48경기를 했고, 딱 한 번 졌다

1971-72시즌 공식전 한 경기만 패하고 트레블을 달성한 아약스 선수단
1971-72 AFC 아약스.

시즌 기록

경기 득점 실점 득실차
48 42 5 1 135 28 +107

우승

에레디비시(Eredivisie)
네덜란드컵(KNVB Beker)
유러피언컵

핵심 인물

인물 국적 포지션
슈테판 코바치 루마니아 루마니아 국기 감독
뤼트 크롤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LB / SW
바리 훌스호프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CB
요한 네이스컨스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CM
헤리 뮈런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CM
요한 크라위프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CF / AM
피트 케이저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LW

1972년 5월 31일, 결승 장소는 로테르담의 더 카위프였다. 네덜란드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결승에 아약스와 인테르가 들어왔으니 대진표부터 전술사 교과서처럼 보였다. 한쪽에는 선수를 위치에 묶어두지 않는 아약스, 다른 쪽에는 위험 지역을 잠그는 법으로 한 시대를 지배한 인테르가 있었다. 크라위프는 후반에 두 골을 넣었고, 두 번째 골 뒤에는 골대 안으로 들어간 공보다 인테르 수비수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이 더 오래 남는다.

토털 풋볼(totaalvoetbal; 선수를 특정 위치에 고정하기보다 공간을 기준으로 움직이게 하고 한 선수가 비운 위치를 다른 선수가 메우며 팀의 구조를 유지하는 축구 사상)을 ‘아무나 아무 데나 뛰는 축구’로 기억하면 정반대로 이해한 셈이다. 크라위프가 비운 중앙을 누가 공격할지, 크롤이 전진한 뒤를 누가 메울지, 모든 선수가 다음 이동을 알고 있어야 자유가 가능했다. 무질서가 아니라 공유된 질서가 너무 촘촘해서 위치가 자유롭게 보였던 축구였다.

더 놀라운 것은 설계자 리뉘스 미헐스(Marinus Jacobus Hendricus Michels; 네덜란드 축구 선수·감독, 1928-2005)가 이미 바르셀로나로 떠난 뒤였다는 점이다. 후임 슈테판 코바치 아래에서 아약스는 약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리그·컵·유러피언컵을 한꺼번에 가져왔다.

이 우승은 단발성 절정도 아니었다. 아약스는 1971년 파나티나이코스를 꺾고 처음 유럽 정상에 오른 뒤 1972년 인테르, 1973년 유벤투스를 차례로 꺾어 유러피언컵 3연패를 완성했다. 이 글이 고른 1971-72시즌은 그 왕조의 두 번째 왕관이자 유일한 트레블 시즌이다. 페예노르트의 1970년 우승까지 합치면 네덜란드 클럽이 유러피언컵을 네 시즌 연속 독점했으니, 로테르담의 2-0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반짝 유행한 경기가 아니라 유럽의 지배 질서가 통째로 북해 쪽으로 이동한 장면이었다.


1위 │ 1962 산투스 FC

세계 최고의 선수가 세계 최고의 클럽 가운데 하나에서 뛰던 시대

1962년 브라질과 남미, 세계 정상에 오른 펠레 시대의 산투스 FC 선수단
1962 산투스 FC.

네 개의 왕관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Campeonato Paulista)
타사 브라질(Taça Brasil)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인터콘티넨털컵

FIFA의 산투스 역사에도 1962년 산투스가 주·전국·남미·세계 타이틀을 같은 해에 모두 차지한 유일한 브라질 클럽으로 정리돼 있다. 다만 산투스가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Torneio Rio-São Paulo)까지 우승했다는 일부 기록은 사실이 아니다. FIFA의 공식 산투스 우승 연혁에서 히우-상파울루 우승 연도는 1959·1963·1964·1966·1997이며 1962는 없다.

네 우승대회

대회 경기 득점 실점 결과
파울리스타 30 23 5 2 102 31 우승
타사 브라질 5 3 1 1 15 7 우승
리베르타도레스 9 6 2 1 29 11 우승
인터콘티넨털컵 2 2 0 0 8 4 우승
합계 46 34 8 4 154 53 4개 대회 모두 우승

핵심 인물

인물 국적 포지션
룰라 브라질 브라질 국기 감독
지우마르 브라질 브라질 국기 GK
마우루 하무스 브라질 브라질 국기 CB
지투 브라질 브라질 국기 CM / DM
멩가우비우 브라질 브라질 국기 CM
도르바우 브라질 브라질 국기 RW
페페 브라질 브라질 국기 LW
쿠치뉴 브라질 브라질 국기 CF
펠레 브라질 브라질 국기 FW / AM

1962 FIFA 월드컵 우승 브라질 대표팀 22명 가운데 7명이 산투스 소속이었다. 지우마르, 마우루, 지투, 멩가우비우, 페페, 펠레, 쿠치뉴. 월드컵 챔피언의 3분의 1이 같은 클럽으로 돌아가 다시 시즌을 이어갔다.

먼저 파울리스타부터 다시 보자

‘상파울루주 선수권’이라는 번역은 지금 독자에게 자꾸 하부 지역대회를 떠올리게 한다. 1962년에는 정반대였다. 전국리그 체제가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이었고, 파우메이라스·코린치앙스·상파울루 FC가 모인 파울리스타는 브라질 클럽 축구의 본무대였다. 산투스는 그 리그에서 102골을 넣었다.

전국 챔피언을 가리는 타사 브라질의 마지막 상대는 보타포구였다. 한쪽에는 펠레, 지우마르, 지투, 마우루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가린샤, 니우통 산투스(Nílton dos Santos, 브라질 축구선수·왼쪽 수비수, 1925-2013), 마리우 자갈루(Mário Jorge Lobo Zagallo, 브라질 축구선수·감독, 1931-2024)가 있었다. 몇 달 전 스웨덴과 칠레에서 월드컵을 연달아 제패한 대표팀의 핵심들이 둘로 갈라져 브라질 챔피언을 결정한 셈이다. 펠레가 유럽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상대가 약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당시 세계적인 재능이 어디에 모여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단서다.

페냐롤 - 아직 이 대회에는 다른 챔피언이 없었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는 1960년에 출범했고 첫 두 대회는 모두 CA 페냐롤(CA Peñarol)이 우승했다. 산투스가 처음 결승에 올라왔을 때 이 대회에는 페냐롤 말고 다른 챔피언이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페냐롤은 1961년 인터콘티넨털컵까지 가져간 세계 챔피언이었다. 도전자가 초대 왕조를 끌어내리는 결승이 평범하게 끝날 리 없었다.

‘병들의 밤’

1962년 8월 2일 빌라 벨미루. 관중석에서 날아든 병이 부심을 맞혔고, 판정 시비와 몸싸움으로 경기는 통제를 잃었다. 주심 카를로스 로블레스는 안전을 위해 경기를 사실상 끝내고도 선수들에게는 계속 뛰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관중은 3-3으로 우승한 줄 알고 돌아갔지만 다음 날 공식 결과는 페냐롤의 3-2 승리였다. 종료 뒤 이어진 플레이는 무효라는 보고가 나왔다. 산투스가 지금도 ‘아 노이치 다스 가하파다스(A Noite das Garrafadas; 병들의 밤)’라는 이름으로 따로 보존하는 사건이다.

결국 우승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세 번째 경기에서 정해졌다. 산투스는 3-0으로 이겨 첫 출전 만에 대회의 유일한 챔피언을 끌어내렸다. 보통이라면 여기서 한 시즌의 절정이 끝나지만, 이 팀에게는 유럽 챔피언을 상대하는 두 경기가 더 남아 있었다.

벤피카 - 레알 마드리드 왕조를 끊은 유럽 2연패 챔피언

벤피카는 포르투갈 챔피언이라는 소개로는 모자란 팀이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유러피언컵 5연패를 끝내고 1961년 바르셀로나, 1962년 레알 마드리드를 결승에서 차례로 꺾은 유럽 2연패 챔피언이었다. 스무 살 에우제비우(Eusébio da Silva Ferreira, 포르투갈 축구선수·공격수, 1942-2014)도 이미 그 공격의 중심에 있었다.

마라카낭 1차전은 산투스가 3-2로 이겼다. 한 골 차였으니 리스본에서는 벤피카가 뒤집을 수 있다는 계산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2차전 스코어는 산투스가 먼저 5-0까지 달아났다. 펠레는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유럽 챔피언의 홈 관중은 자기 팀이 아니라 원정팀의 세계 최고 선수를 보고 있었다.

벤피카 골키퍼 코스타 페레이라(Costa Pereira, 포르투갈 축구선수·골키퍼, 1929-1990)는 경기 뒤 펠레가 같은 행성에서 온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과장된 패자의 찬사처럼 들리지만, 그날 상대는 유럽의 평범한 강팀이 아니라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를 연달아 쓰러뜨린 챔피언이었다.

산투스는 브라질에서 월드컵 챔피언들이 갈라져 싸운 국내 경쟁을 이겼고, 남미에서는 페냐롤밖에 우승해 보지 못한 대회의 왕조를 끝냈으며, 마지막에는 유럽 2연패 챔피언을 홈과 원정에서 모두 꺾었다. 강한 팀을 많이 이겼다는 말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있다. 1962년의 축구가 마련할 수 있었던 모든 층위의 시험을 통과한 팀. 그래서 이 순위의 첫 자리는 산투스다.


왜 유명한 트레블 팀 몇몇은 빠졌는가

1998-9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009-10 인테르, 2014-15 바르셀로나, 2022-23 맨체스터 시티는 물론 1961 페냐롤과 1979 클루브 올림피아(Club Olimpia)도 충분히 후보가 될 수 있다. 다만 이 목록은 트레블 달성팀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명예의 전당이 아니라, 한 시즌의 지배력이 통상적인 우승의 범위를 어디까지 넘어섰는지를 비교한 순위다.

그래서 1971-72 아약스의 공식전 1패, 1966-67 셀틱의 참가 대회 전관왕, 1994-95 아약스의 리그·UEFA 챔피언스 리그 동시 무패, 2012-13 바이에른의 54경기 3패를 우선했다. 여기에 97경기의 과밀 일정을 견디며 국제대회 네 개를 차지한 1993 상파울루와 남미 정상에 오른 뒤 유럽 2연패 챔피언을 홈과 원정에서 모두 꺾은 1962 산투스처럼, 서로 다른 대회 구조 안에서 극단적인 우위를 남긴 시즌을 선택했다.


가장 완벽했던 열 번의 계절

순위 핵심 기록 역사적 의미
1 브라질 브라질 국기 1962 산투스 주·전국·남미·세계 제패 유럽 2연패 챔피언 벤피카까지 직접 격파
2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1971-72 아약스 42승 5무 1패 토털 풋볼의 경쟁력까지 완전히 증명
3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국기 1966-67 셀틱 5개 대회 전부 우승 영국 최초 유러피언컵·유럽 최초 대륙 트레블
4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기 1994-95 아약스 리그·UCL 무패 디펜딩 챔피언 밀란에 시즌 3전 3승
5 독일 독일 국기 2012-13 바이에른 54경기 3패 직전 시즌 3개 준우승 뒤 독일 최초 트레블
6 독일 독일 국기 2019-20 바이에른 UCL 11전 11승 UEFA 챔피언스 리그 전승 우승
7 브라질 브라질 국기 1993 상파울루 97경기·국제 4관왕 극단적 일정 속 밀란까지 격파
8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2000 보카 세계 정상전 레알 2-1 유럽 집중이 시작된 시대의 남미 세계 챔피언
9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1986 리버 국내·남미·세계 제패 구단 첫 리베르타도레스와 첫 세계 정상
10 스페인 스페인 국기 2008-09 바르셀로나 158득점·트레블 과르디올라 시대의 시작

이 열 팀은 같은 방식으로 완벽하지 않았다. 아약스는 거의 지지 않으면서 축구의 공간 사용법을 바꿨고, 셀틱은 참가한 대회를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으며, 1995년의 아약스는 유럽 챔피언을 한 시즌에 세 번 꺾었다. 상파울루는 달력이 무너질 만큼 많은 경기를 치르고도 국제대회 결승에서 계속 살아남았고, 두 바이에른은 각각 복수와 전승이라는 전혀 다른 얼굴로 트레블에 도달했다.

완벽한 시즌은 약점이 없던 계절이 아니라, 그 시대가 내놓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시험을 받고도 설명이 남는 계절에 가깝다. 그 기준에서 1962 산투스보다 긴 답을 가진 팀은 없었다. 월드컵 챔피언들이 갈라져 있던 브라질, 아직 페냐롤만 우승해 본 남미, 레알 마드리드의 왕조를 끝낸 벤피카의 유럽까지 모두 통과했다. 그래서 열 번의 계절을 다 돌아본 뒤에도 마지막 장면은 리스본의 전광판이다. 벤피카 2, 산투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