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역사를 펼치면 자주 같은 인과관계와 만난다. 영국이 축구를 만들었고, 철도 노동자와 선원, 교사와 상인이 제국의 교역망을 따라 세계 곳곳에 그 경기를 전했으며, 현지인은 이를 배워 자기 나라의 스포츠로 발전시켰다는 이야기다. 이 서사는 간결하고 익숙하다. 그러나 사실의 배열이 곧 인과관계의 증명은 아니다.
1863년 잉글랜드축구협회(The Football Association; The FA, 축구 규칙을 성문화한 잉글랜드의 행정기구)가 여러 형태의 풋볼 가운데 어소시에이션 풋볼(association football; 럭비 풋볼과 구분되는 현대 축구 종목)의 규칙을 성문화한 사실은 분명하다. 영국계 주민이 세계 여러 도시에서 클럽과 학교의 경기를 조직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규칙의 계보, 사람과 물자의 이동 경로, 현지 사회에서 대중문화가 형성된 원인을 하나의 ‘전파’라는 동사로 묶는 순간 서로 다른 역사적 층위가 사라진다.
그러나 규칙을 성문화한 역사와 한 사회가 축구를 자기 문화로 만든 역사는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전자만 반복하면 남미 사람들은 영국인이 건네준 공을 뒤늦게 배운 수동적인 학생으로 남는다. 경기장을 만들고, 관중 문화를 키우고, 지역의 정치와 계급·인종·도시 정체성을 축구에 이식한 사람들의 역사는 뒤로 밀린다.
매슈 브라운(Matthew D. Brown; 브리스틀대학교 라틴아메리카사 교수)은 이 익숙한 서술에 질문을 던졌다. 그의 비판 대상은 ‘영국인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식의 역전된 단정이 아니다. 첫째, 영국의 비공식 제국(British informal empire; 공식 식민통치 없이 경제·외교·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한 관계)과 축구 확산 사이의 인과관계가 실증되기보다 반복해서 전제됐다는 점. 둘째, 근거가 영문 신문과 영국계 공동체의 회고에 편중됐다는 점. 셋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사례를 남미 전체의 기원 서사로 일반화했다는 점이다.[1]
따라서 쟁점은 영국의 ‘기여 여부’가 아니라 설명의 단위와 증거의 질이다. 상인·철도·우편망이 사람과 공을 이동시킨 조건이었다는 사실과, 제국이 축구를 문화적 지배의 수단으로 계획하고 확산시켰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다. 브라운의 논문은 바로 이 미끄러짐을 멈춰 세운다.
통설을 검증할 가설로 되돌리기
브라운의 비판은 결론을 뒤집는 작업이 아니라, 결론에 이르는 증거의 사슬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이다.
교역망의 존재와 계획된 문화정책 사이의 인과가 입증되지 않았다.
행정 문서·기업 기록·정책 주체의 의도공식 제도의 기록이 제도 밖에서 열린 경기의 부재를 증명하지 않는다.
현지어 신문·비공식 팀·학교 밖 경기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개척자 서사가 대륙 전체로 확대됐다.
우루과이·칠레·페루 등 지역 비교1. ‘축구의 아버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아르헨티나에는 알렉산더 왓슨 허튼(Alexander Watson Hutton; 아르헨티나 축구 제도화에 관여한 스코틀랜드 출신 교육자), 브라질에는 찰스 윌리엄 밀러(Charles William Miller; 상파울루 태생의 브라질 축구 개척자)가 있다. 허튼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잉글리시 하이스쿨(Buenos Aires English High School; 허튼이 운영한 영어계 학교)을 운영했고, 1893년 아르헨타인 어소시에이션 풋볼 리그(The Argentine Association Football League; 오늘날 아르헨티나축구협회의 제도적 전신) 창설을 주도했다. 밀러는 잉글랜드 유학을 마치고 1894년 상파울루로 돌아와 공과 규칙서를 소개했으며, 상파울루 애슬레틱 클럽(São Paulo Athletic Club; SPAC, 밀러가 활동한 상파울루의 종합 스포츠클럽)에서 경기 조직과 리그 형성에 관여했다.[7][8]


서로 연결된 도시의 행위자들
규칙과 정기 경기를 제도화했다.
사람과 장비, 결과표의 이동을 가능하게 했다.
여러 집단의 이해와 즐거움이 만난 결과
경기의 참여 범위와 대표 대상을 넓혔다.
어떤 경험이 역사로 남을지를 결정했다.
두 사람의 제도적 공헌은 구체적이며 부정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이들이 ‘중요한 행위자’에서 ‘한 나라 축구의 유일한 아버지’로 바뀌는 서사적 도약이다. 제도 설립의 기록이 남았다는 사실은 그 제도 밖에서 공을 찬 사람들의 부재를 증명하지 않는다. 최초의 공식 경기와 최초의 실제 경기도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초기 기록을 남긴 언어가 영어였고, 클럽의 회의록과 신문, 회고록을 생산하고 보존한 집단도 주로 영국계 공동체였다. 선수와 경기 조직자가 기사를 쓰고, 그 기사가 훗날 역사가의 1차 자료가 됐다. 브라운의 표현을 빌리면 이들은 경기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역사가였다. 자기 경험을 기록할 수 있었던 집단의 시야가 도시 전체의 경험으로 확대된 셈이다.[3]
이 과정에서 설명하기 쉬운 한 명의 영웅은 복잡한 도시사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허튼과 밀러의 전기는 제도화의 일부를 선명하게 보여주지만, 그 선명함을 남미 축구 전체의 기원으로 확장해서는 안 된다. 영국인 개척자의 존재를 확인한 뒤 현지인, 다른 이민자 공동체, 기존 스포츠와 놀이, 지역마다 달랐던 수용 과정을 별도의 자료로 검토해야 한다.

2. 축구가 오기 전에도 남미 사람들은 놀고 있었다
축구 전파 서사의 가장 큰 맹점은 축구가 도착하기 전의 시간을 텅 빈 공간처럼 취급한다는 데 있다. 남미 사람들은 영국산 공이 항구에 내리기 전에도 달리고, 겨루고, 내기를 하고, 공동체의 축제를 열었다. 경마와 투계, 투우, 펠로타, 조정과 지역별 신체 활동은 도시와 농촌의 일상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서 ‘스포츠’라는 범주 자체도 역사화할 필요가 있다. 근대 스포츠는 규칙의 통일, 기록의 계량, 협회의 승인, 정기 대회 같은 조건으로 무엇이 스포츠인지를 분류했다. 이 기준에 맞지 않는 원주민·이베리아계 놀이가 비스포츠나 전근대적 오락으로 밀려난 것은 활동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분류 권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영국식 스포츠가 들어오기 전의 남미를 공백으로 보는 시선에는 이미 근대 스포츠의 정의가 숨어 있다.
브라운은 자신의 저서 《남미의 스포츠: 하나의 역사》(Sports in South America: A History; 매슈 브라운이 2023년에 펴낸 남미 스포츠 통사)에서 축구를 남미 스포츠의 출발점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늦게 등장해 기존 스포츠 문화를 흡수한 종목으로 배치한다. 축구가 압도적인 대중성을 얻은 것은 그것이 최초여서가 아니다. 1920-1930년대 도시화와 대중 언론, 학교와 군대, 클럽 조직을 타고 다른 놀이의 관중·공간·대표 기능을 빠르게 끌어안았기 때문이다.[2]
이 관점에 서면 질문이 달라진다. ‘누가 공을 가져왔는가’에서 ‘왜 하필 축구가 그토록 빠르게 현지의 삶을 장악했는가’로 이동한다. 답은 영국인의 영향력 하나가 아니라 노동과 여가의 변화, 항구도시의 성장, 이민과 인종 질서, 국가가 원한 시민의 몸, 신문이 만든 영웅을 함께 살펴야 나온다.
3. 항구와 철도, 이민자가 만든 도시의 경기
19세기 말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몬테비데오, 상파울루, 히우지자네이루는 대서양 세계와 촘촘히 연결된 도시였다. 영국 자본과 철도, 선박 회사가 축구의 물질적 이동 경로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철도망과 축구 클럽 수의 상관관계를 곧바로 영국 제국의 문화 정책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철도는 공과 선수를 운반했지만 그 경기에 의미를 부여한 주체까지 결정하지는 않았다.
리오데라플라타(Río de la Plata; 스페인어로 은의 강이라는 뜻의 거대한 하구)를 오간 증기선과 도시 철도는 원정 경기를 가능하게 했고, 전차는 관중이 다른 구역의 경기장을 찾아갔다가 같은 날 돌아올 수 있게 했다. 교통망은 리그의 공간을 확장했을 뿐 아니라 ‘우리 동네’와 ‘상대의 영토’를 체감하게 했다. 이동의 인프라가 소속감의 지리를 만든 것이다.[3]
경기의 확산은 영국인 공동체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현지 학교 학생, 도시 노동자, 크리오요(criollos; 식민지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유럽계 주민과 그 후손), 메스티소와 아프리카계 주민, 이탈리아·스페인·독일계 이민자가 공을 차기 시작하면서 축구의 언어와 몸짓은 빠르게 변했다. 상파울루의 공식 기억조차 1888-1909년 사이 신문에서 확인되는 축구 클럽이 700개가 넘는다고 기록한다. 한 명의 개척자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회적 증식이다.[8]

초기의 몇몇 클럽은 영어 이름과 영국식 회원 문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같은 도시에서도 클럽의 성격은 달랐다. 어떤 팀은 학교 동문회였고, 어떤 팀은 철도 회사와 연결됐으며, 다른 팀은 동네와 노동자의 소속감을 대표했다. 축구가 현지화된다는 것은 영국식 경기법을 능숙하게 복제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누가 함께 뛸 수 있는지, 어느 동네를 대표하는지, 승리가 누구의 자부심이 되는지를 새로 정하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 리오데라플라타 지역의 짧은 패스와 개인기, 브라질에서 인종의 경계를 밀어낸 선수들의 몸짓, 우루과이가 국가 규모를 뛰어넘어 조직한 대표팀 문화가 나타났다. 이것을 단순히 ‘영국 축구의 남미식 변형’이라고 부르면 변화의 주체를 놓친다. 남미는 축구를 수입한 뒤 장식만 바꾼 것이 아니라, 참여 자격과 관람 방식, 클럽의 대표 범위와 승리의 정치적 의미를 다시 만들었다.
‘남미’라는 한 단어 안에서도 축구는 다르게 제도화됐다
학교·철도·영국계 클럽
1893년 정기 리그
이민자 도시와 지역 리그항구·우편·종합 스포츠클럽
상파울루의 경기와 리그
계급·인종 경계의 재구성항구·철도·리오데라플라타 교류
대표팀과 국제대회
올림픽 성공과 국가 정체성발파라이소 항구·학교
도시별 협회의 경쟁
발파라이소와 산티아고의 분화4. 문명화의 도구가 국가의 얼굴이 되다
엘리트와 국가가 스포츠를 바라본 시선도 중요하다. 규율 있는 신체, 정해진 시간, 심판의 권위, 팀을 위한 희생은 근대 국가가 시민에게 기대한 가치와 잘 맞았다.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Domingo Faustino Sarmiento;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지낸 교육사상가)가 제시한 ‘문명과 야만’(civilización y barbarie; 유럽적 근대와 토착적 전통을 대립시킨 담론)의 이분법처럼, 19세기 남미 자유주의 엘리트는 유럽식 교육과 신체 규율을 국가의 진보와 연결했다. 학교와 군대, 체육 단체는 스포츠를 건강·질서·국방·애국심의 도구로 사용했다.
하지만 위에서 장려한 규율과 아래에서 경험한 즐거움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축구가 계급과 인종의 경계를 넘어 대중화되자 상층 엘리트는 오히려 테니스·승마·골프·럭비와 배타적 회원제 컨트리클럽으로 이동했다. 스포츠는 문명화의 도구였지만, 누가 그 문명의 공간을 점유할지는 통제할 수 없었다.[3]
관중석에서는 클럽이 동네와 계급, 인종과 이민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깃발이 됐다. 대표팀은 국가가 위에서 설계한 상징인 동시에, 사람들이 아래에서 국가를 상상하는 장면이 됐다. 브라운의 표현처럼 남미 축구는 이웃과 도시, 지역과 국가를 대표하는 여러 층위의 언어로 성장했다.[3]
그 변화는 국제대회에서 선명해졌다. 1910년 아르헨티나는 5월 혁명 100주년을 맞아 5월 혁명 100주년컵(Copa Centenario Revolución de Mayo; 5월 혁명 100주년을 기념한 국가대항전)을 열었다. 아르헨티나·우루과이·칠레가 참가한 시험 성격의 대회였다. 1916년에는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부로 첫 공식 남미선수권(Campeonato Sudamericano de Selecciones; 남미 국가대표선수권)이 개최됐다. 대회 기간 남미축구연맹(Confederación Sudamericana de Fútbol; CONMEBOL, 남미 축구를 관할하는 대륙연맹)이 창설되면서 국가 간 경쟁은 상설 제도로 굳어졌다.
1922년 히우지자네이루에서는 브라질 독립 100주년을 계기로 라틴아메리카 경기대회(Jogos Olímpicos Latino-Americanos; 브라질이 주최한 라틴아메리카 종합경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들은 유럽 대회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국가 기념일, 도시 기반시설, 외교와 대중 동원을 하나로 묶는 지역적 실험이었다. 스포츠는 이미 국가 간 경쟁과 남미 지역주의가 교차하는 정치적 무대였다.[4][5]
아르헨티나 5월 혁명 100주년. 남미 국가대항전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일회성 기념행사가 국제대회의 실험장이 됐다.아르헨티나 독립선언 100주년. 대회 기간 남미축구연맹이 창설됐다.
경쟁이 상설 대륙 제도로 전환됐다.브라질 독립 100주년. 스포츠와 국가 기념행사가 결합했다.
국가 기억·외교·도시 행사가 한 무대에 놓였다.우루과이가 남미 축구의 축적을 세계 챔피언이라는 결과로 증명했다.
남미가 참가자를 넘어 세계대회의 주최자로 등장했다.5. 공보다 먼저 국경을 넘은 것은 정보였다
축구를 전파한 것은 배에 탄 몇 명의 영국인만이 아니었다. 규칙집과 전보, 신문 기사, 사진과 결과표가 국경을 넘었다. 아르헨티나의 《카라스 이 카레타스》(Caras y Caretas; 얼굴과 가면들이라는 뜻의 시사 화보지), 《엘 그라피코》(El Gráfico; 스포츠 영웅의 이미지를 구축한 아르헨티나 화보 잡지), 칠레의 《시그사그》(Zig-Zag; 칠레의 대표적인 대중 화보지) 같은 화보 매체는 운동하는 신체를 국가 색상과 영웅의 이미지로 재편집했다. 사람들은 글과 이미지로 축구를 먼저 상상한 뒤 운동장에서 그것을 자기 식으로 재현했다.
이때 자료의 ‘생존 편향’이 발생한다. 영국계 클럽은 상대적으로 문서화된 회의록과 영문 언론을 남겼고, 노동자·비백인·비공식 팀의 경기는 파편적으로만 기록됐다. 오늘날 연구자가 접근하기 쉬운 자료가 당시 가장 중요한 현실이었다고 착각하기 쉬운 구조다. 기록의 양은 영향력의 크기를 보여주는 지표일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유일한 기원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경기의 영향력보다 기록의 생존력이 역사를 좌우할 때
- 영국계 클럽의 공식 경기
- 영문 기사와 회의록 생산
- 문서와 사진의 보존
- 후대 연구가 반복 인용
- 공식 기원 서사로 정착
- 노동자·비공식 팀의 경기
- 산발적인 현지어 보도
- 클럽 문서의 소실
- 연구 자료에서 배제
- 역사적 부재로 오인
자료가 적다는 사실은 행위가 없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기록하고 보존할 권력이 달랐다는 신호일 수 있다.
그래서 축구사를 다시 쓰는 작업은 유명한 영국인 영웅을 현지 영웅으로 교체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스페인어·포르투갈어 신문, 지역 클럽 문서, 선수와 관중의 구술, 학교·노동·교통·도시의 역사를 교차 검증해야 한다. 자료가 없다는 말이 실제 행위가 없었다는 뜻인지, 기록과 보존의 권력이 없었다는 뜻인지도 구분해야 한다. ‘최초’라는 한 줄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축구에 부여한 의미의 층위를 복원하는 것이 먼저다.
6. 결승전의 두 공, 하나가 아니었던 축구
1930년 7월 30일,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첫 FIFA 월드컵(Coupe du Monde de la FIFA; 프랑스어로 FIFA 세계대회라는 뜻) 결승에서 만났다. 두 팀은 어느 나라의 공을 사용할지를 두고도 합의하지 못했다. 결국 전반에는 아르헨티나가 선택한 공, 후반에는 우루과이가 선택한 공을 사용했다. 아르헨티나는 전반을 2-1로 앞섰지만 우루과이가 후반 세 골을 넣어 4-2로 우승했다.[6]
이 대회는 갑자기 주어진 행운이 아니었다. 우루과이는 1924년 파리와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축구에서 연속 우승했고,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페루의 축구 행정가들은 몬테비데오 유치를 지지했다. 우루과이 정부는 독립 100주년과 세계대회를 연결해 센테나리오 경기장(Estadio Centenario; 독립 100주년을 뜻하는 몬테비데오의 국립경기장)과 주변 도시 기반시설을 건설했다. 첫 월드컵은 FIFA의 유럽 중심 확장만이 아니라 남미의 스포츠 외교와 국가 건설이 결합한 결과였다.[3]
공 두 개의 일화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같은 규칙 아래에서도 축구는 이미 하나의 중심이 정한 단일한 감각으로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남미의 두 국가는 유럽이 마련한 무대에 초대된 주변부가 아니었다. 지역 대회를 운영하고, 올림픽에서 경쟁력을 입증하고, 마침내 자국에서 세계대회를 성립시킬 만큼 독자적인 축구 세계를 구축한 주체였다.
첫 월드컵 결승의 두 공은 축구사의 은유처럼 보인다. 규칙은 하나였지만 공의 감촉과 경기의 기억, 그 경기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방식은 하나가 아니었다.
7. 축구의 기원보다 중요한 질문
영국 중심의 축구사를 비판한다고 해서 1863년의 규칙 성문화나 허튼과 밀러의 공헌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개척자 전기를 해체하는 것만으로 현지인의 역사가 자동으로 복원되는 것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공로의 삭제가 아니라 인과관계의 재검토, 자료 기반의 확장, 설명 규모의 조정이다. 영국인은 중요한 연결자였지만 모든 변화를 계획한 유일한 창조자는 아니었다.
남미 사람들은 축구를 받아들인 뒤 자기 도시의 갈등과 욕망을 그 안에 넣었다. 클럽을 만들고, 관중석의 언어를 만들고, 국제대회를 조직하고, 세계가 따라 읽을 전술과 선수를 만들었다. 1930년 우루과이의 우승은 영국 축구가 먼 대륙에서 성공적으로 복제됐다는 결말이 아니다. 남미가 축구의 의미를 다시 쓰고 세계사 한가운데로 들어온 결과다.
축구는 영국에서 시작됐지만,
그 역사는 영국에 의해 완성되지 않았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축구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가’가 아니다. 그 질문 자체가 복수의 행위자와 장기간의 사회 변화를 한 명의 남성 개척자로 환원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누가 기록을 남겼고, 누구의 기억은 자료가 되지 못했으며, 어떤 도시의 사례가 대륙 전체를 대표하게 됐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축구의 세계화는 중심에서 주변으로 완성품이 전달된 단선적 과정이 아니다. 규칙은 번역됐고, 제도는 협상됐으며, 경기의 의미는 현지 사회의 계급·인종·지역·국가 관계 속에서 다시 생산됐다. 축구의 역사는 공의 이동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소유할 권리가 이동한 역사이기도 하다.
잉글랜드에서 통일된 경기 규칙의 계보
남미의 도시와 공동체가 축구에 의미를 부여한 과정
누구의 경험이 자료로 남아 세계사의 표준이 됐는가
출처와 기록 기준
- Matthew Brown, “British Informal Empire and the Origins of Association Football in South America”, Soccer & Society 16(2-3), 2015.
- Matthew Brown, Sports in South America: A History, Yale University Press, 2023.
- Toynbee Prize Foundation, “The History of Modern Sports in South America: An Interview with Matthew Brown”.
- CONMEBOL, Guía Evolución CONMEBOL Copa América.
- Olympic Studies Centre, 1922 Latin American Games archival material.
- FIFA, “Quirky stories from FIFA World Cup finals”.
- Asociación del Fútbol Argentino, “Historia”.
- Museu do Futebol, Centro de Referência do Futebol Brasileiro: Charles Miller와 SPAC 자료.
- 원문: 삥이의 네이버 블로그, 「영국 중심 축구 역사 서술의 한계, 서술 권력의 문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