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4일, 브라질에서는 제4회 FIFA 월드컵이 막을 올렸다.
하루 뒤,
지구 반대편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다.
한 달 뒤,
달력이 7월 17일을 가리킬 무렵 대한민국은 금강 방어선에서 물러나 대전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된 것은 그보다 뒤인 8월 초였다. 같은 시각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는 우승을 확신한 약 20만 관중 앞에서 우루과이가 브라질을 2-1로 꺾었다. ‘마라카나수’(Maracanaço; 마라카낭의 충격 또는 비극)라 불리게 된 패배였다.[1][2]
브라질 골키퍼 모아시르 바르보자(Moacir Barbosa Nascimento;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골키퍼, 1921-2000)는 그날의 결승골 때문에 오랫동안 패배의 희생양으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충격 뒤 수십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신뢰할 만한 동시대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브라질은 1953년 새 유니폼 공모를 거쳐 노란색 상의와 파란색 하의를 택했고 1954년부터 새로운 색으로 월드컵에 나섰다.[1]
축구 때문에 세상이 무너진 듯했던 브라질과, 정말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던 대한민국. 두 나라는 같은 월드컵의 시간을 전혀 다르게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1954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11개월도 지나지 않은 대한민국은 폐허 속에서 조국의 자존심을 걸고 월드컵에 출전했다. 서울의 경기장과 운동장은 전쟁의 상처를 다 수습하지 못했고, 대표선수들은 군과 경찰, 기업, 학교 팀에 흩어져 있었다. 지금처럼 장기간 합숙하며 몸을 만드는 국가대표팀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쉽게 말해 이 팀은 안정된 리그가 길러 낸 완성품이 아니었다. 무너진 축구 체계를 급히 다시 잇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팀, 그 팀이 세계 최강들과 월드컵을 치르러 간 것이었다.[10]
한일전 승리,
최종 예선 상대는 하필 일본이었다. 해방 이후 9년,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나라에서 이 원정의 의미는 단순한 축구 경기를 넘어섰다. 당시 두 나라에 국교도 없었기 때문에 두 경기는 모두 도쿄 메이지진구 가이엔 경기장(明治神宮外苑競技場; 현재 국립경기장 자리에 있던 육상 경기장)에서 열렸다. 비와 진눈깨비가 뒤섞인 3월 7일 첫 경기에서 대한민국은 정남식과 최정민의 연속 득점을 앞세워 5-1로 이겼고, 3월 14일 두 번째 경기를 2-2로 비겼다. 합계 7-3. 일본 원정 두 경기에서 일곱 골을 넣고, 기어이 본선행 티켓을 가져왔다. 아시아 팀으로는 1938년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이어 두 번째, 동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이었다.[3]

당시의 절박함을 상징하는 말로 “일본에 패하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일화가 오래도록 전해진다. 여기서 현해탄은 대한해협(大韓海峽; 한반도와 일본 규슈 사이의 해협)을 가리키는 일본식 한자 지명에서 온 표현이다. 여러 후대 기사에서는 이 말을 이유형의 발언으로 소개한다. 다만 여기서 기록 한 번 정리하고 가자. 대한축구협회의 현재 역대 감독 기록은 예선 일본전을 배종호, 본선 대회를 김용식이 이끈 것으로 구분한다. 뜨거운 일화는 뜨거운 일화대로, 공식 직책은 공식 직책대로 읽어야 한다.[4]


월드컵만 준비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을 텐데, 당시 일정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대표팀은 5월 마닐라 아시안 게임에서 홍콩과 3-3으로 비기고 아프가니스탄을 8-2로 꺾은 뒤, 준결승에서 버마와 연장까지 2-2로 맞섰다. 결승에서는 중화민국에 2-5로 져 은메달을 얻었다. 이 대회 기간인 5월 7일에는 아시아축구연맹(Asian Football Confederation, AFC; 아시아 축구를 관할하는 대륙 연맹)도 마닐라에서 창립됐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은 아시아 축구의 새 질서가 만들어지는 현장에 있다가 귀국했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스위스로 떠난 것이었다.[11]
본선행은 따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스위스까지 갈 외화도, 전원이 함께 탈 좌석도 없었다. ‘미군 수송기’와 ‘48시간 비행’이라는 회고가 널리 따라붙지만, FIFA가 정리한 이동 기록은 더 복잡하고 비행시간도 약 65시간으로 적는다. 선수단은 6월 10일 서울에서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배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런데 도쿄에서 확보한 비행기는 전원을 태우지 못했다. 김용식 감독과 선수 12명은 캘커타로 향했으나 프로펠러 수리 때문에 다시 지체한 뒤 이탈리아를 거쳤다. 나머지 아홉 명은 방콕에서 6월 13일 유럽행 비행기를 기다렸다. 그 비행기조차 좌석이 모자랐다. 마침 영국인 부부가 자리를 양보해 주었고, 그제야 두 선수가 더 탈 수 있었다. 하늘에 떠 있던 시간만 약 65시간. 월드컵 한 경기보다 긴 비행을 마흔 번 넘게 이어 붙여야 나오는 시간이었다.[5]
짐도 장비도 넉넉하지 않았다. 훗날의 신문 기록에는 선수단이 외상으로 맞춘 양복을 입고 출국했고, 헝가리전을 앞두고는 빠져 있던 유니폼 번호를 천 조각과 핀으로 급히 붙였다는 회고가 남아 있다. 국가대표가 월드컵 첫 경기를 앞두고 유니폼 등번호부터 만들어 붙여야 했다. 정말 그리하였다. 물론 이 세부는 FIFA의 공식 이동 기록과는 성격이 다른 후대 증언이다. 그렇지만 ‘국가대표’라는 이름과 그 이름을 뒷받침할 물자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는 선명하게 보여준다.[12]
10시간 전
대한민국 대표팀이 취리히에 도착한 것은 첫 경기 전날 밤이었다. 국내의 여러 회고 기록에는 첫 경기까지 남은 시간이 고작 10시간 남짓이었다고 전해진다. 국가기록원은 조금 더 넓게 ‘경기 하루 전 도착’으로 기록하고, FIFA도 ‘전날 밤’이라고 설명한다. 어느 기록을 따르든 시차 적응도, 제대로 된 현지 훈련도 불가능한 일정이었다.[5][6]
그런데 하필 첫 상대는 당시 세계 최강 헝가리였다. 푸슈카시 페렌츠(Puskás Ferenc;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인사이드 레프트, 1927-2006), 코치시 샨도르(Kocsis Sándor Péter;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인사이드 라이트, 1929-1979), 히데그쿠티 난도르(Hidegkuti Nándor;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센터 포워드, 1922-2002), 보지크 요제프(Bozsik József;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라이트 하프, 1925-1978), 치보르 졸탄(Czibor Zoltán;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아웃사이드 레프트, 1929-1997), 그로시치 줄러(Grosics Gyula;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골키퍼, 1926-2014)가 버티던 아라니처파트(Aranycsapat; ‘황금 팀’)였다. 1952년 올림픽 챔피언이자 31경기 무패. 잉글랜드를 웸블리에서 6-3, 부다페스트에서 7-1로 뚜까 패고 월드컵에 온 팀. 그게 바로 당시의 헝가리였다.[7]
이름값보다 더 낯선 것은 움직임이었다. 히데그쿠티는 전통적인 최전방 자리에서 중원으로 내려오는 후퇴형 센터 포워드(deep-lying centre-forward; 최전방에서 중원으로 내려와 패스와 공간 창출을 맡는 공격수)였다. 쉽게 그려보면 이렇다. 대한민국 수비수가 그를 따라 나오면 푸슈카시와 코치시가 그 빈자리로 파고들었다. 그렇다고 자리를 지키면 히데그쿠티가 보지크와 함께 중원에서 숫자를 늘렸다. 따라가도 문제, 안 따라가도 문제였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가짜 9번(false nine; 중앙 공격수가 아래로 내려와 수비 대형을 끌어내는 역할)과 닮았지만, 당시 선수들이 그 현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세계 축구의 전술이 변하는 최전선과, 현지 훈련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대한민국이 첫 경기에서 정면으로 만났다.

6월 17일 오후 6시, 취리히 하르트투름(Hardturm; 당시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의 홈 경기장). 대한민국은 홍덕영, 박규정, 주장 민병대, 박재승, 강창기, 주영광, 정남식, 박일갑, 성낙운, 우상권, 최정민을 선발로 내보냈다. 푸슈카시가 11분에 첫 골을 넣었고, 코치시는 전반에 두 골을 넣은 뒤 후반 시작 4분 만에 해트트릭(hat-trick; 한 선수가 한 경기에서 세 골을 기록하는 것)을 완성했다. 치보르와 펄로타시 페테르도 뒤를 이었다.[8]
당시는 경기 중 선수 교체가 허용되지 않던 시대였다. 장거리 이동으로 지친 선수들에게 쥐와 근육통이 밀려와도 벤치의 새 선수를 투입할 수 없었다. 후대 기록에는 네 명이 더는 경기를 이어가지 못해 대한민국이 사실상 일곱 명으로 종료 휘슬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세계 최강을 만났는데 몸은 이미 천근만근이었고, 사람을 바꿀 수도 없었다. 당연히 초전박살이었다. 스코어는 0-9. 그러나 점수판에 담기지 않은 장면도 있었다. 헝가리의 공세가 끝없이 이어지는 동안 골키퍼 홍덕영(HONG Deokyeong;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골키퍼, 1921-2005)은 슈팅을 막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5][8][13]
홍덕영의 골문으로 아홉 골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 숫자만으로 그가 한 일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그날 세계 최강의 슈팅을 온몸으로 받아낸 대한민국 첫 월드컵 골키퍼였다.
천근만근
천근만근의 몸을 이끌고 헝가리전 사흘 뒤 튀르키예를 만났다. 페네르바흐체와 갈라타사라이의 선수들이 중심이 된 튀르키예에는 ‘교수’ 레프테르 퀴취칸도냐디스(Lefter Küçükandonyadis; 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 공격수, 1925-2012), 골키퍼 투르가이 셰렌(Turgay Şeren; 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 골키퍼, 1932-2016), 공격수 부르한 사르군(Burhan Sargın; 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 공격수, 1929-2023)이 있었다.
김용식 감독은 헝가리전 선발 가운데 일곱 자리를 바꿨다. 홍덕영과 박규정, 강창기, 우상권만 두 경기 연속 선발로 남았다. 전술적 선택이기도 했지만, 사흘 전의 소모를 견딜 수 있는 선수를 다시 골라야 했던 결정이기도 했다. 그런데 튀르키예 역시 대한민국을 봐줄 처지가 아니었다. 첫 경기에서 서독에 1-4로 졌기 때문에 탈락을 피하려면 대승이 필요했다. 지친 대한민국 앞에, 사정 봐줄 이유가 하나도 없는 상대가 서 있었던 셈이다.[8]
전반 10분 수아트 마마트가 첫 골을 넣었다. 24분 레프테르, 30분 수아트, 37분 부르한이 이어받아 전반에만 네 골이 들어갔다. 후반에는 부르한이 64분과 70분에 다시 득점해 해트트릭을 완성했고, 76분 에롤 케스킨이 일곱 번째 골을 넣었다. 대한민국은 0-7로 졌다.[8][14]
그런데 왜 같은 조의 서독과는 만나지 않았을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괴상한 대진표인데, 이유가 있었다. 1954년 조별리그에는 지금과 다른 시드(seed; 대진 편성을 위해 강팀을 미리 구분하는 제도) 방식이 적용됐다. 한 조의 네 팀 가운데 시드 팀은 비시드 팀하고만 두 경기씩 치렀다. 2조의 헝가리와 튀르키예가 시드, 서독과 대한민국이 비시드였으므로 대한민국과 서독의 맞대결은 애초에 대진표에 없었다. 승점이 같으면 골득실을 따지는 대신 별도의 플레이오프(play-off; 동률 팀의 진출자를 가리는 추가 경기)를 또 치렀다. 실제로 튀르키예와 서독은 조별리그가 끝난 뒤 다시 만났고, 서독이 7-2로 이겼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은 정말 두 경기로 끝났다.[8]
2패, 무득점, 16실점. 결과표만 보면 모든 문장이 패배로 끝난다.
다 져도 좋아.
그래도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이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냐?
그 한 골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도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폐허에서 모인 선수들은 일본을 넘어 세계로 갔고, 마닐라에서 아시아의 강호들과 싸운 뒤 배와 비행기를 갈아타며 경기 전날 밤 스위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당시 최강의 전술과 선수들 앞에 섰다. 그들이 처음 열어 놓은 길로 대한민국은 32년 뒤 다시 월드컵에 돌아왔고, 48년 뒤 첫 승리를 거뒀다.[9]
1954년의 16실점은 한국 축구의 결론이 아니었다. 세계와의 거리를 처음 온몸으로 잰 출발점이었다.
🏆1954 월드컵 전체 기록과 삥이가 고른 대회 베스트 11로 이어집니다.
출처와 기록 기준
- 「1950 FIFA 월드컵 우루과이 2-1 브라질: 마라카낭의 비극」, 삥이FC. 마라카나수와 흰색 유니폼에 관한 기록 검증.
- 「The Kum River Line」,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50년 7월 금강 방어선과 대전 전투.
- 「한국 축구 연혁 1948-1969」, 대한축구협회. 일본과의 예선 두 경기 및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 본선 참가.
- 「남자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대한축구협회. 1954년 예선 배종호, 본선 김용식의 공식 구분.
- 「Better to travel hopefully than to arrive?」, FIFA. 6월 10일 출발, 분산 탑승, 약 65시간의 비행과 경기 전날 밤 도착.
- 「힘겨웠던 한국의 월드컵 도전사」, 연합뉴스. 첫 경기까지 약 10시간이 남았다는 회고; 「기록으로 보는 월드컵」, 국가기록원. 경제 사정과 경기 하루 전 도착.
- 「Die Geburtsstunde der magischen Magyaren」, FIFA. 헝가리 황금 세대의 무패 기록.
- 「World Cup 1954 finals」, RSSSF. 대한민국-헝가리 및 대한민국-튀르키예 경기 기록.
- 「20년 전 오늘: 한국의 사상 최초 월드컵 첫 승」, FIFA. 1954년 첫 참가와 2002년 첫 승.
- 「전쟁의 폐허와 전후 복구」,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정전 직후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적 조건.
- 「Asian Games 1954」, RSSSF. 대한민국의 마닐라 아시안 게임 경기 결과와 AFC 창립 회의.
- 「대한민국 월드컵 도전사」, 조선일보. 출국복과 유니폼 번호에 관한 선수·수집가의 후대 회고.
- 「선수별 A매치 기록: 홍덕영」, 대한축구협회. 홍덕영의 생년과 국가대표 골키퍼 기록.
- 「A Milli Takım Tarihçesi 2」, 튀르키예축구협회. 1954년 대한민국전 득점자와 득점 시간.
- 원문: 「폐허 속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1954 FIFA 월드컵 도전기」. 본문 사진과 영상은 기존 원문 자산을 사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