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축구에서 가장 희귀한 물건은 반드시 가장 큰 트로피가 아니다.

빅이어(Coupe des Clubs Champions Européens; 유러피언컵 우승 트로피)처럼 누구나 알아보는 은빛 잔도 아니고, 한 시대를 지배한 팀만 유니폼에 달 수 있는 별도 아니다. 유럽축구연맹(Union des associations européennes de football, UEFA)이 1988년 유벤투스 FC에 건넨 것은 들어 올리는 컵이 아니라 벽에 거는 상패였다.

이름은 UEFA 플라크(The UEFA Plaque).

상패에 새겨진 문장은 짧았다.

Hommage
de l’UEFA à Juventus F.C.
Premier club ayant remporté les trois compétitions inter-clubs de l’UEFA

유럽축구연맹은 유벤투스 FC에 경의를 표한다.
UEFA의 세 클럽대항전을 모두 우승한 최초의 클럽.

유벤투스에 수여된 UEFA 플라크의 프랑스어 문구와 세 트로피 도안
1988년 유벤투스에 수여된 UEFA 플라크의 도안. 상단에는 세 UEFA 클럽대항전을 처음 모두 우승한 클럽이라는 헌사가, 하단에는 UEFA컵·유러피언컵·컵위너스컵 트로피가 차례로 새겨져 있다. 기존 원고 보관본.

그 아래에는 세 개의 대회명이 놓였다. 유럽 챔피언의 컵, 국내 컵 우승팀의 컵, 그리고 리그의 강호들이 다투던 UEFA컵. 오늘날의 시선으로는 모두 ‘유럽대항전’이라는 한 문장에 들어가지만, 당시에는 출전 자격과 권위, 참가하는 클럽의 신분부터 달랐다.

그러므로 플라크는 트로피 세 개를 모았다는 단순한 수집 인증서가 아니다. 유벤투스가 당시 유럽 축구에 존재하던 세 개의 서로 다른 문을 모두 열었다는 증명서였다.

UEFA 배지 오브 아너와 차이점

UEFA 플라크는 UEFA 배지 오브 아너(UEFA Badge of Honour)와 다른 표창이다.

배지 오브 아너는 유러피언컵·UEFA 챔피언스 리그를 5회 이상 우승하거나 3회 연속 우승한 클럽이 유니폼에 달 수 있었던 명예 표식이다. 레알 마드리드, AFC 아약스, FC 바이에른 뮌헨, AC 밀란, 리버풀 FC, FC 바르셀로나가 그 조건을 충족했다.

반면 UEFA 플라크는 서로 다른 세 대회의 완주를 기념했다. 레알 마드리드처럼 가장 높은 산을 수없이 오른 팀이 아니라, 높이와 성격이 다른 세 산의 정상에 가장 먼저 모두 도착한 팀에게 주어진 상이었다.

영어의 뉘앙스도 흥미롭다. Trophy는 경기에서 쟁취해 들어 올리는 전리품에 가깝다. Plaque는 공적을 기록해 남기는 명판이다. 유벤투스는 플라크를 차지하기 위한 결승전을 치르지 않았다. UEFA가 이미 완성된 역사를 뒤늦게 읽고, 그 의미를 문장으로 새겨 돌려준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기존 서술의 연도를 바로잡아야 한다. 유벤투스가 세 대회의 마지막 조각인 유러피언컵을 얻은 것은 1985년이지만, 플라크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988년 7월 12일이다. 제네바에서 당시 UEFA 회장 자크 조르주(Jacques Georges; UEFA 회장, 1983-1990)가 유벤투스 회장 잠피에로 보니페르티(Giampiero Boniperti; 유벤투스 선수·회장, 1928-2021)에게 상패를 전달했다.

왜 정확히 3년이 지나서야 이 표창이 만들어졌는지는 UEFA가 현재 공개한 기록만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것은 매 시즌 규정에 따라 자동 수여되는 정규 트로피가 아니라, UEFA가 최초의 성취를 사후적으로 정의한 특별 표창이었다.

세 개의 유럽, 세 개의 신분

오늘날 UEFA의 남자 클럽대항전은 UEFA 챔피언스 리그·UEFA 유로파 리그·UEFA 컨퍼런스 리그라는 수직 피라미드로 이해된다. 상위 대회에서 탈락한 팀이 하위 대회로 이동하던 제도도 있었고, 각 리그 순위에 따라 출전 무대가 층위별로 배분된다.

그러나 플라크에 새겨진 세 대회는 단순한 1·2·3부가 아니었다.

유러피언컵(European Cup)은 말 그대로 각국 리그 챔피언의 대회였다. 전년도 우승팀이라는 예외를 빼면 국내 정상에 오르지 못한 거대 클럽도 문 앞에서 돌아서야 했다.

유러피언 컵위너스컵(European Cup Winners' Cup)은 각국의 국내 컵 우승팀을 위한 별도의 유럽이었다. 리그의 장기적 강함과 달리, 단판 토너먼트를 끝까지 살아남는 팀의 계보를 만들었다.

UEFA컵(UEFA Cup)은 인터-시티 페어스컵(Inter-Cities Fairs Cup)의 자리를 대신해 1971년에 출범했지만, UEFA는 두 대회를 공식적으로 같은 대회의 연속선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UEFA컵에는 리그 챔피언도, 국내 컵 우승팀도 아니지만 강한 리그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한 팀들이 몰렸다. 그래서 위계는 유러피언컵 아래였으나 우승 난도까지 언제나 낮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러 강호가 참가하고 홈 앤드 어웨이 라운드를 길게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세 대회를 모두 우승한다는 것은 같은 문을 세 번 두드리는 일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서로 다른 자격을 획득하고, 서로 다른 형식과 상대가 기다리는 유럽을 통과해야 했다.

C1 · CHAMPIONS 유러피언컵

각국 리그 챔피언의 유럽

1984-85 우승
C2 · CUP WINNERS 컵위너스컵

각국 국내 컵 우승팀의 유럽

1983-84 우승
C3 · CONTENDERS UEFA컵

리그 상위권 도전자들의 유럽

1976-77 우승

유벤투스가 그 일을 시작한 때는 1977년이었다.

1977 - 외국인이 없던 유벤투스와 바스크의 아틀레틱

1976년 여름, 서른일곱 살의 조반니 트라파토니(Giovanni Trapattoni;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39-)가 유벤투스의 지휘봉을 잡았다. 선수 시절 네레오 로코의 AC 밀란에서 유러피언컵을 경험했던 남자는 감독이 되자 훨씬 실용적인 언어를 택했다. 상대와 경기의 맥락에 따라 형태를 바꾸고, 재능을 질서 안에 넣되 재능 자체를 질식시키지 않았다.

첫 시즌부터 유벤투스는 세리에 A와 UEFA컵을 동시에 차지했다. 그러나 이 우승을 ‘강호 유벤투스의 당연한 첫 유럽 제패’로 읽으면 재미있는 절반을 놓친다.

당시 유벤투스 선수단에는 외국인 선수가 없었다. 디노 초프, 가에타노 시레아, 클라우디오 젠틸레, 안토니오 카브리니, 로메오 베네티, 마르코 타르델리, 프란코 카우시오, 로베르토 베테가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선수들이 유럽을 건넜다. 결승 상대는 ‘바스크 출신 선수’라는 독자적인 영입 철학으로 유명한 아틀레틱 클루브였다.

오늘날 슈퍼클럽의 결승은 세계 각지의 인재를 가장 많이 모은 두 다국적 프로젝트의 충돌에 가깝다. 그러나 1977년 UEFA컵 결승은 달랐다. 이탈리아인으로만 구성된 유벤투스와 바스크의 정체성을 지킨 아틀레틱이 만난, 유럽대항전이면서 동시에 두 지역 축구문화의 대결이었다.

토리노에서 열린 1차전은 타르델리의 골로 유벤투스가 1-0으로 이겼다. 산마메스의 2차전에서는 베테가가 7분 만에 선제골을 넣었으나 아틀레틱이 하비에르 이루레타와 카를로스의 골로 2-1 역전승을 거뒀다. 합계는 2-2. 당시 원정 다득점 규칙에 따라 트로피는 유벤투스의 것이 됐다.

그 골 하나가 유벤투스의 첫 유럽대항전 우승을 만들었다. 가장 화려한 결승도, 가장 압도적인 스코어도 아니었다. 홈에서는 한 골을 지키고, 원정에서는 패하면서도 필요한 한 골을 먼저 넣었다. 훗날 ‘트라파토니즘’이라고 불릴 만큼 결과와 맥락을 중시한 감독의 유럽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더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유벤투스는 1965년과 1971년 인터-시티 페어스컵 결승에서 이미 두 차례 패했다. 1977년 UEFA컵은 세 번째 도전 끝의 첫 유럽 제패였다. 그리고 UEFA가 페어스컵을 자국 대회의 공식 전신으로 합산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훗날 ‘모든 대회 우승’의 자격을 논할 때 다시 중요해진다.

1983 - 플라크의 역사에는 패배도 들어 있다

유벤투스가 UEFA컵에서 유러피언컵으로 곧장 올라간 것은 아니다. 1977년 뒤에도 국내를 지배했지만, 유럽의 가장 큰 컵은 쉽게 오지 않았다.

1982년 이탈리아가 스페인 월드컵에서 우승한 뒤 유벤투스에는 세계 챔피언의 척추가 남아 있었다. 초프, 젠틸레, 카브리니, 시레아, 타르델리, 파올로 로시. 여기에 프랑스의 미셸 플라티니와 폴란드의 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가 합류했다. 이름만 보면 유럽 정상은 예정된 결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1983년 아테네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함부르거 SV가 유벤투스를 1-0으로 꺾었다. 펠릭스 마가트의 이른 중거리 슛이 결승골이 됐다. 유벤투스의 별들은 공을 소유했으나 함부르크의 조직을 해체하지 못했다.

이 패배는 플라크의 서사에서 지워서는 안 된다. 세 개의 유럽을 모두 정복한 팀은 세 대회를 차례로 손쉽게 수집한 팀이 아니었다. 가장 원하던 컵 바로 앞에서 먼저 넘어졌고, 다음 시즌에는 같은 문으로 돌아갈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대신 유벤투스 앞에는 컵위너스컵이 열렸다.

1984 - 플라티니의 팀에서 비뇰라가 먼저 득점했다

맨체스터 국립축구박물관에 전시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트로피
현재는 사라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트로피. 국내 컵 우승팀만 들어갈 수 있었던 별도의 유럽이기에, 오늘날 UEFA 유로파 리그의 옛 이름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사진: Ank Kumar,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1983-84 시즌 유벤투스는 세리에 A와 컵위너스컵을 함께 차지했다. 유러피언컵 결승 패배를 리그 챔피언과 유럽 챔피언이라는 두 개의 결과로 바꾼 시즌이었다.

바젤에서 열린 결승 상대는 FC 포르투였다. 포르투는 아직 조제 모리뉴 시대의 유럽 챔피언도, 오늘날 익숙한 포르투갈의 판매 명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르투르 조르즈의 등장으로 유럽의 강호가 되어가던 팀이었다.

선제골을 넣은 선수는 플라티니도, 로시도, 보니에크도 아니었다. 베니아미노 비뇰라(Beniamino Vignola; 이탈리아 축구 선수, 1959-)였다. 플라티니와 포지션이 겹쳐 늘 주연으로 뛰기 어려웠던 왼발잡이 미드필더가 13분 만에 결승의 첫 골을 넣었다. 안토니우 소자가 동점골을 넣자 전반 41분 보니에크가 다시 앞서가는 골을 터뜨렸다. 유벤투스는 2-1로 이겼다.

여기에는 강팀의 역설이 있다. 역사책은 황금 함대의 얼굴을 기억하지만, 토너먼트는 때때로 그 얼굴 뒤에 있던 선수가 연다. 플라티니가 발롱도르를 3년 연속 차지하던 시대의 유벤투스에서, 두 번째 유럽의 문을 연 첫 번째 발은 비뇰라의 것이었다.

보니에크는 결승골의 주인공이 됐다. 잔니 아녤리는 큰 유럽의 밤마다 강했던 그를 ‘벨로 디 노테’(Bello di notte; 밤에 아름다운 사람)라고 불렀다. 낮의 리그보다 조명 아래 유럽 경기에서 더 빛난다는 뜻이었다. 그 별명은 몇 달 뒤 눈 내린 토리노에서 더 완벽해졌다.

1985년 1월 - 리버풀을 실제로 완파한 경기는 따로 있었다

유벤투스가 리버풀을 ‘완파’한 경기를 찾는다면 헤이젤의 유러피언컵 결승이 아니라 1984 UEFA 슈퍼컵을 봐야 한다.

당시 슈퍼컵은 유러피언컵 우승팀과 컵위너스컵 우승팀이 홈 앤드 어웨이로 맞붙는 대회였다. 그러나 1984년 유러피언컵 챔피언 리버풀의 일정이 너무 빡빡해 두 구단은 1985년 1월 16일 토리노에서 단판으로 승부를 정했다. 보니에크가 전후반 한 골씩 넣었고 유벤투스가 2-0으로 이겼다.

컵위너스컵 우승팀이 유럽 챔피언을 꺾었다. 플라크의 세 대회가 단순히 높고 낮은 일직선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그리고 유벤투스는 불과 넉 달 뒤 같은 리버풀과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다시 만났다.

하지만 두 번째 만남을 축구의 언어만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1985년 5월 29일 - 완성됐지만 축하할 수 없었던 세 번째 컵

브뤼셀 헤이젤 스타디움. 디펜딩 챔피언 리버풀과 컵위너스컵·슈퍼컵을 차례로 얻은 유벤투스가 만났다. 스포츠의 서사만 놓고 보면 완벽한 대진이었다. 리버풀은 8년 사이 네 번째 유럽 제패를 노렸고, 유벤투스는 승리하면 최초로 UEFA의 세 대회를 모두 우승하게 됐다.

경기 전 관중석에서 폭력이 발생했다. 리버풀 서포터들이 돌진하자 관중이 낡은 옹벽 쪽으로 밀렸고, 벽이 무너지며 39명이 숨졌다. 희생자의 다수는 유벤투스 서포터였다.

브뤼셀 헤이젤 경기장의 1985년 참사 추모 명판
현재 보두앵 국왕 경기장에 남아 있는 헤이젤 참사 추모 명판. 이 글에서는 관중석의 죽음을 자극적인 기록 사진으로 소비하지 않고, 39명의 희생자를 기억하는 장소로 남긴다. 사진: Randy110912,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경기는 취소되지 않았다. UEFA와 두 구단, 각국 협회와 현지 당국은 관중을 즉시 퇴장시키는 것이 더 큰 위험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해 경기를 진행했다. 축구는 시작됐지만 이미 축구가 아니었다.

후반 13분 보니에크가 넘어지며 페널티킥이 선언됐고 플라티니가 성공했다. 반칙 지점이 페널티 지역 밖이었다는 논쟁은 남았으나 그날의 본질 앞에서는 작은 문제가 됐다. 유벤투스는 1-0으로 이겨 첫 유러피언컵을 얻었다. 동시에 UEFA컵·컵위너스컵·유러피언컵을 모두 제패한 최초의 클럽이 됐다.

그러나 이것을 리버풀 ‘완파’라고 쓸 수는 없다. 스코어는 1-0이었고, 무엇보다 우승의 기쁨은 39명의 죽음 앞에서 의미를 잃었다. UEFA의 공식 회고도 그 승리를 ‘hollow success’, 텅 빈 성공으로 표현한다.

플라티니는 훗날 그날의 경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기억에서 지울 수 없기에 그 밤은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UEFA 플라크를 만든 마지막 조각은 유벤투스 역사상 가장 자랑하기 어려운 우승이었다. 이 모순을 제거하면 플라크는 희귀 기록을 자랑하는 팬 상품으로 작아진다. 그대로 바라볼 때 비로소 한 클럽의 영광과 유럽 축구의 실패가 같은 금속판 위에 포개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플라크에 세 대회만 새긴 이유

유벤투스는 1985년 12월 도쿄에서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를 승부차기로 꺾고 인터콘티넨털컵도 차지했다. UEFA컵, 컵위너스컵, 유러피언컵, UEFA 슈퍼컵에 세계 챔피언 결정전까지 더했다. 이후 1999년 UEFA 인터토토컵까지 우승하면서 유벤투스의 국제대회 포트폴리오는 더욱 넓어졌다.

그런데 1988년 플라크가 호명한 것은 세 개의 ‘시즌형 UEFA 클럽대항전’뿐이었다. 슈퍼컵은 두 우승팀이 맞붙는 후속 이벤트였고, 인터콘티넨털컵은 남미 챔피언과 벌이는 대륙 간 대회였다. 플라크는 모든 국제 트로피를 나열한 상이 아니라 한 시즌 동안 각자 독립된 여정을 가진 UEFA의 세 본대회를 완주한 최초성을 기록했다.

더 놀라운 것은 세 우승이 모두 트라파토니의 첫 유벤투스 재임기 안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UEFA컵첫 번째 유럽
컵위너스컵두 번째 유럽
유러피언컵세 번째 유럽
UEFA 플라크제네바 수여

선수단은 바뀌었다. 1977년 외국인 없는 팀에서 1980년대의 플라티니·보니에크 시대로 넘어갔고, 초프의 골문은 스테파노 타코니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감독과 구단 운영의 축은 유지됐다. 한 황금 세대의 짧은 폭발이라기보다, 거의 10년에 걸쳐 서로 다른 선수와 자격으로 유럽을 통과한 체제의 우승이었다.

보니페르티가 회장으로 만들고 트라파토니가 경기장에서 번역한 유벤투스는 ‘이탈리아에서 이기는 법’ 하나를 유럽에 복사하지 않았다. 두 경기짜리 UEFA컵 결승, 단판의 컵위너스컵 결승, 챔피언만 모이는 유러피언컵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이것이 플라크가 감독 개인상이 아니면서도 트라파토니의 얼굴을 지울 수 없는 이유다.

프랑스어로 새겨진 유럽의 행정 언어

상패의 문장은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다. 오늘날 UEFA 콘텐츠의 중심 언어가 영어처럼 보이지만, UEFA는 프랑스어 이름의 머리글자를 딴 약칭을 지금도 쓴다. Union of European Football Associations라면 엄밀히 UEAFA가 되어야 하지만, 조직의 공식 약칭은 프랑스어 명칭에서 나온 UEFA다.

그래서 플라크의 첫 단어 Hommage는 단순한 장식 이상의 맛을 남긴다. ‘Award’나 ‘Winner’가 아니라 경의, 헌사에 가깝다. UEFA는 유벤투스를 또 하나의 대회 우승자로 호명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세 제도를 처음으로 모두 건넌 클럽에 경의를 표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표현은 premier club, 최초의 클럽이다. ‘유일한 클럽’이라고 새기지 않았다. 1988년의 UEFA도 언젠가 다른 팀이 같은 세트를 완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뒤따른 팀들은 있었다.

아약스·바이에른·첼시·맨유도 완성했는데 왜 같은 플라크가 없었나

아약스는 1987년 컵위너스컵, 1992년 UEFA컵을 더해 기존 유러피언컵 우승과 함께 세 대회를 완성했다. 바이에른 뮌헨은 1996년 UEFA컵 우승으로, 첼시는 2013년 UEFA 유로파 리그 우승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2017년 UEFA 유로파 리그 우승으로 같은 역사적 세트를 갖췄다.

그런데 ‘UEFA 플라크’라는 고유명사는 오랫동안 유벤투스와 함께 남았다.

여기서 흔히 “조건을 충족하면 누구나 받는 상인데 UEFA가 다른 팀에는 주지 않았다”거나 “유벤투스만 받을 수 있는 영구적인 단독상”이라고 단정한다. 둘 다 조심해야 한다. 공개된 UEFA 규정에는 플라크의 반복 수여 조건이 없다. 현재 확인되는 형식상 이것은 1988년 최초 달성을 기념한 특별 표창이다. 후발 클럽이 같은 세 대회를 우승했다는 사실과, 최초의 클럽을 위해 제작된 동일한 표창을 받을 권리는 같은 문제가 아니다.

또 바르셀로나가 세트를 완성했다고 오해하기 쉽다. 바르셀로나는 유러피언컵과 컵위너스컵, 인터-시티 페어스컵을 우승했지만 UEFA컵·UEFA 유로파 리그 우승은 없다. UEFA는 자신들이 주관하지 않았던 페어스컵을 UEFA컵 우승으로 합산하지 않는다. 트로피의 외형이나 참가 클럽의 계보보다 누가 제도를 만들고 기록을 승인했는가가 공식 역사에서는 더 중요하다.

이 지점에서 UEFA 플라크는 축구 실력만의 이야기를 넘어선다. 역사는 경기장에서 만들어지지만, 기록의 경계는 행정기관이 긋는다.

1999 - 컵위너스컵의 죽음과 함께 닫힌 문

컵위너스컵은 1998-99 시즌을 끝으로 폐지됐고, 국내 컵 우승팀은 UEFA컵으로 흡수됐다. 그 순간부터 컵위너스컵을 우승하지 못한 클럽은 과거의 세 대회를 새로 완주할 수 없게 됐다.

레알 마드리드는 유러피언컵의 절대 군주지만 컵위너스컵 우승이 없다. FC 바르셀로나와 AC 밀란은 컵위너스컵과 유러피언컵을 모두 가졌지만 UEFA컵·UEFA 유로파 리그 우승이 없다. 리버풀은 유러피언컵과 UEFA컵을 여러 차례 들었지만 컵위너스컵을 얻지 못했다.

우승 횟수로는 유벤투스보다 앞선 클럽들이 있어도, 사라진 대회가 요구한 마지막 칸은 이제 경기로 채울 수 없다.

그래서 플라크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희귀해졌다. 유벤투스가 가장 많은 트로피를 가져서가 아니다. 그들이 완주한 유럽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021 - UEFA 컨퍼런스 리그가 새로운 세 번째 유럽을 만들었다

UEFA는 2021-22 시즌 UEFA 컨퍼런스 리그를 출범시켰다. 컵위너스컵처럼 국내 컵 우승팀만의 대회는 아니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와 UEFA 유로파 리그 아래에 세 번째 층을 추가한 피라미드형 대회였다.

과거의 세 대회가 출전 자격의 종류를 나눴다면, 현재의 세 대회는 대체로 경쟁력과 리그 순위에 따라 높이를 나눈다. 이름은 다시 셋이 됐지만 구조는 같지 않다.

이 차이 때문에 유벤투스의 플라크와 현대의 ‘유럽 전관왕’을 단순 비교하기 어렵다. 유벤투스는 사라진 C1·C2·C3의 세계를 완주했다. 현대의 클럽은 UEFA 챔피언스 리그·UEFA 유로파 리그·UEFA 컨퍼런스 리그라는 새 피라미드를 완주할 수 있다.

그리고 첫 완주자는 첼시였다.

2025 - 첼시가 ‘We’ve won it all’을 다시 부른 날

첼시는 1971년과 1998년 컵위너스컵, 2012년과 2021년 UEFA 챔피언스 리그, 2013년과 2019년 UEFA 유로파 리그, 1998년과 2021년 UEFA 슈퍼컵을 차지했다.

2024-25 시즌에는 UEFA 컨퍼런스 리그에 출전했다. 클럽의 규모만 보면 대회 우승은 의무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첼시 기록의 역설이다. UEFA 컨퍼런스 리그에 나갈 만큼 국내 순위가 내려가야만, 마지막 빈칸을 경기장에서 채울 수 있었다.

첼시는 결승에서 레알 베티스에 먼저 실점했지만 후반에 네 골을 넣어 4-1로 역전했다. 이 우승으로 UEFA가 현재 ‘주요 남자 클럽대항전’으로 집계하는 UEFA 챔피언스 리그·UEFA 유로파 리그·UEFA 컨퍼런스 리그·UEFA 슈퍼컵, 그리고 폐지된 컵위너스컵까지 모두 우승한 최초의 클럽이 됐다.

UEFA는 2025년 8월 28일 UEFA 챔피언스 리그 리그 페이즈 대진 추첨식에서 첼시에 특별 상패를 수여했다. 첼시 회장 겸 최고운영책임자 제이슨 개넌(Jason Gannon)은 “첼시의 120년 역사와 이사회, 선수, 스태프, 서포터를 대표해 이 의미 있는 인정을 감사히 받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첼시는 두 번째 UEFA 플라크 수상팀인가?

넓게 보면 그렇다. UEFA가 ‘모든 대회를 우승한 최초의 클럽’에 특별 상패를 건넸다는 구조는 1988년 유벤투스와 닮았다. 실제로 두 상패는 37년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비추는 물건이다.

그러나 엄밀히는 같은 정규상의 2회 수상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유벤투스의 플라크는 당시 세 시즌형 대회를 최초로 우승한 사실을 프랑스어로 새긴 1988년의 특별 표창이었다. 첼시의 상패는 UEFA 컨퍼런스 리그까지 포함해 UEFA 남자 클럽대항전의 완전한 세트를 만든 2025년의 별도 특별 표창이다. UEFA가 두 표창을 하나의 연속된 정규상 명단으로 공표한 자료는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축구 역사상 단 한 팀만 받은 UEFA 플라크”라는 2024년의 문장은 이제 설명 없이 사용할 수 없다. 더 정확한 문장은 이것이다.

유벤투스는 UEFA의 옛 세 대회를 모두 우승해 1988년 원조 플라크를 받은 최초의 클럽이다. 첼시는 2025년 UEFA 컨퍼런스 리그를 더한 새로운 전체 세트를 완성했고, UEFA는 37년 만에 또 하나의 특별 상패를 건넸다.

유벤투스와 첼시는 같은 완전성이 아니다

유벤투스의 기록이 더 위대하고 첼시의 기록은 하위 대회 참가 덕분이라고 깎아내리는 것도, 첼시가 다섯 종류를 가졌으니 유벤투스를 완전히 넘어섰다고 말하는 것도 간단하지만 재미없다.

두 클럽은 서로 다른 UEFA를 완주했다.

유벤투스의 완전성은 한 체제의 지속성에 있다. 트라파토니 한 감독의 첫 재임기, 보니페르티가 구축한 구단, 이탈리아인 선수단에서 두 명의 외국인 천재가 더해지는 변화 속에서 8시즌에 걸쳐 세 대회를 정복했다.

첼시의 완전성은 시대 횡단성에 있다. 첫 컵위너스컵 우승은 1971년, 마지막 UEFA 컨퍼런스 리그 우승은 2025년이다. 54년 동안 구단주와 감독, 선수, 유럽대항전의 형식이 모두 바뀌었다. 한 왕조가 아니라 여러 시대의 첼시가 릴레이처럼 트로피를 넘겨 완성한 기록이다.

유벤투스는 하나의 긴 문장이다. 첼시는 서로 다른 시대가 쓴 다섯 개의 문장을 한 권으로 묶은 책이다.

가장 큰 클럽과 가장 완전한 클럽은 다르다

축구 팬은 클럽의 위대함을 하나의 표로 정리하고 싶어 한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횟수, 총 트로피, 발롱도르 수상자, 결승 진출 횟수를 더해 서열을 만든다.

UEFA 플라크는 그 표에 작은 방해물을 놓는다.

레알 마드리드는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클럽이지만 컵위너스컵을 우승하지 못했다. 유벤투스는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횟수에서 레알과 비교할 수 없지만, 당시 UEFA가 만든 세 종류의 유럽을 가장 먼저 모두 경험했다. 첼시는 유럽 최다 우승 클럽이 아니지만 현존·폐지 대회를 합쳐 다섯 종류의 UEFA 트로피를 모두 가진 최초의 클럽이다.

가장 많이 이긴 팀과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이긴 팀은 같지 않다.

플라크의 역사적 의미도 여기에 있다. 왜 거기에 세 대회만 적혔는지, 왜 1985년이 아니라 1988년에 건네졌는지, 왜 같은 세트를 완성한 후발 클럽들이 똑같은 물건을 받지 않았는지, 왜 2025년 첼시의 상패를 원조 플라크와 같으면서도 다르게 읽어야 하는지가 하나의 상패 안에 이어져 있다.

트로피는 그 시즌의 승자를 기록한다. 플라크는 한 시대의 구조를 기록한다.

그래서 유벤투스의 상패는 1980년대의 영광만 말하지 않는다. 챔피언과 컵 위너와 리그의 도전자에게 서로 다른 유럽이 존재했던 시대, 원정 다득점 한 골이 첫 문을 열고 후보 미드필더의 왼발이 두 번째 문을 열었으며, 마지막 문이 유럽 축구 최악의 밤에 열려버린 시대를 증언한다.

그리고 37년 뒤 첼시가 또 하나의 상패를 받아 들면서 질문은 다시 시작됐다.

모든 것을 이겼다는 말에서, ‘모든 것’은 누가 정하는가.

경기장에서 답하는 것은 클럽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나의 대회로 인정하고, 어떤 우승을 같은 역사에 넣으며, 어느 순간을 ‘최초’라고 새기는 것은 UEFA다.

UEFA 플라크는 축구의 영광이면서 동시에 축구를 기록하는 권력의 명판이다.

자료와 확인 경로

  1. «1976/77: Juve celebrate first European title», UEFA. 1977 UEFA컵 결승 두 경기, 득점자와 원정 다득점 우승.
  2. «1983/84: Star-studded Juventus make their mark», UEFA. 1984 컵위너스컵 결승의 선수 명단과 경기 흐름.
  3. «1984 Super Cup: Juve buoyed by Boniek», UEFA. 단판으로 열린 슈퍼컵, 보니에크의 두 골과 헤이젤 이후 취소된 다음 대회.
  4. «1984/85: Football mourns Heysel victims», UEFA. 헤이젤 참사 희생자 39명, 결승 스코어와 유벤투스의 세 대회 최초 완주.
  5. 《UEFA, 60 ans au cœur du football》, UEFA. 참사 뒤 경기를 진행한 결정에 관한 당시 UEFA 성명.
  6. «Tottenham eye rare European clean sweep», UEFA. 옛 세 대회를 모두 우승한 다섯 클럽과 대회별 우승 연도.
  7. «Badge of honour bestowed on Barcelona», UEFA. 배지 오브 아너의 5회 우승·3연패 조건.
  8. «Chelsea complete set of UEFA club trophies», UEFA. 첼시의 2025년 UEFA 컨퍼런스 리그 우승과 다섯 UEFA 트로피 최초 완주.
  9. «Champions League draw: Blues discover league phase opponents», Chelsea FC. 2025년 8월 UEFA 특별 표창과 제이슨 개넌의 수상사.
  10. «UEFA Cup Winners' Cup trophy at Manchester National Football Museum», Ank Kumar,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11. «Heysel Stadium 1985 disaster monument», Randy110912,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 1988년 7월 12일 제네바 수여일과 상패 문구는 유벤투스의 역대 표창 기록 및 당시 상패 실물 표기를 대조했다. UEFA가 유벤투스의 1988년 플라크와 첼시의 2025년 특별 상패를 하나의 정규상 계보로 규정한 공개 자료는 확인되지 않아, 본문에서는 닮은 구조의 별도 특별 표창으로 구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