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축구의 20세기 성취는 시장 규모를 기준으로 보면 거의 기적에 가깝다.

1970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71~73년 AFC 아약스, 1988년 PSV 에인트호번은 유럽 정상에 올랐다. 1974년과 1978년의 네덜란드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우승하지 못했으나 축구가 공간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놓았다. 1995년 아약스는 그 오래된 언어를 새로운 세대와 운영 체계로 번역해 다시 유럽을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날 에레디비시(Eredivisie; 네덜란드 프로축구 1부 리그)는 세계 최고의 선수가 완성되는 최종 목적지라기보다, 그 선수가 더 큰 시장으로 이동하기 직전에 거치는 리그로 인식된다. 사람들은 이를 간단히 ‘셀링 리그’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질문은 하나다. 축구를 너무 잘했던 리그는 왜 최고의 선수를 오래 보유하지 못하는 리그가 되었을까?

네덜란드 축구의 위대함은 ‘발명’보다 재조직에 있었다

네덜란드 축구가 무에서 토털 풋볼을 발명했다는 서술은 편리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그 뿌리는 흔히 다뉴브 학파라고 부르는 중부 유럽의 축구 문화, 곧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권에서 발전한 짧은 패스와 기술적 우위, 유동적 위치 교환에 놓여 있다.

차이가 있다면 네덜란드는 그 유산을 훨씬 높은 강도의 압박, 라인 컨트롤, 집단적 공간 압축으로 다시 조립했다는 데 있다. 다뉴브 학파가 조합과 유연성의 미학에 가까웠다면 네덜란드는 그 미학이 90분 동안 반복 작동하도록 구조를 만들었다. 네덜란드 축구의 위대함은 발명이라기보다 재조직에 있었다.

그 전환의 한쪽에는 리뉘스 미헐스(Marinus Jacobus Hendricus Michels; 네덜란드 축구 감독, 1928-2005)와 요한 크라위프(Hendrik Johannes Cruijff; 네덜란드 축구 선수·감독, 1947-2016)가 대표하는 암스테르담 계보가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에른스트 하펠(Ernst Franz Hermann Happel; 오스트리아 축구 선수·감독, 1925-1992)처럼 대륙적 전술 감각을 네덜란드 선수군 위에 씌운 외부 계보가 있었다.

유러피언컵과 함께한 리뉘스 미헐스와 요한 크라위프
리뉘스 미헐스와 요한 크라위프. 토털 풋볼은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지도자, 선수, 아카데미와 클럽 문화가 함께 만든 문법이었다.
훈련장에서 대화하는 네덜란드 축구 관계자들
네덜란드 축구의 전술 계보는 아약스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로테르담의 강도와 실용주의도 그 역사 안에 있었다.

이들은 클럽 축구가 ‘아름답기만 한 축구’가 아니라 유럽 정상급의 실전 경쟁력을 갖춘 축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풀백이 전진하면 누군가가 빈 공간을 덮고, 9번이 내려오면 다른 선수가 최전방을 메우며, 볼을 잃으면 가장 가까운 선수가 즉시 압박하고 뒤의 라인은 그 압박이 헛되지 않도록 전진한다. 공격의 자유는 구조 밖에서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구조 안에서 서로를 이해한 결과였다.

1990년대에는 루이 판할(Aloysius Paulus Maria van Gaal; 네덜란드 축구 선수·감독, 1951-)이 이 문법을 다시 체계화했다. 1995년의 아약스가 1971-73년 팀의 복제품이 아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자가 직관적 혁명에 가까웠다면 후자는 공간 점유, 세 번째 선수의 움직임, 볼 상실 직후 압박을 훈련 가능한 운영 체계로 정교화했다.

네덜란드 전술의 본질은 공격적 자유가 아니라 구조적 상호의존성이었다. 그리고 이 모델은 전술적 판단이 빠른 유소년을 지속적으로 길러낼 수 있을 때 특히 강했다.

작은 리그가 유럽의 중심 언어를 만들던 시절

네덜란드 축구의 성취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우승 횟수만이 아니다. 압도적인 내수시장이나 다수의 초대형 도시를 가진 나라가 아니었음에도 서로 다른 클럽이 반복해서 유럽 결승 단계에 진입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구분조직성과
클럽 AFC 아약스
  • 1968-69 시즌 유러피언컵 준우승
  • 1970-71 시즌 유러피언컵 우승
  • 1971-72 시즌 공식전 단 1패 트레블 및 인터콘티넨털컵 우승
  • 1972-73 시즌 유러피언컵 3연패 및 UEFA 배지 오브 아너 자격 획득
  • 1994-95 시즌 무패 더블
  • 1995-96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 1969-70 시즌 유러피언컵 우승
  • 1973-74 시즌 UEFA컵 우승
PSV 에인트호번
  • 1977-78 시즌 UEFA컵 우승
  • 1987-88 시즌 트레블
국가대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 1974 FIFA 월드컵 준우승
  • UEFA 유로 1976 3위
  • 1978 FIFA 월드컵 준우승
  • UEFA 유로 1988 우승
  • UEFA 유로 1992 4강
1970년 유러피언컵 결승 직후 밀라노 산시로 경기장의 페예노르트 선수단과 관중
1969-70 시즌 페예노르트는 셀틱을 꺾고 네덜란드 클럽 최초로 유러피언컵을 들어 올렸다. 이 우승은 아약스의 전성기가 열리기 전에 로테르담이 먼저 유럽 정복의 문을 열었다는 점, 그리고 네덜란드 축구의 혁신이 한 도시와 한 클럽만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973년 유러피언컵 우승 트로피 빅이어를 들어 올리는 아약스 주장 요한 크라위프
1973년 AFC 아약스의 주장 요한 크라위프가 유러피언컵 우승 트로피 ‘빅이어’를 들어 올리고 있다. 뒤편의 아디다스 재킷 차림 인물은 당시 아약스를 이끌던 슈테판 코바치 감독이다. 아약스는 이 우승으로 유러피언컵 3연패를 완성했고, 토털 풋볼을 매력적인 실험이 아니라 유럽을 지배하는 완성된 경기 체계로 증명했다.
1988년 유러피언컵 우승을 축하하는 PSV 선수단
1987-88 시즌 PSV는 에레디비시와 KNVB 베커, 유러피언컵을 모두 차지했다. 아약스식 토털 풋볼의 복제라기보다 조직적 수비와 경기 관리, 효율적인 선수 구성이 만든 또 하나의 네덜란드식 성공이었다. 이 트레블은 리그의 경쟁력이 특정 철학 하나에만 의존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페예노르트의 1970년은 네덜란드 축구의 유럽 ‘편입’이 아니라 유럽 정복의 시작이었다. 하펠이 이끈 팀은 낭만적 기교보다 균형과 강도, 전환의 속도를 앞세웠다. 그리고 1971-72 시즌의 아약스는 공식전 단 한 번만 패하고 에레디비시·KNVB 베커·유러피언컵을 모두 쓸어 담았다. 말 그대로 ‘1패 트레블’이었다. 이어진 유러피언컵 3연패는 강팀 하나의 지배를 넘어, 상대가 공을 가질 공간과 생각할 시간까지 파괴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승리였다.

PSV의 1988년 트레블은 또 다른 사실을 말해준다. 네덜란드 축구는 하나의 전술 종교가 아니었다. 공통된 기술·교육 기반 위에서 서로 다른 경쟁 모델을 생산할 수 있는 생태계였다. 그래서 1969년부터 1995년까지의 성취를 황금세대 몇 명의 우연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경제가 망해서 축구가 무너졌다는 설명은 틀렸다

1990년대 에레디비시의 상대적 하강을 네덜란드 경제 침체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공식 통계가 보여주는 방향은 반대다. 네덜란드 경제는 1990년대 후반 성장과 고용 개선을 경험했다. 국가 경제 전체가 무너졌기 때문에 축구가 무너진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의 주택 가격과 소득 변화를 비교한 OECD 자료
OECD 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네덜란드는 주택 가격 상승과 가처분소득 증가가 동시에 나타난 경제 확장 국면에 있었다. 특히 1991~2002년의 주택 가격 상승률은 OECD 상위 수준이었다. 이는 해당 시기 에레디비시의 상대적 하강을 국가 경제의 침체로 단순 환원하기 어렵다는 근거다. 경제가 멈춘 것이 아니라 축구 산업에서 가치가 만들어지고 분배되는 방식이 더 빠르게 국제화됐다.

문제는 축구 산업 안에서 가치가 생성되고 분배되는 속도였다. 1990년대 이후 텔레비전 권리, 유럽 노동시장, 리그 거버넌스와 내수시장 규모가 서로 결합하면서 같은 서유럽 국가 안에서도 리그의 체급이 전혀 다른 속도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이 변화를 몰라서 뒤처진 것도 아니었다. 네덜란드 왕립 축구 협회(Koninklijke Nederlandse Voetbalbond, KNVB; 네덜란드 축구 행정기관)는 1990년대 중반 리그와 대표팀의 집단 중계권을 신설 스포츠 채널 Sport7에 판매하는 상업화 실험을 벌였다. 이어 18개 1부 클럽은 1997년 에레디비시 CV(Eredivisie Commanditaire Vennootschap; 에레디비시 클럽의 공동 상업 조직)를 중심으로 리그의 상업·조직·브랜딩을 별도로 다루기 시작했다.

시도는 빨랐다. 문제는 시장의 깊이였다. Sport7은 안정적인 유료 가입자를 확보하지 못했고 짧은 생을 마쳤다. 네덜란드 축구는 ‘축구는 방송 상품’이라는 현실을 누구보다 일찍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영어권의 거대한 글로벌 미디어 자산처럼 키울 국내외 시장은 갖지 못했다.

1996년의 Sport7 거래는 총 10억4,000만 휠던(gulden; 당시 네덜란드 화폐 단위) 규모로 알려졌고, 기존 공영방송의 제안보다 컸다. KNVB가 지분을 보유한 합작 채널에 장기간 독점 중계권을 맡긴 이 선택은 무모한 도박만은 아니었다. 리그가 중계권의 가치를 이해하고 직접 유통 구조까지 장악하려 한 선제적 실험이었다. 그러나 채널은 가입자 기반과 유통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했다. 상품의 가치를 아는 것과 그 상품을 감당할 시장을 갖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 실패 뒤 18개 클럽이 공동 상업 조직을 세운 일도 같은 맥락에 놓인다. 네덜란드는 상업화를 거부한 낭만적 피해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제도화 속도는 빨랐다. 다만 클럽 공동체, 축구협회, 방송사업자가 나눠 가진 이해관계를 하나의 거대한 수익 엔진으로 묶을 규모와 해외 판매력이 부족했다. 이 차이는 이후 프리미어 리그가 리그 단위의 권리 판매와 균등 분배를 통해 하위권 클럽까지 구매자로 만드는 동안 더 크게 벌어졌다.

상업화의 속도는 빨랐으나 시장의 깊이는 얕았다.

보스만 판결이 이적 시장을 가속한 방식

1995년 보스만 판결은 현대 축구의 노동시장과 이적 체계를 뒤집은 사건이었다. 유럽사법재판소(Court of Justice of the European Union, CJEU; 유럽연합 최고법원)는 계약이 끝난 EU 선수의 회원국 간 이동을 막는 이적료와 국적별 선수 제한이 노동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기자회견 중인 장마르크 보스만
벨기에 축구 선수 장마르크 보스만(Jean-Marc Bosman)의 소송으로 시작된 1995년 유럽사법재판소 판결은 ‘계약 만료 뒤 이적료 없는 자유로운 이동’과 ‘EU 회원국 선수에 대한 국적 제한 철폐’를 선언했다. 현대 축구의 이적 체계와 선수 권리를 다시 쓴 판결인 동시에, 임금 지불 능력이 큰 리그가 중소 리그의 완성된 선수를 더 쉽게 흡수할 수 있게 한 제도적 변곡점이었다.
유럽사법재판소의 역할을 설명하는 공식 자료
유럽사법재판소(Court of Justice of the European Union, CJEU)는 선결적 판정 권한을 통해 각국 법원이 판단하기 어려운 EU 법의 공통 기준을 제시한다. 1995년 보스만 판결 이후 재판소는 계약이 끝난 선수의 자유 이동을 가로막던 이적료와 회원국 선수 쿼터가 노동자의 자유로운 이동 원칙을 침해한다고 보았다. 재판소가 축구의 경쟁 균형을 해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단일시장 안에서 축구만 예외적인 노동 규칙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 법적 일관성이 결과적으로 리그 사이의 자본 격차를 더 직접적으로 선수시장에 투영시켰다.

네덜란드처럼 유소년 육성 효율은 높지만 빅리그보다 임금 지불 능력이 낮은 곳에서 충격은 비대칭적이었다. 클럽은 계속 세계급 선수를 길러냈다. 그러나 계약 종료가 가까워질수록 더 큰 임금을 제시하는 리그 앞에서 협상력은 빠르게 약해졌다.

다만 여기서 보스만을 모든 것의 원인으로 만들면 또 다른 오류가 생긴다. 판결 이전에도 네덜란드의 스타들은 세리에 A와 라리가로 떠났다. 1993년 데니스 베르흐캄프(Dennis Nicolaas Maria Bergkamp; 네덜란드 축구 선수, 1969-)와 빔 용크(Wilhelmus Maria Jonk; 네덜란드 축구 선수·지도자, 1966-)는 인테르로 향했다. 마르코 판바스턴, 뤼트 휠릿과 프랑크 레이카르트는 이미 AC 밀란에서 뛰고 있었다.

인테르 입단식의 데니스 베르흐캄프와 빔 용크
기회의 땅 이탈리아 세리에 A로 향한 데니스 베르흐캄프와 빔 용크. 베르흐캄프는 인테르에서 기대만큼 적응하지 못했지만 UEFA컵 우승에 기여했고, 훗날 아르센 벵거의 부름을 받아 아스널로 옮긴 뒤 프리미어 리그를 대표하는 ‘영혼의 투톱’ 중 한 명이 됐다. 이 장면의 핵심은 성공과 실패가 아니다. 네덜란드의 최정상 선수가 이미 보스만 이전부터 더 큰 임금과 무대를 찾아 이동했다는 사실이다.

보스만 이후 달라진 것은 이동 그 자체가 아니라 이동을 둘러싼 마찰 비용과 협상력이었다. 상위 리그는 계약 만료 선수를 훨씬 쉽게 유인했고, 중소 리그는 핵심 선수를 오래 보유하기 위해 더 이른 재계약과 더 빠른 매각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1995년 아약스의 유럽 제패를 이끈 파트릭 클라위버르트(Patrick Stephan Kluivert; 네덜란드 축구 선수·지도자, 1976-)가 1997년 AC 밀란으로 자유 이적한 장면은 그 변화를 상징한다.

AC 밀란 유니폼을 입은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1995년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결승골을 넣었던 파트릭 클라위버르트는 불과 두 해 뒤 계약 만료와 함께 AC 밀란으로 떠났다. 아약스가 유럽 정상급 선수를 길러냈다는 사실과, 그 선수를 전성기 초입부터 장기간 보유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한 이동 안에 겹쳐 있다. 보스만 이후 에레디비시의 문제는 생산의 실패가 아니라 보유 기간의 급격한 단축이었다.

보스만은 네덜란드 축구의 생산력을 파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생산물이 더 빠르게 외부 시장으로 이동하도록 만든 가속기였다.

방송권은 리그를 ‘보유자’와 ‘공급자’로 갈랐다

선수가 어디로 이동하는지는 결국 누가 더 높은 임금을 지속적으로 지급할 수 있는가와 연결된다. 이 지점에서 21세기 유럽 축구의 가장 큰 분기점은 방송권이다.

프리미어 리그는 2025-26시즌부터 네 시즌 동안의 영국 국내 중계권을 67억 파운드에 판매했다. 반면 에레디비시 18개 클럽이 승인한 ESPN 계약은 네덜란드 프로축구 중계를 2030년까지 연장하는 내용이지만, 공식 발표는 거래 총액을 공개하지 않았다. 현지 보도에서 거론된 약 7억5천만 유로를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두 시장의 연간 체급 차이는 명백하다.

돈의 많고 적음만으로는 이 차이를 다 설명할 수 없다. 막대한 중계권은 리그 전체를 구조적 순구매자로 만든다. 반대로 제한된 방송시장은 유소년과 스카우팅으로 만든 자산을 이적시장에서 현금화해야 하는 유인을 강화한다.

아약스 연차보고서 일부
아약스 연차보고서에서 유럽대항전 수입과 선수 거래 손익은 해마다 실적을 크게 움직이는 변수로 나타난다. 국내 중계권과 경기일 수입만으로 유럽 최상위 임금 구조를 유지하기 어려운 까닭에,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과 선수 매각이 단순한 부수입이 아니라 전력 재투자를 떠받치는 핵심 축이 된다. 성적이 선수를 비싸게 만들고, 매각이 다음 세대의 육성비를 조달하는 순환이다.
PSV 연차보고서 발표 자료
PSV의 연차 실적 역시 네덜란드 선도 클럽이 결코 정체된 조직이 아님을 보여준다. 상업 수입과 경기장 사업, 유럽대항전 수입을 키우며 몸집을 불렸지만 비교 상대인 빅리그 클럽의 방송·상업 수입은 더 빠르게 팽창했다. 에레디비시의 상대적 하강은 성장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성장 속도가 유럽 최상위 시장의 자본 증폭을 따라잡지 못해서 발생했다.

네덜란드 리그의 문제는 정체가 아니라 비대칭 성장이다. 아약스·PSV·페예노르트의 매출은 과거보다 커졌다. 리그도 방송 상품과 글로벌 브랜드로 발전했다. 그러나 비교 상대인 프리미어 리그와 유럽 최상위 클럽의 매출·임금·중계권은 그보다 훨씬 빠르게 팽창했다. 성장하고 있는데도 상대적으로 뒤로 밀릴 수 있는 이유다.

정확한 서술은 이렇다.

1990년대 이후 유럽 축구에서는 국가 경제보다 방송시장 구조와 노동시장 통합이 더 직접적인 설명 변수가 되었다. 그 체제에서 네덜란드는 생산자로서 강했으나 보유자로서 약했다.

‘길러서 파는 리그’는 실패한 리그인가

Transfermarkt의 시즌별 집계에서 에레디비시는 장기간 이적수지 흑자를 반복한다. 2025-26시즌도 지출 약 2억4,781만 유로, 수입 약 4억1,953만 유로, 순수지 약 1억7,172만 유로 흑자로 정리된다. 집계는 갱신될 수 있지만 방향은 오랫동안 일관됐다.

유럽 주요 리그의 이적수지를 비교한 Transfermarkt 화면
주요 리그의 이적수지 비교는 에레디비시의 사업 모델을 압축해 보여준다. 리그는 완성된 스타를 비싸게 사서 장기간 소비하는 시장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으로 발굴한 선수를 경기 출전과 유럽대항전을 통해 고도화한 뒤 더 큰 시장에 판매한다. 지속적인 흑자는 건전성의 증거인 동시에, 최고 전력을 유지하려면 그 전력의 핵심을 반복해서 현금화해야 한다는 구조적 제약의 기록이다.

표가 말하는 바는 단순하다. 에레디비시가 돈을 못 벌어서 약해진 것이 아니다. 돈을 버는 방식 자체가 ‘사서 쓰는 리그’가 아니라 ‘길러서 파는 리그’가 되었다. 프리미어 리그의 방송권은 리그 전체를 거대한 구매자로 만들었고, 네덜란드의 아카데미와 스카우팅은 그 시장에 공급할 고부가가치 자산을 생산한다.

여기서 셀링 리그를 무능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좋은 선수를 반복해서 찾아내고, 1군에 올리고, 유럽대항전에서 가치를 증명하고, 더 큰 시장에 판매하는 일도 고도의 전문성이다. 오히려 에레디비시는 변화한 시장에 가장 네덜란드다운 방식으로 적응했다. 공간과 선수를 조직하는 능력을 경기장 밖의 사업 모델로 확장한 셈이다.

그러나 그 전문화에는 분명한 대가가 있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경쟁할 팀을 만들 때마다 성공의 주역들이 흩어진다. 다음 세대를 다시 만드는 능력은 남지만, 한 세대가 충분히 오래 함께 머물며 유럽의 질서를 바꿀 시간은 사라진다. 훈련 보상과 이적수익은 아카데미의 손실을 메울 수 있어도 우승권 전력을 보존해주지는 않는다.

유럽 리그 계수를 비교한 화면
최근 UEFA 리그 계수에서 네덜란드는 다시 6~7위권 경쟁력을 회복했다. 이는 에레디비시의 교육과 전술 생산력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다만 한 시즌의 유럽 성과가 곧 핵심 선수의 시장가치 상승과 이적으로 이어지기 쉬워, 상승세를 동일 선수단으로 장기간 축적하기 어렵다. 경쟁력은 주기적으로 재생되지만 패권은 누적되지 않는다.

에레디비시는 몰락하지 않았다. 승리의 장소가 바뀌었다

네덜란드 축구의 장기사를 관통하는 핵심은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아니라 혁신과 포섭의 반복이다. 다뉴브 학파의 조합 축구는 네덜란드에서 토털 풋볼로 급진화되었고, 미헐스와 크라위프는 그것을 하나의 문법으로 만들었다. 하펠은 그 문법을 우승의 언어로 번역했고, 판할은 다시 운영 체계로 정교화했다.

그렇게 네덜란드는 유럽 축구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 언어의 발신지가 되었다. 1970년, 1971~73년, 1988년과 1995년은 서로 다른 팀의 성공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축구 문화가 낳은 연속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문화는 1990년대 중반 이후 같은 방식으로 축적되지 않았다. 네덜란드가 축구를 몰라서 뒤처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방송권과 리그 상품화에 일찍 뛰어들었다. 다만 그 실험을 영국처럼 초대형 미디어 자산으로 키우기에는 내수와 언어 시장이 작았다. 보스만 이후 유럽 노동시장이 열리자 네덜란드의 강점인 유소년 육성과 전술 교육은 리그 내부의 축적 수단인 동시에 외부 리그의 흡수 대상이 되었다.

선수는 네덜란드에서 배우고, 가치가 폭등하면 더 큰 시장으로 이동한다. 클럽은 그 수익으로 다음 선수를 길러낸다. 이것이 현재의 에레디비시다.

따라서 에레디비시의 변화를 ‘국가 경제 침체 → 리그 쇠퇴’로 읽는 것은 틀렸다. 더 정확한 연결은 방송권과 노동시장의 유럽화 → 상위 리그의 자본 집중 → 네덜란드의 전술·유소년 자본 흡수 → 수출형 리그로의 재편이다.

네덜란드 축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유럽 빅리그의 경기 방식과 세계 정상급 감독들의 전술 어휘 속에도 네덜란드는 살아 있다.

다만 더 이상 그 가치를 가장 오래 자국에서 보유하지 못할 뿐이다.

끗-!

자료와 확인 경로

  1. CJEU, Case C-415/93 - Bosman
  2. Eredivisie, ESPN to show Eredivisie football until mid-2030
  3. Premier League, new UK live rights agreements from 2025/26
  4. Transfermarkt, Eredivisie transfer balance
  5. OECD, Economic Surveys: Netherlands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