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축구의 20세기 성취는 시장 규모를 기준으로 보면 거의 기적에 가깝다.
1970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71~73년 AFC 아약스, 1988년 PSV 에인트호번은 유럽 정상에 올랐다. 1974년과 1978년의 네덜란드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우승하지 못했으나 축구가 공간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놓았다. 1995년 아약스는 그 오래된 언어를 새로운 세대와 운영 체계로 번역해 다시 유럽을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날 에레디비시(Eredivisie; 네덜란드 프로축구 1부 리그)는 세계 최고의 선수가 완성되는 최종 목적지라기보다, 그 선수가 더 큰 시장으로 이동하기 직전에 거치는 리그로 인식된다. 사람들은 이를 간단히 ‘셀링 리그’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질문은 하나다. 축구를 너무 잘했던 리그는 왜 최고의 선수를 오래 보유하지 못하는 리그가 되었을까?
네덜란드 축구의 위대함은 ‘발명’보다 재조직에 있었다
네덜란드 축구가 무에서 토털 풋볼을 발명했다는 서술은 편리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그 뿌리는 흔히 다뉴브 학파라고 부르는 중부 유럽의 축구 문화, 곧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권에서 발전한 짧은 패스와 기술적 우위, 유동적 위치 교환에 놓여 있다.
차이가 있다면 네덜란드는 그 유산을 훨씬 높은 강도의 압박, 라인 컨트롤, 집단적 공간 압축으로 다시 조립했다는 데 있다. 다뉴브 학파가 조합과 유연성의 미학에 가까웠다면 네덜란드는 그 미학이 90분 동안 반복 작동하도록 구조를 만들었다. 네덜란드 축구의 위대함은 발명이라기보다 재조직에 있었다.
그 전환의 한쪽에는 리뉘스 미헐스(Marinus Jacobus Hendricus Michels; 네덜란드 축구 감독, 1928-2005)와 요한 크라위프(Hendrik Johannes Cruijff; 네덜란드 축구 선수·감독, 1947-2016)가 대표하는 암스테르담 계보가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에른스트 하펠(Ernst Franz Hermann Happel; 오스트리아 축구 선수·감독, 1925-1992)처럼 대륙적 전술 감각을 네덜란드 선수군 위에 씌운 외부 계보가 있었다.
이들은 클럽 축구가 ‘아름답기만 한 축구’가 아니라 유럽 정상급의 실전 경쟁력을 갖춘 축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풀백이 전진하면 누군가가 빈 공간을 덮고, 9번이 내려오면 다른 선수가 최전방을 메우며, 볼을 잃으면 가장 가까운 선수가 즉시 압박하고 뒤의 라인은 그 압박이 헛되지 않도록 전진한다. 공격의 자유는 구조 밖에서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구조 안에서 서로를 이해한 결과였다.
1990년대에는 루이 판할(Aloysius Paulus Maria van Gaal; 네덜란드 축구 선수·감독, 1951-)이 이 문법을 다시 체계화했다. 1995년의 아약스가 1971-73년 팀의 복제품이 아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자가 직관적 혁명에 가까웠다면 후자는 공간 점유, 세 번째 선수의 움직임, 볼 상실 직후 압박을 훈련 가능한 운영 체계로 정교화했다.
네덜란드 전술의 본질은 공격적 자유가 아니라 구조적 상호의존성이었다. 그리고 이 모델은 전술적 판단이 빠른 유소년을 지속적으로 길러낼 수 있을 때 특히 강했다.
작은 리그가 유럽의 중심 언어를 만들던 시절
네덜란드 축구의 성취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우승 횟수만이 아니다. 압도적인 내수시장이나 다수의 초대형 도시를 가진 나라가 아니었음에도 서로 다른 클럽이 반복해서 유럽 결승 단계에 진입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 구분 | 조직 | 성과 |
|---|---|---|
| 클럽 | AFC 아약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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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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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V 에인트호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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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대표 |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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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예노르트의 1970년은 네덜란드 축구의 유럽 ‘편입’이 아니라 유럽 정복의 시작이었다. 하펠이 이끈 팀은 낭만적 기교보다 균형과 강도, 전환의 속도를 앞세웠다. 그리고 1971-72 시즌의 아약스는 공식전 단 한 번만 패하고 에레디비시·KNVB 베커·유러피언컵을 모두 쓸어 담았다. 말 그대로 ‘1패 트레블’이었다. 이어진 유러피언컵 3연패는 강팀 하나의 지배를 넘어, 상대가 공을 가질 공간과 생각할 시간까지 파괴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승리였다.
PSV의 1988년 트레블은 또 다른 사실을 말해준다. 네덜란드 축구는 하나의 전술 종교가 아니었다. 공통된 기술·교육 기반 위에서 서로 다른 경쟁 모델을 생산할 수 있는 생태계였다. 그래서 1969년부터 1995년까지의 성취를 황금세대 몇 명의 우연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경제가 망해서 축구가 무너졌다는 설명은 틀렸다
1990년대 에레디비시의 상대적 하강을 네덜란드 경제 침체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공식 통계가 보여주는 방향은 반대다. 네덜란드 경제는 1990년대 후반 성장과 고용 개선을 경험했다. 국가 경제 전체가 무너졌기 때문에 축구가 무너진 것이 아니다.
문제는 축구 산업 안에서 가치가 생성되고 분배되는 속도였다. 1990년대 이후 텔레비전 권리, 유럽 노동시장, 리그 거버넌스와 내수시장 규모가 서로 결합하면서 같은 서유럽 국가 안에서도 리그의 체급이 전혀 다른 속도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이 변화를 몰라서 뒤처진 것도 아니었다. 네덜란드 왕립 축구 협회(Koninklijke Nederlandse Voetbalbond, KNVB; 네덜란드 축구 행정기관)는 1990년대 중반 리그와 대표팀의 집단 중계권을 신설 스포츠 채널 Sport7에 판매하는 상업화 실험을 벌였다. 이어 18개 1부 클럽은 1997년 에레디비시 CV(Eredivisie Commanditaire Vennootschap; 에레디비시 클럽의 공동 상업 조직)를 중심으로 리그의 상업·조직·브랜딩을 별도로 다루기 시작했다.
시도는 빨랐다. 문제는 시장의 깊이였다. Sport7은 안정적인 유료 가입자를 확보하지 못했고 짧은 생을 마쳤다. 네덜란드 축구는 ‘축구는 방송 상품’이라는 현실을 누구보다 일찍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영어권의 거대한 글로벌 미디어 자산처럼 키울 국내외 시장은 갖지 못했다.
1996년의 Sport7 거래는 총 10억4,000만 휠던(gulden; 당시 네덜란드 화폐 단위) 규모로 알려졌고, 기존 공영방송의 제안보다 컸다. KNVB가 지분을 보유한 합작 채널에 장기간 독점 중계권을 맡긴 이 선택은 무모한 도박만은 아니었다. 리그가 중계권의 가치를 이해하고 직접 유통 구조까지 장악하려 한 선제적 실험이었다. 그러나 채널은 가입자 기반과 유통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했다. 상품의 가치를 아는 것과 그 상품을 감당할 시장을 갖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 실패 뒤 18개 클럽이 공동 상업 조직을 세운 일도 같은 맥락에 놓인다. 네덜란드는 상업화를 거부한 낭만적 피해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제도화 속도는 빨랐다. 다만 클럽 공동체, 축구협회, 방송사업자가 나눠 가진 이해관계를 하나의 거대한 수익 엔진으로 묶을 규모와 해외 판매력이 부족했다. 이 차이는 이후 프리미어 리그가 리그 단위의 권리 판매와 균등 분배를 통해 하위권 클럽까지 구매자로 만드는 동안 더 크게 벌어졌다.
상업화의 속도는 빨랐으나 시장의 깊이는 얕았다.
보스만 판결이 이적 시장을 가속한 방식
1995년 보스만 판결은 현대 축구의 노동시장과 이적 체계를 뒤집은 사건이었다. 유럽사법재판소(Court of Justice of the European Union, CJEU; 유럽연합 최고법원)는 계약이 끝난 EU 선수의 회원국 간 이동을 막는 이적료와 국적별 선수 제한이 노동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네덜란드처럼 유소년 육성 효율은 높지만 빅리그보다 임금 지불 능력이 낮은 곳에서 충격은 비대칭적이었다. 클럽은 계속 세계급 선수를 길러냈다. 그러나 계약 종료가 가까워질수록 더 큰 임금을 제시하는 리그 앞에서 협상력은 빠르게 약해졌다.
다만 여기서 보스만을 모든 것의 원인으로 만들면 또 다른 오류가 생긴다. 판결 이전에도 네덜란드의 스타들은 세리에 A와 라리가로 떠났다. 1993년 데니스 베르흐캄프(Dennis Nicolaas Maria Bergkamp; 네덜란드 축구 선수, 1969-)와 빔 용크(Wilhelmus Maria Jonk; 네덜란드 축구 선수·지도자, 1966-)는 인테르로 향했다. 마르코 판바스턴, 뤼트 휠릿과 프랑크 레이카르트는 이미 AC 밀란에서 뛰고 있었다.
보스만 이후 달라진 것은 이동 그 자체가 아니라 이동을 둘러싼 마찰 비용과 협상력이었다. 상위 리그는 계약 만료 선수를 훨씬 쉽게 유인했고, 중소 리그는 핵심 선수를 오래 보유하기 위해 더 이른 재계약과 더 빠른 매각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1995년 아약스의 유럽 제패를 이끈 파트릭 클라위버르트(Patrick Stephan Kluivert; 네덜란드 축구 선수·지도자, 1976-)가 1997년 AC 밀란으로 자유 이적한 장면은 그 변화를 상징한다.
보스만은 네덜란드 축구의 생산력을 파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생산물이 더 빠르게 외부 시장으로 이동하도록 만든 가속기였다.
방송권은 리그를 ‘보유자’와 ‘공급자’로 갈랐다
선수가 어디로 이동하는지는 결국 누가 더 높은 임금을 지속적으로 지급할 수 있는가와 연결된다. 이 지점에서 21세기 유럽 축구의 가장 큰 분기점은 방송권이다.
프리미어 리그는 2025-26시즌부터 네 시즌 동안의 영국 국내 중계권을 67억 파운드에 판매했다. 반면 에레디비시 18개 클럽이 승인한 ESPN 계약은 네덜란드 프로축구 중계를 2030년까지 연장하는 내용이지만, 공식 발표는 거래 총액을 공개하지 않았다. 현지 보도에서 거론된 약 7억5천만 유로를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두 시장의 연간 체급 차이는 명백하다.
돈의 많고 적음만으로는 이 차이를 다 설명할 수 없다. 막대한 중계권은 리그 전체를 구조적 순구매자로 만든다. 반대로 제한된 방송시장은 유소년과 스카우팅으로 만든 자산을 이적시장에서 현금화해야 하는 유인을 강화한다.
네덜란드 리그의 문제는 정체가 아니라 비대칭 성장이다. 아약스·PSV·페예노르트의 매출은 과거보다 커졌다. 리그도 방송 상품과 글로벌 브랜드로 발전했다. 그러나 비교 상대인 프리미어 리그와 유럽 최상위 클럽의 매출·임금·중계권은 그보다 훨씬 빠르게 팽창했다. 성장하고 있는데도 상대적으로 뒤로 밀릴 수 있는 이유다.
정확한 서술은 이렇다.
1990년대 이후 유럽 축구에서는 국가 경제보다 방송시장 구조와 노동시장 통합이 더 직접적인 설명 변수가 되었다. 그 체제에서 네덜란드는 생산자로서 강했으나 보유자로서 약했다.
‘길러서 파는 리그’는 실패한 리그인가
Transfermarkt의 시즌별 집계에서 에레디비시는 장기간 이적수지 흑자를 반복한다. 2025-26시즌도 지출 약 2억4,781만 유로, 수입 약 4억1,953만 유로, 순수지 약 1억7,172만 유로 흑자로 정리된다. 집계는 갱신될 수 있지만 방향은 오랫동안 일관됐다.
표가 말하는 바는 단순하다. 에레디비시가 돈을 못 벌어서 약해진 것이 아니다. 돈을 버는 방식 자체가 ‘사서 쓰는 리그’가 아니라 ‘길러서 파는 리그’가 되었다. 프리미어 리그의 방송권은 리그 전체를 거대한 구매자로 만들었고, 네덜란드의 아카데미와 스카우팅은 그 시장에 공급할 고부가가치 자산을 생산한다.
여기서 셀링 리그를 무능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좋은 선수를 반복해서 찾아내고, 1군에 올리고, 유럽대항전에서 가치를 증명하고, 더 큰 시장에 판매하는 일도 고도의 전문성이다. 오히려 에레디비시는 변화한 시장에 가장 네덜란드다운 방식으로 적응했다. 공간과 선수를 조직하는 능력을 경기장 밖의 사업 모델로 확장한 셈이다.
그러나 그 전문화에는 분명한 대가가 있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경쟁할 팀을 만들 때마다 성공의 주역들이 흩어진다. 다음 세대를 다시 만드는 능력은 남지만, 한 세대가 충분히 오래 함께 머물며 유럽의 질서를 바꿀 시간은 사라진다. 훈련 보상과 이적수익은 아카데미의 손실을 메울 수 있어도 우승권 전력을 보존해주지는 않는다.
에레디비시는 몰락하지 않았다. 승리의 장소가 바뀌었다
네덜란드 축구의 장기사를 관통하는 핵심은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아니라 혁신과 포섭의 반복이다. 다뉴브 학파의 조합 축구는 네덜란드에서 토털 풋볼로 급진화되었고, 미헐스와 크라위프는 그것을 하나의 문법으로 만들었다. 하펠은 그 문법을 우승의 언어로 번역했고, 판할은 다시 운영 체계로 정교화했다.
그렇게 네덜란드는 유럽 축구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 언어의 발신지가 되었다. 1970년, 1971~73년, 1988년과 1995년은 서로 다른 팀의 성공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축구 문화가 낳은 연속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문화는 1990년대 중반 이후 같은 방식으로 축적되지 않았다. 네덜란드가 축구를 몰라서 뒤처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방송권과 리그 상품화에 일찍 뛰어들었다. 다만 그 실험을 영국처럼 초대형 미디어 자산으로 키우기에는 내수와 언어 시장이 작았다. 보스만 이후 유럽 노동시장이 열리자 네덜란드의 강점인 유소년 육성과 전술 교육은 리그 내부의 축적 수단인 동시에 외부 리그의 흡수 대상이 되었다.
선수는 네덜란드에서 배우고, 가치가 폭등하면 더 큰 시장으로 이동한다. 클럽은 그 수익으로 다음 선수를 길러낸다. 이것이 현재의 에레디비시다.
따라서 에레디비시의 변화를 ‘국가 경제 침체 → 리그 쇠퇴’로 읽는 것은 틀렸다. 더 정확한 연결은 방송권과 노동시장의 유럽화 → 상위 리그의 자본 집중 → 네덜란드의 전술·유소년 자본 흡수 → 수출형 리그로의 재편이다.
네덜란드 축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유럽 빅리그의 경기 방식과 세계 정상급 감독들의 전술 어휘 속에도 네덜란드는 살아 있다.
다만 더 이상 그 가치를 가장 오래 자국에서 보유하지 못할 뿐이다.
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