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연방 공화국
Bundesrepublik Deutschland
푸스발-분데스리가
Fußball-Bundesliga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Ballspielverein Borussia 09 e. V. Dortmund노란 벽 이전, 보르시히플라츠의 반란
1909년 12월 19일, 도르트문트 북동부 보르시히플라츠(Borsigplatz; 구단이 태어난 도심 광장)의 선술집 ‘춤 빌트쉬츠’에는 가톨릭 삼위일체 교구 청년들이 모였다. 축구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지도 사제와 맞서 끝까지 자리를 지킨 열여덟 명이 새 구단을 세웠다. 벽에 걸린 지역 양조장의 이름 ‘보루시아’를 가져와 팀 이름으로 삼았고, 오늘의 BVB가 시작됐다.[1]
도르트문트는 루르 공업지대의 석탄과 철강으로 성장한 노동 도시였다. 광산과 제철소의 교대 시간이 도시의 리듬을 만들었고, 축구장은 서로 다른 일터에서 나온 사람들이 같은 색 아래 서는 장소가 됐다. 그래서 이 구단을 설명할 때 관중 수나 트로피보다 먼저 등장하는 말이 Echte Liebe, ‘진짜 사랑’이다. 좋은 계절에만 유지되는 감정이라면 이런 문구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후의 폐허에서 알프레트 프라이슬러가 이끈 팀은 1956년과 1957년 독일 챔피언십을 연달아 차지했다. 1963년에는 푸스발-분데스리가 출범 직전의 마지막 독일 챔피언이 됐고, 1966년 레인저스를 꺾고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을 들어 올리며 독일 구단 최초의 유럽대항전 우승팀이 됐다.[2]
그러나 도르트문트의 역사는 직선으로 상승하지 않았다. 1972년 강등, 재정난, 1976년 복귀를 거쳤다. 1994-95·1995-96시즌 푸스발-분데스리가 2연패 뒤에는 1996-97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 왔지만, 무리한 팽창은 다시 구단의 존립을 위협했다. 2005년 파산 문턱을 통과한 팀은 위르겐 클로프 아래 2010-11·2011-12시즌 푸스발-분데스리가 우승과 2011-12시즌 국내 더블을 일궜고, 2012-13시즌과 2023-24시즌에는 웸블리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까지 돌아갔다.[13]
강팀의 시간만 모으면 도르트문트의 절반을 잃는다. 이곳의 진짜 서사는 무너진 뒤 다시 만원 관중 앞에 서는 능력이다. 남쪽 스탠드 Südtribüne, 곧 ‘노란 벽’은 성공의 장식물이 아니라 그 회복력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든 건축물이다.
HEJA BVB · 폐허, 유럽 정상, 파산 위기와 재건을 지나 남은 열한 명
선정 전술: 리베로를 품은 5-1-3-1
이 조합의 축은 마티아스 자머다. 공을 가졌을 때 그는 세 번째 센터백이 아니라 중원으로 올라오는 첫 번째 플레이메이커가 된다. 위르겐 콜러가 가장 위험한 공격수를 직접 묶고, 마츠 후멜스가 왼발 쪽 전진 패스와 커버를 맡는다. 데데와 슈테판 로이터는 윙백처럼 폭을 넓힌다.
미하엘 초르크는 자머가 비운 자리를 메우며 공격의 속도를 고른다. 안드레아스 묄러는 마지막 패스, 라르스 리켄은 박스 침투, 마르코 로이스는 왼쪽과 중앙을 오가며 슈팅 각을 만든다. 최전방 알프레트 프라이슬러는 마무리만 기다리는 9번이 아니다. 동료를 지휘하고 경기의 감정을 붙드는 주장형 공격수다.
종이에 적으면 5-1-3-1이지만 실제 움직임은 3-4-2-1과 4-2-3-1 사이를 오간다. 서로 다른 시대의 이름을 억지로 같은 전술에 가두기보다, 각자의 장점을 가장 많이 남길 수 있는 가변 구조를 택했다.
1. 골키퍼 - 슈테판 클로스

슈테판 클로스(Stefan Klos; 독일 골키퍼, 1971년생)의 이름은 화려한 선방 모음보다 ‘빠지지 않는 골키퍼’라는 감각으로 남아 있다. 1991-92시즌 오트마어 히츠펠트는 오랫동안 골문을 지킨 테디 데 베어 대신 스무 살의 클로스를 세웠다. 어린 골키퍼가 선배의 자리를 빼앗은 뒤 도르트문트는 UEFA컵 결승, 푸스발-분데스리가 2연패,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계단을 올랐다. 1995-96시즌 33라운드에 엄지손가락이 부러지기 전까지 250경기 연속 출전을 바라볼 만큼 몸과 경기력의 기복이 적었다.[18]
클로스의 장점은 공이 날아온 뒤에만 드러나지 않았다. 슈팅 직전 발을 잘게 놀리며 몸의 중심을 세우고, 낮은 공에는 손만 뻗기보다 몸 전체를 궤도 뒤에 놓았다. 튕겨내더라도 중앙이 아닌 옆으로 보내는 기본기가 좋았다. 지금처럼 골키퍼가 빌드업의 첫 미드필더로 평가받기 전의 선수였지만, 백패스 규정이 바뀐 시대를 통과하며 성급하게 걷어내지 않고 안전한 출구를 찾았다. 콜러처럼 몸을 던지는 수비수 뒤에는 이런 ‘두 번째 사고를 만들지 않는’ 골키퍼가 필요했다.
그를 영웅으로 만든 첫 유럽의 밤은 1993년 오세르 원정이었다. 승부차기에서 프리킥 전문가 엔초 시포의 킥을 막아내며 UEFA컵 결승행을 확정했고, 도르트문트에서는 ‘오세르의 영웅’이라 불렸다. 네 해 뒤 올드 트래퍼드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파상공세를 콜러와 함께 견뎠다. 피터 슈마이켈과 마주한 준결승에서 더 유명한 골키퍼는 반대편에 있었지만, 결승으로 간 골키퍼는 클로스였다.[3]
로만 바이덴펠러는 더 오래 버텼고 클롭 시대의 감정까지 대표한다. 그래도 한 경기의 최고점과 왕조의 출발을 함께 묻는다면 클로스다. 이 팀의 골키퍼에게 요구되는 것은 후방 플레이메이킹보다 자머와 후멜스가 전진한 뒤 찾아오는 단 한 번을 막는 일이다. 도르트문트가 처음 유럽 챔피언이 된 골문에는 가장 조용하고 반복 가능한 답이 서 있다.
2. 리베로 - 마티아스 자머

동독 드레스덴에서 성장한 마티아스 자머(Matthias Sammer; 독일 리베로, 1967년생)는 처음부터 최종 수비수가 아니었다. 중앙 미드필더로 뛰었고, 공을 빼앗은 다음 앞으로 운반하는 감각을 몸에 익힌 뒤 후방으로 내려갔다. 그래서 그의 리베로는 수비수 한 명을 뒤에 더 두는 보수적 장치가 아니었다. 상대 9번이 등을 지면 앞 센터백 뒤에서 공을 회수하고, 고개를 든 순간 직접 중원으로 들어가 숫자를 하나 늘렸다.
핵심은 ‘언제 나가느냐’였다. 너무 일찍 전진하면 뒷공간이 열리고, 늦으면 평범한 스위퍼가 된다. 자머는 패스가 상대 공격수에게 도착하기 전에 간격을 좁혔고, 끊어낸 뒤에는 옆으로 책임을 넘기지 않았다. 짧은 드리블로 첫 압박자를 끌어낸 다음 초르크나 묄러에게 전진 패스를 건넸다. 상대에게는 수비수였던 선수가 몇 초 뒤 중앙 미드필더가 되어 나타나는 셈이다. 이 글의 5-1-3-1이 공을 잡으면 3-4-2-1로 변하는 스위치는 자머 한 사람이다.
1994-95·1995-96시즌 푸스발-분데스리가 2연패와 UEFA 유로 1996 우승은 그 역할이 낭만이 아니라 당대 최정상의 해법이었음을 보여줬다. 대회에서는 독일의 후방 지휘자이자 전진의 시작점이었고, 그해 호나우두와 앨런 시어러를 제치고 발롱도르를 받았다. 지금까지 발롱도르를 수상한 유일한 도르트문트 선수다.[19]
1996-97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는 부상 때문에 최고의 운동능력을 모두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유벤투스가 공을 전개할 때 라인을 정리하고, 로이터와 하인리히가 올라갈 시간을 만들었다. 경기 종료 뒤 주장 완장은 자머에게 있었지만 그는 89분에 들어온 미하엘 초르크가 우승컵을 먼저 들도록 등을 떠밀었다. 경기에서는 전진했고, 시상대에서는 구단의 질서를 먼저 세웠다.[23]
볼프강 파울은 1966년 유럽 제패의 주장이고, 후멜스는 현대적 빌드업 수비수의 완성형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시대의 열한 명을 실제 팀으로 작동시키려면 수비와 중원을 동시에 맡을 수 있는 자머가 필요하다. 베켄바워 이후 사라져가던 리베로를 마지막으로 지배한 선수이면서, 그 위치가 왜 사라졌는지까지 보여준 마지막 황제다.
3. 중앙 수비수 - 위르겐 콜러

위르겐 콜러(Jürgen Kohler; 독일 중앙 수비수, 1965년생)를 단순히 ‘몸을 던지는 파이터’라고 부르면 절반만 본 것이다. 그는 공격수의 발이 아니라 다음 동작을 막았다. 등을 진 상대에게 바짝 붙되 한쪽 방향만 열어주고, 공이 그쪽으로 흐르는 순간 긴 다리를 넣었다. 박스 안에서는 무리하게 먼저 쓰러지지 않았다. 슈팅하는 발과 골문 사이의 가장 짧은 선을 차지한 뒤 끝까지 서 있었기에 마지막 블록이 가능했다.
자머와의 조합은 역할이 선명했다. 자머가 전체 간격을 읽고 앞으로 튀어나가면 콜러는 가장 위험한 공격수를 맡았다. 한 명이 공간을 통제하고 한 명이 사람을 지우니, 도르트문트는 후방 숫자를 유지하면서도 리베로를 중원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 베스트 11에서도 후멜스의 패스와 자머의 전진이 가능한 이유는 오른쪽 뒤편에 콜러가 남기 때문이다.
그 관계가 전설이 된 경기가 1997년 올드 트래퍼드 준결승 2차전이다. 콜러는 세 차례나 골라인에 가까운 곳에서 실점을 막았다. 골키퍼가 이미 반응하기 어려운 공에 발과 머리를 집어넣었고, 칸토나·콜·솔샤르가 이어간 공세를 버텼다. 히츠펠트가 훗날 “콜러가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돌아본 경기였다. 도르트문트 팬들이 그에게 붙인 Fußballgott, ‘축구의 신’이라는 이름은 화려한 공격이 아니라 이 90분의 방어에서 태어났다.[4]
그날의 무게에는 경기 밖의 사연도 있었다. 출국 당일 아내와 함께 아이를 잃는 비극을 겪은 콜러는 아내의 권유 끝에 뒤늦게 맨체스터로 향했다. 이 사실을 승부를 위한 영웅담으로 소비할 수는 없다. 다만 가장 힘든 날 경기장에 섰던 한 인간과,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한 가족의 시간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팬들이 그를 사랑한 이유도 태클의 숫자만은 아니었다.[3]
네벤 수보티치와 크리스티안 뵈른스도 대인 방어의 강도를 높일 수 있다. 그러나 FIFA 월드컵과 UEFA 유러피언 풋볼 챔피언십(통칭 UEFA 유로), UEFA 챔피언스 리그의 가장 큰 무대에서 같은 방식으로 상대 에이스를 지워본 수비수는 콜러다. 그의 수비는 희생적이었지만, 그 희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정확한 거리 계산이었다.
4. 중앙 수비수 - 마츠 후멜스

마츠 후멜스(Mats Hummels; 독일 중앙 수비수, 1988년생)는 상대의 압박을 피하기보다 불러들였다. 공을 발밑에 두고 한 박자 기다리면 상대 공격수가 중앙으로 좁혀온다. 그때 발 바깥쪽으로 측면에 휘어 넣거나, 수비형 미드필더 옆을 가르는 대각 패스로 두 줄을 한꺼번에 넘겼다. 라르스 리켄이 훗날 “여러 세대가 부러워할 기술”이라고 표현한 바깥발 패스는 묘기가 아니라 압박 방향을 역이용하는 무기였다.[20]
수비에서도 기다리기만 하지 않았다. 공격수에게 공이 가는 순간 등을 향해 따라붙고, 첫 터치가 길어지면 앞에서 잘라냈다. 이 전진 수비는 성공하면 곧바로 역습이 되지만, 실패하면 돌아서는 속도가 빠르지 않다는 약점이 노출된다. 그래서 이 조합은 후멜스에게 콜러를 붙인다. 후멜스가 먼저 읽고 나가며 공격을 시작하고, 콜러가 그 선택의 위험을 뒤에서 지운다.
2008년 1월 임대로 처음 왔을 때 도르트문트는 푸스발-분데스리가 13위였다. 클롭의 젊은 팀에서 수보티치와 함께 두 차례 푸스발-분데스리가 우승의 후방을 만들었고, 2012-13시즌 웸블리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섰다. 바이에른으로 떠났다가 돌아온 뒤에는 어린 수비진의 기준점이 되어 2023-24시즌 다시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올랐다. 13년에 걸친 508경기는 초르크 다음으로 많은 도르트문트 공식전 출전이다.[5]
2024년 파리 원정 준결승은 후멜스의 두 얼굴이 한 경기에 모인 장면이었다. 음바페가 있는 방향을 미리 읽어 몸을 넣고, 세트피스에서는 직접 결승골을 넣었다. 스물한 살의 챔피언 팀과 서른다섯 살의 결승 팀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중심이 됐다. 수비수가 도르트문트의 한 시대를 연 뒤, 같은 유니폼으로 그 시대의 마지막 문장까지 쓴 사례다.
볼프강 파울의 주장성과 수보티치의 투지도 강한 경쟁력이다. 하지만 이 열한 명에는 빼앗은 공을 곧바로 로이스와 데데에게 배달할 왼쪽 센터백이 필요하다. 후멜스는 수비를 잘해서만 뽑힌 것이 아니라, 도르트문트의 공격을 자기 진영에서 시작할 수 있어서 뽑혔다.
5. 왼쪽 윙백 - 데데

레오나르두 지 데우스 산투스, 데데(Leonardo de Deus Santos ‘Dedê’; 브라질 왼쪽 수비수, 1978년생)는 미하엘 초르크가 스포츠 디렉터로서 처음 영입한 선수였다. 1998년 스무 살의 브라질 풀백이 도착했을 때 도르트문트는 유럽 챔피언의 환호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13년에는 그 뒤의 추락과 파산 위기, 재건과 다시 찾아온 우승까지 모두 들어 있다. 팀이 바뀔 때마다 왼쪽의 주인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6]
플레이는 직선적이되 단순하지 않았다. 로이스가 안으로 접으면 터치라인 가까이에서 폭을 만들고, 공을 받기 전에 이미 다음 스프린트를 시작했다. 상대 풀백이 로이스를 따라 중앙으로 좁히면 바깥으로 추월했고, 측면을 지키면 로이스가 하프스페이스에서 돌아설 수 있었다. 왼발 크로스도 골문 앞에 높이 올리는 한 가지가 아니라, 수비가 물러설 때는 이른 타이밍에 감아 넣고 끝선에 닿으면 뒤로 낮게 잘라줬다.
공을 잃은 뒤의 속도가 공격만큼 중요했다. 이 조합에서 후멜스가 패스를 넣고 데데가 높이 올라가면 왼쪽 뒤에는 넓은 공간이 남는다. 데데는 첫 세 걸음으로 역습의 방향을 바깥으로 밀어내고, 후멜스가 중앙을 지킬 시간을 번다. 왕복 능력은 그의 장점 목록 중 하나가 아니라 로이스를 자유롭게 만드는 전술적 비용이다.
2008년 개막전에서 십자인대가 파열된 뒤 상황은 달라졌다. 유소년 출신 마르셀 슈멜처가 자리를 잡았고, 데데는 절대적인 주전에서 경쟁자가 되었다. 예전의 폭발력을 모두 되찾지 못했지만 라커룸의 중심으로 남았고, 2010-11시즌 마지막 홈경기에서 우승 방패를 들며 작별했다. 2002년의 챔피언이 클롭의 첫 챔피언 세대까지 연결된 순간이었다.
슈멜처는 압박 전술의 정합성과 주장 경력에서 밀리지 않는다. 하파엘 게헤이루는 중앙에서 경기를 만드는 기술이 더 좋다. 그래도 데데를 고른 까닭은 전성기의 공격성, 398경기의 지속성, 가장 밝은 시기와 가장 어두운 시기를 같은 태도로 건넌 서사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왼쪽 수비수였지만 팬들에게는 한 시대의 표정이었다.
6. 오른쪽 윙백 - 슈테판 로이터

슈테판 로이터(Stefan Reuter; 독일 오른쪽 수비수, 1966년생)의 별명은 Turbo였다. 100미터를 11초 안팎에 달렸다는 유명한 설명만으로는 그 이름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를 다 말하지 못한다. 로이터의 속도는 공을 가진 장면보다 위치를 복구할 때 더 위협적이었다. 공격에 가담한 뒤에도 공이 넘어가는 순간 몸을 돌려 상대 윙어의 첫 선택을 막았다. 빠른 선수가 아니라, 속도를 경기의 질서로 바꿀 줄 아는 선수였다.
1992년 유벤투스에서 돌아온 것은 개인의 이적이면서 도르트문트의 전략을 상징했다. 자머·리들레·묄러·콜러처럼 이탈리아 무대를 경험한 독일 대표급 선수들이 차례로 모였고, 그들은 1995·1996년 리그 정상과 1997년 유럽 정상에 올랐다. 돈을 들여 스타를 모았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로이터는 그 재능들이 한 팀으로 뛰기 위해 필요한 왕복과 반복을 맡았다.[21]
오른쪽 풀백이 기본 위치였지만 스토퍼와 미드필더도 소화했다. 자머가 중원으로 올라가면 로이터는 무조건 함께 전진하지 않고 오른쪽 센터백처럼 좁혀 후방의 네 번째 사람이 됐다. 반대로 묄러가 중앙에서 공을 잡고 상대 측면 수비가 안으로 끌리면 바깥을 전속력으로 추월했다. ‘올라갈 수 있음’보다 ‘올라가도 되는 순간을 앎’이 그의 전술적 가치였다.
1996-97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유벤투스의 왼쪽과 맞선 뒤, 2001-02시즌에는 주장으로 다시 푸스발-분데스리가 우승을 경험했다. 유럽을 제패한 스타 군단과 파산 위기 직전 마지막 챔피언 팀을 모두 뛴 드문 연결고리다. 열두 시즌 동안 수비와 중원 여러 자리를 메웠지만, 어느 자리에서도 자기 역할을 과장하지 않았다.
우카시 피슈체크는 현대 도르트문트의 오른쪽을 더 세련되게 완성했고 공격 연계에서도 강하다. 그럼에도 이 팀은 리베로의 전진을 보상하고 묄러의 자유를 지킬 선수가 필요하다. 로이터의 도르트문트 유산은 은퇴 뒤의 직함이 아니라, 주장 완장을 차고 오른쪽 선을 오르내린 12년과 세 시대를 연결한 전술적 신뢰다.
7. 수비형 미드필더 - 미하엘 초르크

미하엘 초르크(Michael Zorc; 독일 미드필더, 1962년생)는 1978년 유소년팀에 들어와 2022년 스포츠 디렉터직을 내려놓을 때까지 검정과 노랑 안에서 44년을 보냈다. 선수로 572경기 159골. 구단 공식전 최다 출전이며, 득점에서도 프라이슬러 다음 자리를 오랫동안 지켰다. 수비형 미드필더에게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숫자는 그가 단순한 파괴자가 아니었음을 말한다.[7]
초르크는 공을 빼앗은 뒤 서둘러 영웅적인 패스를 찾지 않았다. 몸을 열어 좌우를 확인하고, 상대 압박이 달려오면 짧은 패스로 한 번 더 방향을 바꿨다. 그 한 박자가 묄러에게 앞을 볼 시간을 주고 데데와 로이터를 높은 위치로 보냈다. 수비에서는 센터백 앞을 가로로 이동하며 두 번째 공을 회수했다. 자머가 전진하는 순간에는 빈 중앙을 먼저 채우고, 자머가 돌아오면 다시 박스 근처까지 올라갔다.
159골의 상당 부분은 페널티킥과 세트피스, 늦은 박스 침투에서 나왔다. 공격수가 수비 라인을 끌고 가면 뒤에서 멈춰 서는 대신 골문 쪽으로 한 걸음을 더 옮겼다. 그래서 상대는 묄러와 프라이슬러만 바라볼 수 없다. 이 팀에서도 초르크는 수비 균형을 맡지만, 기회가 오면 가장 늦게 도착해 슈팅하는 숨은 득점원이다.
1996-97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은 그의 성격을 압축한다. 오랫동안 주장이었지만 선발에서 빠졌고 89분에야 묄러 대신 들어왔다. 자머와 동료들은 시상대에서 초르크에게 우승컵을 먼저 들라고 했다. 같은 해 도쿄에서 열린 인터콘티넨털컵 결승에서는 선제골을 넣어 우승의 앞문을 직접 열었다. 유럽의 밤에는 팀의 질서를 받아들였고, 세계의 결승에서는 스스로 해결했다.[23]
선수 은퇴와 동시에 프런트로 이동한 뒤에는 파산 위기와 클롭 시대의 재건을 모두 통과했다. 제바스티안 켈은 더 전형적인 홀딩 미드필더이고 누리 샤힌은 전진 패스가 더 섬세하다. 그러나 자머를 자유롭게 하고, 득점까지 더하며, 주장으로 서로 다른 세대를 묶을 한 사람을 고르면 ‘미스터 도르트문트’가 남는다. 프라이슬러가 첫 기준을 세웠다면 초르크는 그 기준이 끊기지 않도록 평생 연결한 사람이다.
8. 공격형 미드필더 - 안드레아스 묄러

안드레아스 묄러(Andreas Möller; 독일 공격형 미드필더, 1967년생)는 천천히 서서 패스 길을 재는 고전적 10번과 달랐다. 공을 받기 전에 어깨 너머를 보고, 첫 터치로 몸을 전진 방향에 놓았다. 좁은 공간에서 한 명을 벗겨낸 뒤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스루패스와 중거리 슛을 선택했다. 그의 창조성에는 늘 가속도가 붙어 있었다.
1994년 유벤투스에서 돌아왔을 때 도르트문트는 이탈리아를 경험한 독일 대표급 선수들을 모아 유럽의 강호로 올라서고 있었다. 묄러는 리들레와 샤퓌자의 움직임을 읽고, 로이터와 하인리히가 올라올 시간을 골랐다. 앞에 있는 선수를 향해 무조건 찌르는 것이 아니라, 공격수가 수비수의 시선을 끄는 순간 반대편 주자의 길을 열었다. 그래서 그의 도움은 패스 한 번보다 여러 움직임의 마지막 접속에 가까웠다.
1997년 결승에서 그 판단이 두 번 승부를 갈랐다. 카를하인츠 리들레의 두 번째 골은 묄러의 코너킥에서 나왔다. 유벤투스가 한 골을 따라온 뒤에는 교체 투입된 리켄의 질주를 보자마자 수비 뒤로 공을 보냈다. 리켄이 페루치의 머리 위를 넘겨 마무리하며 3-1. 결승의 세 골 가운데 두 골에 묄러의 오른발이 직접 닿았다.[8]
그 결승만의 활약도 아니었다. 올드 트래퍼드 준결승 2차전에서는 시작 8분 만에 리켄의 왼발 골을 도왔다. 이후 경기가 80분 넘는 방어전으로 바뀌었기에 그 한 번의 패스가 도르트문트의 첫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을 열었다. 큰 경기에서 묄러의 가치는 많은 터치보다 상대 수비가 정렬되기 전 내리는 빠른 결정에 있었다.[3]
이 조합에서는 프라이슬러가 내려와 만든 틈, 리켄의 세로 침투, 로이스의 대각 이동을 동시에 본다. 누리 샤힌이나 귄도안은 중원의 전개를 더 안정적으로 만들고, 가가와는 짧은 연계가 더 날렵하다. 그러나 마지막 30미터에서 세 명의 움직임을 한 번에 득점 장면으로 바꾸고 세트피스까지 맡길 선수라면 묄러다. 도르트문트의 1997년은 공격형 미드필더가 경기를 얼마나 빨리 읽을 수 있는지 보여준 그의 대표작이다.
9. 공격형 미드필더 - 라르스 리켄

라르스 리켄(Lars Ricken; 독일 공격형 미드필더, 1976년생)은 공을 오래 만지는 플레이메이커가 아니었다. 상대 미드필더와 수비수 사이에서 몸을 반쯤 열고 기다리다가, 전방 공격수가 내려오면 그가 비운 공간으로 들어갔다. 첫 터치로 공을 소유하는 대신 슈팅이나 다음 패스의 각도를 만들었다. 체격과 힘으로 경기를 지배하지 않아도 수비수의 시선 밖에서 한발 먼저 출발할 수 있었다.
열일곱 살이던 1993년 1군에 올라온 뒤 유럽 무대에서 유난히 큰 장면을 만들었다. 1994년 데포르티보 라코루냐전의 결정적 골, 1997년 올드 트래퍼드 준결승의 선제골이 있었다. 맨체스터에서는 묄러가 공을 잡는 순간 왼쪽 안쪽으로 파고들어 피터 슈마이켈을 낮은 슛으로 무너뜨렸다. 결승의 로빙슛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재능이 아니라, 큰 경기에서 수비 뒤를 먼저 읽어온 선수의 반복이었다.[10]
그래도 그의 선수 경력을 한 장면으로 줄이는 일은 잔인하면서 피하기 어렵다. 1997년 5월 28일 뮌헨. 스무 살의 도르트문트 토박이는 교체로 들어온 지 16초 만에 묄러의 패스를 받았다. 골키퍼 안젤로 페루치가 앞으로 나온 것을 확인한 뒤 별도의 준비 동작 없이 첫 터치로 머리 위를 넘겼다.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교체 선수의 최단 시간 득점이었다.[9]
그 골이 아름다운 이유는 거리나 궤적에만 있지 않다. 유소년팀에서 자란 선수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선수들이 모인 유벤투스를 상대로 자기 도시의 첫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확정했다. 보르시히플라츠에서 시작된 구단의 이야기와 현대 축구의 거대한 결승전이 16초 안에서 만났다. 동시에 그 한 번이 이후의 모든 경력을 가릴 만큼 완벽했다. 잦은 부상과 지나치게 큰 기대 속에서 리켄은 사람들이 상상한 ‘다음 세계 최고’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 명단은 커리어가 한 방향으로만 상승한 선수만 뽑는 자리가 아니다. 리켄은 세 차례 독일 챔피언이 되었고, 묄러의 패스와 프라이슬러의 연계를 득점으로 바꿀 침투자다. 괴체와 가가와가 공을 다루는 재능에서 앞설 수 있어도 도르트문트의 유소년, 가장 결정적인 유럽의 밤, 은퇴 뒤의 육성까지 한 선으로 연결하는 사람은 리켄이다. 2024년 스포츠 부문 경영 책임자가 된 뒤에도 그의 역할은 같다. 다른 사람이 만든 길을 누구보다 먼저 보고 다음 공간으로 들어간다.[10]
10. 공격형 미드필더 - 마르코 로이스

마르코 로이스(Marco Reus; 독일 공격형 미드필더, 1989년생)는 도르트문트에서 태어나 BVB 유소년팀에서 열 해를 보냈지만 그곳에서 곧장 1군 선수가 되지는 못했다. 체격이 작다는 평가 속에 로트바이스 알렌으로 떠났고 묀헨글라트바흐에서 폭발했다. 2012년 독일 올해의 선수가 되어 돌아온 것은 성공한 유망주의 영입이면서, 한 번 놓친 고향 선수가 자기 힘으로 다시 문을 연 귀환이었다.
로이스의 가장 좋은 장면은 드리블 횟수가 많지 않다. 왼쪽 하프스페이스에서 공을 받기 전 몸을 안쪽으로 열고, 첫 터치로 수비수의 바깥발을 건드린 뒤 두세 걸음 안에 슈팅했다. 상대가 슈팅을 막으려고 좁히면 프라이슬러와 리켄에게 짧은 패스를 주고 곧바로 뒷공간으로 다시 움직였다. 공을 오래 소유해 수비를 무너뜨리기보다 패스와 이동을 한 세트로 반복해 수비수의 무게중심을 흔들었다.
왼발과 오른발의 균형도 인상과 실제가 재미있게 엇갈린다. 왼쪽에서 뛰고 몸의 선이 부드러워 왼발잡이처럼 보이지만, 푸스발-분데스리가 득점의 대부분은 오른발에서 나왔다. 왼쪽에서 중앙으로 접어 먼 골문을 감거나, 박스 정면에서 골키퍼의 준비가 끝나기 전에 낮게 차는 슛이 주무기였다. 이 조합에서는 데데가 바깥 폭을 맡아주기에 로이스가 가장 위험한 안쪽 통로에서 출발할 수 있다.[11]
2012-13시즌 첫 UEFA 챔피언스 리그 여정부터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득점하며 웸블리까지 갔다. 2018-19시즌에는 주장으로 전반기를 질주했고 두 번째 독일 올해의 선수가 됐다. 부상이 반복돼 2014 FIFA 월드컵을 놓쳤고, 2023년 마지막 날에는 푸스발-분데스리가 우승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이 경력을 ‘우승하지 못한 천재’라는 문장으로만 묶기 쉬운 이유다. 하지만 그는 2017년과 2021년 DFB-포칼을 실제로 들어 올렸고, 두 차례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도달했다.[22]
프라이슬러 이후 누구도 닿지 못했던 구단 득점 2위까지 올라갔다. 마지막 홈경기 직전 427경기 169골이었고, 다름슈타트전에서는 직접 얻은 프리킥을 골대 상단에 꽂아 한 골을 더 보탰다. 데뷔 홈경기의 첫 골부터 마지막 홈경기의 프리킥까지, 로이스의 오른발은 12년의 시작과 끝을 닫는 괄호가 됐다.[11]
괴체·가가와·귄도안은 클롭 시대의 특정 전술을 더 선명하게 대표할 수 있다. 로이스는 그 시대가 끝난 뒤에도 남아 여러 감독과 여러 실패를 통과했다. 떠날 수 있을 때 남았다는 사실만으로 선정을 낭만화할 필요는 없다. 득점, 도움, 공간 침투, 압박 전환에서 이미 역대급 성취를 남겼다. 다만 그 실력 위에 고향과의 관계가 겹쳤기에, 현대 도르트문트의 얼굴을 고르는 질문에는 결국 로이스가 답이 된다.
11. 센터 포워드 - 알프레트 프라이슬러

도르트문트 역대 최다 득점자.
1956·1957년 독일 챔피언의 주장.
검정과 노랑의 첫 황금기를 만든 지휘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신.알프레트 ‘아디’ 프라이슬러(Alfred ‘Adi’ Preißler; 독일 공격수, 1921-2003)는 이 글의 마지막 선수이자 모든 논쟁의 출발점이다. 클럽이 세계적 브랜드가 되기 전, 푸스발-분데스리가가 생기기 전, 텔레비전의 축구가 일상이 되기 전에 그는 도르트문트라는 이름을 독일 축구의 정상에 새겼다. 지금의 기준으로 옛 득점 기록만 비교하면 그의 크기를 놓친다. 프라이슬러 이전의 BVB와 이후의 BVB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봐야 한다.
1946년 합류한 뒤 1948-49, 1949-50시즌 오버리가 서부 득점왕이 됐다. 하지만 첫 전국 결승에서는 만하임을 상대로 연장 120분 끝에 2-3으로 졌다. 프로이센 뮌스터로 옮긴 뒤에도 1951년 결승에서 준우승했다. 두 번 정상 바로 앞에서 멈춘 공격수는 1952년 도르트문트로 돌아왔고, 마침내 주장으로 1956년 첫 독일 챔피언십 우승컵을 들었다. 이듬해에는 결승 선발 11명을 한 명도 바꾸지 않은 팀으로 2연패를 완성했다.[12]
그를 고정된 센터 포워드로 그리면 실제 영향력이 작아진다. 프라이슬러는 전방에서 내려와 공을 받고, 몸을 돌려 양옆 공격수의 출발을 골랐다. 직접 박스에 들어가 마무리하면서도 경기의 속도와 동료의 위치를 지휘했다. 구단 공식 회고가 그를 득점자이자 플레이메이커, 정신적 지도자로 함께 부르는 이유다. 이 베스트 11에서는 묄러가 공을 몰고 올라올 때 잠시 내려와 벽이 되고, 리켄과 로이스가 안쪽으로 달려들 길을 연다.
알프레트 켈바사(Alfred Kelbassa; 독일 공격수), 알프레트 니피에클로(Alfred Niepieklo; 독일 공격수)와 이룬 ‘세 명의 알프레트’가 그 원형이었다. 힘과 문전 침투를 갖춘 동료들 사이에서 프라이슬러는 공과 사람을 연결했다. 세 사람의 이름이 같은 우연은 별명이 되었지만, 실제 강점은 각기 다른 움직임이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1956·1957년의 연속 우승은 한 명의 득점왕이 아니라 조합을 지휘한 주장 프라이슬러의 작품이었다.
도르트문트 공식 기록은 프라이슬러에게 구단 최다 177골을 부여한다. 로타어 에메리히의 왼발, 레반도프스키의 완성도, 홀란의 득점 속도는 특정 능력에서 그보다 강할 수 있다. 그러나 프라이슬러의 기록에는 전국적 권위가 없던 팀을 첫 챔피언으로 만든 과정과, 두 번의 결승 패배 뒤 돌아와 기준을 세운 책임이 함께 들어 있다. 후대의 공격수들은 이미 커진 도르트문트에서 위대해졌지만, 프라이슬러는 도르트문트를 위대한 팀으로 만들면서 위대해졌다.
프라이슬러가 남긴 가장 유명한 문장은 “모든 이론은 회색이지만 중요한 것은 경기장 위에 있다”는 뜻으로 전해진다. 전술과 기록을 길게 논한 이 글의 마지막에 그 말을 놓으면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생각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결국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데 가깝다. 광산과 양조장의 도시에서 태어난 구단이 가진 노동의 감각, 예상을 뒤집고 다시 일어서는 기질이 이 한 문장에 담겼다.
자머는 가장 높은 개인상을 받은 선수이고, 초르크는 가장 긴 시간을 바친 사람이며, 로이스는 현대 도르트문트의 얼굴이다. 그래도 그들 모두를 비교할 수 있는 무대 자체를 처음 만든 사람은 프라이슬러다. 첫 전국 우승의 주장, 역대 최다 득점자, 전방의 지휘자. 그래서 이 명단의 최전방은 단순한 1위가 아니라 기원에 바치는 자리다. 도르트문트의 신은 프라이슬러다.
열한 명 뒤에 남은 또 다른 도르트문트
로만 바이덴펠러, 볼프강 파울, 네벤 수보티치, 우카시 피슈체크, 제바스티안 켈, 누리 샤힌, 야쿠프 브와슈치코프스키, 로타어 에메리히, 지크프리트 헬트, 슈테판 샤퓌자. 이 이름들만으로도 전혀 다른 베스트 11을 만들 수 있다. 3군에는 귄도안, 가가와, 괴체, 레반도프스키, 피에르에므리크 오바므양, 홀란까지 내려간다.
좋은 역대 베스트 11은 논쟁을 끝내는 명단이 아니다. 한 구단의 기억이 얼마나 두꺼운지 보여주고, 독자가 자기 열한 명을 다시 고르게 만드는 명단이다. 아래 네 장은 2025년 원고를 위해 만든 표제, 포메이션, 2군, 3군을 한 흐름으로 보존한 것이다.
이미지 밖에서 다시 읽는 2군
- 로만 바이덴펠러Roman Weidenfeller · 골키퍼
클롭 시대의 후방을 지키며 2011·2012년 리그 우승과 2013년 웸블리를 함께했다.
- 볼프강 파울Wolfgang Paul · 중앙 수비수
1966년 컵위너스컵 우승팀의 주장으로 독일 구단 최초의 유럽 제패를 이끌었다.
- 크리스티안 뵈른스Christian Wörns · 중앙 수비수
2000년대 초 강한 대인 방어와 리더십으로 수비 라인을 이끌었다.
- 네벤 수보티치Neven Subotić · 중앙 수비수
공중전과 투지로 클롭의 높은 압박 뒤를 지킨 더블 우승기의 전사.
- 우카시 피슈체크Łukasz Piszczek · 오른쪽 수비수
수비수와 윙어의 경계를 오가며 2010년대 오른쪽을 완성했다.
- 디터 쿠라트Dieter Kurrat · 수비형 미드필더
작은 체구와 거대한 활동량으로 1960년대 황금기의 균형을 맡았다.
- 제바스티안 켈Sebastian Kehl · 수비형 미드필더
2002·2011·2012년 세 번의 리그 우승을 연결한 주장과 중원의 방패.
- 누리 샤힌Nuri Şahin · 중앙 미드필더
2010-11시즌 빌드업의 방향을 정하며 젊은 챔피언의 두뇌가 됐다.
- 아키 슈미트Alfred Schmidt · 공격형 미드필더
1950~60년대의 창조성과 득점으로 첫 황금기의 세대를 이었다.
- 야쿠프 브와슈치코프스키Jakub Błaszczykowski · 오른쪽 윙어
직선적인 돌파와 헌신으로 클롭 시대의 오른쪽에 속도와 온기를 더했다.
- 만프레트 부르크스뮐러Manfred Burgsmüller · 세컨드 스트라이커
1970~80년대의 어려운 시간을 득점으로 버틴 다재다능한 공격수.
- 알프레트 니피에클로Alfred Niepieklo · 센터 포워드
프라이슬러·켈바사와 ‘세 명의 알프레트’를 이루어 2연패를 만들었다.
- 로타어 에메리히Lothar Emmerich · 센터 포워드
강력한 왼발과 득점력으로 1966년 유럽 우승기의 공격을 상징했다.
- 지크프리트 헬트Siegfried Held · 센터 포워드
에메리히와 호흡을 맞추며 1960년대 전방의 속도와 연결을 책임졌다.
- 슈테판 샤퓌자Stéphane Chapuisat · 센터 포워드
1990년대 왕조에서 공간 침투와 결정력을 제공한 스위스 해결사.
3군과 주요 후보
- 하인리히 크비아트코프스키골키퍼
1950년대 독일 챔피언십 2연패를 지킨 국가대표 수문장.
- 한스 틸코프스키골키퍼
1960년대 정상급 위치 선정으로 1963년 독일 챔피언의 골문을 지켰다.
- 크리스토프 메첼더중앙 수비수
2001-02시즌 푸스발-분데스리가 우승과 UEFA컵 결승에서 젊은 후방의 중심을 맡았다.
- 니코 슐로터베크중앙 수비수
적극적인 전진 수비와 왼발 패스로 현대 도르트문트의 후방을 이끈다.
- 외르크 하인리히왼쪽 수비수
측면 전체를 소화하며 1997년 유럽 제패팀의 전술 폭을 넓혔다.
- 마르셀 슈멜처왼쪽 수비수
유소년 출신 주장으로 클롭 시대의 압박과 왕복을 묵묵히 수행했다.
- 하파엘 게헤이루왼쪽 수비수
측면과 중앙을 오가는 기술로 후방 전개의 질을 높였다.
- 게르트 칠리악스오른쪽 수비수
전후 재건기와 첫 독일 챔피언십 세대의 오른쪽을 지켰다.
- 로타어 후버오른쪽 수비수
1970~80년대 측면을 오래 지킨 주장형 수비수.
- 케빈 그로스크로이츠오른쪽 수비수
도르트문트 출신의 에너지로 여러 자리를 메우며 더블에 기여했다.
- 폴 램버트수비형 미드필더
1997년 결승에서 지단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첫 골을 도왔다.
- 스벤 벤더수비형 미드필더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압박과 커버로 젊은 챔피언을 보호했다.
- 엠레 잔수비형 미드필더
수비와 중원을 오가며 2023-24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팀의 주장을 맡았다.
- 일카이 귄도안중앙 미드필더
압박을 풀어내는 방향 전환과 전진으로 2012년 더블 이후의 정점을 만들었다.
- 주드 벨링엄중앙 미드필더
십대의 나이에 중원의 모든 구역을 책임진 현대의 거대한 재능.
- 마리오 괴체공격형 미드필더
좁은 공간의 터치와 침투로 클롭 시대 공격의 창조성을 대표했다.
- 가가와 신지공격형 미드필더
빠른 연계와 박스 침투로 2010-12년 공격의 리듬을 바꿨다.
- 헨리크 미키타리안공격형 미드필더
득점과 도움을 함께 폭발시키며 2015-16시즌 공격을 지휘했다.
- 프리트헬름 코니츠카세컨드 스트라이커
1963년 푸스발-분데스리가 역사상 첫 골을 넣은 도르트문트 공격수.
- 알프레트 켈바사센터 포워드
‘세 명의 알프레트’의 강력한 문전 해결사이자 2연패의 핵심.
- 위르겐 쉬츠센터 포워드
1960년대 초 날카로운 득점 감각으로 공격의 세대교체를 이끌었다.
- 프랑크 밀센터 포워드
움직임과 연계로 1989년 DFB-포칼 우승기의 전방을 이끌었다.
- 카를하인츠 리들레센터 포워드
1997년 결승에서 두 골을 넣어 유럽 챔피언의 길을 열었다.
- 얀 콜러센터 포워드
압도적 높이와 부드러운 연계로 2002년 우승팀의 기준점이 됐다.
-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센터 포워드
압박형 공격수에서 세계적 9번으로 성장하며 더블을 완성했다.
- 피에르에므리크 오바므양센터 포워드
폭발적인 뒷공간 침투와 득점왕 시즌으로 포스트 클롭 시대를 이끌었다.
- 엘링 홀란센터 포워드
짧은 재임에도 유럽 무대의 득점 속도를 새로 쓴 파괴적 골잡이.
출처와 기록 기준
- BVB: 1909년 창단, 보르시히플라츠와 열여덟 창립자
- BVB: 1956년 첫 독일 챔피언과 1966년 독일 구단 최초 유럽대항전 우승
- BVB: 1997년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클로스·콜러의 준결승 방어
- BVB: 올드 트래퍼드에서 ‘축구의 신’이 된 위르겐 콜러
- BVB: 마츠 후멜스 508경기와 두 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 BVB: 데데 398경기, 13골, 55도움과 13년
- BVB: 미하엘 초르크 572경기 159골과 44년
- UEFA: 1997년 결승 공식 경기 회고와 묄러·리켄의 세 번째 골
- UEFA: 라르스 리켄의 교체 16초 만의 결승 득점
- BVB: 라르스 리켄의 선수·유소년·경영자 경력
- BVB: 마르코 로이스의 경기·득점 기록과 마지막 홈경기
- BVB: 아디 프라이슬러의 1956·1957년 우승과 구단 기록
- BVB: 2005년 파산 위기와 클롭 시대의 재건
- 마르코 로이스 표지 사진: Tim Reckmann, CC BY-SA 3.0
- 지그날 이두나 파르크 표지 배경: Marvin Ronsdorf, CC0 1.0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문장 원본과 파일 정보
- 2025년 네이버 원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역대 베스트 11
- BVB KidsClub: 슈테판 클로스의 주전 도약, 오세르의 영웅과 연속 출전
- BVB: 1996년 발롱도르 수상자 마티아스 자머
- BVB: 마츠 후멜스의 13년과 바깥발 패스
- BVB: 이탈리아 경험자들의 귀환과 1997년 유럽 제패팀 구성
- BVB: 마르코 로이스의 귀환, 주장 경력과 2019년 독일 올해의 선수
- BVB: 1997년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선발과 주장 초르크의 시상식
- 정사각 목록 카드의 2015년 마르코 로이스 사진: Tim Reckmann, CC BY 2.0
이 글이 만들어진 방식
이 글은 박성호(삥이)가 2025년 네이버에 공개한 원고와 완성 편집물을 1차 저본으로 삼고, 2026년 8월 21일 현재 BVB와 UEFA의 기록을 다시 대조해 확장한 개정판이다. 선수 선정과 ‘프라이슬러가 도르트문트의 신’이라는 중심 평가는 원저자의 판단을 그대로 잇는다. 원고에 있던 지리 표현, 슈테판 로이터의 은퇴 후 경력, 마르코 로이스의 DFB-포칼 이력처럼 사실과 어긋나거나 오해를 낳는 부분은 공식 자료에 맞춰 바로잡았다.
선수별 세로 편집물에는 인물 선정, 사진 탐색, 기록 조사, 원어·별칭 표기, 검정·노랑·금색의 색채 설계, 정보 위계, 프레임과 배경, 수상·우승 내역의 배열이 함께 들어 있다. 표제·포메이션·2군·3군 명단 또한 한 세계를 전제로 설계한 연속 시각물이다. 이 기존 편집물은 모두 박성호(삥이)가 Adobe Photoshop에서 한 장씩 직접 제작했으며, 생성형 AI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번 사이트 개정은 원본을 축소 카드로 분해하지 않고 이미지 속 기록까지 읽을 수 있는 폭으로 보존했다.
사이트용 16:9 대표 썸네일은 생성형 AI를 쓰지 않았다. Tim Reckmann의 2014년 로이스 사진(CC BY-SA 3.0), Marvin Ronsdorf의 경기장 사진(CC0 1.0), 기존 BVB 문장을 박성호(삥이)·삥이FC가 직접 크롭·색보정·합성하고 타이포그래피를 설계했다. CC BY-SA 원본을 바탕으로 만든 이 대표 이미지는 같은 CC BY-SA 3.0 조건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저자·원문·라이선스 표시를 유지해야 한다.
카테고리 목록의 1:1 카드는 Tim Reckmann이 2015년에 촬영한 로이스 사진(CC BY 2.0)을 실제 인물 원본으로 삼아 얼굴과 상반신에 초점을 맞추고, Codex 내장 이미지 생성 편집으로 검정·노랑 정보판과 결합했다. 사진 속 인물을 다른 얼굴로 대체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정사각 목록에서 로이스의 얼굴과 도르트문트 유니폼이 선명하게 읽히도록 재구성한 편집물이다. 사진 저자·원문·라이선스와 생성형 편집 사실을 함께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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