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연방 공화국
Bundesrepublik Deutschland
푸스발-분데스리가
Fußball-Bundesliga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Borussia Verein für Leibesübungen 1900 Mönchengladbach e. V.독일 연방 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1949년 수립된 독일의 공식 국호)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묀헨글라트바흐(Mönchengladbach; 라인강 서쪽의 도시)가 있다. 섬유 산업으로 성장한 이 도시는 쾰른이나 뒤셀도르프처럼 거대한 중심지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태어난 축구단도 1963년 푸스발-분데스리가 창립 회원으로 선택받지 못했다.
1964년 헤네스 바이스바일러(Hennes Weisweiler; 독일 축구감독, 1919-1983)가 부임했을 때 1군의 평균 연령은 21.5세였다. 젊은 선수들은 공격할 때마다 앞으로 쏟아졌고, 재정과 명성이 더 큰 구단을 겁내지 않았다. 기자들은 그 거침없는 질주를 보고 Die Fohlen, ‘망아지들’이라 불렀다. 별명은 곧 구단의 정체성이 되었다.[1]
1970년 첫 분데스리가 우승, 이듬해 리그 최초의 2연패, 1975년부터 1977년까지의 3연패. 1975년과 1979년에는 UEFA컵을 들었고 1977년 유러피언컵 결승에 닿았다. 이 팀의 황금기는 우승 횟수만으로 온전히 적히지 않는다. 바이언이 철과 기둥으로 제국을 세울 때 묀헨글라트바흐는 속도와 교환, 젊음의 무모함으로 축구의 문법을 흔들었다. 유럽이 만난 것은 승리하는 팀인 동시에 축구라는 게임의 진화를 시험하던 실험실이었다.[2]
Die Fohlen · 초록과 검정에 남은 청춘의 속도
열한 자리를 고른 방식
이 명단은 1970년대의 한 시즌을 복원한 사진이 아니다. 창세기의 알베르트 브륄스, 황금기의 네처·포크츠·하인케스, 왕조가 저문 뒤의 빌프리트 하네스와 파트리크 안데르손까지 구단의 서로 다른 시간을 연결했다. 네처가 공을 오래 소유할 자유, 비머가 그 자유의 비용을 지불할 체력, 본호프가 다음 시대로 건네는 힘을 한 중원에 놓았다. 포메이션은 4-3-2-1을 바탕으로 공을 가진 순간 여러 갈래로 풀어진다.
1. 볼프강 클레프|골키퍼

볼프강 클레프(Wolfgang Kleff; 독일 축구선수·골키퍼, 1946-)는 망아지들의 질주가 끝나는 곳을 지켰다. 공격 숫자를 늘린 팀은 필연적으로 넓은 배후를 내주었고, 그는 골문에 붙어 기다리기보다 먼저 거리를 줄이고 수비수에게 다음 위치를 요구했다. 요란한 몸짓보다 각도와 기세로 일대일을 닫는 골키퍼였다.
1973년 UEFA컵 결승과 1977년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리버풀을 넘지 못한 기억도 그의 역사다. 그 사이 분데스리가 다섯 차례, 1973년 DFB-포칼, 1975년 UEFA컵을 함께했다. 유럽 정상으로 솟아오른 팀과 정상에서 내려오는 팀의 골문을 모두 본 사람. 클레프의 긴 재임은 묀헨글라트바흐 황금기의 시작과 끝을 재는 눈금이다.
바이스바일러의 수비는 골키퍼에게 편안한 저녁을 약속하지 않았다. 좌우 풀백이 전진하고 중원이 공을 잃으면 상대 공격수와 넓은 잔디를 마주해야 했다. 클레프는 페널티 지역 앞까지 나와 스루패스의 속도를 죽였고, 잡은 공을 오래 품기보다 측면으로 빠르게 보내 공격의 박자를 다시 붙였다. 1975년 UEFA컵 결승 2차전에서 트벤테를 5-1로 무너뜨린 선발 명단의 맨 뒤에도 그가 있었다. 한 팀의 공격성이 골키퍼의 성격에서 시작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10]
2. 빌프리트 하네스|중앙 수비수

빌프리트 하네스(Wilfried Hannes; 독일 축구선수·수비수, 1957-)는 영광과 침묵 사이를 지킨 그림자였다. 1975년에 합류한 장신 수비수는 공중볼을 처리한 뒤 공을 버리지 않았고, 후방에서 한 줄을 건너뛰는 패스로 공격을 다시 살렸다. 리베로와 대인 수비를 오갈 수 있었기에 포크츠가 측면을 밀어 올리는 순간에도 수비의 중심은 쉽게 기울지 않았다.
1979년 UEFA컵 우승은 왕조의 마지막 유럽 트로피였다. 이후 간판들이 하나씩 떠난 자리에서도 하네스는 1986년까지 남았다. 정점의 환호를 기억하면서 과도기의 무게까지 받아낸 수비수에게 화려한 별명은 필요하지 않다. 팀이 품위를 잃지 않고 내려올 수 있었던 까닭이 그의 침착한 첫 패스 안에 있었다.
하네스는 상대 9번을 따라가는 스토퍼와 남은 공간을 읽는 리베로의 문법을 모두 알았다. 188cm의 신장은 높은 공에서 우위를 주었지만 그의 진짜 가치는 헤더 이후에 드러났다. 세컨드 볼의 낙하지점을 향해 한 발 먼저 움직이고, 압박이 비면 직접 중원으로 전진했다. 1980-81시즌에는 수비수의 위치에서 분데스리가 16골을 넣었다. 세트피스와 페널티킥, 전진 능력까지 후방 자원의 범위를 넓힌 수치다. 어린 시절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도 최고 수준의 거리 판단을 완성했다는 생애는 그 침착함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3. 파트리크 안데르손|중앙 수비수

파트리크 안데르손(Patrik Jonas Andersson; 스웨덴 축구선수·수비수, 1971-)은 1970년대의 낭만을 직접 살지 않은 이 명단의 증언자다.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수비를 이끈 그는 강한 몸싸움과 공중볼, 패스의 절제를 결합했다. 과거의 이름만으로 버틸 수 없던 시기에 묀헨글라트바흐가 1995년 DFB-포칼을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후방의 기준을 세웠다.
이후 바이언과 바르셀로나로 이어진 경력은 그 판단력이 유럽의 높은 단계에서도 통했음을 보여준다. 전통은 전성기의 모양을 반복해서 살아남지 않는다. 안데르손은 황금빛 기억을 1990년대의 단단한 문법으로 번역했다.
1995년 포칼 결승에서 볼프스부르크를 상대할 때에도 그는 수비의 기준점이었다. 앞선 압박이 벗겨지면 무작정 달려들지 않고 물러서며 동료가 복귀할 시간을 벌었고, 몸을 비스듬히 세워 공격수를 불편한 방향으로 몰았다. 공을 얻은 뒤에는 짧은 패스로 압박을 끌어낸 다음 대각선 전환으로 반대편을 열었다. 훗날 바이언의 2001년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결정한 마지막 리그 경기에서 간접 프리킥을 성공시킨 강심장은 묀헨글라트바흐 시절부터 길러진 것이었다.
4. 한스위르겐 클링하머|왼쪽 풀백

한스위르겐 클링하머(Hans-Jürgen Klinkhammer; 독일 축구선수·수비수, 1953-)의 장점은 장면을 빼앗지 않는 데 있었다. 공을 가진 동료의 길을 막지 않고, 측면과 중앙 사이에서 위험이 커지기 전에 자리를 메웠다. 풀백이 조용할수록 팀은 안전하다는 오래된 명제를 가장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가 1군에서 뛴 1970년대 중후반, 팀은 리그 정상과 유럽대항전 결승을 일상처럼 오갔다. 스포트라이트는 네처와 시몬센, 하인케스에게 향했지만 그 빛이 오래 머물도록 전선을 정리한 사람도 필요했다. 클링하머는 묀헨글라트바흐의 거대한 시대가 오직 천재들의 즉흥으로 세워진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는 전형적인 오버래핑 풀백처럼 터치라인 끝까지 매번 질주하지 않았다. 왼쪽 공격수가 안으로 접을 때 후방의 패스 길을 만들고, 반대쪽 포크츠가 올라가면 세 번째 중앙 수비수처럼 폭을 좁혔다. 1975년 UEFA컵 결승 2차전과 1977년 유러피언컵 결승의 선발 명단에 모두 이름을 올린 사실은 역할의 신뢰도를 말해준다.[10][11] 결승의 조명 아래에서도 평소와 같은 간격을 유지하는 능력, 그것이 황금기 팀에서 클링하머가 얻은 자리였다.
5. 베르티 포크츠|오른쪽 풀백

묀헨글라트바흐의 첫 분데스리가 우승부터 마지막 UEFA컵 우승까지.
구단 공식전 500경기 이상을 오직 한 문장으로 연결한 주장.
1974년 월드컵 결승, 요한 크라위프의 자유를 끝까지 추적한 수비수.
선수로 월드컵을 들고 감독으로 UEFA 유로를 제패한 독일 축구의 얼굴.
카푸, 자우마 산투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 릴리앙 튀람과 함께 오른쪽 수비의 권능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불려 나오는 이름.베르티 포크츠(Hans-Hubert “Berti” Vogts; 독일 축구선수·감독, 1946-)에게 Der Terrier, ‘테리어’라는 별명은 체격을 뜻하지 않았다. 상대가 공을 놓는 순간까지 물러서지 않는 집중력, 첫 방향 전환을 읽는 눈, 한 번 빼앗긴 뒤에도 다시 달라붙는 집요함이 작은 몸을 거대한 방어 체계로 만들었다.
1974년 월드컵 결승은 베켄바워와 크라위프의 왕좌전으로 기억된다. 그 왕좌 아래에서 크라위프의 동선을 따라간 사람은 포크츠였다. 네덜란드의 10번이 중앙으로 내려오면 중앙까지, 측면으로 흘러가면 측면까지 쫓았다. 수비는 상대를 지우는 행위에 그치지 않았다. 크라위프가 원하는 박자로 경기가 흐르지 못하게 함으로써 서독이 자기 시간을 되찾는 일이었다.
오른쪽 풀백의 최고 계보를 세우면 카푸, 자우마 산투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튀람과 포크츠가 권능의 영역을 이룬다. 다니 아우베스와 필리프 람, 주세페 베르고미, 클라우디오 젠틸레, 안토니오 카브리니를 그다음 줄에서 논하는 구분은 공격 포인트의 합계가 아니다. 한 시대의 전술을 대표하면서 국가와 클럽의 가장 높은 압력까지 견딘 시간의 무게다.
그 무게의 클럽 쪽 이름은 묀헨글라트바흐다. 1965년부터 1979년까지 한 팀에서 뛰며 다섯 번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두 번의 UEFA컵 우승을 모두 겪었다. 동료들은 그를 위해 공간을 열었고, 그는 동료들이 자유를 누린 뒤 남는 위험을 회수했다. 이 구단에서 ‘베르티’는 세 글자의 애칭이 아니라 수비가 지켜야 할 윤리였다.[3]
6. 헤르베르트 비머|중앙 미드필더

헤르베르트 비머(Herbert Wimmer; 독일 축구선수·미드필더, 1944-)는 소음을 제거하고 본질만 남긴 중원의 전사였다. 네처가 고개를 들고 먼 곳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비머가 가까운 위험을 먼저 치웠기 때문이다. 압박의 첫 걸음, 패스 길을 닫는 각도, 동료가 비운 공간을 향한 반복 주행이 창조자의 시간을 벌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보조자와 주인공으로만 나누면 묀헨글라트바흐의 축구를 놓친다. 네처의 패스가 팀을 앞으로 당겼다면 비머의 회수는 그 팀이 다시 시도할 권리를 만들었다. UEFA 유로 1972와 1974년 월드컵을 품은 서독에서도 같은 기능이 빛났다. 그는 화려함의 반대편이 아니라 화려함을 가능하게 한 구조였다.
별명 Iron Lung, ‘철의 폐’는 장거리 주행만을 가리킨 찬사가 아니었다. 비머는 네처가 왼쪽 깊숙이 내려가면 그 앞의 하프스페이스를 채우고, 10번이 공을 잃는 순간에는 가장 가까운 패스 길부터 지웠다. 공격에서는 박스 바깥에 머물다가 늦게 침투해 수비의 시선을 갈랐다. UEFA 유로 1972 결승에서는 네처의 슈팅이 골키퍼에게 맞고 흐르자 두 번째 골을 넣었다. UEFA 대회 베스트 XI는 그를 지칠 줄 모르는 선수로 기억한다. 366회의 분데스리가 경기를 한 구단에서 치르며 다섯 리그 우승을 함께한 지속성이 그 별명의 완성이다.[12]
7. 라이너 본호프|중앙 미드필더

라이너 본호프(Rainer Bonhof; 독일 축구선수·미드필더, 1952-)는 네처가 떠난 뒤에도 왕조가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증명이었다. 강한 슈팅과 긴 패스, 넓은 활동 범위, 측면으로 흘러 크로스를 올릴 수 있는 유연함을 한 몸에 담았다. 네처가 불꽃이고 비머가 뿌리였다면 본호프는 그 둘의 유산을 다음 시대의 동력으로 바꾼 터빈이었다.
1974년 월드컵 결승에서 게르트 뮐러의 결승골로 이어진 패스를 건넸고, 클럽에서는 네 차례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1975년 UEFA컵을 함께했다. 발렌시아로 향한 1978년의 이적도 독일 미드필더가 국경 밖에서 전술적 권위를 인정받은 이른 사례였다. 오늘날 그는 구단의 행정가로 돌아와 과거를 전시하는 대신 미래에 연결한다. UEFA가 하인케스와 본호프를 두고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보루시아도 없다’는 구단의 평가를 전한 이유다.[4]
본호프의 오른발은 중원을 통과하는 것과 중원을 생략하는 것을 모두 허락했다. 낮고 빠른 패스로 압박 사이를 찌르다가 상대가 안쪽을 잠그면 오른쪽으로 흘러 긴 크로스를 올렸다. 직접 프리킥과 중거리 슈팅은 수비 라인을 앞으로 끌어냈고, 그 틈을 시몬센과 하인케스가 사용했다. 1977년 로마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는 초반 슈팅으로 골대를 때렸다. 우승자는 리버풀이었으나 묀헨글라트바흐가 유럽의 가장 높은 경기에서도 먼저 상대를 흔들 수 있음을 보여준 장면이었다.[11]
8. 귄터 네처|공격형 미드필더

독일 축구가 낳은 첫 번째 팝스타, 묀헨글라트바흐의 창조를 인간의 모습으로 빚은 10번.
귄터 네처(Günter Theodor Netzer; 독일 축구선수·플레이메이커, 1944-)는 긴 금발과 페라리, 나이트클럽, 반항적인 태도까지 축구선수의 사생활이 문화면의 사건이 될 수 있음을 처음 보여준 서독의 팝스타였다. 그러나 그 이미지가 오래 살아남은 까닭은 공이 그의 발을 떠날 때마다 경기장의 질서가 실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분데스리가 공식 회고도 그를 당시 묀헨글라트바흐 공격의 중심이자 독일 축구 최초의 팝스타로 부른다.[5]
낮게 내려와 센터백에게 공을 요구하고, 몸을 반쯤 연 채 전방을 훑은 뒤 수십 미터를 한 번에 접는 패스를 보냈다. 롱패스는 거리를 과시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상대의 압박이 미처 뒤돌아보기 전에 동료를 다음 장면으로 옮기는 시간의 지배였다. 프리츠 발터와 로타어 마테우스 사이에 독일 역대 중원을 세울 때 네처가 먼저 자리 잡는 이유도 이 능력에 있다. 그의 창조성은 장식이 아니라 팀 전체가 숨 쉬는 방식이었다.

볼프강 오베라트(Wolfgang Overath; 독일 축구선수·미드필더, 1943-)와의 경쟁은 잔니 리베라와 산드로 마촐라를 두고 갈라졌던 이탈리아의 논쟁만큼이나 시대를 드러낸다. 오베라트는 균형과 지속성에 강했고 네처는 한 번의 패스로 경기의 법칙을 바꾸었다. 오베라트가 부상으로 빠진 UEFA 유로 1972에서 네처가 지휘한 서독은 대회의 기준이 되었고, 1974년 월드컵에서는 다시 오베라트가 중심에 섰다. 한쪽을 낮춰야 다른 한쪽이 커지는 경쟁이 아니었다. 독일 축구가 질서와 자유 가운데 어느 얼굴로 세계를 마주할지를 묻던 양자택일이었다.[6]
1973년 DFB-포칼 결승, 네처는 선발에서 빠졌다. 연장전이 시작되기 전 감독의 지시를 기다리는 대신 “그럼 이제 제가 뛰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스스로 교체 투입되었다. 잠시 뒤 결승골을 넣었다. 오만과 천재성이 한 장면에서 구별되지 않는 순간, 그는 묀헨글라트바흐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전설로 닫고 레알 마드리드로 떠났다.[2]
9. 알베르트 브륄스|세컨드 스트라이커

알베르트 브륄스(Albert Brülls; 독일 축구선수·공격수, 1937-2004)는 망아지 군단이 태어나기 전 묀헨글라트바흐가 꾸었던 첫 번째 큰 꿈이었다. 공장 견습생으로 일하던 소년은 구단의 공격을 이끌어 1960년 DFB-포칼, 팀의 첫 메이저 트로피를 안겼다. 이 우승이 없었다면 훗날의 젊은 왕조도 자신들이 전국 무대에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2]
1962년 이탈리아로 떠난 선택은 당시 서독 선수에게 드문 길이었다. 세리에 A가 그의 패스와 침투를 원했다는 사실은 브륄스가 지역 영웅에 머물지 않았음을 말한다. 공격형 미드필더와 안쪽 공격수를 넘나든 그는 구단의 창세기와 유럽을 잇는 첫 문이었다.
브륄스는 고정된 센터 포워드보다 공을 찾아 움직이는 내부 공격수에 가까웠다. 중원까지 내려와 패스를 받은 뒤 짧은 드리블로 수비수를 끌고 나왔고, 동료가 만든 틈에는 다시 문전으로 파고들었다. 1960년 포칼 우승 과정에서 보여준 득점과 조율은 지역 대회의 강호였던 팀을 전국의 시야 안으로 옮겼다. 이후 모데나와 브레시아에서 뛰며 이탈리아의 촘촘한 수비를 경험한 경력은, 훗날 묀헨글라트바흐가 유럽의 전술을 흡수하고 되돌려주는 구단이 될 것임을 먼저 예고했다.
10. 알란 시몬센|세컨드 스트라이커

알란 시몬센(Allan Rodenkam Simonsen; 덴마크 축구선수·공격수, 1952-)은 작은 몸으로 묀헨글라트바흐의 역사를 세계사에 연결했다. 첫 두 시즌에는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빠른 방향 전환과 양발의 마무리, 측면과 중앙을 오가는 움직임으로 왕조의 최전선에 올랐다. 1977년 발롱도르는 리버풀과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패한 팀의 공격수가 유럽 최고의 개인으로 선택된 사건이었다.
그는 유러피언컵, UEFA컵, 컵위너스컵 결승에서 모두 득점한 유일한 선수로 기록된다. 서로 다른 세 유럽대항전의 마지막 무대에서 골을 남겼다는 사실은 한 체격이나 한 전술에 갇히지 않았던 공격수의 범위를 보여준다. 덴마크 축구가 훗날 라우드루프 형제와 크리스티안 에릭센을 낳기 전, 세계는 시몬센을 통해 그 나라의 창조성을 먼저 배웠다.[7]
공을 받을 때의 첫 방향이 시몬센의 무기였다. 터치라인 쪽으로 열어 수비수를 따라오게 만든 뒤 안쪽으로 급히 꺾었고, 좁은 보폭으로 두 번째 접촉까지 가져가 슈팅 각을 확보했다. 1975년 트벤테와의 UEFA컵 결승 2차전에서는 시작 3분 만에 골을 넣고 마지막 페널티킥까지 책임졌다. 1977년 로마에서는 리버풀 골문 오른쪽 위를 찌르는 동점골을 남겼다.[10][11] 가장 큰 무대에서 수비가 좁힌 공간을 오히려 출발점으로 삼았으니, 발롱도르는 왕조의 명성에 얹힌 상이 아니라 그가 직접 만든 결승의 흔적이었다.
11. 유프 하인케스|센터 포워드

그는 태어났고, 골을 넣었고, 묀헨글라트바흐가 되었다.도시가 한 사람의 이름을 빌려 자기 황금기를 기억하는 방식.
유프 하인케스(Josef “Jupp” Heynckes; 독일 축구선수·감독, 1945-)를 현대의 기억은 2013년 바이언 트레블의 명장으로 먼저 부른다. 묀헨글라트바흐에서 그의 이름은 전술판 바깥으로 더 멀리 퍼진다. 이 도시에서 태어나 지역의 유소년 축구를 거쳐 보루시아의 최전방에 섰고, 은퇴 뒤 곧바로 같은 팀의 감독이 되었다. 선수와 감독의 경계를 넘어 도시가 가장 찬란했던 계절을 몸 안에 보관한 상징이다.
분데스리가 369경기 220골. 게르트 뮐러와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의 초월적 수치가 놓인 리그에서도 하인케스는 역대 네 번째 득점자로 남아 있다. 두 골 이상 넣은 경기가 51번이며, 이 부문에서 그보다 앞선 선수도 두 사람뿐이다. 1973-74시즌 30골, 1974-75시즌 27골로 연속 득점왕에 올랐다. 두 시즌째의 끝에는 트벤테와의 UEFA컵 결승 2차전 해트트릭이 기다렸다.[8][9]
하인케스의 골은 큰 몸으로 수비를 밀어내는 한 가지 공식에서 나오지 않았다. 수비수의 시선이 공으로 향하는 순간 등 뒤를 비집고, 동료의 첫 터치가 놓일 지점을 먼저 읽었다. 양발과 머리로 끝낼 수 있었기에 골문 앞에서 특정 방향을 강요받지 않았다. 침투의 출발은 조용했고 결과는 폭발적이었다. 망아지들의 복잡한 움직임이 마지막에 도착해야 할 좌표를 그가 알고 있었다.
선수로 네 차례 분데스리가를 제패하고 1975년 UEFA컵을 들었다. 감독으로 돌아와서는 1979년부터 1987년까지 다음 세대의 팀을 길렀다. 게르트 뮐러와 레반도프스키가 분데스리가 득점의 두 극점이라면, 하인케스는 그 사이에서 클럽·도시·선수·감독을 하나로 묶은 독자적인 천외천이다. 묀헨글라트바흐라는 지명이 한 인간의 생애와 이렇게 정확히 겹치는 경우는 축구사에도 드물다.
최종 베스트 11과 이어지는 명단
2군 명단
- 우베 캄프스Uwe Kamps · 골키퍼
한 구단에서 20년 가까이 골문을 지킨 1990년대의 얼굴.
- 얀 조머Yann Sommer · 골키퍼
반사 신경과 발밑으로 현대 묀헨글라트바흐의 후방을 이끌었다.
- 호르스트 비트캄프Horst Wittkamp · 중앙 수비수
초기 황금기의 수비와 중원을 오간 전술적 연결자.
- 한스 브룬스Hans-Günter Bruns · 중앙 수비수
1980년대 후방의 여러 역할을 맡은 다기능 수비수.
- 마티아스 긴터Matthias Ginter · 중앙 수비수
빌드업과 제공권으로 현대 수비의 중심을 맡았다.
- 마르틴 포렌트Martin Porrent · 왼쪽 수비수
초기 구단사의 왼쪽을 지킨 이름.
- 필리프 담스Filip Daems · 왼쪽 수비수
주장으로 2000년대 후반과 재도약기를 연결했다.
- 울리 슈틸리케Ulrich Stielike · 수비형 미드필더
황금기 말기 수비와 중원을 넘나든 세계적 재능.
- 디트마어 다너Dietmar Danner · 중앙 미드필더
강한 활동량으로 1970년대 중원의 깊이를 더했다.
- 로타어 마테우스Lothar Matthäus · 중앙 미드필더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가 되기 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폭발한 청춘.
- 우베 란Uwe Rahn · 공격형 미드필더
1987년 독일 올해의 선수와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함께 차지했다.
- 슈테판 에펜베르크Stefan Effenberg · 공격형 미드필더
두 차례의 재임에서 중원의 성격과 공격성을 바꾸었다.
- 라르스 슈틴들Lars Stindl · 공격형 미드필더
주장과 해결사를 겸하며 현대 구단의 품위를 지켰다.
- 헤닝 옌센Henning Jensen · 세컨드 스트라이커
덴마크 기술의 첫 물결로 황금기 공격을 넓혔다.
- 헤르베르트 라우멘Herbert Laumen · 센터 포워드
첫 리그 우승 세대의 문전 득점을 책임졌다.
3군과 주요 후보
- 볼프강 크나이프골키퍼
클레프와 경쟁하며 1970년대 후반 골문의 깊이를 지킨 장신 수문장.
- 케이시 켈러Kasey Keller · 골키퍼
강한 일대일 방어와 경험으로 2000년대 중반의 주장까지 맡았다.
- 마르크안드레 테어 슈테겐Marc-André ter Stegen · 골키퍼
유소년팀에서 성장해 발밑 좋은 현대 골키퍼의 가능성을 먼저 보였다.
- 클라우스디터 지엘로프Klaus-Dieter Sieloff · 중앙 수비수
분데스리가 초창기 후방에 대인 수비와 강한 킥을 더했다.
- 프랑크 셰퍼Frank Schäffer · 중앙 수비수
1975년 UEFA컵 우승기의 중앙을 지킨 황금기 수비수.
- 한스게오르크 놀렌더스중앙 수비수
승격 전후의 시대를 잇고 초기 분데스리가 수비에 몸을 보탰다.
- 토니 얀치케Tony Jantschke · 중앙 수비수
유소년부터 1군까지 한 구단을 지키며 수비 전 포지션을 소화했다.
- 단치 봉핑Dante Bonfim Costa Santos · 중앙 수비수
강한 제공권과 전진 패스로 2010년대 재도약의 기반을 놓았다.
- 니코 엘베디Nico Elvedi · 중앙 수비수
빠른 커버와 빌드업으로 현대 수비 라인의 장기적인 축이 되었다.
- 오스카르 벤트Oscar Wendt · 왼쪽 풀백
안정된 전진과 왼발 킥으로 한 시대의 왼쪽을 오래 책임졌다.
- 카를 콜리크수비형 미드필더
구단사의 이른 시기에 수비 앞 공간을 지킨 중원의 노동자.
- 카를하인츠 호흐슈테터Karl-Heinz Hochstätter · 수비형 미드필더
1980년대의 압박과 전환을 연결하며 중원에 균형을 더했다.
- 크리스토프 크라머Christoph Kramer · 중앙 미드필더
왕성한 활동량과 압박 회피로 현대 팀의 리듬을 조율했다.
- 플로리안 노이하우스Florian Neuhaus · 중앙 미드필더
전진 패스와 박스 침투로 중원에 창조적인 결을 보탰다.
- 후안 아랑고Juan Arango · 왼쪽 미드필더
정교한 왼발과 프리킥으로 승격 이후의 팀에 낭만을 되돌렸다.
- 마르코 로이스Marco Reus · 공격형 미드필더
폭발적인 운반과 득점으로 2011-12시즌의 유럽 무대 복귀를 이끌었다.
- 하파에우Raffael · 공격형 미드필더
부드러운 연계와 골 결정력으로 파브르 시대 공격의 중심에 섰다.
- 요나스 호프만Jonas Hofmann · 공격형 미드필더
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압박·침투·마지막 패스를 함께 제공했다.
- 울리히 르 페브르왼쪽 윙어
1970년대 초 측면에서 속도와 폭을 공급한 공격 자원.
- 파트리크 헤어만Patrick Herrmann · 오른쪽 윙어
유소년 출신의 빠른 침투로 2010년대 반등을 상징했다.
- 베른트 루프Bernd Rupp · 센터 포워드
승격기와 초기 분데스리가에서 공격의 날을 세운 해결사.
- 하랄트 니켈Harald Nickel · 센터 포워드
강한 슈팅과 득점 감각으로 1970년대 말 전방을 보충했다.
- 한스 크리엔스Hans-Jörg Criens · 센터 포워드
교체 출전에서도 경기를 바꿔 ‘조커’의 전형으로 사랑받았다.
- 프랑크 밀Frank Mill · 센터 포워드
빠른 움직임과 문전 감각으로 1980년대 초 공격을 이끌었다.
- 마르틴 달린Martin Dahlin · 센터 포워드
힘과 속도를 겸비해 1990년대 포칼 우승기의 전방을 책임졌다.
- 하이코 헤를리히Heiko Herrlich · 센터 포워드
1994-95시즌 분데스리가 득점왕과 DFB-포칼 우승을 함께 거머쥐었다.
- 올리버 뇌빌Oliver Neuville · 센터 포워드
노련한 침투와 주장 역할로 강등과 재승격의 시간을 버텼다.
출처와 기록 기준
- UEFA: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창립·승격·망아지 군단의 탄생
- UEFA: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설명하는 열 가지 장면과 공식 우승 기록
- DFB: 베르티 포크츠의 선수·감독 경력
- UEFA: 라이너 본호프와 유프 하인케스가 남긴 구단의 유산
- 푸스발-분데스리가: 귄터 네처, 독일 축구 최초의 팝스타
- DFB: 볼프강 오베라트와 귄터 네처의 대표팀 경쟁
- UEFA: 알란 시몬센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유럽대항전
- 푸스발-분데스리가: 유프 하인케스의 369경기 220골과 득점 기록
- UEFA: 1975년 UEFA컵 결승, 하인케스의 해트트릭
- UEFA: 1975년 UEFA컵 결승 공식 선발과 득점 기록
- UEFA: 1977년 유러피언컵 결승과 묀헨글라트바흐의 경기
- UEFA: UEFA 유로 1972 베스트 XI, 헤르베르트 비머
- 푸스발-분데스리가 공식 상징 원본과 권리 정보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문장 원본과 파일 정보
이 글이 만들어진 방식
이 글은 박성호(삥이)가 2025년 네이버에 공개한 원고와 완성 편집물을 1차 저본으로 삼고, 2026년 8월 21일 현재 UEFA·DFB·푸스발-분데스리가의 자료와 다시 대조한 개정판이다. 당시 원고에 섞여 있던 대회 명칭과 우승 횟수의 오류는 공식 기록에 맞춰 바로잡았다. 열한 명은 통산 기록의 합계로 줄 세우지 않았다. 묀헨글라트바흐에서 맞은 전성기, 구단사의 전환점, 각 시대의 전술적 역할, 한 대형 안에서 서로의 자유를 보존할 수 있는지를 함께 평가했다.
선수별 세로 편집물에는 인물 선정, 사진 탐색, 기록 조사, 원어·별칭 표기, 초록과 검정의 색채 설계, 정보 위계, 프레임과 배경, 수상·우승 내역의 배열이 함께 들어 있다. 표제·포메이션·2군·3군 명단 또한 한 세계를 전제로 설계한 연속 시각물이다. 이 기존 편집물은 모두 박성호(삥이)가 Adobe Photoshop에서 한 장씩 직접 제작했으며, 생성형 AI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번 사이트 개정은 그 원본을 축소 카드로 분해하지 않고, 이미지 속 기록까지 읽을 수 있는 폭으로 보존했다.
이미지와 권리에 관한 편집 원칙
완성 편집물에 포함된 선수 사진은 인물을 식별하고 해당 선수의 경기사적 의미를 비평·교육·정보 전달하기 위한 문맥에서 제한적으로 사용한다. 원사진을 독립 감상물이나 다운로드 자료로 재배포하지 않으며, 기록·해설·선정 논리·새로운 정보 위계와 시각 구성을 결합했다. 편집적 창작성과 원사진의 권리는 서로 다른 층위이므로 자체 기여는 분명히 밝히되 원사진의 권리까지 소유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구단·리그 문장은 식별과 설명의 문맥에서 사용하며 공식 후원이나 제휴를 뜻하지 않는다. 명백한 오류, 정정 요청 또는 구체적인 권리 근거를 갖춘 삭제 요청은 문의 페이지에서 접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