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메아차(Giuseppe Meazza; 이탈리아 축구선수·공격수, 1910-1979)가 현역에서 물러난 뒤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Football Club Internazionale Milano; ‘밀라노의 국제적인 축구단’을 뜻하는 구단 공식명)가 다시 유럽 축구의 중심에 선 시기가 있었다. 안젤로 모라티(Angelo Moratti; 이탈리아 기업가·인테르 회장, 1909-1981) 회장이 판을 키우고, ‘마법사’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 아르헨티나 태생 축구감독, 1910-1997)가 전술과 심리를 함께 다뤘다. 그 아래에서 산드로 마촐라·루이스 수아레스 미라몬테스·자친토 파케티 같은 거물들이 검정과 파랑의 줄무늬 안에서 하나로 움직였다. 이름만 늘어놓아도 호화롭지만, 이 팀의 진짜 매력은 그 재능들이 서로의 빈칸을 정확히 메웠다는 데 있다.

이 팀을 가리키는 이름이 라 그란데 인테르(La Grande Inter; 위대한 인테르)다. 1940년대 이탈리아를 지배한 라 그란데 토리노(La Grande Torino; ‘위대한 토리노’를 뜻하는 1940년대 토리노 FC 왕조의 별칭)가 먼저 떠오르는 표현이기도 하다. 두 왕조 사이에는 묘한 혈연도 있다. 라 그란데 토리노의 주장이었던 발렌티노 마촐라(Valentino Mazzola; 이탈리아 축구선수·공격수, 1919-1949)의 아들 산드로 마촐라가, 이번에는 인테르 황금기의 공격을 이끌었다.

다만 1960-1972년을 한 감독의 고정된 팀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에레라의 재임기는 1960-1968년이고, 1970-71시즌 스쿠데토와 1972년 유러피언컵 준우승은 그 유산이 다음 시대로 이어진 장면에 가깝다. 이 글은 한 경기의 선발을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 긴 전성기를 설명할 베스트 11이다.

선정 과정에서는 이름값보다 역할을 먼저 봤다. 누가 더 유명한가보다, 피키가 비운 자리를 누가 메우고 수아레스의 패스를 누가 다음 장면으로 이어갈 수 있는지를 따졌다. 그렇게 한 자리씩 채운 명단이 실제 역사와 어디에서 만나는지는 글의 마지막에서 확인한다.

FOOTBALL CLUB INTERNAZIONALE MILANO1960-1972

La Grande Inter · 유럽을 두 번 연속 제패한 네라주리(Nerazzurri; ‘검정과 파랑’을 뜻하는 인테르의 별칭) 왕조

그란데 인테르가 남긴 숫자

유러피언컵 트로피2유러피언컵 우승
유러피언컵 트로피2유러피언컵 준우승
세리에 A 우승 트로피4세리에 A 우승
인테르컨티넨탈컵 트로피2인테르컨티넨탈컵 우승
발롱도르 트로피5발롱도르 포디움

그란데 인테르를 단순히 ‘수비만 한 팀’이라고 설명하면 절반도 보지 못한 셈이다. 아리스티데 과르네리는 당시 팀을 돌아보며 “우리에겐 다섯 명의 정상급 공격수가 있었고, 산 시로에서는 결코 수비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피키가 마지막 공간을 읽고, 과르네리와 부르니치가 상대를 지우는 동안 파케티는 왼쪽을 타고 전진했다. 그 앞에서는 수아레스가 경기의 설계도를 그리고, 마촐라·코르소·자이르가 서로 다른 속도로 골문을 흔들었다.[2]

‘빗장 수비의 나라’라는 편리한 오해

한국에서 이탈리아 축구는 오랫동안 ‘수비의 본고장’이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됐다. 카테나초(catenaccio; ‘빗장’을 뜻하는 이탈리아식 수비 전술 계열)는 ‘빗장 수비’가 됐고, 그 말 뒤에는 한 골을 넣은 다음 선수 전원이 골문 앞으로 물러나는 장면이 따라붙었다. 짧은 기사와 중계 멘트로 전달하기에는 이보다 편리한 표현도 없었다. 너무 편리해서, 어느 순간 이탈리아 축구의 한 가지 장점이 그 나라 축구 전체의 성격을 대신해버렸다.

그란데 인테르를 보면 이 설명이 얼마나 많은 장면을 지웠는지 알 수 있다. 피키는 최후방에서 동료가 놓친 공간을 읽었고, 과르네리와 부르니치는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익숙한 ‘빗장’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수비의 목적은 선수들을 골문 앞에 묶어두는 데 있지 않았다.

파케티는 왼쪽 풀백의 자리에서 하프라인을 넘어 페널티 지역까지 들어갔다. 부르니치는 반대편에 남아 그 전진의 위험을 나눠 가졌고, 피키는 두 선수 뒤에서 마지막 공간을 정리했다. 수아레스는 낮은 위치에서 짧은 패스로 상대를 끌어들인 다음 긴 패스로 공격 방향을 바꿨다. 코르소가 왼쪽에서 안으로 들어오면 파케티가 바깥을 차지했고, 오른쪽의 자이르는 수비수가 자세를 고쳐 잡기 전에 세로로 달렸다. 그 끝에서는 마촐라가 패스와 득점을 연결했다.

지금의 전술 용어로 옮겨보면 구조가 더 선명해진다. 비대칭 풀백, 후방 빌드업, 전환 공격, 레스트 디펜스(rest defence; 공격 중에도 상대 역습에 대비해 후방의 수적·위치적 균형을 남겨두는 구조)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풀백 한 명을 전진시키고 반대편 수비수를 남겨 균형을 잡는 방식, 낮은 위치의 미드필더가 반대편 윙어에게 긴 패스를 보내 압박 방향을 바꾸는 방식이 이미 한 팀 안에서 맞물렸다.

그런데 그 기능들은 1960년대의 그란데 인테르 안에서도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선수들이 오늘날의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훈련 방식과 경기 속도, 잔디 상태와 포메이션의 출발점도 달랐다. 그렇다고 그 시대의 선수들이 제자리에서 공이 오기만 기다렸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제야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그 움직임까지 이제야 태어난 것은 아니다.

1960년대의 풀백은 자기 진영에서 제자리 점프나 하고, 윙어는 사이드라인만 따라 달렸으며, 수비수는 공을 멀리 걷어내기만 했다고 생각하는가. 송구스럽지만, 그것은 LA 코리아타운의 삼겹살이 유명하다는 말만 듣고 “삼겹살은 원래 LA 음식이군”이라고 결론 내리는 알래스카의 알렉산더 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LA도, 한국도 경험하지 못했지만 멀리서 건너온 한 문장만으로 전체 역사를 완성해버린 셈이다.

과거의 경기 영상이 적다는 사실과 과거의 축구가 단순했다는 결론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성이 없다. 기록이 부족하면 더 조심해서 봐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반대로 행동한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비워두는 대신, 그 자리를 ‘옛날 축구는 단순했다’는 상상으로 채운다.

그란데 인테르는 현대 축구를 미리 완성한 팀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적이라고 부르는 여러 역할의 원형을 자기 시대의 언어로 조직한 팀이었다. 피키의 커버, 파케티의 전진, 부르니치의 균형, 수아레스의 방향 전환, 코르소와 자이르의 비대칭, 마촐라의 연결은 따로 떨어진 개인기가 아니었다. 서로의 위험을 분담하도록 설계된 하나의 체계였다.

그래서 과르네리의 회고가 중요하다. 빗장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그 빗장은 공격수를 가두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문을 언제 열어도 되는지 확신하기 위해 설치한 빗장이었다. 이탈리아 축구의 수비 전통은 공격수들의 화려함과 반대편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수비의 정밀함이 파케티의 질주를 허락했고, 수아레스의 긴 패스를 보호했으며, 코르소와 자이르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모험할 수 있게 했다.

그란데 인테르의 위대함은 수비를 포기하고 공격했다는 데 있지 않다. 수비를 가장 잘 이해했기 때문에 공격의 위험까지 체계적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삥이가 당시 원고와 함께 고른 BGMDAY6 - Welcome to the Show페이지 안에서 재생됩니다

YouTube에서 원본 보기

삥이가 고른 베스트 11

사르티, 피키, 과르네리, 파케티, 부르니치, 타그닌, 루이스 수아레스, 산드로 마촐라, 마리오 코르소, 자이르 다코스타, 아우렐리오 밀라니로 구성한 그란데 인테르 베스트 11
삥이가 선정한 그란데 인테르 베스트 11. 선수들의 주된 역할을 기준으로 배치한 편집 포메이션이다.

이 명단의 뼈대는 피키의 리베로와 타그닌의 대인 방어다. 수아레스가 낮은 위치에서 공을 배급하면 마촐라가 공격의 높이를 바꾸고, 코르소와 자이르가 좌우의 성격을 완전히 다르게 만든다. 중앙에는 밀라니가 버티고, 파케티는 수비수라는 출발점을 잊게 할 만큼 깊이 올라간다.

1. 줄리아노 사르티|골키퍼

줄리아노 사르티 선수 디자인 카드
GK · GOALKEEPER

줄리아노 사르티

Giuliano Sarti
국적
이탈리아
인테르 소속
1963-1968
선정 근거
유러피언컵 2연패 골키퍼

줄리아노 사르티(Giuliano Sarti; 이탈리아 축구선수·골키퍼, 1933-2017)는 피오렌티나에서 이미 유러피언컵 결승을 경험한 골키퍼였다. 그러니 1963년 인테르에 온 그는 큰 무대를 처음 구경하는 신참이 아니라, 결승전의 공기가 얼마나 무거운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첫 시즌부터 상대가 알프레도 디스테파노(Alfredo Di Stéfano; 아르헨티나 태생 축구선수·공격수, 1926-2014)와 푸슈카시 페렌츠(Puskás Ferenc; 헝가리 축구선수·공격수, 1927-2006)의 레알 마드리드였다. 경기 전 워밍업에서 통증까지 느꼈지만, 사르티는 그대로 골문에 섰다.

이듬해 벤피카와의 결승은 더 골키퍼다운 밤이었다. 빗물에 잠긴 산 시로, 한 골의 리드, 그리고 반대편에서 계속 날아오는 에우제비우(Eusébio da Silva Ferreira; 모잠비크 태생 포르투갈 축구선수·공격수, 1942-2014)의 슈팅. 공격수는 한 번 성공하면 영웅이 되지만 골키퍼는 한 번 놓치면 모든 선방이 지워진다. 사르티는 그 긴장을 끝까지 버텼다. 레프 야신(Lev Yashin; 소련 축구선수·골키퍼, 1929-1990)이 동시대 골키퍼의 절대적인 기준이었다면, 클럽 무대에서 그 기준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이름 가운데 하나가 사르티였다.[3]

2. 아르만도 피키|리베로

아르만도 피키 선수 디자인 카드
SW · LIBERO

아르만도 피키

Armando Picchi
국적
이탈리아
인테르 소속
1960-1967
선정 근거
주장·최후방 설계자

그란데 인테르의 주장 아르만도 피키(Armando Picchi; 이탈리아 축구선수·리베로, 1935-1971)는 골키퍼 앞의 마지막 수비수이면서, 수비가 끝난 뒤 첫 패스를 결정하는 리베로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한 걸음 뒤’다. 상대 공격수와 같은 선에서 매번 몸을 부딪치는 대신, 동료가 놓칠 다음 장면을 먼저 읽었다. 파케티가 앞으로 사라지고 대인 수비수들이 각자의 상대를 따라가도 최후방이 텅 빈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이유다.

카테나초(catenaccio; ‘빗장’을 뜻하는 이탈리아식 수비 전술 계열)를 선수 전원이 골문 앞에 늘어선 장면으로만 상상하면 피키의 축구를 놓치게 된다. 그가 뒤를 책임졌기에 파케티는 올라갈 수 있었고, 전방의 다섯 재능도 수비 불안에 붙잡히지 않았다. 중계 화면에서 피키가 화려한 태클을 하지 않는 순간조차 그의 업적이었다. 이미 위험이 될 길을 닫아 놓았기 때문이다. 인테르 공식 기록이 그를 1960년 입단 뒤 모든 것을 이룬 라 그란데 인테르의 중심으로 설명하는 이유다.[4]

3. 아리스티데 과르네리|중앙 수비수

아리스티데 과르네리 선수 디자인 카드
CB · CENTRE BACK

아리스티데 과르네리

Aristide Guarneri
국적
이탈리아
인테르 소속
1958-1967, 1969-1970
선정 근거
대인 방어와 위치 선정

아리스티데 과르네리(Aristide Guarneri; 이탈리아 축구선수·중앙 수비수, 1938-)는 피키가 뒤에서 전체를 읽을 수 있도록 눈앞의 싸움을 정리한 수비수였다. 공격수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재미없는 상대였을 것이다. 공을 받았는데 돌아설 수 없고, 겨우 몸을 돌렸을 때는 이미 패스 길이 닫혀 있다. 과르네리는 화려한 태클로 장면을 끝내기보다 위험한 장면이 시작될 조건부터 없앴다.

1958년부터 거의 10년에 걸쳐 첫 번째 황금기를 통과했고, 잠시 팀을 떠난 뒤에도 다시 돌아왔다. 훗날 그는 그란데 인테르를 “다섯 명의 정상급 공격수와 단단한 수비가 자연스럽게 성장한 팀”으로 기억했다. 당사자의 이 말은 꽤 중요하다. 바깥에서는 빗장만 보였지만, 안에서 뛰던 선수는 공격수 다섯 명을 먼저 떠올렸다. 그란데 인테르를 수비 축구라는 한 단어에 가두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2]

4. 자친토 파케티|왼쪽 풀백

자친토 파케티 선수 디자인 카드
LB · LEFT BACK

자친토 파케티

Giacinto Facchetti
국적
이탈리아
인테르 소속
1960-1978
선정 근거
공격형 풀백의 개척자

자친토 파케티(Giacinto Facchetti; 이탈리아 축구선수·왼쪽 풀백, 1942-2006)는 레프트백이라는 자리의 지도를 바꾼 선수였다. 지금이야 풀백이 상대 페널티 지역까지 올라가는 장면이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수비수 한 명이 자기 자리를 비운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다. 큰 키의 파케티가 긴 보폭으로 하프라인을 넘기 시작하면 그 모험은 곧 정해진 공격 패턴이 됐다. 상대는 윙어만 막아서는 왼쪽을 닫을 수 없었다.

인테르에서만 17년을 뛰며 주장과 구단 회장까지 지낸 상징이기도 하다. 구단 공식 기록 기준 634경기 75골. 수비수의 득점 기록이라고 생각하면 숫자의 인상이 달라진다. 네 차례 스쿠데토와 두 차례 유러피언컵, 두 차례 인테르컨티넨탈컵을 남겼고, 훗날 정장을 입고도 같은 구단을 이끌었다. 공격하는 풀백의 계보를 말할 때 니우통 산투스(Nílton dos Santos; 브라질 축구선수·왼쪽 풀백, 1925-2013)와 함께 가장 먼저 불려야 할 이름이다.[5]

5. 타르치시오 부르니치|오른쪽 풀백

타르치시오 부르니치 선수 디자인 카드
RB · RIGHT BACK

타르치시오 부르니치

Tarcisio Burgnich
국적
이탈리아
인테르 소속
1962-1974
선정 근거
강인한 대인 수비와 커버

피키가 타르치시오 부르니치(Tarcisio Burgnich; 이탈리아 축구선수·오른쪽 풀백, 1939-2021)에게 붙인 별명은 ‘바위’였다. 별명부터 경기 방식이 보인다. 파케티가 왼쪽에서 운동장을 넓히는 동안 부르니치는 오른쪽 문을 잠갔다. 강한 체격과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집중력으로 가장 위험한 상대를 직접 맡았고, 필요할 때는 그 단단한 몸을 그대로 전진의 힘으로 바꿨다.

두 풀백은 같은 방식으로 뛰지 않았기에 더 강했다. 한쪽 문이 열리면 반대쪽은 더 단단히 닫혔고, 그 뒤에는 피키가 있었다. 이 비대칭이 그란데 인테르 수비의 묘미다. 부르니치는 인테르에서 467경기 6골을 기록하며 네 차례 스쿠데토, 두 차례 유러피언컵과 인테르컨티넨탈컵을 함께했다. 숫자는 파케티보다 조용하지만, 왕조가 모험할 수 있게 만든 쪽은 이 ‘바위’였다.[6]

6. 카를로 타그닌|수비형 미드필더

카를로 타그닌 선수 디자인 카드
DM · DEFENSIVE MIDFIELDER

카를로 타그닌

Carlo Tagnin
국적
이탈리아
인테르 소속
1962-1965
선정 근거
1964 결승의 숨은 영웅

활약 기간과 상징성만 보면 잔프랑코 베딘(Gianfranco Bedin; 이탈리아 축구선수·수비형 미드필더, 1945-)을 택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래도 이 자리에는 카를로 타그닌(Carlo Tagnin; 이탈리아 축구선수·수비형 미드필더, 1932-2000)을 넣었다. 베스트 11이라면 가장 오래 빛난 선수만 고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팀은 단 한 경기의 임무가 그 시대 전체를 설명하기도 한다.

1964년 빈에서 타그닌의 임무는 디스테파노를 따라다니며 레알 마드리드 공격의 첫 문장을 지우는 일이었다. 카메라는 두 골을 넣은 마촐라를 오래 비췄지만, 마촐라가 공격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누군가가 상대의 가장 위대한 두뇌를 귀찮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결승에서는 젊은 베딘이 에우제비우를 맡으며 같은 임무를 이어받았다. 짧은 재임 기간보다 왕조의 첫 유럽 제패에서 감당한 무게를 높게 평가한 선택이다.[1]

7. 루이스 수아레스 미라몬테스|레지스타

루이스 수아레스 미라몬테스 선수 디자인 카드
CM · REGISTA

루이스 수아레스

Luis Suárez Miramontes
국적
스페인
인테르 소속
1961-1970
선정 근거
후방의 경기 설계자

‘건축가’ 루이스 수아레스 미라몬테스(Luis Suárez Miramontes; 스페인 축구선수·중앙 미드필더, 1935-2023)는 에레라가 바르셀로나에서부터 데려온 제자였다. 공격적인 인사이드 포워드로 이름을 날렸지만 인테르에서는 더 낮은 곳으로 내려왔다. 퇴보가 아니라 시야를 넓히기 위한 이동이었다. 짧은 패스로 상대를 한쪽에 모은 뒤, 고개를 들고 반대편 자이르나 전진하는 파케티에게 긴 공을 보냈다.

그란데 인테르의 역습은 흔히 속도로 기억되지만, 속도에도 주소가 필요하다. 누가 달릴지를 정하고 그 발앞으로 공을 보내는 사람이 수아레스였다. 1960년 발롱도르를 받은 그는 스페인 출생 선수 최초의 수상자였고, 2024년 로드리가 수상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유일한 사례로 남았다. 차비·이니에스타·로드리보다 앞선 시대에, 그는 미드필더가 경기의 설계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유럽 정상에서 보여줬다.

8. 산드로 마촐라|공격형 미드필더

산드로 마촐라 선수 디자인 카드
AM · INSIDE FORWARD

산드로 마촐라

Alessandro Mazzola
국적
이탈리아
인테르 소속
1960-1977
선정 근거
왕조의 에이스

그란데 토리노의 주장 발렌티노 마촐라(Valentino Mazzola; 이탈리아 축구선수·공격수, 1919-1949)가 수페르가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산드로 마촐라(Alessandro “Sandro” Mazzola; 이탈리아 축구선수·공격형 미드필더, 1942-)는 여섯 살이었다. 위대한 아버지의 성은 유산인 동시에 평생의 비교표였을 것이다. 산드로는 그 무게를 피하지 않고 전혀 다른 도시와 전혀 다른 전술 안에서 자기 시대를 만들었다.

1964년 결승에서는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두 골을 넣었다. 첫 골로 왕조의 문을 열고 마지막 골로 문을 잠갔다. 그 사이에는 순간적인 방향 전환, 수비 사이를 읽는 시야, 패스와 마무리를 한 동작 안에 넣는 재능이 있었다. 잔니 리베라(Gianni Rivera; 이탈리아 축구선수·공격형 미드필더, 1943-)와 이탈리아 축구의 가장 유명한 라이벌 구도를 만들었고, 1971년 발롱도르 2위에 올랐다. 파케티가 그란데 인테르의 형태였다면 마촐라는 관중이 기억한 얼굴이었다.[1]

9. 마리오 코르소|왼쪽 윙어

마리오 코르소 선수 디자인 카드
LW · LEFT WINGER

마리오 코르소

Mario Corso
국적
이탈리아
인테르 소속
1957-1973
선정 근거
왼발의 창조성

마리오 코르소(Mario Corso; 이탈리아 축구선수·왼쪽 윙어, 1941-2020)는 빨라 보이지 않는데 상대보다 먼저 도착하는 선수였다. 느슨한 리듬으로 수비수의 발을 멈추게 한 뒤, 마지막 40미터에서 왼발 한 번으로 패스 두 번을 대신했다. 그의 프리킥은 공이 벽을 넘은 뒤 갑자기 떨어지는 궤적으로 유명했고, 이스라엘 대표팀 감독은 패배 뒤 “신의 왼발이 우리를 이겼다”고 말했다.

파케티가 바깥으로 전진하면 코르소는 안쪽으로 들어왔다. 한쪽은 운동장을 넓히고, 다른 한쪽은 그 안에 새로운 패스 길을 팠다. 1965년 리버풀을 뒤집은 준결승에서도 그의 프리킥이 대역전의 두 번째 골이 됐다. 모든 선수가 전력 질주할 때 혼자 한 박자 늦춘 뒤 더 정확한 답을 내놓는 선수. 코르소의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상대의 시간을 빼앗는 기술이었다.[7]

10. 자이르 다코스타|오른쪽 윙어

자이르 다코스타 선수 디자인 카드
RW · RIGHT WINGER

자이르 다코스타

Jair da Costa
국적
브라질
인테르 소속
1962-1967, 1968-1972
선정 근거
1965 결승골의 주인공

자이르 다코스타(Jair da Costa; 브라질 축구선수·오른쪽 윙어, 1940-)는 그란데 인테르의 오른쪽을 길게 찢었다. 큰 보폭으로 공간을 삼키면서도 공을 다루는 발은 부드러웠고, 수비수가 자세를 고쳐 잡기 전에 슈팅이나 크로스가 나왔다. 왼쪽의 코르소가 시간을 비틀었다면 오른쪽의 자이르는 상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1965년 유러피언컵 결승은 그의 축구에 꼭 맞는 무대였다. 빗물 때문에 공이 제대로 튀지 않던 산 시로에서 코르소와 마촐라를 거친 공을 오른발로 낮게 밀어 넣었다. 화려하게 감아 찬 골이 아니라, 진흙탕에서 가장 빠르고 단순한 답을 고른 골이었다. 그는 1962년 브라질 월드컵 우승 명단에도 들었지만 가린샤(Manuel Francisco dos Santos; 브라질 축구선수·오른쪽 윙어, 1933-1983)가 버틴 오른쪽에서 출전하지 못했다. 대표팀에서는 가린샤의 그림자였던 선수가 밀라노에서는 유럽 2연패의 결승골 주인공이 됐다.[8]

11. 아우렐리오 밀라니|센터 포워드

아우렐리오 밀라니 선수 디자인 카드
CF · CENTRE FORWARD

아우렐리오 밀라니

Aurelio Milani
국적
이탈리아
인테르 소속
1963-1965
선정 근거
1964 결승의 중앙 공격수

안젤로 도멩기니·레나토 카펠리니·로베르토 보닌세냐처럼 더 오래 활약한 공격수도 있다. 그래도 마지막 자리는 아우렐리오 밀라니(Aurelio Milani; 이탈리아 축구선수·센터 포워드, 1934-2014)에게 줬다. 베스트 11을 누적 경기 수로만 고르면 나오기 어려운 이름이다. 하지만 밀라니는 강한 체격으로 중앙 수비수를 붙잡아 두고, 마촐라와 두 윙어가 파고들 통로를 몸으로 만들었다.

1964년 결승에서는 마촐라의 선제골 뒤 두 번째 골을 넣어 레알 마드리드의 추격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같은 해 인테르컨티넨탈컵에서도 CA 인데펜디엔테(Club Atlético Independiente; 아르헨티나 아베야네다를 연고로 하는 축구단)를 상대로 득점했다. 척추 부상으로 전성기는 너무 일찍 끝났다. 그래서 그의 기록은 길지 않지만 장면은 크다. 그란데 인테르가 처음 유럽과 세계의 정상에 오르던 순간, 상대 센터백 사이에서 길을 열고 있던 중앙 공격수가 밀라니였다.

베스트 11 밖의 후보들

SHORTLIST명단 밖에도 왕조를 만든 이름은 남아 있다

골키퍼 이바노 보르돈, 미드필더 잔프랑코 베딘과 호어스트 시마니아크, 공격수 안젤로 도멩기니·레나토 카펠리니·로베르토 보닌세냐도 충분히 논의할 만한 후보였다. 특히 베딘은 1965년 결승에서 타그닌의 역할을 이어받아 에우제비우를 추적했고, 보닌세냐는 197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전성기의 중심 공격수였다.

고르고 보니, 1964년 빈의 열한 명이었다

1964년 빈에서 인테르를 기다린 상대는 유러피언컵 초대 5연패의 주인공 레알 마드리드였다. 1961년 이후 우승컵은 SL 벤피카와 AC 밀란으로 넘어갔지만, 레알의 선발에는 여전히 알프레도 디스테파노와 프란시스코 헨토(Francisco Gento; 스페인 축구선수·왼쪽 윙어, 1933-2022), 푸슈카시 페렌츠가 서 있었다. 유러피언컵이라는 대회의 역사를 만든 이름들이었다.

레알은 통산 여섯 번째 우승을 노렸고, 인테르는 구단 역사상 처음 오른 결승에서 첫 유럽 정상을 바라봤다. 한쪽에는 이미 대회의 기준이 된 왕조가, 다른 한쪽에는 이제 자기 시대를 시작하려는 팀이 섰다. 이 열한 명이 왜 그란데 인테르의 얼굴인지 설명하려면 바로 그 온도 차이에서 출발해야 한다.

1964년 유러피언컵 결승 선발과 일치하는 그란데 인테르 베스트 11 포메이션
시대 전체를 놓고 선정한 베스트 11을 1964년 빈의 공식 선발표와 대조하자 열한 자리가 모두 일치했다.
EUROPEAN CUP FINAL · 27 MAY 1964 PRATERSTADION · WIEN
인테르3-1레알 마드리드
  1. 산드로 마촐라오른발 중거리 선제골
  2. 아우렐리오 밀라니낮은 오른발 슈팅
  3. 펠로레알 마드리드 추격골
  4. 산드로 마촐라왕조의 시작을 확정한 쐐기골

경기 전부터 계획이 흔들릴 뻔했다. 사르티가 워밍업 도중 강한 충격을 받아 통증을 호소했고, 후보 골키퍼 오타비오 부가티(Ottavio Bugatti; 이탈리아 축구선수·골키퍼, 1928-2016)가 대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사르티는 이를 악물고 출전했다. 그 앞에서는 타그닌이 디스테파노를 따라다니며 레알 공격의 첫 문장을 지웠다.

전반 43분 마촐라의 오른발 중거리 슈팅이 먼저 골문을 열었다. 후반 60분에는 밀라니가 두 번째 골을 낮게 밀어 넣었다. 레알이 펠로의 골로 2-1까지 따라왔을 때에는 골대와 피키의 골라인 수비가 인테르를 지켰다. 그리고 76분, 마촐라가 다시 득점했다. 결승전 두 골. 아버지 발렌티노의 이름을 등에 지고 살아온 스물한 살의 아들이 인테르의 첫 유럽 왕조를 자기 발로 열었다.[1]

이제 포메이션 이미지를 다시 보면 선수 이름이 아니라 역할이 보인다. 타그닌은 디스테파노를 지우기 위해 존재했고, 그 덕분에 수아레스는 공을 앞으로 보내는 일에 집중했다. 파케티가 왼쪽에서 높이를 올리면 부르니치가 반대편 균형을 잡았다. 피키는 그 뒤를 읽었고, 밀라니가 중앙 수비수를 붙들어 놓은 사이 마촐라와 두 윙어가 서로 다른 속도로 달렸다. 이 열한 명은 유명한 선수를 순서대로 세운 명단이 아니라, 한 경기 안에서 서로의 약점을 없애준 조합이었다.

이듬해 벤피카와의 결승에는 두 자리만 바뀌었다. 타그닌의 대인 방어 임무는 잔프랑코 베딘이 이어받아 에우제비우를 추적했고, 최전방에는 밀라니 대신 호아킨 페이로(Joaquín Peiró; 스페인 축구선수·공격수, 1936-2020)가 섰다. 같은 열한 명이 그대로 2연패한 것은 아니지만, 피키·파케티·부르니치·수아레스·마촐라·코르소·자이르로 이어지는 왕조의 척추는 남아 있었다.

결승 선발을 복원하려고 만든 명단은 아니었다. 1960년부터 1972년까지 각 자리에서 그란데 인테르를 가장 잘 설명하는 선수를 한 명씩 골랐고, 베딘과 도멩기니, 보닌세냐처럼 끝까지 고민한 후보도 있었다. 이 명단만이 정답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선정을 마친 뒤 공식 팀 시트를 확인하고는 나도 조금 놀랐다. 열한 이름이 하나도 빠짐없이 겹쳤다. 글을 쓰기 전에 준비한 반전도, 결승 명단을 보고 거꾸로 맞춘 결과도 아니다. 역할을 따라 한 자리씩 고른 선수들이 1964년 5월 27일 빈에서 이미 함께 선발로 뛰고 있었다. 글을 마치며 발견하기에는 꽤 근사한 우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