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TBALL AS A DYNAMIC SYSTEM “전술은 철학이었고, 체계는 미학이었다.”

발레리 로바노우스키는 선수를 숫자로 바꾸려 한 냉혈한이 아니었다. 체력·공간·패스·압박을 측정해 개인의 재능이 우연한 한 장면에 머물지 않고 다시 나타날 조건을 만들었다.

우리는 위대한 감독을 떠올릴 때 대개 장면부터 기억한다. 요한 크라위프(Hendrik Johannes Cruijff; 네덜란드 축구 선수·감독, 1947-2016)의 움직임, 아리고 사키(Arrigo Sacchi;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46-)의 수비선, 주제프 과르디올라(Josep Guardiola i Sala; 카탈루냐 축구 선수·감독, 1971-)의 위치 교환처럼 한눈에 붙잡히는 이미지가 이름을 대신한다. 그러나 발레리 로바노우스키(Валерій Васильович Лобановський; 우크라이나 축구 선수·감독, 1939-2002) 앞에서는 기억의 순서가 달라진다. 먼저 남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체계다.

그는 축구를 수많은 요소가 서로 영향을 주는 동적 시스템으로 보았다. 열한 명의 능력을 단순히 더한 값보다 선수들 사이의 연결이 팀의 경기력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훈련을 측정하고, 경기의 사건을 기록하고, 공을 가졌을 때와 잃었을 때의 집단 행동을 반복했다. 오늘날의 데이터 분석과 전술 주기화가 익숙한 눈에는 당연하게 들리지만, 로바노우스키와 디나모 키이우가 그 일을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였다.[1]

코너킥의 궤적을 계산하던 레프트 윙

로바노우스키는 처음부터 벤치의 과학자가 아니었다. 디나모 키이우의 레프트 윙으로 뛰며 1961년 구단의 첫 소비에트 톱리그 우승에 함께했다. 왼발로 직접 코너킥을 골문 안에 휘어 넣던 선수였고, 공이 날아가는 각도와 속도를 감각만이 아니라 계산의 문제로 받아들였다.[2]

선수 시절부터 그가 견디지 못한 것은 설명되지 않는 반복이었다. 어제 통했던 공격이 오늘 사라지고, 강한 선수들을 모아 놓은 팀이 더 약한 조직에 무너지는 이유를 ‘축구는 원래 그런 것’으로 덮지 않았다. 공학을 공부한 그의 눈에 경기는 우연의 집합이면서 동시에 관찰 가능한 상호작용이었다.

이 문제의식은 훗날 감독 로바노우스키의 출발점이 된다. 선수 개인의 번뜩임을 기다리는 대신, 언제 전진하고 언제 압박하며 누가 빈자리를 채울지 팀 전체가 공유한다. 재능을 없애는 축구가 아니라 재능이 출현할 확률을 높이는 축구. 필자가 그의 축구에서 가장 먼저 붙잡고 싶은 문장도 여기에 있다.

키이우 이전, 드니프로에서 끝낸 예행연습

로바노우스키의 방법을 디나모 키이우의 풍부한 선수층이 낳은 결과로만 보면 시작부터 어긋난다. 그는 선수 은퇴 직후인 1969년 드니프로를 맡았다. 세 번째 도전에서 팀을 소비에트 톱리그로 올렸고, 승격 뒤에는 곧바로 메달권을 다투게 했다. 1972년 드니프로는 2위와 승점 1점 차인 6위였고, 1973년에는 한때 선두에도 올랐다.[8]

키이우가 거대한 실험실이었다면 드니프로는 그 가설을 먼저 견딘 풍동이었다. 더 좋은 선수를 모은 뒤 이론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제한된 자원 안에서 간격과 훈련 강도, 집단 행동을 조직해 경쟁력을 끌어올린 뒤 더 큰 무대로 옮겨 갔다. 그리하였으니 1974년 디나모 키이우의 변화는 천재 감독의 갑작스러운 계시가 아니었다. 이미 작은 팀에서 성패를 겪은 방법의 확대였다.

SYSTEM LAB · FOUR CONNECTED LAYERS선수를 더하지 않고 관계를 설계한다
01부하

심박과 훈련량을 기록해 경기에서 반복할 수 있는 강도를 만든다.

02공간

선수 사이 간격과 전진 방향을 정해 공의 위치에 따라 대형을 바꾼다.

03전환

공을 잃은 순간 여러 명이 함께 압박하고 되찾은 순간 함께 뻗는다.

04검증

경기 기록을 다시 훈련으로 돌려보내 체계를 다음 경기까지 갱신한다.

로바노우스키 혼자 만든 과학이 아니었다

위대한 감독을 한 명의 선지자로 만드는 서사는 쉽다. 그러나 디나모 키이우의 실험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완성되지 않았다. 1974년 로바노우스키는 올레흐 바질레비치(Олег Петрович Базилевич; 우크라이나 축구 선수·감독, 1938-2018)와 동등한 결정권을 가진 지도자 조합을 꾸렸다. 과학자 아나톨리 젤렌초프(Анатолій Матвійович Зеленцов; 우크라이나 스포츠과학자, 1934-2006)는 훈련 부하와 선수 상태, 경기에서 일어나는 행동을 분석하는 방법을 함께 만들었다.[3]

컴퓨터 앞에서 경기 자료를 살피는 아나톨리 젤렌초프
컴퓨터 데이터를 바탕으로 선수의 움직임과 경기 패턴을 분석·설명하는 아나톨리 젤렌초프. 디나모 키이우의 과학은 감독 한 사람의 직관이 아니라 지도자와 연구자의 협업이었다.

컴퓨터는 답을 대신 내는 신탁이 아니었다. 선수의 몸이 어떤 부하에 놓였는지, 팀이 어느 구역에서 공을 잃고 되찾았는지, 계획한 행동이 경기에서 얼마나 반복됐는지를 확인하는 도구였다. 측정은 훈련을 더 정확하게 만들었고, 훈련은 경기 모델을 반복 가능한 습관으로 바꿨다.

여기에는 소련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생물·기계·조직의 제어와 소통을 피드백으로 설명하는 학문)와 스포츠과학이라는 시대적 토양도 있었다. 2019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2회 국제 컴퓨터과학 스포츠 심포지엄(International Symposium on Computer Science in Sport)에서는 로바노우스키와 젤렌초프의 작업을 소련 축구의 컴퓨터과학 계보 안에서 다시 다뤘다.[4] 한 감독이 미래를 홀로 예언했다기보다, 축구·공학·생리학·정보처리가 만난 장소가 디나모 키이우였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때 ‘피드백’은 단순히 경기 뒤 영상을 보는 일이 아니다. 경기 모델을 세우고, 그 모델에 맞는 훈련 부하와 행동을 설계하고, 실제 경기에서 나온 오차를 다시 다음 훈련에 넣는 폐회로였다. 감독의 감각도 이 회로 밖에 놓이지 않았다. 직관은 가설이 되고, 기록은 반증이 되며, 수정된 훈련은 다음 경기가 된다. 로바노우스키의 과학은 정답표가 아니라 계속 틀릴 수 있도록 만든 방법이었다.

소련 대표팀 훈련장에서 코칭스태프와 함께 선수들을 바라보는 발레리 로바노우스키
소련 대표팀 재임 시절의 로바노우스키. 이 사진은 2019년 제12회 IACSS 세계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소련 축구의 사이버네틱스 연구에 소개됐다.

시스템 축구는 인간을 지우지 않았다

과학과 데이터라는 말은 때때로 축구에서 인간을 밀어내는 차가운 언어처럼 들린다. 로바노우스키의 축구도 선수 개인을 거대한 기계의 부품으로 만들었다는 오해를 받기 쉽다. 그러나 그의 체계가 요구한 것은 똑같은 선수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선수가 같은 상황을 읽고, 동료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며, 자신의 장점을 팀의 시간 안에서 꺼내는 일이었다.

로바노우스키는 포지션을 고정된 직업으로 두지 않았다. 수비수는 공격을 시작하고 공격수는 공을 잃는 순간 수비의 첫 선이 됐다. 공이 한쪽으로 이동하면 선수들이 함께 간격을 줄였고, 탈압박에 성공하면 여러 위치에서 동시에 전진했다. UEFA가 정리한 그의 핵심도 높은 압박, 여러 위치를 수행하는 선수, 경기 안에서 달라지는 대형이었다.[2]

개인의 자유는 조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동료가 어디에 있을지 믿을 수 있을 때 더 과감해진다. 그리하여 블로힌의 속도는 고립된 질주가 아니라 팀이 열어 둔 공간을 찢었고, 벨라노우의 폭발력은 압박과 전환의 끝에서 반복됐다. 시스템은 인간을 지우지 않았다. 천재가 더 자주, 더 안정적으로, 더 오래 나타나게 했다.

생테티엔전의 도형에서 읽어야 할 것

1975-76 유러피언컵 생테티엔전 디나모 키이우의 선수 배치와 이동을 표시한 전술도
1975-76 유러피언컵 AS 생테티엔전 디나모 키이우의 선수 배치와 이동을 직접 정리한 전술도. 레오니드 부랴크·빅토르 콜로토우·볼로디미르 베레메예우의 위치 변화는 한 명의 가짜 9번보다 중원 전체가 전진선과 압박 방향을 바꾸는 유동성으로 읽는 편이 정확하다.

이 전술도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선수 세 명에게 ‘가짜 9번’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이 아니다. 레오니드 부랴크(Леонід Йосипович Буряк; 우크라이나 축구 선수·미드필더, 1953-), 빅토르 콜로토우(Ві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Колотов; 우크라이나 축구 선수·미드필더, 1949-2000), 볼로디미르 베레메예우(Володимир Григорович Веремєєв; 우크라이나 축구 선수·미드필더, 1948-)가 정해진 가로선에 머물지 않고 공의 위치에 따라 앞뒤 간격을 바꾸는 방식이다. 한 선수가 전진하면 다른 선수가 연결 지점을 만들고, 공을 잃으면 가까운 선수들이 함께 통로를 닫았다.

이 유동성을 ‘모두가 아무 데나 뛰는 축구’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출발 위치는 달라져도 공과 동료의 위치에 따른 다음 행동은 합의돼 있었다. 자유는 좌표를 버리는 데서 나오지 않았다. 한 사람이 비운 좌표를 다른 사람이 채우리라는 확신에서 나왔다. 포메이션은 경기 전 명단표의 숫자였고, 실제 경기는 관계가 쉼 없이 다시 그리는 도형이었다.

1950년대 헝가리의 히데그쿠티 난도르가 중앙 공격수의 고정된 자리를 비우며 상대 수비의 기준을 흔들었다면, 디나모 키이우는 그 유동성을 팀 전체의 작동 원리로 넓혔다. 헝가리 황금의 팀이 포지션을 관계로 바꾼 과정과 이어 읽으면, 한 사람의 이탈이 어떻게 집단의 공간 설계로 확장됐는지가 보인다.

WITH THE BALL위치를 비워 다음 선을 연다

고정된 공격선보다 내려오는 움직임과 전진하는 움직임의 교차가 수비의 기준을 흔든다.

WITHOUT THE BALL공 가까운 곳을 함께 닫는다

개인의 추격이 아니라 여러 선수가 같은 순간 압박해 상대의 다음 패스를 제한한다.

TRANSITION되찾은 순간 이미 출발한다

수비 대형을 오래 유지하기보다 공을 탈취한 위치에서 가장 짧은 전진 경로를 선택한다.

1975와 1986, 체계가 유럽을 이긴 두 번

1975년 디나모 키이우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에서 페렌츠바로시를 3-0으로 꺾었다. 대회 전체에서 단 한 번만 졌고, 소련 클럽 최초로 유럽대항전 우승컵을 들었다.[5] 이어 UEFA 슈퍼컵에서는 유러피언컵 2연패 직후의 바이에른 뮌헨을 만났다. 당연한 우승 후보는 바이에른이었다.

그러나 올레흐 블로힌(Олег Володимирович Блохін; 우크라이나 축구 선수·공격수, 1952-)은 뮌헨 원정에서 중원부터 달려 나가 결승골을 넣었고, 키이우에서는 10만 명이 넘는 관중 앞에서 두 골을 더했다. 두 경기 합계 3-0, 세 골이 모두 블로힌의 것이었다.[9] 가장 집단적인 체계가 가장 선명한 개인의 서사를 만들었다. 블로힌은 그해 발롱도르를 받았다.

1975년 우승컵을 디나모 키이우 선수에게 건네는 발레리 로바노우스키
1975디나모 키이우의 첫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로바노우스키가 우승컵을 선수에게 건넨다.
1986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을 축하하는 디나모 키이우 선수단
1986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3-0으로 꺾고 다시 유럽 정상에 오른 선수단. 이미지: FC Dynamo Kyiv.

11년 뒤에도 결과는 반복됐다. 1986년 결승에서 디나모 키이우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3-0으로 이겼고 두 번째 컵위너스컵을 차지했다.[6] 이호르 벨라노우(Ігор Іванович Бєланов; 우크라이나 축구 선수·공격수, 1960-)는 그해 발롱도르의 주인공이 됐다. 한 세대가 지나도 같은 감독의 팀에서 세계 최고의 개인이 다시 나왔다는 사실은 로바노우스키의 역설을 보여준다. 가장 집단적인 체계가 가장 눈부신 개인을 지워 버린 것이 아니라 정상까지 밀어 올렸다.

DINAMO KYIV · MAJOR HONOURS반복된 체계가 남긴 숫자

8소비에트 톱리그

6소비에트컵

2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UEFA 슈퍼컵

국가대표팀에서도 그 구조는 이어졌다. 디나모 키이우 선수들을 중심에 둔 소련은 UEFA 유로 1988 첫 경기에서 리누스 미헐스(Marinus Jacobus Hendricus Michels; 네덜란드 축구 선수·감독, 1928-2005)의 네덜란드를 만났다. 로바노우스키는 중원을 조밀하게 만들어 네덜란드가 익숙하지 않은 긴 공을 쓰게 했고 1-0으로 이겼다.[10]

결승에서는 뤼트 휠릿과 마르코 판바스턴의 네덜란드에 0-2로 졌다. 그러나 결승 선발 열한 명 가운데 여덟 명이 디나모 키이우 소속이었다.[11] 클럽에서 매일 연마한 공통 언어가 대표팀의 짧은 준비 기간을 대신했다. 로바노우스키의 축구가 한 훈련장 밖에서도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 대회였다.

1997년 복귀, 셰우첸코와 레브로우

중동에서의 시간을 거쳐 1997년 디나모 키이우로 돌아온 로바노우스키는 자신의 오래된 체계를 박물관에 두지 않았다. 1997-98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바르셀로나를 홈 3-0, 원정 4-0으로 꺾었고, 다음 시즌에는 준결승까지 올랐다. 안드리 셰우첸코(Андрій Миколайович Шевченко; 우크라이나 축구 선수·공격수, 1976-)와 세르히 레브로우(Сергій Станіславович Ребров; 우크라이나 축구 선수·감독, 1974-)가 유럽의 수비를 갈라 놓았다.[1]

1999년 바이에른과의 준결승 1차전은 그 복귀가 단순한 향수였는지를 시험한 경기였다. 디나모는 셰우첸코의 두 골과 비탈리 코소우스키의 골로 3-1까지 앞섰다. 코소우스키의 칩이 골대를 넘은 뒤 바이에른이 두 골을 되찾아 3-3이 됐고, 디나모는 원정 2차전에서 0-1로 패했다.[12] 결승에는 닿지 못했지만, 24년 전의 원리를 새 세대의 속도와 압박으로 갱신해 유럽 최강을 탈락 직전까지 몰았다는 사실은 남았다.

THIRD DINAMO ERA · 1997-2002 낡은 체계를 복원한 것이 아니라
같은 원리로 새 속도를 만들었다

1997-98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

1998-99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1975년의 포메이션이 1999년에도 그대로 남았다는 사실이 아니다. 남은 것은 방법이었다. 선수의 상태를 측정하고, 상대를 분석하고, 팀이 공을 되찾을 위치를 훈련하며, 전환의 속도를 현재 선수단에 맞춰 다시 설계한다. 로바노우스키는 자신의 과거를 복제하지 않았다. 축구는 계속 변하므로 예전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말처럼, 체계 자체를 갱신했다.[7]

예견

오늘날 거의 모든 상위 구단은 경기 데이터를 수집하고, GPS로 훈련 부하를 관리하며, 영상 분석으로 상대의 전진 경로를 나눈다. 압박과 전환, 포지션 유동성, 기능별 테스트도 일상적인 언어가 됐다. 그렇다고 로바노우스키가 현대 축구의 모든 것을 혼자 발명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의 위대함은 더 정확한 곳에 있다.

그는 과학을 축구 바깥의 권위로 들여오지 않았다. 경기를 더 잘 이해하고 훈련을 더 정교하게 만들며, 선수들의 관계를 반복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내부 언어로 사용했다. 과학이 감독의 직관을 몰아낸 것이 아니라, 직관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다시 물을 수 있게 했다. 이 질문하는 체계가 로바노우스키의 가장 깊은 유산이다.

KYIV · MAY 2002

로바노우스키, 전설과의 작별

2002년 키이우가 로바노우스키를 떠나보낸 장면이다. 전술의 증거가 아니라, 그 체계를 함께 살아낸 도시와 사람들이 한 감독을 어떻게 기억했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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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바노우스키는 2002년 5월 7일 메탈루르흐 자포리자 원정 경기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엿새 뒤 세상을 떠났다.[13] 그가 벤치에서 마지막까지 붙잡은 것은 유행하는 포메이션 하나가 아니었다. 경기를 구조로 보고, 구조를 훈련으로 바꾸고, 훈련의 결과를 다시 측정하는 순환이었다. 과르디올라의 WM이 숫자를 복원한 것이 아니라 원리를 재배치한 과정도 그 순환 위에서 읽을 수 있다.

필자는 로바노우스키를 추억할 때 가장 먼저 차가운 컴퓨터가 아니라 뜨거운 반복을 떠올린다. 선수가 한계를 넘어 다시 뛰고, 동료의 빈자리를 메우고, 공을 되찾은 순간 함께 전진하는 반복. 그에게 전술은 철학이었고, 체계는 미학이었다.

어떤 감독은 전술을 만들고, 어떤 감독은 시대를 지배한다. 발레리 로바노우스키는 축구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을 바꿨다.

출처와 기록주

  1. 「Valerii Lobanovskyi」, FC Dynamo Kyiv. 선수·감독 경력, 디나모 키이우의 주요 우승, 발롱도르 수상자, 소련 대표팀 UEFA 유로 1988 준우승, 1997년 이후 UEFA 챔피언스 리그 성과.
  2. 「In profile: Valeriy Lobanovskiy」, UEFA. 선수 시절 직접 코너킥, 간격 훈련, 높은 압박, 다기능 선수와 경기 중 대형 변화.
  3. 「Dynamo Kyiv mourns Oleh Bazylevych」, UEFA. 1974년 로바노우스키·바질레비치의 공동 지도 체제와 아나톨리 젤렌초프의 스포츠과학 협업.
  4. 「12th International Symposium on Computer Science in Sport」, Springer, 2020; 「Cybernetics and Models in a Golden Age of Russian Football」, Keith Lyons. 2019년 모스크바 심포지엄과 로바노우스키·젤렌초프를 다룬 발표의 배경.
  5. 「1974/75: Dynamo burst on to the scene」, UEFA. 페렌츠바로시와의 결승, 대회 전적, 소련 클럽 최초의 유럽대항전 우승.
  6. 「Dynamo players on the magnificent 1986 Cup Winners’ Cup final victory」, FC Dynamo Kyiv.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1986년 결승 및 본문 공식 사진.
  7. 「Lobanovskiy’s football philosophy」, UEFA. 2001년 인터뷰에 나타난 특수 테스트, 컴퓨터 활용과 변화하는 축구에 대한 관점.
  8. 「Перемога у чемпіонаті СРСР-1974」, FC Dynamo Kyiv. 1969년 드니프로 부임, 소비에트 톱리그 승격과 1972·1973년의 상위권 경쟁.
  9. 「1975 Super Cup: Bayern bow to Blokhin」, UEFA. 바이에른과의 두 경기, 블로힌의 세 골과 키이우의 10만 관중.
  10. 「USSR’s Rats rattles Netherlands in EURO 1988 Group 2 opener」, UEFA. 로바노우스키의 중원 밀집 전략과 소련의 1-0 승리.
  11. 「Van Basten volley crowns Netherlands’ EURO 1988 final win against USSR」, UEFA. 결승 결과와 디나모 키이우 선수 8명이 포함된 소련 선발 명단.
  12. 「1998/99 FC Dynamo Kyiv 3-3 FC Bayern München: Report」, UEFA. 준결승 1차전의 득점 전개와 3-3 무승부.
  13. 「Останній матч Валерія Лобановського」, FC Dynamo Kyiv. 2002년 5월 7일 마지막 경기와 경기 중 뇌졸중.
  14. 「Saint-Étienne vs Dynamo Kyiv head-to-head」, UEFA. 1975-76 유러피언컵 8강 대진 확인.
  15. 트로피 실루엣: 「Coppa delle Coppe.svg」, MacMoreno, public domain; 「UEFA Super Cup.svg」, 0 Noctis 0, CC BY-SA 3.0. 소비에트 톱리그·소비에트컵 실루엣은 BBinge FC 자체 제작.
  16. 「ЛОБАНОВСЬКИЙ | ПРОЩАННЯ З ЛЕГЕНДОЮ ДИНАМО КИЇВ | 2002」, ULTRAS DYNAMO KYIV TV. 본문 추모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