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체 보렐이 새 도형을 제안하고 쿠티크 언드라시가 전환을 시작했지만, 그것만으로 왕조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페루초 노보의 구단 운영, 에그리 에르브슈타인 에르뇌의 조직, 그리고 발렌티노 마촐라와 에치오 로이크의 위치 교환이 3-2-2-3을 반복 가능한 축구로 만들었다.
1948년 5월 2일, 스타디오 필라델피아. 토리노 FC는 알레산드리아를 10-0으로 꺾었다. 그 시즌 40경기에서 125골을 넣고 33골만 내줬으며, 2위와의 승점 차는 16점이었다. 홈 20경기 가운데 19경기를 이겼다.[1] ‘그란데 토리노’(Grande Torino; 1940년대 이탈리아 축구를 지배한 토리노 FC 선수단)라는 이름은 참사 뒤 붙은 애칭이 아니라, 상대가 감당할 수 없었던 경기력에 먼저 주어진 평가였다.
그 팀을 숫자 하나로 줄이면 WM, 곧 3-2-2-3이 남는다. 그러나 포메이션 표에 열한 개의 점을 찍는 순간 가장 중요한 장면은 사라진다. 중앙 공격수를 따라 센터 하프가 내려간 변화, 두 하프와 두 인사이드 포워드가 만든 사각형, 발렌티노 마촐라(Valentino Mazzola; 이탈리아 축구 선수·공격수, 1919-1949)가 아래와 위를 연결한 움직임이다. 이 글은 그란데 토리노가 어디에 섰는가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무엇을 바꿨는가를 읽는다.
선 하나의 후퇴가 수비만 늘린 것이 아니라 중원의 관계를 다시 만들었다.
파랑은 최종선으로 내려간 센터 하프, 금색은 하프백과 공격진 사이를 오가며 WM에 호흡을 넣은 두 인사이드 포워드다.
1925년 이후, 이탈리아에는 두 개의 답이 있었다
1925년 오프사이드 법은 공격수가 온사이드가 되기 위해 골라인과 자신 사이에 두어야 할 상대 선수를 세 명에서 두 명으로 줄였다. 수비선 뒤의 공간은 넓어졌고, 센터포워드를 누가 추적할 것인가가 새 문제가 됐다.[2]
잉글랜드에서 허버트 채프먼의 아스널은 센터 하프를 최종선으로 내려 세 명의 수비를 만들었다. 그 앞에 하프백 둘, 인사이드 포워드 둘, 최전방 셋이 놓이면 3-2-2-3이다. 위에서 본 배치가 W와 M을 닮아 WM이라 불렸다. 이 구조는 상대 센터포워드를 더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공을 되찾은 뒤 빠른 윙어를 향해 전진하는 길을 정돈했다.[3]
반면 비토리오 포초(Vittorio Pozzo; 이탈리아 축구 감독, 1886-1968)의 이탈리아는 메토도(Metodo; 센터 하프가 중원에 남는 2-3-2-3 계열의 이탈리아식 전술)를 발전시켰다. 두 인사이드 포워드가 중원과 공격 사이로 내려오고, 센터 하프는 세 명의 하프백 가운데 남았다. 같은 2-3-5에서 출발했지만 잉글랜드의 시스테마(Sistema; 이탈리아에서 WM 계열을 부르던 명칭)와 이탈리아의 메토도는 중앙을 지키는 방법이 달랐다.
그러므로 토리노의 전환을 ‘옛 포메이션을 버리고 최신 유행을 받아들였다’고만 말하면 부족하다. 구단은 이탈리아 축구가 익숙하게 사용하던 중원 구조에서 벗어나, 센터 하프를 마지막 수비수로 바꾸고 그 앞의 네 자리를 새로 연결해야 했다. 전술판의 점 하나가 내려갔지만 선수 선발, 대인 방어, 전진 경로가 함께 바뀌는 작업이었다.
보렐의 제안은 왜 노보의 구단에서 작동했나
전환의 문을 연 사람은 펠리체 보렐(Felice Placido Borel; 이탈리아 축구 선수·지도자, 1914-1993)이었다. 유벤투스에서 세리에 A 세 차례와 1934 FIFA 월드컵 우승을 경험한 공격수는 1941년 토리노로 건너왔다.[4] 그는 기술 책임자 로베르토 코페르니코(Roberto Copernico; 토리노 FC 기술 책임자), 동료 조반니 엘레나(Giovanni Ellena; 이탈리아 축구 선수·지도자, 1913-1990)와 함께 페루초 노보 회장에게 시스테마 전환을 제안했다.[5]
여기서 원고에 오래 남아 있던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자의 이름이 아니다. 사람의 성인 코페르니코다. 이름 하나를 바로잡으면 회의의 성격도 달라진다. 기발한 외국 이론이 갑자기 토리노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구단 안의 선수와 기술 책임자가 현재 선수단에 맞는 구조를 회장에게 제안한 장면이 된다.


노보는 1939년 회장에 취임한 뒤 구단을 부서와 전문 인력의 집합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카를로 카르카노, 자니·엘레나·스페로네 같은 전직 선수들을 곁에 두었고, 1941년 여름에는 보렐뿐 아니라 굴리엘모 가베토, 오베르단 우셀로, 피에트로 페라리스 등을 데려왔다. 토리노 구단의 공식 연대기에 따르면 쿠티크 언드라시(Kuttik András; 헝가리 축구 선수·감독, 1896-1970)가 이끈 1941-42 시즌 팀은 리그 2위와 60골의 최다 득점을 기록했다.[1]
엘레나는 센터 하프 자리에서 뒤로 내려가 상대 9번을 추적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변화는 수비수를 한 명 늘리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하프백 둘만으로 중원 첫 줄을 꾸려야 했고, 그 위의 두 인사이드 포워드가 공을 받으러 내려오지 않으면 팀은 앞뒤로 끊어졌다. 그리하여 다음 영입이 전술의 운명을 바꿨다.
마촐라와 로이크가 중원 사각형에 호흡을 넣었다
1942년 여름 토리노는 베네치아에서 발렌티노 마촐라와 에치오 로이크(Ezio Loik; 이탈리아 축구 선수·미드필더, 1919-1949)를 함께 데려왔다. 같은 시기 주세페 그레차르도 합류했다. 공식 기록의 대표 대형에서 그레차르와 에우세비오 카스틸리아노가 아래의 두 하프를, 로이크와 마촐라가 위의 두 인사이드 포워드를 맡는다.[6]
네 사람을 사각형으로 그리면 역할이 선명해 보이지만, 그란데 토리노의 힘은 사각형을 고정하지 않는 데 있었다. 그레차르는 압박을 견디며 첫 패스를 연결했고, 카스틸리아노는 더 공격적인 전진과 슈팅을 보탰다. 로이크는 활동량으로 오른쪽과 중앙의 틈을 메웠다. 마촐라는 공격수이면서 아래로 내려와 공을 받고, 다시 페널티지역으로 침투했다. 두 인사이드 포워드가 내려오면 하프백은 공을 전진시킬 출구를 얻었고, 다시 올라가면 최전방 셋과 함께 다섯 명의 공격선을 만들 수 있었다.

중원에서 수비라인으로 내려가 상대 최전방 공격수를 전담했다. 그 결과 토리노의 수비는 두 명에서 세 명이 됐다.


수비라인 앞을 지키고, 공을 빼앗으면 로이크와 마촐라에게 첫 패스를 연결했다.


공을 받으러 중원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골문으로 뛰어들었다. 수비와 공격을 이어준 연결축이었다.
FIGC 지도자 교육 자료는 그란데 토리노의 시스테마를 설명하며 그레차르·카스틸리아노·로이크·마촐라의 중원 사각형을 짚는다. 동시에 집단적 움직임, 전환, 체력 준비와 팀의 결속을 강조한다.[7] 포메이션과 조직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보렐이 도형을 건넸다면, 네 명의 중원은 그 도형 안에 패스와 커버, 침투의 시간을 넣었다.
마촐라가 소매를 걷으면 WM의 속도가 달라졌다
마촐라는 왼쪽 인사이드 포워드 한 칸에 갇힌 선수가 아니었다. 상대가 후방을 막으면 아래로 내려와 전개에 참여했고, 공이 측면으로 나가면 문전으로 들어갔다. 공을 잃으면 가장 먼저 압박했고, 동료에게 경기의 속도를 끌어올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토리노의 이른바 ‘그라나타의 15분’은 마촐라가 소매를 걷어 올린 뒤 팀이 집단적으로 강도를 높였다는 기억으로 남았다.[8]
여기서 WM과 현대의 포지셔널 플레이를 같은 것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1940년대의 압박 조건, 잔디, 공, 대인 방어는 지금과 전혀 달랐다. 다만 마촐라의 움직임은 오래된 전술을 읽는 좋은 기준을 준다. 같은 3-2-2-3이라도 인사이드 포워드가 공을 기다리면 선 사이가 끊어지고, 아래와 위를 오가면 하프백과 윙어, 센터포워드가 하나의 공격으로 묶인다.
이는 펩 과르디올라의 3-2-4-1이 100년 전 WM과 닮은 이유와도 맞닿는다. 옛 WM은 센터 하프가 내려가며 3+2를 만들었고, 2022-23 맨체스터 시티는 존 스톤스가 올라가며 3+2를 만들었다. 외곽선은 닮았지만 이동 방향과 해결하려는 문제는 달랐다. 그란데 토리노는 그 사이에서 또 하나를 보여준다. 같은 도형 안에서도 사람의 역할과 관계가 전술의 온도를 바꾼다.


1942-43 더블에서 1947-48의 125골까지
새 구조는 곧 결과를 냈다. 1942-43 시즌 토리노는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를 함께 차지해 이탈리아 최초의 국내 더블을 달성했다. 전쟁으로 리그가 중단된 뒤에도 왕조는 이어졌다. 토리노는 1945-46, 1946-47, 1947-48, 1948-49 시즌까지 우승하며 전쟁 전 한 차례와 전후 네 차례, 모두 다섯 번의 리그 정상에 올랐다.
1942-43 · 1945-49
경기당 3.125골
필라델피아 홈 연속 무패
여기서 기록도 교정할 필요가 있다. 과거 원고에는 필라델피아 홈 93경기 무패와 83승 10무라는 수치가 적혔지만, 토리노 FC의 공식 역사는 홈 100경기 연속 무패로 기록한다.[9] 집계 범위가 다른 숫자를 섞지 않고, 이 개정판에서는 구단의 공식 수치를 따른다.
수페르가 이후 재현되지 못한 전술 생태계
1949년 5월 4일 수페르가에서 선수단과 코칭스태프, 구단 관계자와 기자, 승무원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났다. 이 글은 그 비극을 다시 길게 재현하지 않는다. 수페르가의 비극을 일곱 장면으로 정리한 비주얼 스토리가 마지막 원정과 사고, 애도의 시간을 맡고 있다.
전술의 관점에서 더 오래 남는 질문은 ‘왜 WM 도표가 남았는데 그란데 토리노는 재현되지 않았는가’다. 답은 포메이션에 없는 것들이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선수를 고르는 노보의 조직, 훈련과 체력을 설계한 에르브슈타인, 서로의 빈자리를 읽던 선수들, 필라델피아에서 축적한 반복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었다. 세계 최고였던 토리노의 축구가 왜 이탈리아에 남지 못했는지는 그 단절과 이후 카테나초의 계보를 더 깊이 추적한다.
필자가 그란데 토리노를 보며 얻는 통찰은 분명하다. 전술의 천외천(天外天)은 남들이 모르는 숫자를 먼저 그리는 데 있지 않다. 하나의 배치를 선수 영입, 훈련, 체력, 관계와 연결해 누구나 다음 움직임을 예상할 수 있는 조직으로 만드는 데 있다.
그리하여 토리노의 화양연화는 WM을 채택한 어느 날 시작되지 않았다. 보렐의 제안이 엘레나의 후퇴가 되고, 그 후퇴가 로이크와 마촐라의 움직임을 만나고, 그 움직임이 필라델피아에서 매주 반복됐을 때 시작됐다. 포메이션은 그들이 선 자리를 남겼다. 그란데 토리노는 그 자리가 어떻게 살아 움직였는가를 남겼다.
출처와 기록주
- 「The Grande Torino」, Torino FC. 노보 체제의 영입, 쿠티크 시기의 1941-42 시즌, 우승 연대와 1947-48 시즌 기록.
- 「Herbert Chapman's first game in charge」, Arsenal FC. 1925년 오프사이드 법 개정과 채프먼 시기 전술 변화.
- 「Herbert Chapman Hall Of Fame profile」, National Football Museum. WM 3-2-2-3과 빠른 윙어를 활용한 전진 구조.
- 「Felice Placido Borel」, Juventus FC. 보렐의 유벤투스 출전·득점과 주요 우승 기록.
- 「Borel, Novo e l’introduzione del modulo WM」, Toro News. 보렐·코페르니코·엘레나의 제안과 센터 하프 전환.
- 「Il TC Melfi rende omaggio al Grande Torino」, Torino FC. 그란데 토리노의 대표적인 열한 명과 포지션.
- 「L’evoluzione dei sistemi di gioco」, FIGC Settore Tecnico. 시스테마, 네 명의 중원 사각형, 집단 전술과 전환에 관한 지도자 교육 논문.
- 「Quel record che resiste」, Torino FC. 1948년 알레산드리아전 10-0과 ‘그라나타의 15분’에 관한 구단 기록.
- 「La rinascita del Filadelfia」, Torino FC. 스타디오 필라델피아에서의 홈 100경기 연속 무패 기록.
- 마리오 리가몬티·주세페 그레차르·에우세비오 카스틸리아노·에치오 로이크 인물 사진, Wikimedia Commons. 각 파일 설명 페이지의 퍼블릭 도메인 표기를 확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