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그란데 토리노(Il Grande Torino; 위대한 토리노)는 한 번의 참사로만 기억하기에는 너무 위대한 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세리에 A를 지배했고, 이탈리아 대표팀의 중심이었으며, 한 시대가 상상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공격 축구를 보여줬다.

1947년 5월 헝가리전에 나선 이탈리아의 선발 11명 가운데 10명이 토리노 선수였다. 한 클럽의 전성기라는 말로도 모자랐다. 당시 토리노는 곧 아주리였고, 이탈리아가 전쟁 이후 다시 세우고 있던 축구의 얼굴이었다.

그 위대한 팀의 등장부터 1949년 5월 4일 수페르가에서 멈춘 여정까지, 일곱 장면으로 따라간다. 사진만 빠르게 넘겨도 흐름은 보이지만, 장면과 장면 사이에 놓인 역사를 함께 읽으면 이 팀이 왜 아직도 위대한 토리노로 불리는지 조금 더 선명해진다.

VISUAL STORY · 7 SCENES

빠르게 넘겨본 뒤 더 깊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마지막의 장문 칼럼으로 이어서 읽을 수 있다.

SCENE 01

전쟁 전후의 이탈리아가 바라본 팀

왕조의 출발점은 페루초 노보(Ferruccio Novo; 토리노 회장, 1897-1974)였다. 그는 1939년 회장에 오른 뒤 구단의 조직과 선수단을 함께 손봤다. 1942년 베네치아에서 발렌티노 마촐라와 에치오 로이크를 데려온 선택은 결정적이었다. 두 사람은 중원과 공격의 속도를 한꺼번에 바꾸었고, 토리노는 1942-43 시즌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를 함께 차지했다.

전쟁은 리그를 끊어놓았다. 그러나 1945-46 시즌 전국 대회가 재개되자 토리노는 다시 정상에 섰다. 그래서 이 팀의 5연패는 달력만 죽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1942-43 시즌의 우승 뒤 전쟁으로 정상적인 리그가 멈췄고, 재개된 1945-46 시즌부터 1948-49 시즌까지 다시 네 번을 연속으로 제패하였다. 시대가 끊겼는데 왕조는 끊기지 않았던 셈이다.

토리노 선수들이 관중의 환영을 받으며 경기장에 들어서는 사진과 세리에 A 5연패, 홈 93경기 무패 기록
02 다섯 차례의 연속 우승과 압도적인 홈 기록.
SCENE 02

125골을 넣고 33골만 내준 팀

1947-48 시즌의 숫자는 지금 보아도 조금 무섭다. 토리노는 40경기에서 125골을 넣었고, 2위 그룹을 승점 16점 차로 밀어냈다. 홈구장 스타디오 필라델피아(Stadio Filadelfia; 토리노 왕조의 홈구장)에서는 20경기 가운데 19승을 거두었다. 알레산드리아를 10-0으로 꺾은 날도 있었다.

그렇다고 공격수 몇 명이 제멋대로 골을 몰아넣던 팀은 아니었다. 마촐라는 필요하면 중원으로 내려왔고, 로이크는 그 움직임에 맞춰 전진했으며, 측면과 중앙의 자리가 계속 교환됐다. 관중이 경기 막판에 나팔을 불면 마촐라가 소매를 걷어붙였다는 유명한 장면도 여기서 태어났다. 그 신호 뒤 토리노가 속도를 높이는 몇 분을 사람들은 `그라나타의 4분의 1시간`이라 불렀다. 상대에게는 참 길고도 고약한 15분이었을 것이다.

토리노 선수단 사진 위에 축구사 최악의 비극, 수페르가의 비극이라고 적힌 카드
03 그들의 역사는 수페르가에서 갑자기 멈췄다.
SCENE 03

토리노가 곧 이탈리아였던 순간

클럽의 지배력은 대표팀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1947년 5월 11일 헝가리와의 친선경기에서 이탈리아 선발 11명 중 골키퍼 루초 센티멘티를 제외한 10명이 토리노 소속이었다. 대표팀 명단에 한 팀의 선수가 많이 뽑힌 정도가 아니었다. 푸른 셔츠로 갈아입은 토리노가 국제경기를 치른 것에 가까웠다.

그러니 수페르가 참사는 우승 후보 한 팀을 잃은 사고로 끝날 수 없었다. 이탈리아 대표팀은 주장 마촐라와 여러 주전의 경력만 잃은 것이 아니라, 선수들이 서로를 보지 않고도 다음 움직임을 알던 완성된 관계까지 한꺼번에 잃었다. FIGC가 이 사건 뒤 대표팀에 어두운 시기가 이어졌다고 기록하는 이유다.

토리노와 벤피카 선수들이 경기 전 악수하는 사진과 사고 발생 전 친선 경기 설명
04 리스보아에서 치른 벤피카와의 친선경기.
SCENE 04

한 주장의 은퇴를 위한 약속

리스보아 원정은 정규 대회 일정이 아니었다. 벤피카 주장 프란시스쿠 페헤이라(Francisco Ferreira; 벤피카 주장, 1919-1986)가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의 경기에서 만난 마촐라에게 자신의 은퇴 기념 친선경기를 부탁했고, 마촐라가 이를 받아들이며 성사됐다.

토리노는 1949년 4월 30일 인테르와 0-0으로 비긴 뒤 리그 선두를 굳혔고, 5월 3일 약 4만 명이 모인 리스보아에서 벤피카와 맞붙었다. 결과는 3-4 패배였다. 하지만 그날의 목적은 승점이나 트로피가 아니었다. 한 시대의 주장이 다른 주장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였다. 그 따뜻한 약속이 마지막 경기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토리노 선수 벽화 사진과 1949년 5월 4일 귀국하던 비행기가 수페르가 언덕에 충돌했다는 설명
05 1949년 5월 4일, 돌아오지 못한 귀국길.
SCENE 05

오후 5시 5분, 수페르가

다음 날 선수단과 동행자들은 아비오 리네 이탈리아네의 피아트 G.212 항공기 I-ELCE편에 올랐다. 토리노에는 비와 짙은 구름이 깔려 있었다. 오후 5시 5분, 비행기는 수페르가 언덕의 대성당 뒤편 옹벽과 충돌했다.

사고를 하나의 원인으로 매끈하게 정리하기는 어렵다. 악천후와 짧은 시계, 항법 과정의 문제, 고도계 이상 가능성이 함께 거론된다. 분명한 것은 탑승자 31명 모두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선수 18명만이 아니었다. 구단 임직원과 코치진, 기자들, 승무원까지 토리노라는 하나의 이동 공동체가 그곳에서 사라졌다.

토리노 문양을 배경으로 선수와 매니저, 기자, 승무원 등 수페르가 참사 희생자 31명의 이름을 적은 추모 명단
06 선수와 구단 관계자, 기자와 승무원을 포함한 31명의 이름.
SCENE 06

명단을 읽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

참사를 이야기할 때 마촐라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지만, 카드에 적힌 31명의 이름은 이 사건을 유명 선수의 비극으로만 줄이지 못하게 한다. 벽을 쌓고 공을 옮기던 선수, 훈련을 설계한 코치, 원정을 기록하던 기자, 비행기를 운항한 승무원이 모두 같은 귀국길에 있었다.

장례 행렬에는 수많은 시민이 모였다. 이후 토리노의 남은 리그 일정에는 유소년 선수들이 나섰고, 상대 팀들도 존중의 뜻으로 유소년팀을 출전시켰다. 토리노는 그해 우승팀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순위표의 우승 표시는 이 팀이 완주한 시즌과 완주하지 못한 생애를 동시에 품고 있다.

수페르가 항공기 잔해와 이탈리아 대표팀 경기 사진을 함께 배치하고 토리노의 몰락을 설명한 카드
07 한 클럽의 상실을 넘어 이탈리아 축구 전체에 남은 공백.
SCENE 07

카테나초가 곧장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이야기를 너무 간단히 만들면 곤란하다. 수페르가에서 공격 축구의 왕조가 사라졌고, 그래서 이탈리아가 곧바로 수비 축구의 나라가 되었다는 설명은 극적이지만 정확하지 않다. 카테나초(catenaccio; 빗장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전술 용어)의 계보는 참사 이전 스위스의 베로우와 프랑스의 세루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페르가가 남긴 공백을 작다고 할 수는 없다. 이탈리아는 가장 완성된 클럽과 대표팀의 중심축을 동시에 잃었다. 이후 다른 지도자와 다른 구단이 이탈리아 축구의 언어를 다시 만들었다. 그래서 라 그란데 토리노를 기억하는 일은 사라진 팀을 애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팀이 살아 있었다면 이탈리아 축구가 어떤 방향으로 더 나아갔을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DEEP READ · 축세 세계 최고였던 토리노의 축구는 왜 이탈리아에 남지 못했을까?

에그리 에르브슈타인 에르뇌의 시스템과 피아트·유벤투스의 도시, 그리고 카테나초가 이탈리아의 언어가 된 과정을 따라간다.

장문으로 깊게 읽기

기록 기준

  1. 토리노 FC, 「The Grande Torino」: 왕조의 구성, 시즌별 우승과 1947-48 시즌 기록.
  2. 토리노 FC, 「The tragedy of Superga」: 벤피카 친선경기의 배경, 사고 일시와 기상, 탑승자 기록.
  3. 토리노 FC, 「1893, 1949 e 1979」: 오레스테 볼미다의 나팔과 `그라나타의 4분의 1시간`에 관한 구단 기록.
  4. 토리노 FC, 「La tragedia di Superga」: 장례와 잔여 네 경기의 유소년팀 출전에 관한 구단 기록.
  5. 이탈리아축구연맹(FIGC), 「History of the FIGC」: 1947년 헝가리전의 토리노 소속 선발 10명과 대표팀에 남은 공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