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QUESTION

라 그란데 토리노에 대한 통상적 서술은 비극으로 시작해서 비극으로 끝난다. 그러나 더 오래 남는 질문은 따로 있다. 토리노는 왜 이탈리아 축구사에 계승되지 않았는가?

1949년 5월 4일 오후 5시 5분, 리스보아(Lisboa; 포르투갈의 수도)에서 돌아오던 피아트 G.212 항공기가 수페르가 대성당(Basilica di Superga; 토리노 동쪽 언덕의 바로크 성당) 외벽에 충돌했다. 선수 18명을 포함한 탑승자 31명 전원이 숨졌다. 이틀 뒤 약 50만 명이 토리노 거리로 나와 관을 뒤따랐다.[1]

수페르가의 비극은 축구가 남긴 가장 강력한 애도의 장면 중 하나다. 그래서 라 그란데 토리노(La Grande Torino; ‘위대한 토리노’라 불린 1940년대 토리노 선수단)의 역사는 흔히 이 장면을 향해 직선으로 달린다. 다섯 번의 리그 우승과 발렌티노 마촐라의 완장, 마지막 친선경기와 짙은 안개, 그리고 장례 행렬. 모든 성취는 다가올 참사를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전조처럼 배치된다.

하지만 그렇게 읽으면 정작 사라진 것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다. 토리노가 잃은 것은 선수 명단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당시 이탈리아가 가질 수 있었던 가장 공격적이고 집단적인 축구의 가능성이었다. 볼을 소유해 공간을 지배하고, 중원에서 수적 우위를 만들며, 공을 잃는 순간 여러 선수가 함께 반응하는 팀. 1947년 이탈리아 대표팀의 선발 11명 가운데 10명이 토리노 소속으로 채워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잠시나마 토리노처럼 뛰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토리노는 왜 죽었는가가 아니라, 토리노의 축구는 왜 살아남지 못했는가.

1. 다뉴브에서 토리노까지

에르브슈타인이라는 이방인

에그리 에르브슈타인 에르뇌(Egri Erbstein Ernő; 헝가리 축구 선수·지도자, 1898-1949)는 189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너지바러드(Nagyvárad; 오늘날 루마니아 오라데아)에서 태어났다. 현재 국경만 보면 루마니아 출생이지만, 그의 언어와 축구 교육은 헝가리의 것이었다.

1920-30년대 부다페스트와 빈, 프라하를 잇는 중부 유럽에는 영국식 힘과 속도만으로 경기를 이해하지 않는 흐름이 있었다. 짧은 패스, 기술적 숙련, 포지션 사이의 교환을 중시한 이른바 다뉴브 학파였다. 에르브슈타인은 이 환경에서 선수와 지도자로 성장한 뒤 이탈리아로 건너왔다.

그는 1938-39 시즌 토리노의 기술 책임자로 팀을 이끌었지만,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의 인종법은 유대인이었던 그와 가족의 삶을 무너뜨렸다. 이탈리아를 떠나 헝가리로 돌아간 그는 전쟁과 박해를 견뎠고, 전쟁이 끝난 뒤 다시 토리노로 돌아왔다. 페루초 노보 회장(Ferruccio Novo; 토리노 회장, 1897-1974)는 그를 단순한 감독이 아니라 선수 영입·훈련·전술을 연결하는 기술적 설계자로 복귀시켰다.[2]

비행기 앞에 선 에그리 에르브슈타인 에르뇌와 토리노 관계자 및 선수
비행기 앞의 에르브슈타인과 토리노 인물들. 유럽의 국경과 정치가 그를 여러 번 밀어냈지만, 그의 축구 사유가 완성된 도시는 토리노였다.

메토도와 시스테마

전쟁 전 이탈리아의 성공을 설명하는 전술 언어는 메토도(Metodo; 비토리오 포초가 발전시킨 2-3-2-3 구조)였다. 비토리오 포초(Vittorio Pozzo; 이탈리아 감독, 1886-1968)는 이 구조로 1934년과 1938년 FIFA 월드컵™을 연속 제패했다.

메토도는 두 명의 인사이드 포워드를 중원 가까이에 두고, 기술과 빠른 연결을 살리는 데 유리했다. 그러나 1925년 오프사이드 규정이 바뀐 뒤 영국에서는 다른 답이 발전했다. 허버트 채프먼(Herbert Chapman; 잉글랜드 축구 감독, 1878-1934)의 아스널은 센터하프를 수비선으로 내려 3-2-2-3 형태의 WM을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 계열을 시스테마(Sistema; WM 계열의 전술 체계)라고 불렀다.

메토도 2-3-2-3 포메이션 도식
메토도 2-3-2-3. 포초의 이탈리아가 두 차례 세계 정상에 오른 전술적 기반이었다.
시스테마 3-2-2-3 포메이션 도식
시스테마 3-2-2-3. 센터하프가 뒤로 내려가고 두 하프백과 두 인사이드 포워드가 중앙의 연결망을 만든다.

에르브슈타인의 토리노는 WM을 도면처럼 복사하지 않았다. 영국식 구조 위에 중부 유럽의 패스 감각과 이탈리아 선수들의 역동성을 결합했다. 마촐라는 고정된 공격수라기보다 전후좌우를 연결하는 중심이었고, 에치오 로이크와 주세페 그레차르를 비롯한 선수들은 포지션 사이의 간격을 좁혔다. 한 선수가 움직이면 다른 선수가 빈 공간을 점유했다. 공격과 수비는 별개의 국면이 아니라 집단 전체의 이동으로 연결됐다.

이를 오늘날의 ‘게겐프레싱’과 완전히 같은 것으로 부르는 것은 시대착오다. 당시에는 압박 강도와 위치를 현대처럼 데이터로 측정하지 않았다. 다만 조너선 윌슨(Jonathan Wilson; 영국 축구 저술가)이 전술사의 계보에서 지적하듯, 토리노가 보여준 집단적 이동과 즉각적인 볼 회수 의지는 훗날의 조직적 압박을 떠올리게 하는 분명한 선행 장면이었다.[3]

2. 숫자는 그들이 얼마나 앞섰는지 말해준다

전술적 혁신은 승리하지 못하면 오래 기억되기 어렵다. 라 그란데 토리노는 이 점에서도 예외였다.

토리노는 1942-43 시즌 우승을 시작으로, 전쟁으로 정규 리그가 중단된 시기를 사이에 두고 1945-46·1946-47·1947-48·1948-49 시즌까지 다섯 차례 연속으로 이탈리아 챔피언이 됐다. 이를 단순히 ‘5시즌 연속’이라고 부르면 전시 리그의 단절을 지우게 되지만, 정상적으로 치러진 세리에 A에서 토리노가 다섯 번 연속 왕좌를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4]

1946-47 시즌에는 38경기에서 104골을 넣었다. 이어진 1947-48 시즌의 기록은 더 극단적이다. 40경기 125골, 29승, 승점 65, 공동 2위 그룹과 16점 차. 홈에서는 20경기 중 19경기를 이겼고, 알레산드리아를 10-0으로 꺾었다. 토리노 구단의 공식 역사도 이 시즌을 클럽 역사상 최고의 팀이자 축구사 전체에서 가장 강한 팀 중 하나로 규정한다.[4]

5연속 이탈리아 챔피언
1251947-48 시즌 리그 득점
10-0알레산드리아전 승리

1947년 5월 11일 토리노에서 열린 헝가리와의 친선경기는 이 지배력이 국가대표팀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이탈리아의 선발 11명 가운데 골키퍼 루치디오 센티멘티를 제외한 필드 플레이어 10명이 모두 토리노 소속이었다. 클럽의 조직이 국가대표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셈이었다.

토리노 선수들이 중심을 이룬 1947년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
1947년의 이탈리아 대표팀. 한 클럽의 조직력이 대표팀의 전술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장면이다.

이탈리아는 토리노처럼 플레이했다. 규율적이지만 소극적이지 않았고, 구조적이지만 개인의 표현을 억누르지 않았다. 라 그란데 토리노는 한 클럽의 전성기를 넘어 이탈리아 축구가 선택할 수도 있었던 미래였다.

3. 피아트의 도시에는 두 개의 토리노가 있었다

라 그란데 토리노를 전술만으로 설명하면 절반을 놓친다. 이 팀은 피아트(FIAT; 토리노에서 성장한 이탈리아 자동차 기업)의 도시에서 만들어졌다.

1923년 에도아르도 아녤리(Edoardo Agnelli; 이탈리아 기업가·유벤투스 회장, 1892-1935)가 유벤투스 회장에 취임하면서 아녤리 가문과 유벤투스의 결합은 제도화됐다. 산업 자본의 지원을 받은 유벤투스는 1930년대 이탈리아 축구의 첫 장기 왕조를 구축했다.

유벤투스 회장을 지낸 이탈리아 기업가 에도아르도 아녤리
에도아르도 아녤리. 피아트 자본과 유벤투스의 결합은 데르비 델라 몰레를 경기 이상의 도시 서사로 만들었다.

이에 비해 토리노는 오랫동안 도시의 노동자와 하층 중산층, 이주민의 정체성과 연결됐다. 소설가 마리오 솔다티는 유벤투스를 신사·산업가·보수적 부르주아의 팀으로, 토리노를 노동자와 이주민의 팀으로 묘사했다. 이 구분은 언제나 고정된 계급표는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며 두 팬층은 섞였고, 피아트 노동자 모두가 토리노를 지지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데르비 델라 몰레(Derby della Mole; 토리노와 유벤투스의 지역 라이벌전)가 도시의 권력 관계를 비추는 거울이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흥미로운 것은 라 그란데 토리노가 이 대립을 단순히 밖에서 바라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노보 회장은 1941년 유벤투스에서 알프레도 보도이라, 펠리체 보렐, 굴리엘모 가베토를 동시에 데려왔다. 전시에는 선수들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 피아트와의 관계도 활용됐다. 자본의 팀과 노동자의 팀이라는 선명한 이분법 뒤에서, 생존과 승리를 위한 거래는 계속됐다.

그래서 라 그란데 토리노는 낭만적인 노동자 신화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팀의 성공은 뛰어난 전술가, 섬유업으로 부를 쌓은 회장, 도시 산업망, 정교한 선수 영입이 결합한 결과였다. 계급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현대적 조직이었다.

4. 리스보아에서 돌아오지 못한 팀

1949년 5월 3일, 토리노는 리스보아에서 SL 벤피카와 친선경기를 치렀다. 벤피카 주장 프란시스쿠 페헤이라(Francisco Ferreira; 포르투갈 축구 선수, 1919-1986)를 기리는 경기였다. 발렌티노 마촐라와 페헤이라가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나눈 약속으로 성사된 이 친선전에는 약 4만 명이 모였고, 벤피카가 4-3으로 이겼다. 그것이 라 그란데 토리노의 마지막 경기였다.[1]

1949년 5월 3일 벤피카와 토리노의 친선경기를 알리는 역사 이미지
벤피카 4-3 토리노. 은퇴를 앞둔 친구를 위한 경기가 한 세대의 마지막 경기가 됐다.

다음 날 귀환 비행기는 토리노 상공의 낮은 구름과 비, 짙은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마지막 교신 뒤 항공기는 수페르가 언덕의 대성당 외벽에 충돌했다. 토리노 구단의 공식 기록은 악천후 또는 고도계 이상 가능성을 함께 언급한다. 따라서 기장이 의도적으로 고도를 낮췄다거나 단일한 기계 결함이 사고를 일으켰다고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1]

선수 18명, 에르브슈타인과 레슬리 리브슬리 등 지도자와 임직원, 기자 3명, 승무원 4명을 포함한 31명이 모두 숨졌다. 부상으로 원정에 동행하지 않은 사우로 토마, 자리를 양보한 골키퍼 레나토 간돌피 등 소수만이 팀 밖에 남았다.

5월 6일 약 50만 명이 장례 행렬을 지켜봤다. 참사 뒤 토리노는 남은 리그 네 경기에 유소년팀을 내보냈고, 상대 팀들도 유소년 선수로 맞섰다. 토리노의 어린 선수들은 네 경기를 모두 이겼다. 이미 우승에 가까웠던 팀은 그렇게 다섯 번째 스쿠데토를 완성했다.[1]

1949년 토리노 도심을 가득 채운 라 그란데 토리노 장례 행렬
1949년 5월 6일 토리노. 도시는 한 팀을 애도했지만, 축구는 그 팀의 전술을 보존할 제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5. 수페르가가 카테나초를 만들었다는 착각

여기서 가장 조심해야 할 문장이 있다. “토리노가 사라지자 이탈리아는 카테나초를 선택했다.” 매혹적이지만, 그대로는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다.

카테나초(catenaccio; ‘빗장’을 뜻하는 이탈리아식 수비 전술 계열)의 뿌리는 수페르가 이전으로 올라간다. 카를 라판(Karl Rappan; 오스트리아 출신 스위스 축구 감독, 1905-1996)의 베루(verrou; ‘자물쇠’를 뜻하는 스위스식 전술)가 수비선 뒤에 여분의 수비수를 두었고, 네레오 로코(Nereo Rocco;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12-1979)는 이미 1947-48 시즌 트리에스티나에서 수비적 구조와 빠른 역습을 통해 세리에 A 2위에 올랐다. 수페르가가 카테나초를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참사는 전술사의 분기점이었다. 새로운 수비 언어가 이미 존재하던 순간, 그와 경쟁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공격적 모델의 선수·지도자·훈련 문화가 한꺼번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술은 아이디어만으로 계승되지 않는다. 그 언어를 매일 반복하는 선수, 훈련을 설계하는 지도자, 같은 유형의 선수를 찾아내는 스카우트, 유소년팀에 원칙을 심는 구단이 필요하다. 수페르가가 제거한 것은 바로 그 생태계였다. 살아남은 포메이션 도표만으로는 라 그란데 토리노를 재현할 수 없었다.

이후 이탈리아 축구가 수비와 역습만을 택한 것도 아니다. AC 밀란과 인테르, 유벤투스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유럽 정상에 올랐다. 다만 이탈리아 축구의 국제적 상징이 리베로, 맨마킹, 공간 봉쇄, 결과를 지키는 능력으로 굳어가는 동안 토리노의 볼 점유와 집단적 전진은 하나의 끊어진 가능성으로 남았다.

수페르가와 카테나초 사이에는 단순한 원인과 결과가 없다. 대신 사라진 계승선과 살아남은 계승선이 있다.

6. 두 개의 ‘위대한 팀’과 마촐라 부자

이 역설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이름이 마촐라다.

발렌티노 마촐라(Valentino Mazzola; 이탈리아 축구 선수, 1919-1949)는 라 그란데 토리노의 주장이자 전술적 중심이었다. 소매를 걷어 올리는 그의 몸짓은 팀에 속도를 높이라는 신호로 기억된다. 그는 공격수이면서 중원으로 내려왔고, 득점하면서 압박했으며, 팀 전체의 리듬을 조절했다.

그의 아들 산드로 마촐라(Sandro Mazzola; 이탈리아 축구 선수, 1942-)는 아버지가 죽은 뒤 인테르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1960년대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 아르헨티나 태생 축구 감독, 1910-1997)의 라 그란데 인테르(La Grande Inter; 1960년대 유럽을 제패한 인테르)에서 유러피언컵을 두 차례 들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팀은 모두 ‘위대한’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위대함을 조직한 방식은 달랐다. 토리노는 공을 소유하고 중원을 전진시키며 상대를 밀어냈다. 인테르는 수비적 질서와 전환의 정밀함으로 상대의 공간을 제거했다. 아버지가 열었던 가능성이 아들의 시대에는 정반대의 전술 언어 안에서 완성된 셈이다.

이것을 선악의 대립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카테나초는 비겁한 축구가 아니었고, 라 그란데 인테르도 전술적으로 위대한 팀이었다. 다만 이탈리아 축구는 토리노의 방식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았다. ‘Grande’라는 이름은 남았지만 그 뒤에 놓인 문법은 바뀌었다.

7. 그들은 아직 원정 중이다

수페르가는 사고였다. 그러나 그 사고가 무엇을 끊었는지는 역사적 질문이다.

라 그란데 토리노는 다뉴브의 기술, 영국식 WM의 구조, 이탈리아 선수들의 역동성을 한 팀 안에 결합했다. 그들은 오늘날과 동일한 축구를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볼과 공간을 집단적으로 지배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탈리아가 훗날 외부에서 다시 수입해야 했던 여러 아이디어를 먼저 품고 있었다.

그 혁명은 1949년 5월 4일 오후 5시 5분에 중단됐다.

이후 이탈리아는 카테나초를 비롯한 수비 전술로도 충분히 위대한 역사를 썼다. 그러므로 “토리노가 살아 있었다면 이탈리아는 공격 축구의 나라가 됐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반사실은 증명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토리노만큼 강력하게 다른 미래를 실제 경기로 보여준 팀은 없었다.

1947년 이탈리아 대표팀의 필드 플레이어 10명이 토리노 선수였다. 이탈리아는 토리노였다. 그리고 토리노는 사라졌다.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인드로 몬타넬리(Indro Montanelli; 이탈리아 언론인, 1909-2001)는 장례 뒤 이렇게 썼다.

Gli eroi sono sempre immortali agli occhi di chi in essi crede. E così i ragazzi crederanno che il Torino non è morto: è soltanto «in trasferta».

영웅은 그를 믿는 자들의 눈에서 언제나 불멸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토리노가 죽지 않았다고 믿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원정 중’일 뿐이라고.

그들은 지금도 원정 중이다. 다만 이탈리아 축구는 그들이 돌아올 자리를 오래 비워두지 않았다.

VISUAL STORY · 7 SCENES 위대한 토리노 - 7장으로 보는 수페르가의 비극

세리에 A 5연패와 이탈리아 대표팀의 중심이었던 팀이 수페르가에서 멈추기까지, 일곱 장면으로 빠르게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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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와 확인 경로

  1. «The tragedy of Superga», Torino FC. 마지막 벤피카전, 사고 시각·상황, 희생자 31명, 장례 인파, 잔여 경기 기록.
  2. Dominic Bliss, Erbstein: The triumph and tragedy of football’s forgotten pioneer, Blizzard Books, 2014. 에르브슈타인의 생애·인종법·전후 토리노 복귀.
  3. Jonathan Wilson, Inverting the Pyramid: The History of Football Tactics, Orion, 2008. 메토도·WM·시스테마와 이탈리아 전술사의 계보.
  4. «The Grande Torino», Torino FC. 노보 체제의 선수 영입, 연속 우승, 1946-47·1947-48 시즌 기록.

※ 수페르가 사고 원인은 토리노 구단 공식 기록이 제시하는 악천후 또는 고도계 이상 가능성의 범위에서 기술했다. 참사와 이후 이탈리아 전술 방향의 관계는 직접적인 단일 원인이 아니라 계승 체계의 단절이라는 해석으로 구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