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 LEGEND
바비 무어(Bobby Moore)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웸블리의 주인, 잉글랜드가 낳은 가장 위대한 수비수
웸블리에서 세 해 연속 트로피를 들고 잉글랜드의 유일한 월드컵 우승 주장이 된 바비 무어. 숨긴 암 수술, 벨벳에 손을 닦은 1966년 7월 30일, 보고타의 팔찌와 과달라하라의 태클, 펠레가 꼽은 최고의 수비수까지. 클럽·국대 기록과 역대 등번호, 우승과 개인 수상을 정리한다.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유럽축구연맹Union des Associations Européennes de Football
잉글랜드는 축구를 만든 나라이고 수많은 스타를 낳았지만, 세계 축구사의 첫 줄에 이름을 올린 수비수는 사실상 한 명뿐이다. 바비 무어는 빠르지 않았고 헤더가 압도적이지도 않았으며 왼발은 거의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펠레는 그를 자신이 상대한 최고의 수비수라 불렀고, 베켄바워 역시 그를 자신이 맞선 최고의 수비수로 꼽았다. 몸이 아니라 머리로, 힘이 아니라 시간으로 수비한 선수였다. 상대가 무엇을 할지 먼저 알았고, 그래서 늘 한 걸음 먼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필자는 그를 베켄바워, 바레시, 나사시, 파사레야와 함께 축구사 역대 센터백 다섯 명 안에 둔다.
깔끔한 태클. 상대의 몸이 아니라 공만 정확히 걷어 낸다.
- 깔끔한 태클. 상대의 몸이 아니라 공만 정확히 걷어 낸다.
- 1968년 6월 5일 피렌체, 유고슬라비아와의 UEFA 유로 1968 준결승. 서두르지 않는 침착한 판단.
- 1966년 7월 30일 웸블리, 서독과의 월드컵 결승.
- 같은 결승. 잉글랜드 최후방을 지휘하는 주장 무어.
- 연장전까지 120분 동안 이어진 웸블리의 결승. 무어는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았다.
삥이FC 바비 무어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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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축구 협회에 등록된 역대 국가대표 수비수 가운데 세계 기준으로 최정상급이라 부를 수 있는 선수는 거의 무어 한 명이다. 1950년대의 빌리 라이트(William Ambrose Wright;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와 잉글랜드의 수비수, 1924-1994), 1960년대의 잭 찰턴(John Charlton; 리즈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의 센터백, 1935-2020), 2000년대의 존 테리(John George Terry; 첼시와 잉글랜드의 센터백, 1980-)와 리오 퍼디낸드(Rio Gavin Ferdinand;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의 센터백, 1978-)가 같은 결로 거론될 수 있는 이름이다. 영연방으로 넓히면 유벤투스의 웨일스 출신 존 찰스(William John Charles; 유벤투스에서 센터백과 센터 포워드를 오간 웨일스의 전설, 1931-2004)까지 들어온다. 그러나 그 줄의 2위와 3위를 다툴 라이트나 테리조차 무어 앞에서는 한 수 접어야 한다. 잉글랜드 수비수의 역사는 무어와 그 나머지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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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의 무기는 눈이었다. 경기를 읽는 능력, 상대가 어디로 움직일지 먼저 아는 능력이 그를 세계 최고로 만들었다. 셀틱을 유러피언컵 정상에 올린 조크 스타인(John “Jock” Stein; 1967년 셀틱의 유러피언컵 우승 감독, 1922-1985)은 그를 두고 법으로 막아야 할 선수라고 했다. 다른 사람보다 20분 먼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는 이유였다. 무어의 태클이 깨끗했던 것도 그래서다. 이미 공이 올 자리에 서 있었으니 몸을 날릴 일이 드물었다.
저 사람을 막는 법이 있어야 해. 다른 사람들보다 20분 먼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으니까.
There should be a law against him. He knows what's happening 20 minutes before everyone else.
- 조크 스타인, 셀틱 감독. 바비 무어를 두고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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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빼앗은 다음이 더 무서웠다. 무어는 수비수이면서 잉글랜드에서 가장 정확한 패스를 하는 선수 가운데 하나였다. 1966년 월드컵 결승에서 잉글랜드의 첫 골과 마지막 골이 모두 그의 발에서 시작됐다. 0-1로 끌려가던 전반 18분에는 반칙을 당하자마자 일어나 곧바로 프리킥을 올려 제프 허스트의 동점골을 만들었고, 연장 막판에는 동료들이 걷어 내라고 소리치는 가운데 자기 진영 페널티 지역 앞에서 40야드 롱패스로 허스트의 네 번째 골을 열었다. 걷어 내는 수비수와 연결하는 수비수의 차이가 그 두 장면에 다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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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의 주장 완장은 기록으로도 남는다. 스물두 살에 잉글랜드 역대 최연소 주장이 됐고, 대표팀 108경기 가운데 90경기를 주장으로 뛰었다. 이 90경기는 빌리 라이트와 나눠 가진 잉글랜드 최다 주장 출전 기록으로 반세기 넘게 남았고, 2026년 월드컵에서야 해리 케인(Harry Edward Kane; 토트넘 홋스퍼·바이언 뮌헨과 잉글랜드의 공격수, 1993-)이 넘어섰다. 1964년 FA컵, 1965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66년 월드컵까지 세 해 연속 웸블리에서 트로피를 든 주장이기도 하다. 월드컵을 든 잉글랜드 남자 대표팀 주장은 지금까지도 그 한 사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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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모든 것을 그는 암을 이겨 낸 몸으로 했다. 1964년 고환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지만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고, 2년 뒤 월드컵을 들었다. 1991년 다시 찾아온 대장암은 끝내 이기지 못했다. 1993년 쉰한 살에 세상을 떠났을 때 잉글랜드는 그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기렸다. 운동선수로는 두 번째였다. 필자에게 바비 무어는 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수비수이자, 세계 축구사가 낳은 가장 우아한 수비수다.

바비 무어 프로필
- 본명
- Robert Frederick Chelsea Moore
- 등록명
- 바비 무어(Bobby Moore)
- 출생
- 1941년 4월 12일
- 출생지
- 잉글랜드 에식스 바킹(현 런던 바킹)
- 사망
- 1993년 2월 24일 · 향년 51세
- 사망지
- 잉글랜드 런던 퍼트니
- 신장
- 178cm
- 대표 국적
- 잉글랜드
- 포지션
- 센터백 · 레프트 하프
- 주요 등번호
- 6번
- 선수 경력
- 1958-1983년
- 대표팀
- 1962-1973년 · 108경기 2골
1958년 9월 8일, 맬컴 앨리슨의 6번을 물려받은 열일곱 살
무어는 1941년 4월 12일 런던 동쪽 에식스의 바킹에서 태어났다. 바킹의 웨스트버리 초등학교와 레이턴스톤의 톰 후드 스쿨에서 축구를 했고, 크리켓 실력도 뛰어나 남부 잉글랜드 학생 선발팀 주장을 맡았다. 에식스 유소년 크리켓팀에서는 훗날 1966년 결승의 해트트릭 주인공이 되는 제프 허스트(Geoffrey Charles Hurst;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의 공격수, 1941-)와 함께 뛰었다.
1956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 들어간 무어에게는 스승이 있었다. 1군의 센터 하프 맬컴 앨리슨(Malcolm Alexander Allison; 웨스트햄의 수비수, 훗날 맨체스터 시티 감독, 1927-2010)이었다. 앨리슨은 어린 무어를 곁에 두고 수비수가 경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그런데 그 앨리슨이 결핵으로 쓰러졌다. 1958년 9월 8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 앨리슨의 등번호 6번을 열일곱 살의 무어가 입었다. 앨리슨은 끝내 웨스트햄 1군에 돌아오지 못했고, 6번은 그날부터 16년 동안 무어의 것이 됐다.

같은 해 무어는 잉글랜드 청소년 대표로 UEFA 유소년 대회 결승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허스트와 함께 FA 유스컵 결승에 나섰다. 처음부터 완성된 선수는 아니었다. 발이 빠르지 않았고, 공중볼 경합도 평범했다. 무어를 세계적인 선수로 만든 것은 그 약점을 상쇄하고도 남는 다른 재능이었다. 경기를 읽는 눈, 동료를 정렬하는 목소리, 그리고 태클 타이밍이었다. 무어는 웨스트햄에서 16년을 뛰는 동안 딱 한 번 퇴장당했는데, 그마저 1961년 11월 맨체스터 시티전 종료 휘슬과 동시에 나온 반칙이라 경기가 끝난 뒤에야 퇴장 사실이 알려졌다.
1962년 리마의 데뷔, 스물두 살의 주장 완장
1960년 잉글랜드 23세 이하 대표팀에 뽑힌 무어는 2년 뒤 칠레 월드컵을 앞두고 성인 대표팀에 늦게 합류했다. 월터 윈터보텀(Walter Winterbottom; 잉글랜드 대표팀 초대 전임 감독, 1913-2002) 감독과 축구 협회 선발 위원회의 선택이었다. A매치 경험 하나 없이 남미행 비행기에 오른 그는 1962년 5월 20일 리마에서 열린 페루와의 마지막 평가전에서 데뷔했고, 잉글랜드는 4-0으로 이겼다. 그날 함께 데뷔한 토트넘 홋스퍼의 수비수 모리스 노먼과 무어는 그대로 월드컵 주전 수비진이 됐다. 잉글랜드는 8강에서 그 대회 우승팀 브라질에 졌다.
1963년 5월 29일 체코슬로바키아 원정에서 무어는 처음 주장 완장을 찼다. 열두 번째 A매치였고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 조니 헤인스(John Norman Haynes; 풀럼과 잉글랜드의 인사이드 포워드, 1934-2005)가 대표팀을 떠나고 후임 주장 지미 암필드가 다친 자리였다.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어린 주장이었다. 잉글랜드는 4-2로 이겼고, 이듬해 새 감독 앨프 램지(Alfred Ernest Ramsey;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우승 감독, 1920-1999)는 1964년 여름 원정 시리즈를 거치며 완장을 무어에게 아예 맡겼다.

1960년대는 잉글랜드 축구가 가장 높이 올라간 시대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바비 찰턴(Sir Robert Charlton;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의 공격형 미드필더, 1966년 발롱도르, 1937-2023)이었고, 그 곁에 레스터 시티의 골키퍼 고든 뱅크스(Gordon Banks; 레스터 시티·스토크 시티와 잉글랜드의 골키퍼, 1937-2019), 리즈의 잭 찰턴, 토트넘의 득점원 지미 그리브스(James Peter Greaves; 토트넘 홋스퍼와 잉글랜드의 공격수, 1940-2021), 리버풀의 로저 헌트가 섰다. 그리고 그 모두를 한 팀으로 묶은 주장이 웨스트햄의 무어였다. 1966년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에 이어 1967년 셀틱이 영국 구단 최초로 유러피언컵을 들었고, 1968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그 뒤를 이었다. 같은 해 잉글랜드는 UEFA 유로 4강에 올라 3위를 했다. 앞에는 찰턴, 뒤에는 무어. 이 시기만큼은 잉글랜드가 브라질, 이탈리아와 나란히 섰다.
1964년, 세상에 알리지 않은 수술
1964년 5월 2일 웸블리, 웨스트햄은 2부 리그의 프레스턴 노스엔드를 상대로 FA컵 결승을 치렀다. 프레스턴이 두 번이나 앞서 갔고 웨스트햄이 두 번 따라붙었다. 그리고 종료 직전 로니 보이스(Ronald William Boyce;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미드필더, 1943-)의 헤더가 들어가 3-2가 됐다. 구단 역사상 첫 FA컵이었고, 트로피를 든 사람은 스물세 살의 주장 무어였다. 그해 무어는 잉글랜드 축구 기자 협회가 뽑는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그해 말 무어는 고환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로 한쪽 고환을 떼어 냈고, 다행히 암은 퍼지지 않았다. 그는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잉글랜드 주장이 된 지 반년, 월드컵을 1년 반 앞둔 때였다. 대중이 그 수술을 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2년 뒤 그가 웸블리에서 줄리메컵을 들어 올렸을 때, 그 몸이 지나온 겨울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65년 5월 19일 웸블리, 런던 동부가 유럽을 가진 밤
암을 이겨 낸 무어는 이듬해 봄 다시 웸블리에 섰다. 1965년 5월 19일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 상대는 서독 바이에른의 TSV 1860 뮌헨(Turn- und Sportverein München von 1860)이었다. 전반은 0-0이었다. 후반 25분과 27분에 앨런 실리(Alan William Sealey;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윙어, 1942-1996)가 두 골을 넣었고, 웨스트햄은 2-0으로 이겼다. 잉글랜드 구단이 유럽 대항전 트로피를 든 것은 1963년 토트넘에 이어 두 번째였다.
많은 사람이 무어의 인생 경기로 1966년 월드컵 결승이나 1970년 과달라하라를 꼽는다. 필자는 이 뮌헨전을 그 목록에서 빼지 않는다. 런던 동부의 노동자 동네 구단이 유럽 정상에 오른 밤이었고, 그 팀의 중심에는 허스트, 마틴 피터스(Martin Stanford Peters;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의 미드필더, 1943-2019)와 함께 웨스트햄 아카데미가 길러 낸 주장 무어가 있었다. 1964년 FA컵, 1965년 컵위너스컵, 그리고 1966년 월드컵까지, 무어는 세 해 연속 웸블리에서 트로피를 드는 첫걸음을 이렇게 뗐다.

1966년 7월 30일, 벨벳에 손을 닦은 주장
월드컵을 몇 달 앞두고 신문에 무어가 웨스트햄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는 구단과 계약이 끝난 상태였고, 이대로라면 엄밀히 말해 월드컵에 나설 자격이 없었다. 램지가 웨스트햄의 론 그린우드(Thomas Ronald Greenwood;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감독, 훗날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1921-2006) 감독을 대표팀 숙소로 불러 두 사람에게 당장 계약서에 서명하라고 했다. 그렇게 잉글랜드의 주장은 월드컵에 갔다.
모든 경기를 웸블리에서 치른 잉글랜드는 조별리그를 무난히 통과했고, 8강에서 아르헨티나를, 4강에서 에우제비우의 포르투갈을 2-1로 꺾었다. 결승 상대는 서독이었다. 허스트의 자서전에 따르면 램지가 결승을 앞두고 무어를 빼고 노먼 헌터(Norman Hunter; 리즈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의 수비수, 1943-2020)를 넣는 방안을 코치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동료 조지 코언이 엿들었다고 한다. 서독 공격진의 속도가 걱정이었다. 램지는 결국 주장을 그대로 뒀고, 그 결정은 잉글랜드 축구사에서 가장 옳은 결정 가운데 하나가 됐다.

결승 전반 12분 헬무트 할러(Helmut Haller; 서독의 공격수, 1939-2012)의 골로 잉글랜드가 먼저 끌려갔다. 6분 뒤 무어가 하프라인 너머에서 볼프강 오버라트(Wolfgang Overath; 서독의 미드필더, 1943-)에게 반칙을 당했다. 그는 항의하지도, 수비 자리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일어나면서 이미 앞을 보고 있었고, 서독 수비가 정렬하기 전에 프리킥을 올렸다. 웨스트햄에서 수없이 연습한 그대로 허스트가 머리로 받아 넣었다. 피터스의 골로 2-1이 됐다가 정규 시간 종료 직전 볼프강 베버(Wolfgang Weber; 서독의 수비수, 1944-)에게 동점골을 내줬다. 무어는 핸드볼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연장전 허스트의 논란 많은 세 번째 골로 다시 앞서 간 잉글랜드는 마지막 순간 서독의 총공세를 받았다. 공이 잉글랜드 페널티 지역 끝의 무어에게 떨어졌다. 동료들은 그냥 걷어 내라고 소리쳤다. 무어는 공을 한 번 다스린 뒤 40야드 앞의 허스트 발밑으로 정확히 보냈고, 허스트는 그대로 달려가 4-2를 만들었다. 월드컵 결승 해트트릭은 2022년 킬리안 음바페가 나오기까지 56년 동안 허스트 한 사람의 기록이었다. 그 마지막 골을 연 패스가 주장의 발에서 나왔다.

그날 웸블리의 수많은 장면 가운데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시상대의 무어다. 여왕 앞으로 걸어 올라간 그는 진흙과 땀으로 범벅이 된 손을 벨벳 탁자보에 먼저 닦은 뒤 엘리자베스 2세의 손을 잡았다. 《가디언》(The Guardian; 1821년 창간한 영국 일간지)은 선수들을 이끌고 귀빈석으로 올라가는 무어가 경기장에서 가장 침착한 사람이었다고 적었다. 9만 6,924명이 지켜본 결승에서 잉글랜드 주장이 줄리메컵을 들었다. 잉글랜드가 지금까지 단 한 번 든 월드컵이다.

램지는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감독이었다. 그런 그가 무어를 두고 남긴 말은 감독이 주장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헌사에 가깝다.
나의 주장, 나의 리더, 나의 오른팔. 그는 이 팀의 정신이자 심장이었다. 내 목숨을 맡길 수 있는 냉철하고 계산적인 축구 선수였고, 내가 함께 일한 사람 가운데 최고의 프로였다. 그가 없었다면 잉글랜드는 결코 월드컵을 들지 못했다.
My captain, my leader, my right-hand man. He was the spirit and the heartbeat of the team. A cool, calculating footballer I could trust with my life. He was the supreme professional, the best I ever worked with. Without him England would never have won the World Cup.
- 앨프 램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우승 감독. 주장 바비 무어를 두고
그해 말 무어는 BBC 올해의 스포츠 인물로 뽑혔다. 축구 선수로는 처음이었고, 1990년 폴 개스코인이 받기까지 24년 동안 유일한 축구 선수였다. 발롱도르 투표에서는 바비 찰턴, 에우제비우, 프란츠 베켄바워에 이어 4위에 올랐다. 1966년 12월 30일 런던 가제트에 실린 1967년 신년 서훈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대영 제국 훈장 오피서 등급에 올라 있었다. 공훈 사유는 한 줄이었다. 잉글랜드 축구 월드컵 대표팀 주장.
1970년 5월 보고타, 팔찌 하나와 나흘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잉글랜드는 고지대 적응을 위해 남미에서 평가전을 치렀다. 콜롬비아 보고타의 대표팀 숙소 호텔에서 사건이 터졌다. 무어가 바비 찰턴과 함께 찰턴 아내의 선물을 고르러 호텔 보석상에 들렀는데, 젊은 점원이 무어가 금팔찌 하나를 값을 치르지 않고 가져갔다고 주장한 것이다.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무어는 체포됐다 풀려나 에콰도르 키토로 이동해 80번째 A매치를 뛰었고, 잉글랜드는 2-0으로 이겼다.

그런데 멕시코로 돌아가는 대표팀 비행기가 보고타를 경유하자 콜롬비아 당국은 무어를 다시 붙잡았다. 그는 나흘 동안 가택 연금 상태로 지냈다. 외교적 압박과 빈약한 증거 끝에 사건은 완전히 기각됐고, 무어는 뒤늦게 멕시코로 건너가 대표팀에 합류했다. 숙소에 도착한 그를 동료들이 양쪽으로 줄을 서 맞았다. 그리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6월 2일 루마니아와의 첫 경기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1-0 승리를 이끌었다. 보고타의 나흘이 그의 축구에 남긴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1970년 6월 7일 과달라하라, 세기의 태클
닷새 뒤 과달라하라의 에스타디오 할리스코에서 잉글랜드는 브라질을 만났다. 펠레, 자이르지뉴, 토스탕, 히벨리누, 제르송이 한꺼번에 뛰던, 많은 이들이 축구 역사상 가장 강한 팀으로 꼽는 브라질이었다. 한낮의 멕시코 더위 속에서 무어는 그들을 상대로 경기를 했다.
1970년 6월 7일 과달라하라 에스타디오 할리스코, 브라질과의 조별리그.
- 1970년 6월 7일 과달라하라 에스타디오 할리스코, 브라질과의 조별리그.
- 당대 최강 브라질의 공격 앞에 선 잉글랜드의 주장.
- 브라질의 프리킥 앞에 벽을 세운 잉글랜드.
- 한낮의 멕시코 더위 속에서도 서두르지 않는 수비.
- 공을 몰고 들어오는 브라질. 무어의 생애 최고의 경기로 꼽히는 90분이다.
그 경기에서 브라질의 오른쪽 날개 자이르지뉴(Jair Ventura Filho; 1970년 월드컵 전 경기 득점을 기록한 브라질의 윙어, 1944-)가 속도를 붙여 잉글랜드 페널티 지역으로 파고들었다. 무어는 뒷걸음질로 그를 따라가며 기다렸다. 몸을 날리지 않았고, 성급하게 발을 뻗지도 않았다. 자이르지뉴가 슈팅 각을 잡으려는 바로 그 순간 무어의 발이 들어가 공만 깨끗하게 빼냈고, 그는 그 공을 그대로 몰고 나가 공격을 시작했다. 이 장면은 완벽한 태클, 세기의 태클로 불리며 지금도 전 세계 방송에서 되풀이된다. 1996년 잉글랜드 대표팀 응원가 「스리 라이언스」의 가사에도 이 태클이 등장한다.

브라질은 후반 자이르지뉴의 골로 1-0으로 이겼다. 같은 경기에서 고든 뱅크스는 펠레의 헤더를 걷어 내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방으로 불리는 장면을 남겼다. 이긴 팀과 진 팀의 구분이 무의미한 경기였다. 종료 휘슬이 울리자 펠레와 무어는 서로를 끌어안고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 웃통을 벗은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감싸 쥔 그 사진은 축구가 경쟁을 넘어 존중이 되는 순간을 담은 장면으로 남았다. 무어가 받은 펠레의 셔츠는 훗날 맨체스터의 국립 축구 박물관에 전시됐다.

영국 《더 타임스》(The Times; 1785년 창간한 영국 일간지)는 훗날 이 경기를 두고, 사람들이 무어를 특별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백 년 뒤에도 이 태클이 첫 번째 증거가 될 것이라고 썼다. 무어가 세상을 떠난 1993년, 펠레는 이렇게 말했다.
바비 무어는 나의 친구였고, 내가 상대한 가장 위대한 수비수였다. 세상은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가운데 한 명이자 고결한 신사를 잃었다.
He was my friend as well as the greatest defender I ever played against. The world has lost one of its greatest football players and an honourable gentleman.
- 펠레, 1993년 바비 무어의 별세를 두고
잉글랜드는 조 2위로 8강에 올라 레온에서 다시 서독을 만났다. 2-0으로 앞서다 연장 끝에 2-3으로 졌다. 서독에게는 4년 전 웸블리를 갚은 경기였다. 그해 말 무어는 발롱도르 투표에서 서독의 게르트 뮐러에 이어 2위에 올랐다. 그의 발롱도르 최고 순위다.
1973년 호주프에서 웸블리까지, 마지막 108번째
1973년 2월 14일 햄프던 파크에서 무어는 스코틀랜드를 5-0으로 꺾는 경기로 100번째 A매치를 채웠다. 사흘 뒤에는 웨스트햄 통산 509번째 경기를 뛰어 구단 최다 출전 기록을 새로 썼다. 서른두 살의 주장에게 남은 목표는 1974년 서독 월드컵이었다.
그해 6월 6일 폴란드 호주프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은 무어의 경력에서 가장 아픈 경기가 됐다. 그는 프리킥을 몸에 맞혀 피터 실턴(Peter Leslie Shilton; 잉글랜드 최다 출전 기록을 가진 골키퍼, 1949-)이 지키는 골문 안으로 흘려보냈고, 이어 공을 끌다 브워지미에시 루반스키(Włodzimierz Lubański; 폴란드의 공격수, 1947-)에게 빼앗겨 두 번째 골을 내줬다. 잉글랜드는 0-2로 졌다. 10월 17일 웸블리의 폴란드전은 이겨야만 본선에 가는 경기였고, 램지는 무어를 명단에서 뺐다. 무어가 이제 자신이 필요 없느냐고 묻자 램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물론 아니다, 내년 월드컵에서 내 주장이 돼 줘야 한다고.
그날 무어는 벤치에 앉아 램지 옆에서 공격수를 넣으라고 계속 재촉했다. 잉글랜드는 얀 토마셰프스키(Jan Tomaszewski; 폴란드의 골키퍼, 1948-)의 선방에 막혀 1-1로 비겼고 본선에 가지 못했다. 램지가 약속한 다음 해 월드컵은 오지 않았다. 무어의 마지막 A매치는 다음 경기인 1973년 11월 14일 웸블리의 이탈리아전 0-1 패배였다. 결승골을 넣은 사람은 훗날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이 되는 파비오 카펠로(Fabio Capello; 유벤투스·AC 밀란과 이탈리아의 미드필더, 훗날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1946-)였고, 그는 무어를 상대로 넣은 그 골을 선수 생활 최고의 순간으로 꼽았다.
108경기. 바비 찰턴의 기록을 두 경기 넘어선 당시 잉글랜드 최다 출전이었다. 그중 90경기를 주장으로 뛰어 빌리 라이트와 같은 최다 주장 기록을 세웠다. 출전 기록은 훗날 실턴, 해리 케인, 웨인 루니, 데이비드 베컴, 스티븐 제라드가 넘어섰다. 라이트와 나눠 가진 90경기 주장 기록은 2026년 월드컵 도중 케인이 넘어서기까지 53년 동안 잉글랜드 최다였고, 지금은 라이트와 함께 케인 다음 자리에 있다.
풀럼의 흰 셔츠, 1975년 웸블리의 마지막 결승
1974년 1월 FA컵 헤리퍼드 유나이티드전에서 다친 경기가 무어의 마지막 웨스트햄 경기가 됐다. 그해 3월 14일 그는 15년 넘게 뛴 웨스트햄을 떠나 2부 리그의 런던 라이벌 풀럼으로 옮겼다. 이적료는 2만 5천 파운드였다. 웨스트햄 통산 공식전 647경기, 그리고 잉글랜드 필드 플레이어 최다 출전 기록을 안고 떠났다.
풀럼에서 무어는 1970년 월드컵을 함께 뛴 대표팀 동료 앨런 멀러리(Alan Patrick Mullery; 토트넘 홋스퍼·풀럼과 잉글랜드의 미드필더, 1941-)와 다시 만났다. 첫 시즌 풀럼은 리그컵에서 웨스트햄을 꺾었고, FA컵에서는 결승까지 올랐다. 1975년 5월 3일 웸블리의 결승 상대는 하필 웨스트햄이었다. 풀럼은 앨런 테일러에게 두 골을 내주고 0-2로 졌다. 경기가 끝나자 옛 동료들이 흰 셔츠의 무어에게 다가가 그를 감쌌다. 그 결승이 무어가 프로 선수로 웸블리에 선 마지막 날이었다.

서른넷의 무어는 더는 빠르지 않았다. 원래도 빠른 선수가 아니었다. 풀럼에서 함께 뛴 공격수 존 미첼(John Mitchell; 풀럼의 공격수, 1952-)은 그를 두고 거의 뛰지 못했고, 몸을 돌리지도 못했고, 헤더도 못 했고, 왼발도 없었지만 세계 최고의 수비수였다고 회고했다. 무어가 처음 그에게 건넨 패스는 일부러 발밑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세게 온 공이었는데, 몸을 틀어 공을 받고 보니 자신을 막던 수비수가 왼쪽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무어가 패스 하나로 수비수 한 명을 대신 제쳐 준 것이다. 미첼은 그것이 차이였다고 말했다.
1977년 5월 14일 블랙번 로버스전을 끝으로 무어는 잉글랜드에서의 선수 생활을 마쳤다. 1976년에는 북미 사커 리그의 샌안토니오 선더에서 임대로 24경기를 뛰었고, 같은 해 미국 건국 200주년 기념 대회에서는 미국 선발팀 유니폼을 입고 이탈리아, 브라질, 그리고 잉글랜드를 상대했다. 1978년에는 덴마크의 헤르닝 프레마드에서 9경기를 뛰며 막 프로화하던 덴마크 축구를 알렸고, 같은 해 시애틀 사운더스에서 7경기를 뛰었다. 1983년에는 부상자가 넘쳐 난 캐롤라이나 라이트닌에서 마흔둘의 나이로 8경기를 더 뛰었다.
필자가 꼽는 역대 센터백 다섯 명
우승컵의 숫자를 떠나 선수로서의 총체적인 수준만으로 축구사 역대 센터백 다섯 명을 고르라면, 필자는 다음 다섯 이름을 꺼낸다. 시대순으로 적는다.
호세 나사시(José Nasazzi; 우루과이 수비수, 1901-1968). ’위대한 원수’로 불린 우루과이의 주장이다. 1924년과 1928년 올림픽 금메달을 땄고 1930년 첫 월드컵은 주장으로 들어 올렸으며, 수비수이면서 팀 전체의 위치를 지휘했다. 센터백이 막는 데서 그치지 않고 팀 전체를 움직이는 자리라는 것을 축구사에서 처음 보여 준 선수다. 삥이FC는 그의 두 번의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를 1923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 호세 나사시와 1935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 호세 나사시에 정리했다.
바비 무어. 이 편의 주인공이다. 속도도, 높이도, 왼발도 없이 읽기와 타이밍과 패스만으로 세계 정상에 선 수비수다. 다섯 명 가운데 신체 조건만 놓고 보면 가장 평범한 선수였고, 그래서 그가 도달한 높이가 더 크게 보인다.
프란츠 베켄바워(Franz Anton Beckenbauer; 바이언 뮌헨과 서독의 리베로, 1945-2024). 수비 뒤에서 공을 몰고 올라가는 현대 리베로를 완성한 선수다. 1966년 결승에서 무어와 맞섰고, 1974년에는 서독의 주장으로 월드컵을 들었다. 발롱도르를 두 번 받은 유일한 수비수이며, 다섯 명 가운데 공을 가진 수비수로서는 가장 화려했다.
다니엘 파사레야(Daniel Alberto Passarella; 리버 플레이트·피오렌티나·인테르와 아르헨티나의 센터백, 1953-). 아르헨티나에 1978년 첫 월드컵을 안긴 주장이다. 키가 크지 않았지만 공중볼에서 지지 않았고, 수비수로서는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골을 넣었다. 남미에서 칠레의 엘리아스 피게로아(Elías Ricardo Figueroa Brander; 칠레의 센터백, 1946-)와 함께 역대 최고의 센터백 자리를 다툰다.
프랑코 바레시(Franchino Baresi; AC 밀란과 이탈리아의 리베로, 1960-2026). 아리고 사키(Arrigo Sacchi; AC 밀란과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1946-)의 AC 밀란에서 오프사이드 라인과 압박 수비를 지휘한 리베로다. 20년 동안 밀란 한 팀에서만 뛰었고, 1994년 월드컵에서는 무릎 반월판을 다친 지 25일 만에 결승에 돌아와 브라질 공격진을 120분 동안 막았다. 수비라는 행위를 가장 높은 수준의 조직으로 끌어올린 선수다.
다섯 명을 나란히 세워 보면 무어의 자리가 분명해진다. 나사시가 지휘의 원형이고, 베켄바워가 공을 가진 수비수의 완성이며, 파사레야가 싸우는 수비수의 극점이고, 바레시가 조직의 정점이라면, 무어는 예측의 극치다. 공이 올 곳을 가장 먼저 알았던 수비수다. 베켄바워는 무어 사후 20년을 맞은 2013년 웨스트햄에 보낸 헌사에서 그 점을 정확히 짚었다.
그의 특별한 힘은 직관이었다. 그래서 그는 믿을 수 없는 위치 선정을 보여 주었다.
His particular strength was his intuition. Thus he had an incredible positional play.
- 프란츠 베켄바워, 2013년 2월 바비 무어 별세 20주기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헌사
2020년 《프랑스 풋볼》(France Football; 발롱도르를 주관하는 프랑스 축구 전문지)이 전 세계 기자단 투표로 뽑은 발롱도르 드림팀의 센터백 부문에서도 이 이름들이 위에 섰다. 베켄바워가 1위, 바레시가 2위였고, 무어는 세르히오 라모스와 파비오 칸나바로에 이어 5위, 파사레야가 6위였다. 나사시는 후보 열 명에 들지 못했다. 필자는 그 표를 존중하되, 1920년대의 나사시를 빼고 역대 센터백을 말하는 것은 축구사의 앞 절반을 지우는 일이라고 본다.
역대 클럽·국대 기록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1958-1974647경기 · 27골
풀럼 FC1974-1977148경기 · 1골
샌안토니오 선더1976 · 임대24경기 · 1골
시애틀 사운더스19787경기
헤르닝 프레마드19789경기
캐롤라이나 라이트닌19838경기
잉글랜드 대표팀1962-1973108경기 · 2골주장 90경기
웨스트햄과 풀럼은 리그·FA컵·리그컵과 채리티 실드·유럽 대항전 등을 합한 공식전 기록이다. 리그만 보면 웨스트햄 544경기 24골, 풀럼 124경기 1골이다. 북미 사커 리그와 덴마크 리그는 리그 경기 수이며, 이 밖에 1981년 홍콩 이스턴 AA에서 실드 결승 12분을 뛰었다. 대표팀은 성인 A매치 기준이다. 문장은 무어가 뛰던 시기에 각 구단이 쓰던 것이며, 헤르닝 프레마드는 1978년 당시 문장을 확인하지 못해 현재 문장을 실었다.
역대 등번호
클럽
| 소속팀 | 확인 기간 | 등번호 |
|---|---|---|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 1958-59~1973-74 시즌 | 6 |
| 풀럼 FC | 1974-75 시즌 FA컵 결승 | 6 |
국가대표팀
| 대표팀 | 확인 대회·기간 | 등번호 |
|---|---|---|
| 잉글랜드 | 1962 FIFA 월드컵 | 16 |
| 잉글랜드 | 1966 FIFA 월드컵 | 6 |
| 잉글랜드 | UEFA 유로 1968 | 6 |
| 잉글랜드 | 1970 FIFA 월드컵 | 6 |
당시 잉글랜드 구단은 고정 등번호 없이 포지션에 따라 경기마다 번호를 받았다. 무어는 1958년 9월 8일 데뷔전에서 맬컴 앨리슨의 6번을 물려받았고, 1964년 FA컵 결승과 1965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에서도 6번을 달았다. 웨스트햄은 2008년 8월 6번을 영구 결번했다. 국가대표 번호는 각 대회 공식 선수 명단 기준이며, 북미 사커 리그와 덴마크 구단의 번호는 확인되지 않았다.
대표 우승 경력
우승: 1963-64
준우승: 1974-75 (풀럼)
우승: 1964 (공동)
우승: 1964-65
준우승: 1965-66
우승: 1981-82 (이스턴 AA)
우승: 1966년
8강: 1962년, 1970년
3위: 1968년
우승 6회: 1964-65, 1965-66, 1967-68, 1968-69, 1970-71, 1972-73
공동 우승 3회: 1963-64, 1969-70, 1971-72
바비 무어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대영 제국 훈장 · 오피서Officer · OBE · 1967년
- 발롱도르1964년 19위 · 1966년 4위 · 1968년 22위 · 1970년 2위 · 1971년 10위 · 1972년 7위 · 1973년 19위
- 발롱도르 드림팀2020년 · 센터백 후보 5위
- FIFA 월드컵 올스타 팀1966년
- UEFA 유로 대회 베스트 111968년
- BBC 올해의 스포츠 인물1966년 · 축구 선수 최초
- 잉글랜드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선수1963-64 시즌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올해의 해머1961 · 1963 · 1968 · 1970년
- 월드 사커 올해의 세계 베스트 111968 · 1969 · 1971 · 1972 · 1973년
- FIFA 월드컵 역대 올스타 팀1994년
- FIFA 공로 훈장1996년
- 20세기 세계 베스트 111998년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2002년 · 초대 헌액
- BBC 위대한 영국인 100인2002년
- UEFA 주빌리 어워즈 잉글랜드 골든 플레이어2003년 · 지난 50년 최고의 잉글랜드 선수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6번 영구 결번2008년
- 월드 사커 역대 최고의 베스트 112013년
- IFFHS 역대 남자 드림팀 B팀2021년
1993년 2월 24일, 그리고 웸블리 앞의 동상
축구를 그만둔 무어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사업은 잘 풀리지 않았고, 첫 결혼은 끝났다. 옥스퍼드 시티와 홍콩의 이스턴,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를 맡았지만 감독으로서 큰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신문사 스포츠 에디터와 라디오 해설자로 일하는 동안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월드컵을 든 유일한 잉글랜드 주장에게 끝내 어떤 역할도 맡기지 않았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일을 잉글랜드 축구의 부끄러운 대목으로 꼽는다.
1991년 4월 무어는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당시에는 응급 위 수술로만 알려졌다. 1993년 2월 14일 그는 대장암과 간암을 앓고 있으며 이미 퍼졌다고 스스로 밝혔다. 사흘 뒤 그는 웸블리 중계석에 앉아 오랜 동료 조너선 피어스와 함께 잉글랜드와 산마리노의 경기를 해설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공개 활동이었다. 1993년 2월 24일 아침, 무어는 쉰한 살로 세상을 떠났다. 1966년 월드컵 우승 멤버 가운데 처음으로 떠난 사람이었다.
3월 6일 업턴 파크의 첫 홈경기에는 웨스트햄 팬뿐 아니라 다른 구단 팬들이 보낸 꽃과 머플러가 경기장을 뒤덮었다. 허스트와 피터스가 등번호 6번이 새겨진 꽃 유니폼을 센터 서클에 내려놓았고, 그날 웨스트햄은 6번을 비우고 경기에 나섰다. 냉정하기로 유명했던 잭 찰턴은 훗날 BBC 다큐멘터리에서 평생 울어 본 것은 빌리 브렘너와 무어 두 사람 때문뿐이었다고 말한 뒤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6월 2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추모 예배에는 1966년 우승 멤버 전원이 참석했다. 운동선수가 그곳에서 추모된 것은 서인도 제도의 크리켓 선수 프랭크 워렐(Sir Frank Mortimer Maglinne Worrell; 서인도 제도 크리켓 대표팀 주장, 1924-1967)에 이어 두 번째였다.

무어의 두 번째 아내 스테퍼니 무어는 그해 영국 암 연구소와 함께 바비 무어 기금을 세워 대장암 연구를 후원했다. 2003년에는 웨스트햄 홈구장 근처 바킹 로드와 그린 스트리트가 만나는 교차로에, 허스트와 레이 윌슨의 어깨 위에서 줄리메컵을 든 무어와 피터스를 새긴 조각상이 섰다. 2007년 5월 11일, 다시 지은 웸블리 스타디움 정면에 실물의 두 배 크기 무어 동상이 세워졌다.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지난 50년 최고의 잉글랜드 선수를 묻는 팬 투표에서 무어가 압도적으로 뽑히자 조각가 필립 잭슨(Philip Jackson; 스코틀랜드 출신 조각가, 1944-)에게 맡긴 작품이다. 받침까지 높이 약 6미터의 청동상은 웸블리 길을 내려다보고, 받침 정면에는 1966년 우승 멤버들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받침에는 무어의 가장 가까운 친구 가운데 한 명이던 《데일리 메일》의 축구 기자 제프 파월(Jeff Powell; 《데일리 메일》 축구 기자)이 지은 열한 마디의 헌사가 새겨져 있다. 잉글랜드가 무어에게 바친 헌사로 알려진 바로 그 글이다.
| 헌사 | 원문 |
|---|---|
| 무결점의 축구 선수 | Immaculate footballer. |
| 제왕의 수비수 | Imperial defender. |
| 1966년의 불멸의 영웅 | Immortal hero of 1966. |
| 월드컵을 처음 들어 올린 잉글랜드인 | First Englishman to raise the World Cup aloft. |
| 런던 이스트엔드가 가장 사랑한 아들 | Favourite son of London's East End. |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가장 빛나는 전설 | Finest legend of West Ham United. |
| 국가의 보물 | National Treasure. |
| 웸블리의 주인 | Master of Wembley. |
| 축구의 군주 | Lord of the game. |
| 비범한 주장 | Captain extraordinary. |
| 시대를 초월한 신사 | Gentleman of all time. |
웸블리 스타디움 바비 무어 동상(2007년 5월 11일 제막, 조각 필립 잭슨) 받침에 새긴 제프 파월의 헌사 전문이다. 원문은 열한 마디를 마침표로 끊어 적었다. 네 번째 마디의 First Englishman은 영국인이 아니라 잉글랜드인이다.
이듬해 웨스트햄은 6번을 영구 결번했다. 2016년에는 바킹의 어린 시절 집 담장에 축구 선수 최초로 잉글리시 헤리티지의 블루 플라크가 붙었고, 웨스트햄이 런던 스타디움으로 옮긴 뒤에도 북쪽 스탠드에는 바비 무어 스탠드라는 이름이 그대로 따라갔다.
오늘날 바비 무어는 어떻게 평가받는가
무어는 1994년 FIFA 월드컵 역대 올스타 팀에, 1998년 20세기 세계 베스트 11에 들었고, 2003년 UEFA 창설 50주년에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지난 50년 가장 뛰어난 잉글랜드 선수로 그를 골랐다. 바비 찰턴도, 케빈 키건도, 개리 리네커도 아닌 수비수 무어였다. 2013년 《월드 사커》(World Soccer; 1960년 창간한 영국 축구 월간지)의 역대 최고 베스트 11과 2021년 IFFHS의 역대 드림팀에도 그의 이름이 올랐다.
그를 둘러싼 평가는 늘 같은 역설에서 출발한다. 느렸고, 높지 않았고, 한 발만 썼다. 이 사실을 숨기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그와 맞선 펠레와 베켄바워, 그를 쓴 램지와 지켜본 스타인이 하나같이 최고라는 말을 썼다. 몸의 한계를 머리로 지운 선수, 그래서 수비가 운동 능력이 아니라 지성의 영역일 수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증명한 선수가 무어다. 오늘날 센터백에게 요구되는 위치 선정과 빌드업의 원형을 찾아 올라가면, 1960년대 웸블리의 6번에 닿는다.
그리고 그 모든 위에 품격이 있었다. 진흙 묻은 손을 벨벳에 닦고 여왕의 손을 잡은 주장, 증거 없는 혐의로 나흘을 갇히고도 한마디 원망 없이 다음 경기에 나선 주장, 세계 최강 브라질에 지고도 펠레와 서로의 얼굴을 감싸 쥔 주장. 잉글랜드가 그를 웸블리의 주인이라 부르는 것은 트로피 때문만이 아니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 다섯 명을 꼽으라면, 삥이FC의 답에는 반드시 바비 무어가 들어간다.
참고 자료
- 위키백과: Bobby Moore: 출생과 학창 시절, 맬컴 앨리슨의 6번과 1958년 9월 8일 데뷔, 1962년 리마 데뷔와 1963년 최연소 주장, 1964년 고환암 수술, 1966년 계약 분쟁과 결승의 두 도움, 벨벳 탁자보 일화, 보고타 팔찌 사건, 1970년 브라질전, 1973년 폴란드전과 마지막 A매치, 풀럼 이적, 존 미첼 회고, 투병과 별세, 웨스트민스터 사원 추모, 시즌별 클럽 기록과 연도별 A매치 기록, 우승·개인 수상 목록.
- FIFA: Remembering Bobby Moore(2020년 4월 12일): 앨프 램지, 조크 스타인, 펠레, 베켄바워의 평가와 제프 파월의 헌사, 파비오 카펠로의 회고.
- 잉글리시 헤리티지: Bobby Moore blue plaque: 펠레의 1993년 추모 발언과 바킹 생가 블루 플라크.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Der Kaiser pays his tribute(2013년 2월 27일): 별세 20주기 베켄바워의 헌사.
- 런던 가제트 제44210호 부록(1966년 12월 30일): 1967년 신년 서훈 대영 제국 훈장 오피서 명단, Robert Fredrick Moore, Captain, England Association Football World Cup Team.
- 위키백과: List of England national football team captains, England national football team records and statistics: 최다 주장 출전(해리 케인 99경기, 빌리 라이트·무어 90경기)과 최다 출전 순위(2026년 10월 기준), 2026년 월드컵에서 케인이 90경기 주장 기록을 넘어선 경과.
- 위키백과: Statue of Bobby Moore: 잉글랜드 축구 협회 팬 투표에서 비롯된 제작 경위, 조각가 필립 잭슨, 받침 포함 높이 20피트와 1966년 우승 멤버 부조, 제프 파월의 헌사 전문.
- 위키백과: 1966 FIFA World Cup final: 결승 득점 경과와 관중 9만 6,924명, 등번호 6번.
- 위키백과: 1964 FA Cup final, 1965 European Cup Winners' Cup final, 1975 FA Cup final: 세 결승의 경기 내용과 무어의 6번.
- 위키백과: 연도별 Ballon d'Or 투표 결과: 1964·1966·1968·1970·1971·1972·1973년 순위.
- Goal 이탈리아: Pallone d'Oro Dream Team, la classifica completa: 2020년 발롱도르 드림팀 센터백 득표 순위(베켄바워 738표, 바레시 354표, 무어 178표로 5위, 파사레야 139표로 6위).
- 위키백과: FIFA Order of Merit: 1996년 수훈.
- 위키백과: 1962, 1966, 1970 FIFA World Cup squads, UEFA Euro 1968 squads: 대회별 등번호.
- Logopedia: 웨스트햄(1968-1975년)·풀럼(1972-1977년)·시애틀 사운더스(1974-1983년) 당시 문장.
- 본문 사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데뷔 무렵) · Mirror(1964 FA컵, 1975 FA컵 결승) · BBC(램지와 무어) · Channel 4 News(보고타) · Mirror(브라질전) · Irish Mirror(펠레와 유니폼 교환) · Wikimedia Commons(웸블리 동상, Francesco Gasparetti, CC BY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