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 LEGEND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라츠(Dragoslav Šekularac)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드리블의 귀재, 부산 대우 감독이었던 동유럽 축구 GOAT

1962년 발롱도르 4위, UEFA 유로 1960 준우승과 대회 베스트 11, 1962년 칠레 월드컵 4위.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두 번째 별이자 1996년 부산 대우 로얄즈 감독이었던 유고슬라비아의 드리블 천재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라츠. 클럽·국대 기록과 역대 등번호, 우승과 개인 수상을 정리한다.
흑백으로 처리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시절의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라츠와 세르비아 국기, 드리블의 귀재 문구
드리블의 귀재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라츠.
FIFA 로고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세르비아 국기
SRBIJA세르비아 공화국Република Србија | Republika Srbija
붉은 별이 든 유고슬라비아 국기
FNRJ · 1945-1963유고슬라비아Federativna Narodna Republika Jugoslavija
UEFA 로고

유럽축구연맹Union des Associations Européennes de Football

СРБИЈА 글자와 네 개의 С, 축구공이 든 세르비아 축구 협회 문장
#FSS세르비아 축구 협회Фудбалски савез Србије | Fudbalski savez Srbije
붉은 별과 FSJ 글자가 든 유고슬라비아 축구 협회 문장
#FSJ유고슬라비아 축구 협회Fudbalski savez Jugoslavije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
#SRB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Фудбалска репрезентација Србије | Orlovi (오를로비; 독수리들)
다섯 횃불과 붉은 별, 밀 이삭이 든 1943-1963년 유고슬라비아 국가 문장
#YUG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Fudbalska reprezentacija Jugoslavije | Plavi (플라비; 파랑)
편집자 평가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라츠는 동유럽 축구가 낳은 첫 번째 드리블 천재다. 열일곱에 츠르베나 즈베즈다 1군에 올라 다섯 번 리그 정상에 섰고, 유고슬라비아의 10번 자리에서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은메달, 첫 UEFA 유로였던 1960년 대회 준우승과 대회 베스트 11, 1962년 칠레 월드컵 4위를 이끌었다. 그해 발롱도르 투표에서는 요제프 마소푸스트, 에우제비우, 카를하인츠 슈넬링거 다음인 4위였다. 1950년대에 이미 넛메그와 페인트, 급격한 방향 전환을 자유자재로 섞은 그를 베오그라드 사람들은 셰키라 불렀고,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라이코 미티치 다음 두 번째로 그를 구단의 별로 올렸다. 유벤투스로 가는 길을 국가가 막았고, 주심을 때린 대가로 긴 징계를 받았으며, 서른 넘어서는 독일과 미국, 콜롬비아와 프랑스, 캐나다를 떠돌았다. 그리고 1996년에는 부산 대우 로얄즈의 감독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셰브첸코와 네드베드, 모드리치보다 먼저 동유럽 축구의 GOAT 논쟁에 이름을 올려야 하는 사람이 셰쿨라라츠다.

셰쿨라라츠 플레이드리블의 귀재1 / 5

10번의 드리블. 공을 발밑에 붙인 채 몸의 방향을 틀어 수비수 사이를 빠져나간다.

삥이FC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라츠 평가

  1. 21세기에 축구를 본 사람들은 동유럽 축구의 GOAT로 안드리 셰브첸코(Андрій Шевченко; 디나모 키이우·AC 밀란과 우크라이나의 공격수, 1976-),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파벨 네드베드(Pavel Nedvěd; 라치오·유벤투스와 체코의 미드필더, 1972-), 루카 모드리치를 먼저 떠올린다. 동유럽 역대 베스트 11을 꾸린다면 이야기는 셰쿨라라츠에서 시작해야 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중심이었고, 발롱도르 투표가 열리면 해마다 표를 받았다. 1960년 공동 19위, 1961년 공동 10위, 1962년 4위였다.

  2. 셰쿨라라츠는 1950년대에 이미 넛메그, 팬텀 드리블, 스쿱 턴, 맥기디 스핀 같은 기술을 자유롭게 구사했다. 오늘날로 치면 모드리치나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에당 아자르의 화려함을 지닌 선수였다. 다리가 약간 휘었고 발이 빠른 편도 아니었지만, 방향을 바꾸는 순간이 누구보다 빨랐다. 고개를 든 채 공을 몰았기에 드리블이 끝나는 자리에서 곧바로 패스가 나갔다.

  3. 그의 무대는 유럽이었다. 유럽 대항전에서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피오렌티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바르셀로나 같은 라리가·세리에 A·잉글랜드의 강호를 상대로 버텼고, 셰쿨라라츠는 그 중심에서 서유럽의 관중을 매료시켰다. 첫 UEFA 유로에서 유고슬라비아를 결승까지 끌고 간 것도, 칠레 월드컵 4강을 만든 것도 그였다.

  4. 그리고 그는 한국 축구와도 이어진다. 1961년 칠레 월드컵 예선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베오그라드에서 골을 넣었고, 한 달 반 뒤 서울 원정에도 나섰다. 35년 뒤인 1996년에는 조광래 같은 레전드를 배출한 부산 대우 로얄즈의 감독으로 다시 한국에 왔다. K리그 벤치에 앉은 사람 가운데 발롱도르 4위의 이력을 가진 사람은 그밖에 없다.

어두운 색 10번 상의와 흰 바지 차림으로 공을 몰고 가는 셰쿨라라츠의 흑백 사진
10번을 단 셰쿨라라츠의 드리블. 공은 언제나 그의 발밑 가까이에 있었다.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라츠 프로필

세르비아 국기SRBIJA세르비아 공화국Република Србија | Republika Srbija
본명
Драгослав Шекуларац(Dragoslav Šekularac)
애칭
셰키(Šeki)
출생
1937년 11월 8일
출생지
유고슬라비아 왕국 슈티프(현 북마케도니아)
사망
2019년 1월 5일 · 향년 81세
사망지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대표 국적
유고슬라비아
포지션
인사이드 포워드 · 공격형 미드필더 · 윙 포워드
주요 등번호
10번 · 8번
선수 경력
1955-1976년
대표팀
1956-1966년 · 41경기 6골
별명
드리블의 왕(Kralj driblinga)

1937년 슈티프에서 베오그라드로

셰쿨라라츠는 1937년 11월 8일 지금의 북마케도니아 동부 도시 슈티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마케도니아 사람이었고, 몬테네그로 출신 세르비아인 변호사였던 아버지가 일 때문에 그곳에 머물던 때였다. 아버지가 베오그라드의 농림부에 자리를 얻으면서 가족은 그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수도로 옮겼다. 그가 자란 곳은 베오그라드였다.

소년은 츠르베나 즈베즈다(Fudbalski klub Crvena zvezda; 1945년 창단한 베오그라드의 축구단,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의 팬이었다. 경기장 관중석 아래 맨홀로 숨어 들어가 경기를 봤다는 이야기를 그는 훗날 즐겨 했다. 열세 살에 구단 유소년 팀에 들어갔고, 열일곱이던 1955년 미샤 파비치(Miša Pavić; 츠르베나 즈베즈다 감독) 감독이 그를 1군에 올렸다. 첫 시즌인 1955-56년 그는 리그 22경기에 나섰고,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리그 정상에 섰다.

그해 유러피언컵이 시작됐다.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1956-57 시즌 4강에 올라 피오렌티나와 맞섰고, 열아홉 살의 셰쿨라라츠도 그 명단에 있었다. 그 두 경기는 1956-57 유러피언컵 4강에 정리해 두었다.

1958년 2월 5일 베오그라드, 뮌헨 전날의 3-3

1957-58 유러피언컵 8강에서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만났다. 1월 맨체스터 올드 트래퍼드 1차전을 1-2로 졌고, 2월 5일 베오그라드 2차전에서는 전반에만 0-3으로 밀렸다. 후반에 보라 코스티치(Borivoje Kostić; 츠르베나 즈베즈다와 유고슬라비아의 왼쪽 윙어, 1930-2011)가 두 골, 라자르 타시치(Lazar Tasić; 츠르베나 즈베즈다와 유고슬라비아의 수비수)가 페널티킥으로 3-3을 만들었다. 한 골이면 연장이었다. 경기 막판 그 기회가 셰쿨라라츠에게 왔다.

골문에서 3-4m 앞이었는데, 크로스바 위로 차 버렸다.

I was 3-4m from the goal and I put it over the crossbar.

-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라츠, 1958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을 돌아보며. 조너선 윌슨, 『더 블리자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합계 5-4로 4강에 올랐다. 이튿날인 2월 6일, 귀국길에 급유를 위해 내린 뮌헨에서 그들의 비행기가 추락했다. 셰쿨라라츠는 제문의 영화관 앞에서 한 소년에게 그 소식을 들었다. 라디오를 켰고,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 오기 시작했다. 끔찍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날 경기장에서 마주했던 바비 찰턴(Sir Robert Charlton;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의 공격형 미드필더, 1937-2023)과는 평생 연락을 주고받았고, 그는 그 뒤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이 됐다. 이 대회의 득점 기록은 1957-58 유러피언컵 득점 순위에 있다.

같은 해 여름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미트로파컵(Mitropapokal; 1927년 시작한 중부 유럽 클럽 대회)이 쉬던 해에 한 번 열린 다뉴브컵(Donau-Cup)을 들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루다 흐베즈다 브르노와 치른 결승에서 셰쿨라라츠는 브르노 원정 2차전에 골을 넣었고, 합계 7-3이었다. 이듬해에는 리그와 컵을 함께 차지했다. 1961-62 인터시티 페어스컵에서는 4강까지 올라 바르셀로나에 합계 1-6으로 졌다.

1956년 멜버른과 1958년 스웨덴

대표팀 데뷔는 열여덟이던 1956년 9월 30일 체코슬로바키아전이었다. 그해 11월 멜버른 올림픽에서 유고슬라비아는 미국을 9-1로 꺾고 결승까지 올랐고, 12월 8일 결승에서 소련에 0-1로 져 은메달을 받았다. 셰쿨라라츠는 그 결승에 나섰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그는 15번을 달고 스코틀랜드전 1-1, 프랑스전 3-2 승리, 파라과이전 3-3까지 조별 리그 세 경기를 모두 뛰었다. 대회 직전 베오그라드에서 잉글랜드를 5-0으로 무너뜨린 경기에도 그가 있었다. 유고슬라비아는 8강에서 서독에 0-1로 졌다.

1960년 7월 파리, 첫 번째 UEFA 유로

1960년 유럽은 처음으로 대표팀 선수권을 열었다. 지금의 UEFA 유로, 당시 이름으로 유러피언 네이션스컵(Coupe d’Europe des Nations)이다. 대회를 처음 구상한 프랑스 축구 협회 사무총장 앙리 들로네(Henri Delaunay; UEFA 초대 사무총장, 1883-1955)는 개막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트로피에는 그의 이름이 붙었다. 셰쿨라라츠는 불가리아와의 예선 두 경기, 포르투갈과의 8강 두 경기를 모두 뛰었고, 베오그라드의 8강 2차전 5-1 승리에서는 10분 만에 골을 넣었다. 네 팀이 오른 본선은 프랑스에서 열렸다.

7월 6일 파리 파르크 데 프랭스의 4강에서 유고슬라비아는 개최국 프랑스에 2-4로 끌려가다 후반 막판 3골을 몰아쳐 5-4로 이겼다. 아홉 골은 지금도 UEFA 유로 본선 한 경기 최다 골 기록이다. 나흘 뒤 같은 경기장에서 열린 결승에서 유고슬라비아는 밀란 갈리치(Milan Galić; 파르티잔과 유고슬라비아의 공격수, 1938-2014)의 골로 전반을 앞섰지만, 레프 야신이 지킨 소련에 연장 끝에 1-2로 졌다.

준우승이었지만 UEFA가 꼽은 대회 베스트 11에 유고슬라비아 선수가 넷 들어갔다. 수비의 블라디미르 두르코비치, 공격의 갈리치, 코스티치, 그리고 셰쿨라라츠다. UEFA는 그를 쇼맨의 기술로 유고슬라비아의 스타가 된 자유분방한 인사이드 포워드로 소개한다.

가슴에 국가 문장이 달린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셰쿨라라츠가 실린 칠레 잡지 에스타디오의 표지
칠레 잡지 『에스타디오』 998호(1962년 7월 12일) 표지의 셰쿨라라츠. 칠레 월드컵이 끝난 직후, 개최국이 기억한 유고슬라비아의 얼굴이었다. 가슴의 문장이 머리띠 대표팀 줄에 실은 1943-1963년 국가 문장이다.

1961년 서울, 그리고 1962년 칠레의 4위

칠레 월드컵으로 가는 길에 유고슬라비아는 대한민국을 만났다. 1961년 10월 8일 베오그라드 1차전 5-1 승리에서 셰쿨라라츠는 골을 넣었고, 11월 26일 서울 2차전 3-1 승리에도 선발로 나섰다. 유고슬라비아는 그 길로 일본, 홍콩, 인도네시아, 이스라엘을 돌며 친선 경기를 치렀다. 한국 축구가 처음 맞닥뜨린 유럽 정상급 선수 가운데 하나가 그였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셰쿨라라츠는 8번을 달고 여섯 경기를 모두 뛰었다. 첫 경기에서 소련에 0-2로 졌지만, 우루과이를 3-1, 콜롬비아를 5-0으로 꺾고 8강에 올랐다. 우루과이전을 두고 그는 드리블로 상대를 끌고 다니며 동료에게 정교한 패스를 넣었다고 회상했다. 8강에서는 4년 전 자신들을 떨어뜨린 서독을 1-0으로 꺾었다. 4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 1-3으로 졌고, 3위 결정전에서 개최국 칠레에 0-1로 져 4위로 대회를 마쳤다.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여러 기자가 그를 가린샤나 아마릴두보다 대회 최고의 선수로 꼽을 만했다고 본다고 적는다.

1962년 발롱도르 4위

그해 12월 《프랑스 풋볼》(France Football; 발롱도르를 주관하는 프랑스 축구 전문지)의 발롱도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요제프 마소푸스트(Josef Masopust; 두클라 프라하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미드필더, 1931-2015)에게 돌아갔다. 65점이었다. 2위는 53점의 에우제비우, 3위는 33점의 카를하인츠 슈넬링거(Karl-Heinz Schnellinger; 1. FC 쾰른과 서독의 수비수, 1939-), 그리고 4위가 26점의 셰쿨라라츠였다. 열아홉 명의 투표인 가운데 여덟 명이 그의 이름을 적었고, 두 명은 1위로 적었다. 동유럽의 두 미드필더가 1위와 4위를 나눠 가진 해였다. 대표팀 동료 갈리치는 8위였다.

유벤투스로 가지 못한 이유

유벤투스가 셰쿨라라츠를 원했다. 시기는 1950년대 말이라는 기록(UEFA)과 1962년이라는 기록(트리벨라)이 엇갈린다. 밀라노 산 시로에서 그를 본 피아트의 잔니 아녤리(Gianni Agnelli; 피아트 회장·유벤투스 구단주, 1921-2003)가 반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츠르베나 즈베즈다도 이적료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막은 것은 국가였다.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의 내무부, 그 꼭대기의 알렉산다르 란코비치(Aleksandar Ranković; 유고슬라비아 내무부 장관·부통령, 1909-1983) 쪽에서 셰쿨라라츠는 나라 안에 남아 사람들을 즐겁게 해야 한다는 뜻을 전해 왔다. 젊은이들이라는 기록도, 노동 계급이라는 기록도 있다. 셰쿨라라츠는 훗날 자서전에 유벤투스 이적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적었다.

같은 해 가을 그는 니시에서 열린 라드니치키전이 끝난 뒤 주심 파블레 툼바스(Pavle Tumbas; 유고슬라비아의 주심)를 때렸다. 그 장면이 일간지 『폴리티카』에 사진으로 실렸고, 그는 긴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다. 기간은 18개월이라는 기록과 2년이라는 기록이 엇갈린다. 그는 군에 입대해 징계를 덜었고, 1963년 10월 대표팀에 돌아왔다. 조너선 윌슨의 기록에 따르면 군 복무 중인 그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려고 5천 명쯤이 모였다. 툼바스는 말년에 그에게 용서를 구했고, 셰쿨라라츠는 그를 용서하지 않은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메트로폴 호텔의 셰키

베오그라드의 셰쿨라라츠는 축구 선수를 넘어선 유명인이었다. 그가 즐겨 찾던 곳은 베오그라드 최고의 호텔이던 메트로폴(Hotel Metropol)의 바였고, 결혼식도 그곳에서 올렸다. 첫 계약의 대가가 이탈리아계 가수 카테리나 발렌테(Caterina Valente; 프랑스 태생의 이탈리아계 가수, 1931-2024)의 LP 두 장이었다는 이야기도 그가 직접 했다. 1962년에는 코미디 영화 「셰키가 찍는다, 조심해」(Šeki snima, pazi se)의 주연을 맡았다.

나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It wasn't easy to deal with me.

-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라츠, 조너선 윌슨과의 인터뷰. 『더 블리자드』

카를스루에에서 보고타까지

1966년 등 부상을 겪은 스물여덟의 셰쿨라라츠는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떠났다. 375경기 119골, 리그 우승 다섯 번과 유고슬라비아컵 세 번이 그가 남긴 기록이었다. 마지막 A매치도 그해 6월 1일 베오그라드의 불가리아전이었다. 10년 동안 41경기 6골이었다.

첫 행선지는 서독 분데스리가의 카를스루에 SC(Karlsruher Sport-Club)였고, 1967년에는 미국의 세인트루이스 스타스(St. Louis Stars)로 건너갔다. 베오그라드로 돌아와 OFK 베오그라드에서 한 시즌을 뛴 그는 1969년 콜롬비아로 떠났다. 보고타의 인데펜디엔테 산타페(Independiente Santa Fe)는 1971년 콜롬비아 리그 정상에 섰고, 올림피디아는 그 우승을 그의 경력으로 적는다. 이어 아틀레티코 부카라망가, 미요나리오스 FC, 아메리카 데 칼리에서 뛰었고, 1975년에는 파리 FC, 캐나다 토론토의 세르비안 화이트 이글스(Serbian White Eagles FC; 토론토의 세르비아계 축구단)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

콜롬비아는 그가 가장 사랑한 나라였다. 1968년부터 1972년까지를 그는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이라 불렀고, 콜롬비아 사람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그의 생일에 전화를 걸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산타페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가운데 하나를 잃었다고 했고, 아메리카 데 칼리는 그 기술 때문에 하얀 펠레라 불렸던 사람이라고 추모했다. 펠레가 그를 두고 브라질에서 태어났느냐고 물었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직접 확인되는 기록은 없다.

1990년 더블, 1996년 부산

감독이 된 셰쿨라라츠는 과테말라 대표팀과 호주의 풋스크레이 JUST를 거쳐 1989년 친정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지휘봉을 잡았다. 1989-90 시즌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디나모 자그레브를 승점 9점 차로 따돌리고 리그와 컵을 함께 들었다. 그해 UEFA컵 쾰른 원정에서 퇴장당한 그는 UEFA로부터 여덟 경기 징계를 받았고, 유러피언컵 벤치에 앉을 수 없게 되자 물러났다. 그가 남긴 선수들은 후임 류프코 페트로비치(Ljupko Petrović; 츠르베나 즈베즈다 감독, 1947-) 아래에서 1991년 유러피언컵을 들었다. 그 뒤 그는 멕시코의 클럽 아메리카, 사우디아라비아의 알나스르, 스페인의 마르베야를 맡았다.

1995년 10월 그는 부산 대우 로얄즈(현 부산 아이파크)의 기술 고문으로 한국에 왔고, 1996년 1월 감독에 선임됐다. 그해 부산의 외국인 선수 넷은 모두 유고슬라비아 출신이었다. 부산은 1996 K리그 전기 리그에서 9개 팀 가운데 7위에 머물렀고, 셰쿨라라츠는 그해 여름 팀을 떠났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은 반년 남짓이었다. 그 뒤 그는 세르비아로 돌아가 나프레다크 크루셰바츠와 오빌리치에서 일했고, 2005-06년에는 다시 토론토의 세르비안 화이트 이글스를 맡았다.

경기장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선 노년의 셰쿨라라츠 컬러 사진
2006년 8월 7일 토론토, 세르비안 화이트 이글스 감독 시절의 셰쿨라라츠. 사진: Djuradj Vujcic, CC BY 2.0.
벤치 앞에 나란히 선 셰쿨라라츠와 스테반 모이실로비치의 컬러 사진
2006년 6월 23일 토론토에서 스테반 모이실로비치와 함께한 셰쿨라라츠. 사진: Prvoslav Vujčić, CC BY 2.0.

2019년 1월 5일 베오그라드

셰쿨라라츠는 2019년 1월 5일 베오그라드에서 여든하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그를 구단의 두 번째 별, 축구화를 신은 거장이자 비르투오소라고 불렀다. 1월 10일 라이코 미티치 경기장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사람들은 묵념 대신 박수를 쳤다. 그가 감독으로 이끌었던 선수들을 대표해 보슈코 주로브스키(Boško Gjurovski; 츠르베나 즈베즈다와 유고슬라비아의 미드필더, 1961-)가 고인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처럼 드리블하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축구에서 드리블은 전부입니다.

Niko nije bio dribler kao ti, a dribling je u fudbalu sve.

- 보슈코 주로브스키, 2019년 1월 10일 셰쿨라라츠 추도식. 『다나스』

그날 그는 베오그라드 노보 그로블레(Novo groblje; 베오그라드 신묘지)의 공훈 시민 묘역(Aleja zaslužnih građana)에 묻혔다. 2024년 12월 7일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라이코 미티치 경기장 서쪽에 조각가 토마 코마티나(Toma Komatina)가 만든 그의 동상을 세웠다.

묘비와 꽃이 놓인 베오그라드 신묘지 공훈 시민 묘역의 묘소 컬러 사진
베오그라드 노보 그로블레 공훈 시민 묘역. 체스 선수 밀룬카 라자레비치, 축구 감독 일리야 페트코비치의 묘와 나란히 셰쿨라라츠가 잠들어 있다. 사진: Pidge Copetti, CC BY-SA 4.0.

역대 클럽·국대 기록

ФК 글자와 붉은 별이 든 1950-1992년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문장FK 츠르베나 즈베즈다1955-1966375경기 · 119골
파란 원 안에 KSC 글자가 든 1960-1998년 카를스루에 SC 문장카를스루에 SC1966-196717경기 · 2골
별로 두른 원 안에 St. Louis STARS 글자가 든 세인트루이스 스타스 문장세인트루이스 스타스19678경기 · 1골
파란 세로 줄무늬 방패에 키릴 문자 ОФК БЕОГРАД와 성탑이 든 OFK 베오그라드 문장OFK 베오그라드1967-196838경기 · 5골
SANTA FE 글자와 붉은 원이 든 흰 방패의 1963년 인데펜디엔테 산타페 문장인데펜디엔테 산타페1969-197142경기 · 3골
A.B. 글자와 표범이 든 1948-1990년 아틀레티코 부카라망가 문장아틀레티코 부카라망가19724경기 · 1골
파란 방패에 겹친 두 원과 M 글자가 든 1956-1978년 미요나리오스 FC 문장미요나리오스 FC197323경기 · 1골
AMERICA 글자와 붉은 악마가 든 1970년대 아메리카 데 칼리 문장아메리카 데 칼리19747경기 · 0골
파란 원 안에 PARIS FOOTBALL CLUB 글자가 든 1972-1990년 파리 FC 문장파리 FC19759경기 · 2골
하늘색 방패에 쌍두 독수리가 든 세르비안 화이트 이글스 문장세르비안 화이트 이글스1975-1976선수 겸 감독 · 기록 미확인
다섯 횃불과 붉은 별, 밀 이삭이 든 1943-1963년 유고슬라비아 국가 문장유고슬라비아 대표팀1956-196641경기 · 6골

츠르베나 즈베즈다 기록은 UEFA 부고와 세르비아 대표팀 기록 사이트(reprezentacija.rs) 기준이며, 구단 공식 사이트는 369경기 115골, 비공식 경기를 더한 자료는 470경기로 적는다. 카를스루에 SC는 분데스리가 기록, 세인트루이스 스타스는 1967년 NPSL(National Professional Soccer League) 기록, 미요나리오스 FC는 national-football-teams 기록이다. OFK 베오그라드, 콜롬비아의 다른 세 구단, 파리 FC는 운영자 원고의 숫자이며 1차 자료로 확인하지 못했다. 콜롬비아 구단의 순서와 연도도 자료마다 다르다. 세르비안 화이트 이글스에서는 선수 겸 감독으로 뛰었으나 출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대표팀은 reprezentacija.rs의 A매치 41경기 전체 목록 기준이다. 문장은 셰쿨라라츠가 뛰던 시기의 것이다. 1967년 세인트루이스 스타스는 그해 판이 남아 있지 않아 가장 가까운 1968년 판을, OFK 베오그라드와 세르비안 화이트 이글스는 연도가 확인되는 판이 없어 키릴 문자 판과 현행 판을 실었다.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은 당시 대표팀 셔츠에 달린 국가 문장이다.

역대 등번호

클럽

소속팀확인 기간등번호
FK 츠르베나 즈베즈다1955-1966자료 미등록
카를스루에 SC1966-1967자료 미등록
세인트루이스 스타스1967자료 미등록
OFK 베오그라드1967-1968자료 미등록
인데펜디엔테 산타페1969-1971자료 미등록
아틀레티코 부카라망가1972자료 미등록
미요나리오스 FC1973자료 미등록
아메리카 데 칼리1974자료 미등록
파리 FC1975자료 미등록
세르비안 화이트 이글스1975-1976자료 미등록

국가대표팀

대표팀확인 대회등번호
유고슬라비아1958 FIFA 월드컵15
유고슬라비아1962 FIFA 월드컵8

1950-60년대 유고슬라비아 구단은 고정 등번호 없이 그날 맡은 자리에 따라 1번부터 11번을 달았고, 시즌별 번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사진과 영상 속 그는 대개 10번이나 8번이었다. 국가대표 번호는 각 월드컵 선수 명단 기준이다. 1956년 올림픽과 UEFA 유로 1960은 경기마다 번호를 달아 대회 번호가 없다.

대표 우승 경력

FIFA 월드컵FIFA World Cup

4위: 1962년

8강: 1958년

UEFA 유로UEFA European Football Championship · 당시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준우승: 1960년

올림픽 축구Olympic Football Tournament

은메달: 1956년 멜버른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Prva savezna liga Jugoslavije

우승: 1955-56, 1956-57, 1958-59, 1959-60, 1963-64

유고슬라비아컵Kup Maršala Tita

우승: 1958, 1959, 1964

다뉴브컵Donau-Cup · 미트로파컵 휴지기의 단일 대회

우승: 1958

인터시티스 페어스컵Inter-Cities Fairs Cup

4강: 1961-62

콜롬비아 카테고리아 프리메라 ACategoría Primera A

우승: 1971(인데펜디엔테 산타페)

감독FK 츠르베나 즈베즈다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우승: 1989-90

유고슬라비아컵 우승: 1990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라츠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 발롱도르1960년 공동 19위 · 1961년 공동 10위 · 1962년 4위
  • UEFA 유로 1960 대회 베스트 11UEFA 선정1960년

오늘날 셰쿨라라츠는 어떻게 평가받는가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구단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에게 즈베즈디나 즈베즈다(Zvezdina zvezda; 즈베즈다의 별)라는 칭호를 준다. 지금까지 다섯 명뿐이다. 첫 번째가 라이코 미티치, 두 번째가 셰쿨라라츠이고, 드라간 자이치(Dragan Džajić; 츠르베나 즈베즈다와 유고슬라비아의 왼쪽 윙어, 1946-),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드라간 스토이코비치가 뒤를 잇는다. UEFA는 그의 부고에 그를 우러러보며 자란 후배들의 말을 실었다.

그는 우리에게 세계의 경이였다. 어린 시절 나는 그를 동경했다.

He was a world wonder for us and as a kid I admired him.

- 두샨 사비치(츠르베나 즈베즈다와 유고슬라비아의 공격수), 2019년 1월 UEFA 부고

발롱도르 4위, 첫 UEFA 유로의 결승과 베스트 11, 월드컵 4강, 다섯 번의 리그 우승. 기록만 놓고 봐도 셰쿨라라츠는 1960년대 초 유럽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가운데 하나였다. 그 기록에 다 담기지 않는 것이 드리블이다. 그는 공을 몰고 가는 일 자체로 사람들을 경기장에 불러 모은 선수였다. 국가가 그의 해외 이적을 막은 이유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라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그 매력의 크기를 말해 준다. 서유럽의 큰 무대에서 전성기를 보내지 못했기에 그의 이름은 서유럽 중심의 역대 순위에서 자주 빠진다. 필자는 그 빈자리를 그의 위대함을 깎는 근거로 보지 않는다.

동유럽 축구의 역대 베스트 11을 꾸린다면, 삥이FC의 그 명단에는 반드시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라츠가 들어간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