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 LEGEND
호나우두 나자리우(Ronaldo Nazário)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경이로운 자, 센터 포워드의 완성형
9번의 대명사가 9번을 달지 못한 세 팀. 세계 최고 이적료를 두 번 경신하고 스물하나에 발롱도르를 받은 크루제이루·PSV·바르셀로나·인테르·레알 마드리드를 거친 호나우두 나자리우의 스탯과 등번호, 우승과 개인 수상 전량을 당대 기록으로 정리한다.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남미축구연맹Confederación Sudamericana de Fútbol (스페인어)Confederação Sul-Americana de Futebol (포르투갈어)
축구사에서 센터 포워드 한 자리만 떼어 놓고 최고를 고르라 하면 필자는 호나우두 나자리우를 첫 줄에 둔다. 스물세 살이 되기 전에 클럽과 대표팀에서 200골을 넘겼고, 세계 최고 이적료를 두 번 갈아치웠으며, 스물에 FIFA 올해의 선수를, 스물하나에 발롱도르를 받았다. 두 기록 모두 아직 그보다 어린 수상자가 없다. 그리고 그 절정의 한복판에서 무릎이 두 번 무너졌다. 이 선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달한 높이와 빼앗긴 높이를 동시에 재는 일이다.
단 1년만 활약했지만 전 세계에 충격을 불어넣은 바르셀로나 시절.
- 단 1년만 활약했지만 전 세계에 충격을 불어넣은 바르셀로나 시절.
- 세리에 A에서 인테르 소속으로 폼이 절정이었던 호나우두.
- 전 세계 팬들 가슴 터지게 만들었던 호나우두와 바조의 콤비 플레이.
- 호나우두를 막으려면 수비 두세 명이 몸을 던져야 했다. 그것이 그를 막는 전술이었다.
- 푸욜이 따라잡지도 못하는 장면.
삥이FC 호나우두 나자리우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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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센터 포워드 계보의 첫 줄에 호나우두를 둔다. 같은 자리에서 압도적이라 평가받는 이름은 여럿이다. 네덜란드의 마르코 판바스턴(Marcus Johannes Margaritha van Basten; 아약스와 AC 밀란의 공격수, 1964-), 독일의 게르트 뮐러(Gerhard Müller; 바이언과 서독 대표팀의 공격수, 1945-2021), 헝가리의 코치시 샨도르(Kocsis Sándor; 1950년대 헝가리 황금의 팀 공격수, 1929-1979), 스웨덴의 군나르 노르달(Nils Gunnar Nordahl; AC 밀란의 공격수, 1921-1995), 그리고 대표팀 선배 호마리우(Romário de Souza Faria; 브라질의 공격수, 1994년 월드컵 최우수 선수, 1966-)가 그 줄에 선다. 그럼에도 호나우두를 앞에 두는 이유는 단순하다. 저 이름들이 각자 하나씩 가진 무기를 그는 한 몸에 다 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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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속도는 호나우두가 가진 것 가운데 가장 설명하기 쉬운 항목일 뿐이다. 100미터를 달리는 속도와 공을 달고 달리는 속도가 거의 같았고, 상체 힘은 센터백과 몸을 맞대고도 밀리지 않을 만큼이었으며, 발밑에서는 엘라스티코(elástico; 공을 바깥으로 밀었다가 같은 발 안쪽으로 되감아 상대의 무게중심을 뒤집는 기술)가 나왔다. 《가디언》(The Guardian; 1821년 창간한 영국 일간지)의 롭 스미스는 그를 두고 최초의 플레이스테이션 축구선수라 적었는데, 비디오 게임에서나 가능해 보이는 동작을 실제 잔디 위에서 했다는 뜻이다. 스무 살의 그를 두 시즌 상대한 파올로 말디니(Paolo Cesare Maldini; AC 밀란의 수비수, 1968-)는 자신이 상대한 최고의 선수로 디에고 마라도나와 호나우두 둘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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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 골키퍼를 제치고 빈 골문에 밀어 넣는 마무리다. 바르셀로나에서 넣은 47골 중 상당수가 이 형태였다. 수비를 지나가는 것까지는 다른 선수도 한다. 마지막에 골키퍼까지 사람으로 취급하고 지나가는 선수는 드물다. 위 영상에서 카를레스 푸욜(Carles Puyol i Saforcada; FC 바르셀로나의 수비수, 1978-)이 따라붙다 포기하는 장면과, 수비 두세 명이 동시에 몸을 던지는 장면이 같은 이야기를 한다. 상대는 그를 개인으로 막을 수 없어서 집단으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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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 선수를 찬양만으로 정리하면 곤란하다. 1999년 11월 레체전에서 무릎 힘줄이 끊어졌고, 이듬해 4월 복귀전에서는 6분 만에 슬개건이 완전히 파열됐다. 물리치료사 닐통 페트로니는 무릎뼈가 터져 나왔다고 표현하며 자신이 본 최악의 축구 부상이라 했다. 스물세 살에 200골을 넘긴 선수가 이후 3년 가까이 경기장에서 사라졌다. 2002년 이후의 호나우두는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1996년부터 1999년까지의 그와는 다른 선수였다. 이 편의 절반은 그 3년에 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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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숫자다. 대표팀 98경기 62골은 브라질 역대 3위이며, 2006년에 세운 월드컵 통산 15골은 게르트 뮐러가 30년 넘게 지키던 14골을 넘어선 당시 대회 최다였다. 네덜란드와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각각 리그 득점왕을 했고, 발롱도르 유효표를 일곱 해에 걸쳐 받았으며, FIFA 올해의 선수를 세 번 가져갔다. 인테르와 레알 마드리드,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명예의 전당에 모두 헌액된 선수이기도 하다. 한 시대를 지배한 공격수는 여럿이지만, 무릎이 두 번 무너지고도 월드컵 득점왕으로 돌아온 공격수는 그 하나다.
호나우두 나자리우 프로필
브라질 연방 공화국República Federativa do Brasil
- 본명
- Ronaldo Luís Nazário de Lima
- 등록명
- 호나우두
- 출생
- 1976년 9월 18일
- 출생지
- 브라질 히우지자네이루주 이타과이
- 신장
- 183cm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주요 등번호
- 9번 · 10번 · 11번 · 99번
- 별명
- 경이로운 자(O Fenômeno; 이탈리아에서는 Il Fenomeno)
- 대표팀
- 1994-2011년 · 98경기 62골
- 대표 국적
- 브라질
버스비가 없어 플라멩구에서 돌아선 아이
호나우두는 히우지자네이루(Rio de Janeiro; 브라질 남동부의 주이자 그 주도) 외곽 이타과이에서 태어나 벤투 히베이루의 길거리에서 공을 찼다. 그의 첫 종목은 풋살이었다. 열두 살에 들어간 소시아우 하무스에서 첫 시즌에만 166골을 넣었고, 한 경기에서 팀이 넣은 12골 중 11골을 혼자 넣은 적도 있다. 훗날 그는 풋살이 언제나 자신의 첫사랑이라고 말했다. 좁은 코트에서 공을 한 번 더 건드리지 않고 처리하는 습관, 몸을 낮춘 채 방향을 바꾸는 감각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어릴 때 그가 응원하던 팀은 플라멩구였다. 입단 테스트를 받을 기회도 왔다. 그런데 연습장까지 한 시간 걸리는 버스 요금을 낼 형편이 안 돼 훈련에 빠졌고, 그대로 탈락했다. 대신 그를 알아본 사람이 자이르지뉴(Jair Ventura Filho; 1970년 월드컵 우승 멤버, 1944-)였다. 1970년 월드컵 전 경기 득점 기록을 가진 그 선수가 당시 상 크리스토방을 지도하고 있었고, 열다섯 살에 이미 17세 이하와 20세 이하 팀을 오가던 호나우두를 자신의 친정 크루제이루 EC에 추천했다.
당시 그의 대리인들은 보타포구와 상파울루 FC의 제안을 거절한 상태였다. 크루제이루가 제시한 금액은 5만 유로 상당이었고, 그는 유스 팀 데뷔전에서 4골을 넣었다. 열세 살 때부터 그를 관리해 온 대리인 헤이나우두 피타는 처음부터 다른 선수들과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1993년 11월 7일 바이아전, 열일곱 살이 넣은 5골
1993년 5월 25일 칼덴시전,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무대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크루제이루에 도착한 지 석 달 만이었고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그해 여름 포르투갈 순회 경기에서 벨레넨스스를 상대로 첫 프로 골을 넣으며 새 감독 카를루스 알베르투 시우바의 눈에 들어 주전이 됐다. 같은 순회에서 포르투를 상대한 경기가 인상적이어서 포르투가 50만 달러를 제시했지만, 구단 회장 세자르 마시가 거절했다.
순회에서 돌아온 뒤의 기록이 비정상적이다. 그해가 끝날 때까지 21경기 20골. 10월 5일에는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리스(Supercopa Libertadores; 코파 리베르타도리스 역대 우승팀만 참가하던 남미 대회, 1988-1997) 홈 1차전에서 칠레의 콜로콜로를 상대로 프로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6-1 승리를 이끌었고, 2차전에서 2골, 우루과이의 나시오날을 상대로 3골을 더 넣어 8골로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이 대회 역사상 최연소 득점왕이다. 11월 7일에는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 바이아전에서 혼자 5골을 넣어 6-0 승리를 만들었다. 남미 리그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역대 두 번째 최연소 선수였고, 그 앞에 있는 이름은 펠레 하나뿐이었다.
크루제이루에서의 2년은 47경기 44골로 끝났다. 그사이 구단은 창단 첫 코파 두 브라질을 들었고 이듬해 주 선수권도 가져갔다.
피테서전 10분과 레버쿠젠전 해트트릭, 그리고 첫 무릎
1994년 월드컵이 끝나고 그는 네덜란드로 갔다. PSV를 권한 사람은 대표팀 선배 호마리우였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그 팀에서 뛴 선배의 조언이었다.

1994년 8월 28일 피테서전, 데뷔 10분 만에 골이 나왔다. 홈 데뷔전이던 호 아헤드 이글스전에서는 2골이었다. 첫 시즌 리그에서만 30골을 넣어 1995년 에레디비시 득점왕이 됐다. 그 30골에는 2골씩 넣은 경기가 일곱 번, 위트레흐트전 해트트릭이 들어 있다.
1994-95 UEFA컵 바이어 레버쿠젠전에서도 해트트릭이 나왔다. 상대 공격수이자 1990년 월드컵 우승 멤버인 루디 푈러(Rudolf Völler; 서독의 공격수, 1960-)는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열여덟 살짜리가 이렇게 뛰는 것을 평생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훗날 그를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루이스 엔리케(Luis Enrique Martínez García; 스페인의 미드필더이자 감독, 1970-)는 이 시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텔레비전으로 PSV의 그를 보고 감탄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자신이 본 가장 압도적인 선수였고, 지금은 리오넬 메시가 여섯 명을 제치는 장면에 익숙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그런 걸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시즌에 무릎이 처음 그를 붙잡았다. 시즌 대부분을 결장하고도 21경기 19골을 넣었으니 경기당 기록은 오히려 올라갔고, UEFA컵 핀란드 뮈파전에서는 혼자 4골을 넣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무릎은 그의 커리어에 상주하는 변수가 됐다. PSV에서의 2년은 58경기 54골, 그리고 1995-96 KNVB 베이커 우승으로 남았다. 그는 짧게 호흡을 맞춘 뤼크 닐리스(Luc Nilis; 벨기에의 공격수, 1967-)를 지금도 자신이 함께 뛴 최고의 공격 파트너 중 하나로 꼽는다.
1996년 10월 11일 콤포스텔라, 롭슨이 머리를 감싼 골

1996년 7월 17일,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인 1,950만 달러에 FC 바르셀로나로 갔다. 감독 보비 롭슨(Sir Robert William Robson; 잉글랜드의 감독, 1933-2009)은 8년 계약이었고 그를 최전방에 혼자 세울 생각이었다고 밝혔다.
그 한 시즌의 기록이 49경기 47골이다. 라리가에서만 37경기 34골로 득점왕 피치치와 유러피언 골든슈를 함께 가져갔다. 2008-09 시즌 이전까지, 라리가에서 한 시즌 30골 이상을 넣은 마지막 선수가 그였다. 골을 넣은 뒤의 세리머니는 대체로 같았다. 고향 히우지자네이루를 내려다보는 구세주 그리스도상처럼 두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이 시즌을 대표하는 장면은 1996년 10월 11일 콤포스텔라 원정에서 나왔다. 자기 진영에서 공을 받아 첫 수비수의 거친 태클을 드래그백으로 피하고, 두 번째 수비수를 속도로 떼어 낸 뒤, 페널티 박스 안에서 두 명을 더 지나 골문 구석에 밀어 넣었다. 중계 카메라가 벤치를 비췄을 때 롭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이 골은 이후 48시간 동안 스페인 주요 방송에서 160회 재생됐고, 나이키 광고에 신이 당신의 부탁을 들어줬다면 어떤 선수가 나오겠느냐는 내레이션과 함께 쓰였다.
발렌시아전 해트트릭에서는 수비수 둘 사이를 갈라 들어가 마무리했고, 관중석에서 흰 손수건이 나왔다. 스페인에서 흰 손수건은 원래 야유의 표시지만, 이날은 상대와 자기 팀을 가리지 않고 경의를 표하는 쪽으로 쓰였다. 시즌 막판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에서는 파리 생제르맹을 상대로 페널티킥 결승골을 넣어 1-0 우승을 확정했다. 그해 말, 스무 살의 그는 FIFA 올해의 선수 역대 최연소 수상자가 됐다.
당시 바르셀로나에서 통역으로 일하던 주제 모리뉴(José Mário dos Santos Mourinho Félix; 포르투갈의 감독, 1963-)는 훗날 자신이 평생 본 최고의 선수라고 말했다. 롭슨은 스무 살에 이만큼 가진 선수를 본 적이 없다고 했고, 《월드사커》(World Soccer; 1960년 창간한 영국 축구 월간지)는 그해 표지에 역대 최고냐고 물었다. 같은 시즌 동료였던 오스카르 가르시아는 그때의 그를 섬유와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완벽한 신체였다고 표현하며, 그런 힘이 기술과 맞물리니 막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시즌 중반 구단은 2006년까지 계약을 연장하고 연봉을 두 배로 올리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스무 살 선수에게 클럽이 10년을 걸겠다고 한 셈이다. 그 합의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다음 절의 이야기다.
하루 만에 뒤집힌 재계약, 두 번째 세계 기록
재계약은 하루 만에 무너졌다. 구단 회장 주제프 류이스 누녜스(Josep Lluís Núñez i Clemente; FC 바르셀로나 회장, 1931-2018)는 그가 평생 우리 선수라고 공언했다가, 이튿날 다시 마주 앉은 자리에서 다 끝났다고 인정했다. 훗날 호나우두는 시즌이 끝나기 한 달 전에 연장에 합의했는데 일주일 뒤 구단 변호사와 회장이 그 계약은 말이 안 된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바이아웃 조항을 지불한 쪽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였고, 금액은 2,700만 달러로 다시 세계 기록이었다. 마라도나 이후 세계 이적료 기록을 두 번 경신한 첫 선수가 이때 나왔다. 5년 계약이었고, 입단 발표는 훈련장에 모인 4,000명 앞에서 이루어졌다.

세리에 A는 당대에 가장 점수를 내기 어려운 리그였다. 수비 전술이 가장 앞서 있었고 세계 최고의 수비수들이 모여 있었다. 그 리그에서 첫 시즌에 25골을 넣고 세리에 A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 이탈리아 언론이 그를 일 페노메노라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시즌 도중 FIFA 올해의 선수를 두 번째로 받았고, 스물한 살에 발롱도르를 가져갔다. 이 역시 아직 깨지지 않은 최연소 기록이다.
이탈리아에서 그의 플레이는 한 단계 더 나아갔다. 골만 넣던 선수가 도움을 쌓기 시작했고, 팀의 1순위 페널티킥 키커가 됐으며, 프리킥까지 직접 차서 넣었다. 완성형 공격수로 바뀌는 과정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같은 리그의 피오렌티나에는 가브리엘 바티스투타(Gabriel Omar Batistuta; 아르헨티나의 공격수, 1969-)가 있었고, 두 사람의 맞대결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기다려지는 경기였다. AC 밀란과의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에서도 여러 차례 골을 넣었다. 1998-99 시즌이 끝날 무렵 그는 인테르의 주장이 됐다.
이 시즌의 상징은 1998년 UEFA컵 결승 라치오전 골이다. 수비 사이를 뚫고 골키퍼 루카 마르케자니와 1대1로 마주한 뒤, 공을 건드리지도 않은 채 오른쪽으로 갈 듯 페인트를 넣고 왼쪽으로 몸을 틀어 골키퍼를 주저앉히고, 다시 오른쪽으로 밀어 넣었다. 동료 유리 조르카에프(Youri Raffi Djorkaeff; 프랑스의 공격형 미드필더, 1968-)는 그가 그 시즌 다른 선수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음을 증명했다고 말했다. 인테르 동료들은 그가 골을 넣으면 무릎을 꿇고 구두를 닦는 시늉으로 축하했다.

이 무렵 인테르의 공격진에는 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 이탈리아의 공격형 미드필더, 1993년 발롱도르 수상자, 1967-)와 크리스티안 비에리(Christian Vieri; 이탈리아의 공격수, 1973-)가 함께 있었다. 호나우두와 바조의 조합은 게르만 삼총사 시절만큼은 아니라는 평을 들었지만, 바조의 센스와 호나우두의 속도가 맞물린 몇 경기에서는 상대 수비 전체가 계산을 포기하는 장면이 나왔다. 위 영상의 세 번째 편이 그 조합이다.
레체의 무릎, 6분 만에 끝난 복귀전
1999-2000 시즌의 인테르는 호나우두와 바조와 비에리를 한 팀에 둔 채 출발했다. 그 구상은 11월 21일 레체 원정에서 끝났다. 공을 잡으러 가던 그의 무릎이 꺾였고, 그는 절뚝이며 걸어 나갔다. 검진 결과는 무릎 힘줄 파열, 수술이 필요했다.
첫 복귀전은 이듬해 4월 12일 코파 이탈리아 결승 1차전 라치오전이었다. 6분을 뛰었다. 그리고 슬개건이 완전히 파열됐다. 물리치료사 닐통 페트로니는 무릎뼈가 사실상 터져 나왔다고 말하며 자신이 본 최악의 축구 부상이라 했다. 그는 2000-01 시즌 전체와 그 앞뒤 두 시즌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부상 직전까지 그의 세리에 A 기록은 58경기 42골이었다.
그가 빠져 있는 동안 주장 완장은 하비에르 사네티(Javier Adelmar Zanetti; 아르헨티나의 수비수, 인테르 최다 출전 기록 보유자, 1973-)에게 넘어갔고, 2001년 말에 다시 돌려받았다.
인테르에서의 5년은 99경기 59골로 정리된다. 부상 이전 두 시즌이 그 대부분이다. 2018년 인테르가 명예의 전당을 만들면서 초대 헌액자 네 명 중 하나로 그를 넣은 이유도 그 두 시즌에 있다. 파올로 말디니가 그를 두고 인테르에서의 첫 두 해는 하나의 현상이었다고 말한 것도, 조르카에프가 훈련 중에 동료들이 사실상 하던 것을 멈추고 그를 구경했다고 말한 것도 같은 시기의 증언이다.
올드 트래퍼드의 기립박수, 갈락티코스의 11번

2002년 월드컵을 마친 뒤 4,600만 유로에 레알 마드리드 CF로 갔다. 유니폼 판매는 첫날부터 구단 기록을 갈아치웠다.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호베르투 카를루스, 데이비드 베컴이 차례로 모이던 갈락티코스 1기의 한복판이었다.
부상으로 10월까지 결장하면서 기대만 더 커졌다. 알라베스전 데뷔전에서 교체 투입 61초 만에 골을 넣었고 그날 2골을 기록했다. 시즌 마지막 아틀레틱 클루브전에서도 득점해 리그 23골로 2002-03 라리가 우승을 확정했다. 같은 시기 인터콘티넨털컵과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도 가져갔고, 두 결승에서 모두 득점했다.
2003년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 올드 트래퍼드 원정은 따로 적어야 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세 번째 골은 30야드 밖에서 휘어 들어갔다. 67분에 교체돼 나갈 때 양 팀 관중이 모두 일어났다. 상대 수비수 웨스 브라운(Wesley Michael Brown; 잉글랜드의 수비수, 1979-)은 그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고 했고, 부상 전의 호나우두였다면 더 위험했을 것이라면서도 그가 어떤 무대에서든 원할 때 경기를 지배할 수 있는 선수임을 보여 준 장면이라고 말했다.
이듬해에도 기록은 이어졌다. 2003년 12월 3일 베르나베우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상대로 15초 만에 골을 넣어 구단 역사상 가장 빠른 골 중 하나를 만들었고, 사흘 뒤 캄 노우에서는 20년 만의 리그 원정 승리를 만드는 두 번째 골을 넣었다. 그해 25골로 두 번째 피치치를 받았다.
마지막 두 시즌은 부상과 체중 문제로 결장이 잦았다. 감독 파비오 카펠로(Fabio Capello; 이탈리아의 감독, 1946-)는 2017년에 자신이 지도한 선수 중 다루기 가장 어려웠던 선수가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며 그의 이름을 댔다. 레알에서의 4년 반 동안 그는 100골을 넘겼고, 이는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페렌츠 푸스카시, 우고 산체스, 이반 사모라노에 이어 구단 역사상 다섯 번째로 그 고지에 오른 외국인 기록이었다.
함께 뛴 동료들의 평가는 한결같다. 지단은 자신이 함께 뛰거나 상대한 선수 중 최고가 호나우두라고 말하며, 공을 다루는 편안함이 남달라 매일 훈련에서 새로운 것을 봤다고 했다. 2004년에 합류한 마이클 오언(Michael James Owen; 잉글랜드의 공격수, 2001년 발롱도르 수상자, 1979-)은 전성기의 그와 뛰어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훈련에서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고 말했다. 여섯 달을 함께한 뤼트 판니스텔로이(Rutgerus Johannes Martinus van Nistelrooy; 네덜란드의 공격수, 1976-)는 자신이 함께 뛴 가장 타고난 재능이라고 했다. 스페인 일간지 《마르카》는 그를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베스트 11에 넣었다.
밀란의 99번, 코린치앙스에서 접은 무릎

2007년 그는 밀라노로 돌아왔다. 다만 유니폼이 바뀌었다. 인테르에서 5년을 뛴 선수가 도시 반대편 AC 밀란으로 간 것이다. 등번호는 99번이었다. 안드레아 피를로(Andrea Pirlo; 이탈리아의 미드필더, 1979-), 카카와 호흡을 맞추며 20경기 9골을 넣었지만, 이번에도 무릎이 먼저 멈췄다.
2009년에는 브라질로 돌아가 SC 코린치앙스에 들어갔다. 열여섯에 떠난 나라로 서른셋에 돌아온 셈이다. 69경기 35골을 기록하며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와 코파 두 브라질을 들었고, 2011년 2월에 은퇴를 발표했다. 그때 그의 무릎은 이미 한계를 여러 번 넘긴 뒤였다.
이야기의 끝은 이 글의 첫 절과 이어진다. 버스 요금이 없어 플라멩구 훈련에 가지 못했던 아이는 은퇴 뒤 구단을 사는 사람이 됐다. 2018년 9월에 스페인의 레알 바야돌리드 지분 51퍼센트를 인수해 구단주가 됐고, 2021년 12월에는 자신을 프로로 만들어 준 크루제이루의 경영권을 사들여 7,000만 달러를 넣었다. 그 지분은 2024년 4월에 정리했다.
셀레상의 막내, 등번호 20번의 열일곱 살
호나우두의 백미는 대표팀이다. 브라질에는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Arthur Friedenreich; 브라질 초기의 공격수, 1892-1969)에서 시작해 레오니다스 다시우바, 지지뉴, 펠레, 가린샤, 지쿠, 호마리우로 이어지는 계보가 있다. 그는 그 줄의 다음 자리에 섰고, 조국에 다섯 개의 메이저 대회 트로피를 안겼다.
시작은 벤치였다. 1994년 월드컵 우승 스쿼드의 막내가 그였다. 당시 나이 열일곱, 소속은 크루제이루, A매치 출전은 3경기, 등번호는 20번이었다. 대회에서 한 경기도 뛰지 않았다.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그의 월드컵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2년 뒤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이름 문제가 생겼다. 대표팀에 두 살 위 수비수 호나우두 기아루가 있어서, 그는 유소년 시절에 쓰던 호나우지뉴라는 이름을 다시 꺼내 써야 했다. 훗날 그 이름을 물려받게 될 후배가 아직 대표팀에 오기 전이다. 브라질은 이 대회에서 동메달을 땄다.
호마리우와 호나우두, 호-호 공격
많은 이들이 호마리우와 호나우두가 오래 함께 뛰었으면 어땠을까 궁금해한다. 실제로 그 조합이 작동한 해가 1997년이다. 브라질 언론은 두 사람의 앞 글자를 따 호-호(Ro-Ro; 호나우두와 호마리우의 공격 조합을 부르던 말)라 불렀다.

그해 코파 아메리카에서 둘은 합쳐 8골을 만들며 우승을 이끌었다. 대회 최우수 선수는 호나우두였고, 그는 볼리비아와의 결승에서도 득점했다. 같은 해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는 브라질이 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는데, 호나우두는 4골로 득점 3위에 올랐고 호주와의 결승에서 혼자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그 사이에 열린 친선 대회 투르누아 드 프랑스에서도 득점했고 브라질은 준우승했다.
두 사람의 조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짧았던 만큼 기록은 선명하다. 199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호나우두는 득점왕이 됐고 우루과이와의 결승에서 다시 골을 넣었다. 1995년 대회 준우승까지 포함하면, 그는 코파 아메리카 세 대회에서 우승 둘과 준우승 하나를 남겼고 두 번의 결승에서 모두 득점했다.
결승 킥오프 여섯 시간 전에 일어난 일
1998년 월드컵에 들어설 때 그는 세계 최고의 선수로 불리고 있었다. 스물한 살이었다.
결승까지 가는 길에서 그는 4골과 3도움을 기록했다. 조별리그 모로코전 3-0 승리에서 한 골을 넣고 베베투의 골을 도왔고, 16강 칠레전 4-1 승리에서 2골을 넣었으며, 8강 덴마크전 3-2 승리에서는 두 골을 도왔다. 4강 네덜란드전 1-1 무승부에서 골을 넣었고, 이어진 승부차기에서 브라질의 첫 키커로 나서 성공시켰다.
그리고 프랑스와의 결승 킥오프 여섯 시간 전, 그는 경련성 발작을 일으켰다. 킥오프 72분 전에 그는 선발 명단에서 빠졌고, 에드문두를 대신 넣은 명단이 FIFA 대표에게 제출됐다. 호나우두가 빠진 선발 명단이 전 세계에 나갔다. BBC의 존 못슨은 중계석이 완전히 아수라장이 됐다고 말했다. 그런데 킥오프 직전, 괜찮다며 뛰게 해 달라고 호소한 그를 감독 마리우 자갈루(Mário Jorge Lobo Zagallo; 브라질의 선수이자 감독, 1931-2024)가 다시 명단에 넣었다.
경기장에 들어설 때 그는 브라질 선수 중 마지막으로 터널을 나왔다.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계속 비췄고, 그는 거의 표정이 없었다. 경기 중에는 프랑스 골키퍼 파비앵 바르테즈와 충돌해 부상까지 입었다. 자갈루는 훗날 전반 내내 그를 뺄지 고민했지만 그렇게 했을 때 브라질에서 터져 나올 반응이 두려웠다고 인정했다. 브라질은 0-3으로 졌다.
브라질에서 조사가 열렸다. 대표팀 주치의 리디우 톨레두는 위원회에서, 자신이 호나우두를 못 뛰게 했는데 브라질이 졌다면 북극에 가서 살아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버밍엄대의 임상신경학 교수 에이드리언 윌리엄스는 그가 뛰지 말았어야 했다며, 발작 후 24시간 안에 최상의 경기력을 낼 방법은 없다고 했다.
이 사건은 지금도 단일한 설명이 없다. 당시 보도와 이후 증언이 서로 다르고 구체적 원인에 대해서는 확정된 결론이 없으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운동선수에게 커리어 최대의 경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라는 조건이 온갖 음모론을 불렀다. 확정된 사실은 세 가지다. 그가 발작을 일으켰다는 것, 그럼에도 결승에 출전했다는 것, 그리고 결승 전까지의 활약으로 그 대회 골든볼을 받았다는 것이다.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월드컵은 잃었지만 다른 컵을 하나 얻었다고, 자기 인생이라고.
2002년 6월 30일 요코하마, 두 골
두 번의 수술과 3년에 가까운 공백을 거쳐 그는 2002년 월드컵에 돌아왔다. 돌아온 그는 다른 몸이었다. 발밑으로 수비 셋을 지나가던 스무 살 대신, 뒷공간으로 뛰어들고 마무리를 놓치지 않는 서른 가까운 공격수가 되어 있었다. 히바우두와 호나우지뉴가 뒤를 받치는 삼각 편대의 꼭짓점이 그 자리였다.
대회 내내 8골을 넣어 득점왕이 됐고, 6월 30일 요코하마 국제경기장에서 열린 독일과의 결승에서 2골을 넣어 2-0 승리와 브라질의 다섯 번째 우승을 확정했다. 주심은 피에를루이지 콜리나, 관중은 6만 9,029명이었다. 그 경기의 최우수 선수가 그였다.
4년 전 생드니에서 명단에 들었다 빠졌다 다시 들어가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선수가, 같은 무대의 결승에서 두 골을 넣었다. 그해 그는 FIFA 올해의 선수를 세 번째로 받았고 발롱도르를 두 번째로 가져갔다. 이듬해 열린 라우레우스 시상식에서는 올해의 복귀상을 받았다. 무릎이 두 번 무너진 선수가 월드컵 득점왕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상이었다.
게르트 뮐러의 14골을 넘어선 2006년
2006년 월드컵에서 그는 자신의 월드컵 통산 15번째 골을 넣었다. 이 숫자의 의미는 앞뒤를 봐야 드러난다. 그전까지의 기록은 게르트 뮐러가 1974년 결승에서 세운 14골이었고, 30년 넘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던 숫자였다. 호나우두는 1998년부터 2006년까지 세 번의 대회에 걸쳐 그 기록을 넘겼다. 그리고 그의 15골은 2014년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16번째 골을 넣을 때까지 대회 최다로 남았다.
브라질은 8강에서 프랑스에 막혔고, 이 대회가 그의 마지막 월드컵이었다. 그는 브론즈슈를 받았다. 네 번의 월드컵에 이름을 올렸고, 한 번은 한 경기도 뛰지 못한 막내로, 한 번은 결승에서 무너진 최우수 선수로, 한 번은 결승에서 두 골을 넣은 득점왕으로, 마지막에는 대회 최다 득점 기록 보유자로 떠났다.
호나우두는 발롱도르 유효표를 일곱 해에 걸쳐 받았고, 유럽과 남미의 여러 매체가 그를 당대 베스트 11과 올타임 베스트 11에 반복해서 올렸다. 센터 포워드 한 자리를 놓고 판바스턴, 게르트 뮐러, 호마리우, 코치시 샨도르와 나란히 거론되며, 평가자에 따라 그들 위에 놓이기도 한다.
역대 클럽·국대 기록
PSV 에인트호번1994-199658경기 · 54골
인테르1997-200299경기 · 59골
레알 마드리드2002-2007177경기 · 103골
SC 코린치앙스2009-201169경기 · 35골
브라질 대표팀1994-201198경기 · 62골클럽 기록은 리그와 컵, 대륙 대회를 합한 공식전 기준이다. 리그만 따로 세면 수치가 크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크루제이루는 리그 34경기 34골, 인테르는 세리에 A 68경기 49골, 레알 마드리드는 라리가 127경기 83골이다. 브라질 대표팀 98경기 62골은 브라질 축구 협회 공식 집계이며 역대 3위 기록이다. 문장은 호나우두가 뛰던 시기에 각 구단과 대표팀이 쓰던 것이며, 크루제이루는 당시 문장 원본을 찾지 못해 현재 문장을 쓴다.
역대 등번호
클럽
| 소속팀 | 확인 시즌 | 등번호 |
|---|---|---|
| 크루제이루 EC | 1993~1994 | 9 |
| PSV 에인트호번 | 1994-95~1995-96 | 9 |
| FC 바르셀로나 | 1996-97 | 9 |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1997-98~2001-02 | 10 · 9 |
| 레알 마드리드 CF | 2002-03~2006-07 | 11 · 9 |
| AC 밀란 | 2006-07~2007-08 | 99 |
| SC 코린치앙스 | 2008-09~2010-11 | 9 |
브라질 국가대표팀
| 대표팀 | 확인 기간 | 등번호 |
|---|---|---|
| 브라질 | 1994-2011 | 9 · 20 |
등번호는 트랜스퍼마크트의 시즌별 등록 기록을 기준으로 정리했다. 굵은 숫자는 해당 팀에서 가장 오래 사용했거나 상징성이 큰 대표 등번호다. 1990년대 초 남미 리그와 네덜란드 리그는 경기별 배번을 쓰던 시기가 섞여 있어 시즌 전체를 한 번호로 단정하기 어려운 구간이 있다. 대표팀의 20번은 1994년 월드컵 등록 번호이며, 1998년 이후의 메이저 대회에서는 9번을 달았다.
대표 우승 경력
우승: 1994, 2002
준우승: 1998
8강: 2006
우승: 1997
우승: 1997, 1999
준우승: 1995
동메달: 1996 애틀랜타
우승: 1996-97
우승: 1997-98
우승: 2002
우승: 2002-03
우승: 1996-97
우승: 1996, 2003
우승: 1995-96
우승: 1993, 2009
우승: 1994
우승: 2009
호나우두 나자리우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 발롱도르1997년 · 2002년 1위 · 1996년 · 1998년 2위 · 2003년 11위 · 1999년 23위 · 1995년 26위 · 2004년 최종 후보
- 발롱도르 드림팀프랑스 풋볼이 뽑은 역대 베스트 112020년 1군 선정
- 유러피언 골든슈1996-97
- 라리가 득점왕피치치 트로피 · 1996-97 34골 · 2003-04 25골
- 에레디비시 득점왕1994-95 30골
- 세리에 A 올해의 선수1997-98
- FIFA 올해의 선수1996년 · 1997년 · 2002년
- FIFA 100펠레가 2004년에 선정한 생존 최고 선수 명단2004년
- FIFA 월드컵 골든볼1998년
- FIFA 월드컵 실버볼2002년
- FIFA 월드컵 골든슈2002년
- FIFA 월드컵 브론즈슈2006년
- FIFA 월드컵 도움왕1998년
- FIFA 월드컵 베스트 111998년 · 2002년
- FIFA 월드컵 결승전 최우수 선수2002년
- 라우레우스 올해의 복귀상부상에서 돌아온 선수에게 주는 상2003년
-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1997년
-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1999년
- UEFA 올해의 클럽 축구선수1997-98
- UEFA 올해의 공격수1997-98
- UEFA 선정 유럽 베스트 112002년
- 월드사커 올해의 선수1996년 · 1997년 · 2002년
- IFFHS 올타임 세계 베스트 11국제 축구 역사 통계 연맹이 뽑은 역대 명단B팀
- IFFHS 올타임 남아메리카 베스트 11선정
- IFFHS 올타임 브라질 베스트 11선정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명예의 전당 헌액2018년
- 레알 마드리드 CF 명예의 전당 헌액선정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선정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선정
오늘날 호나우두는 어떻게 평가받는가
2020년 12월 14일, 프랑스 풋볼(France Football; 프랑스 축구 전문지)은 팬 투표와 전 세계 특파원 140명의 선정을 거쳐 축구사 역대 베스트 11인 발롱도르 드림팀을 발표했다. 3-4-3으로 세운 그 1군의 공격진 세 자리는 리오넬 메시, 호나우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였다. 브라질의 9번이 두 명의 현대 GOAT 사이에 섰다.
그 명단에서 눈여겨볼 것은 순위보다 그와 함께 거론되는 이름의 성격이다. 게르트 뮐러가 골문 앞 반경 몇 미터의 절대적 효율을, 판바스턴이 기술과 마무리의 우아함을, 호마리우가 좁은 공간의 결정력을 대표한다면, 호나우두는 하프라인부터 골문까지의 구간 전체를 혼자 처리한 유형이다. 센터 포워드라는 직업의 범위를 넓힌 쪽에 가깝다.
그를 둘러싼 논쟁은 늘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의 3년이 너무 짧았다는 것이다. 스물세 살에 200골을 넘긴 선수가 무릎 때문에 3년을 잃었고, 돌아온 뒤에는 다른 종류의 선수가 됐다. 그래서 그의 평가에는 언제나 가정이 붙는다. 다치지 않았다면 어디까지 갔겠느냐는 가정이다.
허나 그 가정에 기대지 않아도 남는 것이 있다. 무릎이 두 번 무너진 뒤에 돌아와 월드컵에서 8골을 넣고 결승에서 2골을 넣었다. 서른 넘어 레알 마드리드에서 100골을 채웠다. 잃어버린 3년을 빼고 세어도 그는 네덜란드와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각각 리그 득점왕을 했고, 세계 이적료 기록을 두 번 갈아치웠으며, 최연소 기록을 두 개 남겼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 포워드를 한 명만 골라야 한다면, 삥이FC의 답은 호나우두다.
참고 자료
- Wikipedia: Ronaldo (Brazilian footballer): 유소년기와 크루제이루 데뷔일, PSV·바르셀로나·인테르·레알 마드리드 시기의 경기 기록과 이적료, 1999년 레체전과 2000년 복귀전 부상 경위, 동료·감독 증언의 출처 문단.
- Wikipedia: 1997 Intercontinental Cup: 1997년 12월 2일 도쿄 결승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0 크루제이루였다는 확인. 운영자 원고의 1997년 인터콘티넨털컵 우승 기록을 2002년으로 고친 근거.
- Wikipedia: 1996 Johan Cruyff Shield: 1996년 8월 18일 아약스 0-3 PSV 경기 기록. 그가 이미 바르셀로나 소속이던 시점이라 우승 경력에서 뺀 근거.
- Wikipedia: 2002 FIFA World Cup final: 2002년 6월 30일 요코하마 국제경기장, 브라질 2-0 독일, 관중 6만 9,029명, 주심 콜리나, 최우수 선수 호나우두.
- Wikipedia: List of FIFA World Cup top goalscorers: 게르트 뮐러의 14골을 호나우두가 15골로 넘어섰고 2014년 클로제가 16골로 다시 넘었다는 기록 계보.
- Wikipedia: 1994 FIFA World Cup squads: 1994년 브라질 명단의 호나우두 등번호 20번, 당시 17세, 소속 크루제이루, A매치 3경기.
- Wikipedia: Laureus World Sports Award for Comeback of the Year: 2003년 시상식 수상자 기록.
- Wikipedia: Ballon d'Or Dream Team: 2020년 12월 14일 발표된 1군 명단과 3-4-3 구성. 공격진 메시·호나우두·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확인.
- FIFA: 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 대회 공식 페이지의 득점 기록과 수상 대조.
- Transfermarkt: 호나우두 시즌별 기록: 등번호 표의 시즌별 배번과 소속 기간 기준 자료.
- Wikimedia Commons: SC 코린치앙스 문장: 기록 카드에 쓴 문장 이미지. CC BY-SA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