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 LEGEND
페렌츠 푸스카스(Ferenc Puskás)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레알 마드리드 GOAT 공격수
헝가리 황금의 팀의 주장이자 레알 마드리드의 왼발 페렌츠 푸스카스(푸슈카시 페렌츠). 웸블리의 6-3과 베른의 취소된 동점골, 1956년 혁명과 망명, 서른한 살에 다시 시작한 마드리드, 그리고 지고도 해트트릭을 한 암스테르담의 밤까지. 스페인 대표팀에서 낯선 번호를 단 사연과 클럽·국대 기록, 우승과 개인 수상을 정리한다.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유럽축구연맹Union des Associations Européennes de Football
푸슈카시 페렌츠(Puskás Ferenc; 헝가리는 성을 앞에 쓴다. 국내에는 같은 철자를 스페인어식으로 읽고 이름을 앞세운 페렌츠 푸스카스로 먼저 들어왔다)는 헝가리 축구가 낳은 가장 위대한 선수이자, 매직 마자르라 불린 헝가리 역대 최고의 스쿼드를 이끈 선봉장이다. 왼발의 명수, 킥의 명수, 골 넣는 달인이었다. 열여섯 살에 동네 구단 키슈페슈트에서 데뷔해 군대 팀 혼베드의 소령이 됐고, 헝가리 황금의 팀의 주장으로 1952년 올림픽 금메달과 1953년 웸블리의 6-3을 이끌었다. 1956년 혁명 뒤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그는 출전 정지와 이탈리아 구단들의 외면을 지나 서른한 살에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했고, 그곳에서 다시 득점왕 네 번과 유러피언컵 세 번을 보탰다. 유러피언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을 통틀어 두 번 해트트릭을 한 선수는 지금도 그 한 명뿐이다. 금빛 화살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나폴레옹 레몽 코파, 칸타브리아의 광풍 파코 헨토와 함께 저승사자 군단의 최전성기를 이끈 사람, 그리고 해마다 가장 아름다운 골에 이름을 빌려주는 사람이다.
헝가리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로 나서는 주장 푸슈카시.
- 헝가리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로 나서는 주장 푸슈카시.
- 1953년 웸블리, 발바닥으로 공을 끌어당겨 빌리 라이트를 제치고 왼발로 마무리한다.
- 같은 경기. 짧은 패스를 이어 잉글랜드 진영을 가르고 골문까지 간다.
- 골문 앞 혼전에서 끝내 골을 만들고 두 팔을 드는 헝가리 선수들.
- 흰 유니폼의 레알 마드리드 시절. 줄무늬 수비 사이로 공을 몰고 들어간다.
삥이FC 푸슈카시 페렌츠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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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축구사에서 이 이름 옆에 나란히 세울 사람은 없다. 20세기 말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 International Federation of Football History & Statistics, 축구 기록과 역사를 집계하는 단체)이 실시한 유럽 세기의 선수 투표에서 헝가리 선수만 추려 보면, 푸슈카시가 받은 점수는 667점이었다. 2위 코치시 샨도르(Kocsis Sándor; 혼베드·FC 바르셀로나와 헝가리의 인사이드 라이트, 1929-1979)가 54점, 3위 보지크 요제프(Bozsik József; 혼베드와 헝가리의 라이트 하프, 1925-1978)가 41점이었다. 1910년대에 골을 쌓은 실로시 임레(Schlosser Imre; 페렌츠바로시와 헝가리의 공격수, 1889-1959)도, 1967년 발롱도르를 받은 알베르트 플로리안(Albert Flórián; 페렌츠바로시와 헝가리의 센터 포워드, 1941-2011)도 그 표의 아래쪽에 있다. 같은 시기의 투표에서 그는 유럽 4위, 세계 6위였고, 스페인 선수로 추린 순위에서도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바로 다음 자리에 올랐다. 두 나라의 축구사가 모두 그를 자기 이름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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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는 왼발이었다. 헝가리 쪽에는 그가 어린 시절 오른발 슈팅으로 골키퍼의 갈비뼈를 모두 부러뜨린 뒤로 왼발만 썼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헝가리 기록은 이를 지어낸 전설로 분류하고 왼발이 오른발보다 훨씬 좋았을 뿐이라고 적는다. 키 172cm의 작고 다부진 몸으로 공을 멈추고 돌리고 차는 동작이 한 박자 안에 끝났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그의 바깥쪽 측면을 달린 파코 헨토(Francisco Gento López; 레알 마드리드와 스페인의 왼쪽 윙어, 1933-2022)는 그 왼발이 손 같아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like a hand, he could do anything with it)고 말했다. 인사이드 레프트 자리에서 내려와 공을 받고, 몸을 한쪽으로 기울여 수비를 속인 뒤 반대로 빠져나가고, 30미터 밖에서도 골문을 겨눴다. 직접 프리킥과 코너킥으로 넣은 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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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을 축구사에 새긴 장면은 둘이다. 하나는 1953년 11월 25일 웸블리다. 잉글랜드 주장 빌리 라이트(William Ambrose Wright;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와 잉글랜드의 수비수, 1924-1994)가 태클하러 뛰어든 순간 푸슈카시는 발바닥으로 공을 뒤로 끌어당겼고, 라이트가 빈자리를 지나가는 사이 왼발로 골문을 열었다. 헝가리는 6-3으로 이겼고, 잉글랜드 축구는 그날부터 자신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다른 하나는 유러피언컵 결승이다. 1960년 글래스고에서 네 골, 1962년 암스테르담에서 세 골을 넣었다. 1955-56 시즌 유러피언컵이 시작된 뒤 지금의 UEFA 챔피언스 리그까지 결승 두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한 선수는 그 한 명뿐이고, 진 결승에서 해트트릭을 한 첫 선수도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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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그 장면들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증거로만 읽으면 된다. 헝가리 대표팀에서 85경기 84골, 레알 마드리드에서 공식전 262경기 242골을 넣었다. RSSSF(Rec.Sport.Soccer Statistics Foundation; 축구 기록을 모으는 국제 통계 단체)는 그가 공식전 792경기에서 802골을 넣었다고 집계한다. 무게가 실리는 쪽은 그 뒤의 사정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골 242개는 모두 서른한 살 이후에 나왔다. 스물아홉에 조국을 떠나 1년 반 넘게 공식전을 뛰지 못했고, 이탈리아 구단들이 나이와 체중을 이유로 고개를 저은 공격수가 스페인 득점왕을 네 번 차지했다. 1960년에는 루이스 수아레스에 이어 발롱도르 2위에 올랐다. 서른셋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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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애는 20세기 중부 유럽의 역사와 겹친다. 독일계 슈바벤 집안에서 태어나 열 살 때 성을 헝가리식으로 바꿨고, 공산 정권이 구단을 군대에 넘기자 소령 계급장을 달았다. 혁명이 일어난 해 가을에는 원정지에서 서방 언론이 그의 전사 소식을 전했고, 조국은 그를 반역자로 불렀다. 그는 25년 동안 부다페스트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 사이 마드리드에서는 판초(Pancho; 스페인어 이름 Francisco의 애칭)라 불렸고, 그리스와 칠레, 이집트, 파라과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벤치에 앉았다. 1990년대에 고국으로 돌아와 2006년 국가의 예우 속에 묻혔고, 지금은 부다페스트의 국가 경기장과 FIFA의 올해의 골 상이 그의 이름을 쓴다. 필자에게 푸슈카시 페렌츠는 두 번 태어난 공격수다. 한 번은 키슈페슈트의 골목에서, 또 한 번은 서른한 살의 마드리드에서.

푸슈카시 페렌츠 프로필
HUNGARY헝가리Magyarország

- 본명
- Purczeld Ferenc
- 등록명
- 푸슈카시 페렌츠(Puskás Ferenc)
- 출생
- 1927년 4월 1일
- 출생지
- 헝가리 부다페스트
- 사망
- 2006년 11월 17일 · 향년 79세
- 사망지
- 헝가리 부다페스트
- 신장
- 172cm
- 대표 국적
- 헝가리 · 스페인
- 포지션
- 인사이드 레프트 · 센터 포워드
- 주요 등번호
- 10번 · 14번
- 선수 경력
- 1943-1966년 · 혼베드와 레알 마드리드
- 대표팀
- 헝가리 85경기 84골 · 스페인 4경기
- 별명
- 질주하는 소령(Száguldó Őrnagy) · 외치(Öcsi; 꼬마 동생) · 판초(Pancho)
- 주발
- 왼발
1943년 12월 5일 너지바러드, 열여섯 살의 외치
푸슈카시는 1927년 4월 1일 부다페스트에서 푸르첼드 페렌츠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쪽은 다뉴브강을 따라 헝가리에 정착한 독일계 슈바벤 사람(Donauschwaben; 18세기부터 다뉴브 유역에 이주한 독일어권 농민의 후손)이었다. 집안은 만우절 농담을 피하려고 생일을 하루 늦춘 4월 2일에 축하했다. 아버지 푸슈카시 페렌츠 1세(id. Puskás Ferenc; 키슈페슈트의 선수 출신 코치, 1903-1952)는 부다페스트 남동쪽 외곽 동네 키슈페슈트(Kispest; 1950년 부다페스트에 편입된 노동자 동네)의 구단에서 뛰다 코치가 된 사람이었고, 1937년 가족의 성을 헝가리식 푸슈카시로 바꿨다. 어머니 비로 머르기트(Bíró Margit; 재봉사, 1904-1976)는 바느질로 살림을 꾸렸다. 32명의 어른과 백서른두 명의 아이가 함께 산 키슈페슈트의 공동 주택에서 그는 돈이 없어 헝겊을 뭉친 공을 차며 자랐다.
옆집에는 한 살 반 많은 보지크 요제프가 살았다. 열두 살이 된 보지크가 키슈페슈트 AC 유소년 팀에 들어가자, 아직 나이가 모자랐던 푸슈카시는 구단 관계자를 졸라 코바치 미클로시(Kovács Miklós)라는 가짜 이름으로 등록했다. 두 소년은 뒷날 헝가리 대표팀에서 같은 줄에 서고, 같은 군대 팀의 장교가 된다. 1943년 겨울 독감이 선수단을 덮쳐 결원이 생기자 열여섯 살의 그가 12월 5일 1부 리그 너지바러드 원정에 처음 나섰다. 상대는 그해 선두를 달리던 NAC(Nagyváradi Atlétikai Club; 당시 헝가리 영토였던 너지바러드, 지금의 루마니아 오라데아의 구단)였고, 키슈페슈트는 0-3으로 졌다. 사흘 뒤 디오슈죄르 원정에서 그는 첫 리그 골을 넣었다. 나이 많은 동료들은 그를 외치(Öcsi; 꼬마 동생)라 불렀고, 그 이름은 평생 따라다녔다.

전쟁이 끝나자 그의 왼발은 금세 리그를 넘어섰다. 1945년 8월 20일 열여덟 살의 그는 오스트리아전에서 대표팀에 데뷔해 첫 골을 넣었고, 헝가리는 5-2로 이겼다. 1947-48 시즌에는 리그에서 50골을 넣어 그해 유럽 1부 리그 최다 득점자가 됐다. 1949년 2월 19일 죄르전에서는 혼자 일곱 골을 넣었다. 1948년 11월에는 사건도 있었다. 키슈페슈트를 맡은 명장 구트만 벨러(Guttmann Béla; 헝가리의 감독, 훗날 벤피카를 유러피언컵 2연패로 이끈다, 1899-1981)가 경기 중 수비수를 빼려 하자 푸슈카시가 그 선수에게 그냥 남으라고 했다. 권위를 잃은 구트만은 관중석으로 올라가 경기를 지켜본 뒤 팀을 떠났다. 두 사람은 14년 뒤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다시 만난다.
1949년, 질주하는 소령
1949년 키슈페슈트 AC는 헝가리 국방부 소관으로 넘어가 부다페스트 혼베드(Budapesti Honvéd Sportegyesület; 헝가리 인민군의 스포츠 클럽, 혼베드는 국토방위군이라는 뜻)가 됐다. 선수들은 군인이 됐고 계급을 받았다. 푸슈카시는 소령까지 올라갔고, 헝가리 스포츠 언론은 그를 질주하는 소령(Száguldó Őrnagy)이라 불렀다. 영국의 축구 기자 브라이언 글랜빌(Brian Glanville; 『선데이 타임스』·『가디언』에 글을 쓴 영국의 축구 기자)의 표현으로는, 그런 군인 선수들이 대개 그렇듯 그가 열병식에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군대 팀은 징집으로 선수를 모았다. 혼베드는 그렇게 다른 구단의 스타였던 코치시 샨도르와 치보르 졸탄(Czibor Zoltán; 혼베드·FC 바르셀로나와 헝가리의 왼쪽 윙어, 1929-1997)을 데려왔고, 대표팀 감독 셰베시 구스타브(Sebes Gusztáv; 1950년대 헝가리 대표팀 감독·체육부 차관, 1906-1986)는 같은 구단에서 매주 함께 뛰는 선수들로 대표팀의 뼈대를 세웠다. 그 구조가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앞선 축구가 됐는지는 헝가리 황금의 팀과 토털 풋볼에 정리했다. 혼베드는 1949-50 시즌부터 1955년까지 다섯 번 리그 정상에 섰고, 푸슈카시는 1947-48 시즌을 시작으로 네 번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유러피언컵과 발롱도르는 1955년과 1956년에야 생겼다. 그 두 대회가 몇 해만 일찍 시작됐다면 그의 진열장에는 훨씬 많은 트로피가 놓였을 것이다. 군복을 입고 공을 찬 것이 그만의 일은 아니었다. 같은 시대 브라질의 니우통 산투스도 공군에서 복무하다 눈에 띄어 보타포구에 들어갔다. 1950년 그는 평생을 함께할 후녀드바리 에르제베트(Hunyadvári Erzsébet; 1932-2015)와 결혼했고, 2년 뒤 딸 어니코(Puskás Anikó; 1952-2011)가 태어났다.
1952년 8월 2일 헬싱키, 결승의 선제골
헝가리 대표팀은 1950년 5월부터 지지 않았다. 축구사 이래 가장 완벽에 가까웠던 팀, 적수가 없던 팀이라는 평가가 지금도 따라붙는 그 팀을, 동구권 바깥에서는 제대로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 세대의 리더는 단연 질주하는 소령이었다. 1952년 여름 헬싱키 올림픽이 그 장막을 걷었다. 헝가리는 루마니아, 이탈리아, 튀르키예, 스웨덴을 차례로 꺾고 결승에 올랐다. 스웨덴과의 준결승에서는 푸슈카시가 킥오프 1분 만에 골을 넣었고 헝가리는 6-0으로 이겼다. 8월 2일 올림픽 경기장의 결승 상대는 유고슬라비아였다. 푸슈카시는 페널티킥을 실축했지만, 후반 25분 선제골을 넣어 그 실수를 갚았다. 헝가리는 2-0으로 이겨 금메달을 땄다. 그는 다섯 경기를 모두 뛰며 네 골을 넣었다.

이듬해 5월 17일 로마에 새로 지은 올림픽 경기장의 첫 경기에서 헝가리는 이탈리아를 3-0으로 꺾었다. 푸슈카시가 두 골을 넣었다. 그 승리로 헝가리는 1948년에 시작한 센트럴 유러피언 인터내셔널컵(Central European International Cup;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이탈리아·스위스가 리그 방식으로 겨룬 국가대표 대회, 헝가리어로는 Európa-kupa)의 우승을 확정했고, 그는 10골로 대회 득점왕이 됐다. 그날 주심은 잉글랜드의 윌리엄 링(William Ling; 잉글랜드의 국제 심판, 1908-1984)이었다. 1년 뒤 베른의 월드컵 결승을 맡게 되는 사람이다.
1953년 11월 25일 웸블리, 발바닥으로 끌어당긴 공
1953년 가을 잉글랜드는 홈에서 영국 제도 바깥의 팀에게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축구를 만든 나라라는 자부심은 대륙의 축구를 배울 생각을 하지 않게 했다. 영국 언론이 세기의 경기(Match of the Century)라 부른 그 경기를 앞두고, 훗날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이 되는 보비 롭슨(Bobby Robson; 잉글랜드의 공격수 출신 감독, 1933-2009)은 당시를 이렇게 돌아봤다. 그 선수들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고, 우리는 푸슈카시가 누군지도 몰랐다. 경기 전 잉글랜드 선수 하나가 푸슈카시를 가리키며 저 땅딸막한 친구 좀 보라고 비웃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지만, 누가 어디서 한 말인지는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 확인되는 쪽은 오히려 헝가리 주장의 농담이다. 입장 대기 중 잉글랜드에서 자기보다 키가 작은 어니 테일러(Ernie Taylor; 블랙풀과 잉글랜드의 인사이드 포워드, 1925-1985)를 본 푸슈카시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걱정 마, 저쪽에는 나보다 더 작은 사람이 있어(Listen, we’re going to be all right, they’ve got someone even smaller than me).

10만 5,000명이 들어찬 웸블리에서 헝가리는 킥오프 1분 만에 히데그쿠티 난도르(Hidegkuti Nándor; MTK와 헝가리의 센터 포워드, 1922-2002)의 골로 앞섰다. 히데그쿠티는 센터 포워드였지만 미드필드로 내려와 공을 받았고, 잉글랜드의 센터하프 해리 존스턴(Harry Johnston; 블랙풀과 잉글랜드의 센터하프, 1919-1973)은 그를 따라 나갈지 자리를 지킬지 정하지 못했다. 그 틈으로 인사이드의 푸슈카시와 코치시가 파고들었다. 전반 24분, 골문 앞에서 공을 잡은 푸슈카시에게 라이트가 태클하러 뛰어들었다. 푸슈카시는 발바닥으로 공을 뒤로 끌어당겼고, 라이트는 공이 사라진 자리를 지나 미끄러졌다. 몸을 돌린 그의 왼발 슈팅이 골키퍼 길 메릭(Gil Merrick; 버밍엄 시티와 잉글랜드의 골키퍼, 1922-2010)을 지나 골망을 흔들었다. 『더 타임스』의 제프리 그린(Geoffrey Green; 『더 타임스』 축구 기자, 1911-1990)은 이 장면을 이렇게 적었다.
라이트는 엉뚱한 불을 끄러 달려가는 소방차처럼 그를 지나쳐 갔다.
Like a fire engine going to the wrong fire.
- 제프리 그린, 『더 타임스』 1953년 11월 26일 자 경기 기사. 브라이언 글랜빌의 푸슈카시 부고(『가디언』, 2006년 11월 18일) 재인용
3분 뒤 푸슈카시는 보지크의 프리킥 방향을 바꿔 두 번째 골을 넣었다. 후반에 보지크와 히데그쿠티가 한 골씩 더해 헝가리는 6-3으로 이겼다. 헝가리의 슈팅은 35개, 잉글랜드는 다섯 개였다. 그날 주심은 네덜란드의 레오 혼(Leo Horn; 네덜란드의 국제 심판, 1916-1995)이었다. 9년 뒤 암스테르담에서 푸슈카시의 결승 해트트릭을 지켜볼 사람이다.
푸슈카시는 이 경기를 평생 가장 아름다운 승리로 꼽았다. 1955년 영어로 나온 자서전 『헝가리의 주장』(Captain of Hungary)에서 그는 그날의 비결을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는 축구의 황금률을 보여 줬다. 좋은 선수는 공이 없을 때도 계속 경기를 한다(the good player keeps playing even without the ball). 반년 뒤인 1954년 5월 23일 부다페스트의 네프슈타디온에서 열린 재대결은 7-1이었다.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큰 패배로 지금도 남아 있는 경기이고, 푸슈카시는 여기서도 두 골을 넣었다. 두 경기 합계 13-4였다. 당시 첼시의 센터하프였던 론 그린우드(Ron Greenwood; 첼시의 센터하프 출신, 훗날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1921-2006)는 푸슈카시를 처음 봤을 때 훈련을 대부분 식당에서 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글동글한 친구였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곧바로 덧붙였다.
그는 타고난 사람, 축구의 그랜드마스터였다. 완전히 왼발잡이였지만 공이 어떻게 오든 그 왼발이 올라갔고, 공은 즉시 정확하게 멈췄다. 축구화 앞코에 풀이라도 발라 놓은 것 같았다.
He was a natural, a grand master of the game. He was entirely left-footed but no matter how the ball came the old left foot went up and his control was instant and precise. It was as if he had glue on the toe of his boot.
- 론 그린우드, 훗날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데이비드 레이시의 기사 「Puskas: a man who changed the game for ever」(『가디언』, 2006년 11월 18일) 재인용
1954년 7월 4일 베른, 발목을 다친 주장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헝가리를 우승 후보로 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첫 경기에서 대한민국을 9-0으로 꺾었다. 휴전 11개월 만에 첫 월드컵에 나선 한국의 사정은 1954년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에 있다. 6월 20일 바젤에서는 1.5군을 내보낸 서독을 8-3으로 눌렀다. 대가는 컸다. 푸슈카시는 서독의 센터하프 베르너 리브리히(Werner Liebrich; 카이저슬라우테른과 서독의 센터하프, 1927-1995)의 태클에 발목뼈에 금이 갔다. 그는 8강 브라질전과 4강 우루과이전을 벤치 밖에서 봤다.
결승 상대는 다시 서독이었다. 푸슈카시는 다 낫지 않은 발목으로 뛰겠다고 고집했고, 셰베시는 그를 선발로 세웠다. 오른쪽 윙어 부더이 라슬로(Budai László; 혼베드와 헝가리의 오른쪽 윙어, 1928-1983)를 빼 달라는 요구까지 했다고 전한다. 부더이는 결승에 나서지 못했다. 7월 4일 비 내리는 반크도르프 경기장에서 전반 6분 코치시의 슈팅이 막혀 흐른 공을 푸슈카시가 밀어 넣었고, 2분 뒤 치보르가 한 골을 더했다. 헝가리의 32경기 무패가 우승으로 끝나는 듯했다.

서독은 10분과 18분에 따라붙었다. 후반에 헝가리는 골대와 크로스바를 때렸고, 서독 골키퍼 토니 투레크(Toni Turek;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와 서독의 골키퍼, 1919-1984)는 거듭 슈팅을 막았다. 84분 헬무트 란(Helmut Rahn; 로트바이스 에센과 서독의 오른쪽 윙어, 1929-2003)이 3-2를 만들었다. 2분 뒤 코치시가 머리로 떨궈 준 공을 푸슈카시가 골문에 꽂았다. 헝가리 선수들은 링 주심이 처음에는 골을 인정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 웨일스의 선심 머빈 그리피스(Mervyn Griffiths; 웨일스의 국제 심판, 1909-1974)가 깃발을 들어 오프사이드를 알렸다. 푸슈카시는 평생 그 골이 정당했다고 믿었다. 그날 남은 영상에는 패스가 나가는 순간 그의 위치가 담겨 있지 않다.

헝가리가 1950년 5월 이후 처음 진 경기였다. 결승 뒤에도 2년 가까이 지지 않은 이 팀의 50경기 기록은 42승 7무 1패이고, 그 1패가 베른이다. 부다페스트에서는 패배에 분노한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푸슈카시는 패배를 이렇게 받아들였다.
속으로는 그 결과에 울었다. 그래도 서독의 주장 프리츠 발터에게 건넨 축하는 진심이었다. 진 사람은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된다.
Inwardly I wept at the result but my congratulations for Fritz Walter, West Germany's captain, were sincere. The loser must have no spite.
- 푸슈카시 페렌츠, 1954년 월드컵 결승을 돌아보며. 데이비드 레이시의 기사(『가디언』, 2006년 11월 18일) 재인용
그가 늘 그렇게 점잖았던 것은 아니다. 결승 뒤 몇몇 서독 선수가 병원에 실려 가자 그는 서독이 약물을 썼다고 주장했고, 독일 축구 협회는 그가 뛰는 팀과의 경기를 독일 구단들에 금지했다. 이 일은 6년 뒤 글래스고에서 다시 문제가 된다. 결승의 장면은 1954 FIFA 월드컵 결승 서독 3-2 헝가리에, 대회 전체의 기록은 1954 FIFA 월드컵 베스트 11에 정리했다.
1954년 12월 13일 몰리뉴, 유러피언컵을 부른 패배
같은 해 겨울 혼베드는 잉글랜드 챔피언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의 조명탑 아래에서 친선 경기를 치렀다. 12월 13일 몰리뉴, 전반에 2-0으로 앞선 혼베드는 진흙탕이 된 후반에 세 골을 내주고 2-3으로 졌다. 이튿날 영국 신문은 울버햄프턴을 세계 챔피언이라 불렀다. 프랑스 일간지 『레키프』의 편집자 가브리엘 아노(Gabriel Hanot; 프랑스 대표 선수 출신 축구 기자, 1889-1968)가 반박했다. 울버햄프턴이 무적이라고 선언하기 전에 그들을 모스크바와 부다페스트에 보내 보라는 것이었다. 아노는 같은 지면에서 유럽 클럽 챔피언끼리 겨루는 대회를 제안했고, 그 대회가 이듬해 9월 유러피언컵으로 시작했다. 푸슈카시가 세 번 들게 될 트로피는 그가 진 경기에서 출발했다.
1956년 10월, 돌아가지 않은 원정
1956년 10월 23일 부다페스트에서 반소련 봉기가 일어났다. 혼베드는 그해 처음 유러피언컵에 나섰고, 1라운드 상대는 스페인의 아틀레틱 빌바오였다. 혁명의 와중에 서방으로 나간 혼베드가 원정을 이어 가는 사이 11월 4일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다시 짓밟았다. 혼베드는 11월 22일 빌바오에서 2-3으로 졌고, 선수들은 귀국하지 않기로 했다. 서방 언론 일부는 헝가리 육군 소령 푸슈카시가 소련군과 싸우다 전사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그때 이탈리아에 있었다. 부다페스트를 빠져나온 가족들이 선수단을 찾아왔다.

혼베드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돌며 친선 경기로 돈을 벌었다. 12월 12일 로마의 AS 로마전에서 선수들은 혁명의 희생자를 기리는 검은 완장을 찼다. 12월 20일 브뤼셀 헤이젤 경기장에서 중립지 홈경기로 치른 빌바오와의 2차전은 3-3이었다. 푸슈카시는 후반 41분 그의 첫 유러피언컵 골을 넣었지만, 혼베드는 합계 5-6으로 탈락했다. 그 대회의 기록은 1956-57 유러피언컵에 있다.

헝가리 축구 협회와 FIFA의 반대를 무릅쓰고 혼베드는 1957년 1월 브라질 원정을 강행했다. 히우지자네이루에서 플라멩구, 보타포구와 맞섰다. 원정이 끝나고 빈으로 돌아왔을 때 선수들은 둘로 갈렸다. 보지크를 비롯한 다수는 귀국했고, 푸슈카시와 코치시, 치보르는 남았다. 헝가리 당국은 그에게 반역 혐의를 거론했고, 축구계는 출전 정지를 내렸다. 푸슈카시는 회고에서 18개월 출전 정지를 선수 생명의 사형 선고로 받아들였다고 썼다. 혁명이 이 팀을 어떻게 흩어 놓았는지는 1956년 헝가리 혁명과 황금의 팀의 해체에 사료와 함께 적었다.

1958년 여름, 서른한 살의 망명자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정지가 풀린 뒤에도 그를 원하는 구단은 많지 않았다. AC 밀란과 유벤투스가 관심을 보였지만 계약은 이뤄지지 않았고, 1957년 그리스의 에트니코스 피레아스와 맺으려던 계약은 경쟁 구단들의 압력으로 무산됐다. 이탈리아 구단들은 서른을 넘긴 나이와 불어난 체중을 문제 삼았다. 뮌헨 참사로 선수단을 잃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 대행 지미 머피(Jimmy Murphy;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석 코치, 1910-1989)가 그를 원했지만 외국인 선수를 막은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규정과 언어가 걸림돌이었다.
길을 연 사람은 혼베드의 옛 기술 책임자 외스트라이허 에밀(Östreicher Emil; 혼베드의 기술 감독 출신, 1958년부터 레알 마드리드 기술 책임자)이었다. 1958년 레알 마드리드로 옮긴 그는 회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Santiago Bernabéu Yeste; 레알 마드리드 회장, 1895-1978)에게 이탈리아에 있던 푸슈카시를 데려오자고 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이미 유러피언컵을 세 번 연속으로 든 팀이었고, 공격진에는 디스테파노와 레몽 코파, 엑토르 리알(Héctor Rial; 레알 마드리드의 인사이드 레프트, 1928-1991), 헨토가 있었다. 1958년 8월 서른한 살의 과체중 망명자가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했다. 구단 공식 사이트는 당시 스페인 팬들의 반응을 이렇게 적는다. 그렇게 나이 많고 살이 붙은 사람이 스타로 가득한 팀에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생각했지만, 곧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9월 14일 라스팔마스 원정에서 데뷔했고, 일주일 뒤 스포르팅 히혼전에서 해트트릭으로 첫 골을 신고했다. 첫 시즌에만 리그 해트트릭이 네 번이었다. 1959년 1월 4일 라스팔마스와의 홈경기에서는 그와 디스테파노가 나란히 해트트릭을 기록해 10-1로 이겼다. 두 사람은 금세 친구가 됐다. 그해 유러피언컵 4강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상대로 1차전과 재경기에서 페널티킥 골을 넣었지만, 슈투트가르트의 결승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없었다. 부상 때문이었다는 기록이 많고, 감독 루이스 카르니글리아(Luis Carniglia; 레알 마드리드의 아르헨티나인 감독, 1917-2001)와의 불화를 드는 헝가리 쪽 기록도 있다. 레알 마드리드는 우승했고, 카르니글리아는 곧 팀을 떠났다.
1960년 5월 18일 햄프던 파크, 4골
1960년 유러피언컵 결승은 하마터면 열리지 못할 뻔했다. 결승 상대는 서독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였고, 독일 축구 협회는 1954년의 약물 발언 이후 푸슈카시가 뛰는 팀과의 경기를 금지하고 있었다. 푸슈카시가 독일 축구 협회에 서면으로 사과한 뒤에야 경기가 성사됐다.

5월 18일 글래스고 햄프던 파크에는 12만 7,621명이 들어찼다. 지금도 유러피언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역사상 가장 많은 관중이다. 18분 프랑크푸르트가 먼저 넣었다. 디스테파노가 27분과 30분에 두 골로 경기를 뒤집었고, 전반 종료 직전 푸슈카시가 세 번째 골을 넣었다. 후반에 그는 56분 페널티킥으로 한 골, 60분과 71분에 두 골을 더했고, 디스테파노도 한 골을 보태 7-3이 됐다. 두 사람이 일곱 골을 나눠 넣은 셈이다. 결승 한 경기 네 골은 지금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고, 10골이 터진 이 경기는 지금도 결승 최다 골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튿날 런던의 『더 타임스』는 레알 마드리드가 바이킹처럼 유럽을 휩쓸고 다닌다고 썼다. 그 시즌 푸슈카시는 유러피언컵 일곱 경기에서 12골을 넣어 득점왕이 됐고, 리그에서도 25골로 트로페오 피치치(Trofeo Pichichi; 스페인 일간지 『마르카』가 라리가 득점왕에게 주는 상)를 받았다. 그해 발롱도르 투표에서는 FC 바르셀로나의 수아레스에 이어 2위였다.

1962년 5월 2일 암스테르담, 지고도 해트트릭
1960-61 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1라운드에서 FC 바르셀로나에 져 다섯 번 들었던 유러피언컵을 처음 내줬다. 이듬해 다시 결승에 올랐다. 상대는 그 사이 정상에 오른 벤피카였고, 벤피카의 감독은 14년 전 키슈페슈트의 관중석으로 올라간 구트만이었다. 주심은 1953년 웸블리의 레오 혼이었다.
5월 2일 암스테르담 올림픽 경기장에서 푸슈카시는 18분과 23분에 두 골을 넣었다. 그날의 골 가운데 하나는 디스테파노가 하프라인에서 찔러 준 공을 받아 혼자 달려가 넣은 것이었다. 벤피카가 두 골을 따라붙자 그는 39분 세 번째 골을 넣었다. 전반은 3-2였다. 후반에 벤피카의 마리우 콜루나(Mário Coluna; 벤피카와 포르투갈의 미드필더, 1935-2014)가 동점골을 넣었고, 스무 살의 에우제비우(Eusébio da Silva Ferreira; 벤피카와 포르투갈의 공격수, 1942-2014)가 64분 페널티킥과 67분 슈팅으로 경기를 끝냈다. 레알 마드리드는 3-5로 졌다. 진 팀에서 결승 해트트릭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고, 결승 두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한 선수도 그가 처음이었다. 2026년 지금까지 그 뒤를 이은 사람은 없다.

경기가 끝난 뒤 푸슈카시가 자기 유니폼을 벗어 에우제비우에게 건넸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한다. 왼발의 시대가 오른발의 시대에게 왕관을 넘겼다는 상징으로 지금도 자주 인용되는 장면이다. 정작 푸슈카시는 훗날 누구에게도 유니폼을 준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확인되는 것은 그날 경기장에 있던 사람들이 한 시대가 넘어가는 것을 봤다는 사실까지다.
1962년 칠레, 스페인 유니폼의 14번
1961년 푸슈카시는 스페인 국적을 얻었다. 그해 11월 12일 카사블랑카에서 열린 모로코와의 월드컵 예선에서 스페인 대표로 처음 뛰었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는 등번호 14번을 달고 비냐델마르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멕시코, 브라질과의 조별 리그 세 경기를 모두 뛰었다. 골은 없었다. 스페인은 조 최하위로 탈락했다. 헝가리 시절의 동료들과 한 줄로 서던 때와 달리, 그는 낯선 대표팀의 센터 포워드 자리에서 골을 넣기 어려워했다. 대회를 취재한 글랜빌은 칠레가 3위를 차지한 밤 산티아고의 거리에서 축제를 벌이는 칠레 팬들 사이로, 한 문간에 서서 땅콩을 까먹던 푸슈카시를 기억했다. 평생 그를 떠나지 않은 부다페스트 골목 소년의 웃음을 띤 얼굴이었다고 썼다.
헝가리에서 85경기 84골을 넣은 선수가 스페인에서는 네 경기에서 한 골도 넣지 못했다. 두 나라의 대표팀에서 뛴 그의 기록은 그렇게 남았다. 이듬해 10월 23일 그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웸블리에서 열린 잉글랜드와 FIFA 세계 선발의 경기에 교체로 나섰다. 에우제비우와 교대해 들어갔고, 후반에는 디스테파노, 헨토와 함께 왼쪽 공격진을 이뤘다. 10년 전 6-3을 만든 그 잔디였다.
서른아홉까지, 레알 마드리드의 8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1960-61 시즌부터 1964-65 시즌까지 라리가를 다섯 번 연속으로 우승했다. 푸슈카시는 첫 여섯 시즌 동안 해마다 리그 20골 이상을 넣었고, 1962-63 시즌과 1963-64 시즌에도 피치치를 받아 득점왕을 네 번 차지했다. 1963년에는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베르나베우와 캄 노우에서 한 번씩 해트트릭을 했다. 1962년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Copa del Generalísimo; 프랑코 정권 시절의 스페인 국왕컵) 결승에서는 세비야를 상대로 두 골을 모두 넣어 2-1 승리를 이끌었다. 1964년 빈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는 인테르에 1-3으로 졌다. 그 결승이 디스테파노의 레알 마드리드 마지막 경기였다.
푸슈카시는 1년 더 남았다. 1965년 9월 22일 서른여덟의 그는 유러피언컵 1라운드 2차전에서 페예노르트를 상대로 네 골을 넣었다. 그 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결승에 전원 스페인 선수를 세운 젊은 팀으로 여섯 번째 유러피언컵을 들었다. 겨울에 다친 부위가 재발한 푸슈카시는 브뤼셀의 결승에 나서지 못했다. 1966년 5월 8일, 서른아홉의 나이로 레알 마드리드에서 마지막 경기를 뛰었다. 여덟 시즌 동안 공식전 262경기 242골, 우승 트로피는 10개였다. 서른셋부터 서른일곱 사이에 라리가 득점왕을 네 번 한 셈이다. 오늘날로 치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30대 중후반에도 해마다 득점왕에 오르는 것과 같다. 오늘날 팬들이 레알 마드리드의 푸슈카시를 징그럽게도 오래 해 먹은 선수로 기억하는 까닭이다.
1971년 6월 2일 웸블리, 파나티나이코스의 감독
은퇴한 그는 스페인의 에르쿨레스와 미국, 캐나다를 거쳐 1970년 그리스 아테네의 파나티나이코스 감독이 됐다. 1970-71 시즌 파나티나이코스는 8강에서 에버턴을 원정 다득점으로, 4강에서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1차전 1-4 패배 뒤 2차전 3-0으로 뒤집고 결승에 올랐다. 그리스 구단이 유럽 대항전 결승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고, 2024년 올림피아코스가 UEFA 컨퍼런스 리그 결승에 오를 때까지 유일했다. 6월 2일 결승 무대는 웸블리였다. 18년 전 6-3을 만든 그 경기장에서 그의 파나티나이코스는 요한 크라위프(Johan Cruijff; 아약스와 네덜란드의 공격수, 1947-2016)의 아약스에 0-2로 졌다. 이듬해 파나티나이코스는 그리스 리그 정상에 섰고, 파나티나이코스 팬들 가운데는 지금도 그를 구단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꼽는 사람이 많다.

그 뒤의 이력은 세계지도 같다. 레알 무르시아, 칠레의 콜로콜로,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 아테네의 AEK, 이집트의 알마스리, 파라과이의 솔 데 아메리카와 세로 포르테뇨,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사우스 멜버른 헬라스. 솔 데 아메리카는 1986년 그의 지휘로 구단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사우스 멜버른은 1991년 오스트레일리아 내셔널 사커 리그 정상에 섰다. 그때 사우스 멜버른에서 뛴 젊은 수비수가 훗날 토트넘 홋스퍼의 감독이 되는 앤지 포스테코글루(Ange Postecoglou; 그리스계 오스트레일리아인 감독, 1965-)였다. 포스테코글루는 자신의 공격 축구가 푸슈카시에게서 시작됐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1981년, 25년 만의 부다페스트
망명자로 분류된 그의 이름은 헝가리 언론에서 오랫동안 금기였다. 1981년 그는 25년 만에 처음 고국 땅을 밟았다. 가장 먼저 키슈페슈트에 있는 부모의 무덤을 찾았다. 6월 6일 부다페스트의 네프슈타디온에서는 헝가리와 잉글랜드의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원로 선수들의 경기가 열렸고, 쉰넷의 그는 해트트릭을 했다. 그날 잉글랜드 대표팀 벤치에는 1953년 그의 왼발에 충격을 받았던 그린우드가 감독으로 앉아 있었다.

1990년대 초 그는 아내와 함께 부다페스트로 완전히 돌아왔다. 1991년 키슈페슈트는 그를 명예 시민으로 맞았고, 헝가리 축구 협회는 그에게 유소년과 국제 업무를 맡겼다. 1993년 4월부터 6월까지 대표팀 감독 대행으로 네 경기를 지휘했는데, 그 가운데 더블린에서 아일랜드에 0-2로 끌려가다 4-2로 뒤집은 경기가 있었다. 헝가리 국방군은 1992년 그를 중령으로 복권했고 1995년 대령으로 진급시켰다. 혼베드 시절의 소령은 그렇게 군복을 되찾았다. 1993년 11월 웸블리의 6-3 40주년에는 헝가리 공화국이 그와 함께 살아 있던 황금의 팀 동료 그로시치, 부잔스키, 히데그쿠티, 치보르에게 공로 훈장 중십자장을 줬다. 37년 전 반역자로 불렸던 사람이 국가의 훈장을 받은 날이었다.
2006년 11월 17일, 그리고 푸슈카시 아레나
2000년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은 뒤 그는 부다페스트의 병원에서 지냈다. 치료비가 불어나자 레알 마드리드와 디스테파노가 돈을 모았다. 2002년 4월 1일, 그의 75번째 생일에 1950년대의 황금의 팀이 영광을 쌓은 네프슈타디온이 푸슈카시 페렌츠 경기장(Puskás Ferenc Stadion)으로 이름을 바꿨다. 아내 에르제베트는 날마다 병원을 찾았다. 2006년 9월 폐렴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간 그는 11월 17일 아침 일곱 시에 숨을 거뒀다. 일흔아홉이었다. 황금의 팀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로시치와 부잔스키 예뇌(Buzánszky Jenő; 도로그와 헝가리의 오른쪽 풀백, 1925-2015) 두 명뿐이었다.
12월 9일 헝가리 정부는 국가 애도의 날을 선포하고 그를 국가의 명예로 장례했다. 관은 그의 이름이 붙은 경기장을 떠나 영웅 광장(Hősök tere; 부다페스트의 국가 기념 광장)에서 군의 예를 받았고, 성 이슈트반 대성당(Szent István-bazilika; 부다페스트의 가톨릭 대성당)의 지하 묘소에 안장됐다. 국군은 그를 준장으로 추서했다. 혼베드는 10번을 영구 결번으로 남겼다. 레알 마드리드는 2000년 루이스 피구(Luís Filipe Madeira Caeiro Figo; 레알 마드리드와 포르투갈의 윙어, 1972-)에게 10번을 주며 그 번호가 푸슈카시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일러 줬다고 전한다.

그의 이름은 그 뒤로 더 자주 불렸다. 2009년 FIFA는 한 해 동안 가장 아름다운 골을 넣은 선수에게 주는 상을 만들고 그의 이름을 붙였다. 국내에서는 FIFA 푸스카스상(FIFA Puskás Award)으로 더 익숙한 이름이다. 2019년 11월 옛 경기장 자리에 6만 7,000석 규모의 푸슈카시 아레나가 문을 열었고, 2024년 11월 25일 웸블리의 6-3 기념일에는 그 옆에 푸슈카시 박물관이 개관했다. 2026년 5월 30일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도 그 경기장에서 열렸다.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일곱 골을 넣은 사람의 이름 아래에서 유럽 챔피언이 가려진 셈이다. 오부더의 광장에는 정장 차림으로 아이들에게 공을 보여 주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직접 그 도시를 걷고 싶다면 부다페스트 축구 여행 10선이 길잡이가 된다.
역대 클럽·국대 기록
키슈페슈트 · 부다페스트 혼베드1943-1956리그 349경기 · 358골
레알 마드리드 CF1958-1966262경기 · 242골
헝가리 대표팀1945-195685경기 · 84골
스페인 대표팀1961-19624경기 · 0골키슈페슈트·혼베드는 헝가리 1부 리그 기록이며, 컵과 유러피언컵을 더한 전 대회 기준으로는 367경기 380골로 적는 자료가 많고 집계마다 차이가 있다. 레알 마드리드는 구단 공식 기록의 공식전 합계이며, 그 가운데 라리가는 180경기 156골, 유러피언컵은 39경기 35골이다. 헝가리 대표팀 85경기에는 헝가리 축구 협회가 2002년 공식 A매치로 인정한 1952년 모스크바 선발과의 원정 두 경기와 1956년 레바논전이 들어 있다. 스페인 대표팀 네 경기는 1961년 월드컵 예선 모로코전과 1962년 월드컵 본선 세 경기다. 문장은 푸슈카시가 뛰던 시기의 것이다. 혼베드는 1950년부터 쓴 BHSE 문장, 헝가리 대표팀은 1949년부터 1956년까지 셔츠에 단 헝가리 인민공화국 국장이다.
역대 등번호
클럽
| 소속팀 | 확인 기간 | 등번호 |
|---|---|---|
| 부다페스트 혼베드 SE | 1943-1956년 경기 자료 | 10 |
| 레알 마드리드 CF | 1958-1966년 경기 자료 | 10 |
국가대표팀
| 대표팀 | 확인 대회·기간 | 등번호 |
|---|---|---|
| 헝가리 | 1945-1956년 경기 자료 | 10 |
| 헝가리 | 1954 FIFA 월드컵 | 10 |
| 스페인 | 1962 FIFA 월드컵 | 14 |
푸슈카시의 시대에는 시즌 전체에 고정된 선수 번호가 아니라 그날 선 자리에 따라 1번부터 11번을 다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인사이드 레프트의 번호가 10번이어서 혼베드와 레알 마드리드, 헝가리 대표팀에서 그는 대부분 10번을 달았다. 혼베드는 그를 기려 10번을 영구 결번으로 남겼다. 월드컵 번호는 대회 공식 선수 명단 기준이며, 1962년 칠레 월드컵 스페인 명단에서는 22명에게 고정 번호를 주는 규정에 따라 14번을 받았다.
대표 우승 경력
우승: 1949-50, 1950(가을 리그), 1952, 1954, 1955
우승: 1960-61, 1961-62, 1962-63, 1963-64, 1964-65
우승: 1961-62
우승: 1958-59, 1959-60, 1965-66
준우승: 1961-62, 1963-64
우승: 1960
준우승: 1954년
금메달: 1952년 헬싱키
우승: 1947년
우승: 1948-53 대회
푸슈카시 페렌츠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헝가리 인민공화국 공로 훈장 · 5등급Magyar Népköztársasági Érdemrend, V. fokozat · 1951년
헝가리 노동 훈장Munka Érdemrend · 1953년 웸블리 승리 뒤
헝가리 공화국 공로 훈장 · 중십자장Magyar Köztársasági Érdemrend középkeresztje · 1993년 웸블리 6-3 40주년
- 레알 마드리드 CF 축구 레전드구단 공식 사이트 「축구 레전드」 등재
- 발롱도르1956년 4위 · 1959년 7위 · 1960년 2위 · 1961년 5위 · 1965년 공동 13위
- 유러피언컵 득점왕1959-60 시즌 12골 · 1961-62 시즌 7골(공동) · 1963-64 시즌 7골(공동)
- 센트럴 유러피언 인터내셔널컵 득점왕1948-53 대회 10골
- 넴제티 버이노크샤그 I 득점왕1947-48 시즌 50골 · 1949-50 시즌 31골 · 1950년 가을 25골 · 1953년 27골
- 트로페오 피치치라리가 최다 득점 선수에게 주는 상1959-60 시즌 25골 · 1960-61 시즌 28골 · 1962-63 시즌 26골 · 1963-64 시즌 21골
- FIFA 월드컵 역대 올스타 팀1994년
- FIFA 100국제축구연맹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펠레가 선정한 125인의 축구선수2004년
- 골든 풋 레전드모나코 챔피언스 프롬나드에 발자국을 남기는 상2006년
- 월드 사커 20세기 위대한 선수 100인영국 축구 월간지 『월드 사커』 독자 투표1999년 · 7위
- 월드 사커 올해의 세계 베스트 111960 · 1961 · 1962 · 1963년
- IFFHS 헝가리 역대 드림팀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선정2021년
- 헝가리 올해의 축구 선수1950년
- 부다페스트 혼베드 영구 결번10번
오늘날 푸슈카시 페렌츠는 어떻게 평가받는가
1994년 FIFA가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정리한 역대 월드컵 올스타 팀의 공격진은 가린샤(Manuel Francisco dos Santos; 보타포구와 브라질의 오른쪽 윙어, 1933-1983), 펠레, 그리고 푸슈카시였다. 공격수 세 자리 가운데 월드컵 우승이 없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1999년 IFFHS의 20세기 투표에서는 세계 6위, 유럽 4위였고, 같은 해 영국 『월드 사커』 독자 투표에서는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크라위프, 프란츠 베켄바워, 미셸 플라티니, 디스테파노에 이어 7위였다. 디스테파노와의 차이는 4점이었다. 2006년 『가디언』의 데이비드 레이시는 자신의 역대 다섯 명에 그를 넣으며 전후 시대 최고의 선수라 해도 무리가 없다고 썼다.
레알 마드리드 안에서는 디스테파노와 한 묶음으로 기억된다. 디스테파노가 공격을 설계하고 경기 전체를 달렸다면, 푸슈카시는 그 설계가 끝나는 자리에서 왼발로 마침표를 찍었다. 두 사람이 함께 뛴 1958년부터 1964년까지 레알 마드리드는 유러피언컵 결승에 네 번 올랐다. 구단 공식 사이트는 지금도 그를 베르나베우를 밟은 가장 좋은 왼발(La mejor pierna izquierda que ha pisado el Bernabéu)이라 소개한다. 삥이FC가 고른 레알 마드리드 CF 역대 베스트 11과 저승사자 군단 베스트 11에도 그의 자리가 있다.
헝가리에서 그는 축구 선수 이상의 이름이다. 2001년 『넴제티 스포르트』 독자들은 그를 20세기 최고의 헝가리 스포츠인으로 뽑았고, 2004년 그는 국가의 스포츠인(A Nemzet Sportolója; 헝가리 정부가 원로 스포츠인에게 주는 최고 칭호) 칭호를 받았다. 1953년의 6-3은 지금도 헝가리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날로 남아 있고, 그 경기의 주장 이름이 국가 경기장의 간판에 걸려 있다. 잉글랜드에서도 그 이름의 무게는 같다. 그가 웸블리에서 보여 준 축구는 그린우드 같은 다음 세대 지도자들이 영국 축구의 훈련과 전술을 바꾸게 만든 출발점이었다.
후대의 평가가 그의 결함을 지우지는 않는다. 그는 1954년 결승에 다친 발목으로 나서겠다고 고집해 동료를 밀어냈고, 패배 뒤에는 증거 없이 상대를 약물로 몰아 6년 뒤 사과문을 써야 했다. 스페인 대표팀에서는 끝내 골을 넣지 못했다. 그래도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매년 FIFA는 한 해 가장 아름다운 골에 그의 이름을 붙여 시상한다. 축구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부르는 이름이 그의 것이다. 오늘날 팬들은 그를 역대 가장 위대한 헝가리 선수이자 가장 위대한 레알 마드리드 선수 가운데 한 명으로 기억한다.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왼발 공격수를 한 명만 꼽아야 한다면, 삥이FC의 답은 푸슈카시 페렌츠다.
참고 자료
- PUSKAS.COM(유족이 운영하는 공식 사이트): 경기 기록: 1943년 12월 5일 너지바러드 원정 데뷔와 사흘 뒤 디오슈죄르전 첫 골, 경기별 상대·득점·관중.
- 레알 마드리드 공식 사이트: Ferenc Puskas Biro, Se cumplen 68 años del debut de Puskas(2026년 9월 14일): 공식전 262경기 242골, 1958년 9월 14일 라스팔마스전 데뷔, 입단 당시 팬들의 반응과 「베르나베우를 밟은 가장 좋은 왼발」이라는 구단의 말.
- RSSSF: Ferenc Puskás, Goals in International Matches: 헝가리 85경기 84골과 스페인 4경기, 2002년 헝가리 축구 협회가 추가로 인정한 세 경기.
- RSSSF: Ferenc Puskás Biró, Goals in European Cups, European Cup 1961-62, European Cup 1963-64: 유러피언컵 경기별 득점 시간과 공동 득점왕 두 시즌.
- 넴제티 스포르트: God created him to be a football player(2006년 12월 5일): 헝가리 1부 리그 349경기 358골. 전 대회 기준 수치는 자료마다 갈린다.
- 브라이언 글랜빌: Ferenc Puskas obituary(『가디언』, 2006년 11월 18일): 제프리 그린의 『더 타임스』 문장, 1954년 결승 출전 고집, 1962년 결승 유니폼 이야기와 본인의 부인, 칠레 월드컵의 기억.
- 데이비드 레이시: Puskas, a man who changed the game for ever(『가디언』, 2006년 11월 18일 재수록본): 헨토와 그린우드의 말, 자서전 『헝가리의 주장』의 두 대목, 1956년 전사 오보, 1981년 원로 경기 해트트릭.
- UEFA: Men from Mars become Magical Magyars: 어니 테일러를 본 푸슈카시의 농담, 보비 롭슨의 회고, 50경기 42승 7무 1패.
- UEFA: 21 June 1955, a momentous decision, Sports Journalists' Association: The headline that prompted the European Cup: 울버햄프턴-혼베드전 뒤 가브리엘 아노의 반박과 제안.
- The Courier: The greatest-ever European Cup final very nearly didn't take place: 독일 축구 협회의 경기 금지와 푸슈카시의 서면 사과.
- 텔렉스: Guttmann Béla(2026년 5월 24일): 1948년 구트만이 키슈페슈트를 떠난 경위.
- 헝가리 총리실 인사 공고(1993년): 웸블리 6-3 40주년을 맞아 푸슈카시와 황금의 팀 동료들에게 수여한 공화국 공로 훈장 중십자장. 1951년 공로 훈장과 1953년 노동 훈장은 『넵스포르트』 1951년 1월 29일 자와 1953년 12월 10일 자 3면 수훈 기사.
- RSSSF: European Footballer of the Year, IFFHS' Century Elections, World Soccer's Players of the Century, World All-Time Teams, Golden Foot: Legends, Hungary Today: IFFHS Hungary all-time dream team: 발롱도르 순위와 개인 수상, 20세기 투표의 점수.
- Logopedia: Budapest Honvéd FC, 위키미디어 공용: Coat of arms of Hungary (1949-1956): 혼베드(1950년판)와 헝가리 대표팀(1949-1956년) 당시 문장.
- 본문 사진: Fortepan(1949년 키슈페슈트, 1952년 헬싱키, 1953년 웸블리, 1956년 로마, 1982년 부다페스트, CC BY-SA 3.0) · ETH 취리히 도서관 Comet Photo(1954년 베른 결승, CC BY-SA 4.0) ·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 Anefo(1956년 이탈리아, 1962년 암스테르담, 1971년 스히폴, CC0) · 『엘 그라피코』(1961년 캄 노우, 퍼블릭 도메인) · StarDeg(묘판, C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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