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 LEGEND
니우통 산투스(Nílton Santos)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역대 최고의 레프트백, 브라질 축구사 올 타임 넘버원
보타포구 한 팀에서 16년, 셀레상의 왼쪽에서 두 번의 월드컵 우승. 수비수가 하프라인을 넘지 않던 시대에 공을 몰고 올라간 브라질의 백과사전 니우통 산투스. 1954년 베른의 퇴장, 1958년 오스트리아전 골, 1962년 스페인전의 한 걸음까지. 클럽·국대 기록과 역대 등번호, 우승과 개인 수상을 정리한다.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남미축구연맹Confederación Sudamericana de Fútbol (스페인어)Confederação Sul-Americana de Futebol (포르투갈어)
니우통 산투스는 브라질 축구사가 낳은 올 타임 넘버원 왼쪽 풀백이자, 풀백이라는 자리의 뜻을 바꾼 사람이다. 1948년부터 1964년까지 보타포구 한 팀에서 723경기를 뛰었고, 셀레상의 왼쪽에서 1958년과 1962년 두 번 세계 정상에 섰다. 수비수가 하프라인을 넘으면 꾸중을 듣던 시대에 그는 공을 몰고 상대 골문까지 올라갔고, 1958년 월드컵 첫 경기에서 그렇게 골을 넣었다. 브라질 사람들은 축구에 관해 모르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그를 백과사전이라 불렀다. 오른쪽의 자우마 산투스와 짝을 이룬 양쪽 풀백은 브라질이 두 대회 연속 월드컵을 든 바탕이었고, 1998년 전 세계 기자 250명이 뽑은 20세기 세계 베스트 11의 왼쪽 풀백도 그였다. 유럽에 자친토 파케티가 있다면 남미에는 그가 있었고, 그보다 먼저 그가 있었다. 필자에게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프트백은 니우통 산투스다.
깔끔한 태클. 페널티 지역 앞에서 미끄러져 들어가 공만 걷어 낸다.
- 깔끔한 태클. 페널티 지역 앞에서 미끄러져 들어가 공만 걷어 낸다.
- 탈압박 후 패스. 달려드는 상대를 벗겨 내고 곧바로 동료에게 공을 건넨다.
- 볼 끊어먹은 뒤 오버래핑 후 슈팅. 하프라인 부근에서 공을 끊고 상대 골문 앞까지 올라가 직접 슈팅으로 끝낸다.
- 골문 앞 집중력. 골키퍼가 쓰러진 사이 골대 옆으로 돌아 들어가 골라인 앞의 공을 걷어 낸다.
- 미친 침착함. 측면에서 상대가 따라붙어도 서두르지 않고 공을 지킨다.
삥이FC 니우통 산투스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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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전 세계 축구사의 역대 베스트 11을 짜면 왼쪽 풀백 자리에서 니우통 산투스는 파올로 말디니(Paolo Maldini; AC 밀란과 이탈리아의 수비수, 1968-), 자친토 파케티와 경합한다. 브라질 역대 베스트 11로 좁히면 상대는 호베르투 카를루스(Roberto Carlos da Silva Rocha; 레알 마드리드와 브라질의 왼쪽 풀백, 1973-) 한 명이다. 그 뒤로 주니오르(Leovegildo Lins da Gama Júnior; 플라멩구와 브라질의 왼쪽 풀백, 1954-), 브랑쿠(Cláudio Ibrahim Vaz Leal; 브라질의 왼쪽 풀백, 1964-), 마르셀루(Marcelo Vieira da Silva Júnior; 레알 마드리드와 브라질의 왼쪽 풀백, 1988-)까지 브라질은 세계 최고의 왼쪽 풀백을 끊임없이 낳았다. 그 계보의 첫 줄에 선 사람이 니우통 산투스다. 플라멩구의 주니오르는 훗날 니우통 산투스와 비교되는 데 대해, 자신이 그 백과사전의 주머니 사전만 돼도 기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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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케티가 그란데 인테르의 왼쪽에서 오버래핑으로 수많은 공격 포인트를 만든 공격하는 풀백의 선구자였다면, 남미에서 그 역할을 먼저, 그리고 더 이른 시대에 한 선수가 니우통 산투스다. 공격수로 축구를 시작한 그는 두 발로 드리블하고 두 발로 슈팅했다. 1950년대 풀백의 일은 상대 윙어를 따라다니며 공을 걷어 내는 것이었고, 하프라인을 넘는 수비수는 감독의 꾸지람을 들었다. 그는 그 선을 넘어 다녔다. 브라질 언론은 지금도 그를 브라질 최초의 공격하는 왼쪽 풀백으로 부른다. 1958년 월드컵에서 그의 질주를 바로 앞에서 본 왼쪽 윙어 마리우 자갈루(Mário Jorge Lobo Zagallo; 보타포구와 브라질의 왼쪽 윙어, 훗날 1970년 우승 감독, 1931-2024)의 말이 그 의미를 가장 짧게 요약한다.
그때부터 풀백들은 다시는 예전처럼 뛰지 않았다.
A partir dali, os laterais nunca mais jogaram do mesmo jeito.
- 마리우 자갈루, 2013년 니우통 산투스의 1958년 오스트리아전 질주를 돌아보며. 폴랴프레스 탄생 100주년 기사(2025년 5월 16일)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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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우통 산투스는 선수 생활 내내 보타포구 한 팀에서만 뛰며 11골을, 셀레상 일원으로 A매치 3골을 넣었다. 그 가운데 1958 FIFA 월드컵 첫 경기 오스트리아전에서 하프라인을 넘어 달려 올라가 직접 넣은 골이 그의 커리어 백미다. 브라질은 그 경기를 3-0으로 이겼고, 나머지 두 골은 주제 아우타피니(José João Altafini; 당시 등록명 마졸라 Mazzola,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공격수, 1938-)가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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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대표팀의 양쪽 풀백은 오른쪽 자우마 산투스(Djalma Santos, 본명 Dejalma dos Santos; 포르투게자·파우메이라스와 브라질의 오른쪽 풀백, 1929-2013)와 왼쪽 니우통 산투스였다. 두 사람은 성만 같을 뿐 혈연관계가 없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이미 2번과 3번을 나눠 달았고,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는 여섯 경기를 모두 함께 선발로 뛰며 두 번째 우승을 지켰다. 브라질 축구가 공격하는 풀백을 하나의 전통으로 갖게 된 출발점이 이 두 사람이다. 왼쪽 계보는 니우통 산투스에서 호베르투 카를루스로, 오른쪽 계보는 자우마 산투스에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Carlos Alberto Torres; 1970년 브라질 월드컵 우승 주장·오른쪽 풀백, 1944-2016)를 거쳐 카푸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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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그가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1956년 웸블리에서는 마흔한 살의 스탠리 매슈스(Stanley Matthews; 블랙풀과 잉글랜드의 오른쪽 윙어, 1956년 초대 발롱도르, 1915-2000)에게 측면을 내줬고, 보타포구 훈련장에서는 스무 살의 가린샤(Manuel Francisco dos Santos; 보타포구와 브라질의 오른쪽 윙어, 1933-1983)에게 제쳐졌다. 1960년 영국 『월드 사커』의 에릭 배티(Eric Batty; 『월드 사커』에 해마다 세계 베스트 11을 발표한 영국의 축구 기자)는 그를 세계 베스트 11에 넣으면서도 전성기는 지났다고 적었다. 영국의 축구 분석 사이트 피타고라스 인 부츠(Pythagoras in Boots; 영국의 축구 분석 블로그)는 남은 영상으로 보면 그가 공을 가졌을 때 자우마 산투스보다 덜 매끄럽고 덜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당대 최고의 윙어들 앞에서는 그도 고전했다. 훗날 말디니가 당대 최고의 윙어들을 상대로 좀처럼 흔들리지 않은 것과 견주면 차이가 보인다.
결국 니우통 산투스는 완벽한 왼쪽 풀백이라기보다 균형 잡힌 선구자형 왼쪽 풀백이었다. 마누엘 노이어(Manuel Neuer; 바이언 뮌헨과 독일의 골키퍼, 1986-)는 스위퍼형 골키퍼를 처음 한 선수는 아니지만 그 역할을 가장 완벽하게 해내 상징이 됐다. 니우통 산투스의 위대함은 그 반대편에 있다. 그는 공격하는 풀백이라는 자리를 처음 연 사람이다. 이 점이 그가 유럽의 파케티보다 덜 이야기되는 이유일 수 있다. 그러나 선구자의 무게를 아는 사람에게 레프트백이라는 직업의 첫 장은 니우통 산투스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니우통 산투스 프로필
브라질 연방 공화국República Federativa do Brasil
- 본명
- Nilton dos Santos
- 등록명
- 니우통 산투스(Nílton Santos)
- 출생
- 1925년 5월 16일
- 출생지
- 브라질 히우지자네이루 일랴두고베르나도르
- 사망
- 2013년 11월 27일 · 향년 88세
- 사망지
- 브라질 히우지자네이루
- 신장
- 183cm
- 대표 국적
- 브라질
- 포지션
- 레프트백 · 센터백
- 주요 등번호
- 3번 · 6번 · 12번
- 선수 경력
- 1948-1964년 · 보타포구 원클럽맨
- 대표팀
- 1949-1962년 · 75경기 3골
- 별명
- 백과사전(A Enciclopédia)
- 주발
- 양발
1948년, 섬에서 온 스물셋의 공격수
니우통 산투스는 1925년 5월 16일 히우지자네이루 과나바라만의 섬 일랴두고베르나도르(Ilha do Governador; 히우지자네이루 북쪽 과나바라만의 섬, 지금의 갈레앙 국제공항 자리)에서 일곱 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그 섬에서 자랐다. 열네 살에 섬의 아마추어 구단 플레셰이라스(Flexeiras; 일랴두고베르나도르의 동네 구단)에서 공을 찼고, 동네 들판 축구에서는 늘 공격수였다. 그를 프로 구단으로 이끈 길은 군 복무였다. 공군에서 복무하던 그의 공 다루는 솜씨를 한 장교가 눈여겨봤고, 1948년 그는 스물셋의 나이로 보타포구(Botafogo de Futebol e Regatas; 히우지자네이루의 축구단, 1942년 두 구단의 합병으로 지금의 이름이 됐다)의 문을 두드렸다.
처음부터 수비수는 아니었다. 센터 포워드로 테스트를 받았고, 훈련 도중 수비 자리에 세워졌다. 처음 세운 자리가 중앙 수비였는지 오른쪽 풀백이었는지는 자료마다 다르게 전해진다. 미신과 기행으로 이름난 구단 회장 카를리투 호샤(Carlito Rocha; 1940-50년대 보타포구 회장)가 자기 모자를 높이 쳐들고 갓 들어온 청년에게 머리로 받아 보라고 시켰다는 이야기도 원로 해설가들 사이에 전한다. 그가 왼쪽 풀백으로 자리를 잡은 뒤에도 공격수의 발은 그대로 남았다. 1948년 3월 데뷔한 그해 캄페오나투 카리오카(Campeonato Carioca; 히우지자네이루 주 선수권) 첫 경기에서 보타포구는 캉투두히우를 4-2로 이겼고, 시즌이 끝났을 때 보타포구는 1935년 이후 13년 만의 주 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다. 입단 첫해에 첫 우승이었다.

그 발이 문제가 된 적도 있다. 1957년 『조르나우 두스 스포르치스』(Jornal dos Sports; 히우지자네이루의 스포츠 일간지)의 칼럼에 따르면 1952년 보타포구 감독 시우비우 피릴루(Sylvio Pirillo; 브라질의 공격수 출신 감독)는 니우통 산투스를 미드필드로 올렸다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만큼 그는 보타포구의 왼쪽 수비에서 뺄 수 없는 사람이 돼 있었다. 1955년 같은 신문은 그를 도밍구스 다기아(Domingos da Guia; 1930년대 브라질의 전설적인 수비수, 1912-2000) 이후 가장 위대한 브라질 수비수라고 썼다.
백과사전이라 불린 왼쪽 풀백
니우통 산투스의 별명은 백과사전(A Enciclopédia do Futebol; 축구 백과사전)이다. 축구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고, 수비와 드리블과 패스와 슈팅까지 그라운드 위의 모든 일을 할 줄 안다는 뜻이었다. 이 이름을 누가 처음 붙였는지는 여러 사람이 저마다 자기라고 주장해 분명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라디우 글로부의 중계 캐스터 와우지르 아마라우(Waldir Amaral; 브라질의 라디오 축구 중계 캐스터)가 경기 때마다 그 이름을 부르면서 별명이 브라질 전역에 굳어졌다는 것이다.

브라질 축구 문장의 거장 아르만두 노게이라(Armando Nogueira; 브라질의 축구 칼럼니스트·방송인, 1927-2010)는 그가 작은 페널티 지역 언저리를 굴러다니는 거칠고 모난 공을 거의 언제나 벨벳처럼 부드럽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고 썼다. 니우통 산투스 자신은 1962년 노게이라에게 그 비결을 한 문장으로 말했다.
나는 이 세상 모든 공과 어릴 때부터 친구다.
Sou amigo de infância de todas as bolas deste mundo.
- 니우통 산투스, 1962년 칼럼니스트 아르만두 노게이라에게. 폴랴프레스 탄생 100주년 기사(2025년 5월 16일) 재인용
1950년 마라카낭,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준우승
1949년 4월 17일 상파울루에서 열린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콜롬비아전에서 니우통 산투스는 처음 셀레상 유니폼을 입었다. 브라질은 5-0으로 이겼고, 그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듬해 브라질은 자국에서 월드컵을 열었다. 니우통 산투스는 명단에 들었지만 월드컵 본선에서는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감독 플라비우 코스타(Flávio Rodrigues Costa; 1950년 브라질 대표팀 감독, 1906-1999)가 앞코가 단단하지 않은 그의 축구화를 나무라자 나는 공을 발끝으로 차지 않는다(Eu não dou bico na bola)고 받아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950년 7월 16일, 20만 가까운 관중이 들어찬 마라카낭에서 브라질은 우루과이에 1-2로 졌다. 마라카낭의 비극이다. 니우통 산투스는 그날을 벤치에서 봤다. 훗날 그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억했다.
침묵에 빠진 마라카낭을 보는 건 정말 슬픈 일이었다.
Foi muito triste ver o Maracanã silencioso.
- 니우통 산투스, 1950년 월드컵 결승을 돌아보며. 브라질 포털 테하의 생애 기사 재인용
그는 그 패배를 슬픔으로만 기억하지 않았다. 1998년에 낸 자서전에서 그는 1950년의 패배가 플라비우 코스타라는 신화를 무너뜨렸고, 그것이 결국 브라질 축구를 도왔다고 썼다. 그리고 그 결승에서 선심을 본 사람이 잉글랜드의 아서 엘리스(Arthur Ellis; 잉글랜드의 축구 심판, 1914-1999)였다. 4년 뒤 니우통 산투스는 그 심판을 다시 만난다.
1952년 산티아고에서 1953년 리마까지
1952년 3월과 4월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파나메리카 챔피언십(Campeonato Panamericano de Fútbol; 아메리카 대륙 대표팀 대회)에서 니우통 산투스는 다섯 경기를 모두 뛰었고, 브라질은 정상에 올랐다. 마라카낭의 상처가 아물기 전에 거둔 우승이었다. 그해 5월 1일 노동절 기념식에서 대통령 제툴리우 바르가스(Getúlio Dornelles Vargas; 브라질 대통령, 1882-1954)가 직접 그의 가슴에 메달을 달았다.

이듬해 페루 리마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그는 A매치 첫 골을 넣었다. 1953년 3월 27일 리그 마지막 파라과이전, 전반 12분 선제골이었다. 브라질은 그 경기를 1-2로 졌고, 닷새 뒤 우승 결정전에서도 파라과이에 무릎을 꿇었다. 그 대회의 이야기는 1953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 에리베르토 에레라에 있다.
1953년, 처음 보는 오른쪽 윙어
1953년 보타포구 훈련장에 다리가 휜 스무 살의 오른쪽 윙어가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왔다. 가린샤였다. 그를 막은 사람이 대표팀 왼쪽 풀백 니우통 산투스였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가린샤가 이틀의 훈련 끝에 계약했다는 것, 그리고 니우통 산투스가 그렇게 쉽게 자신을 제친 윙어는 처음이었다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보타포구와 CBF의 공식 기록은 그가 구단에 이 선수를 당장 잡으라고 권했다고 적는다. 적으로 만나느니 같은 편에 두는 편이 낫다는 이유였다. 첫 공이 그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갔다는 대목은 후대의 각색이 섞여 전해진다.
가린샤는 자신이 제친 수비수를 이름과 상관없이 모두 주앙(João; 흔한 남자 이름으로, 가린샤가 상대 수비수를 통틀어 부르던 말)이라 불렀다. 니우통 산투스는 그 첫 번째 주앙이었다. 반세기 가까이 지나 쓴 자서전에서 그는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첫 번째 주앙이었다는 게 정말 자랑스럽다.
Tenho muito orgulho de ter sido seu primeiro João.
- 니우통 산투스, 자서전 『나의 공, 나의 삶(Minha Bola, Minha Vida)』(1998). 가린샤를 처음 만난 1953년 입단 테스트를 돌아보며

둘은 평생의 친구가 됐다. 니우통 산투스는 가린샤의 결혼식 들러리였고, 두 사람은 서로를 콤파드리(compadre; 대부와 친부모처럼 가족 같은 사이가 서로를 부르는 말)라 불렀다. 술을 달고 산 가린샤도 니우통 산투스가 옆에 있을 때는 물 한 잔을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니우통 산투스는 자서전 첫머리를 이 친구에게 바쳤다. 나의 콤파드리이자 친구, 내게 두 번의 월드컵을 안겨 준 가린샤에게(Ao meu compadre e amigo Garrincha que me deu duas Copas). 가린샤가 1983년 세상을 떠난 뒤 니우통 산투스는 해마다 그의 생일이면 초를 켰다.
1954년 6월 27일 베른, 보지크와 함께 나간 그라운드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니우통 산투스는 처음 월드컵 본선 그라운드를 밟았다. 등번호는 3번, 반대편 2번은 자우마 산투스였다. 브라질은 멕시코를 5-0으로 이기고 유고슬라비아와 1-1로 비긴 뒤 8강에서 헝가리를 만났다. 6월 27일 베른의 반크도르프 경기장, 주심은 4년 전 마라카낭의 선심 아서 엘리스였다.
비가 내린 그 경기는 축구보다 싸움으로 기억된다. 헝가리가 3-2로 앞선 후반 26분, 니우통 산투스가 보지크 요제프(Bozsik József; 부다페스트 혼베드와 헝가리의 라이트 하프, 1925-1978)에게 반칙을 했고 두 사람은 주먹을 주고받았다. 엘리스는 두 사람을 함께 내보냈다. 8분 뒤 움베르투 토지(Humberto Barbosa Tozzi; 파우메이라스와 브라질의 센터 포워드, 1934-1980)도 퇴장당했다. 헝가리가 4-2로 이겼고, 싸움은 종료 휘슬 뒤 라커룸 통로까지 이어졌다. 헝가리 감독 세베시 구스타프(Sebes Gusztáv; 1950년대 헝가리 대표팀 감독, 1906-1986)는 얼굴을 네 바늘 꿰맸다. 이 경기가 베른의 전투(Battle of Berne)다. 니우통 산투스는 훗날 그 대회를 한마디로 정리했다. 난장판(uma bagunça geral)이었다는 것이다.
이 대회의 브라질 수비진과 베른의 경기 장면은 1954 FIFA 월드컵 베스트 11에 정리했다. 삥이FC는 그 대회의 풀백으로도 니우통 산투스를 골랐다.
1956년 5월 9일 웸블리, 주장 완장을 찬 서른 살
1956년 봄 브라질은 유럽 원정에 나섰고, 5월 9일 웸블리에서 잉글랜드를 만났다. 10만 관중 앞에서 브라질의 주장 완장을 찬 사람이 니우통 산투스였다. 그는 경기 전 잉글랜드 주장 빌리 라이트(William Ambrose Wright;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와 잉글랜드의 수비수, 1924-1994)와 악수를 나눴다.
그날 그의 맞은편에는 마흔한 살의 매슈스가 있었다. 잉글랜드 대표팀에 다시 불려 온 노장 윙어는 오른쪽 측면을 지배했고, 잉글랜드는 4-2로 이겼다. 영국의 축구 기자 브라이언 글랜빌(Brian Glanville; 영국의 축구 기자·저술가)은 매슈스를 니우통 산투스를 곤란하게 만든 몇 안 되는 윙어로 기억했다. 진 경기 뒤의 니우통 산투스는 품위로 기억된다. 영국 축구 잡지 『웬 새터데이 컴스』가 전하는 장면에 따르면 그는 종료 휘슬이 울리자 매슈스에게 다가가 미스터 매슈스, 당신이 왕이다(Mister Matthews, you are the king)라고 말했다. 그해 12월 매슈스는 첫 발롱도르를 받았다. 니우통 산투스는 평생 매슈스를 높이 샀다.

1957년 12월 22일 마라카낭, 보타포구의 6-2
보타포구는 1948년 이후 9년 동안 주 선수권을 들지 못했다. 1957년 감독을 맡은 사람은 훗날 브라질 대표팀 감독이 되는 기자 출신 주앙 살다냐(João Alves Jobim Saldanha; 보타포구 감독, 훗날 브라질 대표팀 감독, 1917-1990)였다. 그해 12월 22일 마라카낭에서 열린 주 선수권 결승에서 보타포구는 플루미넨시를 6-2로 무너뜨렸다. 관중은 8만 9,100명이었다. 센터 포워드 파울리뉴 발렌칭(Paulinho Valentim; 보타포구의 센터 포워드)이 다섯 골을 넣었고, 오른쪽에는 가린샤, 가운데에는 지지(Waldyr Pereira, Didi; 보타포구·레알 마드리드와 브라질의 미드필더, 1928-2001)가 있었다. 포백의 왼쪽 끝은 니우통 산투스였다.
그 팀의 뒷줄과 앞줄은 반년 뒤 스웨덴에서 그대로 브라질 대표팀의 뼈대가 된다. 1958년 6월 29일 스톡홀름 결승의 브라질 선발 열한 명 가운데 니우통 산투스, 가린샤, 지지 세 사람이 보타포구 선수였다. 그해 플라멩구에서 뛴 자갈루도 월드컵이 끝난 뒤 보타포구로 옮겨 왔다.
1958년 6월 8일 우데발라, 하프라인을 넘어간 서른셋
1958년 스웨덴 월드컵을 앞두고 니우통 산투스는 서른세 살이었다. 상파울루 쪽에서는 코린치앙스의 젊은 왼쪽 풀백 오헤쿠(Waldemar Rodrigues Martins, Oreco; 코린치앙스와 브라질의 왼쪽 풀백, 1932-1985)를 주전으로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대표팀 훈련에서 니우통 산투스가 가린샤에게 거듭 뚫리자 지지에게 저 친구 좀 말려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래도 비센치 페올라(Vicente Feola; 1958년 브라질 대표팀 감독, 1909-1975) 감독은 마지막 평가전들을 거치며 왼쪽을 니우통 산투스에게 맡겼다.
6월 8일 우데발라의 림네르스발렌 경기장, 첫 경기 상대는 오스트리아였다. 전반에 마졸라가 선제골을 넣었다. 후반이 시작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니우통 산투스가 자기 진영에서 공을 잡고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프라인을 넘자 벤치의 페올라가 돌아오라고 소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페널티 지역까지 들어간 그의 슈팅이 골문을 열었다. 혼자 끝까지 몰고 갔다는 기록도, 마졸라와 공을 주고받은 뒤였다는 기록도 있다. 2-0. 브라질은 마졸라의 두 번째 골을 더해 3-0으로 이겼다. 외친 말이 정확히 무엇이었든, 페올라가 하프라인을 넘은 그를 꾸짖었다는 데에는 기록이 대체로 일치한다.

하프라인을 넘는 풀백을 꾸짖던 감독 앞에서 풀백이 직접 공을 몰고 올라가 넣은 골이었다. 브라질은 두 번째 경기에서 잉글랜드와 0-0으로 비겼다. 소련과의 세 번째 경기를 앞두고 선수단이 움직였다. FIFA가 전하는 이야기로는 지지가 니우통 산투스에게 뭔가 해야 한다고 속삭였고, 그날 저녁 지지와 니우통 산투스, 주장 벨리니(Hilderaldo Luiz Bellini; 바스쿠 다가마와 브라질의 센터백, 1958년 우승 주장, 1930-2014)가 페올라를 찾아가 미드필더 지투(José Ely de Miranda, Zito; 산투스와 브라질의 미드필더, 1932-2015)를 넣어 달라고 했다. 소련전에서 브라질은 지투와 함께 가린샤와 열일곱 살의 펠레를 처음 선발로 세웠고, 그 셋은 결승까지 빠지지 않았다. 세 선수가 펠레와 가린샤까지 넣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널리 퍼져 있지만, 브라질의 축구사가들은 그 결정을 페올라와 팀 의사 이우통 고슬링의 몫으로 본다.

브라질은 소련, 웨일스, 프랑스를 차례로 넘었고, 6월 29일 스톡홀름 로순다 경기장에서 개최국 스웨덴을 5-2로 꺾었다. 브라질의 첫 월드컵이었다. 결승에서 오른쪽 풀백은 그 대회 처음 선발로 나선 자우마 산투스였다. 니우통 산투스는 여섯 경기를 모두 뛰었고, 대회가 끝난 뒤 스웨덴 축구 협회가 각국 전문가의 답을 모아 1959년 1월 발표한 대회 올스타 팀에도 왼쪽 풀백으로 이름을 올렸다. 삥이FC가 고른 그해의 열한 명은 1958 FIFA 월드컵 베스트 11에 있다.

1962년 6월 6일 비냐델마르, 페널티 지역 밖으로 내디딘 한 걸음
1962년 칠레 월드컵 때 니우통 산투스는 서른일곱이었다. 브라질은 조별 리그 두 번째 경기에서 펠레를 부상으로 잃었고, 세 번째 경기 스페인전에서 탈락 위기에 몰렸다. 6월 6일 비냐델마르의 사우살리토 경기장, 전반 35분 아델라르도(Adelardo Rodríguez Sánchez;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스페인의 미드필더, 1939-)의 골로 스페인이 앞섰다.
그리고 스페인 주장 엔리케 코야르(Enrique Collar Monterrubio;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스페인의 공격수, 1934-2025)가 브라질 페널티 지역 안으로 파고들었다. 니우통 산투스가 그를 넘어뜨렸다. 반칙은 페널티 지역 안에서 일어났다. 니우통 산투스는 넘어진 코야르 옆에서 곧바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뎌 페널티 지역 선 밖에 섰다. 멀리서 달려온 칠레의 세르히오 부스타만테(Sergio Bustamante; 칠레의 축구 심판) 주심은 그가 선 자리를 보고 페널티 지역 밖의 프리킥을 선언했다.
페널티킥이었다. 나는 선 위로 한 걸음 내디뎠다.
Fiz pênalti. Estiquei uma passada pra cima da linha.
- 니우통 산투스, 1962년 스페인전의 반칙을 돌아보며. 『조르나우 지 브라질리아』 칼럼 「Com a mão no tri」(2022년 12월 17일) 재인용
그는 그 장면을 순전한 꾀(pura malandragem)라고 불렀고, 두 번째 우승은 그 한 걸음에서 이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페널티킥 위기를 넘긴 브라질은 후반 27분과 41분 펠레 대신 들어간 아마릴두(Amarildo Tavares da Silveira; 보타포구와 브라질의 공격수, 1940-)의 두 골로 2-1 역전승을 거뒀다. 아마릴두 역시 보타포구 선수였다.

그 대회를 지켜본 브라질의 극작가이자 축구 칼럼니스트 넬송 호드리게스(Nelson Rodrigues; 브라질의 극작가·축구 칼럼니스트, 1912-1980)는 대표팀을 미치광이들의 대표팀이라 부르는 칼럼을 썼다. 가린샤와 자갈루를 하나씩 불러낸 그 글에서 서른일곱의 왼쪽 풀백에게 바친 문장은 한 줄이었다.
그리고 니우통 산투스, 지극히 건강한 그의 영원함.
E Nilton Santos, com a sua salubérrima eternidade.
- 넬송 호드리게스, 1962년 칠레 월드컵 때 쓴 칼럼 「미치광이들의 대표팀(O escrete de loucos)」
브라질은 잉글랜드, 칠레를 넘어 6월 17일 산티아고 결승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3-1로 이겼다. 니우통 산투스와 자우마 산투스는 여섯 경기를 모두 함께 선발로 뛰었다. 서른일곱 살의 니우통 산투스에게 그 결승은 75번째이자 마지막 A매치였다.
보타포구의 16년, 1964년까지 한 팀
니우통 산투스가 뛴 시기의 보타포구는 구단 역사상 가장 화려했다. 가린샤, 지지, 자갈루, 아마릴두, 그리고 뒤의 니우통 산투스. 보타포구는 1957년에 이어 1961년과 1962년 주 선수권을 연달아 차지했고 1962년과 1964년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Torneio Rio-São Paulo; 히우지자네이루와 상파울루 두 주의 강호가 겨룬 대회)를 들었다.
1962년 12월 15일 마라카낭에는 15만 8,994명이 들어찼다. 주 선수권 마지막 경기, 승점 1점 앞선 플라멩구와의 맞대결이었다. 이겨야만 우승이었다. 가린샤가 두 골을 넣었고 보타포구는 3-0으로 이겼다. 그날 왼쪽 풀백 자리에는 젊은 힐두(Rildo da Costa Menezes; 보타포구와 브라질의 왼쪽 풀백, 1942-2021)가 섰고, 서른일곱의 니우통 산투스는 중앙 수비를 맡았다. 주앙 살다냐와 젠칠 카르도주(Gentil Cardoso; 브라질의 축구 감독) 같은 감독들은 경력 후반의 그를 자주 페널티 지역 앞 중앙 수비수로 썼다. 그라운드를 가장 잘 읽는 사람을 가장 가운데에 둔 것이다.

그는 1964년 서른아홉에 은퇴했다. 마지막 프로 경기는 그해 12월 8만 8,000명 앞에서 열린 플라멩구전이었다. 보타포구는 1-0으로 이겼고, 라이벌 플라멩구는 경기장에서 그에게 기념 트로피를 건넸다. 16년 동안 723경기, 그는 다른 구단의 유니폼을 입은 적이 없다. 그 자신의 말로는 이렇다. 나는 한 클럽에서만 축구를 한 사람이다(Sou um cara que só jogou futebol em um clube). 그리고 이렇게도 말했다. 나는 늘 아마추어의 마음을 가진 프로였다(Sempre fui um profissional com espírito de amador).
역대 클럽·국대 기록
보타포구 FR1948-1964723경기 · 11골
브라질 대표팀1949-196275경기 · 3골보타포구는 구단 공식 기록이며, 자료에 따라 718경기에서 729경기까지 다르게 적는다. 대표팀은 RSSSF가 정리한 A매치 기준이며, 세 골은 1953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파라과이전, 1958년 월드컵 오스트리아전, 1962년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스 파라과이전이다. CBF와 보타포구는 비공식 경기를 더해 86경기로 적는다. 문장은 니우통 산투스가 뛰던 시기의 것이다. 대표팀 문장은 당시 대표팀을 운영한 브라질 스포츠 연맹(CBD, 1979년 지금의 CBF로 바뀌었다)이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쓴 판이다.
역대 등번호
클럽
| 소속팀 | 확인 기간 | 등번호 |
|---|---|---|
| 보타포구 FR | 1948-1964 | 자료 미등록 |
국가대표팀
| 대표팀 | 확인 대회 | 등번호 |
|---|---|---|
| 브라질 | 1950 FIFA 월드컵 | 고정 번호 없음 · 출전 없음 |
| 브라질 | 1954 FIFA 월드컵 | 3 |
| 브라질 | 1958 FIFA 월드컵 | 12 |
| 브라질 | 1962 FIFA 월드컵 | 6 |
1950년대 브라질 구단은 고정 등번호 없이 그날 맡은 포지션에 따라 경기마다 번호를 달았고, 보타포구 시절의 번호는 시즌별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국가대표 번호는 각 월드컵 공식 선수 명단 기준이다. 1950년 대회는 선수별 고정 번호가 없었고, 니우통 산투스는 명단에 들었지만 경기에 나서지 않았다.
대표 우승 경력
우승: 1958년, 1962년
준우승: 1950년
8강: 1954년
우승: 1949년
준우승: 1953년, 1957년, 1959년(아르헨티나 대회)
우승: 1952년
우승: 1956년, 1960년
우승: 1950년
우승: 1950년, 1955년, 1961년, 1962년
우승: 1955년, 1961년
우승: 1950년(히우지자네이루 선발)
우승: 1948년, 1957년, 1961년, 1962년
우승: 1962년, 1964년(산투스와 공동)
니우통 산투스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 브라질 축구 박물관 「바로크 천사들」 전시상파울루 축구 박물관이 고른 브라질 축구의 영웅들2008년
- 1958 FIFA 월드컵 올스타 팀대회 뒤 스웨덴 축구 협회가 발표한 비공식 선정1959년 1월 발표
- IFFHS 선정 20세기 브라질 최고의 선수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선정9위
- RSSSF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1999년 이후 발표된 역대 선수 순위 열두 개를 모은 종합 순위50위
- 월드 사커 올해의 세계 베스트 111960 · 1961년
- 20세기 세계 베스트 11전 세계 기자 250명 선정1998년 · 왼쪽 풀백
- FIFA 100국제축구연맹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펠레가 선정한 125인의 축구선수2004년
- 골든 풋 레전드모나코 챔피언스 프롬나드에 발자국을 남기는 상2009년
은퇴 뒤의 백과사전, 아이들과 카니발
은퇴한 니우통 산투스는 봉수세수와 갈리시아, 비토리아의 지휘봉을 잡았지만 감독으로서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그는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축구 학교를 열고 일간지 『코헤이우 브라질리엔시』에 칼럼을 썼으며, 1996년 5월 연방구 의회는 그에게 브라질리아 명예 시민 칭호를 줬다. 토칸칭스주의 주도 파우마스에서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축구 교실을 꾸렸다. 파우마스는 2000년 시립 경기장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1998년에는 자서전 『나의 공, 나의 삶』(Minha Bola, Minha Vida; 그리푸스 출판사)을 냈다.
2002년 히우지자네이루 카니발에서 삼바 학교 빌라이자베우(Unidos de Vila Isabel; 히우지자네이루의 삼바 학교)는 그 해의 주제를 니우통 산투스로 정했다. 제목은 영광의 니우통 산투스, 그의 공, 그의 삶, 우리의 빌라(O Glorioso Nilton Santos… Sua Bola, Sua Vida, Nossa Vila)였다. 자서전의 제목을 그대로 받은 행진에 그는 아내와 함께 올랐고, 훗날 그 밤을 인생에서 가장 큰 감동으로 꼽았다.
보타포구는 그의 생일을 구단의 날로 삼았다. 5월 16일 보타포구의 날(Dia do Botafogo)은 2007년 7월 히우지자네이루 주 법으로 정해졌다. 같은 해 그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2009년 보타포구가 홈으로 쓰는 엔제냥(Engenhão; 2007년 개장한 히우지자네이루의 올림픽 경기장) 서쪽 관중석 앞에 그의 청동상이 섰다.

2013년 11월 27일, 그리고 니우통 산투스 경기장
2013년 브라질은 1958년 우승의 수비진을 차례로 잃었다. 7월에 자우마 산투스가, 8월에 골키퍼 질마르(Gylmar dos Santos Neves; 코린치앙스·산투스와 브라질의 골키퍼, 1930-2013)가 세상을 떠났다. 11월 27일 니우통 산투스가 히우지자네이루 보타포구 지구의 요양 병원에서 폐 감염으로 숨을 거뒀다. 여든여덟이었다. 1950년 월드컵 명단에서 마지막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날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Dilma Vana Rousseff; 브라질 대통령, 1947-)는 이렇게 적었다.
축구는 오늘 그의 백과사전, 1958년과 1962년 세계 챔피언인 위대한 풀백 니우통 산투스를 잃었다.
O futebol perdeu hoje a sua 'enciclopédia', Nilton Santos, o grande lateral campeão mundial de 1958 e 1962.
-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2013년 11월 27일 니우통 산투스 별세 당일 트위터
시신은 제네라우 세베리아누(General Severiano; 보타포구 본부가 있는 거리)의 구단 본부 대회의실에 안치됐다. 1970년 월드컵 우승 멤버 자이르지뉴(Jair Ventura Filho, Jairzinho; 보타포구와 브라질의 오른쪽 윙어, 1944-)는 관 앞에서 그를 삼촌이라 불렀다. 1958년 함께 우승한 자갈루는 그가 진짜 백과사전이었다고 말했고(Era uma verdadeira enciclopédia), 1962년 펠레 대신 뛰어 두 골을 넣은 아마릴두는 보타포구 시절을 이렇게 돌아봤다.
나는 한 젊은이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축구 대학을 다녔다.
Eu tive a melhor universidade de futebol que um jovem poderia ter.
- 아마릴두, 2013년 11월 28일 니우통 산투스 조문 자리에서. 『이스타당 지 상파울루』 보도
보타포구 전 회장 카를루스 아우구스투 몬테네그루의 말은 더 짧았다.
그는 보타포구의 문장을 가슴속에 품고 다녔다.
Ele levava o escudo do Botafogo dentro do coração dele.
- 카를루스 아우구스투 몬테네그루, 보타포구 전 회장. 2013년 11월 28일 니우통 산투스 조문 자리에서
이백 명 남짓한 사람들이 제네라우 세베리아누에서 상주앙바치스타 묘지까지 운구 행렬을 따라 걸었다. 그는 보타포구의 깃발에 덮여 구단 응원가 속에 묻혔다.
보타포구는 그가 떠난 뒤 엔제냥을 니우통 산투스 경기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2015년 구단이 홈경기에서 먼저 이름을 바꿔 썼고, 2017년 2월 공식 명칭이 니우통 산투스 올림픽 경기장(Estádio Olímpico Nilton Santos)으로 바뀌었다. 2023년에는 손녀가 구단이 그 이름을 앞으로 10년 더 쓰도록 허락했다. 경기장 남쪽 매표소 벽에는 CBD 문장이 달린 노란 셀레상 유니폼을 입은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오늘날 니우통 산투스는 어떻게 평가받는가
1998년 6월 전 세계 기자 250명이 뽑은 20세기 세계 베스트 11에서 왼쪽 풀백은 니우통 산투스였다. 레프 야신(Лев Яшин; 디나모 모스크바와 소련의 골키퍼, 1929-1990)이 골문을 지키고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프란츠 베켄바워, 바비 무어와 함께 수비진을 이뤘다. 그 투표의 남미 수비수 후보는 다니엘 파사레야(Daniel Alberto Passarella; 아르헨티나의 센터백, 1953-), 엘리아스 피게로아(Elías Ricardo Figueroa Brander; 칠레의 센터백, 1946-),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그리고 니우통 산투스 넷뿐이었다. 20세기 축구를 돌아본 기자들이 왼쪽 풀백 한 자리에 세운 이름이 그였다. 그 명단의 오른쪽 풀백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니우통 산투스의 조문 자리에서, 열아홉 살 때 보타포구와 플루미넨시의 경기에서 처음 만난 그와 훗날 20세기 최고의 풀백으로 함께 뽑혀 한 무대에 섰던 날을 떠올렸다.
2020년 《프랑스 풋볼》(France Football; 발롱도르를 주관하는 프랑스 축구 전문지)의 발롱도르 드림팀 투표는 다른 그림을 그렸다. 왼쪽 풀백 부문에서 말디니가 603점, 호베르투 카를루스가 562점으로 1·2위였고, 파울 브라이트너(Paul Breitner; 바이언 뮌헨과 서독의 왼쪽 풀백·미드필더, 1951-), 파케티, 안드레아스 브레메(Andreas Brehme; 인테르와 서독의 왼쪽 풀백, 1960-2024), 뤼트 크롤(Ruud Krol; 아약스와 네덜란드의 수비수, 1949-), 마르셀루가 뒤를 이었다. 니우통 산투스는 주니오르와 함께 96점으로 공동 8위였다. 오른쪽 풀백 부문의 자우마 산투스도 7위에 머물렀다. 필자는 그 표를 존중하되, 그 투표가 텔레비전으로 본 축구의 기억에 기울어 있다고 본다. 영상이 거의 남지 않은 1950년대의 왼쪽 풀백은 이름이 낯선 만큼 점수를 잃었다.
점수를 매기는 쪽이 바뀌어도 그의 자리는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공을 가졌을 때의 매끄러움에서 그를 자우마 산투스보다 낮게 본 피타고라스 인 부츠도 역대 레프트백 순위에서는 말디니와 안드레아스 브레메 다음, 3위에 그를 둔다. 브라질 안에서 호베르투 카를루스와 1위를 다투고, 세계에서 말디니·파케티와 맨 앞줄을 다투는 자리. 반세기가 넘도록 그 자리를 지킨 왼쪽 풀백은 많지 않다. 브라질의 축구 칼럼 「지 칼카냐르」(De Calcanhar; 브라질의 축구사 칼럼)는 그를 아마도 축구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왼쪽 풀백(talvez o lateral esquerdo mais decisivo da história do futebol)이라 불렀다.
니우통 산투스는 공격하는 풀백이라는 생각 자체를 그라운드에 처음 올린 사람이다. 하프라인을 넘지 말라는 시대에 넘었고, 그래서 꾸중을 들었고, 그 길로 월드컵 골을 넣었다.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왼발과 마르셀루의 드리블, 그리고 오늘날 모든 오버래핑 풀백의 출발점을 찾아 올라가면 보타포구의 왼쪽에 닿는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백을 한 명만 골라야 한다면, 삥이FC의 답은 니우통 산투스다.
참고 자료
- 브라질리아 연방구 의회 입법령 제74호(1996년 5월 20일): 본명 Nilton dos Santos와 브라질리아 명예 시민 칭호.
- 보타포구 공식 사이트: Ídolos, Nilton Santos: 출생, 보타포구 723경기 11골, 우승 경력, 가린샤 입단 일화, 1962년 스페인전 반칙.
- 보타포구 공식 사이트: Estádio Nilton Santos: 2015년 경기장 이름 변경과 2017년 공식 명칭.
- CBF: #TBTdaAmarelinha, Nilton Santos, a Enciclopédia do Futebol: 백과사전이라는 별명, 1950년 무출전, 대표팀 우승 목록과 CBF 집계 86경기.
- RSSSF: Nílton Santos, International Appearances: A매치 75경기 3골 전체 목록, 데뷔전과 마지막 경기, 대회별 출전.
- RSSSF: 1958 World Cup, 1962 World Cup: 오스트리아전과 스페인전의 득점자·주심·관중, 결승 선발 명단.
- RSSSF: Taça Oswaldo Cruz, Taça do Atlântico, Taça Bernardo O'Higgins: 대표팀 친선 대회의 연도별 결과와 니우통 산투스의 출전 경기.
- The Guardian: Nílton Santos obituary(브라이언 글랜빌, 2013년 11월 28일): 일랴두고베르나도르 출생, 1948년 데뷔, 1954년 베른의 퇴장, 1956년 웸블리의 매슈스.
- FIFA: The Battle of Berne, 위키백과: Battle of Berne: 퇴장 시각, 주심 아서 엘리스, 라커룸 충돌과 세베시 구스타프의 부상, 1954년 등번호.
- 테하: Nilton Santos, a Enciclopédia que reinventou o futebol: 공격수 출신, 1950년 마라카낭의 회고, 1954년 대회 회고, 페올라의 외침, 스페인전 반칙에 대한 본인의 말, 은퇴 뒤의 삶.
- 조르나우 지 브라질리아: Com a mão no tri(2022년 12월 17일), TNH1: Espanhol que enfrentou o Brasil em 1962: 1962년 스페인전 반칙 뒤 한 걸음과 주심 부스타만테.
- Exame: Nilton Santos, a Enciclopédia, morre aos 88 anos: 오스트리아전 골 장면과 페올라의 꾸중, 알츠하이머 진단.
- 조르나우 두 브라질: Há 30 anos o futebol perdia Garrincha, Goal: The angel with bent legs, 트리벨라: Há 35 anos perdemos Garrincha: 1953년 가린샤 입단 테스트와 1958년 대표팀 훈련 일화.
- 조벵 판: Nilton Santos estaria fazendo cem anos: 브라질 최초의 공격하는 왼쪽 풀백이라는 평가, 가린샤 결혼식 증인과 해마다 켠 초.
- 조르나우 두 브라질: Com ídolos de 70, corpo de Nilton Santos é velado no Botafogo(2013년 11월 28일): 제네라우 세베리아누의 조문, 자이르지뉴와 몬테네그루 전 회장의 말.
- Goal 브라질: Dia do Botafogo: 5월 16일 보타포구의 날과 2007년 주 법.
- Goal 브라질: Botafogo e Flamengo: 1964년 플라멩구전 마지막 경기와 기념 트로피.
- ESPN 데포르테스: Por qué el estadio de Botafogo se llama Nilton Santos, 이타치아이아: Família autoriza e Botafogo seguirá usando a marca Nilton Santos: 경기장 이름의 경과와 2023년 손녀의 사용 허락.
- 포르투갈어 위키백과: Nílton Santos: 플레셰이라스와 공군 복무, 1948년 첫 경기, 시우비우 피릴루와 『조르나우 두스 스포르치스』 칼럼, 파우마스 경기장과 2009년 동상.
- 위키백과: World Team of the 20th Century: 1998년 기자 250명 투표와 남미 수비수 후보.
- Goal 이탈리아: Pallone d'Oro Dream Team, la classifica completa, 위키백과: Ballon d'Or Dream Team: 2020년 왼쪽·오른쪽 풀백 부문 득표.
- When Saturday Comes: 1955-56, 웸블리 스타디움: England v Brazil: 1956년 5월 9일 잉글랜드 4-2 브라질과 매슈스.
- Beyond the Last Man: Eric Batty's World XIs, the sixties: 1960년 월드 사커 세계 베스트 11과 배티의 평.
- 피타고라스 인 부츠: Djalma Santos rating, Djalma Santos, the wall of Brazil, Greatest Left Backs: 자우마 산투스와의 비교와 역대 레프트백 3위.
- RSSSF: IFFHS' Century Elections, RSSSF: The Best of the Best, BBC: Pele's list of the greatest, Golden Foot: Legends, Futpop Clube: Museu do Futebol, Anjos Barrocos: 개인 수상.
- 위키백과: 1958 FIFA World Cup Group 4, 1962 FIFA World Cup Group 3: 대회별 등번호.
- Logopedia: 보타포구(1948-1960년)와 CBD 대표팀(1958-1962년) 당시 문장.
- 폴랴프레스: Nilton Santos, nascido há cem anos(2025년 5월 16일): 자갈루의 2013년 회고, 아르만두 노게이라에게 한 말, 와우지르 아마라우와 백과사전이라는 별명, 자서전 속 1950년 평가, 빌라이자베우 카니발, 아마추어의 마음이라는 말.
- 넬송 호드리게스: O escrete de loucos(1962) 재수록본: 1962년 월드컵 칼럼의 니우통 산투스 문장.
- EFDeportes: Garrincha na literatura esportiva do futebol: 자서전 『나의 공, 나의 삶』의 헌사와 첫 번째 주앙 문장.
- 디아리우 두 히우: Nilton Santos 100 anos, 이모르타이스 두 푸치보우: Nilton Santos: 아르만두 노게이라의 평, 별명의 유래, 1950년 축구화 일화.
- 트리벨라: Ídolo, filme que conta história de Nilton Santos(2015년 11월 26일): 카를리투 호샤 회장의 모자 일화와 주니오르의 주머니 사전 발언.
- 트리벨라: As histórias de duas grandes partidas entre Flu e Botafogo: 1957년 12월 22일 주 선수권 결승 보타포구 6-2 플루미넨시의 관중·득점·선발 명단.
- RSSSF 브라질: Campeonato Carioca 1962, 조르나우 지 브라질리아: Pisa na fulô: 1962년 12월 15일 보타포구 3-0 플라멩구와 중앙 수비로 옮긴 니우통 산투스, 1964년 마지막 경기.
- FIFA: Brazil's prince and king of '58: 1958년 소련전을 앞두고 지지·니우통 산투스·벨리니가 페올라에게 지투를 청한 이야기.
- 지 칼카냐르: O homem que inventou o 4-3-3: 1962년 자갈루의 4-3-3과 니우통 산투스에 대한 평가.
- Exame: Dilma lamenta morte de Nilton Santos, 이스타당 지 상파울루 기사 재수록(Vermelho): 대통령의 추모 글, 자갈루·아마릴두·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조문 발언, 운구 행렬과 안장.
- 본문 사진: 브라질 국립문서보관소 『코헤이우 다 마냥』 사진 문고(퍼블릭 도메인, 위키미디어 공용; 1956년 셀레상·보타포구, 보타포구 상반신, 1952년 바르가스, 1958년 우승 행진, 1962년 지지, 1960년대 보타포구) · Scanpix(1958년 결승 단체 사진, 스웨덴 퍼블릭 도메인) · 『엘 그라피코』 2062호(1959년, 아르헨티나 퍼블릭 도메인) · Tito Martins(청동상, CC BY-SA 3.0) · Solon26125(벽화, CC BY-SA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