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 LEGEND
보지크 요제프(Bozsik József)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역대 수비형 미드필더 TOP5, 헝가리의 축구 천재
헝가리 황금의 팀의 라이트 하프이자 피를로·샤비 알론소·로드리의 대선배 보지크 요제프. 푸슈카시와 한 골목에서 자란 소년, 국회의원이 된 축구 선수, 베른의 전투와 웸블리의 한 골, 1956년 고국으로 돌아간 선택과 헝가리 최초의 100경기. 혼베드 한 팀에서 보낸 20년의 기록과 등번호, 우승과 수상을 정리한다.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유럽축구연맹Union des Associations Européennes de Football
보지크 요제프(Bozsik József; 헝가리는 성을 앞에 쓴다. 영어권에서는 József Bozsik)는 축구 역사상 가장 완벽에 가까웠던 팀으로 꼽히는 1950년대 헝가리 황금의 팀의 라이트 하프다. 지금 말로 하면 3선의 수비형 미드필더이고, 안드레아 피를로와 샤비 알론소, 로드리 같은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대선배다. 열한 살에 동네 구단 키슈페슈트에 들어가 1962년 은퇴할 때까지 부다페스트 혼베드 한 팀에서만 뛰었고, 헝가리 선수로는 처음 A매치 100경기를 넘겼다. 같은 골목에서 자란 푸슈카시 페렌츠, 코치시 샨도르, 치보르 졸탄, 그로시치 줄러와 클럽과 대표팀 모두에서 호흡을 맞췄다. 헝가리 사람들은 그를 「축구 천재」(futball-zsenialitás)라 불렀다.
삥이FC 보지크 요제프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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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형 미드필더의 계보를 거꾸로 올라가 보면 로드리와 세르히오 부스케츠, 샤비 알론소와 피를로를 지나 한 사람의 라이트 하프에 닿는다. 센터백 라인보다 반 칸 앞, 하프(half; 수비진과 공격진 사이 절반의 자리라는 뜻)의 자리에서 경기를 설계하던 보지크다. 필자는 그를 수비형 미드필더 계보의 다섯 손가락 안에 둔다. 20세기 말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 International Federation of Football History & Statistics, 축구 기록과 역사를 집계하는 단체)의 유럽 세기의 선수 투표에서 헝가리 선수만 추리면 그는 푸슈카시 페렌츠(667점)와 코치시 샨도르(54점) 다음으로 41점을 받아 3위였다. 1910년대의 득점왕 실로시 임레와 1967년 발롱도르 수상자 알베르트 플로리안보다 앞선 자리이고, 공격수가 아닌 헝가리 선수로는 가장 높은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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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르투로 비달이나 라자 나잉골란처럼 압도적인 활동량으로 그라운드를 덮는 유형이 아니었다. 발도 빠르지 않았다. 대신 위치를 잡는 감각과 공간을 읽는 눈, 정확한 패스가 있었다. 최후방에서 공을 받아 상대 페널티 지역을 겨냥하거나 최전방 공격수에게 공을 대 주는 일, 피를로와 샤비 알론소가 훗날 한 일을 1950년대에 먼저 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기술과 끝없는 아이디어, 전술을 수행하는 기민함, 인상적일 만큼 가벼운 움직임. 헝가리 축구가 그를 축구 천재라 부른 이유다. 2025년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를 낸 헝가리 우정청은 그를 두고 전성기에 세계 최고의 공격형 하프로 꼽혔다고 적었다. 황금의 팀이 공격수 다섯에 히데그쿠티 난도르(Hidegkuti Nándor; MTK와 헝가리의 센터 포워드, 1922-2002)까지 내려와 뛰는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뒤에서 공을 돌리고 길을 열어 주는 보지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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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원클럽맨이었다. 1936년 키슈페슈트 AC 유소년 팀에 들어가 1943년 1군에 데뷔했고, 구단이 군대 팀 부다페스트 혼베드로 바뀐 뒤에도 떠나지 않았다. 1962년 은퇴할 때까지 리그에서 447경기를 뛰었다. 혼베드는 그와 함께 리그를 다섯 번 들었고, 1959년에는 중부 유럽 클럽 대회 미트로파컵을 차지했다. 1986년 구단은 홈구장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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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에서는 1947년부터 1962년까지 101경기에 나서 11골을 넣었다. 헝가리 선수로는 처음 A매치 100경기를 넘긴 사람이고, 2016년 골키퍼 키라이 가보르(Király Gábor; 헝가리의 골키퍼, 1976-)가 넘어설 때까지 반세기 넘게 헝가리 최다 출전 기록이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 1953년 웸블리의 6-3, 1954년 월드컵 준우승이 모두 그의 경력 안에 있다. 마지막 101번째 경기에서도 골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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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애에는 공산 헝가리의 명암이 함께 있다. 정권은 가장 인기 있는 축구 선수를 선전에 쓰려고 그를 국회의원으로 만들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처형을 앞둔 동료를 구하려다 실패했다. 1956년 혁명 뒤 푸슈카시와 코치시, 치보르는 서방에 남았지만 그는 고국으로 돌아갔고, 그 대가로 계급과 훈장, 의원직을 빼앗겼다. 그래도 그는 헝가리에 남아 대표팀의 100경기를 채웠다. 필자에게 보지크 요제프는 황금의 팀이 흩어진 뒤에도 그 팀의 축구를 헝가리 땅에 남겨 둔 사람이다.

보지크 요제프 프로필
- 본명
- Bozsik József
- 등록명
- 보지크 요제프(Bozsik II)
- 출생
- 1925년 11월 28일
- 출생지
- 헝가리 키슈페슈트(지금의 부다페스트)
- 사망
- 1978년 5월 31일 · 향년 52세
- 사망지
- 헝가리 부다페스트
- 대표 국적
- 헝가리
- 포지션
- 라이트 하프 · 수비형 미드필더
- 주요 등번호
- 5번
- 선수 경력
- 1943-1962년 · 혼베드 원클럽맨
- 대표팀
- 1947-1962년 · 101경기 11골
- 감독 경력
- 혼베드 1966-1967년 · 헝가리 대표팀 1974년
- 별명
- 추추(Cucu; 할머니가 붙여 준 애칭) · 축구 천재
1925년 11월 28일 키슈페슈트, 옆집의 푸슈카시
보지크는 1925년 11월 28일 부다페스트 남동쪽 노동자 동네 키슈페슈트(Kispest; 1950년 부다페스트에 편입된 동네)에서 태어났다. 할머니가 붙여 준 추추라는 애칭으로 불린 아이는 동네 공터에서 한 살 반 아래의 옆집 아이와 하루 종일 공을 찼다. 그 아이가 푸슈카시였다. 두 사람은 같은 셰그퓌 거리의 학교를 다녔고, 2008년 키슈페슈트 구청은 그 학교 벽에 두 사람의 얼굴을 새긴 동판을 달았다. 「셰그퓌 거리 학교의 학생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자랑스럽다.」

1936년 열한 살의 보지크가 키슈페슈트 AC 유소년 팀에 들어가자, 아직 나이가 모자란 푸슈카시도 가짜 이름으로 따라 들어갔다. 형 보지크 이슈트반(Bozsik István)도 같은 구단의 선수였다. 그래서 헝가리 스포츠 신문은 그를 보지크 2세(Bozsik II)라고 적었다. 1943년 열일곱의 그는 버셔시를 상대로 1군에 데뷔했다. 푸슈카시가 데뷔한 바로 그해였다.

1947년 8월 17일, 대표팀의 5번
1947년 8월 17일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발칸컵 불가리아전에서 스물한 살의 보지크는 처음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다. 헝가리는 9-0으로 이겼다. 이듬해 바르샤바의 폴란드전에서 첫 골을 넣었다. 1949년 키슈페슈트가 국방부 소관의 혼베드가 되자 그도 군인이 됐고, 1950년 대위 계급을 받았다.
정권은 그를 다른 곳에도 썼다. 1950년 그는 사퇴한 의원의 자리를 이어받아 국회의원이 됐고, 1953년 선거에서도 앞자리를 받았다. 경기장 밖의 정치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1951년 우이페슈트의 국가대표 수비수 쉬치 샨도르(Szűcs Sándor; 우이페슈트와 헝가리의 수비수, 1921-1951)가 사형을 선고받았다. 대표팀에서 19경기를 뛴 센터백이었다. 그는 1950년 여름 팀 전지훈련지에서 만난 가수 코바치 에르지(Kovács Erzsi; 헝가리의 가요 가수, 1928-2014)와 사랑에 빠졌고, 둘 다 혼인한 몸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국경을 넘으려다 비밀경찰이 놓은 함정에 걸려 너지틸러이에서 붙잡혔다. 내무부 소속이던 쉬치는 공개조차 되지 않은 법에 따라 근무용 무기를 지닌 채 망명하려 했다는 죄로 사형을, 코바치는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보지크는 푸슈카시, 서서 페렌츠(Szusza Ferenc; 우이페슈트와 헝가리의 공격수, 1923-2006)와 함께 국방부 장관 파르커시 미하이(Farkas Mihály; 헝가리 국방부 장관, 1904-1965)를 찾아가 선처를 구했다. 그들이 닿았을 때 판결은 이미 집행된 뒤였다. 1951년 6월 4일, 부다페스트 줘르슈코치 거리 감옥의 안뜰이었다. 재판은 비밀이었고, 처형 사실은 체제가 무너질 때까지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판결은 1989년에야 무효가 됐다. 대표팀의 동료가 국가의 손에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본 국회의원, 그것이 황금의 팀 시절 보지크가 선 자리였다.
1952년 8월 2일 헬싱키, 금메달의 하프백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보지크는 다섯 경기를 모두 뛰었다. 튀르키예와의 8강에서는 직접 골을 넣었다. 8월 2일 결승에서 헝가리는 유고슬라비아를 2-0으로 꺾고 금메달을 땄다. 그해 헝가리 축구 협회는 그를 올해의 선수로 골랐다.

피아노를 나르는 사람과 피아노를 치는 사람
황금의 팀에는 하프백이 둘 있었다. 오른쪽의 보지크와 왼쪽의 저커리아시 요제프(Zakariás József; 부더포크·MTK와 헝가리의 레프트 하프, 1924-1971)다. 감독 셰베시 구스타브(Sebes Gusztáv; 1950년대 헝가리 대표팀 감독, 1906-1986)는 6번 저커리아시를 수비 셋 바로 앞에 세워 상대의 공격을 끊게 했고, 5번 보지크에게는 앞으로 나가 경기를 만들 자유를 줬다. 헝가리 사람들은 저커리아시 같은 선수를 피아노를 나르는 사람이라 부른다. 피아노를 친 사람은 푸슈카시와 보지크였다. 디디에 데샹이 지네딘 지단의 프랑스에서, 은골로 캉테가 라니에리의 레스터에서 한 일을 저커리아시가 했고, 보지크는 그 덕에 피를로처럼 뛸 수 있었다.
그 분업은 1953년 5월 로마에서 먼저 결과를 냈다. 새 올림픽 경기장의 첫 경기에서 헝가리는 이탈리아를 3-0으로 꺾고 1948년에 시작한 센트럴 유러피언 인터내셔널컵(Central European International Cup; 중부 유럽 다섯 나라가 리그 방식으로 겨룬 국가대표 대회)을 확정했다. 보지크는 그 대회의 하프로 다섯 해 동안 헝가리의 중원을 지켰다.
1953년 11월 25일 웸블리, 후반의 다섯 번째 골
웸블리의 6-3은 그 분업으로 시작했다. 킥오프 45초 만에 저커리아시가 짧게 내준 공을 보지크가 받아 히데그쿠티에게 넘겼고, 히데그쿠티가 페널티 지역 앞에서 때려 1-0을 만들었다. 그날 그는 푸슈카시의 뒤, 오른쪽 하프의 자리에서 경기를 움직였다. 히데그쿠티가 미드필드로 내려오면 그가 한 칸 더 앞으로 나가 공을 받았고, 잉글랜드의 하프들은 누구를 따라가야 할지 몰랐다. 전반에 푸슈카시의 두 번째 골은 보지크의 프리킥에서 나왔고, 후반 초반에는 그가 직접 다섯 번째 골을 넣었다. 1954년 5월 부다페스트의 7-1 재대결에도 그가 있었다. 웸블리의 승리 직후인 1953년 12월, 정부는 그 경기의 선수들에게 노동 훈장을 줬다. 그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있다. 웸블리의 경기는 푸슈카시 페렌츠 편에, 그 팀이 어떻게 세계를 앞섰는지는 헝가리 황금의 팀과 토털 풋볼에 정리했다.
1954년 6월 27일 베른, 니우통 산투스와 함께 나간 그라운드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그는 다섯 경기를 모두 뛰었다. 비가 내린 8강 브라질전은 베른의 전투로 남았다. 헝가리가 앞선 후반, 브라질의 왼쪽 풀백 니우통 산투스와 주먹을 주고받은 그는 니우통 산투스와 함께 퇴장당했다. 국회의원인 대표 선수가 월드컵에서 퇴장당한 셈이다. 헝가리는 4-2로 이겼고, 싸움은 종료 휘슬 뒤 라커룸 통로까지 이어졌다. 감독 셰베시는 그 난투에서 얼굴을 네 바늘 꿰맸다. 보지크는 사흘 뒤 로잔에서 열린 우루과이와의 4강에도 나섰고, 헝가리는 연장 끝에 4-2로 이겼다.
7월 4일 결승에서 그의 일은 서독의 발터 형제를 막는 것이었다. 경기 시작 6분 만에 그가 서독 센터하프 리브리히의 패스를 끊어 코치시에게 찔렀고, 코치시의 슈팅이 막혀 흐른 공을 푸슈카시가 밀어 넣었다. 2분 뒤 치보르가 한 골을 더했다. 그러나 서독은 18분 만에 따라붙었고, 84분 헬무트 란의 골로 헝가리는 2-3으로 졌다. 1950년 5월부터 이어진 무패가 그 결승에서 끝났다. 그 결승의 장면은 1954 FIFA 월드컵 결승 서독 3-2 헝가리에 있다. 대회가 끝난 뒤 그는 대회 베스트 11의 하프로 뽑혔다. 삥이FC가 고른 1954 FIFA 월드컵 베스트 11에서도 그는 라이트 하프다.

1956년 겨울, 고국으로 돌아간 선택
1956년 10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혼베드는 유러피언컵 1라운드 아틀레틱 빌바오전을 치르러 서방에 나가 있었다. 11월 22일 빌바오에서 2-3으로 졌고, 부다페스트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12월 20일 브뤼셀의 헤이젤 경기장을 빌려 2차전을 치렀다. 3-3, 합계 5-6으로 탈락이었다. 선수단은 귀국을 미루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돌다 해를 넘겨 브라질까지 갔다. 헝가리 축구 협회가 허락하지 않은 원정이었다. 1957년 초 원정이 끝나고 빈으로 돌아왔을 때 선수들은 갈렸다. 푸슈카시와 코치시, 치보르는 서방에 남았고 보지크는 부다페스트로 돌아갔다. 돌아간 그를 기다린 것은 처벌이었다. 허가 없는 원정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그는 군 계급과 훈장을 빼앗겼고, 국회의원직도 내놓아야 했다. 그 시기 헝가리 선수들이 어떤 갈림길에 섰는지는 1956년 헝가리 혁명과 황금의 팀의 해체에 사료와 함께 적었다.

남은 그는 다시 대표팀의 중심이 됐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세 경기를 뛰었다. 헝가리는 웨일스와 1-1로 비기고 스웨덴에 1-2로 진 뒤 멕시코를 4-0으로 꺾었지만, 조 2위 결정전에서 다시 만난 웨일스에 1-2로 져 탈락했다. 4년 전 결승까지 갔던 팀에서 남은 사람은 보지크와 그로시치, 히데그쿠티 같은 몇 명뿐이었다. 푸슈카시가 떠난 대표팀에서 주장 완장은 그의 몫이 됐다. 그래도 그는 그 뒤로도 4년을 더 뛰었고, 1959년에는 티치 러요시(Tichy Lajos; 혼베드와 헝가리의 공격수, 1935-1999) 같은 젊은 선수들과 함께 혼베드에 미트로파컵(Mitropapokal; 중부 유럽 클럽 대회)을 안겼다. 그가 혼베드에서 든 마지막 트로피였다.

1961년 12월 23일 몬테비데오, 100번째 경기
1961년 겨울 헝가리 대표팀은 남아메리카 원정에 나섰다. 서른여섯의 보지크가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다. 12월 9일 산티아고에서 칠레에 1-5로 크게 졌고, 나흘 뒤 다시 만나 0-0으로 비겼다. 그리고 12월 23일 몬테비데오에서 우루과이와 1-1로 비겼다. 보지크의 100번째 A매치였다. 헝가리 선수가 대표팀에서 100경기를 뛴 것은 처음이었다.

1962년 4월 18일 부다페스트에서 다시 우루과이를 만났다. 서른여섯의 보지크는 그 경기에서 골을 넣었고, 그것이 101번째이자 마지막 A매치였다. 그해 그는 혼베드에서도 은퇴했다. 1956년 이전 황금의 팀에서 그와 함께 뛴 선수들이 대부분 대표팀을 떠난 뒤였다.

1978년 5월 31일, 그리고 보지크 경기장
은퇴한 그는 혼베드의 임원이 됐고, 1966년 1월부터 1967년 9월까지 감독으로 47경기를 지휘했다. 1974년에는 헝가리 대표팀 감독에 올랐지만 병 때문에 곧 물러났다. 1978년 5월 31일 그는 심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쉰둘이었다. 아르헨티나 월드컵이 개막하기 하루 전이었다. 그는 부다페스트의 퍼르커슈레트 묘지에 묻혔다.

1986년 혼베드는 키슈페슈트의 홈구장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1996년 헝가리 국방군은 1957년 빼앗았던 계급을 되돌려 그를 대령으로 추서했다. 2021년에는 옛 경기장 자리에 새 보지크 아레나가 문을 열었다. 그의 아들 보지크 페테르(Bozsik Péter; 헝가리의 미드필더 출신 감독, 1961-)는 2006년 헝가리 대표팀 감독이 됐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헝가리 대표팀을 맡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이름은 경기장보다 운동장에 더 많이 남았다. 2002년 헝가리 축구 협회는 여섯 살부터 열두 살 어린이를 위한 전국 유소년 육성 사업을 시작하며 보지크 프로그램(Bozsik-progra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5년 만에 멈췄던 이 사업은 2011년 6월 유소년 전체를 다루는 규모로 다시 시작했고, 지금도 헝가리 전역의 학교에서 일곱 살부터 열네 살 아이들이 일주일에 두 번 보지크의 이름이 붙은 수업으로 공을 찬다. 동네 공터에서 푸슈카시와 헝겊 공을 차던 소년의 이름이 헝가리 아이들의 첫 축구 수업이 된 셈이다. 키슈페슈트와 부다페스트는 그를 명예 시민으로 추서했다. 2025년 탄생 100주년에 헝가리 우정청은 그의 기념우표를 냈고, 그해 12월 2일 그의 이름이 붙은 경기장 앞에 조각가 유허 리하르드(Juha Richárd; 헝가리의 조각가)가 만든 실물 크기의 청동상이 섰다. 제막식에는 아들 페테르와 동생 러요시가 함께했다.
역대 클럽·국대 기록
키슈페슈트 · 부다페스트 혼베드1943-1962리그 447경기 · 33골
헝가리 대표팀1947-1962101경기 · 11골혼베드는 헝가리 1부 리그 기록이며, 전 대회를 더해 477경기로 적는 자료도 있다. 대표팀은 RSSSF가 정리한 A매치 기준이며, 헝가리 축구 협회가 2002년 공식 A매치로 인정한 1952년 모스크바 선발과의 두 경기와 1956년 레바논전이 들어 있다. 문장은 보지크가 뛰던 시기의 것이다. 혼베드는 1950년부터 쓴 BHSE 문장, 헝가리 대표팀은 그가 가장 오래 단 1949년부터 1956년까지의 인민공화국 국장이다.
역대 등번호
클럽
| 소속팀 | 확인 기간 | 등번호 |
|---|---|---|
| 부다페스트 혼베드 SE | 1943-1962년 경기 자료 | 5 |
국가대표팀
| 대표팀 | 확인 대회·기간 | 등번호 |
|---|---|---|
| 헝가리 | 1947-1962년 경기 자료 | 5 |
| 헝가리 | 1954 FIFA 월드컵 | 5 |
| 헝가리 | 1958 FIFA 월드컵 | 5 |
보지크의 시대에는 시즌 전체에 고정된 번호가 아니라 그날 선 자리에 따라 1번부터 11번을 다는 방식이었다. 헝가리는 골키퍼 1번 다음에 오른쪽 풀백 2번, 센터백 3번, 왼쪽 풀백 4번을 주고 라이트 하프에 5번, 레프트 하프에 6번을 줬다. 잉글랜드식 2-3-5 번호(라이트 하프 4번)와 다르다. 그래서 그는 클럽과 대표팀에서 대부분 5번을 달았고, 1954년과 1958년 월드컵 공식 선수 명단에도 5번으로 올랐다.
대표 우승 경력
우승: 1949-50, 1950(가을 리그), 1952, 1954, 1955
우승: 1959년
준우승: 1954년
금메달: 1952년 헬싱키
우승: 1948-53 대회
보지크 요제프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헝가리 인민공화국 공로 훈장 · 5등급Magyar Népköztársasági Érdemrend, V. fokozat · 1951년
헝가리 노동 훈장Munka Érdemrend · 1953년 웸블리 승리 뒤
- 발롱도르1956년 6위 · 1957년 공동 9위
- 헝가리 올해의 축구 선수1952년
- FIFA 월드컵 대회 베스트 11대회별 언론 선정1954년
- IFFHS 20세기 헝가리 최고의 선수 투표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선정3위
오늘날 보지크 요제프는 어떻게 평가받는가
헝가리 안에서 그의 자리는 푸슈카시 바로 뒤에 있다. IFFHS의 20세기 투표에서는 푸슈카시와 코치시 다음 3위였고, 헝가리 언론의 역대 순위에서는 푸슈카시 다음 2위에 오르는 일이 많다. 바깥에서 그의 이름은 덜 불린다. 골을 넣는 사람보다 골이 나오게 하는 사람이 덜 기억되는 것은 축구의 오래된 불공평이다. 영국의 축구 잡지 『포포투』는 역대 최고의 팀 50을 고르며 1950년대 초 혼베드를 28위에 두고, 그를 그 팀의 내다보는 후방 플레이메이커라 불렀다.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말이 생기기 전에 그 일을 한 사람들이 있다. 1950년대 헝가리의 보지크와 1960년대 인테르의 루이스 수아레스가 그 자리에서 공을 받아 경기를 열었다. 피를로와 샤비 알론소, 부스케츠와 로드리는 그 계보의 다음 칸에 있다. 필자가 그를 수비형 미드필더 계보의 다섯 손가락 안에 두는 이유는 그가 처음이어서가 아니라, 가장 강한 팀의 한가운데서 그 일을 가장 완성된 모습으로 했기 때문이다.
역대 수비형 미드필더의 계보를 다섯 명으로 줄여야 한다면, 삥이FC는 그 안에 보지크 요제프의 이름을 넣는다.
참고 자료
- RSSSF: József Bozsik, Century of International Appearances: 101경기 11골의 경기별 목록, 1947년 데뷔와 1961년 100번째·1962년 마지막 경기, 2002년 헝가리 축구 협회가 추가 인정한 경기.
- RSSSF: IFFHS' Century Elections, European Footballer of the Year: IFFHS 20세기 투표의 헝가리 순위, 발롱도르 순위.
- 텔렉스: Szűcs Sándor(2026년 6월 4일), 넴제티 스포르트: On the trail of the darkest episode in Hungarian football history: 1951년 쉬치 샨도르의 처형과 보지크·푸슈카시·서서의 선처 요청, 1989년 판결 무효.
- Economx: Milliárdos keretből újraindul az utánpótlásprogram(2011년 6월 9일), Infostart: Jelentős átalakítások a magyar futball utánpótlásában(2021년): 2002년 시작한 보지크 프로그램과 2011년 재개, 학교 프로그램.
- Libero Guide: Hungary's unsung hero of 6:3 legend: 셰베시가 저커리아시를 수비 셋 앞에 세우고 보지크에게 준 자유, 웸블리 45초의 첫 골 과정, 피아노를 나르는 사람이라는 말.
- Hungarian Conservative: József Bozsik Statue Unveiled in Budapest(2025년 12월 4일): 2025년 12월 2일 보지크 경기장 앞 청동상 제막과 조각가.
- Daily News Hungary: Two Hungarian teams listed among the best football teams of all time: 『포포투』 역대 최고의 팀 50의 혼베드 28위와 보지크에 대한 평.
- 헝가리 우정청: József Bozsik was born 100 years ago(2025년):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와 그 소개문(전성기 세계 최고의 공격형 하프, 키슈페슈트·부다페스트 명예 시민 추서, 1953년 웸블리의 골, 1959년 미트로파컵).
- 국가 수훈: 『넵스포르트』 1951년 1월 29일 자와 1953년 12월 10일 자 3면 수훈 기사. 1957년 계급·훈장 박탈과 1996년 대령 추서는 헝가리 쪽 기록.
- 위키미디어 공용: 헝가리 국장(1949-1956), Logopedia: Budapest Honvéd FC: 기록 카드의 당시 문장.
- 본문 사진: Fortepan(1954년 초상, 1955년 이탈리아전, 1959년 미트로파컵, CC BY-SA 3.0) · Olympia-kuva Oy(1952년 헬싱키, CC BY 4.0) · ETH 취리히 도서관 Comet Photo(1954년 베른 결승, CC BY-SA 4.0) · 『에스타디오』 1962년 1월 4일 자(퍼블릭 도메인) · Csurla(기념판, CC BY-SA 3.0) · Dr Varga József(묘,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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