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세상은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세계 최고라고 한들, 누군가는 "어머~"하며 달려들겠으나 누군가는 당신의 지위를 깎기 위해 혈안이 될 수도 있고, 아니될 수도 있으며, 그냥 꼴 보기 싫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아니할 수도 있겠으며, 그냥 냅둘 수도 있고, "알빠노"라며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인 듯합니다.

그것이 2026년뿐 아니라 과거에도 그러하였을 테지요.

1956년의 어느 밤, 이베리아 반도의 어디엔가. 정확히는 스페인 왕국의 어디엔가.

현대 기준으로도 "축구사 이래 역대 최고의 팀"이라고 평가되는 당시의 아라니처파트(Aranycsapat; 황금의 팀), 영문으로는 ‘매직 마자르’(The Magical Magyars)라 불린 세대가 라디오 앞에 늘어서 있었습니다.

스페인어 중계가 잡음 사이로 흘러나왔고, 선수들은 명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한 가지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전차', '진압', 자기 앞에 열거된 '국가'의 이름을 들을 때는 딱히 별다른 통역도 없었겠죠.

훗날의 푸슈카시는 아래와 같이 회고합니다.

우리는 즉시 헝가리로 돌아가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주장인 내게는 가장 무거운 처분, 18개월 출전정지가 예정돼 있었다. 서른을 앞둔 축구선수에게 그것은 사실상 선수 생명의 사형선고였다.

푸슈카시 페렌츠의 회고록을 옮긴 요약[1]
1956년 헝가리에서 라디오 주위에 모여 방송을 듣는 시민들
라디오는 사건을 보여주지 않고 잘라서 들려준다. 사진은 혼베드 선수단이 아니라 1956년 헝가리의 시민들이다. 서로 다른 장소의 사람들이 같은 혁명을 완전한 전체가 아닌 목소리·소문·침묵의 조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서두의 장면을 보충한다. Fortepan 40141 · 기증자 Nagy Gyula · CC BY-SA 3.0.

들어가며: “혁명이 황금의 팀을 해체했다”는 문장이 빠뜨린 것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 황금의 팀이 해체됐다.” 틀린 문장은 아니다. 다만 이 문장에는 주어가 하나뿐이다. 혁명이 원인이고 해체가 결과이며, 그 사이에 선 수많은 행위자는 지워진다. 게다가 이 문장은 흔히 또 하나의 통념 위에 서 있다. 동쪽은 억압했고 서쪽은 자유를 편들었으며, 선수들은 전차를 보고 자유를 찾아 떠났다는 이야기다.

이 글은 그 통념을 사료로 검증한다. 가설은 이렇다. 1956년 가을의 반응은 진영의 논리대로 정렬되지 않았다. 결정을 내린 권력자, 같은 진영의 국가와 정당, 같은 조건에 놓인 개인, 그리고 사건을 기록한 사람들까지 네 층위 모두에서 반응은 사건의 성격보다 각자의 자리와 시점에 따라 갈렸고, 같은 주체도 시간이 지나면 반응을 뒤집었다. 서두의 말을 빌리면, 세계 최고였던 사람들과 그 나라를 두고 세상은 달려들기도, 깎아내리기도, 모른 척하기도 했으며 그마저 오래 한결같지 않았다.

검증은 두 종류의 자료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했다. 하나는 당시에 만들어진 사료다. 소련 공산당 간부회의 회의 기록, 소련 정부 선언, 너지 임레의 마지막 라디오 방송, 유엔 총회 결의문, 카다르 정부의 성명과 백서, 귀환 선수의 조서, 1956년과 1957년 두 판본의 영화, 그리고 부다페스트와 네덜란드에서 찍힌 사진이다. 다른 하나는 이 사료를 읽어 낸 연구다. 냉전 붕괴 뒤 공개된 문서를 분석한 외교사, 체육행정과 영화에 관한 논문, 난민 기구의 집계가 여기에 든다. 사료로 무엇이 있었는지를 확인한 뒤 연구로 그 의미를 따졌고, 연구끼리 해석이 갈리는 곳은 갈린 채로 적었다. 숫자가 자료마다 다를 때는 범위와 출처를 함께 밝혔다.

1956년 10월 23일 밤 · 부다페스트, 브로디 샨도르 거리의 국영 라디오

사건의 시작부터 라디오가 있었다. 10월 22일 부다페스트 공과대학 학생들은 소련군 철수와 복수정당 선거, 언론의 자유를 담은 16개 요구를 정리했다. 이튿날 오후 약 2만 명이 폴란드 출신 영웅 벰 장군의 동상 앞에 모였고, 밤에는 시내의 8m짜리 스탈린 동상을 끌어내렸다. 요구를 전파에 실으려던 학생 대표단이 국영 라디오 건물 안에서 붙잡혔고, 건물 앞 군중에게 국가보위부(ÁVH)가 총을 쐈다. 시위는 그 자리에서 무장봉기로 바뀌었다.[4][18]

1956년 10월 부다페스트 거리에 굴러떨어진 스탈린 동상의 머리와 주위의 시민들
10월 23일, 끌어내려진 스탈린. 부다페스트 대로에 놓인 스탈린 동상의 머리. Fortepan 93004 · 기증자 Hofbauer Róbert · CC BY-SA 3.0.
총탄 자국이 난 부다페스트 국영 라디오 건물 외벽과 가운데가 뚫린 헝가리 국기
첫 총성이 울린 곳. 총탄 자국이 남은 브로디 샨도르 거리의 국영 라디오 건물. 가운데 문장을 도려낸 국기가 걸려 있다. Fortepan 24571 · 기증자 Nagy Gyula · CC BY-SA 3.0.

첫째, 결정을 내린 사람들부터 사흘 사이에 말을 바꿨다

1956년 10월 30일 · 모스크바, 크렘린

통념은 소련을 처음부터 진압을 작정한 단일한 의지로 그린다. 사료는 다르다. 10월 28일 소련 공산당 간부회는 평화적인 해결과 너지 정부 지지에 합의했다. 흐루쇼프는 이날 헝가리에 다시 군대를 보내는 것이 영국과 프랑스의 이집트 개입을 잘못 흉내 내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30일 간부회는 너지 정부를 무너뜨리지 않기로 하고, 사회주의 국가 간의 평등을 약속하는 정부 선언까지 발표했다. 선언은 소련군 주둔 문제를 헝가리 정부와 협상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8][9][18]

1956년 10월 31일 · 모스크바, 간부회 회의실

하루 뒤 같은 사람들이 정반대의 결정을 내렸다. 회의에 배석한 말린이 받아 적은 기록에서 흐루쇼프는 이렇게 말한다.

평가를 다시 해야 한다. 헝가리와 부다페스트에서 군대를 철수해서는 안 된다. 헝가리의 질서 회복에 우리가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1956년 10월 31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 회의, V. N. 말린의 작업 기록[9]

왜 뒤집었는가에 대해서는 연구의 설명이 겹치면서도 강조점이 다르다. 냉전 붕괴 뒤 공개된 간부회 문서를 분석한 크레이머는 헝가리 공산당의 붕괴 속도와 동유럽 전체로 번질 수 있다는 공포, 강경파의 압력을 핵심 요인으로 본다. 중국의 입장도 이 사이에 흔들렸다. 마오쩌둥은 처음에 재개입에 반대했다가 찬성으로 돌아섰고, 모스크바에 와 있던 류사오치는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 흐루쇼프는 개입 직전 유고슬라비아로 가서 티토와 만나 새 헝가리 지도자로 카다르 야노시를 세우는 데 합의했다.[8][18]

같은 달 폴란드와 비교하면 이 결정이 필연이 아니었다는 점이 더 선명해진다. 6월 포즈난 봉기를 겪은 폴란드에서도 개혁파 고무우카가 권력을 잡았지만, 소련은 폴란드와는 타협했다. 폴란드는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남겠다고 약속했고, 헝가리는 11월 1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8]

1956년 11월 1일에서 4일 새벽 · 부다페스트와 솔노크

헝가리 쪽 결정권자도 한결같지 않았다. 11월 1일 너지 내각은 중립과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를 선언하고, 유엔을 통해 강대국들에 헝가리의 중립을 인정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 결정에는 카다르도 동의했다. 사흘 뒤인 11월 4일 새벽 6시, 그 카다르가 부다페스트가 아닌 동쪽 소도시 솔노크에서 ‘혁명적 노농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성명은 “반혁명 분자들의 폭주를 끝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전날 밤 소련군 철수 협상에 나섰던 헝가리 대표단은 소련 보안기관장 세로프의 명령으로 협상장에서 체포됐다.[4][11][18]

첫째 명제의 증거는 이렇게 모인다. 흐루쇼프는 28일의 말을 31일에 뒤집었고, 카다르는 1일의 동의를 4일에 뒤집었다. 그 사흘 동안 달라진 것은 결정권자들이 선 자리와 그들이 느낀 위험의 크기였다.

둘째, 같은 진영 안에서도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1956년 11월 4일 새벽 5시 20분 · 부다페스트, 코슈트 라디오

오늘 새벽 소련군이 합법적인 헝가리 민주 정부를 전복하려는 명백한 의도로 우리 수도를 공격했다. 우리 군은 싸우고 있다. 정부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너지 임레 총리의 마지막 라디오 방송, 1956년 11월 4일 5시 20분[27]

35초짜리 이 방송은 세계를 향한 호소였다. 그런데 이 소식을 받은 쪽의 반응은 진영 안에서부터 갈렸다.

같은 날 · 뉴욕, 유엔 총회 긴급특별회의

같은 날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은 소련의 거부권에 막혔고, 이사회는 문제를 총회로 넘겼다. 총회는 결의 1004호를 채택했다.

소련 정부는 헝가리 국민에 대한 모든 무력 공격을 즉시 중단하고, 헝가리 내정에 대한 모든 형태의 개입, 특히 무력 개입을 중단하라.

유엔 총회 결의 1004(ES-II), 1956년 11월 4일[28]

표결은 찬성 50, 반대 8, 기권 15였다. 반대한 여덟 나라는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들이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불과 몇 주 전 스스로 소련과 줄다리기를 벌인 폴란드도 있었다. 카다르 정부는 유엔 감시단의 입국을 거부했다.[28][18]

서방 안에서도 반응은 하나가 아니었다.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했고 31일 영국과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군사행동에 가담했다. 헝가리를 편들어야 할 서유럽의 두 강대국이 바로 그 주에 다른 나라를 공격하고 있었다. 미국 부통령 닉슨은 뒷날 소련의 헝가리 개입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의 이집트 개입을 눈감을 수는 없었다는 취지로 말했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공산권 ‘해방’을 말해 왔지만 소련 세력권 안의 일에 군사 개입은 선택지에 두지 않았다.[18]

자유유럽방송의 책임을 두고서는 연구가 정면으로 갈린다. 찰스 가티는 CIA 작전 문서와 방송 원고를 검토해, 워싱턴이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은 사이 자유유럽방송은 봉기 세력의 실현 불가능한 요구를 부추기면서 너지를 깎아내렸다고 비판한다. 반면 방송국이 혁명 직후 벌인 내부 검토는 300건이 넘는 방송 가운데 명백한 방침 위반을 네 건으로 봤다. 역사가 아치 퍼딩턴은 이 방송의 헝가리어 서비스가 6월 포즈난 봉기를 자세히 전한 일이 헝가리 혁명에 영감을 줬다고 본다. 같은 전파를 두고 선동이었다는 평가와 절제됐다는 평가, 영감이었다는 평가가 함께 남아 있다.[10][22]

같은 사상을 공유하던 사람들도 갈라졌다. 영국 공산당은 소련의 개입을 지지했다가 1956년 한 해에만 당원을 크게 잃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공산당원인 철학자 루초 콜레티 등이 소련을 비판하는 성명을 기초해 공산주의 지식인 101명이 서명했고, 이탈리아 공산당은 당 안에서 갈라졌다. 미국 작가 하워드 패스트는 당을 떠나 이듬해 회고록 『벌거벗은 신』을 썼다.[24][25][26]

1956년 11월 22일 · 멜버른 올림픽 개막

스포츠의 무대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멜버른 올림픽에는 아홉 팀이 불참했는데 이유가 셋으로 갈렸다. 네덜란드, 스페인, 스위스, 리히텐슈타인은 소련의 헝가리 진압에 항의했다. 이집트, 이라크, 캄보디아, 레바논은 수에즈 위기를 이유로 들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대만의 참가를 문제 삼았다. 같은 대회를 거부한 나라들이 서로 다른 전쟁을 보고 있었고, 대회는 예정대로 열렸다.[15][19]

둘째 명제의 증거는 이렇다. 동쪽 진영 안에서는 소련과 막 타협한 폴란드가 헝가리 결의에 반대표를 던졌다. 서쪽 진영 안에서는 해방을 말한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고, 영국과 프랑스는 같은 주에 수에즈에 있었다. 방송의 책임을 두고 연구가 갈렸고, 좌파는 당에 남은 사람과 떠난 사람으로 갈렸으며, 올림픽 불참국은 서로 다른 이유를 댔다. 진영이라는 이름표는 반응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셋째,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들도 서로 다른 문을 열었다

1956년 10월에서 12월 · 부다페스트 8구와 9구, 공장과 광산

거리에서 싸운 사람들은 누구였나. 헝가리 쪽 사망자는 약 2,500명, 부상자는 약 2만 명으로 집계된다. 사망자의 약 53%가 노동자였고, 전체 사상자의 절반이 서른 살이 안 된 사람들이었다. 소련군은 699명이 죽고 1,450명이 다쳤으며 사상자의 약 80%가 부다페스트 8구와 9구의 시가전에서 나왔다. 불만은 정치 구호보다 먼저 생활에서 쌓였다. 1950년대 초의 소련식 공업화는 1인당 소득 지표를 끌어올렸지만 공업 투자로 떠밀려 간 강제 분담 때문에 생활 수준은 떨어졌고, 식량은 배급제로 돌아갔다.[18]

같은 공장의 노동자들도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공장과 광산에서는 노동자평의회가 생겨 경영을 맡았고, 이들이 원한 것은 당의 통제에서 벗어난 사회주의 경제였다. 유엔 특별위원회 보고서와 외교 전문은 소련군이 수도를 장악한 뒤에도 평의회가 조직을 유지하고 파업을 이어 갔음을 기록한다. 끝까지 파업한 공장, 먼저 일터로 돌아간 노동자, 국경으로 향한 청년이 같은 도시에 있었다. 공산당원은 혁명 전 약 80만 명에서 12월에 약 10만 명으로 줄었다. 혁명의 지도자들도 흩어졌다. 너지 일행은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에 들어갔다가 11월 22일 대사관을 나서던 길에 체포돼 루마니아로 끌려갔고, 민드센티 추기경은 미국 대사관에 들어가 그곳에서 15년을 살았다.[4][12][18]

1956년 11월 25일 · 네덜란드, 헝가리 난민 셋째 수송 도착

떠난 사람들의 규모는 축구선수 몇 명의 망명과 비교할 수 없다. 유엔난민기구 집계에 따르면 1957년 5월 1일까지 약 17만 4천 명이 오스트리아로, 1만 9천여 명이 유고슬라비아로 넘어갔다. 석 달 남짓한 사이에 약 20만 명, 당시 헝가리 인구의 2%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약 18만 명이 37개 나라에 재정착했고 첫 10만 명은 열 주가 안 돼 새 나라로 떠났다. 국경을 연 오스트리아는 불과 1년 전 점령에서 벗어나 중립국이 된 나라였다.[14]

1956년 11월 네덜란드에 도착한 열차 창밖으로 손을 흔드는 헝가리 난민들
올림픽을 거부한 나라가 받아들인 사람들. 1956년 11월 25일 네덜란드에 도착한 헝가리 난민 셋째 수송. 네덜란드는 같은 달 헝가리 진압에 항의해 멜버른 올림픽 불참을 택한 나라이기도 했다. 사진: Wim van Rossem, Anefo,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 CC0.

1956년 12월 6일 · 멜버른, 올림픽 수영장

올림픽에 나선 헝가리 선수단은 수구에서 소련과 만났다. 발길질과 주먹이 오간 경기에서 헝가리가 4-0으로 앞섰고, 종료 직전 소련 선수의 주먹에 맞은 에르빈 저도르(Zádor Ervin; 헝가리 수구 선수, 1935-2012)가 눈 위로 피를 흘리며 물 밖으로 나왔다. 저도르는 뒷날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위해 뛴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헝가리는 금메달을 땄다. 대회가 끝난 뒤 40명이 넘는 헝가리 선수가 귀국하지 않았고, 저도르도 미국으로 건너갔다. 선수단의 다수는 돌아갔다. 같은 수영장에서 같은 메달을 목에 건 사람들이 서로 다른 비행기를 탔다.[16][19]

1956년 10월 31일에서 1957년 2월 · 빌바오, 브뤼셀, 남미, 그리고 빈

황금의 팀도 이 명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황금의 팀은 국가 바깥의 천재 집단이 아니었다. 1949년 키슈페스트는 국방부 소속 부더페스트 혼베드가 됐고, 군 구단이라는 지위로 코치시와 치보르를 징집 형식으로 데려왔으며 선수들에게 군 계급을 줬다. 이 집중이 1952년 올림픽 금메달과 1953년 웸블리 6-3, 1954년 월드컵 준우승을 만들었지만, 같은 계급과 해외 이동 허가는 귀환 명령과 처벌의 근거이기도 했다. 팀 내부의 보상 갈등과 후원자였던 전 국방장관 퍼르커시 미하이의 체포도 이미 혁명 전에 기록돼 있다.[2][3][20]

  1. 공식 허가를 받아 출국

    아틀레틱 클루브와의 유러피언컵을 앞두고 국외로 나갔다. 출국 자체는 망명이 아니었다.

    행정·원정 기록
  2. 서독 친선경기의 검은 완장

    진압을 애도하는 표시가 새 카다르 정부의 의심을 샀다.

    제도사 연구
  3. 빌바오 원정 2-3 패배

    너지 일행이 대사관을 나서다 체포된 바로 그날, 선수단은 스페인에서 혼베드의 이름으로 뛰었다.

    경기 기록
  4. 브뤼셀 2차전 3-3, 합계 5-6 탈락

    부다페스트 대신 중립지에서 홈경기를 치렀다. 푸슈카시의 첫 유러피언컵 골이 이 경기에서 나왔다.

    경기 기록
  5. 가족을 불러내고 모금 원정

    FIFA와 헝가리 축구 당국의 반대 속에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브라질을 돌았다.

    연구·회고 대조
  6. 빈에서 귀환과 잔류가 갈림

    보지크 등 다수는 헝가리로 돌아갔고 푸슈카시·코치시·치보르는 남았다.

    수사·원정 기록

같은 원정에서 같은 소식을 들은 선수들이 서로 다른 문을 열었다. 푸슈카시와 코치시, 치보르는 남았다. 그들에게 세상은 두 얼굴을 보였다. 헝가리 당국은 푸슈카시에게 반역과 밀수 혐의를 거론했고 축구계는 출전정지를 내렸다. 푸슈카시는 회고에서 18개월 출전정지를 선수 생명의 사형선고로 받아들였다고 썼고, 영어권 전기 자료는 UEFA 차원의 2년 징계로 적는다. 1957년 그리스 에트니코스 피레아스 입단은 경쟁 구단들의 압박으로 무산됐다. 그런데 징계가 끝나자 1958년 레알 마드리드가 서른한 살의 푸슈카시를 받아들였고, 같은 해 FC 바르셀로나에는 먼저 헝가리를 떠난 쿠발라 라슬로의 부름으로 코치시와 치보르가 합류했다.[1][5][17][20][21]

헝가리 대표팀 붉은 셔츠를 입은 1954년의 코치시 샨도르
남은 사람, 코치시. 1954년의 코치시 샨도르. 7년 뒤 그는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1954년 월드컵 결승을 졌던 베른 반크도르프에서 유러피언컵 결승을 또 한 번 졌다. Fortepan 261526 · Faragó György · CC BY-SA 3.0.
1962년 암스테르담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푸슈카시의 슈팅이 벤피카 골망을 흔드는 장면
남은 사람, 푸슈카시. 1962년 5월 2일 유러피언컵 결승 벤피카전에서 들어간 푸슈카시의 두 번째 골. 레알 마드리드는 이 경기를 3-5로 졌다. 사진: Joop van Bilsen, Anefo,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 CC0.

돌아간 사람들의 이유도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 혼베드의 원클럽맨 보지크 요제프는 돌아가 1958년 월드컵에 나섰고 국가대표 101경기를 채웠다. 골키퍼 그로시치 줄러는 이전에 간첩 혐의로 가택연금까지 겪었고 혁명 때는 가족과 함께 나라를 떠나려 했지만, 결국 돌아가 1958년과 1962년 월드컵 골문을 지켰다. MTK의 히데그쿠티 난도르도 돌아왔다. 돌아간 선수들로 꾸린 헝가리는 1958년 월드컵 조별리그 뒤 웨일스와의 순위 결정전에서 1-2로 져 8강에 오르지 못했다.[21][23]

셋째 명제의 증거는 이렇다. 같은 도시의 노동자, 같은 수영장의 선수, 같은 원정길의 축구선수가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나이와 계급, 가족의 위치, 이미 겪은 감시, 받아 줄 곳이 있는지가 저마다 달랐다. 선택을 가른 것은 각자가 짊어진 조건이었다.

넷째, 기록마저 반응에 따라 다시 쓰였다

1957년 · 부다페스트, 필름 편집실과 인쇄소

진압 뒤에는 무엇을 기록하느냐의 싸움이 이어졌다. 카다르 정권은 『10월 사건 속의 반혁명 세력』이라는 제목의 백서를 여러 언어로 펴냈다. 백서는 공산당원과 국가보위부원을 향한 실제 폭력을 기록했지만 그것을 서방이 조종한 반혁명이라는 틀 안에 배치했다. 같은 해 유엔 특별위원회 보고서는 같은 사건을 민족적 봉기와 외국군의 진압으로 기록했다. 한 사건에 대해 두 개의 공식 기록이 동시에 만들어진 셈이다.[4][18]

축구도 이 다시 쓰기를 비켜 가지 못했다. 1956년 여름 촬영된 영화 《기적의 공격수》(A csodacsatár)에는 푸슈카시와 코치시를 빗댄 이름이 나왔다. 혁명 뒤 영화는 다시 편집됐지만 제작 연도는 1956년 그대로 남았다.[7]

FILM AS ARCHIVE · 같은 25초화면은 그대로 두고 국가가 허락한 이름만 바꿨다
1956 ORIGINAL

라디오 중계: “푸슈카”, “코치”

배우의 대사: “들었나? 푸슈카! 우리 선수야.”

1957 RE-EDIT

라디오 중계: “보지크”, “히데그쿠티”

입 모양은 ‘푸슈카’, 들리는 목소리는 “히데그쿠티”

페테르 포도르의 프레임 대조에 따르면 두 판본의 첫 25초 영상은 똑같다. 망명한 선수의 이름을 귀환한 선수의 이름으로 덮었지만 배우의 입 모양까지는 바꾸지 못했다. 삭제하려던 흔적이 오히려 사료로 남았다.

영화 속 라디오 중계에서 이름이 바뀐 선수들이 경기력 때문에 빠진 것은 아니다. 1956년 대표팀에서 가장 많이 뛴 선수가 바로 푸슈카시와 코치시였다. 남았는가 돌아왔는가가 과거의 배역까지 정했다. 국가보안 문서도 같은 일을 했다. 귀환한 선수를 심문하고 망명한 선수에게 혐의를 씌운 조서는 선수의 죄보다 국가가 사람을 충성과 배신으로 분류하던 방식을 더 정확히 보여 준다.[5][7]

1958년 6월 16일, 그리고 1989년 6월 16일 · 부다페스트

기록은 한 번 더 뒤집혔다. 너지는 1958년 6월 16일 비밀재판 끝에 처형돼 표지 없는 무덤에 묻혔다. 보복은 길고 넓어서 약 2만 6천 명이 재판에 넘겨졌고 2만 2천 명이 형을 받았으며, 공식 처형자는 229명으로 집계되지만 예센스키 게자 전 외무장관은 약 350명으로 추산한다. 그런데 같은 정권은 곧 방식을 바꿨다. 카다르는 라코시 시절의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우리의 적”을 뒤집어 “우리에게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와 함께한다”고 말했고, 1963년까지 정치범 대부분이 풀려났다. 요한나 멜리스는 체육 행정도 망명자 처벌에서 선수 달래기로 옮겨 갔다고 분석한다. 31년 뒤 같은 날짜인 1989년 6월 16일, 너지는 복권돼 예우를 갖춘 재장례를 받았다. 그해 10월 23일 헝가리 공화국이 선포됐고 이날은 국경일이 됐다.[6][12][13][18]

넷째 명제의 증거는 이렇다. 같은 사건이 1957년 부다페스트의 백서에서는 반혁명, 같은 해 뉴욕의 보고서에서는 봉기였다. 같은 선수가 1956년 필름에서는 영웅, 1957년 필름에서는 지워진 이름이었다. 같은 사람이 1958년에는 반역자, 1989년에는 국가가 예우하는 인물이었다. 기록 역시 사건을 담는 그릇에 머물지 않고 반응의 일부가 됐다.

검토의 한계: 사료가 말해 주는 것과 말해 주지 않는 것

이 검토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날짜와 결정, 표결과 숫자, 그리고 사람들이 실제로 어디로 갔는가다. 간부회의 번복은 회의 기록으로, 총회의 표결은 결의문으로, 난민의 규모는 유엔 기구의 집계로, 선수들의 동선은 경기 기록으로 남았다. 반대로 개인이 왜 돌아가거나 남았는지는 직접 증명하기 어렵다. 회고는 결과를 다 안 뒤에 쓰였고, 국가보안 문서의 혐의는 국가의 시선으로 작성됐다. 사망자와 처형자 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헝가리어 1차 사료의 상당 부분은 이 글이 인용한 문서집과 연구를 거쳐 읽었다. 그래서 이 글은 누구의 선택이 옳았는지 판정하지 않고, 같은 조건 앞에서 선택이 어떻게 갈렸는지까지만 적는다.

나가며: 같은 시각, 서로 다른 식탁

네 명제를 겹치면 가설은 입증된다. 1956년 가을의 반응은 진영의 논리대로 정렬되지 않았다. 결정권자는 사흘 사이에 말을 바꿨고, 같은 진영은 서로 다른 표를 던졌으며, 같은 조건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문을 열었고, 기록은 누가 쓰느냐에 따라 사건의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이 일들은 대개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벌어지고 있었다.

1956년 11월 4일 새벽 5시 20분, 부다페스트의 라디오에서는 너지의 목소리가 흘렀다. 같은 새벽 솔노크에서는 카다르가 다른 정부의 성명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날 뉴욕에서는 여덟 나라가 반대표를 들었다. 수에즈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폭격이 이어졌고, 국경 밖 어딘가에서는 혼베드 선수들이 라디오의 잡음 사이에서 고국의 소식을 알아들으려 애쓰고 있었다. 열하루 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의 박람회장에서는 국경을 넘어온 헝가리 아이들이 긴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1956년 11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박람회장에서 긴 식탁에 앉아 식사하는 헝가리 난민 아이들과 어른들
1956년 11월 15일의 식탁. 위트레흐트 박람회장에 마련된 수용소에서 식사하는 헝가리 난민 가족. 같은 달 부다페스트와 모스크바와 뉴욕과 멜버른의 식탁은 모두 달랐다. 사진: Daan Noske, Anefo,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 CC0.

같은 시각에도 세상은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1956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 6시

여러분들은 오늘 저녁에 식사하실건가요? 저는 안먹으려고요. 살빼야해서요. 그런데 제 친구는 발레가 끝나고 샤인머스캣을 사간다네요. 그런데 어떤 친구는 조기퇴근하고 5시부터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고 전화가 옵니다.

제가 알던 과거 대표님은 누군가와 미팅을 하고 있고, 우리 직원 중 모 개발자는 휴가를 떠났습니다. 아마, 간식 먹고 있겠지요.

같은 저녁 6시인데 세상은 이렇게 줏대없습니다.

이렇듯 헝가리 혁명도 교과서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대요"로 끝납니다. 파고 들어가 보면, 그날 거기 있던 건 오늘의 여러분과 저랑 다를 바 없는 대학생1, 정치인1, 노동자1, 전차 운전사1, 빵집 주인1, 간호사1, 초등학교 선생님1, 극장 가수1, 우체부1, 사진사1, 누군가의 아내1, 난민 아이1, 수구 선수1, 그리고 축구선수1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냥 '오늘'이었죠. 이 문헌고찰은 그 가을의 오늘들을 돋보기로 조금 크게 보여드린 것입니다.

검토 문헌과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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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Manifesto of the 101」 및 「Italian Communist Party」. 이탈리아 공산주의 지식인 101인 성명, 당내 분열, 사회당과의 동맹 종료.
  26. 「Howard Fast」. 공산당 탈당과 1957년 회고록 『The Naked God』.
  27. 「Imre Nagy: Last Message, November 4, 1956」 및 Seventeen Moments in Soviet History, 「Soviet Intervention」. 11월 4일 5시 20분 너지 총리의 라디오 방송 원문.
  28. 「Resolution 1004 (ES-II) adopted by the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4 November 1956)」, CVCE. 결의 본문과 반대 8개국 명단.
  29. 사진: Fortepan 93004(기증자 Hofbauer Róbert), Fortepan 24571(기증자 Nagy Gyula), Fortepan 261526(Faragó György), CC BY-SA 3.0. Anefo 908-1631(Wim van Rossem), Anefo 908-1439(Daan Noske), Anefo 913-8513(Joop van Bilsen),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 CC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