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 LEGEND
쿠벌러 라슬로(Kubala László)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바르사 역대 최고의 공격수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스페인 세 대표팀에서 뛰고 FC 바르셀로나의 1950년대를 연 아이돌 쿠벌러 라슬로(라디슬라오 쿠발라). 트럭 짐칸의 망명과 비켜 간 수페르가, 한 경기 7골과 5개의 컵, 헝가리 트리오와 베른의 네모난 골대까지. 3개 나라 유니폼에 얽힌 사연과 클럽·국대 기록, 우승과 개인 수상을 정리한다.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유럽축구연맹Union des Associations Européennes de Football
쿠벌러 라슬로(Kubala László; 헝가리는 성을 앞에 쓴다. 스페인에서는 라디슬라오 쿠발라 Ladislao Kubala, 슬로바키아에서는 Ladislav Kubala로 불렸다)는 FC 바르셀로나의 1950년대 아이돌이자 슈퍼스타, 그리고 구단의 현대사를 연 월드 클래스 공격수다. 부다페스트에서 슬로바키아계 아버지와 폴란드·슬로바키아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 스페인 세 나라 대표팀에서 뛰었다. 1949년 트럭 짐칸에 숨어 공산화된 헝가리를 빠져나온 난민은 이듬해 바르셀로나와 계약했고, 첫 온전한 시즌에 한 경기 일곱 골과 다섯 개의 우승컵을 남겼다. 그가 뛴 11년 동안 구단의 회원은 두 배가 됐고 캄 노우가 섰다. 1999년 구단 창립 100주년에 팬들이 투표로 뽑은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도 그였다. 알프레도 디스테파노와 라리가를 나눠 가진 라이벌이었고, 나중에는 코치시 샨도르, 치보르 졸탄과 헝가리 트리오를 이뤘다.
삥이FC 쿠벌러 라슬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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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바르셀로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리오넬 메시와 요한 크라위프(Johan Cruijff; 아약스·FC 바르셀로나와 네덜란드의 공격수, 바르셀로나 감독, 1947-2016)를 지나 한 사람에게 닿는다. 1999년 구단이 창립 100주년을 맞아 팬 투표로 역대 최고의 선수를 뽑았을 때, 크라위프와 디에고 마라도나, 호마리우,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를 제치고 이름이 불린 사람이 쿠벌러였다. 메시가 1군에 오르기 다섯 해 전의 일이다. 그가 온 1950년 2만 6,300명이던 회원은 그가 떠난 1961년 5만 2,791명이 됐다. 구단은 그 시대를 스스로 「쿠벌러의 시대」라고 부른다. 바르셀로나가 가장 위대한 선수를 절실히 필요로 하던 때에 마침 그가 왔다. 그 점에서 그의 업적은 축구를 잘했다는 말로 다 담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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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는 두꺼운 몸과 섬세한 발이 함께 있다는 데 있었다. 구단 기록에는 허벅지 둘레가 67cm였다고 남아 있고, 그 몸으로 수비수를 어깨로 밀어내면서도 공은 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바르셀로나 구단은 그가 공을 휘어 차는 법처럼 그때까지 스페인에서 볼 수 없던 기술을 들여왔다고 적는다. 발 안쪽으로 감아 수비벽을 넘기는 프리킥을 스페인에 처음 보여 준 선수로 꼽히고, 오전과 오후 두 번씩 공을 차며 훈련한 것도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중앙 공격수로 시작했지만 인사이드와 측면을 오가며 경기를 풀었고, 1961년 영국 『월드 사커』의 에릭 배티(Eric Batty; 『월드 사커』에 해마다 세계 베스트 11을 발표한 영국의 축구 기자)는 그를 세계 베스트 11의 오른쪽 윙어로 골랐다. 화려함에 가까운 스타일이었지만 결과를 놓치는 법이 없는, 실리적인 화려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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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을 기록에 박은 장면은 1952년 2월 10일 레스코르츠다. 스포르팅 히혼을 9-0으로 꺾은 경기에서 그는 혼자 일곱 골을 넣었다. 라리가 한 경기 최다 득점으로 지금도 아틀레틱 클루브의 바타(Agustín Sauto Arana, Bata; 아틀레틱 클루브의 공격수, 1908-1986)와 나란히 남은 기록이다. 그 시즌 바르셀로나는 리그와 코파, 라틴컵, 코파 에바 두아르테, 코파 마르티니 로시까지 다섯 개의 컵을 모두 들었다. 구단사에 「다섯 개의 컵」(Les Cinc Copes)으로 남은 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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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나라 대표팀에서 뛴 선수는 드물다. 그는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여섯 경기 네 골, 1948년 헝가리에서 세 경기,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스페인에서 19경기 11골을 기록했다.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 International Federation of Football History & Statistics, 축구 기록과 역사를 집계하는 단체)의 20세기 투표에서 그는 세계 32위, 유럽 24위였고, 스페인 선수로 추린 순위에서는 디스테파노, 푸슈카시 페렌츠 다음 3위였다. 다만 세 나라의 유니폼을 입고도 월드컵이나 대륙 선수권 본선에는 끝내 한 번도 서지 못했다. 헝가리 황금의 팀이 세계를 제패할 때 그 동료가 되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다. 그가 헝가리를 떠난 1949년은 그 팀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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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애는 20세기 중부 유럽의 국경선을 그대로 따라간다. 징집을 피해 국경을 넘었고, 공산 정권을 피해 트럭 짐칸에 숨었으며, 토리노의 비행기에 탈 뻔했다가 아이가 아파 타지 않았다. 국적을 잃은 선수들끼리 꾸린 순회 팀에서 뛰다 바르셀로나에 왔고, 프랑코 정권은 그 망명을 반공 선전 영화로 만들었다. 결핵으로 선수 생명을 잃을 뻔했다가 돌아왔고, 감독과 부딪혀 가장 큰 경기에서 빠졌다가 다음 해 그 상대를 무너뜨렸다. 은퇴 뒤에는 스페인 대표팀을 11년 이끌었다. 미학을 중히 여기는 도시와 팬들에게 그는 영웅이고 아이돌이었다. 필자에게 쿠벌러 라슬로는 바르셀로나가 지금의 바르셀로나가 되기 전에 먼저 그 모양을 보여 준 사람이다.

쿠벌러 라슬로 프로필
ČESKOSLOVENSKO체코슬로바키아Československá republika
HUNGARY헝가리Magyarország

- 본명
- Kubala Stecz László
- 등록명
- 쿠벌러 라슬로(Ladislao Kubala)
- 출생
- 1927년 6월 10일
- 출생지
- 헝가리 부다페스트
- 사망
- 2002년 5월 17일 · 향년 74세
- 사망지
- 스페인 바르셀로나
- 대표 국적
- 체코슬로바키아 · 헝가리 · 스페인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인사이드 포워드 · 윙어
- 주요 등번호
- 9번 · 7번 · 8번 · 10번
- 선수 경력
- 1944-1967년 · 바르셀로나 1950-1961년
- 대표팀
- 28경기 15골 · 세 나라 합계
- 감독 경력
- 스페인 대표팀 1969-1980년
- 별명
- 라시(Laszi; 카탈루냐 팬들이 부른 이름) · 아이돌
1927년 6월 10일 부다페스트, 3개 나라의 피
쿠벌러는 1927년 6월 10일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벽돌공이던 아버지 쿠벌러 쿠리아시 팔(Kubala Kurjas Pál)은 슬로바키아계였고, 공장에서 일한 어머니 스테츠 언너(Stecz Anna)는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헝가리의 피가 섞여 있었다. 그는 훗날 자신을 세계 시민이라 불렀다. 열한 살에 공장 팀 간츠 TE(Ganz Torna Egylet; 부다페스트 간츠 공장의 스포츠 클럽, 당시 3부 리그)의 유소년 팀에서 서너 살 많은 형들과 공을 찼고, 1944년 그 팀에서 성인 무대에 섰다.
열여덟 살이 되기 전 그는 1부 리그의 명문 페렌츠바로시(Ferencvárosi Torna Club; 부다페스트의 축구단)와 계약했다. 그곳에서 만난 동료 가운데 한 명이 두 살 아래의 코치시 샨도르(Kocsis Sándor; 페렌츠바로시·혼베드·FC 바르셀로나와 헝가리의 인사이드 라이트, 1929-1979)였다. 13년 뒤 두 사람은 바르셀로나에서 다시 한 팀이 된다. 그의 본격적인 축구 인생이 시작된 곳이 여기였다.
1946년 브라티슬라바, 체코슬로바키아의 유니폼
1946년 헝가리에서 징집 통지를 받은 그는 국경을 넘어 체코슬로바키아로 갔다. 그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어머니와 함께 브라티슬라바로 옮겼고, ŠK 브라티슬라바(ŠK Bratislava; 지금의 ŠK 슬로반 브라티슬라바)에 입단했다. 슬로바키아계 아버지 덕에 시민권이 곧바로 나왔다. 유럽에서 이름깨나 날리던 그 팀에서 그는 평생의 은사를 만났다. 감독 페르디난드 다우치크(Ferdinand Daučík; 슬로반·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과 FC 바르셀로나의 감독, 1910-1986)다. 1947년 스무 살의 쿠벌러는 다우치크의 여동생 언너 비올러(Anna Viola Daučíková)와 결혼했다.

다우치크가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을 맡자 쿠벌러도 그 유니폼을 입었다. 1946년 10월 27일 빈에서 오스트리아를 4-3으로 꺾은 경기가 첫 A매치였다. 이듬해 8월 프라하에서 폴란드를 상대로 두 골, 9월 부쿠레슈티에서 루마니아를 상대로 두 골을 넣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남긴 기록은 여섯 경기 네 골이다. 그는 슬로반에서 33경기 14골을 넣으며 유럽의 별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1949년 1월, 트럭 짐칸의 망명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군대가 그를 불렀다. 그는 다시 국경을 넘어 부다페스트로 돌아갔다. 옛 구단 페렌츠바로시와 이야기가 오갔지만 더 좋은 조건을 내민 버셔시(Vasas SC; 부다페스트 금속 노동자들의 축구단)를 골랐다. 그해 헝가리 대표로 발칸컵 세 경기에 나섰다. 5월 23일 티라나의 알바니아전이 첫 경기였다. 골은 없었다.
헝가리가 소련의 위성국으로 굳어 가던 1949년 1월, 그는 밀수꾼에게 돈을 주고 트럭 짐칸에 숨어 국경을 넘었다. 미군 점령 구역이던 오스트리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갔고, 프로 파트리아(Aurora Pro Patria 1919; 롬바르디아 부스토아르시치오의 축구단)에서 공을 찼다. 그 무렵 그의 아내는 갓난아이 브랑코를 데리고 다뉴브강을 건너 그를 찾아왔다고 전한다.
1949년 5월 토리노가 리스본에서 벤피카와 친선 경기를 치르기로 하고 그를 손님 선수로 불렀다. 그는 가겠다고 했다가 아들이 아파 빠졌다. 5월 4일 돌아오던 토리노 선수단의 비행기가 수페르가 언덕에 떨어져 탄 사람 31명이 모두 죽었다. 같은 시기 헝가리 축구 협회는 계약 위반과 무단 출국, 병역 기피를 이유로 그를 FIFA에 제소했고, FIFA는 1년 국제 출전 정지를 내렸다.
1950년 여름 헝가리아, 국적 없는 선수들의 순회 경기
1950년 1월 그는 동유럽에서 빠져나온 난민 선수들을 모아 헝가리아(Hungária; 망명 선수들의 순회 팀)라는 팀을 꾸렸다. 감독은 처남 다우치크였다. 공식 대회에 나갈 수 없는 팀은 유럽을 돌며 친선 경기로 먹고살았다. 그해 여름 스페인에 와서 마드리드 선발, 월드컵을 준비하던 스페인 선발, RCD 에스파뇰과 맞섰고, 알프레도 디스테파노가 뛰던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와도 붙었다. 쿠벌러는 상대를 씹어 먹었다. 레알 마드리드가 먼저 그에게 계약을 제안했다.
길을 바꾼 사람은 바르셀로나의 기술 책임자 주제프 사미티에르(Josep Samitier; FC 바르셀로나의 공격수 출신 기술 책임자, 1902-1972)였다. 사리아 경기장에서 열린 에스파뇰전을 지켜본 그는 1950년 6월 15일 쿠벌러와 계약했고, 다우치크도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데려왔다. 사미티에르는 프랑코 정권과의 인맥을 동원했다. 정권은 소련 위성국에서 탈출한 스타를 반공 선전에 쓰고 싶어 했고, 그의 스페인 국적은 이례적인 속도로 나왔다. 1954년에는 그의 탈출과 성공을 각색한 영화 「평화를 찾는 에이스들」(Los ases buscan la paz)이 만들어졌고, 쿠벌러와 사미티에르가 자기 자신으로 출연했다. 카탈루냐 저항의 구단에 온 난민 스타를, 그 저항을 누르던 정권이 간판으로 썼다.
1952년 2월 10일 레스코르츠, 7골
출전 정지 때문에 그는 1951년 4월에야 공식전에 나섰다. 스페인 국적으로 처음 뛴 대회는 그해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였고, 바르셀로나는 그 대회를 우승했다. 그 사이 친선 경기에서는 프랑크푸르트를 상대로 두 경기 연속 6골 5도움을 기록하며 레스코르츠를 들썩이게 했다.
첫 온전한 시즌인 1951-52 시즌, 그는 리그 19경기에서 26골을 넣었다. 1952년 2월 10일 홈에서 스포르팅 히혼을 9-0으로 꺾은 경기에서는 혼자 일곱 골을 넣었고, 셀타 비고를 상대로는 다섯 골, 세비야와 라싱 산탄데르를 상대로는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코파 결승에서도 발렌시아를 4-2로 꺾는 데 한 골을 보탰다. 그 시즌 바르셀로나가 든 트로피가 다섯 개였다. 라마예츠(Antoni Ramallets; FC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의 골키퍼, 1924-2013)가 골문을 지키고 바소라, 세사르, 쿠벌러, 모레노, 만촌이 공격을 이룬 「다섯 개의 컵」 팀이다.

1950년대의 그는 카탈루냐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구단은 지금의 메시조차 비교가 안 되는 인기였다고 적는다. 사람들은 「라 라스파」 가락에 「쿠벌러가 공을 들고 세사르에게 패스하고, 세사르가 골문에 쏜다」는 노랫말을 붙여 불렀고, 아이들은 그의 이름을 넣은 동요를 외웠다. 훗날 카탈루냐의 가수 조안 마누엘 세라트(Joan Manuel Serrat; 카탈루냐의 가수, 1943-)는 1980년 노래 「그때는 그때였지」(Temps era temps)에서 전후 바르셀로나의 기억을 부르며 바소라, 세사르, 쿠벌러, 만촌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1953년, 결핵에서 돌아온 공격수
1952-53 시즌 그는 결핵에 걸렸다. 선수 생명이 끝날 수 있다는 진단이었다. 그는 기적처럼 회복해 시즌 막판에 돌아왔고, 바르셀로나는 리그와 코파를 다시 들었다. 코파 결승에서 아틀레틱 클루브를 2-1로 꺾을 때도 그가 골을 넣었다. 같은 해 바르셀로나는 리버 플레이트와 합의해 디스테파노를 데려오려 했다. 레알 마드리드가 미요나리오스와 따로 협상하면서 분쟁이 됐고, 연맹이 두 구단이 한 시즌씩 번갈아 쓰라는 결정을 내리자 바르셀로나는 권리를 내려놓았다. 이때부터 쿠벌러의 바르셀로나와 디스테파노의 마드리드가 스페인 축구의 패권을 나눠 가졌다.
그해 7월 5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스페인 대표로 첫 경기를 치렀다. 세 번째 대표팀이었다. 10월 21일에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 창립 90주년을 기념한 웸블리의 잉글랜드 대 유럽 선발 경기에서 두 골을 넣었다. 경기는 4-4로 끝났고, 한 달 뒤 같은 잔디에서 헝가리가 잉글랜드를 6-3으로 무너뜨렸다.

1957년 9월 24일, 캄 노우가 문을 연 날
그를 보러 온 사람들이 레스코르츠에 다 들어갈 수 없어 새 경기장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널리 퍼져 있다. 구단의 설명은 조금 다르다. 새 경기장 구상은 그가 오기 전부터 있었고, 그가 그 구상을 서두르게 했다는 것이다. 1953년 「우리는 새 경기장이 필요하고, 원하며, 갖게 될 것」이라는 구호를 내건 프란세스크 미로산스(Francesc Miró-Sans; FC 바르셀로나 회장, 1918-2001)가 회장에 뽑혔고, 공사는 1955년에 시작됐다. 1957년 9월 24일, 바르셀로나의 수호성인 축일인 라 메르세에 캄 노우가 문을 열었다. 2억 8,808만 8,143페세타가 든 경기장이었다.
그해 그는 발롱도르 투표에서 5위에 올랐다. 11월 6일에는 마드리드에서 튀르키예를 상대로 스페인 대표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스코틀랜드, 스위스와 겨룬 1958년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했다. 대표팀에서 쌓은 19경기 11골은 끝내 본선 무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1958년, 헝가리 트리오
1956년 헝가리 혁명 뒤 혼베드의 코치시와 치보르 졸탄(Czibor Zoltán; 혼베드·FC 바르셀로나와 헝가리의 왼쪽 윙어, 1929-1997)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출전 정지를 마친 1958년, 두 사람을 바르셀로나로 부른 사람이 쿠벌러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선수 겸 스카우트 책임자 노릇을 한 셈이다. 페렌츠바로시에서 함께 뛰던 두 사람이 13년 만에 다시 한 팀이 됐다.

포지션마다 역대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세 사람에, 전성기가 막 시작된 루이스 수아레스와 브라질의 에바리스투(Evaristo de Macedo; 플라멩구·FC 바르셀로나와 브라질의 공격수, 1933-)가 더해졌다. 감독은 1958년 부임한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 FC 바르셀로나·인테르의 감독, 1910-1997)였다. 바르셀로나는 1958-59 시즌 리그와 코파를, 1959-60 시즌 리그와 인터시티스 페어스컵을 들었다. 첫 페어스컵인 1955-58 대회 우승 때도 쿠벌러가 있었다. 그 대회 이야기는 1955-58 인터시티스 페어스컵에 정리했다.
1960년 4월, 벤치의 쿠벌러
에레라와 쿠벌러는 잘 맞지 않았다. 규율을 앞세운 감독은 밤의 바르셀로나를 즐기던 스타에게 통금을 걸었고, 쿠벌러는 따르지 않았다. 그는 주전에서 밀렸다. 1960년 4월 유러피언컵 4강에서 바르셀로나는 레알 마드리드를 만났고, 쿠벌러가 빠진 바르셀로나는 1·2차전을 모두 1-3으로 져 탈락했다. 그 결과로 에레라는 바르셀로나를 떠나 인테르로 갔고 쿠벌러는 다시 자리를 찾았다.

1961년 5월 31일 베른, 네모난 골대
1960-61 시즌 1라운드에서 바르셀로나는 다섯 번 연속 유러피언컵을 든 레알 마드리드를 만났다. 마드리드에서 2-2로 비기고 바르셀로나에서 2-1로 이겨, 처음으로 유러피언컵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떨어뜨린 구단이 됐다. 쿠벌러가 그 공격을 이끌었다. 바르셀로나는 함부르크와의 재경기 끝에 결승에 올랐다.
5월 31일 베른 반크도르프 경기장의 상대는 벤피카였다. 코치시의 선제골로 앞섰지만 골키퍼 라마예츠의 실수와 햇빛 속에 두 골을 내줬고, 3-2로 졌다. 바르셀로나의 공은 네 번 골대를 맞혔다. 사각형으로 깎은 골대가 둥글었다면 우승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지금도 바르셀로나에 전한다. 그날 벤피카를 이끈 사람은 헝가리 출신 감독 구트만 벨러였다. 결승 뒤 바르셀로나는 팀을 갈아엎었고, 그 첫 결정이 쿠벌러를 내보내는 것이었다. 구단은 이를 인기 없는 결정이었다고 적는다.
1961-1967, 그라운드와 벤치 사이
은퇴한 그는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을 맡았다가 1962-63 시즌 1군 감독이 됐지만, 페어스컵에서 츠르베나 즈베즈다에 져 물러났다. 1963년 여름 캐나다의 토론토 시티에서 다시 공을 찼고, 같은 해 RCD 에스파뇰에 선수 겸 감독으로 갔다. 그곳에서 1964년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 온 서른여덟의 디스테파노와 한 팀이 됐고, 아들 브랑코를 라리가에 데뷔시켰다. 1966년 스위스의 FC 취리히에서도 선수 겸 감독을 맡아, 그해 유러피언컵 우승팀이 되는 셀틱을 상대로 마지막 유러피언컵 경기를 뛰었다. 1967년에는 토론토 팰컨스에서 처남 다우치크, 처조카 얀코, 아들 브랑코와 한 팀이 됐다.
1969년부터 1980년까지, 스페인 대표팀의 11년
1969년 그는 스페인 대표팀 감독이 됐다. 1980년까지 11년, 68경기를 지휘해 31승 21무 16패를 남겼다. UEFA는 그가 세상을 떠난 2002년, 그때까지 누구보다 오래 스페인 대표팀을 맡은 감독이었다고 적었다. 1970년과 1974년 월드컵 예선에서는 탈락했지만,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으로 스페인을 12년 만에 본선에 올려놓았고 1980년 이탈리아의 UEFA 유로 본선에도 나갔다. 두 대회 모두 조별 리그에서 끝났다. 선수로는 끝내 밟지 못한 본선 무대를 그는 감독으로 두 번 밟았다.

그 뒤로도 그는 1980년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잠시 돌아왔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알힐랄과 말라가를 거쳐 1995년 파라과이 대표팀까지 맡았다. 말라가는 1988년 그의 지휘로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000년 2월 스페인 정부는 그에게 스포츠 공로 훈장 대십자장을 줬다.
2002년 5월 17일, 그리고 캄 노우 앞의 동상
1993년 4월 24일 몬주익 경기장에서 그를 위한 공로 경기가 열렸다. 예순다섯의 그는 카탈루냐 선발 유니폼을 입고 처음 몇 분을 직접 뛰었다. 2002년 2월 그는 칼슘 부족으로 바르셀로나의 병원에 입원했고, 5월 17일 일흔넷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튿날 산타 테클라 성당에서 열린 장례에는 바르셀로나의 옛 선수와 현역 선수들, 레알 마드리드와 에스파뇰의 임원들이 함께했다. 그는 캄 노우 옆 레스코르츠 묘지에 묻혔다. 그해 7월 FIFA는 그에게 공로 훈장을 추서했고, 이듬해 5월 스페인 노동사회부는 노동 공로 금메달을 추서했다.

2009년 9월 24일 바르셀로나 원로 선수회의 기금으로 만든 그의 청동상이 캄 노우 앞 광장에 섰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올드 트래퍼드 앞에 바비 찰턴과 데니스 로, 조지 베스트의 동상이 서 있듯, 바르셀로나는 경기장 앞 광장에 그를 세웠다. 2012년 6월 15일, 그가 바르셀로나와 계약한 지 62년이 되는 날에는 부다페스트의 버셔시 경기장에도 그의 흉상이 섰다. 버셔시는 유소년 아카데미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역대 클럽·국대 기록
간츠 TE194410경기 · 3골
페렌츠바로시 TC1945-194649경기 · 33골
ŠK 슬로반 브라티슬라바1946-194833경기 · 14골
버셔시 SC1948-194920경기 · 10골
FC 바르셀로나1950-1961256경기 · 194골
토론토 시티1963기록 자료 미확인
RCD 에스파뇰1963-196529경기 · 7골
FC 취리히1966-196712경기 · 7골
토론토 팰컨스196719경기 · 5골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1946-19476경기 · 4골
헝가리 대표팀19483경기 · 0골
스페인 대표팀1953-196119경기 · 11골바르셀로나는 구단이 세는 공식전 기록이며, 친선 경기를 더하면 357경기 281골이다. 헝가리 시절 구단 기록은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페렌츠바로시를 49경기 27골이나 50경기 33골로 적는 자료도 있다). 1949년 이탈리아의 프로 파트리아와 1950년 헝가리아에서 뛴 경기는 출전 정지 기간의 친선 경기라 카드에 넣지 않았다. 토론토 시티(1963년 캐나다 동부 프로 리그)의 기록은 확인하지 못했다. 대표팀은 RSSSF가 정리한 A매치 기준이며, 1953년 웸블리의 유럽 선발과 카탈루냐 선발 경기는 넣지 않았다. 문장은 쿠벌러가 뛰던 시기의 것이다. 간츠 TE와 토론토의 두 구단은 남은 문장 자료가 없어 그 도시의 당시 문장을 썼고, 버셔시는 1943-1949년 문장 자료가 없어 바로 다음 시기인 1949년판을, FC 취리히는 현재 문장을 썼다. 대표팀 문장은 셔츠에 달던 그 나라의 당시 국장이다.
역대 등번호
클럽
| 소속팀 | 확인 기간 | 등번호 |
|---|---|---|
| FC 바르셀로나 | 1950-1961년 경기 자료 | 9 · 7 · 8 · 10 |
| RCD 에스파뇰 | 1963-1965년 | 자료 미등록 |
국가대표팀
| 대표팀 | 확인 기간 | 등번호 |
|---|---|---|
| 체코슬로바키아 | 1946-1947년 | 고정 번호 없음 |
| 헝가리 | 1948년 발칸컵 | 고정 번호 없음 |
| 스페인 | 1953-1961년 | 고정 번호 없음 |
쿠벌러의 시대에는 시즌 전체에 고정된 번호가 아니라 그날 선 자리에 따라 1번부터 11번을 다는 방식이었다. 바르셀로나 구단이 적는 「다섯 개의 컵」 팀의 공격진 순서(바소라, 세사르, 쿠벌러, 모레노, 만촌)대로 그는 1950년대 초 중앙 공격수의 9번을 달았다. 코치시가 중앙에 선 1958년 이후에는 오른쪽 윙어와 인사이드 자리의 7번, 8번, 10번으로 옮겨 다녔다. 그는 월드컵이나 대륙 선수권 본선에 나선 적이 없어 대회 등록 번호도 남아 있지 않다.
대표 우승 경력
우승: 1951-52, 1952-53, 1958-59, 1959-60
우승: 1951, 1952, 1953, 1957, 1959
우승: 1952, 1953
준우승: 1960-61
우승: 1952
우승: 1955-58, 1958-60
쿠벌러 라슬로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스페인 왕립 스포츠 공로 훈장 · 대십자장Real Orden del Mérito Deportivo, Gran Cruz · 2000년
스페인 노동 공로 금메달Medalla de Oro al Mérito en el Trabajo · 2003년 추서
- 발롱도르1957년 5위
- 월드 사커 올해의 세계 베스트 111961년 · 오른쪽 윙어
- 잉글랜드 축구 협회 창립 90주년 유럽 선발웸블리 잉글랜드전 두 골1953년
- FC 바르셀로나 구단 역대 최고의 선수창립 100주년 팬 투표1999년
- IFFHS 20세기 최고의 선수 투표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선정세계 32위 · 유럽 24위
- FIFA 공로 훈장2002년 추서
오늘날 쿠벌러 라슬로는 어떻게 평가받는가
바르셀로나 안에서 그의 자리는 흔들린 적이 없다. 1999년 100주년 투표의 1위였고, 구단은 지금도 1950년부터 1961년까지를 그의 이름으로 부른다. 메시가 모든 기록을 갈아 치운 뒤에도 바르셀로나 팬들이 구단사의 첫 장을 펼치면 그의 이름이 나온다. 삥이FC가 고른 FC 바르셀로나 역대 베스트 11에서도 그는 메시와 함께 공격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바르셀로나 밖의 평가는 그보다 박하다. IFFHS의 20세기 투표에서 세계 32위, 유럽 24위였고, 스페인 선수로 좁히면 디스테파노와 푸슈카시 다음이었다. 같은 시대 레알 마드리드의 두 사람은 유러피언컵을 여러 번 들었고 그는 한 번도 들지 못했다. 세 나라의 유니폼을 입고도 월드컵 본선에 서지 못했다는 사실도 그의 국제적 무게를 덜어 낸다. 필자는 그 차이를 트로피의 수로만 읽지 않는다. 디스테파노가 레알 마드리드를 유럽의 왕조로 만들었다면, 쿠벌러는 바르셀로나가 무엇을 사랑하는 구단인지를 처음 보여 줬다. 이기는 것만큼 어떻게 이기는지를 따지는 바르셀로나의 미학은 크라위프보다 먼저 그에게서 시작됐다.
부다페스트의 헝가리 사람들은 그를 황금의 팀에 들지 못한 아쉬운 이름으로 기억하고, 브라티슬라바 사람들은 슬로반의 아들로,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라시라는 애칭으로 기억한다. 한 사람이 세 도시에서 각자의 이름으로 불린다. 20세기 중부 유럽의 국경이 그를 쫓아냈고, 그는 가는 곳마다 그 도시가 사랑할 축구를 남겼다.
FC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를 한 명만 꼽아야 한다면, 삥이FC의 답은 쿠벌러 라슬로다.
참고 자료
- FC 바르셀로나 공식 사이트: Ladislao Kubala, 1950-1961. The Kubala era, 70 years since the signing of Kubala(2020년 6월 15일): 1950년 6월 15일 계약과 1951년 4월 데뷔, 허벅지 둘레와 휘어 차기, 1952년 일곱 골, 다섯 개의 컵 팀, 회원 2만 6,300명에서 5만 2,791명, 캄 노우 구상과 건설비, 「라 라스파」와 영화, 1993년 몬주익 공로 경기, 2009년 동상, 버셔시의 동상, 친선 경기를 포함한 357경기 281골과 우승 목록.
- FC 바르셀로나: Tres partidos contra el Benfica(2025년 1월 20일), Enrique Orizaola (1961): 1961년 베른 결승의 전개와 네 번의 골대, 네모난 골대 이야기, 결승 뒤 쿠벌러를 내보낸 결정.
- RSSSF: Ladislao Kubala Stecz, Goals in International Matches: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스페인 28경기 15골의 경기별 목록.
- RSSSF: IFFHS' Century Elections, European Footballer of the Year: IFFHS 20세기 투표의 세계·유럽·스페인 순위, 1957년 발롱도르 5위.
- Beyond the Last Man: Eric Batty's World XIs, the sixties: 1961년 『월드 사커』 세계 베스트 11의 오른쪽 윙어.
- 스페인 관보 BOE 2000년 2월 5일 자, 왕령 177/2000: 스포츠 공로 훈장 대십자장 수여.
- FC 바르셀로나 공식 사이트(스페인어): Ladislao Kubala: 2003년 5월 5일 노동사회부의 노동 공로 금메달 추서.
- UEFA: Award for Barcelona great(2002년 7월 29일): FIFA 공로 훈장 추서, 1999년 창립 100주년 투표, 스페인 대표팀 68경기 31승 21무 16패와 최장 재임.
- Read the League: Kubala, the man who built Barcelona: 트럭 짐칸의 망명, 다뉴브를 건넌 아내와 아들, 토리노의 초청과 불참, 에레라와의 갈등.
- ESPN 데포르테스: Finales para la historia, Benfica 3-2 Barcelona: 1961년 결승과 1960년 4강 뒤 에레라의 경질.
- Idioma y Deporte: Joan Manuel Serrat and sports: 1980년 노래 「Temps era temps」에 등장하는 바소라·세사르·쿠벌러·만촌.
- Logopedia: ŠK Slovan Bratislava, Ferencvárosi TC, Vasas SC, 위키미디어 공용: 체코슬로바키아 작은 국장, 헝가리 국장(1946-1949): 기록 카드의 당시 문장.
- 본문 사진: 『에스타디오』 1953년 7월 18일 자(퍼블릭 도메인) ·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 Anefo(1953년 암스테르담, 1973년 스히폴, C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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