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관통한 철학, 저항의 상징, 축구의 미학. 필자가 선정한 바르셀로나 역대 최고의 11인을 비롯해 후보 15인, 추가 15인까지 전설이 된 이름들을 시대와 감정의 언어로 조명한다.
클럽 그 이상, 세계 최초의 사회적 협동 구단
FC 바르셀로나라는 이름을 부를 때, 우리가 지칭하는 것은 축구팀 하나가 아니다. 그건 지중해를 둘러싼 철학의 파동이고, 프랑코 독재 아래서의 저항과 언어의 사수였으며, 경기장에서마저도 침묵을 무기로 사용했던 민족주의자의 유니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축구가 감정이고, 정치이며,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20세기와 21세기를 가로질러 증명한 하나의 문명이었다.
바르셀로나의 역사란, 누가 더 많은 골을 넣었는가보다 누가 더 많은 철학을 남겼는가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술’이 아닌 ’정체성’으로, ’기록’이 아닌 ’의미’로, ’선수’가 아닌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41명을 호출했다. 1899년에 태어나 회원이 주인인 구조를 120년 넘게 유지해 온 구단이고, 그동안 라리가를 스물아홉 번 가져갔다.[1]
선정 전술: 120년을 세운 4-3-3
열한 자리 가운데 다섯을 라마시아가 채운다. 푸욜과 부스케츠, 차비와 이니에스타, 그리고 메시다. 같은 훈련장에서 같은 말을 듣고 자란 사람이 절반 가까이 되는 명단이다. 한 자리씩 차례로 부르고, 열한 명이 함께 선 대형은 글의 끝에서 펼친다.
골문에는 수비사레타가 서고, 그 앞은 바르주안과 아우베스가 양쪽을 잡고 쿠만과 푸욜이 가운데를 막는다. 쿠만이 후방에서 경기를 설계하고 푸욜이 그 뒤를 쓸어 담으니, 한 명이 올라간 자리를 다른 한 명이 메우는 구성이다.
중원은 세 명인데 이 셋이 곧 티키타카의 삼각형이다. 부스케츠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공을 받고, 차비가 그 앞에서 방향을 정하며, 이니에스타가 상대 진영으로 들어가 매듭을 푼다.
앞도 세 명이다. 왼쪽에 호나우지뉴가 서서 상대의 균형을 깨고, 오른쪽에 메시가 안으로 접혀 들어오며, 가운데에 쿠벌러가 선다. 쿠벌러가 내려와 공을 받으면 양쪽 윙이 안으로 들어오는 구조이고, 그 사이를 중원의 셋이 채운다.
1. 안도니 수비사레타 - 골키퍼

바르사의 골문을 열면, 가장 먼저 수비사레타의 그림자가 보였다.
1986년, 바르셀로나가 아틀레틱 클루브로부터 영입해 왔던 바스크 출신의 골키퍼 안도니 수비사레타(Andoni Zubizarreta Urreta; 스페인 골키퍼, 1961-)는 단 한 번도 팀의 간판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그 얼굴의 바깥 테두리를 완성하는 자였다.
1986년부터 1994년까지 요한 크라위프(Hendrik Johannes Cruijff; 네덜란드 공격수·감독, 1947-2016)가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서 전 세계의 GOAT가 되어 프란츠 베켄바워(Franz Anton Beckenbauer; 독일 수비수·감독, 1945-2024)와 여전히 라이벌리를 형성할 때 안도니 수비사레타는 “드림팀의 수문장”이었고, 라리가 우승 4회는 물론 유러피언컵 결승전까지 견인했었다. 통산 416경기 369실점, 클린시트 173회다.
수비사레타는 “막아낸 슈팅”보다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로 수비를 펼치던 골키퍼였다. 그의 장점은 균형 잡힌 포지셔닝, 그리고 수비 라인과의 유기적 거리 조절이었다. 숫자로 보면 더 기이하다. 그는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622경기를 뛰었고 그 622경기가 전부 선발이었다. 교체로 들어간 경기가 한 번도 없다는 뜻이고, 그 622경기 동안 실점은 625골이다.[8] 경기당 한 골 언저리를 18년 동안 유지한 골키퍼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가 이 구단을 떠난 날도 경기장이었다. 1994년 아테네,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AC 밀란에 0-4로 무너진 그 경기가 그의 마지막이었고 그는 곧 발렌시아 CF로 갔다.[8]
그는 캄 노우(Camp Nou)의 가장 깊은 문이었다.
2. 로날트 쿠만 - 센터백

제라르 피케의 롤 모델조차 넘어서 중앙 수비수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한 인물 로날트 쿠만(Ronald Koeman; 네덜란드 수비수·감독, 1963-). 그는 후방에서 출발했지만, 결코 뒤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수비수였으나 경기를 바꾸는 선수였고, 공격을 설계했으며, 결승골을 터뜨린 센터백이었다.
센터백의 몸, 미드필더의 뇌, 스트라이커의 심장. FC 바르셀로나 소속 264경기 88골이며, 유럽 무대 최정상급 수비수임에도 역대 수비수 최다 골이다. 1993-94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이기도 했다.
그리고 1992년 5월 20일 웸블리.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UC 삼프도리아를 상대로 연장까지 간 0-0을 프리킥 한 방으로 끝낸 사람이 쿠만이다. 경기가 승부차기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 골이 이 구단의 첫 유러피언컵이었고, 그날부터 그는 웸블리의 영웅이라 불렸다.[2]
요한 크라위프 감독은 로날트 쿠만을 통해 스페인에 “토털 풋볼”의 원형을 심었으며, 바르셀로나 축구가 21세기에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주제프 과르디올라, 차비 에르난데스, 리오넬 메시의 공도 있으나 그 뿌리는 로날트 쿠만을 두고 있다.
롱패스, 프리킥, 페널티킥을 모두 전담했던 로날트 쿠만은 한 번에 수비 라인을 넘어서는 직선형 패스를 통해 공격을 조율했으며, 수비수로서의 미학이 아닌 ’축구 전체의 언어를 이해한 구조자’로 이해하는 것이 옳겠다. PSV 에인트호번에서 1987-88시즌 트레블을 이끌며 발롱도르 5위까지 진입했던 그는 토털 풋볼을 후방에서 구현한 철학의 구체적 화신이었다.
3. 카를레스 푸욜 - 센터백

그는 동료들로부터 상어(El Tiburón)라고 불리며 엄청난 수비 집중력을 자랑했었는데, 카를레스 푸욜(Carles Puyol Saforcada; 스페인 수비수, 1978-)이 센터백임에도 2006년과 2011년에 걸쳐 발롱도르 순위권에 진입하고 2005-06시즌 UEFA 클럽 최우수 수비수로 선정되었던 사례가 그를 대변한다.
전 동료 하비에르 마스체라노(Javier Alejandro Mascherano; 아르헨티나 미드필더, 1984-)는 이런 말을 남겼다.
푸욜은 한 발 늦어도 태클하고, 두 발 늦어도 싸우고, 세 발 늦어도 사과하지 않더군요. 그는 팀을 위해 늦는 법이 없었어요.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그의 머리는 야생마였지만, 그의 정신은 수도승이었다.
그가 대표팀에서 밟은 무대를 늘어놓으면 2000년대 스페인 축구의 연표가 그대로 나온다. 2002년 한일, 2006년 독일, 2010년 남아프리카까지 세 번의 월드컵과 2004년 포르투갈, 2008년 오스트리아·스위스 두 번의 UEFA 유로, 그리고 2009년 컨페더레이션스컵.[11] 스페인이 아무것도 못 하던 시절부터 세계를 다 가져가던 시절까지, 뒷선에는 내내 같은 곱슬머리가 서 있었다.
바르셀로나를 단 한 번도 떠나지 않았던 원 클럽 맨으로서 593경기에 출전했고, 주장으로서 UEFA 챔피언스 리그 3회 우승은 물론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 그리고 FIFA 클럽 월드컵까지 제패했던 푸욜은 21세기 스페인 축구와 화합의 상징이기까지 했다. 바르셀로나라는 팀이 ’가족’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4. 세르지 바르주안 - 레프트백

근래에는 조르디 알바가 세르지 바르주안(Sergi Barjuán Esclusa; 스페인 수비수, 1971-)을 넘어 역대 베스트 11을 넘보기도 한다. 그는 전술을 배운 게 아니라 전술 그 자체를 상징했고, 철학을 읊던 존재라기보단 바르사 철학 자체를 살아낸 자에 가까웠다.
라 마시아(La Masia; 구단 유스 아카데미) 출신이 아님에도 그 누구보다 바르사스러웠으며, 1990년대 스페인 좌측 수비라인의 모든 구조적 해답을 바르주안 혼자서 들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는 늘 정확했고, 침착했고, 올바른 해답을 제시하며 바르사 축구의 수비와 공격에 관여했는데 그의 크로스는 상당히 정제된 편이었으며, 태클은 상대 공격수들의 질주를 저지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공간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어울리는 듯한 세련된 플레이는 바르사 드림팀의 핵심이 될 수 있었던 직접적 원인이 되었었다. 통산 382경기 11골 27도움이다.
그가 서 있던 자리를 시간으로 재 보면 왜 이 명단에 드는지가 보인다. 1993년에 들어와 2002년에 나갔으니, 크라위프의 드림팀 막바지를 받아서 세기말의 긴 침체를 통과하고 호나우지뉴가 오기 직전까지를 혼자 건넌 셈이다. 우승이 쏟아지던 구간과 아무것도 없던 구간을 같은 자리에서 다 겪은 왼쪽 수비수다.
트로피가 많을 때 잘하는 선수는 흔하다. 트로피가 없을 때도 같은 크로스를 올리는 선수가 드물다.
5. 다니 아우베스 - 라이트백

2010년대 중반, 전 세계에서 축구를 가장 잘한 인물 3명을 거론하라면 리오넬 메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그리고 다니 아우베스(Daniel Alves da Silva; 브라질 수비수, 1983-)가 유력하다.
라이트백이라는 포지션을 해체한 윙백의 재해석을 보였던 ‘광기 어린 사내’ 다니 아우베스는 미친 존재감으로 축구는 예술이라는 명제를 참으로 만들었었다. 축구 역사상 두 번째로 가장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린 선수로 기억되고 있기도 하는데, 바르사 소속으로만 23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커리어 내내 43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기도 했었다.
그의 오버래핑은 보조가 아닌 주도였고, 그의 크로스는 선택이 아닌 선언에 가까웠는데 상대 진영에서 볼을 더 오래 소유했던 것이 참으로 기이한 실력이었다.
리오넬 메시의 안쪽 침투와 리버스 삼각형을 완성시키는 지렛대로서 수비 시에도 포지셔닝과 전방 압박 기점으로도 가능하니, 브라질 축구사에서는 자우마 산투스(Djalma Santos; 브라질 수비수, 1929-2013),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Carlos Alberto Torres; 브라질 수비수, 1944-2016), 카푸(Marcos Evangelista de Morais ‘Cafu’; 브라질 수비수, 1970-)에 이어 TOP 4 자리를 마킹하고 있기도 하다.
6. 세르히오 부스케츠 - 수비형 미드필더

당신이 경기 중 그를 봤다면, 아마 그는 실수 중일 것이다.
빅토르 발데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미드필더였으나 가장 눈에 띈 전설이기도 하다. 대선배 주제프 과르디올라는 물론 스페인 축구사 BIG 3 중 한 명인 루이스 수아레스 미라몬테스를 제쳐두고, 필자는 세르히오 부스케츠(Sergio Busquets Burgos; 스페인 미드필더, 1988-)에게 FC 바르셀로나 역대 베스트 11 한자리를 제공한다.
바르사 1군 통산 722경기 18골 46도움이라는 스탯은 팀 동료 이니에스타보다 월등한 출전 숫자인데, 이 긴 기간 동안 라리가 우승 9회, 코파 델 레이 우승 7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3회, FIFA 클럽 월드컵 우승 3회를 차지하며 구단의 트레블 2회를 이끄는 데 핵심이 되었던 수비형 미드필더다.
그가 얼마나 빨리 올라왔는지를 보면 과르디올라가 그를 어떻게 봤는지가 보인다. 2008년에 1군에 붙어 2009년 3월 7일 캄 노우에서 아틀레틱 클루브를 상대로 프리메라 첫 골을 넣었고, 그해 5월 27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선발로 섰다.[9] 팀은 2-0으로 이겼다. 1군 데뷔에서 유럽 정상까지 한 시즌이 채 걸리지 않은 것이다.
부시(Busi)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펩을 닮되 그를 넘었고, 그 넘음은 소리 없는 혁명에 가까웠다. 패스 성공률 90% 이상, 전방 압박에 대한 내성, 수비와 공격 연결의 완급 조절. 팀 동료 차비와 이니에스타가 전방을 누빌 수 있던 이유에는 언제나 부스케츠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7. 차비 에르난데스 - 중앙 미드필더

리뉘스 미헐스(Rinus Michels; 네덜란드 축구 감독, 1928-2005) 감독, 요한 크라위프, 요한 네이스컨스, 로날트 쿠만 등 네덜란드의 ‘토털 풋볼’ 철학이 스페인 땅에 상륙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차비 에르난데스(Xavier Hernández Creus; 스페인 미드필더, 1980-) 덕분이다. 때문에 바르셀로나는 21세기에 ’티키타카’라는 유명한 워딩으로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기도 하다.
라 마시아 출신인 차비는 총 767경기 85골 184도움을 기록했다. 여기서 숫자 하나는 바로잡아야 한다. 이 767경기는 구단 역대 최다 출전이 아니라 두 번째이며, 그 앞에 선 사람은 778경기의 리오넬 메시다.[3] 이 명단의 열 번째 자리에 있는 그 사람이다. 대신 차비는 UEFA 챔피언스 리그 4회 우승인 모든 순간에 핵심 of 핵심으로 군림했던 리더였다.
경기당 100회 이상의 패스 연결은 기본이며, 공격 3선과 수비 3선을 동시에 읽는 중간자의 통제력을 통해 경기장을 리딩 했고, 전진 패스의 타이밍이 기가 막혔기에 축구는 포지션 게임의 핵심이라는 논리를 완성시키기도 했었다.
21세기 수비형 미드필더 1대장이라고 불리는 안드레아 피를로(Andrea Pirlo; 이탈리아 미드필더, 1979-)마저 “그는 공을 받기도 전에 360도를 스캔하더라”라며 경외심을 표현하니, 차비의 위상이 21세기 미드필더 중 어느 수준에 위치하고 있는지 경기를 못 본 팬들도 체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리뉘스 미헐스의 공간 인식론, 요한 크라위프의 사상적 압축, 주제프 과르디올라의 축구관. 이 모든 것을 구현했다는 것 자체로 이미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운 차비이다.
8.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 공격형 미드필더

여전히 축구 팬들에게 차비와 이니에스타는 끝나지 않는 논쟁거리이다. 그만큼 안드레스 이니에스타(Andrés Iniesta Luján; 스페인 미드필더, 1984-)의 위상이 높고, 차비는 물론 루이스 수아레스의 어깨를 넘볼 만큼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상술사(El Ilusionista)라는 별명답게 그라운드 위에서 마법 같은 드리블로 상대 수비수 사이를 비집던 이니에스타는 리오넬 메시가 없어도, 알렉시스 산체스가 없어도, 네이마르가 없어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의 트레블이 가능했다.
그는 움직임과 정지 템포를 가져갈 때의 ’순간 가속’이 좋았는데 때문에 좁은 공간에서 유려하게 탈압박이 가능했고, 이는 마치 음악처럼 리듬을 바꾸는 키가 되기도 했었다.
그의 이름을 한 장면으로 줄이면 2009년 5월 스탬퍼드 브리지다. 첼시 FC에 0-1로 끌려가며 탈락 직전이던 후반 추가시간 93분, 그가 박스 밖에서 때린 슈팅이 골대 구석에 꽂혔다. 그 한 골로 합계가 1-1이 되었고 원정 다득점으로 바르셀로나가 결승에 올랐다.[7] 스페인 사람들이 그 골에 붙인 이름이 이니에스타소(Iniestazo)다. 이름 뒤에 확대사를 붙여 부르는 골이 한 선수의 경력에 몇 개나 되겠는가.
모든 시도가 정확했고, 모든 움직임이 정직했던 이니에스타는 부스케츠, 차비와는 다른 결로 그라운드 위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했는데 때문에 문도 데포르티보(Mundo Deportivo; 바르셀로나의 스포츠 일간지, 1906년 창간)는 이렇게 찬사를 보내기도 했었다.
그가 없는 바르셀로나는 있었지만, 그가 없는 바르셀로나는 사랑받기 힘들다.
문도 데포르티보
9. 호나우지뉴 - 레프트 윙

축구가 예술로 불릴 수 있었던 유일한 시기, 바르셀로나가 가장 매혹적인 춤을 추던 시대, 그리고 캄 노우 전체가 매일 밤 축제의 장이었던 2000년대 중반.
브라질 축구사에서 공격수의 절대자를 거론하라면 펠레 외 가린샤와 지쿠가 호출된다. 이들을 감히 넘보던 존재가 있었다면 그는 2000년대 중반, 파리 생제르맹에서 바르사로 이적했던 호나우지뉴(Ronaldo de Assis Moreira ‘Ronaldinho’; 브라질 공격수, 1980-)였다.
2004-05시즌 엘 클라시코에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 팬들의 기립 박수를 호출하던 호나우지뉴는 그 활약 덕분에 2005년 발롱도르 1위, 옹즈도르 1위, FIFA 올해의 선수 1위라는 트리플크라운을 장식했었다.
호나우지뉴는 상대의 균형을 깨는 드리블로 관중의 심장을 먼저 흔들었고, 공보다 경기장의 분위기를 끌고 다녔다.
2003년, FC 바르셀로나가 몰락의 길을 걸을 때, 그리고 팀의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있던 시기 등장한 호나우지뉴는 바르셀로나를 다시 ’즐거운 팀’으로 바꾸었고, 전 세계 팬들의 시선을 이탈리아나 잉글랜드가 아닌 스페인으로 다시 호출했던 공격수였다.
엘라스티코, 스텝오버, 백힐 노룩 패스, 중앙에서 좌측으로 이동하며 시작된 시작 없는 드리블. 심지어 ‘웃으면서’ 드리블을 하던 그 모습은 광기였다.
그가 캄 노우에 있던 기간은 다섯 시즌뿐이다. 207경기 94골. 숫자만 놓으면 이 명단의 앞뒤에 선 사람들보다 한참 짧고 한참 적다. 그런데도 그가 왼쪽 윙에 서는 이유는, 이 구단의 역사에서 무너진 분위기를 되돌린 사람이 그 말고 잘 없기 때문이다.
2003년의 바르셀로나는 구단 역사상 최악의 리그 가운데 하나를 막 통과한 팀이었다. 직전 시즌에 한때 15위까지 떨어졌고 루이 판할(Louis van Gaal; 네덜란드 축구 감독, 1951-)은 시즌 중간에 경질됐다.[12] 캄 노우에 사람이 줄었고 유럽의 시선은 세리에 A와 프리미어 리그에 가 있었다. 거기에 호나우지뉴가 왔고, 2년 뒤 그는 적지의 관중을 일으켜 세웠으며, 세계 축구의 시선이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에 온 사람이 메시다.
그러니까 이 명단에서 호나우지뉴의 자리는 트로피 개수로 매겨진 게 아니다. 메시가 올라설 무대를 데워 놓은 값이다.
10. 리오넬 메시 - 라이트 윙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수훈, 발롱도르 8회. 대충 이런 숫자는 눈 달린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리오넬 메시(Lionel Andrés Messi Cuccittini; 아르헨티나 공격수, 1987-)가 펠레와 필적할 만한 기량을 갖춘 것은 물론 수상 트로피와 우승 개수가 축구사 GOAT 자격을 갖추고 있고, 21세기 호날두와의 라이벌리를 형성하며 20세기 크라위프와 베켄바워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적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바르셀로나의 신이자, 축구라는 종교의 현현, 그리고 펠레와 함께 전 인류가 공유하는 GOAT의 결정.
에스파뇰과의 바르셀로나 더비, 경기 종료 8분 전이었다. 그날 교체로 들어간 열일곱 살짜리가 공식전 데뷔를 했고, 스물두 살이던 2009년에 첫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를 같은 해에 받았다.[10]
그리고 그가 떠날 때 가져간 ’역대 1위’의 목록이 이렇다.
한 사람이 소속 구단과 조국과 리그의 최다 득점 기록을 동시에 들고 있다. 여기에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유럽 출신이 아닌 선수 가운데 최다 득점까지 붙는다.[10] 축구가 100년 넘게 굴러오는 동안 이 조합을 맞춘 사람은 없었다. 2014-15시즌에는 라리가와 UEFA 챔피언스 리그의 통산 최다 득점 기록을 한 시즌 안에 갈아치우면서 두 번째 트레블과 다섯 번째 발롱도르를 함께 가져갔다.[10]
여기에 2022 FIFA 월드컵 우승과 골든볼, 코파 아메리카, 올림픽 금메달, U-20 월드컵 우승까지 더하면 세계 축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풀 패키지 완성자다. 하지만 이 모든 기록이 그를 설명하진 못한다. 그는 ’기록’이 아닌 ’감정’에 남는 존재로서 이미 조국에서는 알프레도 디스테파노(Alfredo Di Stéfano Laulhé; 아르헨티나 공격수, 1926-2014)와 디에고 마라도나(Diego Armando Maradona; 아르헨티나 공격수, 1960-2020)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에.
펠레가 축구를 세계의 언어로 만든 자라면, 메시는 그 언어를 시로 바꾼 사람이다. 펠레가 민족의 정체성과 희망이었다면, 메시는 개인의 구원과 감정의 해방이었다. 펠레는 축구가 국가의 자존심이라는 걸 보여줬고, 메시는 축구가 ’존재의 이유’라는 걸 증명했다. 펠레가 전 세계의 눈을 브라질로 돌렸다면, 메시는 전 세계가 자신의 심장을 바르셀로나에 놓게 만들었다.
팬들은 그가 공을 잡는 순간 TV 앞으로 모였고, 그의 골 세리머니에 의미를 부여했고, 그가 고개를 떨군 날 그들도 하루 종일 우울해했다. 그 어떤 마케팅도, 시스템도, 감독도 그만큼의 감정 선순환을 만든 적이 없었다.
신을 두고, 무슨 서술을 이어가겠는가.
11. 쿠벌러 라슬로 - 세컨드 스트라이커

FC 바르셀로나의 서문, 민족을 넘어선 천재, 그리고 축구사 가장 독보적 계승자의 원형.
쿠벌러 라슬로(Kubala Stecz László;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스페인 공격수, 1927-2002)는 축구 선수로서 살아낸 3개의 국적을 가졌고, 펠레와 마라도나와 메시도 갖지 못한 시대를 초월한 영향력을 남겼으며, 1950년대의 스페인 축구를 하룻밤 사이 ’현대화’한 존재였다.
FC 바르셀로나 소속 357경기 280골, 라리가 4회와 코파 델 레이 5회, 유러피언컵 준우승 1회다. 여기에 하나가 더 붙는데, 유럽 대항전의 시작을 알린 1955-58 인터시티스 페어스컵과 1958-60 대회를 연달아 들어 올린 것이 그다.[6] 구단 역대 최다 골 3위이며, 그가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와 스페인 세 대표팀에 모두 출전한 것은 FIFA 역사상 유일한 기록이다.[4] 세 개의 유니폼에는 20세기 중부 유럽의 국경이 그대로 찍혀 있다.

첫째, 바르셀로나의 재건자다. 그는 프랑코 정권 하에서 카탈루냐 문화가 짓밟히던 시절 헝가리 공산 정권을 피해온 이주민이었고, 그 자신이 저항이었다.
여기서 그가 스페인까지 온 경로를 짚고 가야 한다. 1949년 1월, 소련이 헝가리를 점령하고 위성국으로 만들던 그때 쿠벌러는 트럭 짐칸에 숨어 국경을 넘었다.[6] 갈 곳이 없어지자 이듬해 1월에는 동유럽에서 함께 도망쳐 나온 선수들을 모아 헝가리아(Hungária; 망명 선수들로 꾸린 유랑 축구단)라는 팀을 직접 만들었다. 매형 페르디난드 다우치크(Ferdinand Daučík; 체코슬로바키아 축구 감독, 1910-1986)가 감독이었다. 나라를 잃은 선수 열몇 명이 유럽을 돌며 친선 경기로 먹고살던 팀이다.
헝가리 협회는 그를 무단 이탈자로 제소했고 FIFA는 그 손을 들어 1년 국제 출전 금지를 내렸다. 그래서 1950년에 바르셀로나에 온 그가 실제로 라리가를 밟은 것은 1951년이다.[6]
그리고 여기에 이 이야기의 뒤틀린 대목이 있다. 그의 스페인 시민권이 놀라운 속도로 나온 이유는 프랑코 정권이 소련 위성국에서 도망쳐 나온 난민 스타를 체제 선전에 쓰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6] 카탈루냐 저항의 구단에 온 저항의 상징을, 그 저항을 짓밟던 정권이 반공 간판으로 썼다. 쿠벌러의 유니폼은 그러니까 한쪽에서 보면 저항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선전이었다.
둘째, 캄 노우 건립의 결정적 동기다. 1957년, 바르사는 쿠벌러 효과로 캄 데 레스코르츠를 넘어서 캄 노우 신축에 착수했는데, 한 사람의 등장이 도시의 확장과 구단의 운명을 바꾼 원인이 되었었다.
이 대목은 한 번 더 뜯어볼 값이 있다. 경기장은 보통 구단이 커져서 짓는다. 성적이 오르고 회원이 늘고 돈이 모여서 짓는다. 그런데 레스코르츠에서 캄 노우로 넘어간 이 건은 한 명의 선수를 보러 온 사람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위의 사진이 그 옛 경기장이다. 저 관중석의 규모를 보면 왜 버틸 수 없었는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축구장 이름을 바꾼 선수는 더러 있어도, 축구장을 새로 짓게 만든 선수는 흔하지 않다.
셋째, 바르셀로나 축구 철학의 원형이다. 토털 풋볼, 포지션 붕괴, 테크닉과 창조성과 공간 인식. 이 모든 전술이 크라위프 이전, 쿠벌러에게서 이미 구현됐었다. 축구 조금 좋아하는 팬들은 알 것이다. 헝가리 풋볼이 이미 ’바르셀로나 축구’를 1940~50년대부터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한 경기장에 선 열한 명
이 명단은 FC 바르셀로나의 가장 위대했던 41인의 명단이다.
이 열한 명을 한 계보로 묶는 것은 공을 다루는 방식이다. 여기 선 사람들은 공을 멀리 보내기보다 붙들어서 이기는 쪽이다. 쿠만은 수비수인데 패스로 공격을 설계했고, 부스케츠는 수비형 미드필더인데 패스 성공률이 90%를 넘었으며, 차비는 한 경기에 패스를 100번 넘게 댔다. 골키퍼조차 막는 것보다 ’시도조차 못 하게 만드는 구조’로 설명된다.
그리고 그 방식이 어디서 왔는가를 따라가면 1950년대의 한 이주민에게 닿는다. 크라위프가 오기 20년 전에 이미 쿠벌러가 그렇게 했고, 그 쿠벌러의 축구는 헝가리에서 왔다. 토털 풋볼이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으로 건너온 이야기로만 기억되지만, 이 명단을 세로로 세워 보면 헝가리에서 카탈루냐로 먼저 건너온 길이 하나 더 보인다.
필자가 이 명단을 세우며 끝까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의 방식이 100년 동안 어떻게 전해졌는가였다. 쿠벌러에서 크라위프로, 크라위프에서 차비와 이니에스타로 넘어간 것은 공을 붙들고 이기는 습관이었다.
이미지 밖에서 다시 읽는 후보 15인
열한 자리는 이 구단이 배출한 이름을 다 담지 못한다. 편집물 안의 이름을 검색 가능한 텍스트로 아래에 다시 적는다.[5]
이미지 밖에서 다시 읽는 추가 15인
기록을 확인한 곳
- 구단 연혁과 라리가 우승 연도 — 스페인어 위키백과 「Fútbol Club Barcelona」와 RSSSF 「Spain - List of Champions」. 1899년 창단과 사회적 협동 구단이라는 지배 구조, 라리가 우승 연도.
- 로날트 쿠만 — 스페인어 위키백과 「Ronald Koeman」. 1992년 5월 20일 웸블리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UC 삼프도리아를 상대로 넣은 프리킥 결승골이 구단 최초의 유러피언컵이며, 그때 얻은 별명이 웸블리의 영웅이다.
- 차비 에르난데스의 출전 기록 — 스페인어 위키백과 「Xavi Hernández」. 공식전 767경기 85골이며 구단 역대 출전은 리오넬 메시에 이어 두 번째다.
- 쿠벌러 라슬로 — 스페인어 위키백과 「László Kubala」. 1950년대 바르셀로나에서의 280골,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스페인 세 대표팀 출전 기록, 슬로바키아 출신 부모와 헝가리 태생이라는 배경. 경기 수는 이 자료의 345경기와 선수 카드의 357경기로 갈린다.
- 후보 서른 명의 원어와 국적 — 표기가 갈린 세 건은 각 인물 문서로 대조했다. `Miguel Ángel Nadal Homar`의 악센트, 바스크 철자 `Begiristain Mujika`, 헝가리식 성명 순서 `Czibor Zoltán`이다.
- 쿠벌러 라슬로의 망명과 제재 — 영어 위키백과 「Ladislao Kubala」. 1949년 1월 트럭 짐칸으로 헝가리를 빠져나온 경위, 1950년 1월 망명 선수들로 꾸린 헝가리아, 헝가리 협회의 제소와 FIFA의 1년 국제 출전 금지, 프랑코 정권이 난민 신분을 체제 정당화에 이용해 시민권을 신속히 내준 배경, 1951년 라리가 데뷔,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1955-58과 1958-60 우승.
-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의 2009년 스탬퍼드 브리지 득점 — 스페인어 위키백과 「Andrés Iniesta」. 첼시 FC에 0-1로 뒤지던 93분의 동점골과 원정 다득점에 따른 결승 진출.
- 안도니 수비사레타의 출전 기록 — 스페인어 위키백과 「Andoni Zubizarreta」. 프리메라 디비시온 622경기 전부 선발과 625실점, 1994년 아테네 유러피언컵 결승 이후의 이적.
- 세르히오 부스케츠의 데뷔기 — 스페인어 위키백과 「Sergio Busquets」. 2009년 3월 7일 아틀레틱 클루브전 프리메라 첫 골과 같은 해 5월 27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선발 출전.
- 리오넬 메시의 데뷔와 보유 기록 — 스페인어 위키백과 「Lionel Messi」. 2004년 10월 16일 에스파뇰전 열일곱 살 데뷔와 데쿠와의 교체, 2009년 스물두 살의 첫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 FC 바르셀로나·아르헨티나 대표팀·라리가·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UEFA 슈퍼컵 역대 최다 득점과 UEFA 챔피언스 리그 비유럽 선수 최다 득점, 2014-15시즌의 기록 경신과 두 번째 트레블.
- 카를레스 푸욜의 대표팀 경력 — 스페인어 위키백과 「Carles Puyol」. 2002·2006·2010년 세 번의 월드컵과 2004·2008년 두 번의 UEFA 유로, 2009년 컨페더레이션스컵 참가.
- 2002-03시즌의 바르셀로나 — 스페인어 위키백과 「Primera División de España 2002-03」. 시즌 도중 15위까지 내려앉아 구단 역사상 최악의 리그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 경위와 루이 판할의 시즌 중 경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