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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레티코 마드리드
Club Atlético de Madrid, Sociedad Anónima Deportiva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그림자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전사의 클럽,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이 콘텐츠는 라리가 역사에서 가장 강인한 혼을 지닌 구단의 역대 베스트 11과 후보 15인을 소개하는 헌사이자 연대기이다.
핏빛 자존, 강철의 혼을 걷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콜초네로스(Los Colchoneros; 매트리스 장수들), “침대 매트리스 장수들”이라는 뜻을 가진 이 팀의 별명은 빨간색과 하얀색 줄무늬 유니폼에서 비롯되었다. 옛 매트리스의 겉감이 꼭 그 무늬였다. 그 줄무늬 속에 투혼과 저항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1903년 4월 26일, 당시 바스크 지역 출신 대학생들이 “마드리드에 빌바오 지부를 만들자”라며 한낱 이념의 싹으로 창립한 이 클럽은, 시간이 흐르며 스스로의 철학과 서사를 창조해나갔다. 처음 이름은 아틀레틱 클루브 마드리드 지부(Athletic Club, Sucursal de Madrid)였고 셔츠도 빌바오를 따라 파란색과 흰색을 반씩 나눈 것이었다. 붉고 흰 줄무늬는 1911년에 빌바오와 함께 갈아입었고, 지부라는 꼬리표는 1920년대 초에 뗐다.
그들은 귀족도, 자본도 아니었다. 도시 외곽에서 태어나, 도시 안에서도 늘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위치했던 구단. 그러나 바로 그 소외감이 오히려 유대감을 낳았다. 노동자, 이민자, 빈민, 청년, 투쟁자. 그들은 레알 마드리드의 반대편에서 자신들의 꿈을, 슬픔을, 목소리를 “아틀레티코”라는 유니폼에 담아 지켜왔다.
마드리드라는 도시 안에서도 왕관과 의전의 상징인 레알이 빛날 때, 아틀레티코는 늘 그 이면에서 흙과 피로 싸운 도시의 또 다른 심장이었다. 이름이 두 번 바뀌는 동안에도 그랬다. 내전이 끝난 1939년 10월 4일, 선수단이 무너진 구단은 공군 축구단 아비아시온 나시오날(Aviación Nacional)과 협정을 맺고 아틀레틱 아비아시온 클루브가 되었다. 1941년 1월에는 클루브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으로, 1947년 1월에는 지금의 클루브 아틀레티코 데 마드리드로 이름을 바꿨다.[1] 공군과의 인연은 이름에서 지워진 뒤에도 남아, 스무 해 뒤 이 명단의 열한 번째 사람을 마드리드로 데려오는 데 쓰인다.
위 철학을 구단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실천해왔다. 1970년대의 전성기, 그 이후 수차례의 침체기, 그리고 21세기 초반의 방황을 지나 아틀레티코는 2011년, 디에고 시메오네(Diego Pablo Simeone; 아르헨티나 축구 감독, 1970-) 감독의 귀환과 함께 다시금 근성의 왕국으로 부활했다. 방황의 바닥은 2000년부터 두 시즌을 보낸 2부 리그였다. 선수로 1995-96시즌의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를 한꺼번에 들었던 시메오네는 2011년 12월 23일에 감독으로 돌아왔다. 첫 트로피는 부임 다섯 달 만인 2012년 5월 9일 부쿠레슈티의 UEFA 유로파 리그 결승에서 들었는데, 상대가 아틀레틱 클루브였다. 그 뒤까지 합치면 라리가 두 번과 코파 델 레이 한 번, UEFA 유로파 리그 두 번, UEFA 슈퍼컵 두 번,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한 번을 들었고 지금도 벤치에 있다. 지휘한 경기 수로는 이미 아라고네스를 넘어섰다.
지지 않는 팀, 버티는 팀, 한 골을 지키기 위해 11명이 뛰는 팀, 스타가 아니라 시스템이 빛나는 팀, 그래서 섹시한 팀. 이 콘텐츠는, 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라는 이름 아래 핏빛 열정과 근성, 조직과 헌신을 지켜낸 26인의 위대한 이름들을 기억하는 연대기이다.
이 명단을 처음 고른 것은 2025년 5월이다. 그 뒤로 한 시즌이 지났다. 2025-26시즌 알레띠는 라리가를 4위로 마쳤고, UEFA 챔피언스 리그는 4강에서 아스널 FC에, 코파 델 레이는 결승에서 레알 소시에다드에 막혔다. 그리에즈만은 그 시즌을 끝으로 떠났고, 코케는 2027년 6월까지 한 해를 더 뛰기로 했다.[5] 아래의 숫자는 2026년 10월에 다시 맞춘 것이다.
빌바오의 지부 · 두 번 바뀐 이름 · 세 번 옮긴 집 · 근성의 왕국
북쪽 끝에서 강가로, 강가에서 동쪽 끝으로
“도시 안에서도 늘 중심이 아닌 변두리”라는 말은 이 구단의 주소를 따라가 보면 그대로 맞는다. 구단은 레티로 공원 옆의 공터(1903-1913)와 오도넬 거리의 구장(1913-1923)을 거쳐 1923년 5월 13일 스타디움 메트로폴리타노(Stadium Metropolitano)에 들어갔다. 마드리드 지하철을 놓은 오타멘디 형제가 지은 경기장이고, 자리는 레이나 빅토리아 대로가 끝나는 곳이었다. 지하철 콰트로 카미노스 역에서 1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그때 마드리드의 북쪽 끝이다. 처음에는 2만 5천 명쯤이 들어갔고, 축구가 없는 날에는 육상과 럭비, 개 경주가 열렸다. 형제는 마드리드의 모든 구단에 세를 놓을 생각이었으나 끝까지 남은 세입자는 이 구단 하나였고, 구단이 그 집의 주인이 된 것은 1950년이다. 내전 때 부서진 경기장은 1943년 6월에야 다시 열렸다.[1]
옛집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이 1965-66시즌이고 구단은 그해 라리가를 들었다. 우승한 집을 두고 이사한 것이다. 1966년 10월 2일, 남쪽 만사나레스 강가의 새 경기장이 문을 열었다. M-30 순환도로가 본부석 밑을 지나가는 자리다. 6만 2천 명이 들어가는 경기장이었고, 유럽의 큰 리그에서 관중석 전부에 의자를 놓은 첫 경기장이었다. 첫 경기는 발렌시아 CF와 1-1로 비겼고, 그 경기장의 첫 골을 머리로 넣은 사람이 이 명단의 일곱 번째 루이스 아라고네스다. 경기장은 1971년 7월 14일에 회장의 이름을 따 비센테 칼데론(Estadio Vicente Calderón)이 되었다.[2] 그해 막 입단한 가라테는 첫 경기를 북쪽 골대 뒤 관중석에서 봤다. 그의 기억으로는 본부석이 다 지어지지 않아 한쪽이 뚫려 있었고 몹시 추웠으며, 팬들이 메트로폴리타노를 떠나 새집에 정을 붙이기까지 몇 해가 걸렸다.[3]
2017년 9월 16일에는 동쪽 끝 산블라스카니예하스로 다시 옮겼다. 마드리드 자치주가 1994년에 지은 육상 경기장이 있던 자리이고, 마드리드가 올림픽을 유치하려 했을 때마다 주경기장으로 잡아 둔 곳이다. 관중석 모양 때문에 라 페이네타(La Peineta; 머리빗)라 불리던 그 경기장을 구단이 2008년에 사서 고쳐 지었고, 이름은 옛집에서 가져왔다. 6만 8천 석으로 열어 지금은 7만 석을 넘는다. 첫 경기에서 말라가 CF를 1-0으로 이겼는데 그 골을 넣은 사람이 이 명단의 열 번째 그리에즈만이다. 구단은 그날의 기록에 “루이스가 만사나레스에서 그랬던 것처럼”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 집을 직접 가 볼 사람은 메트로폴리타노 직관 글에 길과 자리를 적어 두었다.
| 집 | 자리와 첫 골 | 이 명단에서 뛴 사람 |
|---|---|---|
| 스타디움 메트로폴리타노1923-1966 | 북쪽 끝, 레이나 빅토리아 대로. 첫 골은 몬친 트리아나 | 코야르, 카예하, 리비야, 아델라르도, 아라고네스 |
| 만사나레스, 1971년부터 비센테 칼데론1966-2017 | 남쪽 강가. 첫 골은 아라고네스 | 열한 명 전부 |
| 메트로폴리타노2017- | 동쪽 끝, 산블라스카니예하스. 첫 골은 그리에즈만 | 오블라크, 고딘, 코케, 그리에즈만 |
표를 가로로 읽으면 이 명단의 생김새가 나온다. 열한 명 전부가 뛴 집은 강가의 그 경기장 하나다. 다섯은 북쪽의 옛집에서 강가로 이사했고, 넷은 강가에서 동쪽으로 이사했으며, 가라테와 아르테체 둘만 한 집에서 시작해 한 집에서 끝냈다. 새집의 첫 골은 두 번 다 이 명단에서 나왔다.
2017년 5월 21일, 칼데론의 마지막 리그 경기 상대는 아틀레틱 클루브였다. 114년 전 이 구단을 지부로 낳은 구단이다. 페르난도 토레스가 두 골을 넣고 앙헬 코레아가 마지막 골을 넣어 3-1로 이겼다. 그 경기장은 지금 헐리고 없다.
선정 전술: 120년을 세운 4-3-3
열한 명 가운데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사람은 오르탈레사의 아라고네스와 바예카스의 코케 둘뿐이다. 그 아라고네스조차 레알 마드리드가 먼저 데려갔다가 1군 공식전에 한 번도 세우지 않고 내보낸 선수였고, 스물여섯에 레알 베티스에서 왔다. 나머지 아홉은 팔렌시아와 아빌라, 바다호스, 세비야 근교, 칸타브리아, 바스크의 에이바르, 우루과이와 슬로베니아, 프랑스에서 왔다. 골문부터 차례로 부르고, 열한 명이 한 장에 모인 대형은 글의 끝에 둔다.
같이 뛴 사람끼리 묶으면 두 무리가 된다. 코야르와 카예하, 리비야, 아델라르도, 아라고네스, 가라테 여섯은 1966-67시즌과 1967-68시즌을 한 팀에서 보냈다. 오블라크와 고딘, 코케, 그리에즈만 넷은 2014년 여름부터 2019년 여름까지 다섯 시즌을 함께했다. 그 사이에 선 아르테체는 이 명단의 누구와도 같이 뛰지 않았다. 대신 그의 감독이 아라고네스였다.
구단의 라리가 우승 열한 번에 이 명단을 겹쳐 보아도 같은 그림이 나온다. 1966년의 우승은 코야르와 카예하, 리비야, 아델라르도, 아라고네스가 함께 들었다. 1970년에는 카예하와 아델라르도, 아라고네스, 가라테가, 1973년에는 아델라르도와 아라고네스, 가라테가 들었다. 1977년에는 가라테가 선수로, 아라고네스가 감독으로 들었다. 2014년은 고딘과 코케, 2021년은 코케와 오블라크다. 아비아시온 시절의 두 번(1940, 1941년)과 엘레니오 에레라의 두 번(1950, 1951년), 시메오네가 선수로 뛴 1996년은 이 열한 명이 없던 우승이고, 그 빈칸은 후보 명단의 벤바레크와 카미네로가 메운다.
골문에는 오블라크가 서고, 그 앞은 카예하와 리비야가 양쪽을 잡고 아르테체와 고딘이 가운데를 막는다. 아르테체가 몸으로 지우고 고딘이 상황을 읽으니, 성질이 정반대인 센터백 두 장이라 한쪽이 힘으로 눌리는 날에도 다른 쪽의 판단이 남는다.
중원은 세 명인데 이 셋의 성질이 겹치지 않는다. 아델라르도가 가운데에서 짧은 패스로 맥을 잇고, 코케가 왼쪽으로 내려가 압박의 각을 잡으며, 아라고네스가 오른쪽에서 반 발 올라서 수비 조직의 틈을 찾아 마무리까지 들어간다.
앞도 세 명이다. 왼쪽에 코야르가 서서 선을 타고, 가운데에 가라테가 박스 안을 지키며, 그리에즈만이 오른쪽에서 안으로 접혀 들어온다. 그리에즈만이 내려와 공을 받으면 가라테가 앞으로 밀고 들어가는 구조이고, 그 사이 코야르가 왼쪽 끝에서 수비를 벌려 준다.
1. 얀 오블라크 - 골키퍼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은 2025년 5월의 숫자다. 트로페오 리카르도 사모라는 그 뒤 한 번이 더해져 여섯 번이 되었다.
필자는 이 선수를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2010년대, 마누엘 노이어(Manuel Peter Neuer; 독일 골키퍼, 1986-)의 권능에 감히 도전하던 골키퍼.
얀 오블라크(Jan Oblak; 슬로베니아 골키퍼, 1993-)는 마드리드의 훈련장에서 항상 가장 늦게 들렸고, 경기장에선 가장 먼저 등장했으며, 그리고 경기 후엔 늘 조용히 사라졌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속에 사는 인간은 아니지만 팬들의 마음속에 사는 인간임은 분명하다.
슬로베니아의 작은 도시 슈코피아로카에서 태어나 열여섯에 올림피야 류블랴나의 골문을 지켰고, 2014년 여름 SL 벤피카에서 1,600만 유로에 왔다. 그때까지 라리가 구단이 골키퍼 한 명에게 쓴 가장 큰 돈이었는데, 첫 시즌 전반기 내내 그는 미겔 앙헬 모야의 뒤에 앉아 있었다. 2015년 3월 17일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 바이어 04 레버쿠젠전에서 모야가 전반에 다쳐 나가자 장갑을 꼈고, 승부차기의 첫 킥을 막아 팀을 8강에 올렸다. 그날부터 골문은 그의 것이다.
라리가에서 가장 위대한 골키퍼 중 한 명으로 성장한 얀 오블라크는 한국에서는 “난공불락”이라는 별명을 얻게 하였으며, 활약에 힘입어 라리가 최우수 골키퍼에게 수여하는 트로페오 리카르도 사모라(Trofeo Ricardo Zamora) 역시 수차례 수상하기도 하였다. 처음 받은 2015-16시즌에 그가 리그 서른여덟 경기에서 내준 골은 열여덟 개였고, 이것은 라리가 한 시즌 최소 실점 기록과 같은 숫자다. 2024-25시즌에는 서른여섯 경기에서 서른 골을 내주고 열다섯 경기를 무실점으로 막아 여섯 번째 트로피를 받았다. 다섯 번이던 안토니 라마예츠와 빅토르 발데스를 넘어선 대회 역사상 최다다.[1]
그는 골키퍼이지만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선택의 순간마다 등장한다. 크로스는 ‘손으로 잡아내고’, 슈팅은 ‘예측하여’ 쳐내며,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팀의 1-0 스코어를 끝내 방어하는 스타일.
특히 2015-16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vs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4강 결전이나 2017-18시즌 UEFA 유로파 리그 4강이었던 아스널 FC와의 결전은 얀 오블라크 축구 인생 중 가장 큰 하이라이트라고 평가해도 무방하다.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그는 토마스 뮐러(Thomas Müller; 독일 공격수, 1989-)의 페널티킥을 막아냈고, 팀은 2-1로 지고도 원정 다득점으로 결승에 올랐다.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는 경기 시작 10분 만에 한 명이 퇴장당한 팀의 골문을 여든 분 동안 지켜 1-1을 들고 돌아왔다. 2차전을 1-0으로 이긴 알레띠는 리옹의 결승에서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를 3-0으로 눌렀다.
2020년 3월 11일 안필드도 그의 밤이다.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리버풀 FC의 슛 아홉 개를 막았고, 알레띠는 연장에 세 골을 넣어 3-2로 이겼다. 슬로베니아 대표팀의 주장으로 나선 UEFA 유로 2024 16강에서는 연장전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페널티킥을 막았다. 그 경기도 승부차기에서 졌다.
2016년 산 시로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은 승부차기까지 가서 졌고, 그가 막아 낸 킥은 하나도 없었다. 막아 낸 것으로 팀을 결승에 올려놓고 막지 못한 것으로 우승을 놓쳤으니, 이런 결말마저 참 알레띠답다.
2. 후안 카를로스 아르테체 - 센터백

하이라이트 영상도, 박제된 트로피 목록도 많지 않다. 때문에 21세기 이후 축구에 익숙한 대한민국 축구 팬들에게는 더욱이 호명되는 일이 없는 센터백이다. 그러나 후안 카를로스 아르테체(Juan Carlos Arteche Gómez; 스페인 수비수, 1957-2010)는 ’의지의 체급’으로 알레띠를 빛냈던 알레띠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수비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파괴적이지 않았고, 빛나지도 않았으나 절대로 무너지지 않았고, 절대로 등을 보이지 않았으며, 절대로 팀을 떠나지도 않았었다. 칸타브리아 말리아뇨에서 태어나 라싱 데 산탄데르에서 뛰다가 1978년 스물한 살에 알레띠로 왔고, 열한 시즌을 여기서만 보냈다.[1]
처음 온 그는 거칠고 투박한 센터백이었다. 첫 별명이 알가로보(Algarrobo; 쥐엄나무)였으니 나무토막 같다는 놀림이다. 그런데 첫 세 시즌을 브라질 사람 루이스 페레이라의 옆에서 뛰며 멀리 걷어내기보다 먼저 빼앗는 법을 배웠고, 뒤에서 팀을 부리는 리베로로 자랐다. 그러자 별명이 아르테첸바워(Artechenbauer)로 바뀌었다. 믿는 사람은 진심으로, 깎아내리는 사람은 비꼬아서 똑같이 그렇게 불렀다. 레알 마드리드 쪽에서는 그를 탈구의 엔지니어라 불렀다.[4]
그는 알레띠가 가장 침묵에 잠겨있던 시기, 트로피가 멀어지고, 관중도 줄어들고, 심지어 구단의 정체성조차 흔들리던 그 시절. 그 누구보다 먼저 훈련에 앞섰으며, 가장 늦게 라커룸을 비웠다고 기억되고 있다. 그 열한 해 동안 그는 회장 넷을 겪었다. 그가 든 트로피는 1985년 코파 델 레이와 같은 해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둘이다. 1985년 6월 30일 베르나베우의 코파 결승에서 알레띠는 아틀레틱 클루브를 2-1로 이겼고, 두 골은 그 경기를 끝으로 레알 마드리드로 건너간 우고 산체스가 넣었다. 벤치에는 아라고네스가 있었다. 이듬해 리옹에서 열린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에서는 디나모 키이우에 0-3으로 졌다.
이 사람을 설명하는 경기는 결승이 아닌 데 있다. 1983년 11월 비가 퍼붓던 칼데론, 리그 열 번째 경기에서 알레띠는 레알 베티스에 1-3으로 지고 있었다. 한 골을 따라붙은 뒤 아르테체는 자기 진영을 비우고 상대 박스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86분에 머리로 한 골, 90분에 다시 머리로 한 골. 4-3이었다. 두 번째 골을 넣고 떨어지면서 무릎이 부러졌고 그는 들것에 실려 나갔다.
끝은 좋지 않았다. 1987년에 회장이 된 헤수스 힐은 이듬해 아르테체가 운동화를 판다는 핑계를 지어내 그를 팀에서 떼어 놓았다. 한 해 뒤 법원이 선수의 손을 들어 보상금을 매겼다. 유니폼을 벗은 뒤 그는 힐 일가에 맞선 반대파를 이끌었고, 그래서 구단의 공식 행사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2010년 10월 13일 그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 날 신문의 부고는 이렇게 끝난다.
아틀레티코 사람들의 가슴에서 그는 떠난 적이 없다.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Del corazón de los atléticos nunca se fue. Nunca se irá.
일간지 푸블리코의 부고 「문장 한 조각에 보내는 작별」, 2010년 10월 14일[4]
3. 디에고 고딘 - 센터백

세르히오 라모스, 제라르 피케, 조르조 키엘리니, 마츠 후멜스 등과 함께 2010년대 초중반 가장 이름을 떨쳤던 센터백 디에고 고딘(Diego Roberto Godín Leal; 우루과이 수비수, 1986-). 그는 현대 축구에서 유일하게 공을 ’막는 자’로서 전설이 된 선수이기도 하다.
화려하지 않았고, 패스도 특별하지 않았으며, 뚜렷하게 드리블을 시도하지도 못했다. 때문에 FIFPro 월드 XI에 진입하지 못했고, 대한민국 축구 팬들은 아직도 이를 두고 왈가왈부하고는 한다. 이렇듯 평범해 보였던 사내였으나, 라리가를 넘어 유럽, 남미에서 디에고 고딘을 뚫어내는 공격수 자체가 거의 없었고, 주앙 미란다와 디에고 고딘 라인이 해체되자마자 알레띠 수비력이 흔들리던 시기는 길었었다.
2010년 비야레알 CF에서 넘어와 아홉 시즌 동안 389경기를 뛰고 27골을 넣었으며 트로피 여덟 개를 들었다. 구단의 외국인 선수 가운데 가장 많은 트로피이고, 구단 전체로 쳐도 그보다 많이 든 사람은 열 개의 아델라르도뿐이었다.[1] 디자인의 별명은 말라깽이지만 우루과이에서 그는 파라오(El Faraón)다. 클루브 나시오날 데 풋볼 시절 고향의 중계진이 붙여 준 이름이다.
우루과이 대표로는 161경기를 뛰었다. 그 나라에서 가장 많은 숫자이고, 월드컵 네 번과 2011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이 그 안에 들어 있다.
공중전 장악력 라리가 최상위권. 중요 매치에서 세트피스 득점력 수준급. 맨마킹과 존 디펜스에 대한 완벽한 이해력. 경기 전체를 읽는 리더십과 커맨딩 능력.
이러한 능력에 힘입어 2013년 5월 17일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를 연장 끝에 2-1로 잡을 때, 그리고 꼭 한 해 뒤인 2014년 5월 17일 캄 노우 최종전에서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후반 시작과 함께 동점 헤더를 꽂아 라리가 우승을 확정할 때에는 모두 디에고 고딘이 등장하기도 하였었다. 비기기만 하면 되는 경기에서 선제골을 내준 뒤에 나온 헤더였다. 알레띠로서는 열여덟 해 만의 리그였고, 2004년부터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둘이서만 나눠 갖던 트로피였다. 그 한 해 전의 코파 결승도 가볍지 않다. 알레띠는 1999년 뒤로 열네 해 동안 레알 마드리드를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있었고, 그 줄을 끊은 곳이 상대의 집에서 열린 결승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리스본에서 한 번 더 머리를 들이댔는데, 이번에는 결말이 달랐다.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를 상대로 전반 36분에 먼저 넣고도 후반 추가시간 3분에 동점을 허용했고, 연장에서 세 골을 더 내주며 1-4로 졌다. 2014년 5월의 고딘은 여드레 사이에 같은 방식으로 두 번 골문을 열었고, 한 번은 리그를 가져왔으며 한 번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2019년 5월 7일 그는 기자회견장에서 울면서 떠난다고 말했다.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와 칼리아리 칼초를 거쳐 남미로 돌아갔고, 2023년에 축구화를 벗었다.
4. 이사시오 카예하 - 레프트백

그는 전술서보다 팀워크를 먼저 외웠고, 수비력보다 ’경기 감각’을 몸으로 익혔으며, 스포트라이트 대신 경기장 한 귀퉁이에서 팀 전체의 균형을 맞춘 풀백이었다.
이사시오 카예하(Isacio Calleja García; 스페인 수비수, 1936-2019)는 알레띠 통산 425경기에 나서며 라리가 우승 2회, 코파 델 레이 우승 4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 1회를 이끌었던, 1960년대 알레띠 최전성기를 지탱했던 수비수였다. 팔렌시아의 바예 데 세라토에서 태어나 1958년부터 1972년까지 열네 시즌을 뛰었다. 구단이 풀어 적은 425경기는 리그 300, 코파 76, 유러피언컵 15, 컵위너스컵 12,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16, 그 밖의 대회 6이다. 트로피 일곱 개 가운데 둘은 주장으로 직접 받아 들었는데, 1969-70시즌 라리가와 1972년 코파 델 레이다.[1] 1972년의 컵을 들고 그는 스파이크를 벗었으니, 구단의 1974년 인터콘티넨털컵은 그의 것이 아니다.
1966년에 입단한 가라테의 기억에 그 시절 라커룸의 우두머리는 셋이었다. 아르헨티나 센터백 그리파와 아라고네스, 그리고 카예하다. 새로 온 선수는 그 셋 앞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자리를 얻어야 했다고 한다.[3]
그가 든 유럽 트로피 하나는 사연이 길다. 1961-62시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 상대는 직전 대회 우승팀 AC 피오렌티나였고, 1962년 5월 10일 글래스고 햄던파크에서 만나 1-1로 비겼다. 그런데 재경기 날짜가 잡히지 않았다. 그해 여름 칠레에서 월드컵이 열려 빈 날이 없었던 것이다. 재경기는 넉 달 뒤인 9월 5일에야 슈투트가르트 네카르슈타디온에서 치러졌고, 알레띠가 3-0으로 이겼다. 구단 역사상 첫 유럽 트로피다. 이듬해에는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로테르담의 결승에 다시 올랐다가 토트넘 홋스퍼 FC에 1-5로 무너졌다.
그 두 결승 사이에 왼쪽을 지킨 방식이 그를 설명한다. 그는 전방으로 뛰어 올라가는 대신 위치 감각에 기대 자리를 지켰고, 하프라인과 페널티 박스 사이의 간격을 재면서 뒷공간이 벌어지지 않게 했다. 공을 잡으면 길게 끌지 않고 간결한 킥으로 넘겼으며, 페널티 박스 안에서는 미칠 듯 냉정했다. 이 4가지 포인트는 당시 라리가는 물론 유럽 내에서 알레띠 수비력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 시절 스페인 축구 시스템에서 풀백은 ’다재다능’이 요구되었는데 이사시오 카예하는 그 다재다능을 기교가 아닌 습관으로 해낸 사람이다.
스페인 대표로는 열세 경기를 뛰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64년 6월 21일 베르나베우의 UEFA 유러피언 풋볼 챔피언십 결승이다. 2019년 2월 4일 그는 마드리드에서 여든둘로 세상을 떠났다.
5. 펠리시아노 리비야 - 라이트백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양 날개’를 완성시킨 방패 쌍두였고, 스페인 축구 전술의 구조를 바꾼 ’60년대식 라이트백의 교본이었던 펠리시아노 리비야(Feliciano Muñoz Rivilla; 스페인 수비수, 1936-2017).
커리어 초반을 공격수로 시작했던 펠리시아노 리비야인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는 완전한 탈바꿈을 선언한다. 수비력, 체력, 위치 감각, 커버링 모든 것을 갖춘 풀백으로 진화한 그는 스페인 축구 대표팀에서까지 주전으로 자리매김하며 역사를 쓴 라이트백의 교본이 되었다.
아빌라에서 태어난 그는 1958년에 알레띠 1군에 올라와 1968년 은퇴할 때까지 열 시즌 동안 356경기를 뛰었다. 코파 델 레이 세 번(1960, 1961, 1965년)과 1965-66시즌 라리가, 1962년의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이 그의 것이다.[1] 스페인 대표로는 스물여섯 경기를 뛰었고 1962년과 1966년 월드컵에 갔다. 앞의 두 코파는 결승 상대가 모두 레알 마드리드였고 장소도 모두 베르나베우였다. 유러피언컵을 다섯 번 내리 든 팀을 그 팀의 집에서 두 해 연달아 잡은 것이다.
윙어 출신답게 빠른 커버, 오버래핑 타이밍이 완벽하며 크로스의 질 자체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고, 수비 전환 시 집중력과 복귀 속도가 매우 빨랐었다. 또한, 당시 기준으로는 드물게 양발 킥과 역방향 커버까지 가능했던 전술적 다기능 수비수. 오른쪽을 ‘봉인하는 수준’이었고, 21세기로 치면 AS 로마의 카푸나 유벤투스 FC의 릴리앙 튀람 정도를 호출할 수 있겠다.

그 대표팀이 1964년 자국에서 우승했을 때 그는 대회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렸다. 결승은 6월 21일 베르나베우였고 상대는 소비에트 연방이었다. 1-1로 맞서던 경기를 84분에 마르셀리노(Marcelino Martínez Cao; 스페인 공격수, 1940-2022)가 머리로 끝냈다. 그날 스페인의 오른쪽 수비가 리비야였고 왼쪽 수비가 카예하였다. 이 베스트 11의 양쪽 풀백은 예순두 해 전 대표팀의 결승에서 이미 한 번 나란히 서 본 사이다.
이사시오 카예하가 왼쪽의 철학이었다면, 펠리시아노 리비야는 오른쪽의 기술이었고, 때문에 두 풀백의 조합은 알레띠는 물론 스페인 축구 역사상 가장 안정적인 풀백 듀오라고 평가된다.
구단이 그를 보내며 차린 경기의 상대는 펠레의 산투스 FC였다. 1969년 만사나레스에서 그는 붉고 흰 셔츠를 입고 마지막 몇 분을 뛰었다. 1999년 구단 은퇴 선수회가 생겼을 때 첫 회장을 맡았고, 2017년 11월 6일 그가 세상을 떠나자 구단은 새집 메트로폴리타노의 깃발을 하루 동안 반만 올렸다.
6. 아델라르도 로드리게스 - 중앙 미드필더

트로피보다, 유니폼보다 오래 남은 ‘정체성’ 그 자체. 14년을 넘게 알레띠에 헌신하며, 수많은 동료와 감독을 맞이하였고, 그 중심에서 팬들에게는 항상 ’중원의 심장’으로 불렸던 사내.
아델라르도 로드리게스 산체스(Adelardo Rodríguez Sánchez; 스페인 미드필더, 1939-). 1959년, 에스트레마두라에서 상경해 수비수도 공격수도 아닌 청년이 중간에서 모든 걸 잇는 연결고리로 성장하니 가히 마드리드 시민들의 자존심이었다. 열아홉에 CD 바다호스에서 왔고, 라스팔마스 원정 데뷔전에서 골을 넣었다.[1]
열일곱 시즌 동안 553경기에서 113골을 넣었고 트로피 열 개를 들었다. 라리가 세 번, 코파 델 레이 다섯 번, 유러피언 컵위너스컵과 인터콘티넨털컵이 한 번씩이다. 이 구단에서 그보다 많은 트로피를 든 선수는 지금도 없다. 스페인 대표로는 열네 번 나서 두 골을 넣었는데, 그 하나가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넣은 골이다.
그 553경기는 오랫동안 이 구단의 최다 출전 기록이었고, 지금은 두 번째다. 2022년 10월 1일 코케가 그를 넘었다. 다만 기록이 옮겨 갔다고 열일곱 해가 짧아지지는 않는다.
중원과 하프 스페이스를 모두 커버하며, 롱볼보다 짧은 패스를 시도해 경기 흐름의 맥을 이었던 그는 간혹 강력한 중거리 슈팅으로 팀에게 승점 3점을 배달하기도 했었다. 구단을 처음 유러피언컵 결승에 올린 골도 그의 발에서 나왔다. 1974년 4월 24일 칼데론의 4강 2차전에서 가라테와 그가 한 골씩 넣어 셀틱 FC를 2-0으로 보냈다. 그 시절 유럽 최고의 스타 공격수였던 호세 에울로히오 가라테는 반세기 뒤 경기장에서 누구와 가장 잘 맞았느냐는 물음에 우파르테와 아델라르도 두 이름을 댔다.[3]
마지막 경기는 1976년 5월 1일 사리아에서 치른 RCD 에스파뇰 원정이었다. 넉 달 뒤 칼데론이 그를 위한 경기를 열었다. 그가 스스로 꼽는 가장 좋았던 순간은 인터콘티넨털컵이다.
7. 루이스 아라고네스 - 중앙 미드필더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368경기 172골은 자료에 따라 370경기 173골로도 적는다. 구단과 라리가는 그리에즈만이 기록을 따라잡은 날의 숫자를 173골로 센다.
누군가에게 그는 “UEFA 유로 2008 우승 감독”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 그는 “스페인 축구 철학을 창조한 전술가”일 수 있겠다. 하지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는 딱 한 문장의 설명으로 끝난다. 구단은 그를 붉고 흰 줄무늬의 가장 큰 전설(La gran leyenda rojiblanca)이라 적는다.[1]
루이스 아라고네스(José Luis Aragonés Suárez; 스페인 미드필더·감독, 1938-2014)는 알레띠에서 가장 많은 경기를 뛴 존재는 아니지만 선수와 감독으로서 1,000경기에 가깝게 팀에 헌신하며 무려 14번의 시즌 동안 구단의 슈퍼스타였었다. 그가 남긴 골은 2023년 12월까지 반세기 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구단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끝내 그것을 넘은 사람은 이 명단의 열 번째 자리에 앉아 있다.
그가 선수들에게 입버릇처럼 건넨 말은 “이기고, 이기고, 또 이겨라”였다.[2]
프리킥의 대가로서 팬들에게는 큰 부츠(Zapatones)라고 불렸으며, 볼을 기다리지 않고 공간을 만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경기장의 최후방부터 최전방까지 그가 관여했었다. 또한, 수비 조직을 읽고 균열을 유도하는 플레이는 가히 최강이었으며, ’창조와 결단’을 겸비한 축구사 이래 역대 최고의 지능형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헤타페에서 시작해 레알 마드리드에 묶인 채 여러 구단을 임대로 돌았고, 레알 오비에도와 레알 베티스를 거쳐 1964년에 왔다. 선수로서 그가 알레띠에서 든 것은 라리가 세 번과 코파 델 레이 두 번이다. 만사나레스 경기장의 첫 골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고, 이듬해 4월 코파 델 레이의 마요르카전에서는 혼자 네 골을 넣었다. 1969-70시즌에는 16골로 트로페오 피치치까지 받았는데, 단독 수상은 아니었다. 아만시오 아마로(Amancio Amaro Varela; 스페인 공격수, 1939-2023), 그리고 같은 팀 동료인 호세 에울로히오 가라테와 셋이 같은 16골로 나란히 1위였다.[6] 이 베스트 11의 일곱 번째와 열한 번째가 같은 시즌의 득점왕을 나눠 가졌다.
가장 유명한 골은 지고 만 경기에 있다. 1974년 5월 15일 브뤼셀의 유러피언컵 결승, 연장 후반에 그가 프리킥을 감아 넣어 1-0을 만들었다. FC 바이에른 뮌헨의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가 중거리 슛으로 동점을 만든 것은 경기가 끝나기 직전이다. 이틀 뒤의 재경기는 0-4였다.
그리고 선수로 채우지 못한 칸 하나를 그는 감독으로 채운다. 그해 가을 서른여섯의 나이로 스파이크를 벗자마자 같은 팀의 감독이 되었다. 바이언이 출전을 사양해 준우승팀 알레띠가 대신 나간 인터콘티넨털컵에서, 그의 팀은 1975년 3월 아르헨티나 원정을 0-1로 내주고 4월 10일 칼데론에서 인데펜디엔테를 2-0으로 이겼다. 감독으로서도 그는 라리가 한 번과 코파 델 레이 세 번, 수페르코파 한 번을 더 얹었고, 2부로 떨어진 구단을 2002년에 1부로 다시 올려놓았다. 네 차례에 걸쳐 이 구단을 맡았다.
2부에 있던 그 두 해에 그가 1군에서 쓴 십 대 공격수가 페르난도 토레스다. 여섯 해 뒤인 2008년 6월 29일 빈의 UEFA 유로 결승에서 스페인의 감독은 아라고네스였고, 결승골을 넣은 사람은 토레스였다.

그가 떠나던 2014년 2월 1일, 경기장엔 빈 와인 잔이 놓였고, 한쪽 골대엔 붉은 꽃이 꽂혔는데 아틀레티코 팬들은 그를 ‘지도자’, ‘감독님’ 등이 아닌 “엘 사비오(El Sabio de Hortaleza; 오르탈레사의 현자)“라고 불렀다. 이튿날 칼데론은 경기가 시작되고 8분 동안 소리를 내지 않았다. 8은 그의 등번호다. 팀은 레알 소시에다드를 4-0으로 이기고 열여덟 해 만에 리그 맨 윗자리에 올랐으며, 석 달 뒤 그 자리에서 시즌을 마쳤다. 경기가 끝나고 시메오네가 한 말이다.
루이스는 틀림없이 저 위에서 붉고 흰 옷을 입고, 이 용기를 보며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Seguro que Luis estará ahí arriba vestido de rojiblanco y contento por la valentía.
디에고 시메오네, 2014년 2월 2일 레알 소시에다드전 뒤 기자회견[2]
8. 코케 - 중앙 미드필더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679경기 48골은 2025년 5월의 숫자다. 2026년 7월 구단이 적은 기록은 740경기 50골이다.
선배 가비를 이은 주장, 루이스 아라고네스의 권능에 도전하는 자. 마드리드 태생으로서 ’레알’이 아닌 ’아틀레티코’를 선택했던 선수.
코케(Jorge Resurrección Merodio; 스페인 미드필더, 1992-)의 플레이는 빠르지 않고, 그렇다고 눈부시지도 않으나 경기장을 90분간 가장 넓게 지배하는 미드필더로 2010~20년대 알레띠의 가장 중요한 주장이기도 하다.
마드리드 남동쪽의 노동자 동네 바예카스에서 태어나 어릴 때 구단 유소년에 들어왔다. 1군 첫 경기는 2009년 9월 19일 캄 노우 원정이었다. 2-5로 지던 경기의 마지막 23분을 뛰었다.[1]
2022년 10월 1일 세비야 원정에서 그가 554번째 공식전에 나섰다. 그 한 경기로 반세기 가까이 버티던 이름 하나가 자리를 옮겼는데, 그 이름이 이 명단의 여섯 번째 자리에 있는 아델라르도였다. 그 뒤로도 숫자는 멈추지 않았다. 2026년 7월 재계약 때 구단이 적은 기록은 740경기 50골 122도움, 트로피 여덟 개다. 서른넷이던 2025-26시즌에도 쉰여섯 경기를 뛰었다.[5] 다른 구단의 셔츠는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완장은 가비가 2018년에 떠나며 고딘에게 갔다가, 고딘이 떠난 2019년에 그에게 왔다.
그가 든 트로피 가운데 하나가 2020-21시즌 라리가다. 루이스 수아레스(Luis Alberto Suárez Díaz; 우루과이 공격수, 1987-)가 휴대폰을 붙들고 울던 바야돌리드 원정과 메트로폴리타노를 가득 채운 ¡CAMPEONES! 배너가 그 시즌의 끝이었다. 2021년 5월 22일의 그 최종전은 0-1로 끌려가다 앙헬 코레아와 수아레스의 골로 뒤집은 경기다. 2013년 베르나베우의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 연장의 결승골을 만든 프리킥도 그의 발에서 나갔다. 그리고 그는 2014년 리스본과 2016년 산 시로, 두 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을 모두 밟았다. 두 번 다 상대는 레알 마드리드 CF였고 두 번 다 졌다.
기술과 운동량, 압박과 간격 조절 모두를 평균 이상으로 수행하는 하이브리드형 미드필더인 코케는 오프 더 볼 위치 조정과 공간 커버, 압박 유도 능력이 매우 탁월해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 전술 체계에서 가장 핵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태클 시 저자세 태클을 시도하고, 곧바로 짧은 패스를 연결해 내는데 이는 알레띠 특유의 질식 수비와 재빠른 공격에 큰 도움을 주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9. 엔리케 코야르 - 레프트 윙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71골은 구단 기록과 다르다. 구단은 그가 세상을 떠난 날 470경기 105골이라고 적었다.
흔히 페르난도 토레스를 두고 “엘 니뇨(El Niño; 소년)“라고 부르나 원조는 이 선수였다. 엔리케 코야르(Enrique Collar Monterrubio; 스페인 공격수, 1934-2025)가 토레스보다 반세기 먼저 이 구단에서 그 이름으로 불렸다.[1]
그가 드리블을 시작하면 상대 수비수는 주춤했고, 관중석은 일어났으며, 팀 동료들은 “오.. 개쩐다..“를 시전했다는 건 이미 유명한 스토리. 그는 알레띠 축구사에서 ’가장 첫 번째 슈퍼스타’였고, 그 시절 호아킨 페이로와 함께 스페인 전역을 찢어버리며 팬들은 그를 두고 “악마의 왼쪽 날개”라고 부르기도 하였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그 둘에게 붙인 이름은 지옥의 날개(Ala infernal)다.
폭발적인 1:1 돌파와 순간 가속력의 압도적인 재능, 외곽으로 돌아나가는 크로스 루틴과 공격 패턴의 다양화, 거기에 수비 복귀의 헌신도까지. 그는 팀 전술의 축이었다.
이 여섯 가지가 엔리케 코야르를 상징하는 플레이 스타일인데 그는 기술보다 리듬으로 수비보다 시간을 이겨내던 공격수라 정의하는 것이 옳겠다. 그를 두고 당시 동료들은 “꿈같은 선수”라고 칭찬하며, 그를 닮고 싶어 했으나 아무도 그처럼 되지 못했다고 한다.
세비야 근교 산후안 데 아스날파라체에서 태어났다. 1953년부터 1969년까지 470경기에서 105골을 넣었고, 1960년부터 1969년까지 열 시즌 동안 주장 완장을 찼다. 이 구단에서 그보다 오래 주장을 한 사람은 없다. 든 것은 1965-66시즌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 세 번, 1962년의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이다.
그 첫 코파가 구단의 첫 코파이기도 하다. 1960년 6월 26일 베르나베우의 결승에서 알레띠는 한 달 전 유러피언컵을 다섯 번째로 든 레알 마드리드를 3-1로 눌렀고, 0-1로 끌려가던 경기에서 동점골을 넣은 사람이 코야르였다. 스페인 대표로는 열여섯 경기에서 네 골을 넣었고 1962년 칠레 월드컵에 다녀왔다.
발렌시아 CF에서 한 시즌을 더 뛰고 1970년에 은퇴했다. 2005년부터 2011년까지 구단 재단의 회장을 지냈고, 2025년 12월 29일 아흔하나로 눈을 감았다. 이튿날 레알 마드리드도 조의를 표하는 성명을 냈다.
10. 앙투안 그리에즈만 - 세컨드 스트라이커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440경기 197골은 2025년 5월의 숫자다. 그는 500경기 212골로 구단을 떠났다. 돌아온 해는 디자인의 2022년이 아니라 2021년이다.
21세기 최고의 슈퍼스타. 작은 왕자라고 불리지만 한낱 동화 속 주인공이 아닌 현재 진행형 전설. 프랑스 여인들의 가장 은밀한 심장 박동으로 기억되는 사내.
눈에 띄는 카리스마를 내세우지 않지만 그가 없으면 전술은 숨을 쉬지 못하고, 동료들은 맥을 잃고, 공은 목적지를 잃는다. 그는 ‘축구를 완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크리에이터형 처진 공격수이다.
2014년 여름,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넘어와 호날두의 레알 마드리드, 메시의 FC 바르셀로나의 대권에 도전했으며, 네이마르와 함께 < 전 세계 축구 3인자 대결 >에서 한차례도 밀리지 않았던 공격수 앙투안 그리에즈만(Antoine Griezmann; 프랑스 공격수, 1991-). 그가 있기에 알레띠는 유럽에서 ‘대장’, 프랑스는 전 세계에서 ’챔피언’이 되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두 차례의 발롱도르 포디움(2016, ’18년). 빠르지만 급하지 않고, 기술이 있지만 과시하지 않으며, 경기를 읽되, 언제나 동료를 먼저 본다. 때문에 그리에즈만 옆에 그 어떤 스트라이커가 서도 성공했던 공식이었다. 포지셔닝의 귀재로서 연결자와 침투자, 플레이메이커와 마무리까지 모두 담당하는 그는 세트피스 상황이나 페널티킥까지 담당하는 그야말로 메트로놈적 존재이기도 하다.
샤넬보다 우아하고, 빅뱅보다 더 격렬한, 프렌치 감성과 라틴 열정이 동시에 묻어나는 입술, 그리고 슛보다 더 매혹적인 골 셀레브레이션. 그가 머리색을 바꿀 때마다 유럽의 미디어는 흔들리고, 광고 하나로 프랑스 거리의 전광판을 점령하기도 한다.
부르고뉴의 마콩에서 태어났다. 몸이 작다는 이유로 프랑스의 유소년 팀들에서 번번이 떨어졌고, 열세 살에 국경을 넘어 레알 소시에다드의 유소년으로 갔다. 프랑스 대표로는 UEFA 유로 2016에서 여섯 골로 득점왕과 대회 최우수 선수가 되었고, 2018년 모스크바의 월드컵 결승에서 페널티킥을 넣었다.
그의 알레띠는 두 토막이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다섯 시즌을 뛰고 1억 2천만 유로의 바이아웃으로 FC 바르셀로나에 갔다가 2021년 여름에 돌아왔다. 2018년 리옹의 UEFA 유로파 리그 결승에서는 혼자 두 골을 넣었고, 새집 메트로폴리타노의 리그 첫 골과 UEFA 챔피언스 리그 첫 골이 모두 그의 것이다.[1] 2016년 산 시로의 결승에서는 0-1로 뒤지던 후반 초반에 페널티킥을 크로스바에 맞혔고, 승부차기의 첫 킥은 넣었다. 알레띠가 2020-21시즌 라리가를 들던 해에 그는 바르셀로나에 있었다. 이 구단의 역대 최다 득점자에게 이 구단의 리그 우승이 없는 까닭이다.
2023년 12월 19일 헤타페 CF전의 골로 아라고네스와 나란해졌고,[2] 2024년 1월 10일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4강 레알 마드리드 CF전에서 2-2를 만드는 골을 넣으며 그 숫자를 넘어섰다. 이 구단의 신으로 불리던 사람의 기록을, 이 구단이 가장 이기고 싶어 하는 상대 앞에서 지운 것이다. 2025년 9월 27일의 더비에서는 다섯 번째 골을 넣어 5-2를 만들었고, 사흘 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전에서 통산 200번째 골을 채웠다.
2026년 3월 24일, 구단과 그가 시즌이 끝나면 헤어진다고 알렸다. 행선지는 미국의 올랜도 시티 SC다. 그날 그는 구단 홈페이지에 “이번 시즌의 마지막 숨까지 내 오늘은 붉고 흰 줄무늬이고, 내 심장은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썼다.[5]
5월 17일 메트로폴리타노의 지로나 FC전이 그 집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그의 500번째 경기였고, 그는 주장 완장을 차고 결승골을 도왔다. 경기가 끝난 뒤 동료들이 터널 앞에 두 줄로 섰고 코케와 오블라크, 호세 마리아 히메네스가 선수들의 서명이 든 셔츠를 건넸다. 잔디 위에서 그는 바르셀로나로 떠났던 일을 두고 한 번 더 용서를 구했다. 너무 어렸고 잘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리그도 UEFA 챔피언스 리그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래도 오늘 밤의 이것이 내게는 아주 크다.
No he podido traer una Liga o una Champions, aunque me vale mucho esto de esta noche.
앙투안 그리에즈만, 2026년 5월 17일 메트로폴리타노의 고별 행사에서
500경기 212골. 이 열한 명 가운데 코케와 오블라크, 그리고 그가 아직 현역이고, 구단을 떠난 지금도 그는 이 구단의 최다 득점자다.
11. 호세 에울로히오 가라테 - 센터 포워드

그는 마드리드 구단이었으나 바스크에서 성장했고, 아르헨티나에 뿌리를 두었으며, 결국에는 아틀레티코에서 영혼을 바친 선수로 남았다. 호세 에울로히오 가라테(José Eulogio Gárate Ormaechea; 스페인 공격수, 1944-)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에서 태어나 일곱 달을 살고 에이바르로 돌아왔다. 부모는 아틀레틱 클루브의 회원이었고 그도 그 팀을 응원하며 자랐다. 바스크어도 곧잘 했다.[3]
에이바르에서 3부 리그를 뛰다가 빌바오의 2부 구단 인다우추로 옮겼다. 인다우추의 구장과 산마메스 사이에 공과대학이 있었다. 낮에는 거기서 산업공학을 배우고 저녁에 훈련했다. 스무 경기 남짓에 스무 골 가까이 넣자 아틀레틱의 감독 피루 가인사가 그를 불렀다. 걸린 것은 서류였다. 그는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열여덟에 아르헨티나 국적을 골랐고, 그 여권으로는 스페인 구단과 계약할 수 없었다. 아틀레틱은 군 당국에 길을 물었으나 병역을 마치든지 그만두든지 하라는 답만 들었다.
알레띠는 그 문제를 풀어 주겠다고 했다. 한때 이름에 아비아시온을 달았던 이 구단은 공군과 가까웠고, 때마침 아르헨티나에서 병역을 면제한다는 문서가 도착했다. 그는 그 서류로 스페인 국적을 얻고 1966년 마드리드로 왔다. 아버지의 소원이던 공학 학위는 마드리드에서 마쳤다. 본인의 말로는 그때 가장 뛰고 싶던 팀은 아틀레틱이었다. 빌바오의 지부로 태어난 구단이 예순세 해 뒤에 빌바오가 놓친 공격수를 얻은 것이다.
첫 시즌에 자리가 난 것도 이 명단 안의 일이다. 아라고네스가 코르도바에서 퇴장당하고 아델라르도가 다치자 감독 오토 글로리아가 그를 세웠다. 열다섯 경기에서 열네 골을 넣었다.
그는 경기장 위에서 가장 빛났고, 단 한 번도 상대를 도발하지는 않았으나 그 시절에는 “우아함의 결정체”라고 불렸을 만큼 골을 넣었던 공격수였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역대 최다 득점자 5위라는 숫자는 아쉬워 보여도 라리가 우승 세 차례, 코파 델 레이 우승 두 차례, 유러피언컵 준우승 당시 결정적인 모든 순간에 호세 가라테가 존재했었다고 하면 굉장히 위대해 보이기도 한다. 1974년 인터콘티넨털컵 역시 그가 그라운드 위에서 함께 들어 올린 트로피다.
스페인 대표로는 열여덟 경기를 뛰었다. 여기에 하나가 더 붙는다. 그는 트로페오 피치치를 세 시즌 연속으로 받았다. 1968-69시즌 14골, 1969-70시즌 16골, 1970-71시즌 17골이다.[6] 세 번 모두 단독 1위는 아니었으니 첫해는 아만시오 아마로와, 이듬해는 아만시오와 동료 아라고네스와, 마지막 해는 카를레스 레샤크와 같은 골 수였다.
176cm라는 키는 공격수로서 압도적인 피지컬이라 할 수 없겠으나 특유의 골 감각과 움직임 한 번은 상대 수비수들을 바보로 만들기 충분했으며, 슈팅을 때릴 때 몸의 각도, 볼 처리 타이밍이 굉장히 완벽했던 유형이었다. 공학도답게 얻은 별명은 페널티 박스의 엔지니어(El ingeniero del área)였다. 선수 생활을 통틀어 퇴장은 단 한 번이다. 사리아 원정에서 페널티킥을 주지 않은 주심에게 “레알 마드리드였으면 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가 나갔다.
1974년 브뤼셀의 그 밤도 그는 그라운드에 있었다. 2017년 칼데론이 문을 닫기 엿새 전, 그는 그 경기를 이렇게 돌아봤다.
유러피언컵이 손안에 있었는데 바이언이 마지막 순간에 따라붙었다. 우리는 다시 킥오프할 틈도 없었다.
Teníamos la Copa de Europa en la mano y el Bayern nos empató en el último segundo. No llegamos a sacar de centro.
호세 에울로히오 가라테, 2017년 5월 잡지 리베로의 대담에서[3]
무릎에 생긴 병으로 1977년 서른둘에 그만두었다. 지금 그는 구단 은퇴 선수회의 명예 회장이고, 2017년 9월 새집이 문을 열던 날 시축을 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1]
코야르에서 코케까지, 한 경기장에 선 열한 명
이 명단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100년 역사에 침투한 26인의 명단이다.
이 열한 명이 짊어진 결말은 서로 닮았다. 유러피언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을 밟아 본 사람이 일곱인데, 그 일곱이 전부 졌다. 아라고네스와 가라테, 아델라르도가 1974년에 졌고, 고딘과 코케가 2014년과 2016년에 두 번, 오블라크와 그리에즈만이 2016년에 졌다. 세 번 모두 한 뼘이 모자랐다. 1974년에는 연장이 끝나기 직전에 동점골을 맞았고, 2014년에는 후반 추가시간 3분에 맞았으며, 2016년 산 시로에서는 그리에즈만의 페널티킥이 크로스바를 때렸고 승부차기에서 후안프란의 킥이 골대를 때렸다. 구단에 엘 푸파스(El Pupas; 재수 옴 붙은 놈)라는 달갑잖은 별명이 붙은 것이 1974년의 그 밤부터다.[3]
그래서 이 구단이 가진 트로피 하나가 유난히 크게 보인다. 1974년 인터콘티넨털컵이다.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지고 준우승 자격으로 나간 대회에서 알레띠는 남미 챔피언을 눌렀다. FIFA는 2017년에 그 대회의 우승 구단들을 세계 챔피언으로 인정했다. 준우승으로 얻은 출전권이 구단 역사상 가장 큰 트로피로 돌아왔고, 2025년 4월 10일 구단은 그날의 쉰 돌을 아델라르도와 함께 기념했다.[1]
뒤의 네 사람이 유럽의 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이긴 적이 한 번은 있다. 2018년 8월 15일 탈린의 UEFA 슈퍼컵이다. 연장 끝에 4-2였고 네 번째 골을 코케가 넣었다. 큰 귀가 달린 컵만 끝내 오지 않았다.
2026년에도 결말은 같은 쪽이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는 4강에서, 코파 델 레이는 결승에서 끝났다.
아르테체는 우승이 거의 없던 열한 해를 여기서만 보냈고, 아라고네스는 선수로 못 넘은 결승의 다음 칸을 감독으로 넘었으며, 그리에즈만은 라리가도 UEFA 챔피언스 리그도 없이 이 구단의 최다 득점자로 남았다. 도입에 적은 “이기는 것보다 넘어지지 않는 것”은 이 사람들의 이력서를 한 줄로 줄인 말이다.
그림 밖에서 다시 적는 열다섯 명
편집물 안의 서브 명단 열다섯을 글자로 다시 적는다.
- 에드가르도 마디나베이티아Edgardo Mario Madinabeytia Bassi · 골키퍼
1958년 입단해 아홉 시즌을 지킨 아르헨티나 골키퍼다. 1962년 슈투트가르트의 재경기에서 골문을 지켜 구단의 첫 유럽 트로피를 들었다.
- 아벨 레시노Abel Resino · 골키퍼
1990-91시즌 리그에서 1,275분 동안 골을 내주지 않았다. 지금도 라리가 기록이다. 훗날 감독이 되어 2009년 코케를 1군에 처음 올렸다.
- 호르헤 그리파Jorge Griffa · 센터백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 수비의 중심이었던 아르헨티나 센터백이다. 가라테가 기억하는 라커룸의 우두머리 셋 가운데 하나다. 은퇴 뒤 아르헨티나에서 유소년 지도자로 이름을 남겼다.
- 루이스 페레이라Luiz Pereira · 센터백
1970년대 후반의 브라질 수비수다. 아르테체는 첫 세 시즌을 그의 옆에서 뛰며 공을 빼앗는 법을 배웠다.
- 주앙 미란다João Miranda · 센터백
디에고 고딘과 함께 2010년대 초 유럽에서 가장 단단한 센터백 라인을 이뤘다. 2013년 코파 델 레이 결승의 연장 결승골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 필리피 루이스Filipe Luís · 레프트백
2010년대 두 시기에 걸쳐 왼쪽을 맡았고 라리가와 UEFA 유로파 리그 우승을 함께했다.
- 후안프란Juanfran · 라이트백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오른쪽을 지킨 시메오네 체제의 주전이다. 2016년 산 시로의 승부차기에서 골대를 맞힌 킥이 그의 것이다.
- 가비Gabi · 중앙 미드필더
2013-14시즌 라리가를 주장으로 들었다. 캄 노우에서 고딘의 머리에 닿은 코너킥이 그의 발에서 나갔다.
- 사울 니게스Saúl Ñíguez · 중앙 미드필더
유스에서 자라 미드필더와 수비를 오가며 2010년대 후반을 책임졌다. 2016년 4강 1차전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의 수비 여럿을 혼자 제치고 넣은 골이 그의 것이다.
- 라르비 벤바레크Larbi Benbarek · 공격형 미드필더
1940년대 후반에 와서 1950년과 1951년 라리가 2연패를 이끈 모로코 출신 공격수다.
- 호세 루이스 카미네로José Luis Caminero · 공격형 미드필더
1990년대 중반 중원에서 득점까지 책임졌고 1995-96시즌 더블을 함께했다.
- 파울루 푸트르Paulo Futre · 레프트 윙
1987년 헤수스 힐이 회장이 되며 FC 포르투에서 데려온 포르투갈 공격수다. 1992년 베르나베우의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골을 넣었다.
- 호아킨 페이로Joaquín Peiró · 세컨드 스트라이커
엔리케 코야르와 함께 지옥의 날개라 불렸다. 1962년 컵위너스컵 결승과 재경기에서 모두 골을 넣었다.
- 디에고 포를란Diego Forlán · 센터 포워드
2008-09시즌 리그 32골로 트로페오 피치치와 유러피언 골든슈를 받았고, 2010년 함부르크의 UEFA 유로파 리그 결승에서 두 골을 넣었다.
- 페르난도 토레스Fernando Torres · 센터 포워드
유스에서 자라 주장이 되었고, 돌아와 칼데론의 마지막 리그 경기에서 두 골을 넣었으며 2018년 UEFA 유로파 리그 우승으로 알레띠 생활을 마쳤다.
기록을 확인한 곳
- 구단이 적은 기록 — Club Atlético de Madrid 공식 사이트. 경기장: 「Stadium Metropolitano (1923-1966)」, 「Se cumplen 100 años de la inauguración del Metropolitano」, 「Griezmann is our first goalscorer … just like Luis Aragonés did in the Manzanares」, 「Último partido liguero en la historia del Calderón」. 이름이 바뀐 날짜: 「Liga 1939/40」. 선수: 「Oblak conquistó su sexto Trofeo Zamora」, 「Con Arteche se va una de las figuras rojiblancas de los años 80」, 「Diego Godín anunció su retirada del fútbol」, 「Luto por el fallecimiento de Isacio Calleja」, 「Luto por el fallecimiento de Feliciano Rivilla」, 「Se cumplen 44 años del último partido oficial de Adelardo」, 「Adelardo: "Mi mejor momento fue ganar la Intercontinental"」, 「La gran leyenda rojiblanca」, 「El póker de Luis」, 「World Champions: 50th Anniversary」, 「Leyenda Koke」, 「Luto por el fallecimiento de Enrique Collar」, 「Rendiremos tributo a José Eulogio Gárate」.
- 라리가가 적은 기록 — LALIGA 「Diez cosas que quizá no sabías del Vicente Calderón」(2015년 7월 18일), 「Historia del Riyadh Air Metropolitano」, 「Liderato rojiblanco en un día muy especial」(2014년 2월). 만사나레스의 첫 경기와 첫 골, 비센테 칼데론으로 이름이 바뀐 날, 라 페이네타의 내력과 새 경기장의 첫 골, 그리에즈만이 아라고네스와 나란해진 날, 아라고네스를 보낸 경기와 시메오네의 말.
- 가라테의 말 — Santiago Segurola, 「José Eulogio Gárate: "El Atlético se adaptará al Wanda como ya lo hizo al Calderón"」, Revista Líbero, 2017년. 아틀레틱 클루브가 그를 데려가지 못한 경위와 알레띠가 병역 문제를 푼 과정, 입단 첫해의 라커룸과 새 경기장, 한 번뿐인 퇴장, 1974년 결승의 기억.
- 아르테체의 부고 — 「Adiós a un trozo de escudo」, Público, 2010년 10월 14일. 두 별명과 루이스 페레이라 옆에서 보낸 첫 세 시즌, 1983년 11월의 레알 베티스전, 헤수스 힐과의 다툼과 법원의 판결.
- 2026년의 작별과 재계약 — 「La despedida de Griezmann tras hacerse oficial su salida al Orlando」, El Desmarque, 2026년 3월 24일. 「El emotivo adiós de Griezmann a la afición del Atlético de Madrid」, Sports Illustrated, 2026년 5월. 「Koke renueva un año más con el Atlético de Madrid」, El Desmarque, 2026년 7월 1일.
- 트로페오 피치치의 시즌별 골 수 — RSSSF 「Spain - List of Topscorers」. 1968-69시즌 14골, 1969-70시즌 16골, 1970-71시즌 17골과 같은 골 수로 함께 받은 사람들.
- 디자인과 다른 값 — 오블라크의 트로페오 리카르도 사모라는 디자인의 다섯 번에서 여섯 번이 되었다. 아라고네스의 368경기 172골은 370경기 173골로도 센다. 코케의 679경기 48골은 740경기 50골이 되었다. 코야르의 71골은 구단 기록으로 105골이다. 그리에즈만의 440경기 197골은 500경기 212골로 끝났고, 돌아온 해는 2021년이다. 고딘 디자인의 별명 말라깽이와 달리 구단은 그의 별명을 파라오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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