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국기

스페인 왕국

Reino de España
라리가 공식 로고

라리가

Primera División
아틀레틱 클루브 문장

아틀레틱 클루브

Athletic Club

성당이라 불리는 경기장, 사자라 불리는 사람들

빌바오의 축구는 항구에서 왔다. 19세기 말 비스카야의 조선소와 광산에는 영국인 노동자가 들어와 있었고,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바스크 청년들이 그들과 함께 라미아코(Lamiako; 비스카야의 들판, 당시 경마장) 경마장에서 공을 찼다. 1898년 7월 18일 아틀레틱 클루브가 태어났고 1901년 카페 가르시아(Café García; 빌바오 구시가의 카페)에서 정식으로 조직을 갖췄다. 영국인이 들여온 놀이였으므로 초기 회원 명부에는 영국식 이름이 섞여 있었고, 구단명도 영어 단어를 그대로 썼다.[1]

1913년 8월 21일, 산 마메스(San Mamés; 성 마메스 성당 옆에 지은 경기장)가 문을 열었다. 개장 경기는 라싱 데 이룬(Racing de Irún; 기푸스코아의 구단, 1915년 레알 우니온으로 통합)과의 1-1 무승부였고 새 경기장의 첫 골은 피치치의 발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이곳을 축구의 성당(La Catedral)이라 불렀다. 옆 건물에서 온 이름이다. 경기장이 성 마메스 성당 옆에 섰고, 그 성인은 로마인들이 사자 앞에 던졌다는 전승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자에게 던져진 성인의 이름을 딴 자리에서 공을 찼으므로 이 팀은 사자들, 로스 레오네스(Los Leones)가 되었다. 성인의 이름이 먼저 그 땅에 있었고, 1913년 그 옆에 경기장이 들어선 뒤 별명이 따라붙었다.

산 마메스의 관중석. 붉고 흰 줄무늬가 관중석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 구단을 세계에서 가장 특별하게 만든 조항이 1911년부터 작동한다. 대바스크 지역(Euskal Herria)에서 태어났거나 그곳에서 축구를 배운 선수만 쓴다. 스페인 북부의 비스카야·기푸스코아·알라바·나바라와 피레네 너머 프랑스 쪽 바스크를 합친 땅이다. 나라가 아니라 언어와 혈통으로 묶인 지역이고, 인구를 다 더해도 서울 하나에 못 미친다. 다른 구단이 세계 시장에서 열한 명을 조립할 때 이 구단은 한 지방의 인구 안에서 열한 명을 길러냈다. 선수를 고를 수 있는 모수가 그만큼 줄어드는 규칙이다. 그럼에도 아틀레틱 클루브는 레알 마드리드 CF, FC 바르셀로나와 함께 라리가 창설 이래 한 번도 강등되지 않은 세 구단 가운데 하나다. 스페인 축구의 두 제국과 같은 줄에 선 세 번째 이름이, 자기 땅에서 난 사람만 쓰는 구단이다.

기록으로 보면 라리가 8회, 코파 델 레이(Copa del Rey) 24회다. 코파 델 레이는 국왕컵, 곧 스페인의 FA컵에 해당하는 대회인데 이 우승 횟수는 FC 바르셀로나 다음으로 많다. 다만 그 24번째가 오기까지 40년이 걸렸다. 1984년 이후 아틀레틱은 결승에 여러 번 올랐지만 번번이 빈손으로 돌아왔고, 2024년 4월 RCD 마요르카와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 4-2로 이기고서야 40년을 끝냈다. 그 40년 동안 구단은 선수 조항을 손대지 않았다. 같은 기간 라리가의 다른 구단들은 보스만 판결 이후 외국인 제한이 풀리자 선수단을 국제 시장에서 다시 짰다.

이름을 빼앗겼던 시기도 있다. 1941년 2월,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Bahamonde; 스페인 군인·독재자, 1892-1975) 정권은 구단 이름에 카스티야어만 쓰도록 하는 법령을 내렸다. ‘Athletic’은 영어에서 온 말이었으므로 이 구단은 그날부터 ‘아틀레티코 데 빌바오’가 되었다. 문패를 바꾸라는 명령이었다. 원래 이름을 되찾은 시점은 자료마다 1972년과 프랑코 사후로 갈리지만, 어느 쪽이든 30년 안팎을 남의 이름으로 살았다는 사실은 같다.

아래 열한 명 가운데 가라이와 오루에, 가인사와 파니소는 그 30년 안에서 뛰었다. 이들의 출전 기록에 적힌 소속은 아틀레틱 클루브가 아니라 아틀레티코 데 빌바오다.

ATHLETIC CLUB · LOS LEONES1898-2026

항구의 외래 놀이 · 1911년의 조항 · 빼앗긴 이름 · 40년 뒤의 코파

선정 전술: 한 지방의 120년을 세운 4-4-2

열한 명 전원이 1911년의 조항 안에서 나왔다. 서울 하나에 못 미치는 인구에서 여섯 번의 득점왕과 구단 최다 출전 골키퍼를 같은 땅으로 길러냈다는 뜻이다. 아래에서 한 자리씩 부르고, 열한 명이 함께 선 대형은 마지막에 펼친다.

골문에는 이리바르가 선다. 그 앞 네 명은 라라사발과 오루에가 양쪽을 잡고 가라이와 고이코에체아가 가운데를 막는다. 가라이가 상대의 다음 패스를 읽고 고이코에체아가 상대의 에이스를 지운다. 성질이 정반대인 센터백 두 장을 붙였으므로 한쪽이 뚫려도 다른 쪽의 대응이 남는다.

중원은 네 명이 한 줄을 이룬다. 가운데 두 자리를 벨라우스테와 게레로가 나눠 갖는데 높이가 같지 않다. 벨라우스테가 반 발 내려서 공중과 몸싸움을 맡고 게레로가 반 발 올라서 공을 받아 방향을 만든다. 바깥은 가인사가 왼쪽, 파니소가 오른쪽이다. 파니소는 선을 타고 끝까지 내려가기보다 안으로 접어 들어와 경기를 푸는 쪽이었고, 가인사가 오히려 터치라인을 끝까지 밟았다. 두 사람의 성질이 달라서 오른쪽은 좁아지고 왼쪽은 넓어진다.

최전방에는 피치치와 텔모 사라가 함께 선다. 둘은 1922년과 1940년으로 활동 시기가 갈리지만 득점 방식이 겹치지 않는다. 피치치는 골문 앞의 좁은 자리를 먼저 찾아 들어갔고 사라는 머리와 양발, 가슴과 어깨까지 동원해 마무리했다. 앞선 아홉이 공을 전방으로 보내기만 하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받을 수 있는 구성이다.

1. 호세 앙헬 이리바르 - 골키퍼

호세 앙헬 이리바르 골키퍼 상세 정보 디자인
호세 앙헬 이리바르. 디자인: 삥이.

호세 앙헬 이리바르(José Ángel Iribar Kortajarena; 스페인 골키퍼, 1943-)는 1962년부터 1980년까지 아틀레틱 클루브에서 614경기에 나섰다. 구단 역대 최다 출전이다. 바스크어로 포플러를 뜻하는 초포(Txopo)가 그의 별명이었다. 큰 키와 골문 앞에서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는 습성이 함께 붙은 이름이었다.[3]

그의 골키핑은 반응 속도로 설명되지 않는다. 공중볼을 잡을 때 낙하 지점에 먼저 가 있었고, 페널티킥 앞에서는 키커의 준비 동작이 끝나기 전에 무게중심을 옮기지 않았다. 스페인 대표팀에서도 49경기를 뛰었고, 네 번째 A매치에서 UEFA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 우승을 경험했다.

아틀레틱 클루브 선수 시절의 귀사솔라와 이리바르
왼쪽이 귀사솔라, 오른쪽이 이리바르.

그러나 이리바르가 골키퍼를 넘어선 이름이 된 날은 1976년 12월 5일이다. 프랑코가 죽은 이듬해, 바스크 깃발 이쿠리냐(ikurriña)는 아직 합법이 아니었다. 그날 산세바스티안의 아토차(Atotxa; 레알 소시에다드의 옛 홈 경기장)에서 아틀레틱 클루브와 레알 소시에다드가 만났고, 이리바르와 상대 주장 이나시오 코르타바리아(Inaxio Kortabarria Abarrategi; 스페인 수비수, 1950-)가 접힌 이쿠리냐를 들고 함께 걸어 나와 센터서클에 펼쳤다. 두 구단은 그날 라이벌이 아니었다. 금지된 깃발을 공식 경기장에서 펼치는 일을, 양쪽 주장이 같이 했다.

두 주장은 그날 어떤 성명도 내지 않았다. 사진 한 장이 남았고, 그 사진은 이후 바스크 자치와 이쿠리냐 합법화를 다루는 기사마다 인용됐다. 이쿠리냐는 이듬해 1월 19일에 합법화됐다. 이리바르는 은퇴 뒤 아틀레틱 클루브 2군과 1군을 거쳐 1992년 바스크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6]

2. 헤수스 가라이 - 센터백

헤수스 가라이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헤수스 가라이. 디자인: 삥이.

헤수스 가라이(Jesús Garay Vecino; 스페인 수비수, 1930-1995)는 1950년부터 1960년까지 아틀레틱 클루브에서 236경기를 뛰었다. 1950년대 스페인에서 수비수의 기본기는 대개 몸으로 막는 법이었다. 가라이는 읽는 쪽이었다.

그의 인터셉트는 짧았다. 상대의 패스를 예측해 앞으로 튀어나가기보다, 패스가 나올 자리에 미리 서 있다가 발을 대는 식이었다. 그래서 그가 공을 끊는 장면에는 충돌이 적다. 공을 잡은 뒤에는 그대로 빌드업의 첫 단추가 됐다. 수비수가 공을 앞으로 보내는 일을 임무로 삼는 것은 당시 스페인보다 중부 유럽과 이탈리아의 문법이었다.

그가 있던 10년이 이 구단이 스페인과 유럽에서 동시에 강했던 마지막 시기다. 1955-56시즌 라리가 우승과 이듬해 유러피언컵 출전이 그 안에 들어 있다. 1980년대에 라리가를 두 번 더 가져가기는 하지만, 유럽 무대에서까지 상대를 눌러 본 것은 가라이의 시대가 끝이었다. 그런 팀의 중심에 있었는데도 바스크 사람들이 그를 부르던 말은 화려한 데가 없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남자.

3.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 센터백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디자인: 삥이.

안도니 고이코에체아(Andoni Goikoetxea Olaskoaga; 스페인 수비수, 1956-)는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아틀레틱 클루브에서 뛰었고 공식전 369경기에 나섰다. 그가 있던 시기에 이 구단은 1982-83시즌과 1983-84시즌 라리가를 연달아 가져갔고 1983-84시즌에는 코파 델 레이까지 더해 더블을 만들었다. 2024년까지 40년을 기다리게 되는 그 마지막 코파가 이 팀의 것이다.

디에고 마라도나와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마라도나와 고이코에체아.

그런데 그의 이름이 스페인 밖에서 알려진 이유는 우승이 아니다. 1983년 9월 24일 캄 노우, FC 바르셀로나와의 경기에서 그는 뒤에서 들어간 태클로 디에고 마라도나(Diego Armando Maradona; 아르헨티나 공격수, 1960-2020)의 발목을 부러뜨렸다. 출전 정지 10경기가 내려졌고, 영국 기자 에드워드 오언(Edward Owen; 영국 스포츠 기자)이 붙인 빌바오의 도살자(The Butcher of Bilbao)라는 말이 그대로 굳었다. 이듬해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 아틀레틱 클루브가 1-0으로 이긴 뒤 벌어진 난투극에서 그는 다시 마라도나와 얽혔고, 처음 18경기였던 징계가 7경기로 줄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 태클이 벌어진 경기는 엘 클라시코가 아니다. 엘 클라시코는 레알 마드리드 CF와 FC 바르셀로나의 경기이고, 그날 캄 노우에 서 있던 원정팀은 아틀레틱 클루브였다.

그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는 지금도 갈린다. 동료들이 기억하는 고이코에체아는 조용한 사람이었고 그에게는 수줍은 자(El Tímido)라는 별명도 따로 있었다. 확실한 것은 전술적인 쪽이다. 그는 상대의 가장 좋은 선수를 지우는 임무를 맡았고, 공중볼을 장악했고, 세트피스에서 득점했다. 1980년대 아틀레틱 클루브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두 시즌 연속으로 눌렀을 때 그 팀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다. 축구장 위에서 선과 폭력의 경계선을 걸었다는 말은 스페인 마르카의 평가다.

4. 아이토르 라라사발 - 레프트백

아이토르 라라사발 레프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아이토르 라라사발. 디자인: 삥이.

아이토르 라라사발(Aitor Larrazábal Bilbao; 스페인 수비수, 1971-)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아틀레틱 클루브의 왼쪽을 지켰다. 라라(Larra)라고 불렸다.

풀백이 득점을 많이 하기는 어려운데 그는 페널티킥 키커를 맡아 숫자를 쌓았다. 다만 이 선수가 이 자리에 선 이유는 그가 뛴 시기에 있다. 1990년대는 아틀레틱 클루브가 현대화라는 이름의 압력을 정면으로 받던 때였다. 다른 구단은 국경을 열고 돈을 들여 열한 명을 샀고, 이 구단만 바스크 안에 남아 있었다. 그 압력 안에서 라라사발은 흔들리지 않는 쪽을 골랐다.

1997-98시즌 라리가 준우승이 그 답이었다. 순혈 정책을 지킨 팀이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높은 자리에 올랐다. 그 팀에는 아직 이케르 무니아인도, 페르난도 요렌테도, 아리츠 아두리스도 없었다. 라라사발이 왼쪽에 서서 어린 선수들의 방향을 잡아주고 있었다.

5. 호세 오루에 - 라이트백

호세 오루에 라이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호세 오루에. 디자인: 삥이.

호세 마리아 오루에(José María Orúe Aranguren; 스페인 수비수, 1930-2020)는 아틀레틱 클루브에서만 뛴 원클럽맨이고 452경기에 나섰다. 수비수 가운데 구단 역대 최다 출전이다.

그의 이름 앞에는 극적인 장면이 없다. 발목을 부러뜨린 태클도, 깃발을 펼친 날도 없다. 그럼에도 1950년대 아틀레틱 클루브의 수비를 말할 때 평론가들이 가장 먼저 부르는 이름이 오루에였다. 가라이가 읽고 오루에가 버티는 오른쪽이 있었기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 CF와 FC 바르셀로나가 빌바오 위에 서기 어려웠다.

한 구단에서만 452경기를 뛰었다는 것은 1950년대 아틀레틱 클루브의 수비가 해마다 같은 오른쪽을 가지고 시즌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6. 호세 마리아 벨라우스테 - 수비형 미드필더

호세 마리아 벨라우스테 수비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호세 마리아 벨라우스테. 디자인: 삥이.

호세 마리아 벨라우스테(José María Belausteguigoitia Landaluce; 스페인 미드필더, 1889-1964)의 출전 기록은 온전히 남아 있지 않다. 1910년대 아틀레틱 클루브의 출전 기록은 오늘의 기준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고, 그가 정확히 몇 경기를 뛰었는지 말할 수 있는 자료도 마땅치 않다. 그런데도 이 구단의 베스트 11을 짤 때 그의 이름은 매번 불려 나온다.

키 193cm, 몸무게 95kg. 1910년대 기준으로는 거인이었다. 공중볼을 그가 잡으면 경합이 성립하지 않았다.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 스페인 대표팀
1920년 8월 28일, ‘라 푸리아’의 탄생.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Spelen van de VIIe Olympiade;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열린 1920년 하계 올림픽)에서 스페인은 은메달을 땄고, 그 대회에서 벨라우스테가 동료에게 외친 한 문장이 남았다.

¡A mí el pelotón, Sabino, que los arrollo! (사비노, 그 공 나한테 줘. 내가 다 쓸어버릴 테니까.)

스페인 대표팀의 별명 라 푸리아(La Furia), 곧 분노가 여기서 나왔다. 유럽에 스페인 축구의 성격을 처음으로 각인시킨 한 문장이 바스크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이 구단의 자리를 잘 보여준다. 마드리드도 바르셀로나도 아닌 빌바오가 그 말의 출처였다.

그는 1905년부터 1926년까지 코파 델 레이 7회와 비스카야 지역 챔피언십 8회 우승을 함께했고, 사람들은 그를 앤트워프의 사자(El León de Amberes)라 불렀다. 오늘날에도 바스크 유소년 체계에는 그의 이름을 붙인 교육 과정이 있다.

7. 훌렌 게레로 - 공격형 미드필더

훌렌 게레로 공격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훌렌 게레로. 디자인: 삥이.

훌렌 게레로(Julen Guerrero López; 스페인 미드필더, 1974-)는 1990년대 라리가에서 가장 많이 쳐다본 선수였다.

아틀레틱 클루브 시절의 훌렌 게레로
빌바오의 긴 머리칼.
공을 받은 뒤 상체를 먼저 돌려 방향을 만든다.
산 마메스에서의 득점 직후.

1993-94시즌 라리가에서만 18골을 넣었고, 1994년과 1996년 트로페오 브라보(Trofeo Bravo; 이탈리아 잡지 구에린 스포르티보가 주던 상)를 두 번 받았다. 유럽에서 그해 가장 뛰어난 스물한 살 이하 선수에게 주는 상이니, 유망주라는 말이 공인된 셈이다. 1997-98시즌 준우승의 중심도 그였다. 다만 이 선수를 설명하는 말에서 기록은 늘 뒤로 밀린다. 사람들이 먼저 말하는 것은 긴 금발과 유니폼을 여미는 자세다.

축구가 전술로 각을 세우던 시대에 그는 정서로 경기를 끌었다. 공을 받기 전 상체를 반대로 돌려 수비의 무게를 옮기고, 그다음에 방향을 만들었다. 상대의 균형을 먼저 무너뜨린 뒤에 지나갔으므로 속도가 빠른 선수로는 기억되지 않는다. 사자의 왕(El Rey León), 산 마메스의 연인, 빌바오의 긴 머리칼 같은 별명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붙은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고 그는 한 번도 이적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1990년대 라리가에서 이 정도 재능이 한 구단에만 머무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래서 바스크 바깥 사람들까지 시계를 봤다. 엥, 빌바오 경기할 시간이잖아. TV 틀어. 실력만으로 생기는 습관이 아니다. 떠날 수 있는데 떠나지 않는 사람을 지켜보는 일이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였다.

8. 아구스틴 가인사 - 레프트 윙

아구스틴 가인사 레프트 윙 상세 정보 디자인
아구스틴 가인사. 디자인: 삥이.

아구스틴 가인사(Agustín Gaínza Bikandi; 스페인 공격수, 1922-1995)는 아틀레틱 클루브에서 496경기 152골을 기록했다. 출전과 득점 양쪽에서 구단 역대 10위권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선수다. 1942-43시즌부터 1957-58시즌까지 열다섯 해 동안 코파 델 레이를 일곱 번 들었다.

그의 왼쪽은 속도의 왼쪽이 아니었다. 순간 가속보다 리듬으로 수비수를 벗기는 유형이었고, 크로스의 궤적이 부드러워서 당대의 기록자들은 그것을 해안선에 비유했다. 공격에서는 기점이 되고 수비에서는 1차 압박을 맡는 방식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Alfredo Di Stéfano; 아르헨티나 출신 스페인 공격수, 1926-2014)와 비교되기도 했다.

팀이 내려앉던 시기에 주장으로서 그가 한 일도 기록에 남아 있다. 성적이 나쁠 때 고개를 숙이는 대신 관중석을 향해 고개를 든 선수였다. 요즘 말로 남친 코스프레라고 부르면 틀린 말이 된다. 그쪽이 원형에 가까웠다. 그가 왼쪽 선을 타고 오를 때 스페인 국기보다 바스크 깃발이 먼저 휘날리는 기분이었다는 회고가 한결같은 것도 그래서다.

9. 호세 루이스 파니소 - 라이트 미드필더

호세 루이스 파니소 라이트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호세 루이스 파니소. 디자인: 삥이.

호세 루이스 파니소(José Luis López Panizo; 스페인 미드필더, 1922-1990)는 404경기 172골을 기록했고 코파 델 레이 다섯 번을 들었다. 구단 역대 최다 득점 5위다.

그의 자리는 지금의 포지션 이름으로 옮기기 어렵다. 수비 둘에 미드필더 셋, 공격수 다섯을 세우던 2-3-5와, 그 공격수 둘을 뒤로 당겨 알파벳 W와 M 모양을 만든 WM이 함께 쓰이던 시대였다. 그 안에서 파니소가 맡은 자리는 메찰라(mezzala; 이탈리아어로 반쪽 날개라는 뜻의 인사이드 포워드)였다. 중앙도 아니고 윙도 아닌 오른쪽 안쪽의 비스듬한 지점이다. 스페인에서는 같은 자리를 인테리오르(interior)라 불렀다. 중앙도 아니고 윙도 아닌 것이, 험한 것이 나와부렀으. 그가 움직인 궤적은 사선과 곡선이었고, 공을 받으면 앞으로 미는 대신 한 박자 늦춰 팀 전체를 끌어올렸다.

텔모 사라가 넣은 골의 앞 장면에 이 사람이 자주 있었다. 스트라이커에게 마지막 패스를 넣는 쪽이라기보다, 그 패스가 나올 수 있는 상태를 미리 만들어 두는 역할이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경기의 템포를 쥔 선수였다. 그런 선수는 하이라이트에 잘 남지 않고, 그래서 후대의 평가에서 늘 손해를 본다. 이 자리에 그를 세우는 것은 그 손해를 한 번 갚는 일이다.

10. 피치치 - 센터 포워드

피치치 센터 포워드 상세 정보 디자인
라파엘 모레노 아란사디, 피치치. 디자인: 삥이.
골이라는 개념에 이름을 준 사람.
이름이 어떻게 단위가 되는가.

라파엘 모레노 아란사디(Rafael Moreno Aranzadi; 스페인 공격수, 1892-1922)가 공을 찰 때 경기장에는 전광판이 없었다. 스코어보드도, 카메라도, 중계도 없었다. 남은 것은 사람들의 기억과 신문의 몇 줄뿐이었다. 한데 100년이 지난 지금, 스페인에서 한 시즌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는 그의 별명이 적힌 상을 받는다.

피치치라는 말은 원래 바스크 지방에서 작은 아이를 부르던 애칭이었다. 피치치의 형 라이문도 모레노 아란사디가 동생이 몸집도 작으면서 나이 많은 아이들 틈에서 공을 잘 찬다고 붙여준 이름이었다. 칭찬과 놀림이 반반씩 섞인 호칭이었다. 그 말이 1953년부터 마르카(Marca; 스페인 스포츠 일간지)가 주는 상의 이름이 됐다. 트로페오 피치치(Trofeo Pichichi)다. 한 사람의 어릴 적 별명이 리그 전체의 득점왕을 가리키는 말이 됐고, 지금도 매 시즌 수여된다.

기록은 아틀레틱 클루브에서 89경기 83골이다. 자료에 따라 91경기 84골로 적히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경기당 한 골에 가깝다. 신장은 자료마다 1.64m와 1.73m으로 갈린다. 한국에서 흔히 도는 154cm은 어느 원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그가 당대 수비수들보다 작았고, 그 작음이 별명의 출처였다는 사실이다.[2]

작은 몸으로 그는 골문 앞의 자리를 먼저 잡는 쪽을 택했다. 상대를 제치고 들어가는 대신 공이 도착할 지점에 미리 서 있었고, 그래서 그의 득점 장면에는 긴 드리블이 거의 없다. 뒷시대의 게르트 뮐러(Gerhard Müller; 독일 공격수, 1945-2021)나 필리포 인차기(Filippo Inzaghi; 이탈리아 공격수, 1973-)가 쓴 방법을 1910년대에 이미 쓰고 있었다.

1913년 8월 21일 산 마메스 개장 경기의 첫 골이 그의 것이었다. 경기장이 문을 여는 날 첫 골을 넣은 선수가 그 경기장의 성인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가 성인이 된 진짜 이유는 그다음이다. 1922년 3월 1일, 그는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스물아홉이었다. 상한 굴을 먹었다는 설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정확한 원인은 지금도 알 수 없다.

1926년 산 마메스에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그때부터 이 경기장을 처음 찾는 팀은 흉상 앞에 꽃을 놓는다. 2013년 새 산 마메스가 문을 열었을 때 흉상은 선수 통로 입구로 옮겨졌고 전통도 함께 옮겨졌다. 100년 동안 이어진 의식이다. 유럽 어느 경기장에도 처음 방문한 상대가 한 선수에게 꽃을 놓고 들어가는 곳은 없다.

스물아홉에 세상을 떠난 선수가 100년 뒤까지 남은 방식은 두 가지다. 리그의 득점왕 이름으로 한 번, 경기장 입구의 흉상으로 한 번이다.

11. 텔모 사라 - 센터 포워드

텔모 사라 센터 포워드 상세 정보 디자인
텔모 사라. 디자인: 삥이.
스페인 축구가 골을 재는 기준선.
기록이 어떻게 숭배가 되는가.

텔모 사라오난디아(Telmo Zarraonandía Montoya; 스페인 공격수, 1921-2006)는 아틀레틱 클루브에서 354경기 335골을 기록했다. 라리가만 놓고 보면 278경기 251골, 코파 델 레이는 74경기 81골이다. 코파에서는 경기 수보다 골이 많다.[4]

그가 라리가 득점왕에 오른 것은 여섯 번이다. 1944-45, 1945-46, 1946-47, 1949-50, 1950-51, 1952-53시즌. 이 여섯 번 가운데 1950-51시즌의 38골은 한 시즌 최다 기록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가 라리가에서 쌓은 251골은 1950년부터 2014년까지 스페인 리그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여섯 차례 득점왕이라는 기록은 2020년 리오넬 메시(Lionel Andrés Messi; 아르헨티나 공격수, 1987-)가 일곱 번째를 채울 때까지 예순일곱 해를 버텼다.[5]

숫자를 이렇게 늘어놓는 까닭은 그의 기록이 특정 시즌에 몰려 있지 않아서다. 여섯 번의 득점왕이 1944-45부터 1952-53까지 아홉 시즌 안에 흩어져 있다. 전후 스페인이 가난했고 리그의 수준이 고르지 않았다는 반론은 늘 따라붙지만, 같은 리그에서 같은 조건으로 뛴 다른 공격수들은 그 숫자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의 헤더는 도약 높이보다 도약 시점으로 설명된다. 언제 뛰어야 공이 이마에 정확히 닿는지를 계산하는 쪽이었다. 왼발, 오른발, 가슴, 어깨로도 넣었으니, 기술의 가짓수보다 골이 될 상황이면 몸의 어느 부위든 동원했다는 기록으로 읽어야 한다. 요컨대 골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그리고 1950년 7월 2일, 마라카낭.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스페인은 잉글랜드를 1-0으로 이겼고 결승골이 사라의 것이었다. 축구 종주국을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꺾은 골이었고, 이 승리로 스페인은 처음으로 세계 4강에 들었다. 스페인 대표팀에서 그의 기록은 20경기 20골이다. 경기당 한 골을 대표팀에서 지켰다.

피치치가 이름을 남겼다면 사라는 숫자를 남겼다. 스페인에서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를 이야기할 때 세대가 몇 번 바뀌어도 251골과 여섯 번의 득점왕이 비교 기준으로 먼저 놓인다. 라울 곤살레스(Raúl González Blanco; 스페인 공격수, 1977-)가 전설이고 다비드 비야(David Villa Sánchez; 스페인 공격수, 1981-)가 명예라면, 사라는 측정할 수 있는 숭배다.

마침내, 한 경기장에 선 열한 명

아틀레틱 클루브 역대 베스트 11 표제 4-4-2 대형으로 배치한 아틀레틱 클루브 역대 베스트 11 아틀레틱 클루브 역대 베스트 11 서브 명단 편집물
표제, 열한 명의 대형, 서브 명단 열다섯을 한 흐름으로 붙였다. 191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스물여섯 명이 한 장에 들어간다.

이 열한 명은 예외 없이 대바스크 지역에서 태어났거나 그곳에서 축구를 배웠다. 1911년부터 오늘까지 구단이 한 번도 놓지 않은 조항 하나가 120년의 시차를 가진 사람들을 같은 계보 안에 묶어 놓은 것이다.

다른 구단의 역대 베스트 11은 세계 지도를 펼친 결과다. 반면 이 구단의 역대 베스트 11은 한 지방의 인구 안에서 나온 결과다. 그러므로 여기 선 열한 명은 고른 결과인 동시에 남은 결과다. 오루에는 한 구단에서만 452경기를 뛰었고, 게레로는 전성기에 이적을 진지하게 검토한 적이 없다.

이 규칙이 만들어 낸 가장 선명한 장면은 트로피가 아닌 어느 원정에서 나왔다. 2012년 3월 8일, 마르셀로 비엘사(Marcelo Bielsa Caldera; 아르헨티나 축구 감독, 1955-)의 아틀레틱 클루브는 올드 트래퍼드에서 알렉스 퍼거슨(Sir Alexander Chapman Ferguson; 스코틀랜드 축구 감독, 1941-)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3-2로 이겼다. 페르난도 요렌테가 전반 막판에 따라붙었고 오스카르 데 마르코스와 이케르 무니아인이 마지막 18분에 경기를 뒤집었다. 일주일 뒤 산 마메스에서 2-1로 한 번 더 이겨 합계 5-3으로 통과했다. 바스크 출신만으로 짠 팀이 잉글랜드 챔피언을 홈과 원정에서 모두 이긴 것이다.

경기 전 맨체스터 섐블스 광장을 채운 원정 팬들. 아래 서브 명단에 있는 요렌테와 무니아인이 그날의 득점자다.

그 조항이 남긴 진짜 소득은 트로피의 개수가 아니다. 라리가에서 한 번도 강등되지 않은 세 구단 가운데 둘은 세계에서 선수를 사 왔고, 나머지 하나는 사지 않았다. 이 명단은 그 하나가 무엇으로 버텼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필자가 이 열한 명을 고르며 가장 오래 붙들고 있던 것은 선수의 우열보다 명단의 성격이었다. 다른 구단의 역대 베스트 11에서는 최고의 선수를 데려온 구단의 안목이 읽힌다. 이 명단에서는 한 지방이 120년 동안 배출한 인원의 총량이 읽힌다. 열한 자리를 채울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 구단이 내세울 만한 기록이다.

이미지 밖에서 다시 읽는 서브 명단 열다섯

대바스크 출신만 쓰는 조항 아래에서 이만한 명단이 한 번 더 나온다. 열한 자리에서 밀린 것이 실력의 순서는 아니며, 편집물 안의 이름은 검색 가능한 텍스트로 아래에 다시 적는다.

  • 라이문도 레자마Raimundo Pérez Lezama · 골키퍼

    1940년대와 1950년대 초 텔모 사라 시대의 골문을 지켰다.

  • 카르멜로 세드룬Carmelo Cedrún · 골키퍼

    1950년대 후반 스페인 대표 골키퍼로 이리바르 직전 세대를 맡았다.

  • 아구스틴 귀사솔라Agustín Guisasola Zabala · 센터백

    1971년부터 1983년까지 300경기 넘게 뛰었고 센터백과 측면, 수비형 미드필더를 모두 소화했다.

  • 카니토Canito · 레프트백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주장으로 수비 왼쪽을 맡았다.

  • 산티아고 우르키아가Santiago Urkiaga Pérez · 라이트백

    1979년부터 1987년까지 255경기를 뛰며 1982-83·1983-84시즌 연속 우승기의 오른쪽을 지켰다.

  • 헤나르 안드리누아Genar Andrinua Kortabarria · 수비형 미드필더

    1964년 빌바오에서 태어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중원의 균형을 맡았다.

  • 미겔 데 안드레스Miguel de Andrés · 수비형 미드필더

    1980년대 우승기와 그 이후를 잇는 중원의 연결 고리였다.

  • 조수 우루티아Josu Urrutia · 수비형 미드필더

    1987년부터 2003년까지 401경기를 뛰었고 훗날 구단 회장이 됐다.

  • 이케르 무니아인Iker Muniain · 공격형 미드필더

    2009년 데뷔 이후 구단 최다 출전 상위권에 오른 21세기의 얼굴이다.

  • 체추 로호Txetxu Rojo · 레프트 윙

    1960년대와 1970년대 이리바르 시대의 왼쪽 공격을 담당했다.

  • 조세바 에체베리아Joseba Etxeberria · 라이트 윙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오른쪽을 지켰고 마지막 시즌 연봉을 받지 않았다.

  • 마르켈 수사에타Markel Susaeta · 라이트 윙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까지 오른쪽 측면의 기준이었다.

  • 다니 루이스바산Daniel Ruiz-Bazán ‘Dani’ · 센터 포워드

    1980년대 두 차례 라리가 우승기의 주 득점원이었다.

  • 페르난도 요렌테Fernando Llorente · 센터 포워드

    2010년 전후 유럽 무대에서 아틀레틱 클루브의 최전방을 대표했다.

  • 아리츠 아두리스Aritz Aduriz · 센터 포워드

    서른 이후에 전성기를 맞아 30대 중반까지 득점을 쌓은 늦된 공격수다.

기록을 확인한 곳

  1. 구단 연혁 — Athletic Club 「History」. 창단과 산 마메스, 우승 횟수.
  2. 피치치 — Athletic Club 「Pichichi: 100 years since the death of Athletic’s first legend」, 「107 years since the debut of Pichichi」. 1913년 3월 17일 공식전 데뷔, 산 마메스의 첫 골, 공식전 89경기 83골, 1922년 별세, 1953년부터 득점왕 상에 붙은 이름.
  3. 이리바르 — Athletic Club 「58 years since Iribar’s debut」, 「40 years since Iribar’s tribute match」. 1962년 9월 23일 데뷔, 공식전 614경기(리그 466, 코파 93, 유럽 대회 55), 스페인 대표 49경기와 1964년 우승.
  4. 텔모 사라 — Athletic Club 「Telmo Zarra: 100 years a legend」. 1940년 입단과 열다섯 시즌, 354경기 335골, 득점왕 여섯 번, 스페인 대표 20경기 20골.
  5. 득점왕 시즌별 골 수 — RSSSF 「Spain - List of Topscorers」. 1944-45시즌 19골, 1945-46시즌 24골, 1946-47시즌 34골, 1949-50시즌 25골, 1950-51시즌 38골, 1952-53시즌 24골.
  6. 이쿠리냐의 합법화 — Naiz 「La ikurriña, 40 años en el balcón de los ayuntamientos」. 1977년 1월 19일의 합법화와 그 직전인 1976년 12월 5일 아토차의 두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