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영국의 랭커셔 및 요크셔 철도 회사의 철도 노동자 그룹에 의해 설립된 맨유. 이들의 146년 역사 중 최전성기를 구분하라면 세 개의 시대로 구분할 수 있을 텐데 첫 번째는 ‘근본’을 형성했다는 어니스트 맹널(Ernest Mangnall; 잉글랜드 축구 감독, 1866-1932) 감독 시대이고, 두 번째는 ‘빅클럽’ 반열에 제대로 들어선 맷 버스비 경 시대이며, 세 번째는 ‘명가재건’을 얹어주며 초강대 클럽으로 맨유를 탈바꿈시킨 알렉스 퍼거슨 경 시대라고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중 1967-68 시즌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역사가 왜 중요하냐면, 맨유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1958 뮌헨 비행기 참사’를 직접적으로 겪은 세대들이 똘똘 뭉쳐 빅 이어를 들어 올린 시즌이기 때문이다.

바비 찰턴 경을 비롯 수많은 잉글랜드 출신 선수들의 경외심을 들게 만들었던 던컨 에드워즈(Duncan Edwards; 잉글랜드 미드필더, 1936-1958)는 21세의 나이로 세상과 안녕을 말했지만 사경을 헤매다 돌아온 맷 버스비 경(Sir Alexander Matthew Busby, CBE; 스코틀랜드 축구 선수·감독, 1909-1994)을 위시한 바비 찰턴 경 등의 핵심 선수들이 초가집과도 비슷하던 Man United를 다시 빅클럽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던 당시였다.

MANCHESTER UNITED FOOTBALL CLUB1967-68

Sir Matt Busby, CBE · 뮌헨의 생존자들이 잉글랜드 최초로 빅 이어를 든 시즌

1967-68 시즌이 남긴 숫자

유러피언컵 트로피1위유러피언컵
풋볼 리그 챔피언십 트로피2위풋볼 리그 디비전 1
FA 채리티 실드공동 1위FA 채리티 실드
인터콘티넨털컵 트로피2위인터콘티넨털컵
발롱도르 트로피1·2위발롱도르 배출

발롱도르는 조지 베스트가 받았고 바비 찰턴 경이 2위였다. 한 구단이 그해 유럽 최고 선수의 1위와 2위를 동시에 차지한 것이다. 리그에서는 같은 도시의 맨체스터 시티에 우승을 내주고 준우승했고, FA컵은 3라운드에서 토트넘 홋스퍼에 막혀 일찍 끝났다. 시즌 앞의 FA 채리티 실드는 그 토트넘과 3-3으로 비겨 타이틀을 나눠 가졌다. 그리고 5월 29일 웸블리에서 유러피언컵을 들었다.[1]

인터콘티넨털컵 준우승은 엄밀히 말하면 그다음 시즌의 일정이다. 유러피언컵 우승 자격으로 1968년 9월 25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0월 16일 올드 트래퍼드에서 아르헨티나의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를 만나 합계에서 밀렸다. 한 시즌의 성적표에 함께 적는 이유는 그 대회 출전권 자체가 웸블리의 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뮌헨에서 웸블리까지, 열 해

이 시즌을 이해하려면 열 해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58년 2월 6일, 베오그라드에서 유러피언컵 8강 2차전을 마치고 돌아오던 전세기가 급유를 위해 뮌헨리엠 공항에 내렸다. 활주로에는 녹다 만 눈이 깔려 있었고, 두 번의 이륙 중단 뒤 세 번째 시도에서 기체는 속도를 얻지 못한 채 활주로 끝을 넘어갔다. 그날의 사고로 스물세 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중 여덟 명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였다. 주장 로저 번(Roger Byrne; 잉글랜드 수비수, 1929-1958)과 득점왕 토미 테일러(Tommy Taylor; 잉글랜드 센터 포워드, 1932-1958)가 현장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던컨 에드워즈는 열닷새를 더 버텼다. 스물한 살이었고, 이미 잉글랜드 대표로 열여덟 경기를 뛴 뒤였다. 맷 버스비 자신도 두 차례 종부성사를 받을 만큼 위중했다. 감독이 병상에서 일어나 벤치로 돌아온 것은 그해 8월이었다.

더 놀라운 건 그 시즌의 나머지다. 주전 절반이 사라진 팀이 유소년과 급히 데려온 선수들로 경기를 이어갔고, 그대로 FA컵 결승까지 올라갔다. 웸블리에서 볼턴 원더러스에 0-2로 졌지만, 참사 석 달 뒤에 그 무대에 서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록이다. 이 구단이 무너진 뒤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그해 봄에 이미 보여준 셈이다.

왜 하필 유럽이었는가를 짚어야 이 사고의 의미가 완성된다. 유러피언컵이 시작된 1955-56시즌, 잉글랜드 챔피언 첼시는 풋볼 리그의 반대에 부딪혀 참가를 포기했다. 국내 일정이 우선이고 유럽 원정은 불필요하다는 것이 리그의 입장이었다. 이듬해 챔피언이 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그 반대를 밀어내고 잉글랜드 구단 최초로 유러피언컵에 나갔다. 1956-57시즌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막혔고, 이듬해 다시 8강을 통과한 직후가 뮌헨이었다. 유럽으로 가겠다는 결정이 그 비행의 출발점이었고, 그래서 버스비에게 유러피언컵은 갚아야 할 약속이 됐다.[2]

열 해 뒤의 명단에는 그 밤을 직접 통과한 사람이 셋 남아 있었다. 감독 버스비, 스물의 나이로 기체에서 살아 나온 바비 찰턴, 그리고 부상자와 사망자를 기체 밖으로 끌어낸 빌 폴크스다. 셰이 브레넌은 참사 당시 스무 살의 유소년팀 선수였고, 사고 열사흘 뒤 급조된 팀의 FA컵 5라운드 경기에서 데뷔해 두 골을 넣었다.

그사이 잉글랜드 축구 자체도 다른 세계가 되어 있었다. 1961년에 최고 임금 상한제가 폐지됐다. 그전까지 잉글랜드 선수의 주급에는 법으로 정해진 천장이 있었고, 스타든 후보든 받을 수 있는 최대치가 같았다. 이 상한이 사라지면서 선수는 처음으로 몸값이라는 것을 갖게 됐고, 몇 해 뒤 조지 베스트가 축구 선수이면서 동시에 잡지 표지 모델이 되는 풍경도 가능해졌다. 뮌헨 이전의 맨유가 ‘버스비의 아이들’이었다면, 뮌헨 이후의 맨유는 그 아이들의 생존자와 새로운 스타 산업이 한 라커룸에 섞인 팀이었다.

1967-68시즌의 유럽 원정은 몰타의 히베르니안스에서 시작해 사라예보, 구르니크 자브제를 지나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만났다. 올드 트래퍼드 1차전은 베스트의 36분 골로 1-0. 베르나베우 2차전은 전반에만 세 골을 내주며 합계 1-3까지 끌려갔다. 후반, 이그나시오 소코의 자책골로 한 골을 줄이고 73분 새들러가 따라붙은 뒤, 80분에 빌 폴크스가 동점골을 넣었다. 뮌헨의 잔해에서 사람을 끌어냈던 수비수가 열 해 뒤 베르나베우에서 결승행을 확정지었다. 그 시즌 유럽에서의 패배는 구르니크 원정 한 경기뿐이었다.[3]

삥이가 고른 BGMAll Time Low - Time Bomb페이지 안에서 재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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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고른 베스트 11

알렉스 스테프니, 토니 던, 데이비드 새들러, 빌 폴크스, 셰이 브레넌, 노비 스타일스, 바비 찰턴, 팻 크레란드, 존 애스턴, 브라이언 키드, 조지 베스트로 구성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베스트 11 전술판
1967-68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베스트 11. 전술판 디자인: 삥이.

이 명단은 한 시즌 안에서 고른 열한 명이다. 그래서 이름값의 총합보다 그해 실제로 맞물린 조합에 가깝다. 뒤에는 서른여섯의 폴크스와 열아홉의 애스턴이 함께 서 있고, 중원에는 공을 되찾는 사람과 공을 흘려보내는 사람과 경기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각각 한 명씩 있다. 앞의 셋은 모두 스무 살 안팎이거나 스물둘이었다. 참사로 한 세대를 잃은 구단이 다음 세대를 다시 길러내 유럽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명단의 나이에 그대로 남아 있다.

1. 알렉스 스테프니 - 골키퍼

알렉스 스테프니 선수 디자인 카드
GK · GOALKEEPER

알렉스 스테프니

Alexander Cyril Stepney
국적
잉글랜드
시즌 기록
54경기 66실점 16클린시트
선정 근거
결승에서 에우제비우를 막은 골키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첫 번째 빅 이어 획득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골키퍼이며, 1960~70년대 잉글랜드 무대를 호령하던 골키퍼가 바로 알렉스 스테프니(Alexander Cyril Stepney; 잉글랜드 골키퍼, 1942-)였다. 더불어 같은 해 UEFA 유로 1968에서는 잉글랜드 대표팀에 뽑혀 조국의 3위를 함께했다. 주전은 당연히 고든 뱅크스(Gordon Banks; 잉글랜드 골키퍼, 1937-2019)였고, 알프 램지 감독이 뱅크스 뒤에 둔 백업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스테프니였다. 그의 A매치 데뷔는 1968년 5월 스웨덴과의 친선경기였는데, 그 경기가 유러피언컵 결승을 꼭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그리고 그 한 경기가 그의 대표팀 경력 전부가 된다.

특히 벤피카와의 결승전에서 에우제비우(Eusébio da Silva Ferreira; 모잠비크 출신 포르투갈 공격수, 1942-2014), 안토니우 시몽이스(António Simões; 포르투갈 윙어, 1943-), 주제 토헤스(José Augusto Torres; 포르투갈 센터 포워드, 1938-2010)로 이어지는 삼각편대를 상대로 뚫리지 않은 선방 쇼를 펼쳤으며, 에우제비우가 넘지 못한 몇 안 되는 골키퍼가 알렉스 스테프니이기도 하다.

그 장면의 시각까지 적어둘 만하다. 1-1로 맞선 정규 시간 종료 직전, 에우제비우가 수비 뒷공간을 잡고 단독으로 들어왔다. 스테프니는 각을 좁히며 버텼고 슈팅은 그의 가슴에 걸렸다. 에우제비우가 박수를 보낸 뒤 연장에 들어가 세 골이 터졌다. 한 번의 선방이 승부를 통째로 옮긴 셈이다.

2. 데이비드 새들러 - 좌 센터백

데이비드 새들러 선수 디자인 카드
CB · CENTRE BACK

데이비드 새들러

David Sadler
국적
잉글랜드
시즌 기록
56경기 6골 2도움
선정 근거
수비와 중원을 오간 시즌 최다 출전

1967-68 시즌의 핵심 센터백 중 한 명이었던 데이비드 새들러(David Sadler; 잉글랜드 수비수·미드필더, 1946-). 그 시절 노비 스타일스가 뚫리면 후방에는 새들러-폴크스 라인이 멀쩡히 가동되고 있었고, 이를 뚫으면 알렉스 스테프니라는 골키퍼가 버티고 있었다.

덕분에 유러피언컵에서도 겨우 ‘1패’만을 기록하며 우승했었고, 이는 수비진의 공이 매우 큰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벤피카와의 결승전에서도 에우제비우, 시몽이스, 토헤스에게 별다른 기회를 내주지 않았고, 심지어 마리우 콜루나(Mário Esteves Coluna; 모잠비크 출신 포르투갈 미드필더, 1935-2014)의 중거리 슈팅 각 역시 쉽게 내주지 않았었는데 여기에 데이비드 새들러의 역할도 매우 컸었다.

데이비드 새들러의 경우 맨유 역사상 가장 축구를 잘했다는 선수 ‘던컨 에드워즈’처럼 유틸리티 플레이어 기질이 있었는데 수비수가 아닌 미드필더, 심지어 공격수로 나설 때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만큼 축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선수였다고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그 기질이 가장 크게 쓰인 날이 4강 2차전이다. 합계 1-3으로 끌려가던 후반, 수비수인 그가 73분에 페널티 지역 안에서 공을 밀어 넣어 차이를 한 골로 줄였다. 이 골이 없었다면 7분 뒤 폴크스의 동점골도 결승행이 되지 못했다.

3. 빌 폴크스 - 우 센터백

빌 폴크스 선수 디자인 카드
CB · CENTRE BACK

빌 폴크스

William Anthony Foulkes
국적
잉글랜드
시즌 기록
33경기 2골
선정 근거
뮌헨 생존자, 4강 2차전 동점골

상술한 데이비드 새들러의 센터백 파트너가 바로 빌 폴크스(William Anthony Foulkes; 잉글랜드 수비수, 1932-2013)였다. 1967-68 시즌은 36세로 은퇴를 앞둔 시즌이었기에 시즌 내내 33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오늘날의 치아구 시우바나 조르조 키엘리니, 단치 등과 같은 명 수비수들처럼 구력은 오히려 상승하여 노익장을 과시했던 선수이기도 했었다.

빌 폴크스는 2024년 기준 라이언 긱스, 바비 찰턴 경, 폴 스콜스에 이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대 최다 출전 4위 688경기에 해당하는 기록도 갖고 있는데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레드 데블스를 위해 헌신하며, A급 기량을 유지했었는지 체감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더불어 빌 폴크스는 1958 뮌헨 비행기 참사의 생존자이기도 하다. 그는 기체에서 스스로 걸어 나온 뒤 다시 잔해로 돌아가 동료들을 끌어냈고, 사고 이후 급조된 팀에서 주장 완장을 이어받았다. 열 해 뒤 베르나베우에서 그가 넣은 동점골은 그 시즌 그의 두 골 가운데 하나였다. 서른여섯 살 수비수의 시즌 두 골 중 한 골이 구단을 첫 유럽 결승으로 올려보낸 것이다.

4. 토니 던 - 레프트백

토니 던 선수 디자인 카드
LB · LEFT BACK

토니 던

Anthony Peter Dunne
국적
아일랜드
시즌 기록
51경기 1골 1도움
선정 근거
유러피언컵 전 경기 선발

1967-68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챔스 우승 당시 레프트백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던 선수가 3명 있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토니 던(Anthony Peter Dunne; 아일랜드 수비수, 1941-2020)과 프랜시스 번스 그리고 유스 출신이었던 셰이 브레넌이었다. 특히 레프트백으로 토니 던 51경기 1골 1도움의 스탯 누적, 프랜시스 번스 46경기 2골의 스탯을 누적하며 주전급 활약을 선보였었는데 더욱 흥미로운 점은 프랜시스 번스의 경우 1967-68 시즌 46경기에 출전하던 당시의 나이가 시즌 개막 기준 ‘겨우 18세’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두 선수 중 아무래도 선수로서 더욱 완성도 있었던 선수는 토니 던이었는데 폴크스-새들러-브레넌과 함께 철의 포백을 형성하며 리그와 유러피언컵에서 팀의 고공행진을 이끌었었고, 특히 유러피언컵 우승 당시 전 경기 선발 출전하며 빅 이어 획득 1등 공신 중 한 명이기도 했었다.

이듬해였던 1969년에는 아일랜드 올해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기까지 하니 맨유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레프트백이라 평가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5. 셰이 브레넌 - 라이트백

셰이 브레넌 선수 디자인 카드
RB · RIGHT BACK

셰이 브레넌

Seamus Anthony Brennan
국적
아일랜드
시즌 기록
18경기 1골
선정 근거
참사 직후 데뷔한 유스 출신 풀백

셰이 브레넌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한 세이머스 앙토니 ‘셰이’ 브레넌(Seamus Anthony Brennan; 아일랜드 수비수, 1937-200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스 출신이었으며, 1958 뮌헨 비행기 참사를 10대의 나이에 경험하며, 맨유가 이 참사를 극복하기 위해 적극 기용했던 유소년팀 풀백이기도 했었다.

데니스 어윈, 게리 네빌, 필 네빌, 파트리스 에브라 등과 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대 가장 위대한 수비수 중 한 명으로 평가해 볼 수 있는 셰이 브레넌의 경우 데뷔 시즌부터 빅 이어를 들어 올렸던 1968년까지 항상 주인공 중 한 명이었으며, 1968년 ‘만감이 교차하던’ 우승 셀레브레이션 당시 맷 버스비 경의 품에 안겼던 선수이기도 하다.

그의 데뷔전 자체가 이 구단의 사정을 말해준다. 참사 열사흘 뒤인 1958년 2월 19일, 선수 명단을 겨우 채운 팀이 FA컵 5라운드에서 셰필드 웬즈데이를 만났고 스무 살 유소년팀 풀백이 왼쪽 윙어로 선발 출전해 두 골을 넣었다. 그날 경기 프로그램의 맨유 선수 명단 칸은 이름 없이 비어 있었다. 열 해 뒤 웸블리에서 그는 오른쪽 풀백으로 선발 출전한다. 시즌 18경기의 출전 기록만 보면 그를 이 자리에 세우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만, 유럽의 마지막 세 경기에서 버스비가 택한 오른쪽은 늘 브레넌이었다.

여담으로 브레넌은 맨체스터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고향을 따라 아일랜드 대표로 뛰었다. 같은 포백에 선 토니 던도 아일랜드 사람이었으니, 잉글랜드 구단의 첫 유럽 우승을 만든 포백의 양쪽 끝이 모두 아일랜드였던 셈이다. 스코틀랜드 출신 감독이 지휘하고 북아일랜드 출신 윙어가 결승골을 넣은 팀이라는 점까지 더하면, 이 우승을 ‘잉글랜드의 우승’으로만 부르기도 어딘가 부족해진다.

6. 노비 스타일스 - 수비형 미드필더

노비 스타일스 선수 디자인 카드
DM · DEFENSIVE MIDFIELDER

노비 스타일스

Norbert Peter Stiles
국적
잉글랜드
시즌 기록
29경기 2도움
선정 근거
에우제비우 전담 대인 방어

맨유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한 명이라고 볼 수 있는 노비 스타일스(Norbert Peter Stiles, MBE; 잉글랜드 미드필더, 1942-2020). 거머리 같은 수비력과 왕성한 활동량은 21세기에 이 팀을 응원하는 모든 팬들이 그리워하는 유형 중 한 명이기도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노비 스타일스는 당시 맨유나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꼭 필요한 존재이기도 했었다.

전투적인 기질과 찰거머리 같은 수비력 덕에 바비 찰턴 경의 우아한 플레이, 조지 베스트의 화려한 플레이 등이 충분히 가능했다고 볼 수 있겠으며, 설령 바비 찰턴이 볼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노비 스타일스는 다시 되찾아오는데 능한 모습을 보였었다.

특히 노비 스타일스의 인생 경기라고 한다면 유러피언컵 결승전 vs 벤피카, 1966 FIFA 월드컵 4강 vs 포르투갈전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에우제비우를 꽁꽁 틀어막으며 팀의 승리를 이끄는 핵심 선수가 되어주기도 했었다. 두 경기의 상대가 같은 선수였다는 점이 이 대인 방어의 성격을 말해준다. 스타일스는 키가 크지 않았고 발도 빠른 편이 아니었다. 대신 상대가 공을 받기 전에 먼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은골로 캉테나 박지성 선수가 조금 더 거친 버전이랄까. 과거 마르세유에서 ‘미친개’라고 불렸던 로리크 차나가 생각나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명 미드필더 젠나로 가투소를 상상해 봐도 좋을 것 같다.

7. 팻 크레란드 - 공격형·중앙 미드필더

팻 크레란드 선수 디자인 카드
CM · CENTRAL MIDFIELDER

팻 크레란드

Patrick Timothy Crerand
국적
스코틀랜드
시즌 기록
55경기 1골 5도움
선정 근거
스타일스와 찰턴을 잇는 윤활유

‘영국 축구계는 스코틀랜드 출신 감독·선수를 빼면 절반의 가치가 퇴보할’ 수준이라고 찬사를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스코틀랜드에는 1966-67 셀틱의 5관왕 멤버들을 더불어 잉글랜드 무대에서 뛰던 스코틀랜드 역사를 꽃피운 명 선수들이 많았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팻 크레란드(Patrick Timothy Crerand; 스코틀랜드 미드필더, 1939-)였다. 여담으로 영국 역대 최고의 감독이라 평가되는 조크 스타인, 빌 샹클리, 맷 버스비 경, 알렉스 퍼거슨 경, 케니 달글리시 경 모두 스코틀랜드 출신.

팻 크레란드는 조지 베스트, 바비 찰턴 경, 데니스 로 등에게 가려져서 이름값이 낮을 뿐 당시 맨유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선수 중 한 명이었는데 노비 스타일스, 바비 찰턴을 적절히 윤활할 수 있는 플레이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으며, 어쩌면 노비 스타일스와 조금 더 유사한 면이 있던 미드필더이기도 했었다.

바비 찰턴이 그라운드 이곳저곳을 휘저을 수 있던 원동력 중 하나가 스타일스와 크레란드의 존재 덕분이었는데 팻 크레란드는 이러한 스타일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달리거나 싸울 줄 알아야 했어요.”라고 인터뷰한 적도 있었으며, 특히 조지 베스트가 크레란드에 대해 평가하길 “그는 스코틀랜드 괴짜에요.”라는 표현까지 섞으며 그의 축구 스타일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내기도 했던 사례도 있었다.

한 가지 덧붙이면, 크레란드는 1966-67 셀틱의 우승 멤버가 아니라 그 셀틱에서 1963년에 맨체스터로 건너온 선수다. 그가 떠난 뒤의 셀틱은 1966-67시즌에 스코티시 리그와 컵, 리그컵, 글래스고컵, 그리고 유러피언컵까지 다섯 대회를 모두 가져갔다. 축구 역사에서 한 시즌에 다섯 개를 쓸어 담은 사례는 이때의 셀틱뿐이다. 같은 시기 스코틀랜드 출신 지도자와 선수가 잉글랜드 축구의 뼈대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한 사람의 이동 경로에도 남아 있다.

8. 바비 찰턴 경 - 공격형·중앙 미드필더

바비 찰턴 경 선수 디자인 카드
CM · CENTRAL MIDFIELDER

바비 찰턴 경

Sir Robert Charlton
국적
잉글랜드
시즌 기록
55경기 20골 5도움
선정 근거
결승 2골, 뮌헨 생존자이자 주장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물론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All Time Best라고 평가하는데 부족함이 일절 없으며, 스탠리 매슈스 경, 톰 피니 경, 지미 그리브스, 데이비드 베컴, 스티븐 제라드, 바비 무어, 존 테리, 고든 뱅크스 등과 함께 잉글랜드 축구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 바비 찰턴 경(Sir Robert Charlton, CBE; 잉글랜드 미드필더, 1937-2023).

1960년대에 펠레, 가린샤, 요한 크라위프, 에우제비우, 산드로 마촐라, 루이스 수아레스, 요제프 마소푸스트, 지지, 프란츠 베켄바워 등과 함께 가장 위대했던 당대 최고급 플레이어가 바로 바비 찰턴 경이었으며, 맨유 역사에서 이 선수를 빼면 ‘앙꼬 없는 찐빵’이라고까지 미사여구를 곁들일 수 있겠다.

1966 FIFA 월드컵에서 서독의 베켄바워와 함께 가장 뛰어났던 퍼포먼스를 선보인 바비 찰턴 경은 1966년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영예를 맞이했으며, 1967-68 시즌에도 마찬가지로 유러피언컵은 물론 UEFA 유로 1968에서도 팀 내에서만큼은 MVP 급의 활약을 선보여 발롱도르 2위에 랭크되기도 했었다.

뮌헨을 통과한 사람이 웸블리에서 든 트로피

이 자리에 그를 세우는 일은 다른 열 자리와 성격이 다르다. 찰턴은 1958년 2월 6일 그 기체에 타고 있었고, 스무 살에 동료 여덟 명을 한 번에 잃었다. 열 해 뒤 웸블리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선발로 나선 사람도, 55분에 머리로 선제골을 넣고 연장 100분에 팀의 네 번째 골을 넣은 사람도 그였다. 구단의 첫 유럽 우승에서 두 골을 넣은 선수가 참사의 생존자였다는 사실은 이 팀의 열 해를 한 문장으로 묶는다.

경기 뒤 그는 탈진해 만찬에 내려오지 못했다. 버스비가 홀에서 노래를 부르는 동안 주장은 방에 누워 있었다. 승리의 장면을 기록할 때 흔히 지워지는 쪽이지만, 그 두 골과 그 탈진이 같은 사람의 것이라는 점을 적어두는 편이 정확하다.

덧붙이면 그 잔디는 그에게 두 번째였다. 1966년 7월 30일, 같은 웸블리에서 찰턴은 월드컵을 들었다. 노비 스타일스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두 해 사이에 같은 경기장에서 세계 챔피언과 유럽 챔피언이 된 선수가 한 팀에 둘이나 있었던 셈인데, 이런 조합은 이후 잉글랜드 축구에서도 흔치 않다.

그의 축구가 남긴 문법

찰턴의 플레이는 위치로 설명하기 어렵다. 인사이드 포워드로 시작해 중원으로 내려왔고, 공을 잡으면 방향을 바꾸는 데 한 번의 터치만 썼다. 왼발과 오른발의 차이가 거의 없어 수비수가 한쪽으로 몰 수 없었고, 25미터 밖에서의 슈팅이 항상 선택지에 있었기 때문에 상대는 물러설 수도 달려들 수도 없었다. 스타일스와 크레란드가 뒤를 채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자유롭게 움직일수록 팀이 얻는 것이 많았다.

9. 존 애스턴 - 레프트 윙포워드

존 애스턴 선수 디자인 카드
LW · LEFT WING FORWARD

존 애스턴

John Aston Jr.
국적
잉글랜드
시즌 기록
46경기 11골 1도움
선정 근거
결승 MOTM, 당시 19세

아버지 존 애스턴(John Aston Sr.; 잉글랜드 수비수, 1921-2003)이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맨유에서 활약했고, 그 뒤를 이어 1965년부터 1972년까지 맨유를 위해 활약한 존 애스턴 주니어(John Aston Jr.; 잉글랜드 윙어, 1947-). 데니스 로가 아닌 존 애스턴을 맷 버스비 시대 챔스 우승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베스트 11으로 선정해 본다.

1966-67 시즌 풋볼 리그 디비전 1 우승에 공을 세웠던 존 애스턴은 1967-68 시즌이 되어서 인터콘티넨털컵 준우승과 유러피언컵 우승을 이끄는 핵심 멤버가 되었는데 특히 벤피카와의 경기에서 MOTM에 선정된 선수는 2골을 넣은 바비 찰턴이나 조지 베스트가 아닌 ‘존 애스턴’이기도 했었다.

이러한 존 애스턴의 당시 나이는 겨우 19세.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상대 오른쪽 수비수의 위치로 설명된다. 애스턴은 결승 내내 벤피카의 오른쪽을 혼자 갈랐고, 그 바깥쪽 압박이 중앙의 에우제비우에게 공이 편하게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표팀 경력도 없고 트로피 이후의 경력도 길지 않았던 선수가 구단 역사상 가장 중요한 90분에서 최고의 선수였다는 기록은, 이 명단이 그해의 조합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10. 조지 베스트 - 라이트 윙포워드

조지 베스트 선수 디자인 카드
RW · RIGHT WING FORWARD

조지 베스트

George Best
국적
북아일랜드
시즌 기록
55경기 32골 7도움
선정 근거
시즌 32골과 연장 역전골, 1968 발롱도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데이비드 베컴과 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최고의 슈퍼스타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선수이며, 당대 언론의 주목을 받던 스타 조지 베스트(George Best; 북아일랜드 윙어, 1946-2005). 드리블 스타일 역시 화려함의 극치였으며, 성격과 센스마저도 여느 슈퍼스타처럼 언론의 주목을 받기에 좋은 타입이기도 했었다. 심지어 외모 역시 빼어났으니 영국 최고의 인기 선수이기도 했었다.

수비진이 쉽게 막을 수 없는 드리블 스타일로 바비 무어와 같은 당대 슈퍼 클래스 수비수들을 앞에 두고도 쫄지 않는 플레이를 선보였으며, 특히 유러피언컵 결승전 당시 바비 찰턴이나 에우제비우, 시몽이스보다 빛이나는 것은 조지 베스트이기도 했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라는 말 그대로 왕성한 활동량과 측면을 붕괴해 중앙으로 파고드는 드리블 스킬은 일품이었으며, 연장전으로 접어들던 당시 결승전에서 벤피카를 무너뜨리는 역전 골을 넣은 주인공이 조지 베스트이기도 했었다.

활약에 힘입어 조지 베스트는 1968년 발롱도르 최종 위너가 되었으며, 더불어 총 32골을 넣으며 맨유 최다 득점자가 되기도 했었다.

97분, 골키퍼를 지나간 드리블

역전 골의 장면은 한 문장으로 기록되지만 실제로는 세 동작이었다. 연장 전반 97분, 스테프니가 길게 걷어낸 공을 키드가 머리로 떨궜고 베스트가 중앙에서 이를 잡았다. 수비수 한 명을 안쪽으로 속인 뒤 페널티 지역에서 골키퍼 주제 엔리케(José Henrique Rodrigues; 포르투갈 골키퍼, 1945-)가 나오자 몸을 틀어 그 옆으로 공을 밀고 지나갔고, 빈 골문 앞에서 멈춘 뒤 밀어 넣었다. 2-1이 된 직후 키드와 찰턴의 골이 이어져 4-1이 됐다.

스물두 살이었다. 그해 그는 리그 28골을 포함해 공식전 32골로 구단 최다 득점자가 됐고 발롱도르를 받았다. 그 뒤의 경력이 짧았다는 사실 때문에 이 시즌이 ‘전성기의 한 조각’으로 축소되곤 하지만, 1967-68시즌의 베스트는 유럽에서 가장 결정적인 선수였다.

당시 영국 언론이 그에게 붙인 별명이 ‘다섯 번째 비틀’이었다. 1966년 벤피카 원정에서 5-1 승리를 이끈 뒤 솜브레로를 쓰고 공항에 나타난 사진 한 장이 그 별명의 출발점이었다고 전해진다. 축구 선수가 경기장 밖에서 소비되는 방식이 이때부터 달라졌고, 그 변화의 첫 번째 사례가 하필 이 팀에 있었다.

11. 브라이언 키드 - 센터 포워드

브라이언 키드 선수 디자인 카드
CF · CENTRE FORWARD

브라이언 키드

Brian Kidd
국적
잉글랜드
시즌 기록
51경기 17골 5도움
선정 근거
열아홉 번째 생일에 넣은 결승 세 번째 골

데니스 로, 조지 베스트와 함께 1960년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베스트 11 공격수였으며, 1967-68 시즌에는 51경기에 출전해 17골을 터뜨리며 센터 포워드 다운 모습을 선보인 바 있었던 브라이언 키드(Brian Kidd; 잉글랜드 공격수, 1949-). 더불어 벤피카를 상대로 세 번째 골을 넣었으며, 벤피카 골키퍼였던 주제 엔리케와의 ‘핑퐁 호흡 골’이 재밌던 순간이기도 했었다. 현실은 골키퍼와 공격수의 숨 막히는 접전이었지만.

참고로 그가 빅 이어를 확정 짓는 골을 터뜨리던 날은 18세에서 19세로 넘어가던 키드의 ‘생일’이었다. 이건 기록으로 남아 있다. 키드는 1949년 5월 29일에 태어났고, 결승은 1968년 5월 29일에 열렸다. 그는 열아홉 번째 생일에 유러피언컵 결승에 선발로 나서 골을 넣었다.

98분의 그 골도 한 번에 들어가지 않았다. 헤더가 골키퍼에게 막혀 나온 공을 다시 머리로 넘겨 득점했다. 맨체스터 콜리허스트에서 자란 유소년팀 출신 공격수가, 참사로 유소년 세대를 통째로 잃었던 구단의 첫 유럽 우승에서 세 번째 골을 넣었다.

베스트 11에 들지 못한 후보

베스트 11에 들어가지 못한 후보 선수들입니다. 프랜시스 번스(Francis Burns; 스코틀랜드 수비수, 1948-)는 시즌 개막 기준 18세로 46경기 2골을 쌓은 레프트백이었고, 존 피츠패트릭(John Fitzpatrick; 스코틀랜드 수비수·미드필더, 1946-2021)은 21세로 같은 자리와 중원을 함께 봤다. 그리고 센터 포워드 데니스 로(Denis Law; 스코틀랜드 공격수, 1940-2025), 당시 28세.

로의 부재는 이 팀의 성격을 오히려 선명하게 만든다. 맨유의 1960년대를 이야기할 때 흔히 ‘삼위일체’라 부르는 베스트·로·찰턴 가운데 한 축이 빠진 채로 유럽 정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열아홉 살 키드가 메웠고, 왼쪽은 역시 열아홉 살 애스턴이 맡았다. 그는 웸블리의 밤을 병원 침대에서 라디오로 들었다. 구단 역사상 가장 큰 승리의 순간에 가장 큰 스타 중 한 명이 경기장 밖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 열한 명이 왜 이렇게 묶였는지를 그대로 설명한다.

결론 - 한 시즌을 열한 명으로 고정한다는 것

이 편은 처음부터 1967-68 한 시즌만 본다. 그란데 인테르처럼 열두 해를, 레알 마드리드처럼 열한 해를 압축한 명단이 아니다. 시대를 고르면 누구를 넣을지 고민하게 되지만, 한 시즌을 고르면 그 시즌이 이미 답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명단의 열한 자리는 1968년 5월 29일 웸블리의 선발 기록과 그대로 겹친다.

알렉스 스테프니 · 셰이 브레넌 · 빌 폴크스 · 노비 스타일스 · 토니 던 · 팻 크레란드 · 바비 찰턴(주장) · 조지 베스트 · 브라이언 키드 · 데이비드 새들러 · 존 애스턴[1]

겹침은 예상된 일이다. 버스비가 구단 역사상 가장 중요한 90분에 세운 열한 명이 곧 그 시즌의 답이었고, 필자가 시즌 기록과 역할을 따져 고른 결과도 같은 자리에 도착했다. 다만 그 명단을 읽는 방법은 결승 선발표만 봐서는 나오지 않는다. 서른여섯의 폴크스와 열아홉의 애스턴이 왜 같은 줄에 서 있는지, 18경기만 뛴 브레넌이 왜 오른쪽인지, 한 시즌을 통째로 따라가야 보인다.

경기는 4-1로 끝났지만 정규 시간은 1-1이었다. 찰턴이 55분에 앞서 나갔고 하이메 그라사(Jaime Graça; 포르투갈 미드필더, 1942-2012)가 80분에 따라붙었다. 연장에서 베스트, 키드, 찰턴이 차례로 넣었다. 관중 92,225명, 주심은 이탈리아의 콘체토 로 벨로(Concetto Lo Bello; 이탈리아 심판, 1924-1991)였다. 잉글랜드 구단이 유러피언컵을 든 첫 번째 밤이었고, 첼시가 리그의 반대로 유럽행을 포기한 1955년으로부터 열세 해 뒤였다.[1]

버스비는 이 우승 이듬해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참사에서 살아남은 감독이 잃어버린 팀의 목적지에 도착한 뒤 자리를 내려놓은 셈이다. 그래서 1967-68시즌의 베스트 11은 한 시즌의 최고 선수 열한 명이기 이전에, 열 해 동안 끊겼다가 다시 이어진 한 구단의 시간표다.

이것이 필자가 고른 세 번째 커스텀 베스트 11이다.

출처와 집계 기준

  1. RSSSF, “European Champions’ Cup 1967-68 – Details”. 1968년 5월 29일 결승의 득점 시각, 양 팀 선발 명단, 관중 92,225명과 주심 기록,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대회 전 경기 결과를 대조했다.
  2. RSSSF, “European Champions’ Cup 1967-68”. 1라운드부터 결승까지의 대진과 합계 결과를 확인했다.
  3. Manchester United, “European Cup / Champions League”. 구단 공식 트로피룸의 1968년 우승 기록.
  4. RSSSF, “European Footballer of the Year (‘Ballon d’Or’)”. 1968년 조지 베스트 수상과 바비 찰턴 2위, 1966년 찰턴 수상 기록.
  5. 선수별 1967-68시즌 공식전 기록(경기·골·도움·실점·클린시트)은 삥이FC가 정리한 당시 집계를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