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 LEGEND
산드로 마촐라(Sandro Mazzola)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인테르 GOAT 공격형 미드필더
그란데 토리노 주장의 아들로 태어나 인테르 한 구단에서만 17시즌을 뛴 산드로 마촐라. 빈의 결승 2골과 푸슈카시가 건넨 셔츠, 잔니 리베라와 한 경기를 반씩 나눠 뛴 1970년 멕시코의 계주, 크라위프 다음이었던 1971년 발롱도르까지. 그란데 인테르의 인사이드 라이트가 미드필더로 내려서며 바뀐 번호의 사연과 클럽·국대 기록, 우승과 개인 수상을 정리한다.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유럽축구연맹Union des Associations Européennes de Football
산드로 마촐라(Alessandro “Sandro” Mazzola; 이탈리아 축구선수·공격형 미드필더, 1942-2026)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가 낳은 가장 위대한 선수다. 그란데 토리노의 주장 발렌티노 마촐라의 아들로 태어나 여섯 살에 수페르가에서 아버지를 잃었고, 열여덟 살에 인테르 1군에 데뷔해 서른네 살에 은퇴할 때까지 다른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 1964년 빈의 프라터 경기장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두 골을 넣어 구단에 첫 유러피언컵을 안겼고, 엘레니오 에레라의 그란데 인테르에서 세리에 A 네 번, 유러피언컵 두 번, 인터콘티넨털컵 두 번을 들었다. 빠른 발과 드리블로 수비 사이를 찢던 인사이드 라이트는 1970년대에 한 줄 내려선 미드필더가 되어 1971년 발롱도르에서 요한 크라위프 다음 자리에 섰다. 아주리에서는 UEFA 유로 1968 우승과 1970년 월드컵 준우승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의 축구 인생 처음부터 끝까지, 밀라노의 반대편에는 잔니 리베라가 있었다. 아홉 달 사이로 태어나 같은 도시에서 같은 자리를 다투고 같은 아주리 셔츠를 나눠 입어야 했던 두 사람의 맞수 관계는 이탈리아 축구사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이어진 논쟁이다.
관중석을 등진 젊은 마촐라의 옆얼굴, 그리고 콧수염을 기른 아주리 시절의 마촐라.
- 관중석을 등진 젊은 마촐라의 옆얼굴, 그리고 콧수염을 기른 아주리 시절의 마촐라.
- 줄무늬 유니폼의 마촐라가 흰 상의 수비수를 등지고 몸을 돌려 빠져나간다.
- 8번을 단 마촐라가 공을 몰고 들어가다 방향을 꺾어 뒤따르던 수비수를 떼어 낸다.
- 햇빛과 그림자가 갈린 운동장에서 수비수 둘을 연달아 벗겨 낸다.
- 레알 마드리드를 털어먹는 산드로 마촐라.
- 아주리 유니폼의 마촐라가 수비수를 제치고 골키퍼가 몸을 던지기 전에 낮게 차 넣는다.
- 골키퍼까지 제친 뒤 빈 골문에 공을 밀어 넣는다.
- 페널티 지역 안에서 흰 상의 수비수 셋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마무리한다.
삥이FC 산드로 마촐라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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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를 놓고 다툴 이름은 많다. 1930년대의 득점 기계 주세페 메아차(Giuseppe Meazza; 인테르와 이탈리아의 공격수, 1934·1938 월드컵 우승, 1910-1979), 구단이 3번을 영원히 남겨 둔 자친토 파케티, 858경기를 뛴 하비에르 사네티(Javier Zanetti; 인테르와 아르헨티나의 측면 수비수·미드필더, 1973-), 한 구단에서만 20시즌을 보낸 주세페 베르고미(Giuseppe Bergomi; 인테르와 이탈리아의 수비수, 1963-), 1997-98 시즌 한 해로 세계를 흔든 호나우두. 필자는 그 맨 앞에 산드로 마촐라를 세운다. 그의 생애 하나가 이 계보 전체를 꿰기 때문이다. 유소년 시절의 그를 돌본 어른이 메아차였고, 1군에서 함께 유럽을 정복한 동료가 파케티였다. 은퇴 뒤 단장이 된 그는 아르헨티나의 스물한 살 사네티를 밀라노로 데려오는 데 힘을 보탰고, 1997년 여름 호나우두가 인테르 본사에서 첫 인사를 할 때 루이스 수아레스와 함께 그 옆에 섰다. 인테르는 그의 부고에 그가 소년으로 들어와 다시는 나가지 않은 구단의 역사 그 자체였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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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축구는 속도에서 출발했다. 그란데 인테르의 오른쪽 인사이드 포워드, 당시 번호로 8번 자리에서 출발한 그는 공을 받기 위해 미드필드로 내려왔다가 수비 사이의 빈 곳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첫 터치로 공을 앞에 놓고 두 번째 터치에서 이미 수비수의 옆을 지나가는 드리블, 30미터 밖에서도 골문 구석을 노리는 오른발 슈팅, 그리고 골문 앞에서 서두르지 않는 침착함이 한 사람 안에 있었다. 이탈리아 축구 연맹 박물관은 그를 아주 빠르고, 드리블이 좋고, 골문 앞에서 맑은 정신을 잃지 않는 선수로 기록한다.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 아르헨티나 태생 프랑스의 감독, 1910-1997)는 그에게 미드필드와 공격 사이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줬고, 마촐라는 훗날 그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에레라는 나를 아약스의 크라위프처럼 뛰게 했다, 그것도 10년 먼저. 1970년대에는 나이와 함께 한 줄 내려와 경기를 조립하는 미드필더가 됐고, 그 자리에서 1971년 발롱도르 2위에 올랐다. 공격수와 미드필더, 두 번의 전성기를 다른 포지션에서 맞은 드문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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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무대에서 그는 가장 먼저 이름을 남겼다. 1963-64 시즌 유러피언컵에서 일곱 골을 넣어 푸슈카시 페렌츠와 함께 공동 득점왕이 됐고, 그 가운데 두 골이 빈의 결승이었다. 이듬해 안필드에서도 골을 넣었고, 1967년 리스본 결승에서는 페널티킥으로 선제골을 넣었다. 국가대표팀에서는 1968년 로마의 결승 재경기를 지휘해 이탈리아의 첫 유럽 챔피언 트로피를 들었고, 1970년 멕시코에서는 세기의 경기라 불린 서독전 준결승과 펠레의 브라질을 만난 결승을 뛰었다. 인테르가 유럽에서 처음 쓴 역사의 첫 문장이 그의 오른발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구단사에서 그의 자리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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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지고 태어났다. 발렌티노 마촐라(Valentino Mazzola; 토리노와 이탈리아의 인사이드 레프트, 그란데 토리노의 주장, 1919-1949)는 많은 사람이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는 사람이다. 그 아들이 아버지의 구단 토리노를 떠나 밀라노의 인테르에서 자랐고, 아버지와 다른 유니폼으로 아버지만큼의 이름을 얻었다. 1964년 결승이 끝난 빈의 그라운드에서 아버지와 맞붙은 적이 있던 푸슈카시가 그에게 셔츠를 건넨 장면은, 이탈리아 축구가 한 세대를 건너 이어진 순간으로 지금도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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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잔니 리베라(Giovanni “Gianni” Rivera; AC 밀란과 이탈리아의 공격형 미드필더, 1969년 발롱도르, 1943-)가 있다. 필자는 두 사람의 맞수 관계를 볼프강 오베라트와 귄터 네처, 요한 크라위프와 프란츠 베켄바워, 미셸 플라티니와 지쿠와 디에고 마라도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의 대결과 같은 높이에 놓는다. 아홉 달 차이로 태어난 두 사람은 같은 도시의 두 구단을 15년 넘게 대표했고, 1963년부터 1969년까지 밀라노는 일곱 시즌 가운데 네 번 유럽 챔피언을 배출했다. 무엇보다 둘은 한 나라의 같은 셔츠를 놓고 겨뤘다. 대표팀 감독이 끝내 한 경기를 전반과 후반으로 나눠 두 사람에게 맡긴 맞수 관계로는 축구사에서 이보다 유명한 예가 없다. 그 시절 신문은 두 사람을 원수처럼 갈라 세웠지만, 정작 둘은 그 기사를 읽으며 웃었고 함께 이탈리아 축구선수 협회를 세웠다. 반세기가 지난 2021년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이 이탈리아 역대 드림팀을 꾸렸을 때, 두 사람은 1군 공격형 미드필더 두 자리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산드로 마촐라 프로필
- 본명
- Alessandro Mazzola
- 등록명
- 산드로 마촐라(Sandro Mazzola)
- 출생
- 1942년 11월 8일
- 출생지
- 이탈리아 토리노
- 사망
- 2026년 9월 19일 · 향년 83세
- 가족
- 아버지 발렌티노 마촐라 · 동생 페루초 마촐라
- 대표 국적
- 이탈리아
- 포지션
- 인사이드 라이트 · 공격형 미드필더 · 중앙 미드필더
- 선수 경력
- 1960-1977년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대표팀
- 이탈리아 70경기 22골
- 주요 등번호
- 8번 · 10번
- 은퇴 뒤
- 인테르·제노아·토리노 단장
- 별명
- 검은 수염(Il Baffo; 콧수염)
- 맞수
- 잔니 리베라
1949년 5월 4일 수페르가, 여섯 살의 아들
산드로 마촐라는 1942년 11월 8일 토리노에서 알레산드로 마촐라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해 여름 아버지 발렌티노가 베네치아에서 토리노로 옮겨 왔다. 밀라노 근교 카사노다다(Cassano d’Adda; 밀라노 동쪽 아다강 가의 마을)에서 태어나 알파 로메오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출신의 발렌티노는, 토리노에서 주장이자 득점원이자 팀의 영혼이 됐다. 그가 소매를 걷어붙이면 토리노 홈구장 필라델피아에 15분의 맹공이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한다. 토리노는 1942-43 시즌부터 전쟁의 공백을 사이에 두고 다섯 번 연속 이탈리아 정상에 섰고, 사람들은 그 팀을 위대한 토리노, 그란데 토리노(Il Grande Torino; 1940년대 세리에 A 5연패를 이룬 토리노 FC)라 불렀다. 그 팀이 어떤 축구를 했는지는 그란데 토리노 WM 전술에, 그 축구가 왜 이탈리아에 남지 못했는지는 세계 최고였던 토리노의 축구에 따로 적었다.
아버지는 일요일마다 아들을 데리고 그라운드에 나갔다. 어린 산드로는 경기 전 운동장에서 아버지의 동료 골키퍼 발레리오 바치갈루포(Valerio Bacigalupo; 그란데 토리노의 골키퍼, 1924-1949)를 상대로 슛을 차 보곤 했고, 발렌티노는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봤다.

1947년 5월 11일 토리노 코무날레 경기장에서 이탈리아는 헝가리를 3-2로 꺾었다. 이탈리아 선발 11명 가운데 10명이 토리노 선수였고, 발렌티노는 그날 이탈리아의 중심이었다. 헝가리 쪽에는 스무 살의 푸슈카시 페렌츠가 있었다. 그 경기는 17년 뒤 빈에서 한 번 더 이야기된다.

1949년 5월 4일, 리스본에서 벤피카와 친선 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던 토리노 선수단의 비행기가 짙은 안개 속에서 토리노 외곽 수페르가 언덕의 성당 뒤편 담장에 부딪혔다. 탑승자 전원이 숨졌고, 그란데 토리노는 그날로 사라졌다. 산드로는 여섯 살 반이었다. 인테르는 훗날 그를 추모하며,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끌어안던 어른들의 무너진 얼굴을 바라보던 소년을 떠올렸다. 그는 아버지를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알게 됐다. 여든 살이 된 2022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더는 울지 않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덧붙였다. 아버지는 지금도 꿈에서 다시 만난다, 눈을 뜬 채로.
1961년 6월 10일 토리노, 1-9의 한 골
아버지를 잃은 소년은 밀라노에서 자랐고, 인테르의 유소년 팀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를 돌본 어른이 1950년대 인테르의 공격수 베니토 로렌치(Benito Lorenzi; 인테르와 이탈리아의 공격수, 1925-2007)와 인테르 역사상 최고의 골잡이 주세페 메아차였다. 그 소년에게 기회는 이상한 날에 찾아왔다.
1960-61 시즌 4월 16일 유벤투스와 인테르의 경기는 관중이 그라운드 가장자리까지 밀려 들어와 30분 만에 멈췄다. 이탈리아 축구 연맹은 처음에 인테르의 몰수승을 선언했다가 재경기로 결정을 뒤집었다. 구단주 안젤로 모라티(Angelo Moratti; 석유 사업가, 1955-1968년 인테르 구단주, 1909-1981)는 항의의 뜻으로 6월 10일 토리노의 재경기에 유소년 팀을 내보냈다. 유벤투스의 오마르 시보리(Enrique Omar Sívori; 아르헨티나 태생 유벤투스와 이탈리아의 공격수, 1961년 발롱도르, 1935-2005)가 혼자 여섯 골을 넣었고 유벤투스는 9-1로 이겼다. 인테르의 한 골은 열여덟 살 마촐라가 페널티킥으로 넣었다. 세리에 A 데뷔전이었다. 그해 시보리가 발롱도르를 받은 사정은 1961년 발롱도르 시보리 편에 적었다.

그해 유벤투스의 주장 잠피에로 보니페르티(Giampiero Boniperti; 유벤투스와 이탈리아의 공격수, 1928-2021)는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표팀에서 너의 아버지와 함께 뛰었다, 내가 본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 칭찬이었지만 그 말은 소년이 평생 들을 비교의 첫 줄이기도 했다. 그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밝힌 마지막 말에도 그 9-1이 들어 있다.
1963년, 13초와 펠레
1960년 인테르에 온 에레라는 1961-62 시즌 마촐라를 한 경기만 내보냈다. 이듬해 1962-63 시즌 그는 세리에 A 23경기에서 10골을 넣었고, 인테르는 구단의 여덟 번째 스쿠데토(scudetto; 이탈리아 리그 우승팀이 이듬해 셔츠에 다는 삼색 방패, 곧 리그 우승)를 들었다. 그 시즌 2월 24일의 밀라노 더비에서 그는 킥오프 13초 만에 골을 넣었다. 지금도 밀라노 더비 역사상 가장 빠른 골이다. 경기는 1-1로 끝났고, 반대편 밀란의 미드필드에는 열아홉 살의 리베라가 있었다. 두 사람이 더비에서 처음 마주 선 날이다.
석 달 뒤인 5월 12일 산 시로에서 그는 대표팀에 데뷔했다. 상대는 전해 칠레 월드컵 우승팀 브라질이었고, 이탈리아는 3-0으로 이겼다. 스무 살의 마촐라는 데뷔전에서 골을 넣었다.

1964년 5월 27일 빈, 2골과 푸슈카시의 셔츠
1963-64 시즌 인테르는 유러피언컵에서 에버턴, AS 모나코, 파르티잔 베오그라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차례로 넘었다. 마촐라는 모나코전에서 두 골, 파르티잔전에서 한 골, 도르트문트와의 준결승 두 경기에서 한 골씩을 넣었다. 결승 상대는 다섯 번 유럽 정상에 선 레알 마드리드였다. 알프레도 디스테파노와 푸슈카시는 서른일곱, 수비의 기둥 호세 산타마리아(José Emilio Santamaría; 우루과이 태생 레알 마드리드와 스페인의 센터백)는 서른넷이었다. 마촐라는 그날 그라운드에 선 22명 가운데 가장 어렸다. 스물한 살이었다.
경기장으로 나가는 통로에서 그는 디스테파노를 넋을 놓고 바라봤다. 훗날 그는 UEFA와의 인터뷰에서 그때의 디스테파노가 자기 눈에는 키 2미터로 보였다고 했다. 그를 깨운 사람은 옆에 선 루이스 수아레스였다. 그만 감탄하고 결승전을 뛰라는 한마디였다. 에레라는 그날 선수들에게 100퍼센트를 내놓지 않으면 아무것도 내놓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고, 우리가 우승한다고 했다.

경기 시작 10분쯤 프라터 경기장의 함성이 갑자기 멎었다. 사흘 전 페루 리마의 올림픽 예선 경기장에서 300명 넘게 목숨을 잃은 참사를 기리는 1분의 묵념이었다. 묵념이 끝나자 그라운드는 다시 거칠어졌다. 타르치시오 부르니치(Tarcisio Burgnich; 인테르와 이탈리아의 오른쪽 수비수, 1939-2021)는 레알의 펠로(Félix Ruiz García; 레알 마드리드의 인사이드 포워드)를 걷어찼고, 디스테파노와 레프트백 파친(Enrique Pérez Díaz “Pachín”; 레알 마드리드의 레프트백)은 인테르의 오른쪽 윙어 자이르 다코스타(Jair da Costa; 브라질 태생 인테르의 오른쪽 윙어)를 차례로 쓰러뜨렸다. 30분이 지나면서 레알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펠로의 슛은 골대를 넘어갔다.
전반 43분, 공격에 가담한 센터백 아리스티데 과르네리(Aristide Guarneri; 인테르와 이탈리아의 센터백)가 왼쪽의 파케티에게 공을 보냈고, 파케티의 패스가 마촐라에게 갔다. 마촐라는 왼쪽에서 먼 거리 슈팅을 때렸다. 휘어 들어간 공이 크로스바 바로 아래 구석에 꽂혔다. 그는 두 번 뛰어오른 뒤 잔디 위에서 앞구르기를 했고, 관중석의 이탈리아 응원단이 쏘아 올린 폭죽이 빈의 저녁 하늘을 갈랐다. 네덜란드 『트벤츠 다흐블라트 투반티아』의 특파원은 수비에서 공을 빼앗아 30-40미터의 정확한 패스로 단숨에 공격으로 넘어가는 이 장면이야말로 인테르가 모든 상대에게 위험한 이유라고 썼다.
후반은 레알이 쏟아져 나왔다. 마촐라와 산타마리아가 레알 페널티 지역에 엉켜 쓰러져 있던 사이 반대편에서 푸슈카시의 슈팅이 골대 안쪽을 맞고 나갔다. 디스테파노의 프리킥은 위경련을 참고 서 있던 인테르 골키퍼 줄리아노 사르티(Giuliano Sarti; 인테르와 이탈리아의 골키퍼, 1933-2017)가 크로스바 밑에서 잡아냈다. 후반 15분쯤 레알의 오른쪽 수비수 이시드로가 공을 다루는 사이 센터 포워드 아우렐리오 밀라니(Aurelio Milani; 인테르와 이탈리아의 센터 포워드, 1934-2014)가 공을 낚아채 안으로 파고든 뒤 낮게 차 넣었다. 2-0. 레알은 푸슈카시의 코너킥을 펠로가 어깨 높이로 받아 넣어 한 골을 따라붙었고, 이후 사르티의 선방과 주장 아르만도 피키(Armando Picchi; 인테르의 리베로이자 주장, 1935-1971)의 골라인 걷어내기가 인테르를 지켰다.
76분, 산타마리아가 위험 지역의 공을 오버헤드 킥으로 걷어내려다 헛발질에 가깝게 빗맞혔다. 바로 그 자리로 마촐라가 번개처럼 지나가며 공을 가로챘다. 산타마리아가 뒤에서 넘어뜨리려 했을 때 둘의 거리는 이미 3미터였다. 3-1. 네덜란드 『헷 로테르담스 파롤』의 린 발은 산타마리아가 잔디에 누운 채 그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썼다. 인테르는 그 뒤 공을 돌리며 경기를 얼렸고, 구단의 첫 유러피언컵을 들었다. 한 해 전 밀란이 웸블리에서 들었던 트로피가 밀라노를 떠나지 않았다.
종료 뒤 레알의 라커룸은 조용했다. 『니우스블라트 판 헷 노르던』은 깊게 팬 얼굴로 벤치에 앉아 있던 디스테파노와 산타마리아가 갑자기 늙어 보였다고 적었다. 그것이 디스테파노의 레알 마드리드 마지막 경기였다. 그라운드에서는 푸슈카시가 스물한 살 청년에게 다가가 자기 셔츠를 벗어 건넸다.
난 네 아버지와도 경기를 했었지, 너도 아버지 못지않구나. 이 셔츠는 네가 가져라.
Ragazzo, ho giocato contro tuo padre e tu sei degno di lui: tieni la camiseta.
- 푸슈카시 페렌츠, 1964년 5월 27일 빈 프라터 경기장. 결승이 끝난 뒤 마촐라와 셔츠를 바꾸며. 인테르 공식 사이트 「Mazzola, di padre in figlio」(2016년 10월 25일)

마촐라는 같은 대회의 일곱 골로 푸슈카시 등과 함께 공동 득점왕이 됐다. 푸슈카시가 17년 전 토리노에서 상대한 발렌티노의 아들이, 그 푸슈카시의 레알을 무너뜨린 밤이었다. 빈의 결승은 디스테파노 편과 푸슈카시 편에서는 한 시대의 끝으로, 이 글에서는 한 시대의 시작으로 읽힌다.
1965년 5월 27일 산 시로, 득점왕과 두 번째 유럽
빈에서 넉 달 뒤인 9월, 인테르는 남미 챔피언 CA 인데펜디엔테(Club Atlético Independiente; 아르헨티나 아베야네다의 축구단)와 인터콘티넨털컵을 치렀다. 아베야네다 원정에서 0-1로 진 뒤 산 시로의 2차전에서 마촐라의 골로 앞서 2-0으로 이겼고, 마드리드의 3차전에서 마리오 코르소(Mario Corso; 인테르와 이탈리아의 왼쪽 윙어, 1941-2020)가 연장전 결승골을 넣었다. 인테르가 처음으로 세계 챔피언이 됐다.
1964-65 시즌 마촐라는 세리에 A에서 17골을 넣었다. 피오렌티나의 알베르토 오를란도(Alberto Orlando; 피오렌티나와 이탈리아의 공격수)와 같은 수였고, 두 사람이 함께 득점왕(capocannoniere; 세리에 A 최다 득점자)이 됐다. 인테르는 리그를 되찾았다. 유러피언컵 준결승에서는 안필드에서 1-3으로 지고도 산 시로에서 3-0으로 뒤집어 리버풀을 넘었다. 안필드의 한 골이 마촐라의 것이었다. 결승은 빈에서 꼭 1년이 지난 5월 27일, 비에 젖은 산 시로에서 열렸다. 벤피카를 상대로 자이르의 골 하나를 끝까지 지켜 낸 인테르가 2연패를 했다. 9월에는 다시 인데펜디엔테를 만나 산 시로에서 3-0으로 이겼는데, 마촐라가 두 골을 넣었다. 아베야네다 원정은 0-0이었다. 인테르는 2년 연속 세계 챔피언이 됐다.
1965-66 시즌 인테르는 10번째 스쿠데토를 들어 셔츠에 금색 별(stella; 세리에 A 10번 우승 구단이 다는 별)을 달았다. 1962-63 시즌부터 네 시즌 동안 리그 세 번, 유러피언컵 두 번, 인터콘티넨털컵 두 번. 위대한 인테르, 라 그란데 인테르(La Grande Inter; 에레라 시대의 인테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팀의 11명이 어떻게 맞물렸는지는 그란데 인테르 베스트 11에 정리했다.

에레라의 8번, 10년 먼저 온 크라위프
그란데 인테르의 축구는 흔히 카테나치오(catenaccio; 걸쇠라는 뜻, 수비 뒤에 리베로를 하나 더 두는 이탈리아식 수비 전술)라는 한 낱말로 요약된다. 피키가 수비 맨 뒤에서 마지막 공간을 지웠고, 부르니치와 과르네리가 상대 공격수를 한 명씩 맡았다. 그러나 그 수비는 공을 빼앗는 순간 끝났다. 공은 곧장 깊은 자리의 수아레스에게 갔고, 수아레스의 긴 패스가 왼쪽으로 달리는 파케티, 오른쪽의 자이르, 그리고 그 사이로 뛰어드는 마촐라를 찾았다. 1964년 빈의 네덜란드 기자들이 본 것도 그것이었다. 『니우어 프로빈시알러 흐로닝어 쿠란트』는 자이르와 마촐라를 인테르 공격의 빠른 기폭제라 불렀다.
마촐라의 자리는 그 체계에서 가장 자유로웠다. 등에는 오른쪽 인사이드 포워드의 번호 8번을 달았지만 오른쪽에 머물지 않았다. 빈의 첫 골은 왼쪽에서 나왔고, 마지막 골은 상대 센터백의 실수를 가장 먼저 알아챈 자리에서 나왔다. 미드필드까지 내려와 공을 받았다가 수아레스가 고개를 드는 순간 이미 수비 뒤로 달리고 있었다. 마촐라는 에레라가 자신에게 맡긴 역할을 1970년대 아약스의 크라위프에 빗댔다. 정해진 자리 없이 공이 있는 곳과 빈 곳 사이를 오가며 경기의 방향을 바꾸는 선수. 그 비유가 과장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가 나중에 실제 크라위프와 같은 발롱도르 투표지 위에서 2위에 오른 것으로 증명됐다.

1966년 7월 19일 미들즈브러, 북한전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은 마촐라와 리베라가 함께 나선 첫 월드컵이었다. 에드몬도 파브리(Edmondo Fabbri; 1962-1966년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1921-1995) 감독의 이탈리아는 선덜랜드에서 칠레를 2-0으로 꺾었고, 마촐라가 선제골을 넣었다. 두 번째 경기에서 소련에 0-1로 졌고, 7월 19일 미들즈브러 에어섬 파크에서 북한의 박두익에게 골을 내줘 0-1로 졌다. 마촐라와 리베라는 그 경기에 함께 서 있었다. 이탈리아는 조별 리그에서 짐을 쌌다. 4년 뒤 네덜란드 『트라우』는 그 북한 공격수의 이름이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이탈리아 스타들의 머리 위에 걸려 있다고 썼다.

1967년 5월 25일 리스본, 페널티킥 한 골과 셀틱
1966-67 시즌 인테르는 세 번째 유러피언컵 결승에 올랐다. 리스본 근교의 에스타디우 나시오날(Estádio Nacional; 리스본 서쪽 외곽의 국립 경기장)에서 만난 상대는 스코틀랜드의 셀틱이었다. 전반 초반 레나토 카펠리니가 페널티 지역에서 넘어졌고, 마촐라가 페널티킥을 차 넣었다. 이후의 경기는 셀틱의 것이었다. 인테르는 끝까지 수비를 내리고 버텼지만 후반 토미 젬멜과 스티비 차머스에게 골을 내줘 1-2로 졌다. 영국 구단의 첫 유러피언컵이었다. 그로부터 한 주 뒤 인테르는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만토바에 0-1로 져 1점 차로 유벤투스에 우승을 내줬다. 한 주 사이에 두 개의 트로피를 잃은 그 6월을 사람들은 그란데 인테르의 끝으로 기억한다. 에레라는 이듬해 인테르를 떠났다.

1968년 6월 10일 로마, 재경기의 지휘자
1966년의 실패 뒤 이탈리아 대표팀을 맡은 페루초 발카레지(Ferruccio Valcareggi; 1966-1974년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1919-2005)는 홈에서 열린 UEFA 유로 1968에서 첫 시험을 치렀다. 6월 5일 나폴리의 준결승에서 이탈리아는 소련과 연장전까지 0-0으로 비긴 뒤 동전 던지기로 결승에 올랐다. 그 경기에서 리베라가 다쳤다. 6월 8일 로마의 결승에는 마촐라도 부상으로 나서지 못했고, 이탈리아는 유고슬라비아와 1-1로 비겼다. 이틀 뒤 재경기에 마촐라가 돌아왔다. 루이지 리바(Luigi Riva; 칼리아리와 이탈리아의 공격수, 이탈리아 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 1944-2024)와 피에트로 아나스타시(Pietro Anastasi; 유벤투스와 이탈리아의 공격수, 1948-2020)가 전반에 한 골씩 넣었고, 이탈리아는 2-0으로 첫 유럽 챔피언이 됐다. UEFA는 대회 베스트 11에 마촐라를 넣으며, 첫 결승에서 다쳤다가 재경기에 돌아와 2-0 승리를 설계한 선수로 적는다.

세기의 라이벌, 산 시로의 두 주인
잔니 리베라는 1943년 8월 18일 피에몬테의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마촐라보다 아홉 달 늦다. 열다섯 살에 고향 구단 알레산드리아에서 세리에 A에 데뷔했고, 1960년 밀란으로 와 1979년까지 19시즌을 뛰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를 골든 보이(Golden Boy; 금빛 소년)라 불렀다. 마촐라가 속도와 드리블로 수비를 찢는 선수였다면 리베라는 고개를 든 채 공을 다루며 한 번의 패스로 경기를 끝내는 선수였다. 이탈리아 축구 기자 잔니 브레라(Gianni Brera; 『라 가체타 델로 스포르트』 편집장을 지낸 이탈리아의 축구 기자, 1919-1992)는 우아하지만 몸이 가냘픈 선수를 아바티노(abatino; 작은 수도원장이라는 뜻, 브레라가 붙인 별명)라 불렀고, 그 말은 리베라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됐다. 마촐라는 여든 살이 된 해에 그 이야기를 바로잡았다. 브레라가 아바티노라 부른 사람은 리베라만이 아니었다, 나와 자코모 불가렐리도 그렇게 불렀다.
밀라노 언론과 팬들은 두 사람을 원수처럼 갈라 세웠다. 리베라를 고르면 마촐라를 버려야 했고, 마촐라를 고르면 리베라를 버려야 하는 것처럼 썼다. 두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어쨌든 리베라와 나는 한 번도 서로 맞선 적이 없다. 오히려 우리가 원수라는 기사를 읽고 그런 말을 들으며 즐거워했다.
Io e Rivera, comunque, mai stati contro, anzi ci divertivamo a leggere e sentire che eravamo nemici...
- 산드로 마촐라, 여든 살 생일을 앞두고 『아베니레』와 나눈 인터뷰(마시밀리아노 카스텔라니, 2022년 11월 6일)
그라운드 위의 두 사람은 같은 도시를 나눠 가졌다. 리베라의 밀란이 1963년 웸블리에서 유러피언컵을 들자 이듬해와 그다음 해에는 마촐라의 인테르가 그 트로피를 가져왔고, 1969년에는 다시 리베라의 밀란이 마드리드에서 아약스를 4-1로 꺾었다. 1963년부터 1969년까지 일곱 시즌 가운데 네 시즌의 유럽 챔피언이 밀라노에서 나왔다. 그해 리베라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선수로는 처음으로 발롱도르를 받았다. 그로부터 2년 뒤 발롱도르 2위에 오른 사람이 마촐라였다.

마촐라인테르가 두 해 연속 들어 올린 인터콘티넨털컵과 유러피언컵을 안은 마촐라.

리베라1970년 4월 19일 산 시로, 1969년 발롱도르를 들어 올린 밀란의 주장.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선수가 처음 받은 발롱도르였다.

아주리1973년 3월 31일 제노바, 1974 월드컵 예선 룩셈부르크전을 앞둔 마촐라(왼쪽)와 리베라. 이탈리아가 5-0으로 이겼다.

밀라노 더비산 시로의 더비, 경기 전 주심을 사이에 두고 손을 내민 두 주장. 인테르의 마촐라(왼쪽)와 밀란의 리베라.
두 사람이 받은 발롱도르 표를 해마다 나란히 놓으면 이 맞수 관계의 모양이 보인다. 리베라가 앞선 해가 있었고 마촐라가 앞선 해가 있었다. 둘이 같은 해에 함께 표를 받은 것도 일곱 번이다. 유럽의 기자들은 10년 넘게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을 고르지 않았다.
| 해 | 마촐라 | 리베라 | 그해 수상자 |
|---|---|---|---|
| 1963년 | - | 2위 | 레프 야신 |
| 1964년 | 공동 19위 | 9위 | 데니스 로 |
| 1965년 | 공동 8위 | 7위 | 에우제비우 |
| 1966년 | 공동 14위 | - | 보비 찰턴 |
| 1967년 | 공동 10위 | 공동 16위 | 플로리안 알베르트 |
| 1968년 | 공동 17위 | 9위 | 조지 베스트 |
| 1969년 | - | 1위 | 잔니 리베라 |
| 1970년 | 공동 8위 | 공동 10위 | 게르트 뮐러 |
| 1971년 | 2위 | - | 요한 크라위프 |
| 1972년 | 공동 15위 | 공동 18위 | 프란츠 베켄바워 |
| 1973년 | 공동 14위 | 8위 | 요한 크라위프 |
『프랑스 풋볼』 발롱도르 연도별 투표 결과를 RSSSF 집계로 옮겼다. 표를 받지 못한 해는 줄표로 적었다. 1974년에는 두 사람 모두 표를 받지 못했다.
밀라노 더비는 두 사람이 정면으로 마주 서는 자리였다. 트랜스퍼마크트의 경기별 기록으로 두 사람이 함께 그라운드에 선 더비를 세면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를 합쳐 30경기다. 첫 경기는 마촐라의 13초 골이 나온 1963년 2월의 1-1이었고, 마지막은 마촐라의 선수 생활 마지막 공식전이 된 1977년 7월 산 시로의 코파 이탈리아 결승이었다. 그 사이의 승부는 거의 정확히 반으로 갈린다.
| 두 사람이 함께 뛴 밀라노 더비 | 기록 |
|---|---|
| 경기 | 30경기 · 1963년 2월 24일-1977년 7월 3일 |
| 인테르 기준 승패 | 10승 11무 9패 |
| 마촐라의 골 | 6골 |
| 리베라의 골 | 3골 |
| 대표팀에서 함께 뛴 경기 | 48경기 |
트랜스퍼마크트 경기별 기록에서 두 사람이 모두 출전한 경기만 골라 셌다. 마촐라가 뛴 더비는 모두 37경기 6골이다.

필자가 이 관계를 오베라트와 네처, 크라위프와 베켄바워, 플라티니와 지쿠와 마라도나, 호날두와 메시와 같은 줄에 세우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 위대한 맞수들은 대개 서로 다른 나라나 다른 리그에 있었다. 오베라트와 네처는 한 나라의 같은 자리를 다퉜지만 같은 도시를 나눠 가지지는 않았다. 마촐라와 리베라는 아홉 달 사이로 태어나, 같은 경기장을 홈으로 쓰는 두 구단의 얼굴이 되어, 같은 대표팀의 같은 자리를 다퉜다. 주말에는 산 시로의 양쪽 끝에서, 대표팀 소집 때는 같은 아주리 셔츠를 입고 같은 라커룸에서 만났다. 이탈리아 언론은 이 관계를 1940년대 이탈리아를 둘로 갈랐던 사이클 선수 파우스토 코피와 지노 바르탈리의 재판이라 불렀다. 한 나라를 갈랐던 맞수의 이름을 빌려 와야 할 만큼 큰 일이었다는 뜻이다. 그 크기는 1970년 여름 멕시코에서 가장 극적인 모양으로 드러났다.
1970년 6월 17일 아스테카, 계주의 여름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발카레지와 대표팀 기술 위원 발테르 만델리(Walter Mandelli; 1970년 대표팀 기술 위원회를 이끈 이탈리아 축구 행정가)는 마촐라, 마리오 베르티니, 잔카를로 데시스티(Giancarlo De Sisti; 피오렌티나와 이탈리아의 미드필더)로 미드필드를 꾸렸다. 리베라는 연습 경기 내내 2진에 섰고 14번을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 기자들을 불러 모아 발카레지와 만델리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가, 밀란 감독 네레오 로코(Nereo Rocco; 밀란을 두 번 유럽 정상에 올린 감독, 1912-1979)의 권유로 사과했다. 네덜란드 『트라우』와 만난 리베라는 그때의 자신을 이렇게 돌아봤다. 잘못이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들이 내가 얼마나 뛰고 싶어 하는지 보지 않아서 화가 났다.
이탈리아는 조별 리그에서 스웨덴을 1-0으로 이기고 우루과이, 이스라엘과 0-0으로 비겼다. 세 경기 한 골이었다. 리베라는 이스라엘전 후반에 처음 그라운드를 밟았다. 안젤로 도멩기니와 바뀌어 들어가 마촐라와 함께 뛰었는데, 멕시코에서 두 사람이 같은 시간에 그라운드에 선 것은 그 45분과 결승의 마지막 6분뿐이었다.
6월 14일 톨루카의 8강에서 발카레지는 처음으로 그 방식을 썼다. 마촐라가 전반을 뛰고 후반 시작과 함께 리베라가 그 자리에 들어갔다. 1-1이던 경기는 후반에 뒤집혔다. 리베라의 프리킥이 데시스티를 거쳐 리바의 골이 됐고, 5분 뒤 리베라가 직접 3-1을 만들었다. 이탈리아는 개최국 멕시코를 4-1로 꺾었다. 브라질의 감독 마리우 자갈루(Mário Jorge Lobo Zagallo; 브라질의 감독, 1931-2024)는 이튿날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리베라 없는 이탈리아는 까다로운 다크호스였다, 멕시코전부터 리베라가 있는 이탈리아는 우승 후보다. 이탈리아 언론은 이 교대를 계주(staffetta; 릴레이)라 불렀다.
6월 17일 멕시코시티 아스테카의 준결승에서도 계주는 이어졌다. 마촐라는 전반을 뛰었고, 그사이 이탈리아는 로베르토 보닌세냐의 골로 앞섰다. 후반 시작과 함께 리베라가 들어갔고, 90분에 서독의 카를하인츠 슈넬링거가 동점골을 넣었다. 연장전 30분 동안 다섯 골이 오갔다. 3-3이던 111분, 보닌세냐의 크로스를 쫓아 들어간 리베라가 결승골을 넣었다. 축구사가 세기의 경기라 부르는 4-3이다. 그 골이 들어갈 때 마촐라는 벤치에 있었다.

결승을 앞두고 계주는 멈췄다. 네덜란드 『더 테이트』는 마촐라가 한 경기를 통째로 뛸 수 있다고 한 말에 놀랐는지 발카레지와 만델리가 후반에도 리베라를 넣지 않았다고 썼다. 6월 21일 아스테카의 브라질전, 1-1로 끝난 전반 뒤 라커룸에서 마촐라는 축구화를 벗고 있었다. 리베라의 기억으로는 발카레지가 다가와 벗지 말라고, 후반에도 당신이 나간다고 했다. 이탈리아는 후반 66분 제르송, 71분 자이르지뉴에게 골을 내줬다. 1-3이 된 84분, 리베라가 들어갔다. 바뀐 사람은 마촐라가 아니라 결승에서 이탈리아의 유일한 골을 넣은 보닌세냐였다. 리베라가 6분 뛰는 동안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골이 하나 더 들어갔고, 펠레의 브라질은 4-1로 세 번째 우승을 했다. 그 여섯 분은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 논쟁거리가 되는 교체로 남아 있다.
우리는 성격이 너무나 달라서 얼마든지 함께 뛸 수 있었다. 앞선 월드컵에서도, 그다음 월드컵에서도 함께 뛰었다. 멕시코에서만 그게 정말 불가능해 보였다.
Avevamo caratteristiche talmente diverse che potevamo benissimo giocare insieme. Come ho detto, abbiamo giocato insieme i Mondiali precedenti e quelli successivi, in Messico sembrava non fosse proprio possibile.
- 잔니 리베라, 마촐라가 세상을 떠난 2026년 9월 19일 라디오 1 라이와의 인터뷰. 『AGI』 보도
마촐라는 그 여름을 선수 인생에서 가장 큰 아쉬움으로 꼽았다. 펠레의 브라질에 진 월드컵이었다. 그는 계주를 이렇게 기억했다. 그들은 우리를 서로 맞세웠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건 한쪽이 다른 쪽을 이기는 일이 아니라 서로 더 잘하려는 일이었다, 나도 화가 났고 리베라도 화가 났다, 우리는 그저 뛰고 싶었다.
1971년, 미드필더로 돌아온 주장과 발롱도르 2위
에레라가 떠난 뒤의 인테르는 몇 해를 헤맸다. 1970-71 시즌 초반 에리베르토 에레라(Heriberto Herrera; 파라과이 태생 감독, 1926-1996)가 경질되고 구단 출신 조반니 인베르니치(Giovanni Invernizzi; 인테르 선수 출신 감독, 1931-2005)가 지휘봉을 잡았다. 주장 완장을 찬 마촐라는 그 무렵부터 한 줄 내려서서 경기를 조립하는 미드필더가 됐다. 인테르 명예의 전당은 그를 골을 타고난 트레콰르티스타(trequartista; 공격형 미드필더)가 더 깊은 자리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선수로 소개한다. 인테르는 3월 7일 더비에서 밀란을 2-0으로 꺾었고, 끝내 밀란을 2위로 밀어내고 11번째 스쿠데토를 들었다.
그 시즌이 끝나 갈 무렵인 1971년 5월 27일, 빈에서 트로피를 함께 들었던 주장 피키가 서른다섯에 세상을 떠났다. 빈의 결승에서 꼭 7년이 지난 날이었다.
그해 말 발롱도르에서 마촐라는 57점으로 2위에 올랐다. 1위는 116점의 크라위프, 3위는 56점의 조지 베스트였다. 10년 전 에레라가 그에게 맡긴 역할을 그대로 하던 선수와, 같은 투표지 위에서 두 번째 자리를 다툰 것이다. 그가 받은 발롱도르 표는 이 해가 가장 많았다.

1972년 5월 31일 로테르담, 크라위프의 밤
1971-72 시즌 인테르는 다시 유러피언컵 결승에 올랐다. 묀헨글라트바흐 원정 1-7 패배가 관중석에서 날아든 깡통 사건으로 무효가 된 대회였다. 마촐라는 AEK 아테네전과 스탕다르 리에주전에서 골을 넣었다. 결승 상대는 크라위프의 아약스였다. 로테르담 더 카윕(De Kuip; 페예노르트의 홈구장)에서 크라위프는 후반에만 두 골을 넣었고, 인테르는 0-2로 졌다. 그날 마촐라는 10번을 달았다. 이듬해 크라위프가 다시 발롱도르를 받았다.

1974년 6월 23일 슈투트가르트, 마지막 아주리
1973년 에레라가 인테르로 돌아왔다. 서른 살을 넘긴 마촐라와 예순을 넘긴 감독이 아피아노 젠틸레의 훈련장에서 다시 만났다. 이듬해 서독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는 아이티를 3-1로 이기고 아르헨티나와 1-1로 비겼다. 마촐라와 리베라가 아주리 셔츠를 입고 함께 뛴 마지막 경기가 그 아르헨티나전이었다. 6월 23일 슈투트가르트의 폴란드전에서 리베라는 빠졌고, 마촐라는 뛰었다. 이탈리아는 1-2로 져 조별 리그에서 떨어졌다. 마촐라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였다. 11년 동안 70경기에서 22골을 넣었다.

1977년 7월 3일 산 시로, 마지막 경기의 맞은편
마촐라의 마지막 공식전은 1977년 7월 3일 산 시로에서 열린 코파 이탈리아 결승이었다. 상대는 밀란이었고, 맞은편에는 서른셋의 리베라가 서 있었다. 인테르는 0-2로 졌다. 14년 전 13초 만에 골을 넣은 더비에서 시작한 맞대결이 같은 경기장의 더비로 끝났다. 그는 17시즌 동안 인테르의 셔츠만 입었다. 인테르가 부고에서 밝힌 기록은 공식전 565경기 158골이다.

그라운드를 떠난 뒤에도 그는 축구를 떠나지 않았다. 1968년 이탈리아 축구선수 협회(Associazione Italiana Calciatori; 1968년 밀라노에서 세워진 이탈리아 프로 축구선수 노조)가 생길 때 리베라와 함께 힘을 보탰고, 은퇴 뒤에는 인테르와 제노아, 다시 인테르, 그리고 2003년까지 아버지의 구단 토리노에서 단장으로 일했다.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인테르의 단장으로 있던 시절 사네티와 호나우두가 밀라노에 왔다. 인테르는 그가 젊은 골키퍼 발테르 쳉가를 알아본 안목도 함께 기억한다. 방송 해설자로도 오래 마이크 앞에 앉았다. 2014년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2022년 인테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2026년 9월 19일, 산 시로가 100살이 된 날
산드로 마촐라는 2026년 9월 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밤, 오랜 투병 끝에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26년 9월 19일 문을 연 산 시로가 꼭 100년을 맞은 날이었다. 인테르는 부고의 첫 줄을 이렇게 썼다.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인테르의 역사에서만이 아니다. 밀란은 그를 역사적이고 정정당당했던 맞수라 불렀고, 유벤투스는 이탈리아 축구의 챔피언이자 신사라고 했다. 이탈리아 올림픽 위원회는 그 주말 이탈리아의 모든 경기장에서 1분의 묵념을 하자고 했다. 장례는 9월 21일 밀라노의 산탐브로조 성당에서 열렸다.
리베라는 라디오에 나와 친구를 잃었다고 말했다. 그는 인테르 사람이었고 나와 다른 팀에서 뛰었지만 우리는 큰 우정을 나눴다, 서로를 크게 존중했다. 반세기 전 신문이 원수로 만들었던 두 사람의 마지막 이야기였다.
인테르는 부고의 마지막을, 마촐라가 생전에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 밝힌 말로 맺었다.
좋은 사람으로. 이길 수 없을 때에도 끝까지 해 보는 사람으로. 그 9-1 때처럼.
Come un bravo uomo, che se la gioca anche quando è impossibile vincere, come in quel 9-1.
- 산드로 마촐라가 생전에 밝힌, 기억되고 싶은 모습.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부고(2026년 9월 19일), 『AGI』 보도
역대 클럽·국대 기록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1960-1977565경기 · 158골클럽 수치는 인테르가 2026년 9월 부고에서 밝힌 공식전 합계다. 집계 범위에 따라 이탈리아 축구 연맹 축구 박물관은 565경기 160골, 트랜스퍼마크트 경기별 기록은 566경기 162골로 적는다. 대표팀 수치는 이탈리아 축구 연맹 기록이다. 문장은 마촐라가 뛰던 시기에 인테르와 대표팀이 쓰던 것이다.
대회별 스탯
| 대회 | 경기 | 골 |
|---|---|---|
| 세리에 A | 416 | 116 |
| 코파 이탈리아 | 80 | 24 |
| 유러피언컵 | 38 | 17 |
| UEFA컵 | 14 | 0 |
| 인터콘티넨털컵 | 4 | 3 |
| FIFA 월드컵 | 12 | 1 |
| UEFA 유로 | 2 | 0 |
주요 대회만 추린 트랜스퍼마크트 경기별 기록의 집계다. 이 시대 경기는 도움 기록이 거의 남지 않아 도움 칸을 두지 않았다. 이 밖의 기록은 미트로파컵 10경기 1골, 1964년 세리에 A 우승 결정전 1경기, 인터토토컵 1경기, 아르만도 피키 기념 대회 2경기 1골, 대표팀 친선 경기 28경기 8골, FIFA 월드컵 예선 15경기 7골, UEFA 유로 예선 9경기 6골, UEFA 유로 8강 홈 앤드 어웨이 4경기다. 대회별 합계는 클럽 기록 카드의 공식전 총계와 집계 범위가 달라 그대로 더해지지 않는다.
역대 등번호
클럽
| 소속팀 | 확인 기간 | 등번호 |
|---|---|---|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1963-64 시즌부터 1974-75 시즌까지 경기 자료 | 8 |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1972년 유러피언컵 결승 · 1975-76 시즌 경기 자료 | 10 |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1976-77 시즌 일부 경기 | 9 |
국가대표팀
| 대표팀 | 확인 대회·기간 | 등번호 |
|---|---|---|
| 이탈리아 | 1966 FIFA 월드컵 | 14 |
| 이탈리아 | UEFA 유로 1968 | 15 |
| 이탈리아 | 1970 FIFA 월드컵 | 15 |
| 이탈리아 | 1974 FIFA 월드컵 | 7 |
마촐라의 시대에는 시즌 내내 고정된 번호가 아니라 그날 선 자리에 따라 1번부터 11번을 다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오른쪽 인사이드 포워드의 번호가 8번이어서 그란데 인테르 시절 그는 대부분 8번을 달았고, 미드필더로 내려선 뒤에는 10번을 단 경기가 늘었다. 클럽 번호는 트랜스퍼마크트 경기별 기록 기준이며, 1962-63 시즌까지와 일부 경기는 번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대표팀 번호는 대회별 등록 번호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리베라는 14번을 달았다.
대표 우승 경력
우승: 1962-63, 1964-65, 1965-66, 1970-71
준우승: 1964-65, 1976-77
우승: 1963-64, 1964-65
준우승: 1966-67, 1971-72
우승: 1964, 1965
우승: 1968
준우승: 1970
산드로 마촐라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 발롱도르1964년 공동 19위 · 1965년 공동 8위 · 1966년 공동 14위 · 1967년 공동 10위 · 1968년 공동 17위 · 1970년 공동 8위 · 1971년 2위 · 1972년 공동 15위 · 1973년 공동 14위
- FIFA 세계 선발팀국제축구연맹이 꾸린 세계 선발팀의 친선 경기 출전1967년 · 리카르도 사모라 기념 스페인전 3-0, 선제골
- UEFA 유로 대회 베스트 111968년
- IFFHS 선정 이탈리아 역대 드림팀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선정2021년 · 1군
- 월드 사커 전 세계 베스트 11영국 축구 전문지 선정1965년 · 1967년 · 1968년 · 1971년 · 1974년
- 유러피언컵 득점왕1963-64 시즌 7골(공동)
- 세리에 A 득점왕Capocannoniere1964-65 시즌 17골(공동)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2014년 · 이탈리아 원로 부문
- 인테르 명예의 전당 헌액2022년 · 미드필더 부문
오늘날 산드로 마촐라는 어떻게 평가받는가
인테르는 2018년 명예의 전당을 만들고 해마다 포지션별로 팬 투표를 열었다. 마촐라의 이름은 2022년 다섯 번째 명단에 미드필더로 올랐다. 로타어 마테우스, 데얀 스탄코비치, 에스테반 캄비아소, 베슬리 스네이더르에 이어 다섯 번째 미드필더였다. 그보다 앞서 2014년에는 이탈리아 축구 연맹이 코베르차노의 축구 박물관에 마련한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카를로 안첼로티, 파비오 칸나바로, 디에고 마라도나와 같은 해에 들어갔다. 2021년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의 이탈리아 역대 드림팀에서는 1군의 공격형 미드필더 두 자리를 그와 리베라가 나눠 가졌다. 같은 드림팀의 2군에는 그의 아버지 발렌티노가 있다. 한 나라의 역대 드림팀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오른 일은 흔하지 않다.
이탈리아 바깥의 평가도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영국 『월드 사커』의 에릭 배티는 1965년부터 1974년까지 다섯 번 그를 세계 베스트 11에 넣었고, 그 다섯 번은 인사이드 라이트에서 시작해 미드필더로 끝난다. 1964년 빈의 결승을 본 네덜란드 기자들은 그를 젊고 기술이 빼어난 선수라 불렀고, 1971년 유럽의 기자들은 크라위프 다음 자리에 그를 놓았다. 삥이FC가 고른 인테르 역대 베스트 11과 그란데 인테르 베스트 11에도 그의 자리가 있고, 맞은편의 AC 밀란 역대 베스트 11에는 리베라가 있다.
그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리베라와 한 묶음으로 돌아온다. 밀란이 그의 부고에 적은 역사적이고 정정당당했던 맞수라는 말이 그 묶음을 가장 정확하게 요약한다. 오늘날 이탈리아 팬들은 두 사람을 같은 시대를 함께 완성한 한 쌍으로 기억한다. 발카레지가 끝내 풀지 못한 문제를 반세기 뒤 역사가들은 둘을 나란히 세우는 것으로 풀었다.
축구 역사상 인테르의 셔츠를 입은 가장 위대한 선수를 한 명만 꼽아야 한다면, 삥이FC의 답은 산드로 마촐라다.
참고 자료
- 인테르 공식 사이트: Hall of Fame, Sandro Mazzola, Sandro Mazzola, Inter Hall of Fame 2022: 1942년 11월 8일 출생, 로렌치와 메아차가 돌본 유소년 시절, 1961년 6월 10일 데뷔, 빈의 두 골, 득점왕 두 번, 더 깊은 자리로의 전환, 2022년 다섯 번째 명단의 미드필더 부문 헌액.
- 인테르 공식 사이트: Mazzola, di padre in figlio(로베르토 브람빌라, 2016년 10월 25일): 푸슈카시가 셔츠를 건네며 한 말, 1947년 5월 11일 이탈리아-헝가리전, 발렌티노의 출신과 바치갈루포 일화, 보니페르티의 말.
- 『AGI』: È morto Sandro Mazzola, simbolo della grande Inter di Herrera(2026년 9월 19일), Mazzola, il Baffo: 인테르 부고의 문장과 565경기 158골, 쳉가·사네티·호나우두, 기억되고 싶은 모습, 리베라의 라디오 1 라이 인터뷰, 밀란·유벤투스·이탈리아 올림픽 위원회의 추모, 디스테파노를 바라본 통로의 일화.
- 『일 포스트』: È morto Sandro Mazzola(2026년 9월 19일), funerale di Sandro Mazzola(2026년 9월 21일), 『라 시칠리아』: Sandro Mazzola se ne va a 83 anni nel giorno in cui San Siro compie cent'anni: 별세와 투병, 13초 더비 골, 은퇴 뒤의 단장·해설 경력, 장례, 산 시로 100주년.
- 이탈리아 축구 연맹 축구 박물관: Sandro Mazzola, Many happy returns to Sandro Mazzola!, Hall of Fame 2014: 대표팀 70경기 22골, 클럽 565경기 160골, 은퇴 뒤 단장 경력, 2014년 원로 부문 헌액.
- 『아베니레』: Mazzola, a 80 anni la bandiera sventola(마시밀리아노 카스텔라니, 2022년 11월 6일): 리베라와의 관계, 브레라의 아바티노, 멕시코의 아쉬움, 아버지와 수페르가, 크라위프에 빗댄 에레라의 역할.
- 『투토메르카토웹』: Sandro Mazzola compie 83 anni(2025년 11월 8일, 비보 아추로 TV 인터뷰 인용), Gianni Rivera: con Mazzola se ne va un amico(2026년 9월 19일): 계주에 대한 두 사람의 말.
- 『라 나치오네』: 18 agosto, Gianni Rivera compie 81 anni(마우리치오 코스탄초, 2024년 8월 18일): 두 사람의 맞수 관계를 코피와 바르탈리의 재판에 빗댄 이탈리아 언론의 표현.
- 『코리에레 델로 스포르트』: Mazzola-Rivera, i sei minuti che sconvolsero l'Italia(2016년 2월 18일): 멕시코의 계주와 결승의 여섯 분.
- 델퍼: 『헷 로테르담스 파롤』 린 발 「Europacup weer naar Italië」, 『트벤츠 다흐블라트 투반티아』 「Italiaanse vreugde in Weense Prater」, 『니우스블라트 판 헷 노르던』 「Ook sportcracks moeten gaan」, 『니우어 프로빈시알러 흐로닝어 쿠란트』 「Europa-cup voor Inter」(모두 1964년 5월 28일 자): 빈 결승의 리마 참사 묵념, 골 과정, 앞구르기 세리머니, 산타마리아의 실수, 에레라의 말, 레알 라커룸.
- 델퍼: 『트라우』 마르턴 더보스 「Vernedering」(1970년 6월 17일), 『더 테이트』 「Rivera haalt zijn gram」(1970년 6월 16일), 『더 테이트』 결승 기사(1970년 6월 22일), 『알헤메인 다흐블라트』 「Italië vernedert Mexico」(1970년 6월 15일), 『헷 파롤』 「Loting」(1970년 6월 18일): 리베라의 14번과 기자회견, 자갈루의 말, 8강과 준결승의 교대, 결승 전 마촐라의 말과 84분의 교체.
- RSSSF: World Cup 1970 Full Details, European Cup 1966-67, Italy 1964-65, Matches of FIFA XI: 멕시코 월드컵 경기별 교체, 리스본 결승 명단, 1964-65 시즌 경기별 득점(마촐라·오를란도 17골), 1967년 9월 27일 FIFA 선발팀의 스페인전.
- RSSSF: European Footballer of the Year와 연도별 투표표(1964-1973): 마촐라와 리베라의 해마다의 발롱도르 순위와 점수.
- UEFA: EURO 1968 Team of the Tournament: 대회 베스트 11과 결승 재경기의 마촐라.
- IFFHS: Men's All Time Italy Dream Team(2021년 11월 12일, 웹 아카이브): 1군 공격형 미드필더 마촐라·리베라, 2군의 발렌티노 마촐라.
- Beyond the Last Man: Eric Batty's World XIs, The Sixties, The Seventies: 『월드 사커』 지면에 실린 1965·1967·1968·1971·1974년 세계 베스트 11.
- 인테르 공식 사이트: Armando Picchi nella Hall of Fame del Calcio Italiano: 피키의 생몰(1935년 6월 20일-1971년 5월 27일).
- 트랜스퍼마크트: Sandro Mazzola, Gianni Rivera: 경기별 출전·득점·등번호, 두 사람이 함께 뛴 더비와 대표팀 경기.
- 본문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의 이탈리아 퍼블릭 도메인 사진(1947년 토리노, 1961년 토리노, 1963년 산 시로, 1963-64 시즌 인테르 Keystone, 1960년대 산 시로, 1965년 로마 AGI, 1967년 베네치아, 1968년 로마 Keystone, 1970년 산 시로 Omega Fotocronache, 1970-71 시즌 인테르, 1971년 더비, 1973년 라 피네티나, 1974년 코베르차노) ·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 Anefo(1964년 빈, 1972년 로테르담, C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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