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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문장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Football Club Internazionale Milano Società per Azioni
FOOTBALL CLUB INTERNAZIONALE MILANO · I NERAZZURRI 1908-2026

산 시로 · 세리에 A 우승 21회 · 유러피언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 3회 · 인터콘티넨털컵 2회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역대 최고의 전설 열한 명과 후보 마흔여덟, 쉰아홉 개의 이름을 필자의 견해로 골랐다.

산 시로의 북쪽, 푸른 심장

푸른 심장이 뛴다. 산 시로(San Siro)의 북쪽 스탠드가 다시 살아난다. 그 이름하여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08년 3월 9일 밤, 외국인 선수에게 문을 닫으려던 밀란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 밀라노의 식당 로롤로조(L’Orologio)에 모여 세운 구단이다. 그래서 이름에 국제적이라는 뜻의 낱말이 들어갔다. 같은 도시의 AC 밀란과는 태어난 날부터 형제이자 맞수였고, 1947년부터는 산 시로라는 한 지붕까지 나눠 쓴다. 북쪽 응원석이 인테르의 자리이고 남쪽이 밀란의 자리다.

이 팀은 숫자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승리와 전술 너머에서 이탈리아 북부의 대도시 밀라노를 대표해 온 한 도시의 정체성이고 한 세기의 미학이다. 그래도 숫자부터 적어 두면, 인테르는 세리에 A가 생긴 뒤로 한 번도 2부 리그에 내려간 적이 없는 유일한 구단이다. 구단이 스스로 세는 트로피는 세리에 A 21회, 코파 이탈리아 10회,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Supercoppa italiana; 리그 우승 팀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 팀이 겨루는 대회) 8회, 유러피언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 3회, UEFA컵 3회, 인터콘티넨털컵 2회, FIFA 클럽 월드컵 1회다.[1]

전성기는 세 번 왔다.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가운데 하나인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 아르헨티나 태생의 감독, 1910-1997)가 루이스 수아레스와 산드로 마촐라를 앞세워 유러피언컵을 2연패한 위대한 인테르(La Grande Inter)의 시대가 먼저다. 1964년 빈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1965년 산 시로에서 벤피카를 꺾었다. 조반니 트라파토니(Giovanni Trapattoni; 이탈리아 감독, 1939-)가 1989년에 세리에 A의 승점 기록을 갈아 치운 팀이 그다음이고, 2005-06시즌부터 다섯 시즌을 내리 우승한 끝에 주제 모리뉴(José Mourinho; 포르투갈 감독, 1963-)와 2009-10시즌 트레블에 닿은 팀이 세 번째다. 2010년 5월 5일에 코파 이탈리아를, 16일에 스쿠데토(scudetto; 세리에 A 우승 팀이 이듬해 가슴에 다는 작은 방패, 곧 리그 우승)를, 22일에 UEFA 챔피언스 리그를 들었다. 열여드레 사이에 셋을 든 이 트레블은 이탈리아 구단으로는 지금까지 하나뿐이다.

스무 번째 스쿠데토는 2024년 4월 밀란과의 더비에서 확정했다. 유니폼에 두 번째 별을 단 날의 상대가 형제였다. 필자가 이 명단을 처음 짠 것은 그 이듬해인 2025년 봄이다. 그 뒤 인테르는 2025-26시즌에 스물한 번째 스쿠데토를 들었다. 2010년 트레블 때 수비수로 뛰던 크리스티안 키부(Cristian Chivu; 루마니아 감독, 1980-)가 감독으로 맞은 첫해였다. 2026년 5월 13일에는 라치오를 2-0으로 꺾어 코파 이탈리아까지 가져갔으니, 한 시즌에 둘을 함께 든 것은 2010년 이후 열여섯 해 만이다. 나흘 뒤 산 시로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린 주장이 라우타로 마르티네스(Lautaro Martínez)였다.

주세페 메아차로 시작되어, 자친토 파케티로 방점을 찍고, 하비에르 사네티로 연결되어, 현세의 라우타로 세대까지 이어온 인테르. 이 팀은 고유하다. AC 밀란이 우아하다면 인테르는 단단한 팀이었다. 라리가에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사가 있다면 이탈리아에는 유벤투스 곁에 밀란과 인테르가 함께 있다. 축구가 기억해야 할 ‘푸른 신화’, 네라주리(Nerazzurri; 검고 푸른 사람들)의 이름 쉰아홉 개를 적는다.

선정 전술 세 번의 전성기를 포갠 4-3-3

대형은 4-3-3이다. 골문에 쳉가를 세웠고, 포백은 왼쪽부터 파케티와 피키와 베르고미와 사네티다. 중원의 바닥에 캄비아소가 서고 그 좌우 앞을 수아레스와 마테우스가 맡는다. 맨 앞줄은 왼쪽의 코르소, 가운데의 메아차, 오른쪽에서 안으로 드는 마촐라다.

열한 명은 구단의 전성기 셋에서 고르게 왔다. 피키와 파케티, 수아레스와 마촐라와 코르소 다섯은 에레라의 그란데 인테르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세리에 A를 세 번, 유러피언컵과 인터콘티넨털컵을 두 번씩 든 팀이다. 쳉가와 베르고미와 마테우스 셋은 트라파토니의 1988-89시즌에 있었다. 서른네 경기에서 스물여섯 번 이기고 두 번 져 승점 58점을 쌓았는데, 이긴 경기에 2점을 주고 열여덟 팀이 겨루던 시대의 최고 기록이다. 사네티와 캄비아소 둘은 2010년 5월 마드리드에서 구단의 세 번째 유럽 정상을 밟은 트레블의 주장과 중원의 중심이었다. 메아차만 혼자 1930년대에서 온다.

AC 밀란이 우아하다면 인테르는 단단했다는 말은 이 세 팀을 나란히 놓으면 숫자로 선다. 그란데 인테르는 빗장으로 유럽을 두 번 들었다. 1988-89시즌의 팀은 서른네 경기에서 열아홉 골만 내줬다. 2010년의 팀은 준결승 2차전 캄 노우에서 한 명이 퇴장당한 채 예순 분 넘게 바르셀로나를 막아 0-1로 지고도 결승에 갔다. 세 팀 모두 공격수의 이름이 화려했으나 우승을 정한 쪽은 뒤였다. 이 글의 열한 명에도 골키퍼와 수비수가 다섯이고, 수비를 함께 맡는 미드필더가 둘이다.

이 명단을 구단이 스스로 고른 이름과 나란히 놓아 볼 수 있다. 인테르는 2018년부터 2022년까지 다섯 번에 걸쳐 골키퍼와 수비수, 미드필더와 공격수를 한 명씩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그렇게 오른 스무 명이 아래 표다.[1]

구단 명예의 전당 스무 명이 이 글의 어디에 있는가
해골키퍼수비수미드필더공격수
2018쳉가열한 명사네티열한 명마테우스열한 명호나우두서브 명단
2019톨도추가 명단파케티열한 명스탄코비치추가 명단메아차열한 명
2020줄리우 세자르서브 명단베르고미열한 명캄비아소열한 명밀리토서브 명단
2021팔리우카추가 명단마테라치추가 명단스네이더르서브 명단에토추가 명단
2022보르돈추가 명단마이콩서브 명단마촐라열한 명비에리추가 명단

스무 명 가운데 여덟이 이 글의 열한 명이고, 다섯이 서브 명단에, 일곱이 추가 명단에 있다. 구단이 부른 스무 명 전원이 필자의 쉰아홉 안에 든다. 첫해인 2018년의 네 사람 가운데 셋이 열한 명이며, 남은 한 사람 호나우두는 서브 명단의 공격수다. 명예의 전당의 골키퍼 다섯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글의 골키퍼 여섯 안에 있고, 남은 한 사람이 한다노비치(Samir Handanovič)다. 거꾸로 열한 명 가운데 구단의 명예의 전당에 아직 이름이 없는 사람은 피키와 수아레스와 코르소 셋이고, 셋 다 그란데 인테르의 선수다.

자리마다 사정이 있다. 수아레스를 캄비아소의 왼쪽 앞까지 내린 것은 그가 인테르에서 실제로 섰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의 안쪽 공격수는 밀라노에서 깊은 곳으로 내려와 긴 패스로 역습의 주소를 정했다. 오른쪽의 마테우스는 독일에서 맡던 6번과 8번 자리가 차 있어 10번을 받아 든 사람이고, 마촐라는 득점왕을 하던 공격수에서 경력의 뒤쪽으로 갈수록 미드필더가 되어 갔다. 가운데의 메아차는 본업이 센터 포워드이고 사정이 있을 때 안쪽 공격수였다고 스스로 말했다. 이 앞줄과 중원은 누가 내려오면 누군가는 올라가도록 짜여 있다. 그 오르내림의 한가운데에 캄비아소가 남는다. 공격수 출신도 10번 출신도 아닌 그가 바닥을 지켜야 수아레스의 긴 패스와 마테우스의 전진이 마음 놓고 나온다. 2010년의 인테르가 스네이더르(Wesley Sneijder)와 에토(Samuel Eto’o)와 밀리토(Diego Milito)를 한꺼번에 세우고도 무너지지 않은 방식이 그랬다.

왼쪽은 파케티가 바깥을 달리고 코르소가 안으로 들어온다. 그란데 인테르가 실제로 쓰던 왼쪽이다. 오른쪽에서는 사네티가 올라가면 베르고미가 오른쪽으로 벌려 선다. 사네티가 아예 중원으로 들어가 캄비아소 곁에 서는 것도 그가 말년에 실제로 하던 일이다. 베르고미는 라이트백으로 시작해 스위퍼로 끝난 수비수이니 그 이동이 낯설지 않고, 남은 한가운데는 피키가 한 걸음 뒤에서 지킨다.

서브 명단 열다섯으로도 같은 대형이 한 벌 더 나온다. 골문에 줄리우 세자르(Júlio César), 포백에 브레메(Andreas Brehme)와 과르네리(Aristide Guarneri)와 페리(Riccardo Ferri)와 마이콩(Maicon)이 서고, 오리알리(Gabriele Oriali)와 스네이더르가 중원을 맡으며, 앞에는 스코글룬드(Lennart Skoglund)와 자이르가 벌리고 호나우두와 밀리토가 선다. 그러고도 주세페 바레시(Giuseppe Baresi)와 부르니치(Tarcisio Burgnich), 보닌세냐(Roberto Boninsegna)와 라우타로가 남는다. 인테르의 역사는 벤치까지 채우고 남는다. 추가 명단 서른셋까지 펼치면 1912년에 데뷔한 체베니니(Luigi Cevenini)부터 2026년에 떠난 더프레이(Stefan de Vrij)까지, 100년이 넘는 시간이 빈 시대 없이 이어진다.

1. 발테르 쳉가 - 골키퍼

발테르 쳉가 골키퍼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구단이 적는 공식전 출전은 474경기다.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은 1989년이다.

인테르의 상징이 된 자. 행글라이더(Deltaplano).

전 세계 축구 클럽 가운데 골키퍼 명단이 가장 화려한 인테르에서도 단연코 독보적인 존재다. 이탈리아의 골문이 가장 강하고 아름다웠던 시대, 그 시대를 수호하던 자가 바로 발테르 쳉가(Walter Zenga; 이탈리아 골키퍼, 1960-)였다. 서브 명단의 줄리우 세자르와 추가 명단의 보르돈(Ivano Bordon), 팔리우카(Gianluca Pagliuca), 톨도(Francesco Toldo), 한다노비치까지 이 글에 적힌 골키퍼만 여섯인데, 구단의 명예의 전당이 2018년 첫해에 골키퍼로 부른 사람이 그다.

밀라노에서 태어나 어릴 때는 쿠르바 노르드(Curva Nord; 산 시로의 북쪽 응원석)에 서서 인테르를 봤다. 구단은 그가 전설적인 골키퍼이기 전에 위대한 인테리스타였다고 적는다. 1군 골문에 서기까지는 멀리 돌았다. 살레르노와 사보나, 산베네데토델트론토의 작은 구단에서 네 해를 구르고 돌아왔으니, 소년으로 떠나 어른이 되어 온 길이었다. 돌아온 이듬해인 1983년, 열네 해 동안 골문을 지킨 이바노 보르돈이 떠나면서 그 자리가 그의 것이 됐다.[2]

반사 신경만으로 서는 골키퍼가 아니었다. 190cm에 가까운 키로 골문을 덮었고, 몸으로 공간을 인식했고, 시선으로 상대를 흔들었으며, 기세로 경기의 리듬을 통제했다. 허세가 있고 말이 많다는 소리도 들었는데, 관중석에서 온 사람의 기질이 골문에서도 그대로였다. 산 시로가 붙인 또 하나의 별명은 거미 인간(L’Uomo Ragno)이었다.

1988-89시즌 인테르는 기록의 스쿠데토를 들었다. 네덜란드 삼총사의 밀란과 마라도나의 나폴리, 비알리와 만치니의 삼프도리아가 한 리그에 있던 해다. 그 팀의 수비는 쳉가와 베르고미와 리카르도 페리, 구단 유소년에서 올라온 세 사람이 가운데를 이뤘다. 서른네 경기에서 내준 열아홉 골이 그가 그 시즌에 허락한 전부다. 그해 가을에는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들었고, 유럽에서는 1991년과 1994년 두 번 UEFA컵을 들었다. 1군 골문을 지킨 것이 열두 시즌이다.

대표팀에서는 월드컵에 두 번 나갔다. 자국에서 열린 1990년 대회에서 그는 일곱 경기 동안 두 골만 내줬고 이탈리아는 3위로 끝났다. 구단은 그가 세 해 동안 세계 최고의 골키퍼였다고 적는데,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이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내리 그를 올해의 골키퍼로 뽑은 것을 가리킨다.

그 1990년의 여름을 설명하는 숫자가 하나 있다. 쳉가는 대회가 시작되고 517분 동안 골을 내주지 않았다. 월드컵 한 대회 안에서의 무실점으로는 지금도 가장 긴 기록이다. 기록이 멈춘 곳은 나폴리의 준결승이었다. 골문을 비우고 나온 그의 손보다 아르헨티나의 클라우디오 카니자의 머리가 먼저 공에 닿았고, 이탈리아는 승부차기 끝에 결승에 가지 못했다. 가장 긴 무실점과 가장 아픈 실점이 한 대회에 함께 있었다.

작별도 그답게 했다. 1994년 5월 잘츠부르크를 상대한 UEFA컵 결승에서 그는 막을 수 없어 보이던 공들을 막았고, 인테르는 구단 역사상 두 번째 UEFA컵을 들었다. 그 경기가 인테르 골문에서의 마지막이었고, 여름에 그는 페리와 함께 삼프도리아로 떠났다. 그 자리에 온 사람이 추가 명단의 잔루카 팔리우카다. 구단의 표현을 빌리면 그에게 필요했던 작별은 아니었으되 그가 받을 만한 작별이었다.[2]

2. 아르만도 피키 - 센터백

아르만도 피키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구단이 적는 공식전 출전은 257경기 2골이다. 디자인의 별명 바위(La Roccia)는 피키가 동료 타르치시오 부르니치에게 붙여 준 별명이다.

위대한 인테르의 주장.

전술의 시초이자, 수비가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 리베로(libero; 대인 수비수들 뒤에 혼자 남는 자유로운 수비수)가 아르만도 피키(Armando Picchi; 이탈리아 수비수, 1935-1971)다.

에레라는 밀라노에 와서 처음 두 해 동안 골을 많이 넣고도 우승하지 못했다. 구단 수뇌부가 감독에게 건넨 말을 필자 식으로 줄이면 이렇다. 공격적인 건 좋은데 축구는 이겨야지, 수비가 왜 이러냐. 감독은 AC 밀란의 네레오 로코가 먼저 다듬어 쓰던 카테나초(catenaccio; 빗장을 뜻하는 이탈리아식 수비 전술)를 자기 방식으로 다시 짰다. 맨 뒤에 피키를 두고, 그 앞에 아리스티데 과르네리를, 좌우에 자친토 파케티와 타르치시오 부르니치를 세웠다. 이 넷으로 인테르는 1964년과 1965년 유러피언컵과 인터콘티넨털컵을 내리 들었다. 세계 정상을 다툰 상대는 두 번 다 아르헨티나의 인데펜디엔테였다.

이 영광의 시대를 축구사는 위대한 인테르라 부르고, 에레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의 반열에 들었다. 그 체계가 돌아가는 데 가장 핵심이었던 수비수가 피키다. 빗장은 공을 되찾을 때까지만 잠겨 있었다. 피키 바로 앞에서 뛴 과르네리는 그 팀을 돌아보며, 우리에게는 정상급 공격수가 다섯 있었고 산 시로에서는 결코 수비적이지 않았다고 했다.[3]

피키는 리보르노 사람이다. 고향 팀에서 다섯 해 동안 오른쪽 풀백으로 이름을 얻은 뒤 SPAL을 거쳐 1960년 밀라노로 건너왔고[3], 그 오른쪽 풀백을 에레라가 수비 라인 뒤로 돌렸다. 상대 공격수와 같은 선에서 매번 부딪치는 대신 한 걸음 뒤에서 동료가 놓칠 다음 장면을 먼저 읽는 자리다. 그가 뒤를 책임졌기에 파케티가 마음 놓고 올라갔고, 앞의 다섯 재능도 수비 걱정에 붙들리지 않았다. 리베로라는 자리를 실질적으로 완성한 사람이 그였고, 에레라의 카테나초에서 핵심 중의 핵심 조각이었다.

그의 수비에는 볼 만한 태클이 드물었다. 위험이 될 길을 미리 닫아 놓아서 몸을 던질 일이 적었기 때문이다. 공을 되찾은 다음의 첫 패스도 그의 몫이어서, 인테르의 역습은 수아레스보다 한 걸음 뒤에서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곤 했다.

그가 밀라노에 온 1960년은 에레라가 부임한 해이기도 해서, 감독과 주장은 같은 해에 와서 한 해 차이로 떠난 사이다. 완장을 찬 것도 그였다. 당시의 선발 명단은 지금도 이탈리아 사람들이 사르티(Giuliano Sarti; 이탈리아 골키퍼, 1933-2017), 부르니치, 파케티, 베딘(Gianfranco Bedin), 과르네리, 피키 하고 노래처럼 외우는데, 수비의 맨 끝에 불리는 이름이 주장이었다. 키 171cm의 리베로가 자기보다 큰 수비수 셋을 맨 뒤에서 움직였다.

끝은 갑자기 왔다. 1967년 5월 리스본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셀틱에 졌고, 한 주 뒤인 6월 1일 만토바 원정에서도 져 마지막 날에 스쿠데토까지 놓쳤다. 그 만토바전이 피키가 인테르에서 뛴 마지막 세리에 A 경기다.[3] 그해 여름 그는 바레세로 떠났고, 그란데 인테르도 그와 함께 저물었다.

구단은 그가 뛴 일곱 시즌에 세리에 A 세 번, 유러피언컵 두 번, 인터콘티넨털컵 두 번이 있었다고 적는다. 지도자가 되어 유벤투스의 벤치에 앉아 있던 1971년, 서른다섯의 나이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 리보르노의 경기장이 지금 그의 이름으로 불리고, 2021년에는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이 뒤늦게 그를 불렀다.

3. 주세페 베르고미 - 센터백

주세페 베르고미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구단이 적는 공식전 출전은 756경기다. 그가 든 스쿠데토는 1988-89시즌의 것이다. 위 디자인의 키 171cm는 피키 디자인의 값이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라이트백 순위 9위. 삼촌(Lo Zio).

인테르라는 존재가 세대를 넘어 이어진다는 것을 증명한 증인이며, 산 시로의 북쪽을 지킨 푸른 영혼이 주세페 베르고미(Giuseppe Bergomi; 이탈리아 수비수, 1963-)다. 그가 인테르에 머문 스무 해는 팀이 이기든 무너지든 그 모두를 품겠다는 사랑이었다.

시작부터 빨랐다. 감독 에우제니오 베르셀리니(Eugenio Bersellini; 이탈리아 감독, 1936-2017)는 어른처럼 진지한 열여섯 살을 1980년 1월 30일 코파 이탈리아 유벤투스전에 내보냈다. 열일곱에 더비에서 골을 넣었고, 열여덟에는 1982년 월드컵 결승에 선발로 나서 세계 챔피언이 됐다. 일찍부터 기른 콧수염 탓에 라커룸에서 잔피에로 마리니(Gianpiero Marini; 이탈리아 미드필더, 1951-)가 우리 삼촌을 닮았다고 한 말이 평생의 별명으로 굳었다.[2]

밀라노 근교에서 자란 그를 먼저 본 구단은 밀란이었다. 밀란은 혈액 검사의 류머티즘 소견을 이유로 그를 두 번 돌려보냈고, 1977년 인테르가 1,300만 리라에 데려갔다. 다섯 해 뒤 마드리드의 월드컵 결승에서 그 소년은 서독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Karl-Heinz Rummenigge)를 맡아 지웠다. 이탈리아의 두 번째 골이 되는 공격에도 그의 발이 끼어 있었다. 루메니게는 두 해 뒤 인테르로 와서 그의 동료가 된다.

인테르에서만 756경기를 뛰었다는 것은 실력을 설명하는 일이 사치일 정도의 숫자다. 축구를 숫자로 기억하는 사람에게도 위대해 보이겠으나, 밀라노 시민들에게 베르고미는 하비에르 사네티의 권능과 나란한 존재로 기억된다. 깨질 것 같지 않던 그 출전 기록을 넘어선 사람이 사네티였고, 구단은 사네티를 그의 자연스러운 후계자라고 부른다. 믿음과 충성, 생존, 그리고 사랑의 총합이다. 한 구단에서만 뛴 선수를 꼽을 때 늘 먼저 불리는 이름이고, 2016년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2020년 구단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본디 라이트백이지만 센터백으로도, 스리백과 포백 어디서도 훌륭했다. 유벤투스의 가에타노 시레아, AC 밀란의 프랑코 바레시에 견줄 인테르만의 자존심이었다. 전성기에는 지능과 대인 마크로 경기의 균형을 잡았고, 말년에는 감독 루이지 시모니(Luigi Simoni; 이탈리아 감독, 1939-2020) 아래에서 스위퍼로 물러나 수비 전체를 읽었다.

베르고미는 요란하거나 폭발적이지 않았다. 묵직하고 성실하게 경기를 정리하고 동료의 약점을 덮었다. 그렇다고 순한 수비수는 아니어서, 구단은 그가 선수 생활 동안 열두 번 퇴장당했다고 적어 두었다. 조용한 얼굴 밑에 불이 있었다.

트로피는 출전 수에 견주면 많지 않다. 스쿠데토는 1989년의 한 번이고, UEFA컵을 1991년과 1994년과 1998년 세 번 들었다. 그 대회에서만 아흔 경기 넘게 뛰어 지금도 최다 출전자로 남아 있다. 알토벨리(Alessandro Altobelli)의 시대에 데뷔해 마테우스의 시대를 지나 호나우두의 시대까지 한 구단에 있었던 수비수다. 그 스무 해 동안 일요일마다 그가 맡아야 했던 상대가 마라도나와 판바스턴, 만치니와 바조, 푈러와 라우드루프였다. 세리에 A가 세계에서 가장 센 리그이던 시절이다.

대표팀에서는 여든한 경기를 뛰었고 월드컵에 네 번 나갔다. UEFA 유로 1988에서는 대회 베스트 11에 들었고 그해부터 1991년까지 주장 완장을 찼다. 주장으로 치른 자국의 1990년 대회는 3위로 끝났다. 그 세대 전체의 아쉬움으로 남은 대회다. 서른다섯이던 1998년에도 월드컵에 불려 갔고, 이듬해 유니폼을 벗었다. 지금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믿을 만한 해설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4. 자친토 파케티 - 레프트백

자친토 파케티 레프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구단이 적는 공식전 기록은 634경기 75골이다. 인터콘티넨털컵은 1964년과 1965년 두 번 모두 우승이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레프트백 순위 2위. 주장(Il Capitano).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프트백을 물으면 웬만해서는 네 사람으로 좁혀진다. 파올로 말디니, 니우통 산투스, 호베르투 카를루스 그리고 자친토 파케티(Giacinto Facchetti; 이탈리아 수비수, 1942-2006). 이탈리아 안에서 말디니는 절대지존이 아니며, 때로는 파케티가 그의 권능을 부숴 버린다.

베르가모 근교 트레빌리오에서 공격수로 자랐다. 1960년 인테르에 온 열여덟 살을 에레라가 왼쪽 수비수로 돌려세웠고, 감독이 그의 성을 잘못 발음한 데서 치페(Cipe)라는 별명이 나왔다.[2] 마촐라와 같은 해에 와서 그보다 한 해 늦게 떠나게 되는 긴 동행도 그때 시작됐다. 키가 크고 빨랐으며 어느 자리에 세워도 뛰었다. 기자 잔니 브레라(Gianni Brera; 이탈리아 체육 기자, 1919-1992)는 아예 센터 포워드로 쓰자고까지 했다.

에레라의 카테나초는 수비수를 뒤에 세워 두기만 하는 전술이 아니었다. 감독은 큰 체격과 속도, 공을 다루는 능력을 함께 가진 선수를 맨 뒤 왼쪽에 놓고 거기서 공격이 출발하게 했다. 파케티는 세트피스가 아닌 흐름 속에서도 골문 앞의 마지막 선수가 되곤 했다. 풀백이 터치라인을 따라 상대 골문까지 가는 오늘의 축구가 그의 왼쪽에서 먼저 시작됐다.

당대 가장 빠른 수비수였고, 공격의 미학을 심은 레프트백이었다. 니우통 산투스에 대한 유럽의 대답이며 지금 세대 모든 레프트백의 원형이다. 수비수의 이름 옆에 골이 적히는 것이 낯설던 시절에 인테르에서만 75골을 넣었으니 수트라이커라는 말을 그에게 써도 지나치지 않다. 1966-67시즌의 리그 열 골은 페널티킥 없이 수비수가 세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가장 유명한 골은 1965년 5월의 것이다. 유러피언컵 준결승 1차전을 리버풀에 1-3으로 내주고 돌아온 산 시로에서 인테르는 세 골이 필요했고, 세 번째 골을 넣은 사람이 왼쪽에서 올라온 파케티였다. 그 골로 인테르는 결승에 가서 2연패를 했다.

세리에 A 우승 네 번, 유러피언컵 두 번, 인터콘티넨털컵 두 번, 코파 이탈리아 한 번이다. 대표팀에서는 아흔네 경기 가운데 일흔 경기를 주장으로 뛰며 월드컵에 세 번 나갔다. 자국에서 열린 UEFA 유로 1968을 들었고, 1970년 멕시코에서는 세기의 경기라 불리는 서독과의 준결승 4-3을 지나 결승에 섰다. 1965년 발롱도르에서는 에우제비우(Eusébio da Silva Ferreira; 모잠비크 태생 포르투갈 축구선수·공격수, 1942-2014) 다음인 2위였다. 큰 키에 걸음이 빠르고 얼굴까지 이탈리아의 배우 같았으니 스타성도 최고였다.

사람됨은 기록보다 오래 남았다. 그는 700경기를 넘게 뛰며 퇴장을 한 번 당했다. 경고를 준 심판에게 손뼉을 쳤다가 일흔다섯 번째 분에 쫓겨났는데, 걸어 나가는 그에게 산 시로가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다.[2] 골키퍼 디노 초프는 그를 투명하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말년에는 수비의 한가운데로 자리를 옮겨 뛰었다. 마지막 트로피는 1978년의 코파 이탈리아였고 그해 서른다섯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그 뒤로 구단의 임원이 됐고 2004년부터 회장을 맡았다. 2006년 9월 4일 세상을 떠나자 구단은 3번을 영구 결번으로 올렸고, 2019년에는 명예의 전당의 수비수 자리에 그를 올렸다. 2010년 마드리드에서 세 번째 유럽 우승을 축하하던 밤, 캄비아소가 입고 나온 것이 그 3번 셔츠였다.

5. 하비에르 사네티 - 라이트백

하비에르 사네티 라이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구단이 적는 공식전 출전은 858경기이며 구단 역대 최다다. 같은 디자인 아래쪽의 878경기는 이 숫자를 잘못 옮긴 것이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라이트백 순위 8위. 트랙터(El Tractor).

하비에르 사네티(Javier Adelmar Zanetti; 아르헨티나 수비수, 1973-). 그의 이름은 무한성과 충직함의 상징이다. 21세기의 미디어 속에서 신화가 된 사람이어서, 전 세계 팬들이 충직한 선수라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얼굴 가운데 하나다.

1995년 여름 스물두 살의 그는 축구화를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프리시즌 훈련장에 나타났다. 사람들이 기다리던 쪽은 함께 온 아르헨티나 공격수 세바스티안 람베르트(Sebastián Rambert; 아르헨티나 공격수, 1974-)였다. 람베르트는 곧 고국으로 돌아갔고, 비닐봉지의 주인은 마흔하나에 눈물 젖은 산 시로의 배웅을 받으며 은퇴했다.[2]

반필드에서 뛰던 그를 데려온 사람은 그해 구단을 사들인 마시모 모라티(Massimo Moratti; 이탈리아 기업인, 1945-)다. 새 구단주의 첫 영입 가운데 하나가 그였다. 아버지 안젤로가 그란데 인테르를 세웠던 구단을 아들이 다시 맡은 열여덟 해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네티와 함께였다.

구단이 세어 둔 숫자가 그를 설명한다. 공식전 858경기에 7만 3,284분, 유럽 대항전 160경기, 밀라노 더비 47경기, 주장으로 열세 해, 트로피 열여섯 개다. 뛴 시간만 이어 붙여도 꼬박 쉰 날이 넘는다. 세리에 A 615경기는 외국인 선수의 최다 출전 기록이기도 하다. 그가 온 1995년은 이탈리아 축구가 선수마다 고정 등번호와 이름을 달기 시작한 해였고, 인테르의 4번 위에는 그 뒤로 다른 이름이 적힌 적이 없다.

처음에는 측면을 헤집는 드리블로 눈에 띄었다. 그러다 빈틈없는 풀백이 됐고, 말년에는 머리로 뛰는 미드필더가 됐다. 공격과 수비의 균형이 완벽에 가까웠으며, 때로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때로는 왼쪽 풀백으로도 섰다. 그래서 이반 코르도바나 마이콩 같은 수비수들과 한 팀에 함께 설 수 있었다.

사네티는 상대 공격수를 뒤쫓아 잡을 만큼 빠른 유형은 아니었다. 그런데 늘 상대보다 먼저 수비 라인에 닿아 있었다. 몸싸움보다는 균형으로, 드리블보다는 공간으로 수비하고 역습했다. 축구를 이해하는 지능이 그만큼 높았다. 강철의 허벅지라는 별명처럼 몸으로 싸우되 더럽게 막는 법이 없었다. 그는 라이트백이라는 자리의 뜻을 투쟁의 상징에서 윤리의 상징으로 바꾸었고, 한 시대의 수비 철학을 다시 쓴 사람에 가깝다. 기록은 발자국일 뿐이다. 사네티의 진정한 기록은 한 구단에서 열아홉 해 동안 경기마다 90분을 책임진 존재감이다.

첫 트로피는 1998년 파리의 UEFA컵이었다. 라치오를 3-0으로 이긴 그 결승에서 벌칙 구역 바깥의 공을 그대로 때려 두 번째 골을 넣은 사람이 그였다. 주장이 되어 처음 들 뻔했던 2005년 코파 이탈리아는 대표팀 일정과 겹쳐 손에 쥐지 못했지만, 그 뒤로는 팔이 쉴 틈이 없었다. 스쿠데토 다섯 번에 코파 이탈리아 세 번을 더 들었고, FIFA 클럽 월드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를 들었다. 2010년 마드리드의 밤에 빅 이어를 가장 먼저 든 사람이 서른여섯의 그였다.

구단의 소개 글이 따로 고른 장면이 둘 더 있다. 스쿠데토를 지켜 낸 로마전의 골과, 또 한 번의 우승이 걸린 시에나 원정에서 밀리토에게 내준 도움이다. 서른아홉이던 2013년 봄에는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 그 나이면 선수 생활이 끝나는 부상인데 그는 가을에 돌아왔고, 한 시즌을 더 뛰고서야 산 시로와 작별했다.

경기장 밖에서도 흐트러진 적이 없다. 2001년 아내 파울라와 함께 고국의 아이들을 돕는 재단을 만들고 어릴 적 별명 푸피(Pupi)를 이름으로 붙였다. 은퇴한 2014년부터는 구단의 부회장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왔지만 이제는 밀라노 사람에 가깝고, 정작 사는 곳은 호수가 있는 코모다. 술과 담배와 군말이 없던 선수가 지금도 팀의 정신을 지키고 있다. 축구 역사에서 가장 고결했던 선수로, 그래서 순수의 지성으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6. 에스테반 캄비아소 - 수비형 미드필더

에스테반 캄비아소 수비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구단이 적는 공식전 출전은 430경기다.

가장 저평가된 미드필더. 쿠추(Cuchu).

에스테반 캄비아소(Esteban Matías Cambiasso Deleau; 아르헨티나 미드필더, 1980-)는 태클의 선수라기보다 책략과 시선의 예술가에 가까웠다. 그 솜씨는 인테르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미드필더 가운데 한 사람이 되기에 충분했다. 별명 쿠추는 어릴 적 아르헨티나 텔레비전의 인기 출연자에게서 따온 것이라고 구단은 적는다.[2]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자라 열다섯 무렵 레알 마드리드의 유소년으로 건너간 유망주였다. 고국에 돌아가 인데펜디엔테와 리버 플레이트에서 뛰고 다시 마드리드로 갔으나, 별들이 모인 팀에서 자리를 굳히지는 못했다. 2004년 여름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이 끝난 그를 인테르는 이적료 없이 데려왔다. 그 뒤 열 해 동안 430경기를 뛰며 트로피 열다섯 개를 들었다. 그가 온 뒤 두 해 사이에 줄리우 세자르와 사무엘(Walter Samuel), 마이콩이 차례로 왔다. 트레블의 뼈대가 그렇게 섰고 그 가운데에 그가 있었다. 중원에서 그는 무엇이든 했다. 패스를 돌리고, 마지막 공을 찔러 주고, 골을 넣고, 상대의 하루를 고단하게 만들었다. 미드필더의 숫자로는 많은 51골이 그렇게 쌓였다.

짝은 세르비아의 데얀 스탄코비치(Dejan Stanković)였다. 둘이 중원을 지킨 인테르는 세리에 A를 다섯 번 내리 우승했다. 텔레비전 화면은 공격수들을 더 자주 비췄으나, 화면 밖에서 그가 서 있는 자리가 곧 팀의 균형이었다. 넘치는 법이 없는데 빠지면 곧바로 티가 나는 선수였다. 드러나는 역할 없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축구 철학이 그에게서 실현됐고, 동료들은 경기가 꼬일 때마다 그를 기준점으로 찾았다.

골에는 종류가 둘 있었다. 하나는 2006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의 발리처럼 그냥 아름다운 골이다. 다른 하나는 꼭 필요한 순간의 골인데, 2009-10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에서 첼시의 페트르 체흐를 뚫은 결승골이 그랬다. 그 한 골의 차이를 안고 런던으로 건너간 인테르는 원정에서도 이겼고, 석 달 뒤 마드리드에서 유럽 챔피언이 됐다. 모리뉴가 자기 옛 구단을 넘은 그 16강이 트레블로 가는 길의 첫 고비였다.

트레블이 완성되던 2010년, 캄비아소는 모리뉴 체제의 전술적 심장이었다. 주장 사네티와 함께 큰 소리 없이 조직을 움직였다. 축구판 체스 마스터라는 별명, 월등한 축구 지능, 강한 리더십과 품위 있는 태도. 이 셋이 그를 라커룸과 그라운드를 잇는 다리로 만들었다.

그해 여름의 일은 아르헨티나 축구가 오래 설명해야 했던 장면이다. 트레블을 든 지 몇 주 뒤, 대표팀 감독 디에고 마라도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명단에 캄비아소와 사네티의 이름을 넣지 않았다. 유럽 챔피언의 주장과 중원의 중심이 나란히 집에서 그 대회를 봤다.

등번호는 열 해 내내 19번이었다. 구단이 그의 시절을 대표하는 한 장면으로 꼽는 것은 골이 아니다. 마드리드의 우승 축하 자리에 그는 자기 19번이 아닌 파케티의 3번 셔츠를 입고 나왔다. 스물셋에 와서 서른셋에 떠났다. 2020년 명예의 전당이 미드필더 자리에 그를 불렀다.

7. 로타어 마테우스 - 중앙 미드필더

로타어 마테우스 중앙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431경기 51골 32도움은 캄비아소 디자인의 숫자다. 마테우스가 인테르에서 남긴 기록은 세리에 A 115경기 40골이고, 여기에 코파 이탈리아 18경기 7골과 유럽 대항전 21경기 6골이 더해진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중앙 미드필더 순위 1위. 탱크(Der Panzer).

완벽함이라는 낱말조차 로타어 마테우스(Lothar Herbert Matthäus; 독일 미드필더, 1961-)를 설명하기에는 모자랄 수 있다. 강인했지만 무식하지 않았고, 우아했지만 나약하지 않았다. 경기를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운명을 쓰는 자였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세계 축구를 지배한 독일의 전차이자 전사이며 시인이다. 월드컵에만 다섯 번 나갔다.

1988년 여름 그는 안드레아스 브레메와 함께 뮌헨에서 밀라노로 왔다. 첫마디가 선언이었다. 바이언에 갔을 때 첫해에 우승했으니 인테르에서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2] 독일에서 맡던 6번과 8번 자리는 이미 주인이 있어서 그는 군말 없이 10번으로 옮겼고, 그 첫 시즌 리그 서른두 경기에서 아홉 골을 넣었다.

그 팀의 원정 방식을 바꾼 것도 그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원정에서 비기고 안방에서 이기면 된다는 말을 듣고 온 볼로냐 원정 날, 그는 동료들에게 비긴다니, 오늘은 4-0으로 이긴다고 했다. 틀린 예언이었다. 경기는 6-0으로 끝났다. 동료들은 한목소리로, 그가 이기기로 마음먹은 경기는 이겼다고 돌아본다.

1988-89시즌의 스쿠데토는 인테르 역사에서 가장 완벽했던 시즌으로 꼽힌다. 서른네 경기 승점 58점이다. 지난 시즌 우승팀은 네덜란드 사람들을 앞세운 밀란이었고, 마라도나의 나폴리와 바조의 피오렌티나, 라우드루프의 유벤투스, 비알리와 만치니의 삼프도리아가 한 리그에 있었다. 우승을 확정한 것은 그 나폴리를 상대로 그가 꽂아 넣은 프리킥이었고, 유럽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라는 자리도 그해에 굳었다.

롱패스의 정확도는 당시 유럽 최고였다. 중거리 슛은 말 그대로 한 방의 미학이었고, 상대를 파악하고 통제하는 시야는 그라운드 밖에서 감독이 보는 수준이었다. 필드의 어느 자리에 세워도 일류 이상으로 뛰었으니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도, 바이언도, 인테르도 그와 함께 정상에 섰다.

산 시로는 그를 사랑했다. 1990년 월드컵에서 서독은 다섯 경기를 그 경기장에서 치렀고, 쿠르바 노르드는 인테르 팬들로 차서 독일의 주장을 응원했다. 그해의 발롱도르를 그는 산 시로에서 들어 보였다. 인테르 유니폼을 입고 그 상을 받은 사람은 그와 1997년의 호나우두 둘뿐이다.

그 월드컵의 결승은 로마에서 열렸다. 0-0으로 맞선 85분에 서독이 페널티킥을 얻자 모두가 주장인 그를 봤는데, 공을 든 사람은 인테르의 동료 브레메였다. 그 골로 서독은 세 번째 우승을 했다. 마테우스와 브레메, 그리고 한 해 늦게 온 위르겐 클린스만(Jürgen Klinsmann)까지 인테르의 독일 사람 셋이 그 대표팀의 뼈대였다.

1991년 5월에는 산 시로에서 열린 로마와의 결승 1차전에서 크로스바 바로 밑으로 페널티킥을 차 넣었다. 인테르는 그 경기를 2-0으로 이기고 원정을 0-1로 막아 구단의 첫 UEFA컵을 들었다. 이듬해 봄 무릎을 크게 다쳤고, 그해 여름 뮌헨으로 돌아갔다. 밀라노에서 보낸 네 해를 구단은 그의 스무 해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고 적는다. 그 시절 밀라노의 운동장에서 아이들은 플라티니도 마라도나도 판바스턴도 아닌 마테우스가 되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가 떠난 뒤, 인테르는 마테우스와 비슷한 미드필더 자체를 품어 본 기억이 없다.

8. 루이스 수아레스 - 중앙 미드필더

루이스 수아레스 중앙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구단의 최근 집계는 공식전 328경기 54골이다. 구단 자료도 시점에 따라 골 수가 갈린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공격형 미드필더 순위 8위. 건축가(El Arquitecto).

차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함께 스페인 축구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이며, 파코 헨토와 함께 20세기의 스페인을 빛낸 사람이 루이스 수아레스(Luis Suárez Miramontes; 스페인 미드필더, 1935-2023)다. 경기를 설계하던 존재였고, 에레라 감독의 페르소나 그 자체였다. 밀라노에서는 루이시토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갈리시아의 라코루냐에서 태어나 고향 팀 데포르티보에서 열여덟에 1군에 올랐다. 그 팀에서 바르셀로나를 처음 만난 날 1-6으로 졌는데, 1954년 그를 데려간 구단이 그 바르셀로나였다. 에레라는 바르셀로나에서 그를 가르쳤고, 밀라노로 옮긴 이듬해인 1961년에 그를 불러왔다. 인테르가 치른 2억 5천만 리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이적료였다. 한 해 전 발롱도르를 받은 선수의 값이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선수가 그 상을 받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고, 2024년 로드리가 받을 때까지 유일했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골문 가까이 서는 안쪽 공격수였다. 인테르에서는 더 낮은 곳으로 내려왔다. 짧은 패스로 상대를 한쪽에 모은 뒤 고개를 들어 반대편의 자이르 다코스타나 달려 올라오는 파케티에게 긴 공을 보냈다. 그란데 인테르의 역습은 흔히 속도로 기억되지만 속도에도 주소가 필요하다. 누가 달릴지를 정하고 그 발 앞에 공을 놓는 사람이 수아레스였다. 바르셀로나에서 176경기 80골을 넣던 공격수가 인테르에서는 328경기 54골의 설계자가 됐으니, 숫자가 먼저 그의 이동을 말해 준다.

에레라와의 사이는 총애라는 한마디로 끝나지 않는다. 감독이 수비 조직과 빠른 전환을 요구했을 때, 빼앗은 공을 공격으로 바꾸는 첫 판단을 맡은 사람이 그였다. 1964년은 그 일의 정점이다. 5월에 인테르의 유러피언컵을, 6월에 스페인의 유러피언 네이션스컵을 들었다. 한 해에 구단과 대표팀의 유럽 정상을 모두 지휘한 미드필더가 됐다.

드리블은 유연했고 패스는 날카로웠으며, 경기 운영 능력은 21세기의 미드필더들도 비빌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는 피치 위에서 철학을 실현한 사람이었고 스페인 축구의 초월적 상징이기도 하다. 인테르에서는 신이 됐다. 세리에 A 우승 세 번에 유러피언컵 2연패, 인터콘티넨털컵 2연패가 그의 발에서 나왔다. 스페인 대표팀에서는 서른두 경기에 열네 골을 남겼다.

AC 밀란의 카를하인츠 슈넬링어를 바보로 만드는 루이스 수아레스

1967년 리스본의 유러피언컵 결승에 그는 다쳐서 서지 못했다. 인테르는 마촐라의 페널티킥으로 앞서고도 셀틱에 1-2로 뒤집혔다. 그가 정상적으로 나섰더라면 셀틱의 트레블을 막아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필자의 마음속에는 지금도 있다.

그의 플레이는 여전히 영상으로 많이 찾아본다. 화려해서라기보다 기교 뒤에 숨은 생각을 배우려는 축구인들의 발길이다. 아홉 시즌을 뛰고 1970년 삼프도리아로 옮겼으며, 감독으로도 인테르의 벤치에 여러 번 앉았다. 2023년 7월 9일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밀라노 사람으로 살다 간 건축가였다.

9. 산드로 마촐라 - 공격형 미드필더

산드로 마촐라 공격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구단이 적는 생일은 1942년 11월 8일이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공격형 미드필더 순위 9위. 검은 수염(Il Baffo).

아버지의 이름 아래에서 자란,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슈퍼스타다. 그란데 토리노를 잇는 그란데 인테르의 얼굴이었고 인테르 그 자체였다. 산드로 마촐라(Alessandro Mazzola; 이탈리아 미드필더, 1942-2026)는 한 선수의 이름이기 전에 이탈리아 축구가 물려받은 기억의 이름이다.

아버지 발렌티노 마촐라(Valentino Mazzola; 이탈리아 공격수, 1919-1949)는 그란데 토리노의 주장이었다. 산드로도 아버지가 뛰던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1949년 수페르가 언덕의 비행기 사고로 그 팀 전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여섯 살이었다. 많은 사람이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는 사람의 성을 그는 어린 어깨에 지고 자랐다. 인테르 유소년에서 그 소년을 돌본 어른이 베니토 로렌치(Benito Lorenzi)와 주세페 메아차였다.[2] 이 글의 열한 번째 사람이 아홉 번째 사람을 키웠다. 산드로는 비극의 계승자로 기억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 도시의 상징이 되기를 꿈꿨나 보다. 스스로의 경기력으로 아버지의 그림자를 넘어서야 했고, 끝내 이탈리아 역사에서 가장 우아한 플레이메이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를 잡았다.

첫 경기는 이상한 날에 왔다. 1961년 6월 10일 유벤투스전에 구단주 안젤로 모라티(Angelo Moratti; 이탈리아 기업인, 1909-1981)는 판정에 항의하는 뜻으로 유소년 팀을 내보냈다. 인테르는 1-9로 졌는데 그 한 골을 페널티킥으로 넣은 열여덟 살이 마촐라였다.

세 해 뒤 그는 유럽의 꼭대기에 있었다. 1964년 빈의 프라터 경기장에서 인테르는 푸슈카시와 디스테파노의 레알 마드리드를 3-1로 이겼고, 첫 골과 마지막 골이 스물한 살 마촐라의 것이었다. 구단의 첫 유러피언컵이다. 그해 대회에서 일곱 골로 득점왕이 됐고, 가을에는 인데펜디엔테와의 인터콘티넨털컵 2차전에서도 골을 넣었다. 이듬해에는 열일곱 골로 세리에 A 득점왕까지 했다.

상대 팀 입장에서는 공포

미친 드리블의 장인이었고 루이스 수아레스의 영혼의 파트너였다. 기술과 직관, 그리고 지성의 경계에서 춤을 추던 선수다. 당시의 이탈리아 축구가 무겁고 수비적이었다면 마촐라는 그 안에서 시의 리듬을 연주하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수아레스와 마촐라 곁으로 코르소와 자이르 다코스타(Jair da Costa)가 한꺼번에 달려 나가면, 지금으로 치면 메시와 호날두 뒤에 네이마르와 이니에스타가 함께 뛰어오는 것과 비슷한 위압이었을 것이다.

경력의 뒤쪽에서는 한 줄 내려와 미드필더로 뛰었고 거기서도 일류였다. 1971년 발롱도르에서는 요한 크라위프(Hendrik Johannes Cruijff; 네덜란드 축구 선수·감독, 1947-2016) 다음인 2위에 올랐다. 그의 10번은 밀라노의 정체성이었으며, AC 밀란의 잔니 리베라(Giovanni Rivera; 이탈리아 미드필더, 1943-)와 함께 이탈리아의 10번 전성기를 양분했다. 크라위프와 베켄바워, 메시와 호날두만큼이나 유명한 두 사람의 맞수 관계는 아름다움과 냉철함이라는 두 낱말로 요약되곤 한다.

둘은 대표팀에서도 한 자리를 나눠야 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감독 페루초 발카레지(Ferruccio Valcareggi; 이탈리아 감독, 1919-2005)는 마촐라를 선발로 내고 후반에 리베라를 넣었다. 이탈리아가 계주라고 부른 방식이다. 마촐라는 그 앞 주자로 결승까지 뛰었고, 두 해 전에는 UEFA 유로 1968을 들었다.

1960년부터 1977년까지 인테르 한 구단에서만 뛰었다. 대표팀에서는 일흔 경기에 스물두 골을 넣었다. 세리에 A 417경기 116골에 우승 네 번, 유러피언컵 두 번, 인터콘티넨털컵 두 번이다. 유니폼을 벗은 뒤에도 구단의 임원으로 남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된 이야기를 그는 삶과 축구로 마무리 지었다. 그의 패스에는 서사가 있었고, 그의 골에는 기도가 깃들어 있었다.

10. 마리오 코르소 - 레프트 윙

마리오 코르소 레프트 윙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그의 공식전 출전과 득점은 자료에 따라 502경기 94골에서 509경기 95골까지 갈린다.

천재는 때론 조용히 피어난다. 신이 주신 왼발(Il piede sinistro di Dio).

마리오 코르소(Mario Corso; 이탈리아 공격수, 1941-2020)는 밀물처럼 부드럽고 썰물처럼 날카로운 왼발을 가진 사나이였다. 공을 차는 것이 아니라 감쌌고, 그의 킥은 날아간다기보다 휘감겨 돌아왔다. 그 곡선은 인테르의 전술에 곡선을 그려 넣는 음악이었다.

별명에는 날짜가 있다. 1961년 10월 15일 이탈리아는 이스라엘에 끌려가다가 코르소가 막판에 넣은 두 골로 4-2로 뒤집었다. 경기 뒤 이스라엘의 감독 줄러 만디(Mándi Gyula; 헝가리 출신 감독)가 우리는 잘 싸웠으나 신의 왼발이 우리를 이겼다고 했다.[3] 그 밖에도 만화 속 마술사의 이름인 만드레이크, 마리올리노 같은 별명이 따라다녔으니 기자들이 그를 얼마나 쓰고 싶어 했는지 알 만하다.

베로나 근교에서 자라 열여섯에 인테르로 왔다. 동료들과 함께 묶여 온 거래의 값이 900만 리라였고 소년의 월급은 7만 리라였다. 1958년 6월 코파 이탈리아에서 열여섯 살 열 달의 나이로 첫 경기를 치렀고, 두 주 뒤에 넣은 첫 골은 구단의 최연소 득점으로 남아 있다. 그란데 인테르의 선발 명단을 노래처럼 외울 때 맨 끝에 오는 이름이 그다. 자이르, 페이로(Joaquín Peiró; 스페인 축구선수·공격수, 1936-2020), 마촐라, 수아레스, 코르소. 등번호도 순서도 열한 번째였다.

빨라 보이지 않는데 먼저 도착하는 선수였다. 느슨한 걸음으로 수비수의 발을 묶어 놓고 왼발 한 번으로 일을 끝냈다. 수비수들은 그가 어느 쪽으로 돌지 끝까지 알지 못했다. 포르타 로마나의 어느 집 큰 방에 침대 둘을 놓고 그와 함께 하숙하던 동료 과르네리는 그와 뛰면 공이 패스 두 번이 아니라 한 번에 목적지에 닿았고, 마지막 40미터에서 그가 말 그대로 경기를 밝혔다고 돌아본다. 말수가 적다가 남의 속을 긁는 농담을 툭 던지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농담이 가장 자주 향한 곳이 감독이었다. 에레라는 해마다 그를 팔자고 했고, 구단주 안젤로 모라티는 해마다 안 된다고 했다. 마법사라 불리던 감독의 자존심을 코르소의 비꼬는 한마디가 건드렸다고 한다. 그 둘 사이에서 코르소는 열여섯 시즌을 뛰었다.

프리킥은 따로 적어야 한다. 수비벽을 넘은 공이 갑자기 힘을 잃고 떨어지는 그의 킥을 이탈리아 사람들은 낙엽이라고 불렀고, 팬들은 코르소의 곡선으로 기억한다. 낙엽 킥은 브라질의 지지가 먼저 차던 것이지만 코르소는 공을 다르게 맞혀 다른 궤적을 얻었다. 골대 바깥으로 나가던 공이 안으로 빨려 들어오는 마법 같은 장면이 그렇게 나왔다. 1965년 5월 리버풀을 상대로 세 골이 필요했던 산 시로의 밤, 두 번째 골이 그 프리킥이었다. 물 먹은 가죽 공으로 차던 시절의 일이다.

인테르에서 열여섯 시즌을 뛰며 세리에 A를 네 번, 유러피언컵과 인터콘티넨털컵을 두 번씩 들었다. 네 번째 스쿠데토는 그란데 인테르가 저문 뒤인 1971년에 왔다. 1973년 에레라가 인테르 벤치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코르소가 떠났다. 6월 17일 코파 이탈리아 유벤투스전이 마지막 경기였고 행선지는 제노아였다. 대표팀과는 끝내 인연이 얕았다. 산 시로 한복판에서 대표팀 감독을 향해 보란 듯이 무례한 손짓을 해 보인 일이 있었고, 그 뒤로 오랫동안 부름이 끊겼다. 왼발 하나로 유럽을 두 번 든 선수가 월드컵 본선에는 한 번도 서지 못했다. 2020년 6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옛 동료 부르니치는 그가 그 시절 최고였다고 했다.[3]

산드로 마촐라와 마리오 코르소의 2:1 부분 전술

11. 주세페 메아차 - 세컨드 스트라이커

주세페 메아차 세컨드 스트라이커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구단이 적는 공식전 기록은 408경기 284골이다. 구단의 소개는 그가 뛰어서 든 스쿠데토를 두 번으로 센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처진 공격수 순위 9위. 페피노(Peppino).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역대 최다 득점자이고 세리에 A 득점왕을 세 번 했으며, 구단과 이탈리아 축구의 명예의 전당에 모두 이름이 있다. 그리고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의 주인공이다. 주세페 메아차(Giuseppe Meazza; 이탈리아 공격수, 1910-1979)는 축구가 한 나라의 열망과 환호를 받아 내는 무대로 올라서던 바로 그 시절, 이탈리아 전역을 뒤흔든 첫 번째 축구의 신이었다.

1927년 열일곱 살의 그를 1군에 올린 사람은 헝가리 사람 감독 아르파드 바이스(Weisz Árpád; 헝가리 감독, 1896-1944)였다. 라커룸의 선배들은 이제는 발릴라 애들까지 뛰게 하느냐고 투덜댔다. 발릴라는 당시의 소년단 이름이다. 그 투덜거림이 그대로 별명 일 발릴라(Il Balilla)가 됐다.[2] 소년을 알아본 바이스는 훗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이탈리아에서 쫓겨나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고향 동네 포르타 비토리아에서는 그를 페핀이라 불렀다. 한 시즌을 한 리그로 치르기 시작한 1929-30시즌에 열아홉 살의 그는 서른한 골로 득점왕이 됐고 인테르는 우승했다. 1930년 5월 부다페스트에서 이탈리아는 헝가리를 5-0으로 이겼고 그가 세 골을 넣었다. 대표팀의 첫 국제 대회 우승이 걸린 경기였다. 돌아온 날 밀라노역에는 2만 5천 명이 나와 기다렸다.

1930년대의 유럽은 정치적 격동과 전체주의의 물결 속에 있었다. 사람들이 힘과 질서를 찾던 그 한복판에서 메아차는 자유의 선율처럼 피어난 존재였다. 그는 공을 몬 것이 아니라 공과 함께 흘렀고 공과 함께 유영했다. 169cm의 크지 않은 몸이었으나 터치는 섬세했고 두 발을 다 썼다. 본인은 본업이 센터 포워드이고 사정이 있을 때 안쪽 공격수라고 했다. 골키퍼를 불러내 제치고 빈 골문에 밀어 넣는 그의 골에는 초대하는 골(gol a invito)이라는 이름이 따로 붙었다.

그가 뛰던 구단의 이름은 인테르나치오날레가 아니었다. 1928년 파시스트 정권은 국제적이라는 낱말을 못마땅해했고, 구단은 밀라노의 수호성인에게서 따온 암브로시아나라는 이름으로 그 시절을 지났다. 안방도 산 시로가 아니라 도심의 아레나 치비카였다. 훗날 자기 이름이 붙을 경기장을 그는 주로 원정 선수로 밟았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1934년 로마와 1938년 파리에서 월드컵을 연달아 들었다. 두 번째 대회에서는 주장이었다. 쉰세 경기에서 넣은 서른세 골은 지금도 루이지 리바 다음으로 많다.

정장 차림의 남자에게서 트로피를 건네받는 주세페 메아차
쥘 리메 컵(꿈의 트로피)을 받는 주세페 메아차

거리의 왕자이자 무도회의 주인공이었다. 공 하나로 눈을 사로잡던 소년은 연미복을 입고 댄스 플로어를 지배하는 신사이기도 했다. 외모는 귀족, 태도는 플레이보이, 실력은 신계였다. 연인들이 줄을 섰고 그의 슈트는 신문 1면에 실렸으며 그의 말 한마디가 청년들의 유행이 됐다. 훗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조지 베스트나 데이비드 베컴 같은 아이돌의 자리를 그가 먼저 살았다. 아이들은 메아차처럼 되고 싶다고 외치며 공을 찼다.

메아차는 골을 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축구라는 언어의 문법을 바꿔 버렸다. 스타라는 존재가 처음 등장하던 시대에 그는 모든 빛의 중심이었다. 그라운드 위에서는 페이크와 볼 터치와 속임수의 혁신가였고, 밖에서는 이탈리아 근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다.

인테르에서 열네 시즌을 뛰었고 그 가운데 아홉 해가 주장이었다. 득점왕을 한 세 시즌 가운데 둘이 우승한 시즌이고, 1938-39시즌에는 코파 이탈리아도 들었다. 유럽 구단들이 겨루던 미트로파컵에서도 세 번 득점왕을 했다. 다친 뒤로는 밀란과 유벤투스의 셔츠도 입었으나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의 옷은 하나다. 유니폼을 벗은 뒤에는 구단 유소년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그 아이들 가운데 하나가 산드로 마촐라다. 1979년 8월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밀라노는 산 시로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축구의 신이며, 인테르의 첫 번째 로망이고, 영원한 왕이다.

메아차에서 라우타로까지, 쉰아홉 개의 이름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역대 베스트 11 표제 4-3-3 대형으로 배치한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역대 베스트 11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역대 베스트 11 서브 명단 15인 편집물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역대 베스트 11 추가 명단 33인 편집물
표제, 열한 명의 대형, 서브 명단 15인, 추가 명단 33인. 1912년에 데뷔한 루이지 체베니니부터 2026년의 더블을 든 주장 라우타로 마르티네스까지 쉰아홉 명이 한 흐름에 들어간다.

이 명단은 인터 밀란의 가장 위대했던 역대 베스트 59인의 명단이다.

구단 역대 최다 출전 1위와 2위와 3위가 이 열한 명 안에 있다. 사네티의 858경기, 베르고미의 756경기, 파케티의 634경기다. 역대 최다 득점자 메아차가 있고, 구단이 영원히 비워 둔 등번호 두 개, 3번과 4번의 주인이 모두 여기 있다. 인테르 유니폼으로 발롱도르를 받은 사람도 이 안에 있다. 쉰아홉으로 넓히면 세리에 A 득점왕만 여덟이다. 메아차와 마촐라, 보닌세냐와 라우타로, 녜르시와 비에리(Christian Vieri), 이브라히모비치(Zlatan Ibrahimović)와 이카르디다.

이름들은 서로 손이 닿아 있다. 메아차가 유소년에서 마촐라를 가르쳤다. 마촐라와 오래 함께 뛴 파케티가 회장이던 때의 주장이 사네티였다. 그 사네티가 부회장으로 있는 구단에서 서브 명단의 라우타로가 주장 완장을 차고 더블을 들었다. 메아차에서 파케티로, 사네티로, 라우타로로 내려오는 계보는 구단의 직함으로도 이어져 있다.

이탈리아에서 일곱, 아르헨티나에서 둘, 독일과 스페인에서 하나씩 왔다. 프로 생활을 인테르 한 구단에서만 한 사람이 베르고미와 파케티와 마촐라 셋이다. 외국인 선수에게 문을 열겠다며 갈라져 나온 구단의 열한 명답게 넷이 나라 밖 사람이고, 그 넷이 오른쪽 수비와 중원 전부를 맡는다. 골문과 수비의 가운데, 왼쪽 측면과 맨 앞줄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지킨다.

구단이 유럽의 꼭대기에 선 세 번의 결승을 이 명단에 대 보면 이렇다. 1964년 빈의 선발 열한 명 가운데 여덟이, 1965년 산 시로의 선발 가운데 아홉이 쉰아홉 안에 있다. 열한 명의 다섯에 서브 명단의 과르네리와 부르니치와 자이르, 추가 명단의 베딘을 더한 숫자다. 2010년 마드리드의 선발에서도 아홉이 여기 있다. 사네티와 캄비아소, 줄리우 세자르와 마이콩, 스네이더르와 밀리토, 루시우(Lúcio)와 사무엘과 에토다. 빠진 둘 가운데 한 사람이 왼쪽 수비수 키부였고, 그는 열여섯 해 뒤 감독으로 돌아와 더블을 들었다.

푸른 심장이 뛴다.검고 푸른 줄무늬가 118년 동안 써 내려온 쉰아홉 개의 이름.

열한 명 뒤에 선 마흔여덟

서브 명단 열다섯과 추가 명단 서른셋을 글자로 다시 적되 포지션은 그림에 적은 대로 두었다. 그림 두 장의 머리글은 모두 추가 명단이고, 앞의 열다섯이 서브 명단이다. 그림의 스코일룬은 스코글룬드, 세베니니는 체베니니, 클라탄은 즐라탄이며, 이름만 적힌 이슈트반은 헝가리 사람 녜르시 이슈트반이다. 마흔여덟을 자리로 나누면 골키퍼가 다섯, 수비수가 열둘, 미드필더가 열하나, 공격수가 스물이다. 센터 포워드만 열셋이니, 단단하다는 구단이 얼마나 많은 골잡이를 거느렸는지가 여기서 보인다.

서브 명단 15인

  • 줄리우 세자르Júlio César · 골키퍼

    2005-2012년. 2010년 트레블의 골문을 지켰고 2020년 구단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 아리스티데 과르네리Aristide Guarneri · 센터백

    1958-1967년과 1969-70시즌. 피키 앞에서 상대 공격수를 지운 그란데 인테르의 스토퍼다.

  • 주세페 바레시Giuseppe Baresi · 센터백

    1976-1992년 세리에 A 392경기. 밀란의 프랑코 바레시의 형으로, 형제 가운데 그만 인테르가 받아 주었다.

  • 리카르도 페리Riccardo Ferri · 센터백

    1981-1994년 세리에 A 290경기. 쳉가, 베르고미와 함께 1989년의 수비를 이룬 유소년 출신이다.

  • 안드레아스 브레메Andreas Brehme · 레프트백

    1988-1992년 세리에 A 116경기 11골. 마테우스와 같은 여름에 와서 기록의 스쿠데토를 들었다.

  • 타르치시오 부르니치Tarcisio Burgnich · 라이트백

    1962-1974년 세리에 A 358경기. 피키가 바위라고 부른 그란데 인테르의 오른쪽 문지기다.

  • 마이콩Maicon · 라이트백

    2006-2012년 세리에 A 177경기 16골. 트레블의 오른쪽을 오르내렸고 2022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 가브리엘레 오리알리Gabriele Oriali · 수비형 미드필더

    1970-1983년 세리에 A 277경기 33골. 1982년 월드컵을 든 이탈리아의 중원이기도 하다.

  • 베슬레이 스네이더르Wesley Sneijder · 공격형 미드필더

    2009-2013년 세리에 A 76경기 13골. 트레블의 10번이며 2021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 렌나르트 스코글룬드Lennart Skoglund · 레프트 윙

    1950-1959년 세리에 A 241경기 55골. 1953년과 1954년 연속 우승의 왼쪽 날개였던 스웨덴 사람이다.

  • 자이르 다코스타Jair da Costa · 라이트 윙

    1962-1967년과 1968-1972년. 1965년 산 시로에서 벤피카를 꺾은 유러피언컵 결승의 한 골이 그의 것이다.

  • 라우타로 마르티네스Lautaro Martínez · 세컨드 스트라이커

    2018년 입단. 2026년 스쿠데토와 코파 이탈리아를 함께 든 주장이다.

  • 로베르토 보닌세냐Roberto Boninsegna · 센터 포워드

    1969-1976년 세리에 A 197경기 113골. 1971년 스쿠데토의 득점왕이다.

  • 호나우두Ronaldo · 센터 포워드

    1997-2002년 세리에 A 68경기 49골. 인테르 선수로 1997년 발롱도르를 받았고 이듬해 UEFA컵을 들었다.

  • 디에고 밀리토Diego Milito · 센터 포워드

    2009-2014년 세리에 A 128경기 62골. 2010년 마드리드 결승의 두 골이 그의 것이다.

추가 명단 33인

  • 이바노 보르돈Ivano Bordon · 골키퍼

    1969-1983년 세리에 A 281경기. 2022년 명예의 전당이 골키퍼로 부른 이름이다.

  • 잔루카 팔리우카Gianluca Pagliuca · 골키퍼

    1994-1999년 세리에 A 165경기. 쳉가의 뒤를 이었고 1998년 UEFA컵을 들었다.

  • 프란체스코 톨도Francesco Toldo · 골키퍼

    2001-2010년 세리에 A 147경기. 2019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 사미르 한다노비치Samir Handanovič · 골키퍼

    2012-2023년 세리에 A 380경기. 2021년 스쿠데토를 주장으로 들었다.

  • 로랑 블랑Laurent Blanc · 센터백

    1999-2001년 세리에 A 68경기 6골. 두 시즌 동안 수비를 이끈 프랑스의 리베로다.

  • 이반 코르도바Iván Córdoba · 센터백

    2000-2012년 세리에 A 324경기 15골. 사네티 곁에서 열두 해를 뛴 콜롬비아 사람이다.

  • 마르코 마테라치Marco Materazzi · 센터백

    2001-2011년 세리에 A 184경기 18골. 2021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 왈테르 사무엘Walter Samuel · 센터백

    2005-2014년 세리에 A 169경기 14골. 별명이 벽이었던 트레블의 센터백이다.

  • 루시우Lúcio · 센터백

    2009-2012년. 사무엘과 짝을 이뤄 2010년의 유럽을 막아 냈다.

  • 스테판 더프레이Stefan de Vrij · 센터백

    2018-2026년 세리에 A 213경기 12골. 세 번의 스쿠데토를 함께했다.

  • 잔프랑코 베딘Gianfranco Bedin · 수비형 미드필더

    1964-1974년 세리에 A 225경기 20골. 그란데 인테르의 명단에서 네 번째로 불리던 이름이다.

  • 디에고 시메오네Diego Simeone · 수비형 미드필더

    1997-1999년 세리에 A 57경기 11골. 1998년 UEFA컵을 든 중원의 싸움꾼이다.

  • 마르첼로 브로조비치Marcelo Brozović · 수비형 미드필더

    2015-2023년 세리에 A 261경기 25골. 2021년 스쿠데토의 중원을 조율했다.

  • 니콜라 베르티Nicola Berti · 중앙 미드필더

    1988-1998년 세리에 A 229경기 29골. 기록의 스쿠데토와 두 번의 UEFA컵을 함께했다.

  • 아론 빈터르Aron Winter · 중앙 미드필더

    1996-1999년 세리에 A 76경기 1골. 1998년 UEFA컵을 들었다.

  • 데얀 스탄코비치Dejan Stanković · 중앙 미드필더

    2004-2013년 세리에 A 231경기 29골. 캄비아소의 짝이며 2019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 니콜로 바렐라Nicolò Barella · 중앙 미드필더

    2019년 입단. 2021년과 2024년, 2026년의 스쿠데토를 들었다.

  • 하칸 찰하노을루Hakan Çalhanoğlu · 중앙 미드필더

    2021년 입단. 밀란에서 건너와 2024년의 스무 번째 스쿠데토를 조율했다.

  • 유리 조르카에프Youri Djorkaeff · 공격형 미드필더

    1996-1999년 세리에 A 87경기 30골. 1998년 UEFA컵을 들었다.

  • 녜르시 이슈트반Nyers István · 레프트 윙

    1948-1954년 세리에 A 182경기 133골. 1953년과 1954년 연속 우승의 골잡이다.

  • 레오폴도 콘티Leopoldo Conti · 라이트 윙

    1919-20시즌과 1922-1931년. 메아차의 첫 우승인 1929-30시즌을 함께했다.

  • 루이스 피구Luís Figo · 라이트 윙

    2005-2009년 세리에 A 105경기 9골. 밀라노에서 보낸 네 시즌 모두 스쿠데토로 끝났다.

  • 카를하인츠 루메니게Karl-Heinz Rummenigge · 세컨드 스트라이커

    1984-1987년 세리에 A 64경기 24골. 마테우스보다 네 해 먼저 뮌헨에서 왔다.

  • 루이지 체베니니Luigi Cevenini · 센터 포워드

    1912-1915년, 1919-1921년, 1922-1927년. 1919-20시즌 구단의 두 번째 우승을 이끈 초창기의 별이다.

  • 베니토 로렌치Benito Lorenzi · 센터 포워드

    1947-1958년 세리에 A 305경기 138골. 유소년에서 어린 마촐라를 돌본 사람이기도 하다.

  • 알레산드로 알토벨리Alessandro Altobelli · 센터 포워드

    1977-1988년 세리에 A 317경기 128골. 1980년 스쿠데토를 들었고 1982년 월드컵 결승에서 골을 넣었다.

  • 위르겐 클린스만Jürgen Klinsmann · 센터 포워드

    1989-1992년 세리에 A 95경기 34골. 1991년 UEFA컵을 들었다.

  • 크리스티안 비에리Christian Vieri · 센터 포워드

    1999-2005년 세리에 A 143경기 103골. 2022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 훌리오 크루스Julio Cruz · 센터 포워드

    2003-2009년 세리에 A 130경기 49골. 벤치에서 나와 경기를 뒤집던 아르헨티나의 공격수다.

  • 아드리아누Adriano · 센터 포워드

    2001-02시즌, 2004-2007년, 2008-09시즌. 황제라 불린 브라질의 왼발이다.

  •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Zlatan Ibrahimović · 센터 포워드

    2006-2009년 세리에 A 88경기 57골. 세 시즌 모두 우승했다.

  • 사뮈엘 에토Samuel Eto'o · 센터 포워드

    2009-2011년 세리에 A 67경기 33골. 트레블의 측면을 뛰었고 2021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 마우로 이카르디Mauro Icardi · 센터 포워드

    2013-2019년 세리에 A 188경기 111골. 세리에 A 득점왕을 두 번 했다.

기록을 확인한 곳

  1. 구단이 센 트로피와 명예의 전당 — Inter 「Honours」, 「Hall of Fame」. 트로피 수와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오른 스무 명의 이름.
  2. 구단이 적은 여덟 사람 — Inter Hall of Fame의 쳉가, 베르고미, 파케티, 사네티, 캄비아소, 마테우스, 마촐라, 메아차 소개. 출전과 득점, 별명의 유래, 선수가 한 말.
  3. 피키와 코르소 — Inter 「Throwback Thursday: Armando Picchi, Inter legend」, 「Mario Corso and Grande Inter」, 「Guarneri looks back on La Grande Inter」. 피키의 257경기와 마지막 경기, 신의 왼발이라는 말이 나온 날, 과르네리와 부르니치의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