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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e A
AC 밀란 문장

AC 밀란

Associazione Calcio Milan Società per Azioni
ASSOCIAZIONE CALCIO MILAN · I ROSSONERI 1899-2026

산 시로 · 세리에 A 우승 19회 · 유러피언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 7회 · 인터콘티넨털컵 3회

AC 밀란 역대 최고의 전설 열한 명과 후보 마흔여덟, 쉰아홉 개의 이름을 필자의 견해로 골랐다.

한 번도 퇴장한 적이 없는 팀

AC 밀란은 세계 축구사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 가운데 하나다. 1899년 12월 16일 잉글랜드 사람 허버트 킬핀(Herbert Kilpin; 잉글랜드 출신의 구단 창립자, 1870-1916)이 밀라노 비아 베르셰의 선술집 피아스케테리아 토스카나에서 문을 연 이 팀은, 한 해 반 뒤인 1901년 5월 5일 제노아를 3-0으로 꺾고 첫 이탈리아 챔피언이 됐다. 구단이 전하는 창립의 말은 이렇다. 우리는 악마의 팀이 될 것이고, 우리의 색은 불처럼 붉고 상대에게 두려움을 안길 만큼 검을 것이다. 그 뒤로 127년 동안 유럽 축구의 정점에서 ’권위’라는 낱말의 뜻을 정해 온 구단이 밀란이다.

수많은 시대가 흘렀고, 왕조가 무너지고, 영광이 사라진 후에도 AC 밀란은 단 한 번도 퇴장한 적이 없었다. 1963년 웸블리에서는 이탈리아 구단으로는 처음으로 유러피언컵을 들었고, 네레오 로코(Nereo Rocco; 이탈리아 감독, 1912-1979)에서 사키와 카펠로(Fabio Capello; 이탈리아 감독, 1946-), 안첼로티(Carlo Ancelotti)로 이어지는 벤치는 시대마다 축구를 보는 새로운 눈을 내놓았다. 1980년과 1982년 두 번이나 세리에 B로 떨어졌던 팀이 여섯 해 뒤에는 유럽의 꼭대기에 서 있었으니, 내려갔다가 돌아오는 일조차 이 구단은 남들과 다르게 했다. 그들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고, 경기장의 중심에서 가장 우아한 언어로 승리를 외쳐왔다.

세리에 A 우승 19회, 코파 이탈리아 5회,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Supercoppa italiana; 리그 우승 팀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 팀이 겨루는 대회) 8회, 유러피언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를 합쳐 7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2회, UEFA 슈퍼컵 5회, 인터콘티넨털컵 3회, FIFA 클럽 월드컵 1회, 코파 라티나 2회. 일곱 번의 유럽 정상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고, 구단은 2007년 12월부터 2014년 2월까지 FIFA가 인정하는 국제 대회 트로피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가진 팀이었다고 스스로 적는다.[1]

수십 년간 세계를 호령한 로소네리(Rossoneri; 붉고 검은 사람들)의 계보다. 축구가 제국의 은유가 되어 세계를 하나로 묶던 1900년대 초부터 오늘까지, 그 모든 순간을 관통해온 팀의 기념비적인 기록이다. 산 시로(San Siro)의 불빛 아래, 총 59인의 전설들을 조명해 보았다.

선정 전술 리드홀름이 이은 4-2-2-2

대형은 4-2-2-2다. 골문에 로시, 포백에 말디니와 코스타쿠르타와 바레시와 타소티를 세웠고, 그 앞을 레이카르트와 휠릿이 맡는다. 한 줄 위에서는 리드홀름과 리베라가 좌우로 벌려 서고, 맨 앞에는 노르달과 판바스턴이 나란히 선다.

이 열한 명 가운데 여덟은 실제로 같은 팀이었다. 로시와 포백 네 명,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온 세 사람은 1990년부터 1993년까지 한 라커룸을 썼다. 1991-92시즌 그 팀은 서른네 경기를 스물두 번 이기고 열두 번 비겨 한 번도 지지 않고 세리에 A를 우승했는데, 한 시즌을 한 리그로 치르기 시작한 1929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 해 뒤인 1993-94시즌에는 서른네 경기에서 열다섯 골만 내주고 우승했다. 넣은 골은 서른여섯에 그쳤고, 2위 유벤투스는 스물두 골을 더 넣고도 승점 3점이 모자랐다. 그 스쿠데토(scudetto; 세리에 A 우승 팀이 이듬해 가슴에 다는 작은 방패, 곧 리그 우승)는 수비가 든 것이나 다름없다. 그 두 시즌의 골문과 포백이 이 명단의 골문과 포백 그대로다.

1989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슈테아우아 부쿠레슈티를 4-0으로 이긴 유러피언컵 결승의 선발 명단을 옆에 놓아 보면 더 또렷하다. 타소티와 코스타쿠르타와 바레시와 말디니가 포백이었고, 레이카르트가 중원에, 휠릿과 판바스턴이 맨 앞에 섰다. 그날의 열한 명 가운데 일곱이 이 글의 열한 명이며, 안첼로티와 도나도니(Roberto Donadoni)는 후보 명단에 있다. 이 대형은 필자가 책상에서 짜기 전에 사키가 그라운드에서 먼저 짰다.

남은 셋은 시대가 다르다. 노르달과 리드홀름은 1949년부터 일곱 해를 함께 뛴 스웨덴 사람들이고, 리베라는 1960년부터 1979년까지 열아홉 시즌을 혼자 건너왔다. 그런데 이 셋과 앞의 여덟을 한 사람이 잇는다. 닐스 리드홀름이다.

리드홀름과 닿은 이름들
때무슨 일이 명단의 누구
1949년노르달의 권유로 그렌과 함께 밀라노에 온다노르달
1960-61시즌선수로서 마지막 시즌에 열일곱 살 신입과 한 팀에서 뛴다리베라
1978년 4월 23일감독으로 베로나 원정에 열일곱 살 수비수를 내보낸다바레시
1979년 5월감독으로 구단의 열 번째 스쿠데토를 든다. 주장의 마지막 시즌이었다리베라, 바레시
1985년 1월 20일우디네 원정 후반에 열여섯 살 소년을 들여보낸다말디니
1986년 8월 24일코파 이탈리아에서 스무 살 유소년 출신에게 첫 공식전을 준다코스타쿠르타

리드홀름이 밀란 벤치를 떠난 것은 1987년 4월이고, 그해 여름 휠릿과 판바스턴이 왔으며 이듬해 레이카르트가, 1990년에 로시가 왔다. 타소티는 1984년부터 세 시즌을 그의 오른쪽 풀백으로 뛰었다. 리드홀름을 뺀 열 명 가운데 여섯이 그를 동료나 감독으로 겪었고, 나머지 넷은 그가 1군에 올린 수비수들과 한 팀에서 뛰었다.

이 명단에는 삼총사가 둘 들어 있다. 스웨덴의 그레-노-리에서는 노르달과 리드홀름이 열한 명에 들었고 그렌(Gunnar Gren)은 후보 명단에 있다. 네덜란드의 세 사람은 통째로 들어왔다. 1988년 발롱도르의 시상대는 판바스턴과 휠릿과 레이카르트였고, 이듬해에는 판바스턴과 바레시와 레이카르트였다. 유럽 최고의 선수 셋을 두 해 연속으로 한 구단이 독차지한 일은 그 상의 역사에서도 흔치 않다.

1. 세바스티아노 로시 - 골키퍼

세바스티아노 로시 골키퍼 상세 정보 디자인

신전의 첫 번째 수호자다.

세리에 A 역사에서 가장 단단했던 팀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말디니와 코스타쿠르타와 바레시와 타소티가 서고 그 뒤를 세바스티아노 로시(Sebastiano Rossi; 이탈리아 골키퍼, 1964-)가 지키던 1990년대의 밀란이다. 고향 체세나의 유소년 팀에서는 훗날 밀란의 감독이 되는 아리고 사키(Arrigo Sacchi; 이탈리아 감독, 1946-) 밑에서 프리마베라 리그를 우승했다. 3부 리그의 포를리와 론디넬라를 임대로 돌며 골문을 익혔고 1990년 여름 밀라노로 왔다. 198cm의 키에 붙은 별명은 사람 승강기를 뜻하는 라셴소레(l’ascensore)였다.

그는 화려했던 4백 라인 앞에서 AC 밀란 수비 라인의 마지막 퍼즐이며, 무패 신화를 현실로 이끈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골문을 덮는 듯한 존재감에 누구보다 침착한 반사 신경이 얹혀 있었다. 1993-94시즌 그는 디노 초프가 갖고 있던 세리에 A 연속 무실점 기록 903분을 넘어 929분까지 골문을 잠갔다. 열 경기를 꼬박 치르고도 남는 시간이다. 기록이 멈춘 날은 1994년 2월 27일 산 시로의 포자전이었고, 이 숫자는 2016년 잔루이지 부폰이 974분으로 고쳐 쓰기까지 스물두 해를 버텼다.[5]

처음부터 주전은 아니었다. 안드레아 파찰리의 후보로 와서 한 해를 기다렸고, 1991년 파찰리가 볼로냐로 떠나면서 골문을 물려받았다. 1992-93시즌에는 젊은 프란체스코 안토니올리의 도전도 물리쳤다.

929분의 기록을 세운 그 시즌 끝에, 1994년 5월 아테네에서 밀란은 요한 크라위프(Hendrik Johannes Cruijff; 네덜란드 축구 선수·감독, 1947-2016)의 바르셀로나를 4-0으로 눌렀다. 바레시와 코스타쿠르타가 징계로 빠진 결승이었으니, 주전 센터백 둘 없이 치른 그 밤의 무실점은 골키퍼의 몫이 컸다. 로시가 밀란에서 든 스쿠데토는 다섯 번이며 1992년부터 세 시즌을 내리 들었다.

성격은 골문만큼 조용하지 않았다. 1999년 1월 페루자전에서 나카타 히데토시에게 페널티킥을 내준 직후, 공을 주우러 골문 안으로 들어온 상대 선수를 팔로 쳐 쓰러뜨렸다. 출전 정지를 받은 그의 자리에 스물한 살의 크리스티안 아비아티가 들어갔고 밀란은 그 시즌 우승했다. 그 뒤로 로시는 벤치와 골문을 오갔고, 2000년 봄에는 감독 알베르토 차케로니(Alberto Zaccheroni;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53-)와 크게 다투기도 했다. 1997년 마시모 타이비가 왔을 때도 그는 전반기를 벤치에서 보내고 후반기에 골문을 되찾았다. 지다(Dida)가 온 뒤로는 세 번째 골키퍼까지 밀렸다가 시즌 막판에 다시 장갑을 꼈고, 2002년 페루자로 떠났다. 밀려나도 끝내 돌아오는 것이 이 골키퍼의 방식이었으며, 그렇게 열두 시즌을 머물렀다. 이만한 트로피를 들고도 이탈리아 대표팀 경기는 한 번도 뛰지 못했다. 1994년 10월 대표팀 감독 사키가 에스토니아전을 앞두고 그를 불렀는데, 밀란의 골키퍼가 대표팀에 불려 간 것이 1961년 이후 처음이었다. 그때도 골문에 서지는 못했다. 장갑을 벗은 뒤에는 밀란의 유소년 골키퍼들을 가르쳤고, 2022년부터는 고향 체세나에서 골키퍼 부문을 맡았다.

2.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 센터백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달콤했던 신사, 빌리(Billy).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Alessandro Costacurta; 이탈리아 수비수, 1966-)는 팀 동료였던 파올로 말디니와 프랑코 바레시에 가려진 면이 있고, 한국 축구 팬들에게는 알레산드로 네스타(Alessandro Nesta), 야프 스탐(!!!)에게 밀리는 인지도를 갖고 있으나 AC 밀란만 놓고 본다면 구단 역사상 가장 오래, 가장 꾸준하게 중앙을 지킨 수비수다. 심지어 레프트백도 소화 가능하며, 라이트백까지 소화할 수 있다.

바레세 근교 예라고 콘 오라고에서 태어나 밀란 유소년에서 자랐다. 1986년 8월 코파 이탈리아에서 첫 공식전을 치른 뒤 세리에 C1의 몬차로 한 해 임대를 다녀왔고, 1987년 10월 25일 베로나 원정에서 세리에 A에 데뷔했다. 결승골은 피에트로 파올로 비르디스가 넣었다. 그 시즌에는 필리포 갈리(Filippo Galli; 이탈리아 수비수, 1963-)에게 막혀 리그 일곱 경기에 그쳤지만, 구단은 그가 아리고 사키 아래에서 바레시의 옆이라는 제자리를 찾았다고 적는다.[1] 이탈리아에서 붙은 또 하나의 별명이 영혼의 떨림이었으니, 조용한 수비수에게 사람들이 무엇을 봤는지 짐작이 간다.

미리 읽고 들어가는 슬라이딩 태클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일대일 수비가 그의 것이었다. 가장 적은 동작으로 가장 큰 결과를 끌어내는 움직임에는 수학의 방정식 같은 수비 공식이 있었다. 그가 존재하는 수비 라인은 팀을 넘어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에서도 질서정연했고, 위험은 사전에 차단되기 일쑤였다. 대표팀에는 1991년에 처음 불려 가 1998년 프랑스 월드컵까지 부동의 주전으로 쉰아홉 경기를 뛰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는 경험과 위치 선정, 한발 앞선 예측에 기대어 뛰었고, 그러면서도 젊고 유망한 수비수들의 자리를 번번이 빼앗았다. 2001년 안첼로티가 부임한 뒤로는 풀백으로 서는 날도 늘었다.

그와 바레시, 타소티, 말디니가 이룬 수비는 사키 시절에는 불멸의 팀으로, 카펠로 시절에는 무적의 팀으로 불렸다. 넷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남은 사람이 그였고, 마흔하나의 그를 벤치에서 지휘한 감독은 옛 동료 안첼로티였다.

스물한 시즌 동안 공식전 663경기를 뛰었다. 세리에 A 우승이 일곱 번이고, 유러피언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 1989년, 1990년, 1994년, 2003년, 2007년 다섯 번이다. 다만 운이 따르지 않은 밤도 있었다. 1994년 아테네 결승에는 징계로 서지 못했고, 같은 해 여름 월드컵 결승도 같은 이유로 관중석에서 봤다. 불가리아와의 준결승에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를 막다 받은 경고 한 장 때문이었으니, 석 달이 채 안 되는 사이에 결승 둘을 놓쳤다. 그가 실제로 선 결승 가운데는 진 밤도 있어서, 1993년 뮌헨에서는 마르세유에, 1995년 빈에서는 아약스에 졌다.

마지막 경기는 2007년 5월 19일 산 시로의 우디네세전이다. 그는 그날 페널티킥을 넣었고, 마흔한 살의 그 골로 당시 세리에 A에서 가장 나이 많은 득점자가 됐다. 663경기에서 그가 넣은 골은 셋뿐이고 그 마지막이 이 골이다. 이듬해에는 안첼로티의 벤치에서 타소티와 나란히 코치로 앉았다. 밀란을 밀란답게 만든 퍼즐이 떠나는 방식으로는 그만한 것이 없었다.

3. 프랑코 바레시 - 센터백

프랑코 바레시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출생일은 코스타쿠르타의 것이다. 바레시는 1960년 5월 8일 브레시아 근교 트라발리아토에서 태어났다. 출전 수는 예전 구단 집계가 716경기, 지금 통용되는 집계가 719경기다. 한글 표기는 바레시로 적는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센터백 순위 4위. 베켄바워에 비견되는 황제, 카이저 프란츠(Kaiser Franz).

프랑코 바레시(Franchino Baresi; 이탈리아 수비수, 1960-2026)는 2026년 7월 31일 밀라노 남쪽 로차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예순여섯이었다. 구단은 부고의 제목을 「프랑코 바레시, 영원히」라고 달고 그를 세기의 로소네로라 불렀다. 마지막으로 사람들 앞에 선 것은 그해 겨울 산 시로에서 열린 밀라노 동계 올림픽 개막식이었다.[6] 필자가 이 명단을 처음 짤 때 그는 구단의 얼굴로 살아 있었고, 지금은 6번이라는 숫자로 남았다.

열네 살이던 1974년 8월 밀라넬로에 들어왔다. 먼저 문을 두드린 곳은 인테르였으나 거기서는 받아 주지 않았고, 형 주세페만 인테르에 남았다. 구단이 그에게 들인 돈은 150만 리라였고 첫 월급은 2만 리라였다. 1978년 4월 23일 리드홀름이 베로나 원정에 내보낸 열일곱 살 수비수는 그날부터 스무 시즌 동안 한 번도 다른 셔츠를 입지 않았다. 데뷔전 이튿날 신문이 그에게 매긴 평점은 7이었는데, 같은 경기의 리베라와 같은 숫자였다. 리드홀름 아래에서 그는 지역 방어의 원리를 익혔고, 마지막 수비수라는 자리를 가장 잘 해석하는 선수가 되어 갔다. 동료들은 체구가 작다고 그를 꼬마라는 뜻의 피시닌(Piscinìn)이라 불렀다.

스물둘에 주장이 됐다. 구단이 승부조작 사건과 성적 부진으로 두 번이나 세리에 B로 내려갔을 때 다른 팀들의 제안이 쏟아졌지만 그는 완장을 찬 채 2부 리그를 뛰었다. 훗날 팬들이 그를 향해 건 현수막에는 우리 곁에 남아 달라는 한 줄이 적혀 있었다.[3]

밀란 한 구단에서만 스무 시즌, 공식전 719경기 33골이다. 세리에 A 우승 여섯 번과 유러피언컵,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세 번이 그의 완장 아래에서 나왔다. 그가 축구장을 누빌 때, 그 어떤 공격수도 그의 눈빛을 외면하지 못했다. 전 세계의 일류 공격수가 가장 많이 모였다는 그 시절 세리에 A에서 바레시를 이긴 공격수가 없었다. 1989년 발롱도르에서는 판바스턴에 이어 2위에 올랐는데, 3위가 레이카르트였으니 그해 시상대는 통째로 밀란의 것이었다.

인테르의 주세페 베르고미? 유벤투스의 가에타노 시레아? 모두 프랑코 바레시 앞에서 정리되었다. 그가 서독의 베켄바워, 칠레의 엘리아스 피게로아, 잉글랜드의 바비 무어, 아르헨티나의 다니엘 파사레야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사실만으로 더 보탤 말이 없다.

사키와의 관계는 따로 적을 만하다. 파르마에서 온 새 감독은 선수들을 앉혀 놓고 자기 팀의 경기 비디오를 몇 시간씩 틀었고, 주장이던 바레시는 처음에 그 방식과 부딪쳤다. 그러다 그 감독의 수비 라인을 그라운드에서 지휘하는 사람이 됐다. 한 손을 들어 라인을 끌어올리던 그의 동작이 곧 사키의 축구였다.

대표팀에서는 여든한 경기를 뛰었고 그 가운데 서른한 경기가 주장이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의 우승 메달은 시레아의 후보로 한 경기도 뛰지 않고 받았다. 골은 1988년 2월 바리에서 소련을 상대로 넣은 한 골이 전부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은 그를 설명하는 가장 짧은 이야기다. 6월 23일 노르웨이전에서 무릎 반월판을 다쳐 맨해튼에서 수술을 받았고, 스물다섯 날 뒤인 7월 17일 패서디나의 결승에 선발로 나섰다. 그날의 그에게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La Gazzetta dello Sport; 밀라노에서 내는 이탈리아 스포츠 일간지)는 평점 9를 줬다. 승부차기의 첫 번째 키커로 나선 그의 공은 크로스바 위로 떴고, 경기가 끝나자 그는 울었다.

1997년 6월 1일 칼리아리전이 마지막이었다. 그해 10월 28일 산 시로에서는 「영원한 6번」이라는 이름의 고별 경기가 열렸다. 유니폼을 벗은 뒤에는 구단 부회장과 유소년 총괄을 맡았고, 2000년 이탈리아 선수 협회는 그를 세기의 선수로 뽑았다. 구단은 6번을 영구 결번으로 올렸고, 2024년 10월 문을 연 명예의 전당의 첫 헌액자로 그를 세웠다.[2] 2026-27시즌 밀란의 모든 팀은 왼쪽 소매에 「영원한 6번」이라는 패치를 달고 뛴다. 그가 700경기 넘게 완장을 찼던 바로 그 팔이고, 글자는 팬들이 남긴 추모의 글에서 한 자씩 따 왔다. 1군은 8월 23일 토리노 원정에서 처음 그 유니폼을 입었다.[6] AC 밀란의 영원한 아버지다.

4. 파올로 말디니 - 레프트백

파올로 말디니 레프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구단이 적는 공식전 출전은 902경기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레프트백 순위 1위.

필자가 인테르의 자친토 파케티, 브라질의 니우통 산투스와 호베르투 카를루스보다 위에, 역대 레프트백 계보의 맨 앞에 헌정했던 이름이 파올로 말디니(Paolo Cesare Maldini; 이탈리아 수비수, 1968-)다. 이름만으로 축구의 품격을 뜻하게 된 사내는 스물다섯 해 동안 한 번도 팀을 바꾸지 않았다.

아버지 체사레 말디니는 1963년 웸블리에서 밀란의 첫 유러피언컵을 주장으로 들어 올린 사람이다. 아들의 첫 경기는 1985년 1월 20일 우디네 원정이었다. 열여섯 살의 그는 14번을 달고 벤치에 앉아 있다가 세르조 바티스티니가 다치자 후반에 오른쪽 풀백으로 들어갔고, 경기 뒤 리드홀름은 파올로에게 큰 앞날이 있다고 말했다.[3] 이듬해부터 그는 왼쪽으로 옮겼다. 오른발잡이가 왼쪽 터치라인에서 세계 최고가 된 사연의 시작이다.

말디니의 수비는 마라도나와 호나우두를 지워 버리는 예술이었다. 태클은 마지막 수단으로 아껴 뒀다. 열 살에 구단 유소년에 들어왔으니 밀란에서 보낸 세월은 서른한 시즌이다. 세리에 A 첫 골은 1987년 1월 4일 코모 원정에서 넣었고, 이탈리아에서 붙은 별명은 용의 심장이었다. 말디니를 통해 팬들은 레프트백이라는 포지션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축구가 아름다울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자각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축구 팬들에게는 파케티 이후에 나타난 기적과도 같은 수비수였다.

공식전 902경기 33골로 구단 역대 최다 출전이다. 세리에 A 우승 일곱 번에 유러피언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다섯 번을 들었으며, 그 대회 결승에 여덟 번 나선 기록은 레알 마드리드의 파코 헨토와 함께 역대 최다다. 발롱도르 순위권에 든 해가 열세 번이고 1994년과 2003년에는 3위였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126경기를 뛰었고 그 가운데 74경기가 주장이었다. FIFA가 2002년에 뽑은 월드컵 역대 드림팀의 열한 명에도 그의 이름이 있다.

1994년 아테네 결승에서는 바레시와 코스타쿠르타가 빠진 중앙 수비를 그가 메웠다. 왼쪽 풀백이 센터백으로 서서 바르셀로나의 호마리우(Romário de Souza Faria; 브라질의 공격수, 1966-)를 지운 밤이다. 1997년 바레시에게서 완장을 물려받았다. 정점은 2003년 5월 28일 맨체스터 올드 트래퍼드의 밤이다. 아버지가 웸블리에서 컵을 든 지 꼭 마흔 해 만에 아들이 같은 트로피를 주장으로 들었다. 2005년 이스탄불 결승에서는 경기 시작 1분이 채 되기 전에 골을 넣고도 졌고, 두 해 뒤 아테네에서 같은 상대에게 갚았다. 그때 그는 서른여덟이었다.

마흔까지 현역이었다. 산 시로에서의 마지막은 2009년 5월 24일 로마전이었다. 그날 밀란 선수들은 그의 얼굴과 「오직 너만의 3번」이라는 문구를 새긴 패치를 가슴에 달고 나왔다. 마지막 경기는 일주일 뒤인 5월 31일 피렌체 원정이며, 구단은 3번을 영구 결번으로 정했다. 다만 그의 아들이 1군에 올라오면 그 번호를 다시 꺼낼 수 있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둘째 다니엘이 2020년 밀란에서 데뷔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은 세 번째 말디니가 됐다. 이 숫자들은 그가 어떤 수비수였는지보다 어떤 인격이었는지를 말해 준다. 그는 뛰면서 상대방의 방향을 바꾸는 수비를 시도했고, 경기장 밖에서는 가장 고요한 언어로 팬들의 찬사를 이끌기도 하였었다. 2018년에는 구단 임원으로 돌아와 다섯 해 동안 선수단을 짰고, 2022년의 스쿠데토가 그 시절에 나왔다.

5. 마우로 타소티 - 라이트백

마우로 타소티 라이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지금 통용되는 집계로 공식전 출전은 583경기다.

너무 영리했고 너무 공격적이었던 사내, 이탈리아의 자우마 산투스.

너무 영리했고 너무 공격적이었지만 그게 굉장히 실속 있었던 오른쪽 풀백이 마우로 타소티(Mauro Tassotti; 이탈리아 수비수, 1960-)다. 오죽하면 당시 매체들이 “새로운 자우마 산투스가 나타났다!!“라고 찬사를 보냈을까. 팬들이 붙인 다른 별명은 교수였다.

로마에서 태어나 라치오 유소년에서 컸다. 세리에 A 첫 경기는 열여덟이던 1978년 11월 5일 아스콜리 원정이었고, 스무 살이던 1980년 여름 밀란으로 왔다. 하필 구단이 승부조작 사건으로 세리에 B에 떨어진 해였다. 그는 훗날 밀라노에 올 때의 자신을 못생기고 거칠고 실력도 모자란 선수였다고 돌아보며, 못생긴 것은 그대로 남았으되 밀란이 사람으로도 선수로도 자신을 바꿔 놓았다고 했다.[3] 2부 리그를 두 번 겪으며 거칠던 수비수는 오프사이드 함정을 가장 잘 다루는 풀백이 되어 갔다.

1980년부터 1997년까지 로소네리의 붉고 검은 줄무늬를 입고 밀라노를 누빈 그는 빠른 발과 좁은 공간의 드리블, 호쾌한 중거리 슛으로 이탈리아 무대를 휘어잡았다. 정확하고 날카로운 크로스가 있었고, 수비에 가담한 뒤 곧바로 오버래핑으로 이어 가는 두 번째 공격은 가히 박수를 부를 정도였다. 한창때는 유럽의 큰 구단들이 수없이 문을 두드렸으나 그는 밀라노에 남았다. 그의 앞에 서는 오른쪽 날개는 안젤로 콜롬보에서 로베르토 도나도니로, 다시 스테파노 에라니오(Stefano Eranio; 이탈리아 미드필더, 1966-)와 잔루이지 렌티니로 바뀌었지만 뒤에서 주고 돌아 뛰는 사람은 열일곱 해 동안 한 사람이었다.

미친 중거리 골

열일곱 시즌 동안 공식전 583경기 10골을 남겼다. 밀란에서 처음 든 트로피는 2부 리그 팀으로 나가 우승한 1982년의 미트로파컵이었다. 세리에 A 우승 다섯 번, 유러피언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세 번이다. 부주장이던 그는 1994년 아테네 결승에서 징계로 빠진 바레시를 대신해 완장을 찼고, 4-0으로 끝난 그 밤의 트로피를 그가 들었다. 그래도 그가 가장 벅차게 떠올리는 장면은 따로 있다고 한다. 1988년 5월 첫 스쿠데토를 확정하고 코모에서 돌아오던 밤이다. 길 양쪽에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고 산 시로에는 8만 명이 깃발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3]

대표팀의 문은 늦게 열렸다. 서른두 살에 처음 불려 갔고, 1994년 월드컵 8강 스페인전에서 루이스 엔리케(Luis Enrique Martínez García; 스페인 미드필더·감독, 1970-)의 얼굴을 팔꿈치로 쳐 여덟 경기 출전 정지를 받으면서 일곱 경기로 끝났다. 그해 11월 그는 인터뷰에서 공개로 사과했고 루이스 엔리케는 받아들였다. 1997년 6월 1일 칼리아리전은 타소티의 마지막 경기이기도 하다. 바레시와 같은 날 같은 경기에서 유니폼을 벗었다. 그 뒤로는 구단 프리마베라 팀을 맡아 비아레조 대회를 두 번 우승했고, 2001년 3월에는 체사레 말디니와 함께 1군 벤치를 잠시 넘겨받았다. 이듬해부터는 안첼로티의 수석 코치로 2003년과 2007년의 유럽 정상을 벤치에서 다시 겪었으며, 감독이 레오나르두와 알레그리, 세이도르프(Clarence Seedorf)와 인차기(Filippo Inzaghi)로 바뀌는 동안에도 2015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선수로 열일곱 해, 지도자로 열여덟 해다.

6. 프랑크 레이카르트 - 수비형 미드필더

프랑크 레이카르트 수비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그가 밀란에서 든 세리에 A 우승 두 번은 1991-92시즌과 1992-93시즌이다. 1993년 5월 30일 브레시아전이 밀란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수비형 미드필더 순위 1위.

그는 중원을 통제했고 중원은 그에게 복종했다. 프랑크 레이카르트(Franklin Edmundo Rijkaard; 네덜란드 미드필더, 1962-)는 중원에서의 운동 능력과 수비 감각, 공간을 장악하는 힘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의한 선수이며, 21세기의 로드리가 언젠가는 넘어야 할 겁나 큰 산(山)이기도 하다.

1988-89시즌부터 세리에 A는 한 팀의 외국인 선수를 셋까지 허용했다. 휠릿과 판바스턴 다음의 세 번째 자리를 두고 구단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당시 AC 밀란 구단주, 1936-2023)는 아르헨티나의 클라우디오 보르기를 원했고, 사키는 레이카르트를 고집했다. 감독이 이겼다. 레알 사라고사에서 건너온 그는 1988년 8월 21일 코파 이탈리아에서 첫 경기를 치렀다. 붉고 검은 셔츠가 처음은 아니었다. 한 해 전인 1987년 6월 밀라노에서 열린 초청 대회에 아약스 소속이던 그가 임대 선수로 밀란 유니폼을 입고 포르투전에 나선 적이 있다. 세리에 A 첫 경기는 1988년 10월 9일 피오렌티나를 4-0으로 이긴 날이다. 네덜란드 대표팀에는 열여덟이던 1981년 9월 1일 스위스전에서 데뷔해 일흔세 경기를 뛰었고, 마지막은 1994년 7월 9일 월드컵 8강 브라질전이다.

수리남에 뿌리를 둔 암스테르담 사람으로, 1979년 레오 베인하커르의 아약스에 들어가 곧장 기둥이 됐다. 수비형 미드필더였고, 센터백으로도 뛰었으며, 때로는 상대 문전까지 올라갔다. 필요하면 골도 넣었다. 프랑크 레이카르트는 운동 능력이 최강이었다!! << 이 표현은 매우 부족하다. 그의 플레이는 표현을 넘어섰으니 말이다. 힘과 민첩성의 조화, 일대일에서 밀리지 않는 균형, 양발의 킥과 롱패스, 그리고 무심한 얼굴로 90분 내내 그라운드를 휘젓는 통제력이 한 몸에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그를 허리케인 프랭클린이라 불렀다. 같은 중원의 휠릿에게도 귀감이 되는 플레이였다. 그는 미드필더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표현했다.

팀을 빅 이어로 이끄는 골

1989-90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벤피카를 상대로 결승골을 꽂아 넣던 장면을 기억해 보라. 빈의 프라터 경기장에서 판바스턴이 찔러 준 공을 받아 넣은 그 한 골로 밀란은 유럽 2연패를 했다. 한 해 전 준결승에서는 레알 마드리드를 5-0으로 무너뜨린 밤에 골을 보탰고, 1990년 12월 도쿄의 인터콘티넨털컵 결승에서는 올림피아를 상대로 두 골을 넣었다.[1]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덜 화려했으되 큰 경기의 골은 그가 가장 많이 넣었다. 밀라노에서는 그를 결승전의 사나이라고도 했다. 1988년 여름 서독에서 세 사람은 오라녀의 유니폼으로 유럽 챔피언이 됐고, 그 여름 끝에 레이카르트가 두 동료를 따라 밀라노로 왔다. 다섯 시즌 동안 공식전 201경기 26골이다. 유러피언컵 두 번에 세리에 A 두 번을 들었고 다섯 해에 든 트로피가 모두 열 개이며, 발롱도르에서는 1988년과 1989년 두 해 연속 3위였다. 흠도 밀라노에 남겼다. 1990년 6월 산 시로에서 열린 월드컵 16강 서독전에서 루디 푈러에게 침을 뱉고 함께 퇴장당했고, 훗날 푈러에게 사과했다. 구단의 옛 소개 글은 그가 늘 약한 쪽에서 친구를 찾았고 밀란에서는 수비수 필리포 갈리와 가장 가까웠다고 적는다.[9] 1993년 여름 그는 아약스로 돌아갔고, 두 해 뒤 같은 빈의 결승에서 옛 팀 밀란을 1-0으로 꺾었다. 결승골을 넣은 파트릭 클라위버르트(Patrick Stephan Kluivert; 네덜란드 축구 선수·지도자, 1976-)에게 공을 내준 사람이 레이카르트였고, 그는 며칠 뒤 선수 생활을 마쳤다.

7. 뤼트 휠릿 - 중앙 미드필더

뤼트 휠릿 중앙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그가 밀란에서 든 세리에 A 우승 세 번은 1987-88시즌, 1991-92시즌, 1992-93시즌이다. 1993년 유러피언컵 결승에는 나서지 않았다. 한글 표기는 휠릿으로 적는다.

멀티 포지션의 귀재(鬼才), 검은 튤립(De Zwarte Tulp).

한 자리에 묶이지 않았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곧 포지션으로 만들던 미드필더가 뤼트 휠릿(Ruud Gullit; 네덜란드 미드필더, 1962-)이다. 그의 플레이는 에너지였으며, 그 에너지는 경기의 결을 바꾸는 파동과 같았다.

체격은 센터백이고 속도는 윙어이며 드리블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는데, 시야는 레지스타(regista)의 것이었다. 구단은 그가 스위퍼로 출발해 점점 앞으로 올라가 세계 최고의 공격수 가운데 하나가 됐다고 적는다.[1] 윙과 중앙 미드필더와 공격형 미드필더는 물론이고 스트라이커로 나서도 두각을 보였다. 압박과 전진 드리블, 공중볼 경합, 수비 가담까지 그 시절 기준으로는 한 사람에게 맡길 수 없던 임무들을 혼자 해냈고, 사키가 나폴리의 마라도나를 막으려고 짠 계획의 한가운데에도 그가 있었다.

암스테르담의 아마추어 팀에서 공을 차기 시작해 하를럼, 페예노르트, PSV 에인트호번을 거쳤다. 열여섯에는 아약스의 입단 시험에서 떨어진 소년이었다. 100m를 11초에 끊는 발과 그 큰 걸음으로 리베로에서 공격수로 자리를 옮겨 갔다. 베를루스코니는 바르셀로나의 감페르 트로피에서 PSV 에인트호번의 리베로로 뛰는 그를 보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오라고 했고, 1987년 여름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인 130억 리라를 치렀다. 8월 23일 코파 이탈리아 바리전에서 판바스턴과 같은 날 데뷔했다. 기자 잔니 브레라(Gianni Brera; 이탈리아 체육 기자, 1919-1992)는 그 머리를 보고 사자의 이름인 심바를 별명으로 붙였다. 그해 겨울 발롱도르를 받은 그는 상을 남아프리카의 감옥에 있던 넬슨 만델라에게 바쳤다. 레게 머리를 땋은 수리남계 네덜란드 사람이 이탈리아 전역에 불러일으킨 열기를 사람들은 굴리트마니아(Gullitmania)라 불렀고, 그 인기는 마라도나와 맞설 만했다.

첫 시즌에 밀란은 아홉 해 만의 스쿠데토를 들었다. 1989년 바르셀로나의 캄 노우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결승에서는 슈테아우아 부쿠레슈티를 4-0으로 눌렀는데, 네 골을 휠릿과 판바스턴이 둘씩 나눠 넣었다. 첫 골과 세 번째 골이 휠릿의 것이다. 오라녀의 주장으로 UEFA 유로 1988을 든 지 한 해 만의 일이다. 그 대표팀에 처음 선 날은 열아홉 번째 생일이던 1981년 9월 1일이고, 후반에 그와 교대해 들어온 열여덟 살이 레이카르트였다.

공중에서도 그를 이길 수비수가 드물었다. 코너킥이 올라오면 마크를 떼어 내고 솟구쳐 머리로 꽂는 골이 그의 서명 같은 장면이었다. 네덜란드 대표팀에서는 예순여섯 경기에 열일곱 골을 넣었다. 일곱 시즌에 걸쳐 공식전 171경기 56골. 무릎이 성하던 날이 많지 않았던 선수의 숫자다. 1993년 삼프도리아로 떠났다가 이듬해 잠깐 돌아왔고, 1994년 10월 30일 유벤투스 원정을 끝으로 다시 제노바로 갔다. 2026년 4월 구단은 팬 투표로 그를 명예의 전당에 올렸고, 미드필더 부문의 첫 트로피를 4월 26일 산 시로의 유벤투스전에 앞서 그에게 건네기로 했다.[2]

그는 골을 넣을 때마다 두 팔을 뻗고 달렸다. 그렇다, 축구 역사상 가장 자유로웠던 존재였다.

8. 닐스 리드홀름 - 공격형 미드필더

닐스 리드홀름 공격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1958년 발롱도르 수상자는 레몽 코파다. 리드홀름은 그해 투표에서 6점으로 공동 8위였다.

삼총사의 기점, 남작(Il Barone).

군나르 노르달, 군나르 그렌과 함께 그레-노-리(Gre-No-Li) 삼총사를 이뤄 스웨덴 대표팀과 밀란의 화양연화(花樣年華)를 이끈 지성의 미드필더가 닐스 리드홀름(Nils Erik Liedholm; 스웨덴 미드필더, 1922-2007)이다. 셋은 1948년 런던 올림픽 금메달의 주역이었고, 먼저 밀라노에 와 있던 노르달이 이듬해 두 친구를 불렀다. 리드홀름은 IFK 노르셰핑에서 스웨덴 리그를 두 번 우승하고 오는 길이었다. 프로가 된 뒤로는 대표팀에 부르지 않던 나라의 규정 탓에 스웨덴 유니폼은 스물세 경기밖에 입지 못했다.

밀란이라는 팀이 힘과 전술 너머의 고결한 정신을 갖도록 만든 첫 번째 지성인이다. 중장거리 패스의 정확도가 당대 최고였고 공중볼과 전진 패스, 시야와 위치 선정이 모두 일류였다. 스웨덴식의 침착함으로 경기의 분위기를 통째로 뒤집어 놓곤 했으며, 밀란의 체계를 짠 사람도 그였다. 어린 시절의 꿈은 농부였다고 한다. 그 침착함은 벤치를 향할 때도 같았다. 감독이 위치를 바꾸라고 지시하자 그는 경기장 밖은 감독이 지휘하지만 안에서는 주장인 자신이 지휘한다고 태연하게 받았다.[4] 저널리스트 잔니 브레라는 지치지 않는 그에게 장거리 주자 자토페크의 이름을 붙였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흔히 10년 동안 훈련장에서 찬 슛이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다는 식으로 전해지지만, 본인과 구단이 전하는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밀란에서 두어 시즌을 뛴 어느 날 그가 패스 하나를 잘못 보냈고, 산 시로의 관중이 5분 동안 손뼉을 쳤다. 그의 실수가 그만큼 드문 구경거리였기 때문이다. 리드홀름은 훗날 워낙 새로운 일이어서 자신의 실수가 환호로 강조됐다고 돌아봤다.[4]

삼총사 안에서 그의 자리는 왼쪽 안쪽이었고 오른쪽 안쪽에는 교수라 불리던 그렌이 섰다. 셋 가운데 가장 오래 남은 사람도 그다. 1949년 9월 11일 삼프도리아 원정에서 데뷔해 열두 시즌 동안 공식전 394경기 89골을 남겼다. 1950-51시즌의 스쿠데토는 밀란이 마흔네 해 만에 되찾은 우승이고, 그는 1955년과 1957년, 1959년에도 그 컵을 들었다. 1958년에는 서른다섯의 주장으로 두 개의 결승을 치렀다. 5월 브뤼셀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에 연장 끝에 2-3으로 졌고, 6월 스톡홀름 근교 솔나의 월드컵 결승에서는 경기 시작 4분 만에 선제골을 넣고도 브라질에 2-5로 졌다.

선수로 서른여덟까지 뛰고는 지도자 과정을 밟아 구단 유소년부터 맡았다. 1964년 3월 루이스 카르닐리아의 뒤를 이어 처음 1군 벤치에 앉았고 그 시즌을 3위로 마쳤다. 그라운드에서는 순수한 지역 방어를, 밖에서는 포도밭을 사랑한 사람이다. 밀란 벤치에 세 번 앉았고, 1979년에는 구단의 열 번째 스쿠데토로 유니폼에 별을 달아 줬다. 바레시와 말디니를 1군에 처음 내보낸 감독이 그라는 것은 앞의 표에 적은 대로다. 로마에서도 1983년에 스쿠데토를 들었으니 감독으로도 한 시대를 가졌다. 구단이 역대 가장 위대한 로소네리를 뽑았을 때 그는 바레시와 리베라 다음인 세 번째였다. 2007년 11월 5일 피에몬테의 쿠카로 몬페라토에서 눈을 감았다.

9. 잔니 리베라 - 공격형 미드필더

잔니 리베라 공격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공격형 미드필더 순위 7위. 황금빛의 소년, 골든 보이.

AC 밀란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이자 밀라노 역사상 가장 황홀했던 아이돌이 잔니 리베라(Giovanni Rivera; 이탈리아 미드필더, 1943-)다. 꽃과 황금을 닮았던 미소년은 산드로 마촐라(Alessandro Mazzola; 이탈리아 미드필더, 1942-2026)의 영원한 맞수였고 산 시로의 황금 심장이었으니, AC 밀란 그 자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알레산드리아 근교에서 태어나 고향 팀에서 세리에 A에 데뷔했다. 1959년 6월 2일 인테르와 1-1로 비긴 경기였고 그는 열다섯이었다. 이듬해 산 시로 원정에서 알레산드리아가 졌을 때 한 골을 만회한 것도 이 소년이었다. 밀란은 선수 셋에 6천만 리라를 얹어 그를 데려왔다. 감독 로코는 몸을 불리도록 파도바에 한 해 임대를 보내자고 했으나 단장 주세페 비아니(Giuseppe Viani; 이탈리아 감독·당시 AC 밀란 기술 이사, 1909-1969)가 버텼다고 한다.[3] 1960년 열일곱의 나이로 밀란에 왔다. 첫 공식전부터 공교롭다. 9월 18일 코파 이탈리아의 상대가 바로 그 알레산드리아였고 밀란이 5-3으로 이겼다. 입단 첫해 그의 곁에는 선수 생활의 마지막 시즌을 보내던 리드홀름이 있었다.

그가 공을 잡는 순간 경기의 박자가 바뀌었다. 두 번째 시즌에 스쿠데토를 들었고, 이듬해인 1963년 웸블리에서는 벤피카를 상대로 주제 아우타피니(José Altafini)의 골을 만들어 주며 밀란에 첫 유러피언컵을 안겼다. 최고의 밤은 1969년 마드리드다. 리뉘스 미헐스(Marinus Jacobus Hendricus Michels; 네덜란드 축구 선수·감독, 1928-2005)가 이끌고 요한 크라위프가 버티던 아약스를 4-1로 갈기갈기 찢어 버린 그 결승에서 피에리노 프라티(Pierino Prati)가 해트트릭을 했는데, 뒤꿈치로 내준 공과 골키퍼를 끌어내고 머리 위로 올려 준 공이 모두 리베라의 발에서 나왔다. 그해 겨울 그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선수로는 처음으로 발롱도르를 받았다.

기록은 그를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적어 두자면 이렇다. 밀란에서 열아홉 시즌, 공식전 658경기 164골. 세리에 A 우승 세 번, 유러피언컵 두 번,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두 번, 코파 이탈리아 네 번에 인터콘티넨털컵 한 번이다. 미드필더이면서 1972-73시즌에는 열일곱 골로 세리에 A 득점왕까지 했다. 밀란 유니폼을 입고 치른 세리에 A 첫 경기는 1960년 9월 25일 카타니아전이었다. 대표팀에는 열여덟이던 1962년 5월에 데뷔해 예순 경기에 열네 골을 넣었다. UEFA 유로 1968을 들었고,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준결승에서 서독을 4-3으로 꺾은 연장 결승골의 주인이었다. 감독 페루초 발카레지(Ferruccio Valcareggi; 이탈리아 감독, 1919-2005)는 그 대회 내내 그와 마촐라를 전반과 후반에 번갈아 썼고, 브라질과의 결승에서 리베라에게 준 시간은 마지막 6분이었다.

몸이 가늘다고 브레라는 그를 작은 수도원장이라는 뜻의 아바티노(l’Abatino)라고 놀렸다. 그 가는 몸으로 서른다섯까지 정상에서 뛰었으니 별명이 틀렸다. 등번호 10번은 밀라노의 정체성이 됐고, 그는 마촐라와 함께 이탈리아의 10번 전성기를 양분했다. 크라위프와 베켄바워, 메시와 호날두만큼이나 유명한 리베라와 마촐라의 맞수 관계는 아름다움과 냉철함이라는 두 낱말로 요약되곤 한다.

고분고분한 스타는 못 됐다. 심판 콘체토 로 벨로와 벌인 설전은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그는 그 값을 몇 달의 출전 정지로 치렀다. 자신을 토리노에 팔려던 회장 알비노 부티키(Albino Buticchi; 이탈리아 기업인·밀란 회장, 1926-2003)와도 맞섰는데 떠난 쪽은 회장이었다.[3] 은퇴한 뒤에는 곧바로 구단 부회장이 되어 베를루스코니가 구단을 사들이던 1986년까지 자리를 지켰다.

마지막 경기는 1979년 5월 13일 라치오 원정이고, 그 시즌에 든 스쿠데토가 구단의 열 번째였다. 밀란의 첫 번째 스타였고 첫 유럽 정복의 주역이었으며, 이 팀이 미학과 전략을 함께 품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다. 그는 훗날 즈보니미르 보반(Zvonimir Boban), 데얀 사비체비치(Dejan Savićević), 후이 코스타(Rui Costa), 카카(Kaká)라는 후배들이 밀란에서 어떻게 플레이해야 “먹히는지” 정의해 준 선수였다. 때문에 그는 GOAT라는 위대한 단어 속에 존재하는 스포츠인 가운데 한 명으로 기억된다.

10. 군나르 노르달 - 센터 포워드

군나르 노르달 센터 포워드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출생일은 리드홀름의 것이다. 노르달은 1921년 10월 19일 스웨덴 회르네포르스에서 태어났다. 221골은 공식전 268경기의 숫자이고, 257경기는 세리에 A 출전 수이며 그 리그 골이 210골이다. 그가 밀란에서 든 코파 라티나는 1951년 한 번이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스트라이커 순위 8위. 골 넣는 소방관, 일 폼피에로네(Il Pompierone).

AC 밀란 역대 최다 득점자다. 공식전 268경기 221골. 그가 밀라노를 떠난 지 일흔 해가 지났는데 이 숫자에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이 일곱 해를 쫓은 안드리 셰우첸코이고, 그도 175골에서 멈췄다.[1] 마흔여섯 골의 차이다. 세리에 A 득점왕 다섯 번은 지금도 역대 최다이며, 그 리그에서 해트트릭을 한 날이 열일곱 번으로 이 또한 역대 최다다. 군나르 노르달(Nils Gunnar Nordahl; 스웨덴 공격수, 1921-1995), 그의 이름은 곧 밀란의 숫자적 정체성이었고, 그의 발끝은 산 시로를 쉬게 놔두지 않았다. 세리에 A 역사에서 ’기록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린 남자’다.

밀란의 골수 팬들 사이에서 노르달은 판바스턴을 넘어서는 이름이다. 그 순위에서는 판바스턴이 다섯 칸 위에 서지만, 붉고 검은 9번만 놓고 물으면 순서가 바뀐다. 판바스턴이 밀란에서 201경기 125골을 남기는 동안 노르달은 268경기에서 221골을 넣었고, 세리에 A 득점왕은 두 번과 다섯 번으로 갈린다. 로마 시절까지 합친 세리에 A 291경기 225골, 경기당 0.773골은 이 리그의 역사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구단의 기록 보관소는 그의 조각상 사진 밑에 밀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센터 포워드라고 적어 두었다. 구단도 그를 역대 가장 위대한 센터 포워드 가운데 하나라는 말로 소개한다.

별명은 직업에서 왔다. 스웨덴 북쪽 회르네포르스에서 자란 그는 데게르포르스를 거쳐 1944년 IFK 노르셰핑으로 옮겼는데, 아마추어뿐이던 그 나라에서 구단이 그를 데려오려고 마련해 준 일자리가 소방서였다. 노르셰핑에서 뛴 네 시즌에 네 번 다 리그를 우승했고, 스웨덴 리그 득점왕도 네 번 했다. 대표팀에서는 서른세 경기에 마흔세 골을 넣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일곱 골로 공동 득점왕이 되어 금메달을 걸었고, 8강에서 스웨덴이 한국을 12-0으로 이긴 날에는 혼자 네 골을 넣었다. 한국 축구가 올림픽에서 당한 가장 큰 패배에 이 사내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해 9월 오슬로에서는 노르웨이를 상대로 다섯 골을 넣었다.

그를 먼저 눈여겨본 쪽은 유벤투스였다. 밀란이 점찍어 둔 덴마크 선수 한 명을 유벤투스가 가로챈 직후여서, 잔니 아녤리(Giovanni Agnelli; 이탈리아 기업인·유벤투스 회장, 1921-2003) 회장이 노르달은 밀란에 양보했고 피아트의 스톡홀름 지사가 계약을 도왔다고 한다. 1949년 1월 14일 계약서에 서명했고, 22일 밀라노 중앙역에 내렸으며, 27일 프로 파트리아전에 나서 첫 경기부터 골을 넣었다. 남은 반 시즌 열다섯 경기에서 열여섯 골이었다. 곧 구단을 설득해 그렌과 리드홀름을 불러들였다.

값도 치렀다. 스웨덴 협회는 나라 밖에서 프로가 된 선수를 대표팀에 부르지 않았고, 스물일곱에 떠난 그는 노란 유니폼을 다시 입지 못했다. 스웨덴은 그 없이 1950년 월드컵에서 3위를 했다. 문이 다시 열린 1958년 자국 대회에는 리드홀름과 그렌이 돌아가 결승까지 올랐으나, 서른여섯의 노르달은 로마에서 이미 감독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 월드컵 기록 어디에도 없는 사연이다.

처음으로 온전히 뛴 1949-50시즌에 서른다섯 골을 넣었다. 세리에 A 한 시즌 최다 득점으로 예순여섯 해를 버틴 숫자이고, 2016년에야 곤살로 이과인이 서른여섯 골로 넘어섰다. 그 시즌 밀란이 넣은 리그 골은 118골이었다. 1950년 2월 토리노 원정에서는 유벤투스를 7-1로 무너뜨렸는데 그 가운데 세 골이 그의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텔레비전이 처음으로 중계한 경기로 전해지며, 주간지 『라 도메니카 델 코리에레』는 넋이 나간 유벤투스 팬의 그림을 표지에 실었다. 그해의 우승팀이 유벤투스였으니 챔피언이 안방에서 일곱 골을 맞은 날이다. 그 뒤로 서른네 골, 스물여섯 골, 스물세 골, 스물일곱 골로 득점왕을 네 번 더 했고, 득점왕을 놓친 두 시즌에도 득점 2위였다.

180cm에 90kg의 몸집은 당시 수비수들이 도무지 붙을 수 없는 체격이었고, 유니폼을 잡아당겨도 통하지 않았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가 경기장에 나서면 1골, 2골, 3골 심지어 4골은 어렵지 않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를 들소라고도 불렀다. 1956년 2월 밀란에서의 200번째 골을 넘기자 구단은 금으로 만든 작은 대포를 선물했고, 기자 브루노 로기(Bruno Roghi; 이탈리아 체육 기자)는 그 무렵의 『일 칼초 일루스트라토』(Il Calcio Illustrato; 밀라노에서 나오던 축구 주간지)에서 힘으로 밀고 들어가 넣는 골에 노르달식 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머리를 어깨 사이에 묻고 주먹을 쥔 채 성난 들소의 걸음으로 떠나면 눈앞에는 붉은 구름밖에 보이지 않고, 수비수들이 다리를 걸어도 달군 칼이 버터 덩이를 가르듯 길을 낸다는 묘사다. 로기는 같은 글에 노르달의 마지막 골은 언제나 끝에서 두 번째 골이라고 적었다.[7]

1950-51시즌 밀란은 마흔네 해 만에 스쿠데토를 되찾았다. 처진 공격수 그렌이 뒤에서 풀고 리드홀름이 길게 찔러 주면 노르달이 끝냈다. 삼총사는 그해 코파 라티나까지 들었는데, 릴을 5-0으로 이긴 결승에서 세 골을 넣은 사람도 그였다. 1955년의 두 번째 스쿠데토는 다친 오메로 토뇬을 대신해 주장 완장을 차고 들었고, 우승이 정해진 날 팬들은 그를 어깨에 메고 돌았다. 스물일곱에 건너온 사람에게 이탈리아에서의 여덟 시즌은 두 번째 전성기였다.

1956년 6월 3일 라치오전이 밀란에서의 마지막이다. 서른넷의 그는 로마로 갔고, 맞바꿔 온 공격수가 카를로 갈리였다. 1995년 9월 15일 아내와 휴가를 보내던 사르데냐 알게로의 수영장에서 헤엄치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날 그가 입고 있던 수영복이 붉고 검은 줄무늬였다. 베를루스코니는 눈을 감으면 매달린 상대 센터하프(centre half; 수비 한가운데에서 상대 센터 포워드를 맡던 자리. 오늘날의 센터백에 가깝다)를 힘으로 끌고 골문으로 가는 그가 지금도 보인다고 했고, 이틀 뒤 맞붙은 밀란과 로마는 팔에 검은 띠를 두르고 뛰기로 했다.[8]

11. 마르코 판바스턴 - 센터 포워드

마르코 판바스턴 센터 포워드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그가 밀란에서 든 세리에 A 우승은 1987-88시즌, 1991-92시즌, 1992-93시즌 세 번이고, 유러피언컵은 1989년과 1990년 두 번, UEFA 슈퍼컵도 그 두 해다. 세리에 A 득점왕은 두 번이다. 골 수는 구단이 125골, 다른 집계가 124골로 적는다. 별명의 네덜란드어는 De Zwaan van Utrecht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스트라이커 순위 3위. 위트레흐트의 백조.

마르코 판바스턴(Marcel van Basten; 네덜란드 공격수, 1964-)은 매번 새로운 방식으로 골의 정의를 고쳐 썼고, 스트라이커라는 자리가 왜 있는지를 다시 묻게 만든 선수다. 그래서 축구사에서 가장 위대한 스트라이커를 꼽는 자리라면 어떤 매체가 평가하건 그는 늘 세 손가락 안에 있다. 은퇴한 나이가 서른이었음에도 그렇다.

1982년 4월 3일 아약스에서 요한 크라위프와 교체돼 들어간 것이 프로 첫 경기였다. 아약스에서 172경기 152골을 넣고 1987년 여름 밀란에 왔다. 네덜란드 리그 득점왕을 네 해 내리 했고 1986년에는 유러피언 골든슈를 받은 스물둘이었다. 계약서에 서명한 것은 1986년 11월 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밤이었다. 8월 23일 바리전에서 휠릿과 나란히 데뷔해 골까지 넣었지만 첫 시즌은 발목 때문에 거의 뛰지 못했다. 그래도 봄에 돌아와 엠폴리전과 나폴리 원정에서 넣은 골로 마라도나의 팀을 따라잡았고, 밀란은 그 시즌 스쿠데토를 들었다. 이듬해에는 공식전 서른두 골을 넣었다. 그 발목이 끝내 그를 데려간다.

공식전 201경기. 세리에 A 득점왕 두 번에 발롱도르가 1988년, 1989년, 1992년 세 번이다. 네덜란드 대표팀에서는 쉰여덟 경기에 스물네 골을 넣었다. 한 경기 네 골이 밀란에서만 세 번 있었는데, 1988년 유러피언컵의 비토샤 소피아전과 1992년 11월의 나폴리 원정, 그리고 같은 달 25일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예테보리전이다. 예테보리전의 네 골 가운데 하나는 스테파노 에라니오의 크로스를 골문을 등진 채 받아 넘긴 오버헤드킥이었고, 골키퍼는 스웨덴 대표팀의 토마스 라벨리(Thomas Ravelli; 스웨덴의 골키퍼, 1959-)였다. 그는 수많은 스트라이커들처럼 골을 기록하러 그라운드에 나서는 선수는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라운드에 나섰고, 때문에 팬들은 그를 사랑했다.

리뉘스 미헐스 감독 아래에서, 판바스턴 vs 소련

본인이 꼽는 가장 아름다운 골은 기록에 없는 골이다. 1989년 4월 5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치른 유러피언컵 준결승 1차전에서 타소티의 크로스를 거의 땅에 붙어 몸을 비틀며 머리로 받았는데, 공이 크로스바 밑동과 골키퍼 부요의 등을 차례로 맞고 들어가는 바람에 연감은 자책골로 적었다.[4]

UEFA 유로 1988 결승에서 소련을 상대로 넣은 발리슛은 세계 축구가 가장 우아한 골이라는 말을 쓸 때 맨 먼저 꺼내는 장면이 됐다. 각도가 없는 곳에서 떨어지는 공을 그대로 때려 반대편 그물에 꽂았다. 벤치의 미헐스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저었다.

축구 역사상 가장 우아한 비극이기도 하다. 그의 커리어는 만 28세에 쫑났고 30세에 마감된다. 마지막 골은 1993년 5월 9일 안코나 원정이고, 마지막 경기는 그달 26일 뮌헨에서 마르세유에 진 결승이다. 오른쪽 발목의 연골을 네 번 수술하고 두 해 넘게 기다린 끝에, 1995년 8월 17일 그는 비아 투라티의 트로피 진열실에서 싸움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말했다.[4] 여덟 해를 있었지만 뛴 것은 여섯 시즌뿐이라고, 9번은 좋은 번호이니 다음 시즌에는 웨아(George Weah)가 다는 것이 옳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튿날 산 시로에서는 평상복 차림으로 경기장을 한 바퀴 돌며 손을 흔들었다. 울면 꼴이 우스워지니 울지 않기를 바란다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스트라이커가 도달하고자 했던 정점을 먼저 경험하고 떠났다. 이탈리아가 그에게 붙인 다른 이름이 날아다니는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2024년 12월 구단 명예의 전당이 공격수 부문의 첫 이름들을 정할 때 그가 거기 있었다.[2]

산 시로의 불빛 아래 선 쉰아홉 명

AC 밀란 역대 베스트 11 표제 4-2-2-2 대형으로 배치한 AC 밀란 역대 베스트 11 AC 밀란 역대 베스트 11 서브 명단 15인 편집물 AC 밀란 역대 베스트 11 추가 명단 33인 편집물
표제, 열한 명의 대형, 서브 명단 15인, 추가 명단 33인. 1926년 산 시로의 첫 골을 넣은 주세페 산타고스티노부터 지금 왼쪽을 달리는 하파엘 레앙까지 쉰아홉 명이 한 흐름에 들어간다.

이 명단은 AC 밀란의 가장 위대했던 역대 베스트 59인의 명단이다.

서브 명단 열다섯 가운데 일곱은 안첼로티의 팀에서 왔다. 지다와 네스타, 피를로(Andrea Pirlo)와 가투소(Gennaro Gattuso), 세이도르프와 카카, 그리고 셰우첸코다. 2003년과 2007년에 유럽을 든 그 팀에서 열한 명에 오른 사람은 말디니와 코스타쿠르타 둘뿐이고, 둘 다 사키의 팀에서 건너온 선수다. 1963년 웸블리의 팀에서는 체사레 말디니와 트라파토니(Giovanni Trapattoni)와 아우타피니가 후보에 앉았고 리베라만 올라왔다.

로시가 잡은 공은 바레시의 발로 간다. 바레시가 수비 라인을 한 걸음 끌어올리는 사이 말디니는 왼쪽 터치라인을 타고 오르고, 타소티는 반대편에서 안으로 좁혀 들어온다. 코스타쿠르타는 남는다. 레이카르트가 공을 받아 돌아서면 휠릿은 이미 뛰고 있고, 리드홀름의 긴 패스가 그 등 뒤를 넘어 리베라의 발 앞에 떨어진다. 리베라가 한 박자를 늦춰 수비 둘을 끌어낸 뒤 내준 공을 노르달이 몸으로 지키고, 흘려 준 공은 판바스턴이 떨어지기 전에 때린다.

구단 역대 최다 출전 1위와 2위와 3위가 이 열한 명 안에 있다. 역대 최다 득점자가 있고, 발롱도르가 다섯 개 있으며, 영구 결번 두 개가 모두 여기 있다. 이탈리아에서 여섯, 네덜란드에서 셋, 스웨덴에서 둘이 왔다. 유소년에서 올라온 사람이 셋이고 나라 밖에서 온 사람이 다섯이니, 안에서 키운 수비와 밖에서 데려온 공격이 한 팀을 이룬 모양새다.

단 한 번도 퇴장한 적이 없는 팀.붉고 검은 줄무늬가 127년 동안 써 내려온 쉰아홉 개의 이름.

쉰아홉에서 열한 명을 뺀 마흔여덟

서브 명단 열다섯과 추가 명단 서른셋을 글자로 다시 적되 포지션은 그림에 적은 대로 두었다. 다만 그림의 잔카를로 갈리는 카를로 갈리이고, 그림에 센터 포워드로 적힌 체사레 말디니는 수비수다. 로렌초 부폰은 초고를 쓰고 반년 뒤인 2025년 11월 25일 아흔다섯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브 명단 15인

  • 로렌초 부폰Lorenzo Buffon · 골키퍼

    1949-1960년 공식전 300경기. 그레-노-리 시절의 골문을 지켰다.

  • 지다Dida · 골키퍼

    2000-01시즌과 2002-2010년 공식전 302경기. 2003년 올드 트래퍼드 결승 승부차기에서 세 개를 막았다.

  • 체사레 말디니Cesare Maldini · 수비수

    1954-1966년 공식전 412경기. 1963년 웸블리에서 유러피언컵을 든 첫 밀란 주장이다.

  • 알레산드로 네스타Alessandro Nesta · 센터백

    2002-2012년 공식전 326경기. 구단은 그가 전성기의 바레시를 떠올리게 했다고 적는다.

  • 카를하인츠 슈넬링어Karl-Heinz Schnellinger · 레프트백

    1965-1974년 공식전 334경기. 1969년 유러피언컵을 든 수비의 한 축이다.

  • 조반니 트라파토니Giovanni Trapattoni · 수비형 미드필더

    1957-1971년 공식전 351경기. 1963년 결승에서 에우제비우를 지웠다.

  •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Demetrio Albertini · 수비형 미드필더

    1988-2002년 공식전 406경기 28골. 카펠로의 무적 함대에서 박자를 쥔 메트로놈이다.

  • 안드레아 피를로Andrea Pirlo · 수비형 미드필더

    2001-2011년 공식전 401경기 41골. 안첼로티가 한 줄 내려 세운 자리에서 세계 최고가 됐다.

  • 젠나로 가투소Gennaro Gattuso · 중앙 미드필더

    1999-2012년 공식전 468경기. 피를로 옆에서 열세 해를 뛰었다.

  • 클라렌스 세이도르프Clarence Seedorf · 중앙 미드필더

    2002-2012년 공식전 432경기 62골. 세 구단에서 UEFA 챔피언스 리그를 든 유일한 선수다.

  • 카카Kaká · 공격형 미드필더

    2003-2009년과 2013-14시즌 공식전 307경기 104골. 2007년 발롱도르 수상자이며 2026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 후안 스키아피노Juan Alberto Schiaffino · 레프트 윙

    1954-1960년 공식전 171경기 60골. 1950년 마라카낭의 동점골을 넣은 우루과이 사람이다.

  • 로베르토 도나도니Roberto Donadoni · 라이트 윙

    1986-1996년과 1997-1999년 공식전 390경기. 베를루스코니가 구단을 사고 처음 데려온 선수다.

  • 주제 아우타피니José Altafini · 센터 포워드

    1958-1965년 공식전 246경기 161골. 1963년 웸블리 결승의 두 골이 그의 것이다.

  • 안드리 셰우첸코Andriy Shevchenko · 센터 포워드

    1999-2006년과 2008-09시즌 공식전 322경기 175골. 구단 역대 득점 2위다.

추가 명단 33인

  • 파비오 쿠디치니Fabio Cudicini · 골키퍼

    1967-1972년 공식전 183경기. 글래스고와 맨체스터의 선방으로 검은 거미라 불렸다.

  • 로베르토 로사토Roberto Rosato · 센터백

    1966-1973년 공식전 269경기. 리베라와 생일이 같다.

  • 마르셀 드사이Marcel Desailly · 센터백

    1993-1998년 공식전 186경기. 1994년 아테네 결승의 네 번째 골을 넣었다.

  • 카하 칼라제Kakha Kaladze · 센터백

    2001-2010년 공식전 284경기. 왼쪽 풀백으로 와서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 치아구 시우바Thiago Silva · 센터백

    2009-2012년 공식전 119경기. 등록을 기다리던 반년 동안 말디니 곁에서 배웠다.

  • 알도 말데라Aldo Maldera · 레프트백

    1971-72시즌과 1973-1982년 공식전 310경기 39골. 골 넣는 풀백의 원조 격이다.

  • 알베리코 에바니Alberico Evani · 레프트백

    1980-1993년 공식전 393경기. 1989년 UEFA 슈퍼컵과 인터콘티넨털컵을 프리킥으로 결정지었다.

  • 테오 에르난데스Theo Hernández · 레프트백

    2019-2025년 공식전 262경기 34골. 2022년 스쿠데토의 왼쪽이다.

  • 안젤로 안퀼레티Angelo Anquilletti · 라이트백

    1966-1977년 공식전 418경기. 리바와 베스트, 크라위프를 따라다니며 지웠다.

  • 카푸Cafu · 라이트백

    2003-2008년 공식전 166경기. 서른셋에 와서 2007년 유럽 정상에 섰다. 인물관의 카푸 편에 적었다.

  • 조반니 로데티Giovanni Lodetti · 수비형 미드필더

    1961-1970년 공식전 288경기. 리베라의 뒤를 받치던 일꾼이다.

  • 마시모 암브로시니Massimo Ambrosini · 수비형 미드필더

    1995-1997년과 1998-2013년 공식전 489경기 36골. 열일곱 시즌을 머물렀다.

  • 로메오 베네티Romeo Benetti · 중앙 미드필더

    1970-1976년 공식전 251경기 49골. 1973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의 싸움꾼이다.

  • 카를로 안첼로티Carlo Ancelotti · 중앙 미드필더

    1987-1992년 공식전 160경기. 사키의 분신이었고 2026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 리카르도 몬톨리보Riccardo Montolivo · 중앙 미드필더

    2012-2018년 공식전 158경기. 어려운 시절의 주장이다.

  • 즈보니미르 보반Zvonimir Boban · 공격형 미드필더

    1992-2001년 공식전 251경기 30골. 1999년 스쿠데토의 조로다.

  • 데얀 사비체비치Dejan Savićević · 공격형 미드필더

    1992-1998년 공식전 144경기 34골. 아테네 결승의 로빙 슛 하나로 영원히 남았다.

  • 후이 코스타Rui Costa · 공격형 미드필더

    2001-2006년 공식전 192경기. 피오렌티나 편의 열한 명 가운데 하나다.

  • 호나우지뉴Ronaldinho · 레프트 윙

    2008-2011년 공식전 95경기 26골. 2008년 9월 더비를 머리로 끝냈다.

  • 하파엘 레앙Rafael Leão · 레프트 윙

    2019년부터 뛰는 현역. 2025-26시즌까지 공식전 291경기 80골이다.

  • 브루노 모라Bruno Mora · 라이트 윙

    1962-1969년 공식전 148경기 33골. 1965년의 다리 골절이 상승세를 끊었다.

  • 데이비드 베컴David Beckham · 라이트 윙

    2009년과 2010년 두 번의 임대로 공식전 33경기를 뛰었다.

  • 로베르토 안토넬리Roberto Antonelli · 세컨드 스트라이커

    1977-1982년 공식전 143경기 32골. 열 번째 스쿠데토에 다섯 골을 보탰다.

  • 군나르 그렌Gunnar Gren · 세컨드 스트라이커

    1949-1953년 공식전 137경기 38골. 그레-노-리의 첫 글자다.

  • 주세페 산타고스티노Giuseppe Santagostino · 센터 포워드

    1921-1932년 공식전 236경기 106골. 1926년 9월 19일 산 시로의 첫 골을 넣었다.

  • 카를로 갈리Carlo Galli · 센터 포워드

    1956-1961년 공식전 128경기 57골. 1958년 4월 13일 라치오전에서 다섯 골을 넣었다.

  • 피에리노 프라티Pierino Prati · 센터 포워드

    1966-1973년을 중심으로 공식전 209경기 102골. 1969년 결승의 해트트릭이다.

  • 다니엘레 마사로Daniele Massaro · 센터 포워드

    1986-1995년 공식전 306경기 70골. 1994년 아테네 결승에서 두 골을 넣었다.

  • 조지 웨아George Weah · 센터 포워드

    1995-2000년 공식전 147경기 58골. 판바스턴의 9번을 이어받았다.

  • 올리버 비어호프Oliver Bierhoff · 센터 포워드

    1998-2001년 공식전 119경기 44골. 첫 시즌에 열여섯 번째 스쿠데토를 들었다.

  • 필리포 인차기Filippo Inzaghi · 센터 포워드

    2001-2012년 공식전 300경기 126골. 2007년 아테네 결승의 두 골이 그의 것이다.

  • 알베르토 질라르디노Alberto Gilardino · 센터 포워드

    2005-2008년 공식전 132경기 44골.

  •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Zlatan Ibrahimović · 센터 포워드

    2010-2012년과 2020-2023년 공식전 163경기 93골. 두 번 와서 두 번 다 스쿠데토를 들었다.

기록을 확인한 곳

  1. 구단이 적은 구단사와 전설들 — AC Milan 「History」, 「Legends」, 「Top scorers」. 창립과 첫 우승, 2007년 12월부터 2014년 2월까지의 국제 트로피 기록, 선수마다 구단이 고른 말.
  2. 명예의 전당 — AC Milan, 2024년 10월 7일 발표, 2024년 12월 12일 발표, 2026년 4월 23일 발표.
  3. 선수가 한 말과 당시의 평 — Magliarossonera.it의 바레시, 말디니, 타소티 항목에 모아 둔 구단 발간물과 신문 기사. 출전과 득점, 데뷔와 마지막 경기의 날짜도 이 기록 보관소의 선수별 집계를 따랐다.
  4. 리드홀름의 박수와 판바스턴의 작별 — Magliarossonera.it 리드홀름, 판바스턴 항목. 잘못 보낸 패스에 쏟아진 박수는 구단 공식 소개도 같은 이야기로 전한다.
  5. 929분 — Calciomercato.com 「Che fine ha fatto? Sebastiano Rossi」. 초프의 903분과 부폰의 974분 사이에 놓인 기록과 별명.
  6. 바레시의 부고와 추모 — AC Milan 「Franco Baresi forever」, 「6 per sempre」.
  7. 노르달의 숫자와 당시의 글 — Magliarossonera.it 노르달 항목. 시즌별 출전과 득점, 계약과 도착의 날짜, 유벤투스 원정 7-1을 그린 주간지 표지, 경기당 0.773골이 여기 모여 있다. 브루노 로기의 글은 같은 항목에 실린 『일 칼초 일루스트라토』 「Nordahl a quota 200」 지면이다.
  8. 노르달의 부고 — la Repubblica, 1995년 9월 16일 「Addio Gunnar, leggenda del Milan」. 소방서 일자리, 알게로의 마지막 날, 베를루스코니의 말.
  9. 레이카르트의 사람됨 — Magliarossonera.it 레이카르트 항목에 옮겨 둔 구단의 옛 소개 글. 대표팀 첫 경기와 마지막 경기의 날짜도 여기서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