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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탈란타 BC 문장

아탈란타 BC

Atalanta Bergamasca Calcio Società a responsabilità limitata
ATALANTA BERGAMASCA CALCIO · LA DEA 1907-2026

뉴발란스 아레나 · 코파 이탈리아 1회 · UEFA 유로파 리그 1회 · 세리에 B 우승 5회

아탈란타 BC 역대 최고의 전설 열한 명과 후보 열다섯, 스물여섯 개의 이름을 필자의 견해로 골랐다.

축구는 한 도시를 구할 수 있는가

전술은 혁명을 낳았고, 고요한 도시 베르가모는 유럽을 흔들었다. 아탈란타 BC는 강팀으로 태어난 구단이 못 된다. 허나 세계 축구에서 가장 치열하고 창의적이었던 팀을 꼽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이 이름이 낀다. 파푸 고메스와 요시프 일리치치가 그 시절의 얼굴이었고, 구단사 전체로 넓히면 가장 위대했던 크리스티아노 도니가 있다.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의 언덕 도시 베르가모는 밀라노에서 북동쪽으로 50km, 알프스가 시작되는 자락에 앉아 있다. 이 조용한 도시에 축구로 전설을 쌓아 올린 구단이 아탈란타다. 1907년 그리스 신화의 여자 사냥꾼에게서 이름을 빌려 왔고, 그 연원으로 별명이 여신(La Dea)이 되었다.

부유했던 적도, 스타로 가득했던 적도 없다. 대형 자본은 더욱이 없었고 무한한 팬덤을 기대할 만한 인구도 못 됐다. 이탈리아는 이런 구단을 지방의 여왕(regina delle provinciali)이라 부른다. 주도(州都)가 아닌 도시의 구단 가운데, 또 리그를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구단 가운데 세리에 A에서 가장 많은 시즌을 보낸 팀에게 붙은 이름이다. 1933년에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가 시민들의 모금과 간판선수의 매각으로 겨우 숨을 붙였다. 그런 구단의 축구를 전 세계가 경외한 순간이 있었다.

3-4-1-2의 해체와 재조합이 그 순간의 이름이다. 윙백이 윙어가 되고, 수비가 공격을 시작하며, 공격이 수비를 끝맺는 치열한 질서 속 무질서의 미학이었다. 그 중심에 잔 피에로 가스페리니 감독과 파푸 고메스, 요시프 일리치치가 있었고, 로빈 고젠스와 한스 하테부르로 대변되는 윙백들은 측면이라는 자리의 쓰임새를 고쳐 썼다. 그들은 UEFA 챔피언스 리그를 휘저으며 베르가모의 기적이라 불렸고, 무너지지 않는 ’작은 클럽의 윤리’를 세상에 내보였다.

Atalanta Bergamasca Calcio

아탈란타 BC가 써 내려온 ’작은 거인의 신화’를 다시 기억해 보자.

이 글의 초고는 2025년 5월 24일에 썼다. 더블린에서 UEFA 유로파 리그를 든 지 1년하고 이틀이 지난 날이었고, 주장 톨로이가 떠난다는 구단의 인사가 나온 이튿날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5월 31일에는 가스페리니마저 아탈란타를 떠났다.[1][4]

그 뒤의 한 해 반은 순탄치 못했다. 후임 이반 유리치는 리그 열한 경기에서 승점 13을 얻는 데 그쳐 13위에 머물던 2025년 11월 10일에 해임됐다. 뒤를 이은 라파엘레 팔라디노가 팀을 7위까지 끌어올려 UEFA 컨퍼런스 리그에 보냈고, 그 사이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과 코파 이탈리아 4강을 밟았다. 2026년 3월 22일에는 새 주장 마르턴 더론(Marten de Roon; 네덜란드 미드필더, 1991-)이 436번째 경기에 나서 벨리니의 구단 최다 출전 기록을 넘어섰다. 그해 여름 더론도 베르가모를 떠났으며, 2026-27시즌의 지휘봉은 마우리치오 사리가 쥐고 있다.[4]

열한 명을 부르기에 앞서 한 사람을 먼저 세운다.

잔 피에로 가스페리니: 베르가모의 아홉 해

이 글이 맨 먼저 세우는 이름은 감독의 것이다. 잔 피에로 가스페리니(Gian Piero Gasperini;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58-). 열한 자리 가운데 다섯이 그의 선수이고 대형마저 그에게서 빌렸으니, 명단의 절반은 이 사람의 손을 거친 터다.

경기장 잔디 위에서 관중석을 향해 웃으며 손뼉을 치는 잔 피에로 가스페리니
게비스 스타디움의 관중에게 손뼉으로 답하는 가스페리니. 구단이 2025년 6월 1일 작별 인사에 실은 사진이다. Photo: Atalanta BC

토리노 근교 그룰리아스코 사람으로 아홉 살에 유벤투스 유소년에 들어갔으나 1군의 문턱은 끝내 넘지 못했다. 선수로는 팔레르모와 페스카라를 돌았고, 감독으로는 제노아에서 3-4-3을 들고 세리에 A 5위까지 올라 이름을 얻었다. 당시 인테르를 맡고 있던 주제 모리뉴가 자신을 가장 애먹인 감독으로 그를 꼽았을 정도다. 바로 그 인테르가 2011년 그를 불렀다가 다섯 경기, 73일 만에 내보냈다. 좋은 감독이되 큰 구단에는 맞지 않는다는 딱지가 그때 붙었다.[2]

2016년 여름 그가 도착한 아탈란타는 직전 두 시즌을 17위와 13위로 마친 팀이었다. 1907년에 생긴 구단이 109년 동안 세리에 A에서 가장 높이 올라 본 자리는 1947-48시즌의 5위였고, 트로피라고는 1963년의 코파 이탈리아 하나가 전부였다.[1]

출발부터 위태로웠다. 첫 다섯 경기에서 네 번을 졌고, 5라운드 팔레르모전 패배 뒤에는 경질 이야기가 공공연히 돌았다. 구단은 그를 남겼다. 그러자 그는 구단 유소년에서 자란 칼다라와 콘티, 갈리아르디니를 선발로 올리고 케시에와 페타냐 같은 무명의 젊은 선수들을 그 곁에 세웠다. 이어진 아홉 경기에서 팀은 여덟 번을 이겼는데 나폴리와 인테르, 로마가 그 여덟에 들어 있다. 시즌이 끝났을 때의 순위는 4위, 그때까지의 구단 역사에서 가장 높은 자리였다.[2]

시즌세리에 A유럽 대회코파 이탈리아
2016-174위출전 없음16강
2017-187위UEFA 유로파 리그 32강4강
2018-193위UEFA 유로파 리그 플레이오프준우승
2019-203위UEFA 챔피언스 리그 8강16강
2020-213위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준우승
2021-228위UEFA 유로파 리그 8강8강
2022-235위출전 없음8강
2023-244위UEFA 유로파 리그 우승준우승
2024-253위UEFA 챔피언스 리그 플레이오프8강

109년 동안 한 번도 없던 3위가 아홉 해 사이에 네 번 나왔다.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는 세 번 올랐고, UEFA 챔피언스 리그는 처음 나간 해에 8강까지 갔다. 2019년 9월 9일 베르가모시는 그를 명예 시민으로 올렸다.

그의 축구는 경기장 전체에서 사람을 붙잡는 압박에서 출발한다. 공을 잃으면 열 명이 저마다 맡은 상대를 쫓아 올라가고, 공을 얻으면 3백의 바깥 수비수까지 공격에 가담하며, 폭은 윙백이 만든다. 1990년대의 그가 본보기로 삼은 팀은 아리고 사키의 밀란보다 루이 판할의 아약스였다고 한다. 2019-20시즌이 이 축구의 절정이었다. 아탈란타는 리그에서만 98골을 넣었는데, 이탈리아 1부 리그의 한 시즌 팀 득점으로는 60년 넘게 나오지 않던 숫자다. 모든 대회를 합치면 116골에 이른다. 일리치치가 21골, 루이스 무리엘과 두반 사파타가 19골씩, 마리오 파샬리치가 12골을 넣었고 윙백 고젠스가 10골을 보탰다. 영국의 가디언은 그해 봄 이 팀을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는 팀 가운데 하나라고 적었다.[2]

그 봄의 베르가모는 이탈리아에서 코로나19의 피해가 가장 컸던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이 절의 앞에 걸어 둔 물음이 거기서 나온다. 축구가 그 도시를 구했다고 적을 근거를 필자는 갖고 있지 않다. 기록에 남은 것은 리그가 다시 열린 그 여름에 아탈란타가 또 3위를 했고, 8월 리스본의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파리 생제르맹을 90분까지 앞서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성적이 돈으로 산 것이 못 된다는 데 베르가모의 자부심이 있다. 첫 시즌이 끝나자마자 갈리아르디니가 2,200만 유로에 인테르로, 콘티와 케시에가 2,400만 유로와 3,200만 유로에 AC 밀란으로 팔려 갔다. 2,000만 유로에 데려온 라스무스 호일룬은 한 시즌 만에 7,400만 유로를 남기고 떠났다. 2010년부터 구단이 선수 매각으로 거둔 차익은 5억 유로를 넘는다. 구단은 그 돈으로 시(市)의 경기장을 사들여 한 구역씩 고쳐 지었고, 주전을 해마다 내주면서도 순위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2]

이윽고 2024년의 더블린에 닿는다. 가는 길부터 적어 둘 만하다. 16강에서 스포르팅 CP를 합계 3-2로 넘었고, 8강 1차전에서는 안필드에서 리버풀을 3-0으로 이겼다. 리버풀이 홈에서 34경기째 지지 않던 때다. 4강에서는 마르세유를 합계 4-1로 눌렀다. 5월 22일 결승의 상대 바이어 04 레버쿠젠은 그 시즌 공식전 51경기를 한 번도 지지 않고 온 팀이었는데, 아탈란타는 아데몰라 루크먼(Ademola Lookman; 나이지리아 공격수, 1997-)의 해트트릭으로 3-0 승리를 거뒀다. 구단의 첫 유럽 트로피이자 1963년 뒤로 61년 만의 트로피였고, 예순여섯의 가스페리니가 감독으로 처음 들어 본 트로피였다. 자국 리그를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채 유럽 대회를 든 구단은 지금까지 여섯뿐이며 아탈란타가 그 가운데 하나다.[1]

떠나는 일도 그가 정했다. 2025년 5월 31일 그는 베르가모의 일간지 『레코 디 베르가모』(L’Eco di Bergamo)에 팬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었다. 결별은 오직 자신이 정한 일이며 구단과 임원들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적었고, 팀을 리그 3위와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에 올려놓고 떠난다고 했다. 추신에는 자신이 베르가모의 명예 시민이며 이 도시의 가치를 어디서나 높이 들고 다니겠다는 다짐을 달았다.[2]

하지만 작별이라는 말은 하지 말자. 나는 그 말이 싫다.

Non parliamo però di addio. Non mi piace.

잔 피에로 가스페리니가 아탈란타를 떠나며 팬들에게

이튿날 구단은 「고마웠습니다, 감독님」이라는 제목의 글로 답했다. 아홉 해를 축구에서 좀처럼 없는 이야기라 불렀고, 함께 베르가모에 안긴 기쁨이 상상할 수 있던 것을 넘어섰다고 적었다.[1]

다루기 쉬운 사람은 못 됐다. 까다롭고 요구가 많았으며, 선수의 경력을 통째로 바꿔 주는 대신 자신을 온전히 믿고 따르기를 바랐다. 그 값을 가장 비싸게 치른 이가 이 글의 맨 앞줄에 선 고메스인데, 그 이야기는 10번 절에 적는다.

열한 명 가운데 톨로이와 고메스, 고젠스와 하테부르, 일리치치 다섯이 그의 선수다. 앞의 둘은 그가 오기 전부터 베르가모에 있었고, 뒤의 셋은 2017년 한 해에 차례로 왔다. 1월의 하테부르, 6월의 고젠스, 7월의 일리치치다.

베르가모의 기적.109년 동안 5위가 가장 높던 구단이 아홉 해 사이에 3위를 네 번 했다.

선정 전술: 네 시대가 선 3-4-1-2

대형은 가스페리니가 베르가모에서 쓰던 3-4-1-2를 그대로 가져왔다. 골문에 페론이 서고 그 앞의 셋은 왼쪽부터 구스타브손, 벨리니, 톨로이다. 가운데 줄에서는 왼쪽 끝의 고젠스와 오른쪽 끝의 하테부르가 터치라인을 맡고, 스트룀베리와 안젤레리가 안쪽을 지킨다. 그 앞 한 칸에 도니가 서며 맨 앞의 둘은 고메스와 일리치치다.

열한 명은 네 시대에서 왔다.

1949-1961
안젤레리 · 구스타브손1958년 강등, 1959년 세리에 B 우승
1984-1996
스트룀베리 · 페론1988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4강, 1991년 UEFA컵 8강
1998-2016
도니 · 벨리니강등 세 번, 승격 네 번
2014-2025
톨로이 · 고메스 · 고젠스 · 하테부르 · 일리치치3위 네 번, UEFA 유로파 리그 우승

네 칸을 나란히 놓으면 이 구단의 궤적이 읽힌다. 앞의 세 시대에 구단은 1부와 2부를 오르내렸고 유럽 대회는 어쩌다 얻어걸리는 손님이었다. 마지막 한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유럽이 일상이 됐다. 아탈란타는 세리에 A로 승격한 횟수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은 구단이기도 하다. 그만큼 자주 떨어졌고 그때마다 돌아왔다는 방증이다.

완장으로 세어 보아도 같은 명단이 나온다. 열한 명 가운데 일곱이 아탈란타의 주장이었다. 안젤레리, 스트룀베리, 페론, 도니, 벨리니, 고메스, 톨로이다. 2008년부터 완장이 넘어간 순서를 적으면 아래와 같다.

  1. 2008-2011도니
  2. 2011-2016벨리니
  3. 2016-2017라이몬디
  4. 2017-2021고메스
  5. 2021-2025톨로이
  6. 2025-2026더론

2008년부터 2025년까지 17년 동안 완장을 찬 다섯 사람 가운데 넷이 이 글의 열한 명에 들었고, 그 뒤를 이은 더론은 후보 명단에 있다. 한편 2012년 5월 쿠르바 노르드(Curva Nord; 북쪽 골대 뒤 응원석)는 시즌 마지막 홈 경기에서 구단의 역대 주장 일곱의 이름을 적은 깃발 일곱 장을 내걸었는데, 스트룀베리의 이름이 그 일곱에 들어 있었다.[3]

한가운데 선 도니에 대해서는 먼저 적어 둘 날짜가 있다. 구단 최다 득점자인 그는 2011년 8월 9일 승부조작으로 3년 6개월의 자격 정지를 받았고, 아탈란타는 승점 6점이 깎인 채 2011-12시즌을 시작했다. 그해 12월 그는 체포됐으며 2012년 5월에는 징계에 2년이 더해졌다. 9번 절에 그의 기록과 징계를 한 표에 날짜순으로 적는다.[4]

1. 파브리치오 페론 - 골키퍼

파브리치오 페론 골키퍼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코파 이탈리아 준우승은 1995-96시즌 한 번이고, 1990-91시즌의 8강은 유러피언컵이 아니라 UEFA컵이다.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4강(1987-88시즌)은 그가 오기 한 해 전의 일이다.

무명의 아이콘.

이기는 법은 잊을 수 있어도, 막아낸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1990년대 아탈란타의 골문을 지켰던 사내가 파브리치오 페론(Fabrizio Ferron; 이탈리아 골키퍼, 1965-)이다. 슈퍼스타도 국가대표도 못 됐으나, 팀이 무너질 듯한 순간마다 그는 단단한 벽으로 서 있었다.

밀라노 근교 볼라테에서 태어나 AC 밀란 유소년에서 컸다. 1985년 유소년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고 1986년 비아레조 대회에서는 최우수 골키퍼로 뽑혔으나, 1군 골문에는 줄리아노 테라네오가 버티고 있었다. 밀란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한 그는 세리에 B의 삼베네데테세로 내려갔고, 거기서 피에로 페르시코라는 골키퍼 코치를 만났다. 골키퍼를 따로 가르치는 코치가 드물던 때여서 그 두 해가 자신을 만들었노라고 그는 회고한다.[3]

아탈란타가 그를 눈여겨본 날도 그는 기억하고 있다. 1987-88시즌 초 베르가모 원정에서 팀은 졌는데 그는 선방을 스물두 개쯤 해냈다. 그 경기를 지켜본 아탈란타 임원들이 골키퍼 코치 차카리아 코메티(Zaccaria Cometti; 이탈리아 골키퍼·코치, 1937-2020)를 시켜 그를 따라다니게 했고, 시즌이 끝나자 데려갔다. 코메티는 이 글의 후보 명단 첫 줄에 적힌 바로 그 골키퍼다.

데뷔전은 예고 없이 닥쳤다. 나폴리 원정이었고 상대는 마라도나와 카레카의 나폴리였다. 주전 오토리노 피오티의 몸에 탈이 나는 바람에 그는 경기 시작 10분 전에야 출전을 통보받았다. 8만 관중 앞에 서 본 적이 없는 골키퍼로서는 평생 남을 밤이었고, 그는 지금도 그 경기를 가장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꼽는다.[3]

총 292경기를 출전하며 345실점만을 허용했던 그는, 팀이 1부 리그와 2부 리그를 오가던 부침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존재감을 발휘했다.

베르가모에서 보낸 시간은 여덟 시즌이다. 1988-89시즌 6위로 UEFA컵 출전권을 얻었고, 1990-91시즌에는 디나모 자그레브와 페네르바흐체, 1. FC 쾰른을 차례로 넘어 8강에서 그해 우승팀 인테르를 만났다. 베르가모에서 0-0으로 비기고 밀라노에서 0-2로 졌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는 세 번째 골키퍼 후보로 조반니 체르보네, 잔루카 팔리우카와 함께 이름이 올랐다가 팔리우카에게 밀렸고, 대표팀 경기는 끝내 한 번도 뛰지 못했다. 1993-94시즌에는 주장 완장을 찼는데 하필 그해에 팀이 강등됐다. 그는 남아서 한 시즌 만에 팀을 다시 올려놓았으며, 1996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피오렌티나에 진 것이 아탈란타에서 치른 마지막 큰 경기가 됐다.

그 시절을 그는 지금과 견주어 말한 적이 있다. 오늘의 아탈란타는 하나의 현실이지만 자신이 뛰던 때의 아탈란타는 갓 승격한 팀이 일으킨 이변이었다는 것이다. 동료들의 인상도 남겼다. 스트룀베리는 예의 바르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단단한 사람이었고, 세 해를 같이 보낸 클라우디오 카니히아와는 더없이 잘 지냈다고 한다. 소음을 못 견디던 코메티의 방 벽에 밤마다 테니스공을 튕기던 장난은 덤이다.[3]

화려하지 않은 안정감, 간결한 위치 선정, ’나’보다 ’우리’를 앞세운 플레이가 그의 것이었다. 이탈리아는 그를 군더더기 없는 골키퍼라 불렀다. 자리를 잘 잡았고 허리를 튕겨 몸을 날리는 반응이 좋았으며, 1990년대 세리에 A에서 기복이 가장 적은 골키퍼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그의 세이브 하나하나는 아탈란타라는 이름이 사라지지 않도록 만드는 시간의 축적이었다.

1996년 삼프도리아로 떠났고 인테르와 베로나, 코모를 거쳐 2005년에 장갑을 벗었다. 지금은 이탈리아 연령별 대표팀의 골키퍼 코치로 일한다.

2. 벵트 구스타브손 - 센터백

벵트 구스타브손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호적에 오른 성은 디자인대로 구스타프손(Gustafsson)이고, 스웨덴 축구의 기록은 그를 구스타브손(Gustavsson)으로 적는다. 이 글은 축구 기록의 표기를 따랐다.

전후 유럽 축구를 연결한 철학적 센터백.

1950년대는 축구가 전쟁의 상흔을 딛고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뻗어 가던 시기다. 그 흐름을 타고 이탈리아로 넘어온 한 북유럽인이 아탈란타 수비의 기틀을 세웠다.

그의 이름은 벵트 올로프 에마누엘 구스타브손(Bengt Olof Emanuel Gustavsson; 스웨덴 수비수·감독, 1928-2017). 1956년부터 ’61년까지 아탈란타에서 뛰며 정제된 수비와 철학적 리더십을 보여준 인물이다.

스웨덴에서 그는 율레(Julle)로 통했다. 어린 시절 한때를 보낸 쇠데르만란드의 율리타 교구에서 온 별명이다. 처음부터 수비수였던 것도 아니다. 1947년 IFK 노르셰핑에 들어갔고, 1949년 군나르 노르달이 AC 밀란으로 떠나자 구단은 그 빈자리에 그를 세우려 했다. 그는 AIK와의 첫 경기에서 세 골을 넣었다. 그런데 1950년에 부임한 오스트리아 감독 카를 아다메크(Karl Adamek)가 그를 수비로 내렸고, 거기가 평생의 자리가 됐다. 노르셰핑에서 리그를 세 번 우승했고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받았으며, 1953년에는 스웨덴 올해의 선수상인 굴드볼렌(Guldbollen; 황금 공)을 받았다.

위치 선정은 거의 수학적이었고, 대인 마크는 예술처럼 유연했으며, 무엇보다 그는 경기의 온도를 읽는 자였다.

이탈리아의 기록은 그를 힘과 카리스마를 갖춘 수비수, 팀의 젊은 선수들이 보고 배운 스승으로 적는다. 다섯 시즌 동안 리그 145경기를 뛰었고 골은 하나도 없다. 스웨덴 축구 명예의 전당은 2021년 그를 일흔다섯 번째 헌액자로 올리며 노르셰핑과 대표팀, 이탈리아에서 오래도록 수비의 바위였다는 소개를 붙였다.

베르가모의 다섯 해는 순탄치 못했다. 아탈란타는 1958년에 강등됐다. 그해 여름 그는 강등된 팀의 선수 신분으로 자기 나라에서 열린 월드컵에 나가 결승까지 뛰었다. 스톡홀름에서 브라질에 2-5로 진 1958년 결승의 스웨덴 수비 한가운데가 그의 자리였다. 대회가 끝나자 그는 베르가모로 돌아와 2부 리그에서 한 시즌을 뛰었고, 아탈란타는 1959년 세리에 B를 우승해 곧바로 올라왔다. 공교롭게도 그 시즌 아탈란타의 감독이 노르셰핑에서 그를 수비수로 만든 아다메크였다.

닐스 리드홀름, 군나르 그렌, 군나르 노르달, 쿠르트 함린이라는 스웨덴의 제왕들이 날뛰던 이탈리아 무대에서 ’전진의 준비’를 끝낸 자가 있었다면 벵트 구스타브손이다.

1961년 스웨덴으로 돌아가 2부의 오트비다베리(Åtvidabergs FF)에 들어갔고, 1963년까지 대표로 57경기를 뛰었다. 선수 겸 감독을 거쳐 감독이 된 뒤에는 1967년 팀을 1부에 올리고 1970년 스웨덴컵을 들었다. 2017년 2월 16일 노르셰핑에서 여든아홉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잔파올로 벨리니 - 센터백

잔파올로 벨리니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별명 줄 「교수(Il Professore)」는 11번 일리치치 디자인과 같은 줄이다. 이탈리아 언론이 그 별명으로 부른 선수는 일리치치다.

베르가모에 뿌리내린 수비수.

아탈란타가 쓰러질 때마다, 그곳엔 늘 벨리니가 존재했다.

1980년 3월 27일 베르가모현의 호숫가 마을 사르니코에서 태어나, 1998년부터 2016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단 하나의 팀만을 위해 뛴 수비수가 잔파올로 벨리니(Gianpaolo Bellini; 이탈리아 수비수, 1980-)다.

그는 세리에 A의 잔혹한 승강과 재정 위기, 대형 팀들의 스카우트 제안을 모두 뿌리치며 끝까지 아탈란타 BC를 위해 뛰었고, 끝내 ’베르가모의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유소년의 가장 어린 반부터 아탈란타에서만 컸다. 과학 고등학교를 마치면 건축학과에 원서를 낼 작정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이미 1군과 훈련하고 있던 터라 축구를 택했다고 그는 구단 행사에서 학생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축구와 공부 가운데 어느 쪽도 차선이 아니었고, 둘 다 손에 쥐고 있는 동안은 똑같이 힘을 들였다는 이야기였다.[1]

1군 데뷔는 1999년 4월 11일 세리에 B 경기였고, 세리에 A 첫 경기는 2000년 10월 1일에 치렀다. 그 시즌 코파 이탈리아에서 그는 AS 로마를 상대로 두 골을 넣었다. 올림피코 원정에서 빈첸초 몬텔라의 선제골을 따라붙는 동점골을, 베르가모로 돌아와서는 4-2로 이겨 8강에 오른 경기의 한 골을 보탰다. 21세 이하 대표로 15경기를 뛰었고 2002년 유럽 대회 본선에서는 조별 리그 세 경기를 선발로 나섰다. 그 뒤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레프트백과 센터백의 자리를 오가며 철벽같은 수비를 선보였다.

아탈란타 통산 435경기에 출전하며 팀 역사상 최다 출전 기록으로 자리 잡은 그는, 수많은 ’실점하지 않은 경기’에 거듭 새겨졌다. 2010년 9월 5일 구단 최다 출전 선수가 됐고, 2011년 2월 19일에는 안젤레리가 50년 넘게 쥐고 있던 리그 출전 기록 317경기마저 넘어섰다. 이 글의 5번이 그 안젤레리다. 리그 398경기와 세리에 A 281경기라는 숫자를 구단은 지금도 그의 이름 곁에 적는데, 세리에 A 281경기는 안젤레리와 한 경기도 다르지 않다.[1]

전성기 시절 그는 크리스티아노 도니, 리카르도 몬톨리보와 함께 팀의 중추로 활약했고, 2000-01시즌 세리에 A 7위와 2010-11시즌 세리에 B 우승의 선봉에 섰다.

기실 그가 가장 빛난 때는 팀이 추락하던 때였다. 2010년대 초반 팀이 강등 위기를 겪는 동안 그는 늘 주장 완장을 차고 있었고, “아탈란타는 버틸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경기마다 새겼다. 완장은 2011년 도니가 징계로 물러난 자리에서 그에게 넘어왔다. 승점 6점이 깎인 채 시작한 2011-12시즌에 아탈란타는 12위로 잔류했다.

마지막 홈 경기는 2016년 5월 8일 우디네세전이다. 관중은 저마다 그의 등번호 6이 그려진 종이를 들었고, 쿠르바 노르드에는 커다란 6번 셔츠와 베르가모 구시가지를 배경으로 한 그의 얼굴이 걸렸다. 그 경기에서 페널티킥이 나자 그가 찼다. 18년 동안 페널티킥을 한 번도 차 본 적이 없는 수비수였는데도 공은 들어갔고, 경기는 1-1로 끝났다. 그 시즌의 첫 골이었으며, 세리에 A에서 넣은 여섯 골 가운데 베르가모에서 넣은 첫 골이었다.[4]

수비수 한 사람의 이름이 도시의 일부가 되고, 상징이 되고, 마침내 시간 그 자체가 됐다. 그리하여 벨리니를 말할 때 필자는 수비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였다.

은퇴 뒤에도 구단을 떠나지 않았다. 유소년 프리마베라(Primavera; 19세 이하 팀)의 코치로 리그를 두 번 우승했고 2022년부터는 17세 이하 팀을 맡았다. 그의 435경기는 2026년 3월 22일 더론이 436번째 경기에 나설 때까지 10년을 더 버텼다. 더론이 아탈란타에서 처음 뛴 시즌이 곧 벨리니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4. 라파엘 톨로이 - 센터백

라파엘 톨로이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1920-21시즌은 2020-21시즌이다. 그가 떠난 2024-25시즌에도 팀이 3위를 해서 세리에 A 3위는 네 번이 됐다.

시간을 이은 방패.

브라질의 피로, 이탈리아의 심장을 지닌 자. 때문에 ’하파에우 톨로이’가 아닌 ’라파엘 톨로이’가 정확한 이름이다.

그는 이방인이었다. 브라질에서 유소년을 시작했고 로마에서는 잠시 머물렀을 뿐이다. 2015년부터 아탈란타 BC에 정착한 라파엘 톨로이(Rafael Tolói; 브라질 태생의 이탈리아 수비수, 1990-)는 2025년 여름 떠날 때까지 팀의 ’심장’으로 불렸다.

마투그로수주의 글로리아 두에스치에서 태어났다. 고이아스에서 프로가 됐고, 2009년에는 브라질 20세 이하 대표로 남미 선수권을 우승하고 그해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준우승했다. 상파울루로 옮겨 2012년 코파 수다메리카나를 들었으며, 2014년에는 AS 로마에 임대로 와서 리그 다섯 경기를 뛰고 돌아갔다. 아탈란타가 그를 산 날은 2015년 8월 26일이다. 9월 13일 사수올로 원정에서 세리에 A에 데뷔했는데, 공교롭게도 80분에 그와 교체돼 나온 선수가 잔파올로 벨리니였다. 열하루 뒤 엠폴리 원정에서는 머리로 결승골을 넣었다.

아탈란타 통산 300경기 돌파, 가스페리니 체제의 3백 수비 전술 중심축. 그는 수비수이면서 공격의 시작점이었고, 캡틴이면서 때로 가장 겸손한 병사였다.

오른발로 전진 패스를 찌르고, 머리로는 실점을 지워냈으며, 몸을 던져 팀의 리듬을 지켜냈다. 그런 그의 플레이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균형.

힘이 좋고 발도 빨랐지만 장기는 예측에 있었다. 상대 공격수가 공을 받기 전에 먼저 끊으러 나갔고, 3백의 바깥 수비수이면서 공격에 자주 올라갔다. 2018년 2월 UEFA 유로파 리그 32강 도르트문트전에서 넣은 골이 그의 첫 유럽 대회 골이다.

2021년 그는 이탈리아 국적을 얻었다. 자신이 품은 클럽과 도시의 정체성에 스스로를 맞추고자 한 선택이었고, 그 끝에 UEFA 유로 2020 우승 국가대표라는 영광까지 쟁취했다.

증조부 다비드 톨로이가 1891년 프리울리의 체르비냐노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FIFA는 2021년 2월 17일 그의 대표팀 변경을 승인했고, 그는 3월 31일 리투아니아 원정에서 서른 살에 데뷔했다. 석 달 뒤 UEFA 유로 2020에서 네 경기를 뛰었다. 스위스전에서는 교체로 들어가 치로 임모빌레의 골을 도왔고 웨일스전에는 선발로 나갔으며, 웸블리의 결승은 벤치에서 지켜봤다.

도니와 벨리니를 잇는 자. 파푸 고메스와 일리치치가 팀을 떠난 뒤 무너진 라커룸의 질서를 복원한 리더. 완장은 2021년 1월 고메스가 떠나며 그에게 넘어왔고, 그는 다섯 시즌 동안 주장이었다. 2024년 5월 더블린 결승에서는 후반 추가시간에 교체로 들어가 구단의 첫 유럽 트로피를 받았다.

2024년 12월 19일 코파 이탈리아 경기에서 300번째 출전을 채웠다. 2025년 5월 23일 구단은 그가 떠난다고 알렸는데, 인사는 숫자로 적혀 있었다. 10년, 313번, 늘 땀에 젖어 있던 셔츠 한 벌. 마지막 홈 경기는 근육 부상 탓에 뛰지 못하고 경기장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대신했으며, 그해 8월 그는 상파울루로 돌아갔다.[4]

5. 스테파노 안젤레리 - 수비형 미드필더

스테파노 안젤레리 수비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수비의 언덕에서 노을을 지킨 사내.

아탈란타의 클래식을 설계한 최초의 기초공사자.

그의 이름은 아마 많은 현대 축구팬들에겐 낯설 것이다. 허나 클럽의 기초란 기억에서 잊혔을 뿐 결코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스테파노 안젤레리(Stefano Angeleri; 이탈리아 미드필더·감독, 1926-2012), 1949년부터 ’60년까지 열한 시즌 동안 아탈란타의 중원에서 자리를 지킨 ‘클럽의 숨결’.

피에몬테의 카스텔라초 보르미다에서 태어나 지역 아마추어 팀과 보게레세를 거쳐 1947년 유벤투스에 들어갔다. 발렌티노 마촐라의 토리노가 모든 것을 이기던 때였고, 그 그늘 아래의 유벤투스에서 그는 두 시즌 동안 세리에 A 47경기를 뛰었다. 1949년 여름 유벤투스가 아탈란타의 자코모 마리를 데려가면서 그는 그 거래에 얹혀 베르가모로 왔다. 달갑지 않은 이적이었고 잠깐 머물다 갈 곳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는 거기서 선수로 열한 해, 코치와 감독으로 여덟 해를 보냈고 2012년 베르가모에서 눈을 감았다.[4]

그는 전형적인 수비형 미드필더였지만 동시대 선수들과는 달리 공간을 수비한 선수였다. 그의 플레이는 육체적이기보단 지리적이었다. 한 발짝 빠르게 읽은 방향과 한 걸음 미리 끊은 패스가 그의 무기였다.

당시의 말로는 메디아노(mediano; 상대 인사이드 포워드를 맡던 하프백)였다. 시야가 좋았고 마크는 사나웠다. 몸이 가늘었으며 두 팔을 벌린 채 뛰었는데, 그 팔이 날개 같다 하여 별명이 갈매기, 가비아노(Gabbiano)가 됐다. 가끔은 오른쪽 날개로도 섰다.

때문에 필자는 그를 ’미리 보는 축구’를 실현한 전후 세대의 몇 안 되는 지성이라 적는다.

그가 뛰는 동안 아탈란타는 열한 시즌 가운데 열 시즌을 세리에 A에서 보냈다. 한 번 떨어진 1958년에 완장이 그에게 왔고, 그는 주장으로 1958-59시즌 세리에 B를 우승해 팀을 한 해 만에 올려놓았다. 무너질 듯한 순간마다 그가 지킨 자리는 늘 ’버팀목’처럼 남아 있었다.

리그 317경기, 그 가운데 세리에 A가 281경기다. 리그 317경기는 그가 은퇴한 뒤로도 51년을 더 가서 2011년 벨리니가 넘을 때까지 구단 최다 기록으로 남았다. 세리에 A 281경기는 2016년 벨리니가 똑같이 채웠고, 훗날 더론이 넘어설 때까지 두 사람이 나눠 가졌다.

은퇴는 1960년, 서른넷의 일이다. 심장에 문제가 생겨서였다.

은퇴 후엔 아탈란타 유소년팀을 거쳐 1군 감독까지 역임했다. 1965-66시즌 도중 경질된 감독의 자리를 넘겨받아 팀을 12위로 잔류시켰고, 1969년까지 두 번에 걸쳐 102경기를 지휘했다. 그 뒤 파르마를 세리에 C로, 크레모네세를 세리에 B로 올렸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석 달 뒤, 고향 카스텔라초 보르미다는 시립 경기장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4]

6. 글렌 스트룀베리 - 중앙 미드필더

글렌 스트룀베리 중앙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2012년 훈장은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훈장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별 훈장(Ordine della Stella d'Italia) 장교장이다.

유럽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

지중해에 내린 북유럽의 품격.

스웨덴 출신. IFK 예테보리와 벤피카, 그리고 스웨덴 축구 대표팀의 핵심으로 활약했던 글렌 스트룀베리(Glenn Peter Strömberg; 스웨덴 미드필더, 1960-)는 1984년, 갑작스레 이탈리아의 중하위권 팀인 아탈란타 BC를 선택한다.

그는 휘황찬란한 스타였고, 그 선택은 그의 인격과 철학을 가장 명확하게 증명한 한 수였다.

열여섯 살까지 그는 탁구 선수였다. 본인 말로는 유럽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유망주였다. 예테보리 유소년에 들어간 뒤 그를 붙든 사람이 스벤예란 에릭손(Sven-Göran Eriksson; 스웨덴 축구 감독, 1948-2024)이다. 2군에서 아홉 달을 다쳐 쉬는 동안 기다려 줬고, 달리기 측정 결과를 보고는 더 영리하게 뛰는 법을 배우라고 일렀다. 아무도 달지 않으려던 17번을 받고 나간 데뷔전에서 그는 골을 넣었다. 1982년 예테보리는 함부르크를 꺾고 UEFA컵을 들었는데, 구단이 파산 직전이어서 8강 발렌시아 원정의 여비를 팬들이 댔다고 그는 회고한다. 이듬해 에릭손을 따라 벤피카로 가서 리그를 두 번 우승했다.[3]

이탈리아가 그를 눈여겨본 무대는 UEFA 유로 1984 예선이었다. 스웨덴은 이탈리아를 두 번 다 이겼고 그는 그 두 경기에서 세 골을 넣었다. 1984년 그가 받아 든 계약서는 유벤투스나 밀라노의 구단이 아닌, 막 승격한 아탈란타의 것이었다. 2년 전까지 3부 리그에 있던 구단이었으며, 구단의 트로피를 다 합쳐도 스물네 살의 새 선수가 가진 것보다 적었다. 그래도 그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어려운 리그에서 뛴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고개를 돌리면 우디네에 지쿠가, 유벤투스에 플라티니가, 나폴리에 마라도나가 있던 시절이다. 다만 첫 몇 달은 충격이었다. 예테보리와 벤피카에서는 이기려고 뛰었는데 아탈란타에서는 지지 않으려고 뛰어야 했던 까닭이다.

그는 패스의 결부터 달랐다. 그의 오른발에서 나오는 롱패스는 마치 현악기의 아르페지오처럼 리듬과 방향, 높낮이가 조율된 음악에 가까웠더라지.

90분을 통째로 이해하고 그 안에서 ’공간’을 해석하던 지성의 미드필더였다. 190cm의 키로 중원의 끝에서 끝을 오갔고 별명은 마라토너였다. 1985년에는 스웨덴 올해의 선수상 굴드볼렌을 아탈란타 선수로 받았다. 32년 앞서 그 상을 받은 선배가 이 글의 2번 구스타브손이다.

그가 아탈란타에 입단한 해는 팀이 세리에 B에서 세리에 A로 막 올라온 해였고, 이후 1992년까지 여덟 시즌 동안 그는 팀의 중원을 완벽히 지배한 ’축구 귀족’으로 남았다.

전설이 된 계기는 팀이 떨어진 해에 있다. 1986-87시즌 아탈란타는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 오르고도 강등됐다. 여러 구단이 그를 원했고 로마에 있던 에릭손도 그를 불렀다. 새로 온 감독 에밀리아노 몬도니코(Emiliano Mondonico;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47-2018)가 그를 붙잡았다. 비난과 뒷말은 신경 쓰지 말라고, 너와 함께면 곧바로 1부로 돌아간다고 했다. 강등에 제 몫의 책임을 느끼던 그는 남았고, 몬도니코는 그에게 완장을 줬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카드놀이 일화가 전한다. 원정길 버스에서 세 시간째 카드를 쥐고 있던 그에게 감독이 집중력을 해친다며 그만하라고 하자, 대표팀 경기에서 지고 돌아와 심기가 사납던 그가 세 시간 가운데 두 시간은 치겠노라고 대들었다. 동료들이 하얗게 질린 가운데 몬도니코는 스트룀베리가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고 물러섰다. 이튿날 까닭을 묻는 그에게 감독은 웃으며 답했다고 한다. 네게 무기를 하나 준 것이니 잘 쓰라고.[3]

그 여름 프리시즌 친선 경기에서 그가 두 골을 넣은 날, 관중석에서 “일어나, 마리사!“라는 야유가 날아왔다. 마리사는 상대 팬들이 그의 긴 금발을 놀리며 부르던 여자 이름인데, 자기 팀 관중석에서 그 이름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울타리를 넘어 관중석으로 들어가 소리친 사람 앞에 섰다. 내 이름은 글렌 스트룀베리이고 스웨덴과 아탈란타의 주장이니 잊지 말라고 했다. 머지않아 베르가모의 팬들이 그를 따라 머리를 기르게 된다.

그 시즌 2부 리그의 아탈란타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 나갔다. 코파 이탈리아 우승팀 나폴리가 리그까지 우승하면서 준우승팀에게 자리가 돌아온 덕이다. 웨일스의 머서 티드빌, 그리스의 OFI, 포르투갈의 스포르팅 CP를 차례로 넘어 4강에 올랐고, 거기서 그 대회의 우승팀이 되는 벨기에의 KV 메헬런에 두 경기를 모두 1-2로 내줬다. 자국 1부 리그에 속하지 않은 팀이 UEFA 대회에서 거둔 성적으로는 지금도 이것이 가장 높다. 리그에서는 4위로 승격했다.

나는 스웨덴에서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베르가모 사람으로 죽을 것이다.

I was born in Sweden, but I'll die Bergamasco.

글렌 스트룀베리가 자신과 베르가모를 두고

또한 그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스웨덴 축구 대표팀으로 나가 스코틀랜드전에서 골을 넣었다. 아탈란타 선수가 월드컵 본선에서 뛴 전례는 32년 전의 결승에 선 구스타브손에게 있다. 이 열한 명 안에 스웨덴 사람이 둘이고, 둘 다 아탈란타 선수로 월드컵에 나갔다.

1992년 2월 은퇴를 알렸고 그 시즌이 끝이었다. 서른둘의 나이였고 거듭된 근육 부상이 이유였다. 공식전 273경기, 그 가운데 리그가 219경기다. 그는 스웨덴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지금도 베르가모에 살면서 스웨덴 방송의 해설을 하러 비행기를 탄다. 2024년 더블린 결승을 앞두고 그는 결과가 어떻든 아탈란타는 이미 호감으로는 유럽 챔피언이라고 말했다.[3]

아탈란타 BC가 품은 유럽 축구사 역대 최고의 슈퍼스타.

7. 로빈 고젠스 - 왼쪽 윙백

로빈 고젠스 왼쪽 윙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재적 기간 2017-23년은 2017년 6월부터 2022년 1월까지다. 코파 이탈리아 8강 줄(1998-99시즌 외 2회)은 9번 도니 디자인의 것이 넘어온 것이고, 8번·10번·11번 디자인에도 같은 줄이 있다.

측면이라는 바다에서 혁명을 설계한 윙백.

2010년대 유럽 축구 최고의 풀백 조합 어떻게 뽑으세요? 라고 누군가 물을 때, 필자는 대부분 이 조합을 말한다. “로빈 고젠스 & 한스 하테부르요.”

대개의 선수는 전술을 따라가는데, 로빈 고젠스(Robin Everardus Gosens; 독일 윙백, 1994-)의 경우에는 전술이 그를 따라갔다. 현대 축구의 전장을 가장 먼저 읽어낸 일기예보자가 그였다.

베르가모에서 폭발한 이 좌측 날개는 한때 완전한 무명이었으나, 가스페리니 체제 아래에서 유럽 전체가 주목한 포지션 해체자가 되었다.

네덜란드 국경에 붙은 독일 마을 엘텐에서 자랐다. 엘텐은 1949년부터 1963년까지 네덜란드가 다스리던 곳이고 그의 아버지는 네덜란드 국적이다. 포르투나 엘텐과 보홀트, 레데 같은 동네 구단에서 공을 찼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가 떨어졌다. 본인은 그날을 낭패라고 부른다. 프로 경력은 국경 너머에서 열렸다. 2012년 피테서 유소년에 들어갔고, 임대로 간 도르드레흐트에서 팀의 1부 승격을 도왔으며, 헤라클레스 알멜로에서 두 시즌을 뛴 뒤 2017년 6월 2일 아탈란타에 왔다. 첫 골은 그해 11월 에버턴 원정 5-1 승리에서 나왔다.

그가 아탈란타에서 뛴 시간 동안 표현한 포지션은 “득점하는 미드필더”, “침투하는 스트라이커”, 그리고 무엇보다 로빈 고젠스 자체로서의 “왼쪽을 파괴하는 수비수”와 같았다.

뒷공간을 찌르는 노련한 오버래핑, 상대 수비를 등지고 내려오는 위치 선정, 오른발로도 가능했던 침착한 마무리, 그리고 수비 시의 직선적이고 강력한 인터셉트가 그의 연장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2019-20시즌과 2020-21시즌에 걸쳐 수비수답지 않은 스탯을 양산해낼 수 있었고, UEFA 유로 2020에서 독일 축구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도 완벽한 모습을 선보일 수 있었다.

2019-20시즌 그는 유럽 5대 리그의 수비수 가운데 골과 도움이 가장 많았다. 2019년 12월 샤흐타르 원정에서 넣은 UEFA 챔피언스 리그 첫 골은 아탈란타를 16강에 올린 3-0의 마지막 골이었고, 2020년 11월에는 안필드에서 리버풀을 2-0으로 이긴 경기의 두 번째 골을 넣었다. 2020-21시즌 리그에서는 11골을 넣었는데, 세리에 A에서 수비수가 한 시즌 두 자릿수 골을 넣기는 마르코 마테라치 뒤로 14년 만이었다.

호날두의 셔츠 이야기는 그가 2021년에 낸 자서전에 직접 적었다. 2019년 코파 이탈리아에서 유벤투스를 3-0으로 이긴 날, 그는 경기가 끝나자 자축도 미루고 어릴 적 우상에게 가서 셔츠를 달라고 청했다. 호날두는 쳐다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했다. 얼굴이 달아올랐고 누가 봤을까 주위를 살폈노라고 그는 썼다. 2021년 6월 19일 UEFA 유로 2020, 호날두가 주장으로 나온 포르투갈을 독일이 4-2로 이긴 경기에서 그는 한 골을 넣고 두 골을 도와 경기 최우수 선수가 됐다.[3]

2022년 1월 인테르로 떠났다. 아탈란타에 남긴 기록은 157경기 29골이며, 그 가운데 리그 골이 25개다.

8. 한스 하테부르 - 오른쪽 윙백

한스 하테부르 오른쪽 윙백 상세 정보 디자인

돌격하는 수학자.

고젠스와 잊을 수 없는 조합이 바로 한스 하테부르와의 양쪽 날개다. 오른쪽의 강철, 왼쪽의 예술. 가스페리니의 3-4-1-2라는 실험실에서 나온 최고의 작품이 이 둘이었고, 유럽은 그 해의 ’아탈란타’를 이 조합으로 기억했다.

네덜란드 흐로닝언 출신으로 그의 등장 자체는 이목을 끌지 못했으나, 아탈란타 BC 입단 후 “좋은 백업” 자원에서 명실상부 유럽을 대표하는 오른쪽 윙백으로 성장한 이가 한스 하테부르(Hans Hateboer; 네덜란드 윙백, 1994-)다.

흐로닝언주의 마을 베이르타에서 태어나 동네 구단을 거쳐 FC 흐로닝언에서 컸다. 2014년 1월의 프로 데뷔전부터 요란했다. 도움을 하나 올리고 퇴장을 당했다. 2015년에는 구단의 첫 메이저 트로피인 KNVB컵을 들었다. 계약 마지막 해에 그가 여름에 자유 계약으로 떠나겠다는 뜻을 밝히자, 흐로닝언은 빈손이 되느니 겨울에 파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2017년 1월 31일 아탈란타로 왔고, 떠날 때 그는 그 시즌 에레디비시 수비수 가운데 도움이 가장 많았다.

처음 몇 달은 안드레아 콘티의 백업이었다. 3월 19일 페스카라전에서 세리에 A에 데뷔해 그날 파푸 고메스의 골을 도왔고, 여름에 콘티가 AC 밀란으로 팔려 가자 오른쪽이 그의 차지가 됐다. 첫 골이 나오기까지는 1년 반이 걸렸다. 2018년 8월 9일 UEFA 유로파 리그 예선 하포엘 하이파 원정에서였고, 열하루 뒤 프로시노네와의 개막전에서 세리에 A 첫 골을 넣었다. 그 사이인 2018년 3월 23일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네덜란드 대표팀에 데뷔했다. 2018-19시즌 그는 세리에 A 서른여덟 경기에 빠짐없이 나서 다섯 골을 넣었고 팀은 처음으로 3위를 했다.

그는 아탈란타의 오른쪽을 구조적으로 다시 썼고, 그라운드를 수평으로 여는 열쇠가 되었으며, 잔 피에로 가스페리니 감독 전술의 Master Key였다.

강한 체력,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돌파, 골문을 향한 낮고 빠른 크로스, 그리고 후방 침투 능력까지 갖췄다.

특히 로빈 고젠스와의 좌우 조합은 유럽 5대 리그 역사상 가장 독창적이고 공격적인 듀오 중 하나로 회자된다. 고젠스는 왼쪽에서 예술을 펼치고, 하테부르는 오른쪽에서 속도와 직선의 논리를 펼쳤다.

한쪽 윙백이 올린 공에 반대쪽 윙백이 뛰어드는 장면이 그 시절 아탈란타의 서명이었다. 그 서명이 가장 크게 찍힌 밤이 2020년 2월 19일이다.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 밀라노의 산 시로를 빌려 치른 발렌시아전에서 하테부르는 두 골을 넣었고 아탈란타는 4-1로 이겼다. 그의 첫 골은 아탈란타가 이 대회 토너먼트에서 넣은 첫 골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구단의 네덜란드 선수가 이 대회에서 한 경기 두 골을 넣기는 마르코 판바스턴과 클라런스 세이도르프 뒤로 그가 세 번째였다.

그 결과 아탈란타는 2019-20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에 올랐고, 세리에 A 3위를 지켰으며, 더 나아가 네이마르와 음바페가 버티던 PSG를 침몰 직전까지 몰아칠 수 있었다. 리스본에서 치른 8강 단판에서 아탈란타는 90분까지 1-0으로 앞섰고, 그 뒤 3분 사이에 두 골을 내줬다.

2023년 2월 십자인대가 끊어져 그 시즌을 접었다. 돌아온 2023-24시즌에는 더블린 결승 84분에 교체로 들어가 트로피를 들었고, 그해 8월 프랑스의 스타드 렌으로 떠났다. 아탈란타에서 일곱 해 반 동안 리그 188경기를 뛰었다.

9. 크리스티아노 도니 - 공격형 미드필더

크리스티아노 도니 공격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클럽 그 자체.

아탈란타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가장 복잡하며, 가장 사랑받았던 이름.

1998년 네라주리 유니폼을 입고, 2003년에 떠났다가 2006년에 돌아와 2011년까지, 두 번에 걸친 열 시즌 동안 이 클럽의 모든 빛과 그림자를 품은 이름이 크리스티아노 도니(Cristiano Doni; 이탈리아 공격형 미드필더, 1973-)다.

’이름 없는 팀’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만든 미드필더가 그였다. 한 마디로 이 구단 자체에서는 G.O.A.T.에 위치한 선수다.

로마에서 태어나 세 살에 베로나로 갔고 모데나 유소년에서 컸다. 리미니, 피스토이에세, 볼로냐, 브레시아까지 8년 동안 네 구단의 셔츠를 입었으며 그 사이 승격을 세 번 했다. 1998년 여름 그는 브레시아에서 그 맞수인 아탈란타로 옮겼다. 두 구단이 나란히 2부로 떨어진 해였다.

이듬해 부임한 조반니 바바소리(Giovanni Vavassori;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52-) 감독은 4-4-2의 측면에 그를 세웠다. 그는 2부 리그 35경기에서 14골을 넣었고 아탈란타는 승격했다. 승격 첫해인 2000-01시즌에 팀은 7위를 했다.

터져 나오는 강력한 중거리 슈팅, 침투 타이밍을 정확히 재는 패스 시야, PK 상황에서의 냉철한 판단력이 그의 것이었다.

때문에 크리스티아노 도니는 플레이메이커이면서 동시에 피니셔 역할을 수행했고, 심지어 “팀을 완전히 단독 캐리할 수 있는 결정자”였다. 2001-02시즌엔 세리에 A에서 16골을 터뜨리며 중하위권 팀 소속으로는 이례적인 득점력을 보였고, 그 시즌에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2001년 11월 7일 사이타마에서 열린 일본과의 친선 경기, 이탈리아가 0-1로 끌려가던 후반에 19번을 달고 들어간 그는 5분 만에 동점골을 넣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는 에콰도르전과 크로아티아전에 선발로 나갔다.

그해 여름에는 유벤투스로 가는 문이 열릴 뻔했다. 시즌 마지막 홈 경기가 끝나자 그는 작별 인사처럼 경기장을 한 바퀴 돌았는데, 동료 루차노 차우리와 함께 가기로 돼 있던 이적은 여름 사이에 깨졌다. 남은 그는 2002-03시즌 잦은 부상 속에서도 열 골을 넣었으나 팀은 레지나와의 잔류 플레이오프에서 져 2부로 떨어졌다.

골을 넣으면 그는 턱 밑에 손을 대고 고개를 들었다. 그 세리머니의 연원은 2000-01시즌에 있다. 그해 가을 그와 동료 몇이 코파 이탈리아 피스토이에세전의 결과를 짰다는 혐의를 받았고, 혐의가 풀린 뒤 그는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다는 뜻으로 그 동작을 했다.[3]

골 세리머니이기만 한 게 아니다. 사는 방식이다.

Non è solo un gesto di esultanza ma uno stile di vita.

크리스티아노 도니가 턱 밑에 손을 대는 자신의 세리머니를 두고

그 경기가 실제로 짜인 경기였다는 사실을 그는 12년 뒤에 스스로 인정했다.[3]

2003년 팀이 강등되자 삼프도리아로 갔고 스페인의 마요르카에서 한 시즌을 보냈다. 2006년 여름, 계약이 한 해 남아 있던 그는 마요르카에 풀어 달라고 청하고 연봉을 깎아 베르가모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그는 이 셔츠가 자기에게는 마법 같은 것이며, 클라크 켄트를 슈퍼맨으로 바꾸던 그 옷에 견줄 만하다고 했다. 말대로였다. 본래의 자리인 공격형 미드필더로 돌아간 2006-07시즌에 13골을, 이듬해에 12골을 넣었고, 2008-09시즌의 아홉 골 가운데 넷은 그해의 챔피언 인테르를 상대로 넣었다.[3]

날짜있었던 일
2008년 5월 4일리보르노전 골로 구단의 세리에 A 최다 득점자가 됨. 아드리아노 바세토가 1957년부터 갖고 있던 기록
2008년 12월 4일베르가모시 공로 시민. 축구 선수로는 처음
2010년 1월 17일라치오전 두 골로 아탈란타 통산 100골
2011년 3월 19일피아첸차전 두 골로 아탈란타 리그 통산 100골
2011년 8월 9일승부조작으로 자격 정지 3년 6개월. 대상 경기는 3월 19일 피아첸차전. 구단은 승점 6점 삭감
2011년 12월 19일크레모나 검찰의 두 번째 수사로 다른 열여섯 명과 함께 체포
2012년 5월 31일자격 정지 2년 추가. 모두 5년 6개월
2019년 7월볼로냐 법원, 범죄 단체 가담 혐의에 공소시효 완성 선고

리그 100번째 골을 넣은 경기와 징계의 대상이 된 경기가 같은 경기다. 서른여덟이던 그에게 3년 6개월은 은퇴나 다름없는 기간이었다. 통산 323경기 112골. 리그 103골과 세리에 A 69골까지 구단의 득점 기록은 지금도 그의 것이며, 세리에 A 69골은 뒷날 두반 사파타가 같은 숫자를 채웠다.

아탈란타 팬들은 그를 ’클럽의 정체성을 만든 자’로 기억한다. 팀이 세리에 B로 강등될 때도, 그가 팀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때도, 논란에 휘말렸을 때조차 팬들은 그를 잊지 않았고, 그 역시 팬들을 항상 최우선 존재로 생각했기에 그렇다.

완벽한 사람은 못 됐고 때로는 스캔들의 한복판에 섰으며 경기 밖에서도 논란을 낳았으나, 아탈란타 팬들은 그를 항상 GOAT라고 기억하고 있다.

10. 알레한드로 고메스 - 세컨드 스트라이커

알레한드로 파푸 고메스 세컨드 스트라이커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245경기 12골 21도움은 8번 하테부르 디자인의 숫자가 넘어온 것이다. 고메스의 아탈란타 기록은 252경기 59골이다.

아탈란타의 리오넬 메시.

파푸의 춤은 전술이었다. 작지만 거대한, 아탈란타의 혼.

그는 167cm라는 작은 키를 지녔고, 68kg밖에 되지 않는 야리야리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빠르지도, 강하지도, 높지도 못했다. 그런 그가 공을 잡는 순간 아탈란타 전체 경기의 결이 바뀌었고, 팬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축구를 보기 시작했다.

2014년, 세리에 A의 중위권에 위치하던 아탈란타 BC는 파푸를 영입하는데, 당시의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테크니션, 적당한 2선 자원 정도의 평가를 받던 공격수였다. 본명은 알레한드로 고메스(Alejandro Darío Gómez; 아르헨티나 공격수, 1988-)이고 모두가 그를 파푸(Papu)라 부른다.

날짜는 9월 1일, 이적 시장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자코모 보나벤투라가 AC 밀란으로 떠났고 아탈란타는 몇 시간 안에 그 자리를 메워야 했다. 우크라이나의 메탈리스트 하르키우에 있던 스물여섯의 고메스가 그렇게 왔다. 재능은 있으되 기복이 심해 강팀에 한 번도 자리 잡지 못한 선수라는 것이 당시의 평판이었다. 첫 시즌 그는 24경기에서 세 골을 넣었고 팀은 17위로 겨우 살아남았다. 이듬해에는 일곱 골과 도움 여섯 개로 팀 안에서 두 부문 모두 첫째였다.

그러다 그는 점점 더 성장하며, 팀을 전술적 언어로 번역해냈다.

그의 플레이는 리오넬 메시를 닮았고, 데쿠의 시야를 장착한 듯싶었으며, 하비에르 사비올라의 템포를 얹어, 디에고 마라도나의 자존감이 얽혀있는 듯하였다. 남미 특유의 정열적인 템포를 지녔던 공격수라는 말이다.

가스페리니가 온 2016-17시즌 그는 리그에서 16골을 넣었고 팀은 4위를 했다. 2017년 크리스티안 라이몬디가 은퇴하자 완장이 그에게 왔다. 그해 5월에는 그의 춤에 노래가 붙었다. 「바일라 코모 엘 파푸」(Baila como El Papu; 파푸처럼 춤춰라)라는 싱글이 나와 이탈리아에서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9월 14일 에버턴전은 그의 첫 유럽 대회 경기였는데 그는 그 경기에서 골을 넣었다. 아탈란타가 26년 만에 유럽 대회로 돌아온 밤이었다.

팀이 세리에 A 강팀으로 도약할 때, 세리에 A TOP 4에 수년 연속으로 진입하고, 코파 이탈리아 결승을 진출하며,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타 리그의 강팀들을 상대로 “공격이란 무엇인지” 교육을 하던 그 시절.

3-4-1-2 시스템의 전술 허브. 하프라인 근처에서 빌드업 조율.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 직접 피니시. 위 3박자를 동시에 수행해 내던 게 파푸 고메스였다.

숫자로는 2019-20시즌이 꼭대기에 해당한다. 리그에서 도움 16개를 올렸고, 이는 그때까지 세리에 A 한 시즌 최다 기록이었다. 2019년 11월 26일 디나모 자그레브전에서는 UEFA 챔피언스 리그 첫 골을 넣었는데, 그 2-0이 아탈란타가 이 대회에서 거둔 첫 승리다. 2020년 6월에는 어린이를 위한 만화책 한 권을 자기 이름으로 냈다.

파국은 느닷없었다. 2020년 12월 1일 UEFA 챔피언스 리그 미트윌란전 하프타임에 그와 가스페리니가 그의 자리를 두고 부딪쳤다. 오른쪽에 있으라는 지시에 그가 싫다고 답한 소리가 관중 없는 경기장에 그대로 들렸다고 AP 통신은 전했다. 그는 후반에 나오지 않았고, 뒷날 감독이 자신을 때리려 들었노라고 말했다. 12월 16일 유벤투스전이 마지막 경기가 됐으며 1월에 세비야로 떠났다. 이 글의 맨 앞에 세운 감독과 맨 앞줄에 세운 선수는 그렇게 갈라섰다.[4]

252경기 59골로 구단 역대 득점 7위다. 세리에 A 통산 도움 80개는 리그 역대 10위에 든다.

11. 요시프 일리치치 - 세컨드 스트라이커

요시프 일리치치 세컨드 스트라이커 상세 정보 디자인

악마의 왼발, 천사의 멜랑콜리(melancholy).

요시프 일리치치(Josip Iličić; 슬로베니아 공격수, 1988-). 보스니아의 프리예도르에서 크로아티아계 집안에 태어났다. 한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와 형과 함께 슬로베니아의 크란으로 옮겨 거기서 자랐다. 그는 말수가 적었고, 고독을 품은 채 그라운드를 걷는 자였다.

허나 공만 잡으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축구를 말했다. 그의 왼발은 직선 대신 곡선을 그었고, 패스 하나하나가 잠 못 드는 밤의 멜로디 같았으며, 슛 하나하나가 잔잔한 비극의 문장 같았다.

190cm의 키에 빠르지 않은 발, 그리고 뒤꿈치로 공을 끊어 치는 속임 동작이 있었다. 이탈리아 언론은 그의 생각의 속도를 두고 교수(Il Professore)라 불렀다. 팔레르모에서 세 해, 피오렌티나에서 네 해를 보내는 동안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두 번 졌다. 2017년 여름 피오렌티나가 재계약을 내밀지 않자 스물아홉의 그는 삼프도리아와 계약하기 직전까지 갔는데, 팔레르모에서 그를 가르친 적이 있는 가스페리니의 아탈란타가 550만 유로에 그를 가로챘다. 고메스와 마찬가지로 재능은 있으되 기복이 심하다는 평판을 달고 온 선수였다.

그의 전성기는 2018년부터 ’20년까지가 명확했다.

아탈란타 공격의 삼각편대로 ‘도니의 후계자’, ’파푸의 파트너’로서 게비스 스타디움 전체를 울렸으며,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경기 4골을 휘몰아치며 유럽 전역에 ’아탈란타 공포증’을 처음으로 미디어에 심은 존재이기도 했다.

2018년 12월 29일
교체로 들어가 해트트릭사수올로 원정 6-2. 세리에 A에서 세 번째
2020년 1월 25일
100번째 경기의 해트트릭토리노 원정 7-0. 하프라인 프리킥이 그 안에 있다
2020년 3월 10일
메스타야의 네 골발렌시아 원정 4-3. 이 대회 토너먼트 원정 경기에서 처음
32세 41일
그날의 나이이 대회에서 한 경기 네 골을 넣은 최고령. 앞선 기록은 이브라히모비치

메스타야의 네 골은 관중이 한 명도 없는 경기장에서 나왔다. 코로나19가 유럽의 경기장을 닫던 주였다. 그 시즌 그는 34경기에서 21골을 넣었고 그 가운데 열다섯이 1월 뒤에 나왔다. 발롱도르 후보로 꼽아야 마땅하다는 말이 그 무렵 이탈리아에서 돌았다.

그는 공격수였기에 상대를 찢어버렸고, 왼발의 킥은 가히 ’악마의 재능’이라 불리기에 적절했다.

절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리그가 다시 열린 2020년 여름 그는 개인적인 문제로 팀을 떠나 슬로베니아로 돌아갔다. 석 달 뒤에 복귀했고 11월 안필드에서 아탈란타 통산 50번째 골을 넣었다. 2021년 12월부터는 다시 경기에 나오지 못했다. 가스페리니는 2021-22시즌 마지막 경기의 마지막 10분에 그를 넣었다. 홈 관중에게 인사할 시간이었다.

2022년, 공식 작별 당시 베르가모는 눈물로 그를 보냈다. 8월 31일 계약을 풀었고, 이튿날인 9월 1일 토리노전을 앞둔 게비스 스타디움에서 그는 경기장을 한 바퀴 돌았다. 관중석 전체가 일어섰다. 173경기 60골 44도움이 남았다.[4]

트로피보다 기억 속의 문장으로 남은 사내다.

그 누구도 일리치치의 아픔을 알지 못했으나, 이제 세상은 아픔을 품고도 월드 클래스 반열에 진입했던 그를 기억한다.

마침내, 한 경기장에 선 열한 명

아탈란타 BC 역대 베스트 11 표제 3-4-1-2 대형으로 배치한 아탈란타 BC 역대 베스트 11 아탈란타 BC 역대 베스트 11 후보 15인 편집물
표제, 열한 명의 대형, 후보 15인. 1931년에 데뷔한 주세페 보노미부터 지금도 아탈란타에서 뛰는 마리오 파샬리치까지 스물여섯 명이 한 흐름에 들어간다.

이 명단은 아탈란타 BC의 가장 위대했던 역대 베스트 11인의 명단이다.

페론이 잡은 공은 톨로이에게 먼저 간다. 톨로이가 오른쪽으로 올라서면 벨리니가 그 뒤를 메우고 구스타브손이 가운데를 잠근다. 안젤레리가 상대 인사이드 포워드를 붙잡는 동안 스트룀베리가 반대편으로 길게 연다. 하테부르가 그 공을 받아 낮게 올리면 먼 쪽 골대로 고젠스가 뛰어든다. 안에서는 일리치치가 왼발 쪽으로 꺾어 들어오고, 고메스가 그 사이를 빠져나가며, 도니가 한 박자 늦게 페널티 지역에 닿는다.

주장 일곱, 구단 역대 득점 1위와 6위와 7위, 그리고 2026년 3월까지 구단에서 가장 많은 경기를 뛴 사람이 이 열한 명 안에 있다. 스웨덴에서 둘, 이탈리아에서 넷이 왔고 브라질 태생의 이탈리아 대표가 하나, 독일과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와 슬로베니아에서 하나씩 왔다. 베르가모가 119년 동안 불러 모은 이름들이다.

작은 거인의 신화.베르가모가 써 내려온 스물여섯 개의 이름.

이미지 밖에서 다시 읽는 후보 15인

후보 열다섯을 글자로 다시 적는다. 가스페리니의 선수가 일곱이고 제2차 세계 대전 전의 이름이 둘이다. 포지션은 그림에 적은 대로 두었다. 그림의 A. 페르카시는 지금의 구단 회장 안토니오 페르카시이고, H. 마스치오는 움베르토 마스키오다. 그림의 안젤로 로뇨니는 1954년부터 1961년까지 뛴 날개 안젤로 롱고니로 읽었다.

  • 차카리아 코메티Zaccaria Cometti · 골키퍼

    1957-1970년 리그 178경기. 은퇴 뒤 골키퍼 코치로 남아 페론을 찾아냈다.

  • 안토니오 페르카시Antonio Percassi · 센터백

    1971-1977년 리그 110경기. 2010년부터 구단을 이끄는 회장이다.

  • 마시모 카레라Massimo Carrera · 센터백

    1996-2003년 리그 207경기. 여섯 시즌 동안 주장이었다.

  • 호세 루이스 팔로미노José Luis Palomino · 센터백

    2017-2024년 리그 175경기. 가스페리니 3백의 한 자리를 일곱 해 지켰다.

  • 베라트 짐시티Berat Djimsiti · 센터백

    2018-2026년 334경기. 더블린 결승에 주장 완장을 차고 선발로 섰다.

  • 다미아노 제노니Damiano Zenoni · 라이트백

    1998-2005년 리그 209경기. 2003년부터 두 시즌 주장을 맡았다.

  • 마르턴 더론Marten de Roon · 수비형 미드필더

    2015-16시즌과 2017-2026년 445경기. 구단 최다 출전 기록을 가진 사람이다.

  • 레모 프로일러Remo Freuler · 중앙 미드필더

    2016-2022년 리그 203경기 18골. 3위를 세 번 한 팀의 중원이다.

  • 주세페 보노미Giuseppe Bonomi · 라이트 미드필더

    1931-1938년 리그 99경기 23골. 1937년 구단의 첫 세리에 A 승격을 함께했다.

  • 마리오 파샬리치Mario Pašalić · 공격형 미드필더

    2018년부터 2026년 9월까지 350경기 69골. 득점은 구단 역대 3위다.

  • 안젤로 롱고니Angelo Longoni · 라이트 윙

    1954-1961년 리그 197경기 38골. 한 번 뛴 A매치에서 두 골을 넣었다.

  • 움베르토 마스키오Humberto Maschio · 센터 포워드

    1959-1962년 리그 80경기 22골. 아르헨티나에서 온 공격수다.

  • 조반니 가도니Giovanni Gaddoni · 센터 포워드

    1939-1942년 리그 76경기 40골. 1939-40시즌 세리에 B에서 25골을 넣었다.

  • 두반 사파타Duván Zapata · 센터 포워드

    2018-2023년 82골. 구단 역대 득점 2위다.

  • 루이스 무리엘Luis Muriel · 센터 포워드

    2019-2024년 리그 144경기 54골. 유럽 대회 12골은 파샬리치와 함께 구단 최다다.

기록을 확인한 곳

  1. 구단이 적은 기록과 인사 — Atalanta BC 「Palmares」, 「Grazie Mister!」(2025년 6월 1일), 「Gianpaolo Bellini ushering in the “La Scuola allo Stadio” 2024/25」(2024년 10월 12일). 1962-63시즌 코파 이탈리아와 2023-24시즌 UEFA 유로파 리그, 가스페리니에게 보낸 구단의 답, 벨리니가 학생들에게 한 이야기와 구단이 적는 435·398·281경기.
  2. 가스페리니의 편지와 아홉 해 — Calciomercato.com에 실린 『레코 디 베르가모』 편지 전문(2025년 5월 31일), Il Post 「La rivoluzione senza fine di Gian Piero Gasperini」(2024년 5월 10일). 인용문과 편지의 내용, 유벤투스 유소년과 제노아·인테르 시절, 첫 다섯 경기와 유소년 출신 기용, 압박과 판할의 아약스, 이적료와 차익.
  3. 당사자가 한 말 — Virgilio Sport의 페론 인터뷰(2024년 5월), Avvenire의 스트룀베리 인터뷰(2024년 5월 21일), Champions Journal의 스트룀베리 인터뷰, Goal.com이 옮긴 고젠스의 자서전, Goal.com 「Eroe e antieroe: essere Cristiano Doni」. 삼베네데테세의 골키퍼 코치와 나폴리 원정 데뷔전, 탁구와 에릭손·카드놀이·쿠르바 노르드의 깃발, 호날두의 셔츠, 턱 밑의 손과 슈퍼맨의 옷.
  4. 그날의 기사 — Il Giorno 2025년 5월 23일(톨로이), 2012년 1월 31일(안젤레리 부고), 2011년 12월 19일(도니), 2022년 10월 5일(일리치치), Tuttosport 2016년 5월 8일(벨리니의 마지막 홈 경기), Sportmain 「C’era una volta Stefano Angeleri」, AP 통신 2020년 12월 17일(Infobae 게재, 고메스), Lega Serie A 「De Roon, a true Atalanta icon」.
  5. 디자인과 다르게 적은 값 — 페론의 코파 이탈리아 준우승 2회는 1회, 유러피언컵 8강은 UEFA컵 8강이다. 구스타브손 디자인의 성 Gustafsson은 호적의 표기이고 축구 기록의 표기는 Gustavsson이다. 톨로이의 1920-21시즌은 2020-21시즌이다. 고젠스의 재적 기간은 2022년 1월까지다. 고메스의 245경기 12골 21도움은 252경기 59골이다. 스트룀베리의 2012년 훈장은 이탈리아의 별 훈장이다. 벨리니 디자인의 별명 줄은 일리치치의 것이다. 그림의 안젤로 로뇨니는 같은 시대에 같은 자리에서 뛴 안젤로 롱고니로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