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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트넘 홋스퍼 FC
Tottenham Hotspur Football Club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 · 리그 우승 2회 · FA컵 8회 · 리그컵 4회 · 유럽 대회 4회
토트넘 홋스퍼 FC 역대 최고의 전설 열한 명과 후보 열다섯, 스물여섯 개의 이름을 필자의 견해로 골랐다.
북런던의 자존심, 그 단어 속에 숨겨진 진짜 이름들
런던엔 수많은 클럽이 존재한다. 하지만 ’북런던의 자존심’이라는 글자에 가장 오래, 가장 진하게 머문 팀, 바로 토트넘 홋스퍼다.
화려한 우승 트로피보다, 더 찬란한 순간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토트넘은 단순한 클럽이 아닌 감정의 역사서다.
지미 그리브스의 침묵, 대니 블랜치플라워의 철학, 손흥민의 질주,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이름들.
오늘, 우리는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마음속 토트넘 베스트 11은 누구입니까?”
이 콘텐츠는 필자가 정리한 시대의 기록으로, 토트넘 홋스퍼 FC 역대 베스트 11을 가장 정중하고 뜨겁게 소개하려 한다.
이 글의 초고는 2025년 5월 3일에 썼다. 18일 뒤인 5월 21일, 빌바오의 산 마메스에서 토트넘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0으로 꺾고 UEFA 유로파 리그를 들었다. 2008년 리그컵 뒤로 17년 만의 트로피였고 1984년 UEFA컵 뒤로 41년 만의 유럽 트로피였다. 그 트로피를 받아 든 주장이 손흥민이다.[1]
영광은 길지 않았다. 그 시즌 리그 순위는 17위였고, 우승 16일 뒤 포스테코글루 감독이 해임됐다. 8월에는 주장이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2025-26시즌에도 토트넘은 17위였다. 강등권과의 차이는 승점 2였다.
열한 명을 부르기 전에 두 사람을 먼저 세운다.
블랜치플라워와 그리브스: 토트넘의 두 GOAT
토트넘 144년 축구사에서 필자가 역대 최고의 선수(GOAT)라 적는 이름은 둘이다. 한 사람은 이 구단이 어떤 축구를 하는 곳인지를 말로 정해 놓았고, 한 사람은 그 말을 골로 바꿨다. 대니 블랜치플라워(Robert Dennis Blanchflower; 북아일랜드 미드필더, 1926-1993)와 지미 그리브스(James Peter Greaves, MBE; 잉글랜드 공격수, 1940-2021)다.
382경기 21골. 20세기 첫 더블과 영국 구단의 첫 유럽 대회 우승을 주장으로 들었다. 기자단이 뽑는 올해의 선수를 두 번 받았다.
379경기 266골. 잉글랜드 1부 리그 통산 357골과 득점왕 여섯 번은 지금까지 아무도 넘지 못했다.
블랜치플라워의 말부터 적는다. 구단은 지금도 이 말을 그의 축구관 전체로 소개한다.
큰 착각은 축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축구는 영광에 관한 것이고, 멋을 부려 화려하게 해내는 것이며, 나가서 상대를 꺾는 것이다. 상대가 지루해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The game is about glory.
대니 블랜치플라워가 자신의 축구관을 두고
말로 끝난 사람이 아니다. 1960-61시즌 그가 주장인 토트넘은 개막 열한 경기를 내리 이겼다. 잉글랜드 1부 리그의 기록이었다. 리그를 승점 8점 차로 우승했고 FA컵 결승에서 레스터 시티를 이겼다. 리그와 FA컵을 한 시즌에 든 팀은 1897년의 애스턴 빌라 뒤로 처음이었다. 1963년 5월에는 로테르담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5-1로 꺾고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을 들었다. 영국 구단이 유럽 대회에서 우승한 첫날이다. 2009년 영국의 일간지 타임스는 토트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그를 꼽았다.[2]
그리브스는 그 더블 팀에 마지막으로 얹힌 조각이다. 1961년 12월 빌 니컬슨 감독은 AC 밀란에 99,999파운드를 치렀다. 구단의 말로는 감독이 더블 팀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다고 본 선수가 그 하나였다. 그는 흰 셔츠를 입은 첫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했고, 떠날 때까지 379경기에서 266골을 넣었다. 그 득점 기록은 53년을 버텼다. 잉글랜드 1부 리그 전체로 넓혀도 그보다 많이 넣은 사람이 없다. 516경기 357골이다.[10]
| 블랜치플라워 | 그리브스 | |
|---|---|---|
| 토트넘에 온 날 | 1954년 12월, 3만 파운드 | 1961년 12월, 99,999파운드 |
| 첫 경기 | 맨체스터 시티 원정 0-0 | 블랙풀전 5-2, 해트트릭 |
| 1962년 FA컵 결승 | 페널티킥으로 세 번째 골 | 3분 선제골 |
| 1963년 로테르담 | 주장으로 트로피를 받음 | 선제골과 네 번째 골 |
| 잉글랜드 축구의 기록 | 올해의 선수 2회(1958, 1961) | 1부 리그 357골, 득점왕 6회 |
| 떠난 날 | 1964년 4월 은퇴, 서른여덟 | 1970년 3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이적 |
두 사람이 한 팀에서 뛴 것은 1961년 12월부터 1964년 봄까지 두 시즌 반이다. 그 사이 토트넘은 FA컵 하나와 유럽 트로피 하나를 들었다. 두 결승에서 다 한 사람은 완장을 차고 있었고 한 사람은 첫 골을 넣었다.
선정 전술: 주장 여섯이 선 4-3-3
대형은 4-3-3이다. 골문에는 제닝스가 서고, 그 앞 네 명은 왼쪽부터 놀스, 매벗, 킹, 페리먼이다. 가운데는 매카이와 블랜치플라워가 나란히 서고 호들이 한 칸 앞에서 공을 받는다. 맨 앞은 왼쪽에 손흥민, 가운데 케인, 오른쪽으로 처진 자리에 그리브스다.
매카이와 블랜치플라워는 1961년 더블 팀의 좌우 하프백 그대로다. 페리먼은 본래 미드필더지만 주장으로 FA컵을 두 번 든 시절의 자리인 오른쪽 수비에 뒀다.
이 열한 명을 숫자로 보면 한 가지가 더 드러난다. 구단이 집계한 역대 출전 순위의 1위부터 6위까지가 전부 이 안에 있다.[1]
- 1위 · 854경기
- 스티브 페리먼1969-1986년
- 2위 · 611경기
- 게리 매벗1982-1998년
- 3위 · 590경기
- 팻 제닝스1964-1977년
- 4위 · 506경기
- 시릴 놀스1964-1976년
- 5위 · 490경기
- 글렌 호들1975-1987년
- 6위 · 454경기
- 손흥민2015-2025년
득점 쪽도 다르지 않다. 280골의 케인이 1위, 266골의 그리브스가 2위, 173골의 손흥민이 5위다.
트로피 쪽은 구단이 직접 센 숫자가 있다. 2025년 5월 손흥민이 빌바오에서 UEFA 유로파 리그를 들었을 때, 구단은 1882년부터의 역사에서 주요 트로피를 들어 올린 주장이 열세 명이라고 적었다.
| 주장 | 들어 올린 트로피 | 이 명단 |
|---|---|---|
| 잭 L. 존스 | 1901년 FA컵 | |
| 아서 그림스델 | 1921년 FA컵 | |
| 론 버지스 | 1950-51시즌 리그 | |
| 대니 블랜치플라워 | 1960-61시즌 리그, 1961·1962년 FA컵, 1963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 7번 |
| 데이브 매카이 | 1967년 FA컵 | 6번 |
| 앨런 멀러리 | 1971년 리그컵, 1972년 UEFA컵 | 후보 |
| 마틴 피터스 | 1973년 리그컵 | |
| 스티브 페리먼 | 1981·1982년 FA컵 | 5번 |
| 그레이엄 로버츠 | 1984년 UEFA컵 | |
| 게리 매벗 | 1991년 FA컵 | 2번 |
| 솔 캠벨 | 1999년 리그컵 | |
| 레들리 킹 | 2008년 리그컵 | 3번 |
| 손흥민 | 2025년 UEFA 유로파 리그 | 9번 |
열세 명 가운데 여섯이 이 글의 열한 명 안에 있다. 후보에 적은 멀러리까지 치면 일곱이다. 1961년부터 2025년까지 토트넘이 든 트로피 열여섯 개 가운데 열 개를 이 명단의 누군가가 주장으로 받았다. 가장 오래 남은 사람들과 가장 많이 넣은 사람들과 트로피를 받아 든 사람들을 모으면 이 명단이 된다.
1. 팻 제닝스 - 골키퍼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570경기는 구단 기록으로 590경기다. 리그 472, FA컵 43, 리그컵 39, 유럽 대회 36경기를 더한 값이다.
스퍼스 골문의 성벽.
테드 디치번, 레이 클레멘스, 폴 로빈슨, 위고 요리스 등 토트넘 축구사 위대한 골키퍼가 많았으나 그 누구도 이 자의 “권능”에 대적할 수 없다.
하얀색 유니폼을 입은 골키퍼는 언제나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팻 제닝스(Patrick Anthony Jennings, CBE; 북아일랜드 골키퍼, 1945-)는 ’독보적’이란 수식조차 평범하게 만들어버렸다.
1964년부터 1977년까지 무려 13년 동안 토트넘의 골문을 수호하며, FA컵, 리그컵, UEFA컵 등 구단이 거둔 모든 주요 트로피에 본인의 이름을 마킹했다.
북아일랜드 뉴리에서 태어난 그는 열여섯 살까지 축구가 아니라 게일릭 풋볼을 했다. 높이 뛰어올라 공을 낚아채는 버릇은 거기서 왔고, 손아귀 힘은 목재소에서 일하며 생겼다. 1963년 왓퍼드가 6천 파운드에 데려갔고, 열여덟 살의 그는 첫 시즌 52경기를 전부 뛰었다. 이듬해 빌 니컬슨 감독이 2만 7천 파운드를 주고 그를 북런던으로 불렀다.[4]
놀라운 건 플레이 스타일이다. 좌우 모두를 사용하는 킥력, 슈퍼세이브에 의존하지 않는 재빠른 반응 속도, 팀 전체를 조율하는 시야와 카리스마.
이 모든 것은 ’토트넘 골키퍼’라는 대명사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상징이 된 장면은 1967년 FA컵 결승이다. 첼시가 막판 동점골을 노리고 올린 크로스를 그는 큰 손 하나로 공중에서 낚아챘다. 그 한 손 캐치가 이후 그의 서명이 됐다. 구단은 그를 각도의 달인이라 적는다. 어디에 서야 골문이 가장 좁아 보이는지를 알았고, 나갈 때와 남을 때를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단이 풀어 쓴 그의 재료는 넷이다. 타고난 키, 목재소에서 붙은 힘, 게일릭 풋볼에서 익힌 도약, 그리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위치 감각이다. 압박을 받아도 침착했고 6야드 구역 안에서는 수비수들을 세우고 치우며 모든 상황을 자기가 정리했다. 정석이 통하지 않는 공에는 반사 신경이 있었다. 낮게 몸을 던져 골대 밖으로 밀어내거나 골문을 가로질러 날아 크로스바 위로 넘겼다.
현대 축구에서 ’롱패스 빌드업’이 중요해졌다는 분석이 나오기 훨씬 전, 팻 제닝스는 이미 양발 킥과 빌드업에 능한 1970년대 골키퍼의 미래형이었다.
그 킥이 얼마나 멀리 갔는지는 1967년 FA 채리티 실드가 말해 준다. 올드 트래퍼드에서 그가 길게 찬 공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페널티 지역 끝에서 한 번 튀더니 골키퍼 알렉스 스테프니의 머리를 넘어 골문으로 들어갔다. 구단의 표현으로는 찬 본인이 어리둥절했다.
1973년 기자단이 뽑은 올해의 선수, 1976년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가 됐다. 선수들이 뽑는 상을 골키퍼가 받은 것은 그가 처음이다. 그리고 1977년, 팀이 강등되던 해에 구단은 서른둘의 그를 끝나 가는 선수로 보고 아스널에 넘겼다. 그는 하이버리에서 여덟 해를 더 뛰며 FA컵을 한 번 더 들었다. 북런던의 두 구단에서 다 FA컵을 든 골키퍼가 그렇게 생겼다. 1983년 2월에는 잉글랜드 축구에서 처음으로 공식전 1,000경기를 채웠고 그날도 무실점이었다.
마지막 경기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의 브라질전이다. 마흔한 번째 생일이었다. 그때까지 월드컵에 그보다 나이 많은 선수가 나온 적이 없었다. 북아일랜드 대표로 뛴 119번째 경기였고 당시 세계 최다 기록이었다. 1993년부터는 골키퍼 코치로 토트넘에 돌아와 있다.
2. 게리 매벗 - 센터백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개리 마버트는 이 사이트의 표기로 게리 매벗이다.
강철로 만들어진 남자.
수비수의 강인함은 육체에서 시작되지만, 진짜 레전드는 ’의지’에서 태어난다.
게리 매벗(Gary Vincent Mabbutt, MBE; 잉글랜드 수비수, 1961-)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강철로 ’만들어진 남자’라는 말이 가장 어울릴 듯싶다.
그는 당뇨병을 앓으면서도 16년간 스퍼스의 에이스였으며, 주장이자 핵심 수비수로 화이트 하트 레인(White Hart Lane; 토트넘의 이전 경기장)에서 모든 시대의 팬들에게 기억될 서사를 남겼다.
1987년 토트넘 올해의 선수, 1991년 FA컵 우승을 이끈 주역. 600경기 이상 출전한 레전드 중의 레전드.
1형 당뇨 진단은 열일곱 살에 받았다. 프로 선수가 된 것부터가 그 병과 싸워 얻은 결과라고 구단은 적는다. 1982년 브리스틀 로버스에서 12만 파운드에 왔을 때 그는 수비수인지 미드필더인지조차 정해지지 않은 선수였다. 누가 다치면 그 자리에 들어갔고, 1984년 UEFA컵도 그렇게 들었다. 센터백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입단 네 해 뒤다.[5]
그는 그 병을 숨기지 않았다. BBC의 어린이 프로그램에 나가 오렌지에 주사기를 꽂아 보이며 날마다 인슐린을 어떻게 맞는지 설명했다. 같은 병을 가진 아이들에게 그는 프로 선수가 될 수 있다는 증거였다.
첫 경기는 1982년 리버풀과의 FA 채리티 실드였다. 구단의 묘사로는 미드필더로 나선 그가 웸블리 잔디를 구석구석 밟았다. 쫓고 물고 늘어지다가 공을 따내면 빠르고 정확하게 내줬고, 틈이 나면 앞으로 올라갔다. 그해 10월에는 오른쪽 수비수로 잉글랜드 대표팀에 데뷔했다. A매치는 16경기다.
그는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위치를 읽는 센스, 강력한 태클과 공중볼 장악력, 그리고 팀 전체를 지휘하는 리더십은 그 어떤 재능보다도 무거운 무기였다.
키가 큰 수비수도 아니었다. 구단의 기록으로 175cm 남짓이다. 그런데도 뛰어오르는 탄력과 타이밍으로 훨씬 큰 공격수들을 눌렀다.
태클에는 그만의 것이 있었다. 구단은 발을 넣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자리에서 그가 깨끗하게 공만 빼내곤 했다고 적는다. 진 것을 인정할 줄 모르는 선수였고, 옆 사람들의 자리를 잡아 주는 데도 뛰어났다.
웸블리는 그에게 두 얼굴을 보여줬다. 1987년 FA컵 결승에서 그는 팀의 두 번째 골을 넣어 2-1을 만들었다. 그런데 연장에서 코번트리 시티의 크로스가 그의 무릎에 맞고 골키퍼 키를 넘어갔다. 2-3, 자책골로 진 결승이었다. 코번트리에는 ’게리 매벗의 무릎’이라는 이름의 팬 잡지까지 생겼다. 그해 주장 완장을 받은 그는 네 해 뒤인 1991년, 같은 계단을 올라 FA컵을 받았다. 그날의 결승골은 노팅엄 포리스트 수비수의 자책골이었다.
특히 안면 부상에도 불구하고 철심을 박고 복귀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팬들은 그를 두고 “바이오닉 맨(The Bionic Man)“이라 불렀다.
1993년 11월 윔블던전의 일이다. 공중볼을 다투던 존 패셔누의 팔꿈치에 맞아 광대뼈와 눈확이 부서졌다. 그는 석 달 뒤 보호 마스크를 쓰고 돌아왔다. 얼굴 가리개를 쓰고 경기에 나선 선수는 그가 처음이었다. 1996-97시즌 개막전에서는 다리가 부러져 꼬박 한 해를 쉬었고, 그러고도 돌아와 16번째 시즌을 채웠다.
매벗은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수가 아니라, 부상을 ’통제’하고 극복하는 선수였던 것이다.
그가 센터백에 서있다는 사실은, 상대에겐 공포였으며, 동료에게는 안식이었다.
은퇴한 뒤의 일도 적어 둔다. 코로나19 유행 때 그는 나이 든 팬들의 생일에 직접 전화를 걸기 시작했고 그 일을 지금도 한다. 구단에 따르면 2026년 5월에 2만 번째 전화를 걸었다.
숫자와 기록을 넘어, ‘정신력으로 팀을 감싸 안은’ 가장 단단한 토트넘의 수호자.
3. 레들리 킹 - 센터백

팬들이 가장 눈물겹게 사랑하는 남자.
무릎이 아니었다면.. 단 한 문장으로도 전설이 되는 사내.
레들리 킹(Ledley Brenton King; 잉글랜드 수비수, 1980-)은 그라운드 위에 오래 머물지 못했던 선수다.
하지만, 그가 머문 그 짧은 시간이야말로 토트넘 팬들에게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감동이었다.
2001년 토트넘 최고의 선수, 2005년 토트넘 제37대 주장 임명, 2012년 은퇴까지 단 한 번도 다른 팀 유니폼을 입지 않은 원클럽맨.
본인의 말로는 이렇다. 이곳이 내 구단이고, 내 하나뿐인 구단이라고.
런던 동쪽 보에서 자라 열다섯 살에 토트넘 유소년이 됐다. 1군의 첫 골은 기록부에 남았다. 2000년 12월 9일 브래드퍼드 시티 원정, 경기 시작 9.82초 만이었다. 프리미어 리그에서 가장 빨리 들어간 골이었고 그 기록은 18년 넘게 깨지지 않았다.
유소년 시절부터 그에게는 바비 무어의 자질과 본능이 보인다는 말이 따랐다. 몸으로 부딪치기보다 읽어서 빼앗는 수비수라는 뜻이다.
킹의 센터백 능력은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웠다. 태클의 정확도는 정밀했고, 공중볼 경합은 마치 타이밍의 예술이었으며, 패싱 능력과 빌드업 센스는 중원에서도 통할 수준이었다.
실제로 한동안은 미드필더로 뛰었다. 대표팀에서도 그랬다. 어느 자리가 그의 자리인지는 유로 2004 첫 경기가 정리했다. 수비수들이 줄줄이 다쳐 여섯 번째 A매치에 불려 나간 그는 전 대회 우승팀 프랑스의 티에리 앙리를 맡아 경기 내내 눌렀다.
그날 당한 사람의 평이 가장 유명하다. 앙리는 자기가 상대한 수비수 가운데 킹이 최고였고, 반칙에 기대지 않고 자기 공을 빼앗은 유일한 수비수였다고 말했다. 숫자가 그 말을 받친다. 킹이 선수 생활 내내 받은 경고는 여덟 장이다.
구단은 그 수비를 이렇게 풀었다. 키와 힘을 갖춘 센터백은 많다. 그를 가른 것은 움직임마다 배어 있던 차분한 권위였다. 가장 좁은 구석에서도 몸을 돌려 빠져나왔고, 뚫린 동료의 뒤는 속도로 덮었다. 공에서 눈을 떼지 않고 상대를 위험하지 않은 쪽으로 몰다가 딱 맞는 순간에 발을 넣었다. 빼앗은 공을 급히 차 내는 일도 드물었다.
만성 무릎 부상. 그는 훈련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경기 당일이면 기적처럼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감독 해리 레드냅의 설명이 그 무릎의 상태다.
고칠 방법이 없다. 연골이 없어서 수술할 것도 없다.
There's no cure. There's no cartilage, nothing to operate on.
해리 레드냅 감독이 레들리 킹의 무릎을 두고
동료들이 훈련하는 평일에 그는 혼자 몸을 풀었고, 주말에 한 경기를 뛰었다. 레드냅은 훈련 없이 프리미어 리그 수준을 유지하는 그를 두고 완전히 별종이라고 했다.[6]
무릎 통증으로 한 번의 훈련 없이 출전했던 그 수많은 경기들 속에서 모든 수비수 중 최고 평점을 받아냈던 ‘인간의 한계에 도전했던 자’.
그러나 레들리 킹은 단 한 번도 변명을 내뱉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른 프리미어 리그 레전드들이 그를 칭송하기에 바빴을 만큼 겸손했다.
그 무릎으로 든 트로피가 하나 있다. 2008년 2월 웸블리의 리그컵 결승, 연장 끝에 첼시를 2-1로 이긴 날 주장 완장은 그의 팔에 있었다. 그 뒤 17년 동안 토트넘의 주장은 아무것도 들지 못했다. 다음 사람이 손흥민이다.
마지막까지 뛰지 못한 것이 아닌, 아픔 속에서도 뛰었던 존재로 기억될 이름.
4. 시릴 놀스 - 레프트백

자친토 파케티에 대한 잉글랜드의 대답.
’공격형 레프트백’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대, 서독의 카를하인츠 슈넬링어, 이탈리아의 자친토 파케티라는 “전 세계 역대 최고의 레프트백”의 대권에 도전하던 자 시릴 놀스(Cyril Barry Knowles; 잉글랜드 수비수, 1944-1991).
1964년, 미들즈브러 FC에서 토트넘 홋스퍼로 이적한 시릴 놀스는 그 시절로선 이례적일 만큼 ’현대적인 풀백’이었다.
단단한 수비력은 기본이요, 스피드와 크로싱 능력, 그리고 끊임없이 오버래핑하며 좌측을 장악하는 능력.
윙어 출신이라는 내력이 그 풀백을 만들었다. 그의 크로스는 움직이는 공에서도 세트피스에서도 숱한 기회가 됐다. 반대편에는 아일랜드의 오른쪽 수비수 조 키니어가 있었다. 좌우 풀백이 번갈아 올라가는 이 한 쌍은 잉글랜드 축구가 오버래핑하는 공격형 풀백을 받아들이는 데 한몫을 했다는 평을 듣는다.
이 모든 것은 그가 ’현대로 치면 마르셀루 스타일’이라는 별명이 생기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요크셔 탄광 마을에서 럭비 리그 선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생 피터도 울버햄프턴에서 뛴 프로 선수였다. 처음에는 왼쪽 윙어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블랙풀, 울버햄프턴에서 차례로 퇴짜를 맞고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을지를 의심하던 그를 왼쪽 수비수로 돌려세운 곳이 미들즈브러다. 1군 39경기를 본 니컬슨이 4만 5천 파운드를 냈다. 토트넘에서 그는 꾸준함으로 이름을 얻었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네 해 동안 그가 빠진 리그 경기는 단 한 경기다.
북런던의 터줏대감이었던 12년 동안 500경기 이상을 소화하며, 1966-67 시즌 FA컵 우승, 1970-71 시즌 리그컵 우승, 1971-72 시즌 UEFA컵 우승까지 모든 영광의 순간에 왼쪽에는 늘 시릴 놀스가 있었다.
잉글랜드 대표로는 네 번밖에 뛰지 못했다. 같은 시대에 리즈 유나이티드의 테리 쿠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팀의 골을 돋보이게 만드는 선수였다. 스포트라이트보다 어시스트를, 화려한 수식보다 꾸준한 헌신을 택했던 남자.
그런 사람의 이름이 뜻밖의 길로 영국 전체에 퍼졌다. 1972년 한 식빵 회사가 텔레비전 광고를 냈다. 빵을 잘 구운 제빵사 시릴을 칭찬하는 광고였고 문구가 “나이스 원, 시릴”이었다. 화이트 하트 레인의 관중석이 그 말을 자기네 왼쪽 수비수에게 가져다 붙였다. 토트넘 팬인 작곡가가 그것을 노래로 만들었고, 「나이스 원 시릴(Nice One Cyril)」은 1973년 3월 영국 싱글 차트 14위까지 올라갔다.
쉰 해 뒤 같은 관중석은 그 가락에 이름만 바꿔 불렀다. 나이스 원 소니. 손흥민의 응원가에는 원래 주인이 따로 있었다.
무릎이 그를 서른하나에 멈춰 세웠다. 은퇴한 뒤에는 아래쪽 리그의 팀을 맡아 살림을 꾸렸다. 4부 리그 바닥의 달링턴을 3부로 올렸고, 토키 유나이티드에서는 훗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윙어가 되는 소년 리 샤프를 키웠다. 마지막 팀 하틀풀 유나이티드에서 뇌 수술을 받고 지휘봉을 놓았다.
너무 빨리 떠난 사람이었다. 1991년, 47세의 나이에 뇌종양으로 세상과 안녕을 말했을 때 토트넘은 진정한 ’왼쪽 심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잊지 말자. 토트넘의 왼쪽, 그 기틀을 만든 이가 누구였는지를.
5. 스티브 페리먼 - 라이트백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스티브 페리맨은 이 사이트의 표기로 스티브 페리먼이다.
토트넘의 역사 속 가장 많이 새겨진 이름.
854경기. 그가 토트넘 유니폼을 입고 뛴 공식전 수다.
역대 최다 출장 기록. 단일 클럽에서 이만큼 ‘존재’ 그 자체로 남은 인물은 전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힌다.
하지만 단순히 오래 뛴 선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스티브 페리먼(Stephen John Perryman, MBE; 잉글랜드 미드필더·수비수, 1951-)은 토트넘의 영혼, 기둥, 철학이자 가장 ’현장적인 리더’였던 사내였다.
1967년 FA컵 결승에 구단의 손님으로 초대받은 학생이었다. 두 해 남짓 뒤인 1969년 9월, 열일곱 살의 그는 그날 웸블리에서 구경한 선수들 옆에서 뛰고 있었다. 맡은 일은 공을 빼앗는 것이었다. 기술은 넘치는데 싸울 사람이 없던 중원에 물어뜯는 선수로 들어갔다.[7]
본 포지션은 미드필더. 그러나 팀이 원할 때는 라이트백으로도, 때로는 센터백처럼도 플레이했다. 포지션을 바꾸면서도 영향력은 전혀 줄지 않았다. 그의 플레이는 늘 안정적이었고, 조직을 단단히 묶는 리듬을 만들었다.
자리를 옮긴 사연마다 구단의 사정이 있다. 1977년 강등 위기에서 감독은 주장인 그를 센터백으로 내렸다. 그래도 팀은 떨어졌다. 떠나도 누구 하나 탓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남았고, 한 시즌 만에 팀을 1부로 되돌려 놓았다. 그 뒤 오른쪽 풀백으로 옮긴 시절이 그의 전성기다.
부지런한 일꾼으로만 보면 절반만 본 것이다. 구단은 그를 그 자신이 타고난 플레이메이커였다고 적는다. 결정적인 패스가 들어갈 길을 보는 눈이 있었고 그것을 꼭 맞는 순간에 넣었다. 데뷔하고 스무 경기쯤 뒤 감독이 그를 쉬게 하자 팀의 성적이 곧장 나빠졌다. 다시 불려 온 뒤로 그는 다치지 않는 한 빠진 적이 없다.
팀이 흔들릴 때마다 페리먼은 조용히 중심을 잡아줬고, 누구보다 경기의 온도를 정확히 읽는 지능적인 선수였다.
2번의 FA컵 우승(1981, 1982년), 2번의 리그컵 우승(1971, 1973년), 그리고 1972년과 1984년의 UEFA컵 우승까지. 그가 들어 올린 트로피들은 단순한 우승 기록이 아니라, <토트넘스러움>이 무엇인가를 증명한 세월의 흔적이었다.
골과는 인연이 적었다. 854경기에 39골이다. 그런데 1972년 UEFA컵 준결승 1차전에서 AC 밀란을 2-1로 꺾은 두 골은 다 그가 넣었다.
잉글랜드 대표팀과도 인연이 적었다. 23세 이하 대표로 17경기를 뛰고도 A매치는 한 경기뿐이다. 기자단이 뽑은 올해의 선수가 된 1982년 6월, 아이슬란드전 후반 70분에 교체로 들어간 20분이 전부다. 그 경기는 원래 B 대표팀 경기였다가 나중에 A매치로 올라갔다.
1984년 UEFA컵 결승에서 그는 1차전만 뛰었다. 징계로 2차전에 나서지 못했고, 우승을 정한 승부차기를 밖에서 지켜봤다. 그날 오스발도 아르딜레스가 나섰다. 메달은 페리먼이 가져야 한다고 고집한 것이다.
구단은 그를 이렇게 적는다. 재능 있고 화려한 선수는 많았지만 이 사람보다 충성스럽고 믿음직하고 자기를 내준 선수는 없었다고. 리그 655경기, FA컵 69경기, 리그컵 66경기도 지금까지 구단 최다 기록이다. 은퇴 뒤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시미즈 에스펄스의 감독으로 J리그 스테이지 우승과 아시안 컵위너스컵을 들었다.
토트넘의 문화 그 자체로 정의할 수 있는 라이트백.
6. 데이브 매카이 - 수비형 미드필더

토트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
“한 존재가 조직의 정체성을 바꾼다.”
이 유명한 말을 증명한 이가 있다면, 그게 바로 데이브 매카이(David Craig Mackay; 스코틀랜드 미드필더, 1934-2015)였다.
1960년대, 토트넘이 더블(리그+FA컵)을 차지했던 구단 역사상 유일무이한 황금기의 중심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에든버러의 하츠에서 일곱 해 동안 스코틀랜드의 리그와 컵과 리그컵을 다 들고 왔다. 1959년 3월의 일이다. 구단은 그의 소개를 이렇게 시작한다. 스타가 있고 영웅이 있고 전설과 신화가 있다. 그리고 데이브 매카이가 있다.[8]
무서우리만큼 강인했던 피지컬, 전진성과 패스 센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대 질 수 없다”라는 정신력.
큰 사람은 아니었다. 172cm 남짓이다. 그런데 술통 같은 가슴과 나무 밑동 같은 허벅지가 그를 실제보다 크게 보이게 했다고 구단은 적는다. 손뼉을 치고 소리를 질러 옆 사람을 끌어올리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거친 것이 전부였다면 전설이 되지는 못했다. 구단은 공을 다루는 재주만으로도 스타가 됐을 선수라고 적는다. 거기에 몸이 얹혔다. 믿기 어려운 힘과 지구력, 뼈가 울리는 태클이다. 스코틀랜드 대표로는 22경기를 뛰었고 1958년 월드컵에 갔다.
그는 수비형 미드필더였지만 모든 선수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가진 사내였다.
1960-61 시즌 더블. 1961-62 시즌 FA컵 우승. 1961-62 시즌 유러피언컵 4강. 1962-63 시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 모든 트로피는 그의 다리 위에 놓였다.
다만 로테르담의 결승에는 그가 없었다. 결승까지 팀을 밀고 간 사람이 부상으로 빠졌고, 니컬슨 감독은 아틀레티코의 이름난 선수들보다 그 빈자리를 더 걱정했다고 한다.
그는 다리 골절 부상을 두 번이나 겪었다. 1963년 12월 올드 트래퍼드에서 경기 시작 8분 만에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그가 실려 나간 뒤 팀은 1-4로 졌다. 복귀를 시도하기까지 아홉 달이 걸렸고, 1964년 9월 2군 경기에서 같은 뼈가 또 부러졌다. 한 번 부러지고도 돌아오지 못하는 선수가 많던 시절이다. 두 번이면 끝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매카이는 돌아왔다. 이전보다 더 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보고 어찌 “권능”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이건 축구사 이래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이다.
1966년, 리즈 유나이티드의 빌리 브렘너가 매카이의 부상당한 다리를 걷어찼고, 매카이가 그를 향해 분노와 위엄이 섞인 눈빛으로 다가가는 장면.
그 장면은 토트넘의 리더란 무엇인지, “겁 없고, 꺾이지 않고, 굽히지 않는” 정신적 상징이 되었다.
정작 본인은 이 사진을 싫어했다. 자기가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처럼 찍혔다는 것이다. 그가 밝힌 사정은 이렇다. 브렘너가 노린 것은 가까운 쪽 다리가 아니라 두 번 부러졌던 왼쪽 다리였다.
블랜치플라워가 은퇴한 뒤 완장은 그에게 왔다. 한 줄 내려가 센터하프로 뛰면서도 태클은 여전했고, 1967년 주장으로 FA컵을 들었다. 이듬해 서른셋에 간 더비 카운티에서는 젊은 감독 브라이언 클러프의 팀을 1부로 올려놓고, 맨체스터 시티의 토니 북과 함께 기자단이 뽑은 올해의 선수가 됐다. 조용한 은퇴를 예상한 사람들은 전부 틀렸다. 감독이 된 뒤에는 1974-75시즌 그 더비 카운티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축구 명예의 전당은 둘 다 첫 회 헌액자 명단에 그를 넣었다.
1960년대에 그를 가장 자주 상대한 천재의 평으로 맺는다.
내가 상대한 선수 가운데 가장 단단한 사람이었고, 틀림없이 가장 용감한 사람이었다.
The hardest man I have ever played against, and certainly the bravest.
조지 베스트가 데이브 매카이를 두고
위기의 순간마다 중심을 잃지 않게 만든 기둥.
7. 대니 블랜치플라워 - 중앙 미드필더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FA 채리티 실드 3회 (1961, '62 시즌)는 적힌 연도대로 2회다. 3회는 1967년까지 뛴 매카이의 기록이다.
말디니가 밀란이라면, 블랜치플라워는 토트넘이다.
토트넘 역대 최고의 주장. 토트넘 144년 축구사 역대 최고의 선수(GOAT). 북아일랜드에서 조지 베스트의 권능에 도전하는 자. 전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드필더 중 한 명.
그는 패스를 찔렀고, 시대를 찔렀다. 그는 경기를 조율했고, 토트넘의 정신을 작곡했다.
1954년부터 1964년까지, 토트넘의 전술, 리듬, 품격을 결정한 단 한 사람.
벨파스트 블룸필드에서 다섯 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여자 축구팀의 센터포워드였다. 담배 공장의 견습 전기공으로 일하던 그는 1943년 나이를 속이고 공군에 들어갔다. 항법사 교육을 받으러 간 곳이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였고, 거기서 평생의 취미가 된 골프를 배웠다. 전쟁이 끝난 스무 살에 공장으로 돌아와 축구로 이름을 얻었다.[2]
글렌토런에서 시작해 1949년 잉글랜드의 반즐리로 건너갔고, 거기서 벌써 감독과 부딪쳤다. 훈련에 공을 쓰자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공 없이 뛰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애스턴 빌라로 옮긴 뒤에는 신문에 축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쓰기 시작했고, 그를 좋아하는 사람과 불편해하는 사람이 같이 늘었다.
트로피를 원한 그는 이적을 요청했고, 빌라는 당시 최고액인 4만 파운드를 불렀다. 토트넘의 아서 로 감독은 소문을 다 듣고도 그를 원했다. 같은 축구를 꿈꾸는 사람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1954년 12월, 3만 파운드에 그가 왔다.
1961-62 시즌 유러피언컵 4강에서 구트먼 벨러 감독(Guttmann Béla; 헝가리)의 SL 벤피카의 숨통을 조여버린 사내.
그는 경기의 정서를 다루는 미드필더였다.
단순히 뛰고, 패스하고, 슛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축구를 ’읽어내고 있다’라는 것에 조금 더 가까웠다. 마치 크라위프처럼.
그러니 모든 플레이가 악보 같았겠지. 동료의 위치를 미리 ‘읽고’, 상대 수비의 약점을 ‘찔러’ 공격의 출발점을 ’설계’했던 사내. 토트넘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이었다.
자리는 오른쪽 하프백이다. 늘 공을 달라고 했고, 받으면 일을 단순하게 했다. 옆 사람에게 짧게 주거나, 반대편 윙어의 걸음 앞에 길게 떨구거나, 수비 사이를 갈랐다. 수비로 이름난 선수는 아니었다. 몸을 던지는 태클 대신 길목을 미리 끊거나 상대를 해롭지 않은 쪽으로 몰았다. 올라갔다가 뒤를 비우는 일도 잦았다고 구단은 숨기지 않는다.
구단이 그의 가장 큰 재주로 꼽는 것은 주장 노릇이다. 입단 첫 시즌이 끝나기 전에 앨프 램지에게서 완장을 넘겨받았다. 니컬슨이 감독이 된 뒤로는 감독의 구상을 경기장에 옮기는 사람이었고, 필요하면 경기 중에 그 구상을 바꿨다. 감독이 그것을 온전히 믿어 줬다.
“The game is about glory.”
경기는 단지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이기기 위한 것이다. 축구를 잘 모른다는 팬들도 한 번쯤은 들어본 전설의 명언이다.
1960-61 시즌 더블, 1961-62 시즌 FA컵 우승 및 유러피언컵 4강, 1962-63 시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까지 세상은 토트넘의 우승을 기억하고, 대니 블랜치플라워의 존재를 기억한다.
그 우승들을 든 것은 서른다섯에서 서른일곱 사이의 일이다. 기자단이 뽑는 올해의 선수는 1958년과 1961년 두 번 받았다. 1958년에는 북아일랜드의 주장으로 월드컵 8강에 갔고, 1962년에는 북아일랜드 선수로는 처음으로 A매치 50경기를 채웠다. 1958년 2월 뮌헨의 비행기에서 다쳐 선수 생활을 접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재키 블랜치플라워가 그의 동생이다.
입담도 오래 남았다. 가장 알려진 농담은 이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상대가 넣기 전에 먼저 동점골을 넣는 것이다. 경기장 밖의 일에도 이름을 걸었다. 1958년 7월에는 국제 스포츠의 인종 분리 정책에 반대하는 타임스 독자 편지에 서명했다.
자기 생각대로 사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방송국도 알게 됐다. 1961년 2월, 유명인을 몰래 불러내 그 사람의 생애를 들려주는 BBC의 인기 프로그램이 그를 주인공으로 골랐다. 진행자가 빨간 책을 들고 다가오자 그는 그냥 걸어 나갔다. 그 프로그램의 초대를 거절한 첫 사람이었다. 사생활 침해라는 것이 이유였다. 누구도 자기를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다고 했다.
그의 패스는 지휘봉이었고, 그의 침착함은 철학이었으며, 그의 리더십은 ’조용한 전율’이었다.
그는 지미 그리브스를 위해 공간을 열었고, 데이브 매카이에게 균형을 부여했으며, 스티브 페리먼에게 ’승리를 위한 예술’이 존재함을 가르쳤다.
1964년 서른여덟에 부상으로 은퇴했다. 한동안 토트넘의 코치로 남았고, 니컬슨은 그를 자기 후임으로 생각했다. 1974년 니컬슨이 물러났을 때 구단은 다른 사람을 골랐고 그도 떠났다. 그 뒤의 본업은 기자였다. 선수 때와 똑같이 거침없고 논쟁적이었는데, 동료 기자들은 그를 축구를 정말로 아는 사람으로 대접했다. 북아일랜드와 첼시의 감독도 잠깐 했다. 신문 칼럼은 1988년까지 썼다. 1990년 5월 1일 화이트 하트 레인이 그를 위한 기념 경기를 열었을 때 그는 이미 병을 앓고 있었고, 1993년 12월 9일 예순일곱으로 눈을 감았다.
8. 글렌 호들 - 공격형 미드필더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FA 채리티 실드 3회 (1981 시즌)는 1회다. 1981년 애스턴 빌라와 비겨 함께 든 것이 전부다.
신(神)의 은총이라 불렸던 자.
신의 은총이라 불렸지만, 때로는 ’불안한 천재’라 불렸던 미드필더 글렌 호들(Glenn Hoddle; 잉글랜드 미드필더, 1957-).
구단의 평가는 한술 더 뜬다. 그 세대에서 가장 타고난 선수라는 흔한 말이 호들에게는 모자라다는 것이다. 한 세대가 아니라 여러 세대를 통틀어 가장 타고난 선수였다고 적는다.[9]
그라운드 위에는 선수들이 뛰고, 관중은 열광하고, 기록은 매체에 남는다.
그런데 가끔, “예술”이 나타날 때가 있다. 토트넘 역사에서, 그런 존재는 글렌 호들으로 정의된다.
열한 살 때 동네 유소년 대회 결승에서 뛰었다. 시상하러 온 사람이 토트넘의 공격수 마틴 치버스였다. 치버스는 구단에 돌아가 그 아이의 이름을 꺼냈다. 1976년 2월 처음 선발로 나선 리그 경기에서 그는 스토크 시티를 상대로 먼 거리 발리슛을 넣었다. 그 공을 막지 못한 골키퍼가 잉글랜드 대표 피터 실턴이다.
그의 오른발 패스는 아름다웠고, 슛은 기술이 아닌 ’예언’과 같았다.
구단이 적은 목록은 길다. 빠른 원투 패스, 촘촘한 수비 사이로 꿰는 공, 가장 좁은 구석에서 부리는 재간, 수비벽을 돌아 들어가는 프리킥, 몇 발짝 안 되는 빈자리에 떨구는 칩, 달리는 동료의 걸음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긴 패스다. 키 크고 마른 몸에 균형이 완벽했고 서 있는 자세만으로 자신감이 보였다.
정확도, 창의성, 그리고 리듬. 3개의 미덕이 하나의 발에 담겼고, 토트넘 팬들은 ’말도 안 되는 패스’가 ’자연스럽게 성공하는 광경’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감정의 선율을 중시하던 그에겐 ’지시’보단 ’영감’이 어울렸다.
잉글랜드 대표팀은 그 영감을 어디에 둘지 끝내 정하지 못했다. A매치는 53경기다. 구단은 적당한 숫자지만 그가 받았어야 할 수의 절반밖에 안 된다고 적는다.
알아본 사람은 바다 건너에 있었다. 1983년 10월 UEFA컵에서 토트넘은 요한 크라위프가 뛰던 페예노르트를 두 경기 합계 6-2로 이겼다. 경기 전 호들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크라위프는 1차전이 끝난 뒤 그와 셔츠를 바꿔 입었다.
드리블, 루프패스, 중거리슛 전부를 시처럼 구사한 최초의 잉글랜드 토종 플레이메이커.
그가 스퍼스에 준 것은 득점이 아니었고, 어시스트도 아니었으며, 오직 “감탄”이었다.
그렇다고 득점이 적었던 것도 아니다. 미드필더로 490경기에 110골을 넣었다. 1979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에서 아르딜레스와 공을 주고받은 뒤 때린 발리, 1983년 왓퍼드 원정에서 페널티 지역 모서리에 서서 골키퍼 머리 위로 넘긴 로빙슛. 구단은 역대 최고의 골 스무 개를 꼽으면 그의 골이 여럿 들어간다고 한다.
1981년과 1982년 FA컵을 들었다. 재경기까지 간 1982년 결승에서 토트넘이 넣은 두 골은 다 그의 것이다. 1984년 UEFA컵은 부상으로 결승에 나서지 못한 채 들었다. 마지막 경기는 1987년 FA컵 결승이다. 매벗의 무릎에 공이 맞던 바로 그 경기다. 그해 봄에는 대표팀 동료 크리스 워들과 부른 노래가 영국 싱글 차트 12위에 올랐다. 여름에 그는 모나코로 갔다. 그를 부른 감독이 아르센 벵거였고, 첫 시즌에 프랑스 리그를 우승했다.
2007년 잉글랜드 국립 축구 박물관은 그를 명예의 전당에 올리며 균형과 볼 터치, 패스와 시야, 슈팅을 고루 꼽았다.
9. 손흥민 - 레프트 윙

디자인 뒤의 일 위 디자인은 2025년 5월 초에 만들었다. 451경기는 454경기로 끝났고, 주요 경력에는 2025년 UEFA 유로파 리그 우승이 더해졌다. 손흥민은 2025년 8월 로스앤젤레스 FC로 옮겼다.
대한민국 축구사 역대 최고의 7번.
이름 석 자로 써 내려간 토트넘의 눈부신 변주.
그는 묻지 않았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가?” 그는 다짐하지 않았다. “내가 토트넘을 바꿀 수 있을까?”
그는 다만, 뛰었다.
Son Heung-min, you’re really fantastic. 동양에서 온 사내는 익숙한 이정표도 없이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와 화이트 하트 레인의 공기를 바꿨다.
스퍼스는 늘 아름다운 팀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때로 연약했고, 기록보다 감정에 치우쳤고, 전통에 취해 있었지.
춘천에서 태어나 열여섯 살에 독일로 건너갔다. 함부르크와 레버쿠젠을 거쳐 2015년 8월에 왔다. 첫 경기는 9월 선덜랜드 원정이었고, 홈 데뷔전인 UEFA 유로파 리그 카라바흐전에서 두 골을 넣었다. 첫 시즌은 8골로 끝났다. 그다음 시즌부터는 아홉 시즌을 내리 골과 도움을 합쳐 스물 넘게 만들었다.[3]
아버지 손웅정은 선수 출신 지도자다. 그 밑에서 큰 아들의 가장 큰 무기는 양발이다. 왼쪽에서 안으로 꺾어 오른발로 감아 차고, 수비가 그쪽을 막으면 바깥으로 치고 나가 왼발로 때린다. 어느 발을 막아야 할지 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를 상대한 수비수들의 문제였다.
아시아 선수 최초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토트넘 역사상 최다 비유럽 득점자. 누군가는 “월드클래스”라 불렀고, 누군가는 “겸손한 천재”라 칭한다.
구단의 새 집에 처음 이름을 새긴 사람도 그다. 2019년 4월 3일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의 첫 공식 경기에서 첫 골을 넣었고, 엿새 뒤 그 경기장의 첫 유럽 대회 골도 넣었다. 맨체스터 시티와의 그 8강 두 경기에서 세 골을 넣어 팀을 구단 사상 첫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까지 밀어 올렸다.
2019년 12월 번리전에서는 자기 진영에서 공을 잡아 경기장 끝에서 끝까지 혼자 몰고 가 넣었다. 그 골로 이듬해 FIFA 푸슈카시상을 받았다. 2021-22시즌에는 리그 23골로 득점왕이 됐다.
그는 측면에서 중앙으로, 수비와 수비 사이로, 패스와 슈팅 사이에서 본능으로 골을 선택한다. 그렇게 생긴 “흥민존”이라는 마의 구간.
그가 득점할 때 스탠드는 환호보다 경외에 가까운 감정을 품었다.
옆에는 케인이 있었다. 2020-21시즌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만들어 준 리그 골은 14골이다. 한 시즌 기록으로는 프리미어 리그 역대 최다였다.
한국 선수로 사는 일도 그 열 해에 들어 있다. 2018년 아시안게임에서 주장으로 금메달을 땄다. 2020년 2월 애스턴 빌라 원정에서 팔이 부러졌고, 축구가 멈춘 그해 4월에는 제주의 해병대에서 3주간 기초 군사 훈련을 받았다. 아시아 최고의 선수상은 아홉 번 받았다. 구단은 그것이 기록이라고 적는다.
케인이 떠난 2023년 8월 완장이 그에게 왔다. 그는 트로피가 없는 자신을 구단의 위대한 선수들 옆에 둘 수 없다고 말해 왔다.

2025년 5월 21일 빌바오의 주장은 발 부상 탓에 선발로 서지 못했다. 후반 67분에 들어가 한 골의 리드를 지켰고, 경기가 끝난 뒤 트로피를 들었다. 아시아 선수가 주장으로 유럽 대회 트로피를 든 것은 처음이었다. 그날 밤 기자가 다시 물었다.
전설이라고 해 두자. 안 될 것 없지 않나. 오늘만은. 17년 동안 아무도 못 한 일이다.
Let's say I'm a legend. Why not? Only today!
손흥민이 2025년 5월 21일 UEFA 유로파 리그 결승 직후 TNT 스포츠 인터뷰에서
그의 말엔 기교보다 진심, 스탯보다 성실함, 관심보다 헌신이 있었고, 토트넘 144년 축구사 정체성이 그려낸 철학에 가장 부합했다.
마지막 경기는 서울이었다. 2025년 8월 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치른 여름 투어 경기다. 사흘 뒤 구단은 그의 이적을 알렸다. 454경기 173골, 구단 역대 득점 5위. 4위 마틴 치버스와는 한 골 차이다.
런던의 팬들에게 인사할 기회는 넉 달 뒤에 왔다. 2025년 12월 9일 UEFA 챔피언스 리그 슬라비아 프라하전을 앞두고 그는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의 잔디에 다시 섰다. 그날에 맞춰 토트넘 하이 로드에는 그의 벽화가 그려졌다.
토트넘이라는 거울 속에서 가장 뜨겁게 빛나는 별.
필자는 손흥민을 토트넘 홋스퍼 FC 역대 베스트 11 단골손님인 바비 스미스(Robert Alfred Smith; 잉글랜드), 클리프 존스(Clifford William Jones; 웨일스)라는 레전드 위에 헌정해 본다.
10. 지미 그리브스 - 세컨드 스트라이커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381경기 268골은 FA 채리티 실드 두 경기 두 골을 넣은 값이다. 구단의 공식 기록은 379경기 266골이다.
잉글랜드 공격수 GOAT.
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공격수. 토트넘 144년 축구사 역대 최고의 선수(GOAT).
스탠리 매슈스 경, 톰 피니 경, 바비 찰턴 경, 바비 무어, 고든 뱅크스와 함께 잉글랜드 절대 성역.
전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트라이커 중 한 명.
그 이름은, 단순한 전설이 아니다. 지미 그리브스는 숫자가 감정을 이긴 유일한 예외였고, 감정조차 그를 설명하기엔 부족한 존재였다.
원래 토트넘에 올 아이였다. 학교를 마치면 입단하기로 돼 있었는데 1955년 초 아서 로 감독이 병으로 자리를 비웠고, 그 틈에 첼시가 그를 데려갔다. 흰 셔츠를 입기까지 여섯 해가 더 걸렸다. 1957년 8월 첼시 선수로 치른 리그 데뷔전의 장소가 하필 화이트 하트 레인이었고, 그는 그날도 골을 넣었다.
첼시에서 네 해 동안 169경기 132골을 넣고 AC 밀란으로 갔다. 열네 경기에 아홉 골을 넣고도 행복하지 않았다. 선수의 하루를 통째로 묶어 두는 네레오 로코 감독의 방식과 맞지 않았고, 여섯 달 만에 돌아왔다. 1961년 12월 니컬슨이 치른 값은 99,999파운드다. 더블을 든 팀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선수라고 본 사람에게 감독은 사상 첫 10만 파운드짜리 선수라는 짐만은 지우지 않으려 했다. 데뷔전에서 그는 해트트릭을 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몸을 날린 가위차기였다.
누구보다 많은 골을 넣었고, 누구보다 많은 경기에서 터뜨렸고, 누구보다 조용히, 부드럽게, 넣은 자.
지미 그리브스의 골은 환호보단 ’당연함’이었고, 그의 골은 전술을 뛰어넘는 운율이었다.
구단이 적은 그의 기술은 이렇다. 빗나간 패스나 굴절된 공이 어디에 떨어질지 미리 아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첫 몇 걸음이면 어떤 수비수도 떼어 놓았다. 남들이 슛을 쏘고 서서 구경할 때 그는 공을 따라 들어가 튀어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본인은 그 침착함이 느긋한 성격에서 나온다고 했다. 첫 시즌 FA컵 일곱 경기에서 아홉 골을 넣어 팀을 웸블리로 데려갔다. 1962-63시즌에는 리그 41경기 37골, 다음 시즌에는 41경기 35골이었다. 퇴장은 평생 한 번이다. 1963년 베오그라드에서 치른 컵위너스컵 준결승에서 상대 수비수에게 주먹을 휘두르려다 쫓겨났다. 한 경기를 쉬고 나온 결승에서 그는 선제골과 네 번째 골을 넣었다.
1962년 FA컵 결승에서는 3분 만에 선제골을 넣었고, 1963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에서는 두 골을 넣었다. 1962-63시즌의 리그 37골과 통산 리그 220골은 지금도 구단 기록이다.
잉글랜드를 넘어 전 유럽의 팀들은 지미 그리브스를 알고도 못 막았다. 마치 리오넬 메시가 달려오던 그 순간처럼.
토트넘 역사상 최다 득점자(266골, 해리 케인 이전까지). 1962-63 시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 주역. 잉글랜드 1부 리그 득점왕 최다 기록(6회). 잉글랜드 대표팀 A매치 57경기 44골.
잉글랜드 1부 리그 통산 357골도 그의 것이다. 그보다 많이 넣은 사람은 지금까지 없다.
그런 사람에게 1966년이 있다. 잉글랜드 대표로 넣은 44골 가운데는 해트트릭이 여섯 번 있다. 지금도 잉글랜드 기록이다. 자기 나라에서 열린 월드컵의 조별 리그 프랑스전에서 상대 미드필더의 스터드가 그의 정강이를 긁었다. 열네 바늘을 꿰맸고 흉터는 평생 남았다. 대신 들어간 제프 허스트가 8강에서 결승골을 넣어 자리를 지켰고 결승에서 해트트릭을 했다. 결승 날 그리브스는 뛸 수 있는 몸이었지만 앨프 램지 감독은 팀을 바꾸지 않았다. 선수 교체라는 제도가 없던 때다. 그는 결승을 벤치에서 지켜봤고, 우승 메달도 뛴 열한 명에게만 나왔다. 그의 메달은 FIFA가 규정을 바꾼 2009년에야 왔다.[10]
모두와 함께 경기장을 돌며 춤을 췄지만, 그 승리와 큰 행복의 순간에도 속 깊은 곳은 슬펐다. 프로 선수로 사는 내내 월드컵 결승에서 뛰는 꿈을 꿨다.
I had missed out on the match of a lifetime and it hurt.
지미 그리브스가 자서전에서 1966년 월드컵 결승의 날을 두고
“골잡이”라는 단어가 잉글랜드 사전 속에 존재한다면 그 첫 예시는 당연히 <Jimmy Greaves>이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조차 레알 마드리드에서 절대 권능이 되지 못했던 것처럼 해리 케인 역시 지미 그리브스 앞에서 절대 권능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구단이 꼽는 그의 골은 1968년 10월 레스터 시티전의 것이다. 제닝스가 길게 찬 공을 하프라인 근처 오른쪽에서 받아 한 동작으로 첫 수비수를 벗겼다. 세 명을 더 제치고, 골키퍼 실턴을 속이고, 밀어 넣었다. 구단의 경기 안내 책자는 몇 주 동안 그 사진을 표지에 썼다. 그가 공을 밀어 넣는 뒤편으로 수비수 넷이 저마다 다른 자세로 일어나고 있는 사진이다.
토트넘을 떠난 1970년 봄 그는 런던에서 멕시코시티까지 달리는 월드컵 랠리에 나갔다. 난생처음 나간 랠리에서 포드 에스코트를 몰아 96대 가운데 6위로 들어왔다. 선수 생활 뒤에는 술과 싸웠고, 끊은 뒤로는 죽을 때까지 입에 대지 않았다. 1985년부터 1992년까지는 리버풀의 옛 공격수 이언 세인트존과 축구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다음 세대의 얼굴이 됐다. 2015년 뇌졸중으로 말을 잃었고 2021년 9월 19일 여든하나로 세상을 떠났다.
이 선수를 더 설명할 게 있을까… 슈퍼스타인 것을..
11. 해리 케인 - 센터 포워드

토트넘의 부흥기에 가장 앞섰던 자.
처음부터 대단하지 않았지만 눈 떠보니 어느덧 PL King이라는 수식어로 평가되던 스트라이커 해리 케인(Harry Edward Kane, MBE; 잉글랜드 공격수, 1993-).
임대 생활, 벤치, 무명의 시기.. 기다림은 길었고, 의심은 많았다.
런던 북동쪽 월섬스토에서 태어나 토트넘 유소년으로 컸다. 1군에 자리가 없던 그를 구단은 네 번 빌려줬다. 레이턴 오리엔트에서 18경기 5골, 밀월에서 27경기 9골. 노리치 시티에서는 발목을 다쳐 4경기만 뛰었고, 레스터 시티에서는 13경기 2골이었다.[11]
여덟 살에 아스널 유소년에 들어갔다가 한 해 만에 나왔다. 어린 날의 우상은 토트넘의 공격수 테디 셰링엄이었다. 1군 첫 경기는 2011년 8월 UEFA 유로파 리그 하츠전이다. 그는 페널티킥을 얻어 냈고 직접 찼다가 막혔다. 첫 골은 그해 12월 섐록 로버스 원정에서 나왔다.
2014년 10월 UEFA 유로파 리그 아스테라스 트리폴리스전은 그의 이력에서 가장 이상한 밤이다. 프로 첫 해트트릭을 한 경기였는데, 끝나기 3분 전 골키퍼 요리스가 퇴장당했고 교체 카드가 남아 있지 않았다. 케인이 장갑을 꼈다. 프리킥을 잡으려다 놓쳐 한 골을 내줬다. 그 시즌 그는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영 플레이어가 됐다.
그러나 케인은 <왜 내가 런던에 있는가>를 스스로 증명해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토트넘 축구사 역대 최다 득점자로 우뚝 섰다. 마치 호날두가 마드리드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그 타이밍은 2023년 2월 5일이다. 상대는 그 시즌의 챔피언 맨체스터 시티였고, 그의 골은 그날의 유일한 골이었다. 구단 통산 267번째 골, 그리브스의 266골이 53년 만에 넘어갔다.
- 1위 · 280골
- 해리 케인435경기
- 2위 · 266골
- 지미 그리브스379경기
- 3위 · 208골
- 바비 스미스317경기
- 4위 · 174골
- 마틴 치버스367경기
- 5위 · 173골
- 손흥민454경기
해리 케인의 움직임은 무겁지 않다.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다.
이 역설적 존재인 케인은 ’책임’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등에 지고 골문을 바라보며, 무너지는 자세 속에서도 유럽의 그 어떤 공격수보다 날카로운 슈팅을 날렸다. 2010년대 중반에 이런 유형은 폴란드의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나 아르헨티나의 마우로 이카르디 외 전무했었다.
그는 크로스를 기다리는 스트라이커이며, 동시에 직접 빌드업을 설계하는 미드필더였고, 필요시 가장 깊숙한 곳까지 수비하던 리더였다.
숫자가 그 두 얼굴을 다 증명한다.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을 세 번 했고, 2020-21시즌에는 득점왕과 도움왕을 한꺼번에 가져갔다. 2017년 한 해 동안 넣은 프리미어 리그 39골은 시어러가 갖고 있던 한 해 최다 36골을 넘은 기록이고, 그해 리그에서만 해트트릭을 여섯 번 했다. 프리미어 리그 통산 213골은 앨런 시어러의 260골 다음이다.
토트넘의 트로피는 그의 이름을 모르지만, 기억은 트로피보다 오래 남는다.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 주장으로서, 토트넘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짊어진 사내로서, 그는 “언젠가”의 가능성을 “현대의 상징”으로 바꾸었다.
토트넘이라는 클럽의 ’감정선’은 지미 그리브스가 시작했고, 해리 케인이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 마무리는 새로운 이야기의 서문이다.
그는 현재형이었고, 미래형으로 남을 선수다.
마침내, 한 경기장에 선 열한 명
이 명단은 토트넘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26인의 명단에 대한 헌사이다.
제닝스가 한 손으로 크로스를 낚아채 왼쪽의 놀스에게 굴린다. 매벗과 킹이 가운데를 잠그고, 오른쪽의 페리먼은 854번째 경기에서도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매카이가 공을 빼앗아 블랜치플라워에게 건네면 블랜치플라워가 반대편으로 길게 연다. 호들이 수비 넷의 머리 위로 공을 띄운다. 손흥민이 왼쪽에서 안으로 꺾어 들어오고, 그리브스가 튀어나올 공을 기다리고, 케인이 내려와 받았다가 돌아서 때린다.
트로피를 받아 든 주장 열셋 가운데 여섯, 가장 오래 뛴 여섯 전부, 가장 많이 넣은 다섯 가운데 셋이 이 열한 명이다.
이미지 밖에서 다시 읽는 후보 15인
후보 열다섯을 글자로 다시 적는다. 더블의 선수 넷, 1970년대 초 컵 대회의 선수 셋, 2019년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의 선수 셋이 들어 있다. 포지션은 그림에 적은 대로다. 그림의 가레스 베일은 개러스 베일, 크리스 휴튼은 크리스 휴턴, 대런 앤더튼은 대런 앤더턴이다.[12]
- 테드 디치번Ted Ditchburn · 골키퍼
1946-1958년 452경기. 1951년 구단의 첫 리그 우승 때 골문을 지켰다.
- 위고 요리스Hugo Lloris · 골키퍼
2012-2023년 447경기. 프리미어 리그 361경기는 구단 최다 기록이다.
- 마이크 잉글랜드Mike England · 센터백
1966-1975년 397경기 19골. 제닝스에게 자신감을 넣어 준 웨일스의 센터하프다.
- 피터 베이커Peter Baker · 센터백
1953-1965년 342경기. 1961년 더블과 1963년 로테르담의 수비수다.
- 모리스 노먼Maurice Norman · 센터백
1955-1965년 411경기 19골. 더블 팀 수비의 한가운데에 섰다.
- 얀 페르통언Jan Vertonghen · 레프트백
2012-2020년. 유럽 대회 56경기를 뛰었고 2019년 결승에 선발로 섰다.
- 앨런 멀러리Alan Mullery · 중앙 미드필더
1964-1972년 374경기 30골. 1971년 리그컵과 1972년 UEFA컵을 든 주장이다.
- 크리스 휴턴Chris Hughton · 중앙 미드필더
1979-1990년 398경기 19골. FA컵 두 번과 1984년 UEFA컵을 함께했다.
- 오스발도 아르딜레스Osvaldo Ardiles · 공격형 미드필더
1978-1988년 311경기 25골. 월드컵을 들고 온 아르헨티나 선수다.
- 크리스티안 에릭센Christian Eriksen · 공격형 미드필더
2013-2020년 프리미어 리그 51골. 2019년 결승으로 간 팀의 패스를 맡았다.
- 클리프 존스Cliff Jones · 레프트 윙
1958-1968년 378경기 159골. 더블 팀의 날개이고 구단 역대 득점 6위다.
- 개러스 베일Gareth Bale · 레프트 윙
2007-2013년과 2020-21시즌 237경기 71골. 2013년 올해의 선수상을 휩쓸었다.
- 대런 앤더턴Darren Anderton · 라이트 윙
1992-2004년 358경기. 프리미어 리그 299경기를 토트넘에서 뛰었다.
- 바비 스미스Bobby Smith · 센터 포워드
1955-1964년 317경기 208골. 더블 팀의 9번이고 구단 역대 득점 3위다.
- 마틴 치버스Martin Chivers · 센터 포워드
1968-1976년 367경기 174골. 두 결승에서 골을 넣은 공격수이고 2026년 1월 세상을 떠났다.
기록을 확인한 곳
- 구단 우승 기록과 주장 열셋, 출전·득점 순위, 2025년 이후의 일 — Tottenham Hotspur 「Club Honours」, 「Sonny's latest stats as he joins select band of Spurs skippers」. 트로피를 든 주장 13명의 명단, 역대 출전 1-10위와 득점 1-10위, 빌바오 결승과 17년·41년, 2024-25시즌 17위와 감독 해임, 2025-26시즌 17위와 승점 2 차 잔류. 트로피 열여섯 개는 구단의 주장 명단에 적힌 1961년 이후의 우승을 센 값이다.
- 대니 블랜치플라워 — Tottenham Hotspur 명예의 전당 「Danny Blanchflower」. 영광에 관한 말, 벨파스트의 유년과 공군, 개막 11연승과 1897년 뒤의 첫 더블, 반즐리의 훈련과 빌라의 이적료, 아서 로와 3만 파운드, 플레이스타일과 주장 노릇, 382경기 21골, 올해의 선수 두 번, 1958년 월드컵과 동생 재키, A매치 50경기, 동점골 농담, 1958년 타임스 독자 편지, 1961년 2월 방송 초대 거절과 본인의 설명, 1963년 영국 구단의 첫 유럽 대회 우승, 은퇴와 코치·기자 생활, 1990년 기념 경기, 2009년 타임스의 선정.
- 손흥민 — Tottenham Hotspur 「Heung-Min Son」, 「Sonny departs for LAFC」, 「Sonny's coming home」, PA 통신 2025년 5월 22일(Waterford News & Star 게재). 함부르크와 레버쿠젠, 아버지와 양발, 데뷔와 첫 시즌, 새 경기장의 첫 골, 푸슈카시상과 득점왕, 케인과의 14골, 아시안게임과 군사 훈련, 아시아 최고의 선수상 아홉 번, 주장 선임, 빌바오의 67분 교체 투입과 인터뷰, 454경기 173골, 서울의 마지막 경기와 12월의 작별 인사.
- 팻 제닝스 — Tottenham Hotspur 명예의 전당 「Pat Jennings」. 게일릭 풋볼과 목재소, 구단이 적은 플레이스타일, 왓퍼드와 이적료, 1967년 결승의 한 손 캐치, 채리티 실드의 골, 590경기, 두 번의 올해의 선수(선수들이 뽑는 상의 첫 골키퍼), 아스널 이적, 1983년 1,000번째 경기, 마흔한 번째 생일의 119번째 A매치, 1993년 복귀. 구단 글은 UEFA컵 우승을 1974년으로 적었으나 우승은 1972년이고 1974년은 준우승이다.
- 게리 매벗 — Tottenham Hotspur 명예의 전당 「Gary Mabbutt」. 당뇨 진단과 어린이 프로그램 출연, 12만 파운드, 채리티 실드 데뷔와 A매치 16경기, 611경기 38골, 1987년 결승의 골과 자책골, 팬 잡지, 1991년 결승, 1993년 부상과 보호 마스크, 1996년 골절, 2만 번째 전화.
- 레들리 킹 — Tottenham Hotspur 명예의 전당 「Ledley King」. 하나뿐인 구단이라는 말, 바비 무어와의 비교, 9.82초의 골, 앙리의 평과 경고 여덟 장, 구단이 적은 플레이스타일, 유로 2004 프랑스전, 무릎과 레드냅의 말, 2008년 리그컵, 323경기 14골.
- 스티브 페리먼 — Tottenham Hotspur 명예의 전당 「Steve Perryman」. 1967년 결승의 손님, 1969년 데뷔와 재기용, 플레이메이커라는 평, 아이슬란드전 한 경기, 센터백과 풀백으로 옮긴 사정, 밀란전 두 골, 1984년 결승과 아르딜레스, 854경기 39골과 대회별 최다 출전, 시미즈 에스펄스의 우승.
- 데이브 매카이 — Tottenham Hotspur 명예의 전당 「Dave Mackay」. 하츠의 우승, 체격과 플레이, 스코틀랜드 22경기와 1958년 월드컵, 1963년 결승 결장, 두 번의 골절, 브렘너와의 사진과 본인의 말, 1967년 FA컵, 더비 카운티와 올해의 선수, 1974-75시즌 감독으로 든 리그 우승, 두 명예의 전당, 조지 베스트의 평, 318경기 51골.
- 글렌 호들 — Tottenham Hotspur 명예의 전당 「Glenn Hoddle」. 치버스와 유소년 대회, 스토크전 발리, 구단이 적은 플레이스타일, 1983년 페예노르트전과 크라위프의 셔츠, 1982년 결승의 두 골, 1987년 싱글 차트 12위, 490경기 110골, 구단이 꼽은 골들, A매치 53경기, 1984년 결승 결장, 1987년 결승과 모나코, 2007년 국립 축구 박물관 명예의 전당.
- 지미 그리브스 — Tottenham Hotspur 명예의 전당 「Jimmy Greaves」. 아서 로의 병과 첼시, 밀란의 여섯 달, 99,999파운드, 가위차기를 낀 데뷔전 해트트릭, 첫 시즌 FA컵 9골과 리그 37골·35골, 베오그라드의 퇴장, 379경기 266골과 리그 220골, 1부 리그 357골과 득점왕 6회, 잉글랜드 해트트릭 여섯 번, 1966년의 부상(열네 바늘)과 램지의 선택, 2009년의 메달, 자서전의 회고, 1968년 레스터전의 골, 1970년 월드컵 랠리 6위, 방송 진행과 2021년 9월 19일 별세. 구단 글은 1966년 결장의 사정으로 간염 회복을 든다. 간염은 1965-66시즌의 일이고 대회 중에 자리를 잃은 것은 프랑스전 부상 때문이다.
- 해리 케인 — Tottenham Hotspur 「Harry Kane」. 어린 시절과 셰링엄, 하츠전 데뷔와 첫 골, 네 번의 임대, 아스테라스 트리폴리스전의 해트트릭과 골키퍼, 2017년 한 해 39골, 435경기 280골, 2023년 2월 5일의 267번째 골, 프리미어 리그 213골과 득점왕 세 번.
- 후보 15인 — Tottenham Hotspur 「Hall of Fame」, 「Hugo Lloris」, 「Gareth Bale」, 출처 1의 순위표. 그림의 포지션 가운데 피터 베이커와 크리스 휴턴은 실제로는 풀백으로 뛴 선수다.
- 디자인과 다르게 적은 값 — 제닝스의 570경기는 590경기, 블랜치플라워의 채리티 실드 3회는 2회, 호들의 채리티 실드 3회는 1회, 손흥민의 451경기는 454경기, 그리브스의 381경기 268골은 구단 공식 기록 379경기 266골이다. 근거는 출처 1-4, 10, 1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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