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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시티 FC 문장

맨체스터 시티 FC

Manchester City Football Club
MANCHESTER CITY FOOTBALL CLUB · THE CITIZENS 1880-2026

에티하드 스타디움 · 리그 우승 10회 · FA컵 8회 · 리그컵 9회 · UEFA 챔피언스 리그 1회

맨체스터 시티 FC 역대 최고의 전설 열한 명과 후보 열다섯, 스물여섯 개의 이름을 필자의 견해로 골랐다.

하늘색 혁명, 도시를 지배한 축구 철학

맨체스터 시티 FC. 더 시티즌스(The Citizens)라는 이름은 단순한 별명을 넘어선 브랜드 마케팅의 신화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한 도시의 정체성과 한 시대의 전술을 바꿔놓은 철학의 코드다.

1880년 세인트 마크스 교회의 소박한 풋볼팀에서 출발한 이 클럽은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그늘과 빛을 반복하며 맨체스터라는 도시의 이면을 품어왔다. 교회 팀은 1887년 아드윅 AFC가 되어 하이드 로드에 자리를 잡았고, 1894년 도시 전체를 대표하겠다며 맨체스터 시티라는 이름으로 다시 짜였다.[1]

1960년대 조 머서(Joe Mercer; 잉글랜드 축구 감독, 1914-1990)와 맬컴 앨리슨(Malcolm Allison; 잉글랜드 축구 코치·감독, 1927-2010)이 이끌었던 매혹의 시티, 2008년 아부다비의 자본을 등에 업은 뒤에도 시티는 단지 돈으로 이루어진 클럽이 아니었다.

그들은 축구의 형식과 내용을 완전히 재구성한 혁명적 구조물이 되었고, 옛 오스트리아 분더팀부터, 엘레니오 에레라의 카테나치오, 리뉘스 미헐스와 에른스트 하펠의 토털 풋볼, 아리고 사키의 기계식 압박까지 모두 차용한 주제프 과르디올라(Josep Guardiola Sala; 스페인 축구 감독, 1971-)라는 한 지휘자 아래에서 맨체스터 시티는 전술 그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다비드 실바의 품격, 아궤로의 한 방, 콤파니의 투혼, 로드리의 리듬, 더브라위너의 비전, 그리고 콜린 벨로 상징되는 영혼의 계보.

이 콘텐츠는 그 하늘색 시대를 이끌었던 가장 위대한 26인을 기억하는 기록이며, 맨체스터라는 도시가 품은 축구 철학의 정점에 바치는 연애편지다.

명단은 2025년 5월에 골랐다. 더브라위너가 에티하드 스타디움에 작별을 고하던 봄이었다. 그 뒤 한 해 반 사이에 명단 안팎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그해 여름 더브라위너는 나폴리로, 워커는 번리로 떠났다. 2026년 5월에는 과르디올라가 열 해 동안 트로피 스무 개를 남기고 물러났고 엔초 마레스카가 그 자리에 앉았다. 8월에는 로드리가 월드컵 우승 메달과 골든볼을 들고 바르셀로나로 갔다. 이제 열한 명 가운데 하늘색 셔츠를 입고 뛰는 사람은 없다. 9월 29일에는 프리미어 리그의 독립 위원회가 2009-10시즌부터 2017-18시즌까지 구단이 재정 규정을 어겼다는 혐의를 인정했다. 제재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구단은 결백을 주장하며 10월 1일 항소했다.

콜린 벨과 케빈 더브라위너: 키팍스의 왕과 킹 케브

2025년 5월, 더브라위너를 떠나보내며 구단은 그를 소개하는 글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나이 든 세대에게 그는 콜린 벨 이후 최고다. 다시는 나올 수 없다던 천재의 복제.

He's the greatest since Colin Bell.

맨체스터 시티 FC가 케빈 더브라위너를 두고

열한 명을 부르기 전에 이 두 사람을 먼저 세운다. 콜린 벨(Colin Bell; 잉글랜드 미드필더, 1946-2021)과 케빈 더브라위너(Kevin De Bruyne; 벨기에 미드필더, 1991-). 메인 로드(Maine Road; 1923년부터 2003년까지 맨체스터 시티의 홈구장)의 입석 스탠드 키팍스는 벨을 왕이라 불렀고, 에티하드의 관중석에는 더브라위너를 그린 통천에 KING KEV라는 글자가 적혔다. 반세기를 사이에 두고 같은 구단이 같은 자리의 선수에게 같은 칭호를 줬다.[2][3]

소매에 8번이 적힌 사선 무늬 셔츠를 입고 먼 곳을 바라보는 콜린 벨의 흑백 사진
1966-1979 · 키팍스의 왕콜린 벨The King of the Kippax498경기 153골. 새 경기장은 한쪽 스탠드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우승을 확정한 날 라커룸에서 두 팔을 벌리고 소리치는 케빈 더브라위너
2015-2025 · 킹 케브케빈 더브라위너King Kev422경기 108골 170도움. 떠나는 날 동상이 약속됐다.
사진: 맨체스터 시티 FC.

두 사람 다 의심 속에 왔다. 1966년 3월, 2부 리그 버리의 스무 살 주장을 보러 간 앨리슨은 관중석에서 다른 구단 스카우트들이 다 듣도록 떠들었다. 패스를 못 한다, 태클도 못 한다, 공중볼도 형편없다. 이사회가 돈을 마련할 시간을 벌려는 연극이었고, 시티는 4만 5천 파운드에 그를 데려왔다. 2015년 여름 볼프스부르크의 더브라위너가 구단 최고 이적료로 올 때는 연극이 필요 없었다. 영국의 방송 해설자들이 진심으로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좋은 선수이기는 한데 위대한 선수냐는 것이었다. 그는 바로 전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도움 21개를 올린 올해의 선수였다.

의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벨은 데뷔전에서 골을 넣었고 그 봄 시티를 1부로 끌어올렸으며, 두 해 뒤에는 리그 우승 팀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지치지 않는 그를 두고 팬들은 당대의 명마 이름을 따 니진스키(Nijinsky; 1970년 잉글랜드 삼관마)라고도 불렀다. 더브라위너는 첫 시즌에 16골 13도움을 올리며 구단을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 데려갔고, 그 뒤 아홉 해 동안 프리미어 리그를 여섯 번 들었다.

콜린 벨케빈 더브라위너
온 곳버리, 4만 5천 파운드볼프스부르크, 당시 구단 최고액
남긴 기록498경기 153골422경기 108골 170도움
1부 리그 우승1번6번
유럽의 트로피1970 유러피언 컵위너스컵2023 UEFA 챔피언스 리그
긴 부상1975년 11월 오른 무릎, 두 해2023-24시즌 햄스트링 수술, 다섯 달
돌아온 날1977년 12월 26일 뉴캐슬전, 후반 교체 투입. 0-0이 4-0이 됐다2024년 1월 뉴캐슬 원정, 교체 투입. 1-2가 3-2가 됐다
경기장에 남은 것콜린 벨 스탠드(2004), 동상(2023)동상(2025년 5월 제작 발표)

왕의 자격은 돌아온 날에 증명됐다. 1975년 11월 리그컵 맨체스터 더비에서 벨의 오른 무릎이 무너졌다. 두 해가 넘는 공백 끝에 1977년 12월 26일, 0-0으로 맞서던 뉴캐슬전 후반에 그가 교체로 들어서자 메인 로드 전체가 일어섰다. 경기는 4-0으로 끝났다. 더브라위너의 귀환도 공교롭게 뉴캐슬이 상대였다. 햄스트링 수술로 다섯 달을 쉰 그는 2024년 1월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1-2로 뒤진 팀에 교체로 들어가 동점골을 넣고, 추가시간에 결승골을 만드는 패스를 보냈다. 시티는 그 시즌 잉글랜드 최초의 리그 4연패를 이뤘다.

구단이 두 사람에게 준 것도 닮았다. 2003년 새 경기장으로 옮긴 시티는 이듬해 팬 투표에 서쪽 스탠드의 이름을 맡겼고, 압도적인 표가 콜린 벨에게 갔다. 선수의 이름이 붙은 스탠드는 지금도 그것 하나다. 2025년 5월 20일 더브라위너가 에티하드에서 마지막 경기를 마치자 구단은 그 자리에서 동상 제작을 발표했다. 회장은 그를 이 구단의 셔츠를 입은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불렀다.

맨체스터의 하늘색에는 왕이 둘이다.키팍스가 세운 왕과, 에티하드가 세운 왕.

선정 전술: 네 번의 전성기를 포갠 3-4-1-2

대형은 3-4-1-2다. 골문에는 트라우트만이 서고, 그 앞 세 명은 왼쪽부터 도일, 콤파니, 워커다. 콤파니가 한 발 뒤에서 스위퍼로 남고 도일과 워커가 좌우 스토퍼로 나선다. 워커를 풀백이 아니라 스리백의 오른쪽에 둔 것은 과르디올라가 실제로 그를 그렇게 썼기 때문이다. 시티의 3-2-4-1이 100년 전의 WM과 어떻게 닮았는지는 과르디올라의 전술을 다룬 글에 따로 적었다.

가운데 줄은 로드리와 벨이 한복판을 맡고 실바가 왼쪽, 더브라위너가 오른쪽에 선다. 넷 다 측면을 달리는 선수가 아니라 안으로 좁혀 들어와 공을 다루는 선수다. 그 앞에 서머비가 서고, 맨 앞은 아궤로와 리다.

이 열한 명은 구단의 전성기 네 번에서 왔다. 트라우트만은 1956년 FA컵의 사람이다. 도일과 벨, 서머비, 리는 1968년 5월 11일 뉴캐슬에서 리그 우승을 확정한 날 한 팀으로 선발에 섰다. 콤파니와 실바, 아궤로는 2012년 5월 13일 44년 만의 우승을 함께 들었다. 워커와 로드리, 더브라위너는 2023년 트레블의 얼굴이다.[13]

1. 베르트 트라우트만 - 골키퍼

베르트 트라우트만 골키퍼 상세 정보 디자인

목이 부러진 채 일어선 남자.

그는 전쟁 포로였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는 영국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키퍼로 남았다.

베르트 트라우트만(Bernhard Carl “Bert” Trautmann; 독일 골키퍼, 1923-2013). 독일 출신, 독일 공군 공수부대 출신, 그리고 맨체스터 시티의 골문을 지킨 사내.

브레멘에서 태어난 그는 1941년 열일곱에 공군에 들어가 공수부대원으로 동부 전선에서 싸웠다. 전쟁 막바지에 영국군에게 붙잡혔을 때는 처형당할 줄 알았다고 한다. 영국 병사들의 첫마디는 어이 프리츠, 차 한잔 하겠나였다.

1945년, 영국군의 포로로 체포된 그는 랭커셔의 수용소에서 골키퍼 장갑을 처음 꼈고 전후에도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맨체스터라는 도시의 축구팀에 남기로 결심한다. 수용소 축구에서 그는 원래 필드를 뛰는 선수였다. 어느 날 다쳐서 골문으로 물러났는데 그 자리가 평생의 자리가 됐다. 독일식 이름 베른트가 영국 사람들 입에서 버트가 된 것도 이때다. 1948년 수용소가 문을 닫자 귀국 제안을 거절하고 농장과 폭탄 처리반에서 일하며 동네 팀 세인트 헬렌스 타운의 골문을 지켰다.

그 결정은 단순한 용기가 아니었다. 미움과 상처, 오해와 냉소를 뚫고 자신의 존재로 신뢰를 쌓아간 기적의 시작이었다. 1949년 10월 7일 1부 리그의 맨체스터 시티가 그와 계약하자 도시가 뒤집혔다. 2만 명이 항의하러 나왔다고 전해진다. 전쟁이 끝난 지 네 해였고, 맨체스터에는 큰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그때 맨체스터의 랍비 알렉산더 알트만(Alexander Altmann; 독일 출신 랍비·유대 철학자, 1906-1987)이 지역 신문에 공개서한을 실었다. 독일인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지만 그 범죄와 관계없는 한 사람의 독일인을 미움으로 벌하지는 않겠다는 글이었다. 트라우트만은 훗날 알트만 덕분에 한 달 만에 다 잊혔다고 말했다.

원정에서는 야유가 더 오래갔다. 1950년 첫 런던 원정이던 풀럼전에서 시티는 0-1로 졌는데, 경기가 끝나자 양 팀 선수들이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는 데뷔한 날부터 정확히 100경기를 내리 뛰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맷 버스비 감독은 선수들에게 트라우트만을 상대로는 어디로 찰지 생각하지 말고 일단 차고 나서 생각하라고 일렀다.

시티 통산 545경기. 1956년 FA컵 결승 출전, 경기 도중 목뼈가 골절됐음에도 끝까지 출전. 1956년 기자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 골키퍼가 그 상을 받은 것도, 외국인이 받은 것도 처음이었다.

웸블리 골문 앞에서 목과 얼굴을 감싸 쥐고 골대에 기대는 베르트 트라우트만의 연속 사진
1956년 5월 5일 웸블리. 충돌 뒤 목을 감싸 쥐고 골문으로 돌아가는 트라우트만. 사진: 맨체스터 시티 FC.

1956년 5월 5일 웸블리, 상대는 버밍엄 시티였다. 시티는 3분 만에 앞서 나갔고 62분과 64분에 두 골을 더해 3-1을 만들었다. 세 번째 골은 트라우트만이 길게 차 준 공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종료 17분 전, 달려드는 피터 머피(Peter Murphy; 버밍엄 시티의 공격수)의 발밑으로 몸을 던졌다가 그의 오른 무릎에 목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 교체라는 제도가 없던 시절이다. 주장은 필드 선수를 골문에 세우려 했지만 그는 비틀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고, 남은 시간에 두 번을 더 막았다. 관중은 그를 위해 노래를 불렀고, 메달을 걸어 주던 에든버러 공작은 그의 목이 비뚤어져 있다고 말했다. 엑스레이를 찍은 것은 사흘 뒤다. 목뼈가 부러져 있었다.

본인은 그날을 영웅담으로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용기 이야기를 하는데, 목이 부러진 줄 알았으면 총알같이 나갔을 것이라고 했다. 그해는 그에게 가장 잔인한 해이기도 했다. 결승 몇 달 뒤 다섯 살 난 맏아들 존이 집 근처에서 차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1964년 4월 15일의 고별 경기에는 공식 집계로 4만 7천 명이 들었고, 문밖에서 돌아간 사람까지 6만 명이 왔다고 구단은 추산한다. 열다섯 해 전 그의 입단에 항의하던 도시였다.

그리고 2004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OBE(대영 제국 훈장) 수훈. 영국과 독일의 화해에 힘쓴 공로였다. 훈장은 그해 11월 1일 베를린의 영국 대사관에서 받았다.[4]

지금 내 마음은 영국 사람이다. 내 교육은 영국에 와서 시작됐다. 여기서 인간다움과 관용과 용서를 배웠다.

베르트 트라우트만이 영국을 두고

그는 단지 세이빙을 잘하는 골키퍼를 넘어선 존재이다. 도시의 불신과 혐오를 사랑으로 바꿔낸 상징적 존재로서 맨체스터 시티 FC는 그를 명예의 전당 가장 깊숙한 곳에 헌정했다. 레프 야신은 세계적인 골키퍼가 둘뿐이라고 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맨체스터에서 뛴 독일 청년이라고. 2013년 7월 19일 스페인 발렌시아 근교의 집에서 여든아홉으로 눈을 감았다.

2. 마이크 도일 - 좌 스토퍼

마이크 도일 좌 스토퍼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507경기는 구단 공식 기록으로 563경기다.

맨시티 팬들의 영원한 자부심.

맨체스터 곁의 애슈턴에서 태어나 맨체스터 시티에서 축구를 배웠으며, 맨체스터 시티에서 영혼을 불태웠다.

마이크 도일(Michael Doyle; 잉글랜드 수비수, 1946-2011). 구단 역사상 가장 시티스러운 수비수.

그의 피에는 하늘색이 아니라 시민 정신(Citizenship) 그 자체가 흐르고 있었고, 그래서 모든 맨시티 팬들이 가슴속 No.1을 이 선수로 꼽는다.

아홉 살에 지역 신문에 편지를 보낸 아이였다. 커서 프로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내용이었고, 시티의 수석 스카우트 해리 고드윈이 그 기사를 오려 뒀다가 몇 해 뒤 주소를 들고 찾아갔다. 식탁에는 경찰관인 아버지의 헬멧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 시티의 경기 프로그램이 있었다. 고드윈은 그걸 보고 계약을 확신했다고 한다. 1962년 5월의 일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어려서부터 경찰 호신술 수업에 넣었다. 훗날 서포터들은 투표로 그를 시티 역사상 가장 거친 선수로 뽑았다.

견습생 시절에는 트라우트만의 차를 닦았다. 울버햄프턴에 여덟 골을 내주고 돌아온 대선배에게 허리는 괜찮으시냐고 물은 벌이었고, 몇 달 동안 그의 폴크스바겐을 세차해야 했다.

시티 통산 563경기. 주장 완장 세 시즌. 1968 리그 우승, 1969 FA컵 우승, 1970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 맨시티 역사상 가장 많은 경기에 출전한 자, 3위. 그보다 많이 뛴 사람은 앨런 오크스와 조 코리건 둘뿐이다.

그는, 센터백과 풀백,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을 모두 수행했으며, 감독들이 호출한 자리에서 잉글랜드 리그 내 TOP Class 수준의 플레이를 선보였다. 머서의 첫 시즌에는 급한 대로 공격수로 나서 리그 열아홉 경기에서 일곱 골을 넣었다. 1967-68시즌 리그 마흔두 경기 가운데 마흔 경기에 나섰고, 우승을 확정한 뉴캐슬전에서 서머비의 선제골로 이어진 패스를 넣었다.

웸블리에는 그의 이름이 두 번 남았다. 1970년 3월 리그컵 결승, 진창이 된 잔디에서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에 0-1로 끌려가던 후반에 동점골을 넣었다. 연장에서 결승골을 넣은 글린 파도는 훗날 그의 사돈이 된다. 도일의 아들과 파도의 딸이 결혼했다. 1975년 주장 완장을 받았고, 이듬해 2월 리그컵 결승에서 뉴캐슬을 2-1로 누르고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그 뒤 서른다섯 해 동안 시티의 주장은 누구도 웸블리에서 트로피를 들지 못했다. 본인은 그 사실이 지겹다고 했다. 자랑스럽기는 한데 그 말은 우리가 그 뒤로 아무것도 못 땄다는 뜻이니까.

경기 중 한 팔을 높이 들고 상대와 공을 다투는 하늘색 유니폼의 마이크 도일
하늘색 셔츠를 입고 몸을 던지는 마이크 도일(오른쪽). 사진: 맨체스터 시티 FC.

맨유 이야기를 빼고 도일을 말할 수는 없다. 올드 트래퍼드의 더비에 나오지 말라는 살해 협박이 신문사로 날아든 적이 있다. 그는 경찰의 24시간 경호를 받으며 출전했고 시티가 이겼다. 1974년 맨유가 강등됐을 때는 속이 쓰리다고 했다. 보장된 승점 4점이 날아갔다는 것이다. 맨체스터에는 축구팀이 둘뿐이라는 말도 그의 것이다. 맨체스터 시티와 맨체스터 시티 2군.[5]

내일 당장 축구를 그만둬야 한다면 곧장 나가서 시티 시즌권을 살 것이다. 나는 응원 도구를 내려놓고 사랑하는 팀을 위해 뛸 기회를 얻은, 관중석의 그 사내다.

마이크 도일이 자기 자신을 두고

2011년 6월 27일 예순넷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머비는 그를 맨체스터 시티의 심장이자 영혼이었다고 했다. 2019-20시즌에는 손자 토미 도일이 시티 1군에서 데뷔했다.

3. 뱅상 콤파니 - 스위퍼

뱅상 콤파니 스위퍼 상세 정보 디자인

맨시티 사상 가장 뛰어났던 방패.

맨체스터 시티가 클럽 이상의 신념이 되어 가던 시절에 등장한 벨기에의 왕.

뱅상 콤파니(Vincent Jean Mpoy Kompany; 벨기에 수비수·축구 감독, 1986-). 벨기에 왕국 출신의 이 사내는, 맨시티가 여전히 이웃의 그림자 밑에서 헤매던 시절에 등장했고, 그 자신이 시티의 중력이 되었다.

2008년 8월 함부르크에서 왔다. 아부다비의 인수가 발표되기 일주일 전이다. 새 시대의 돈으로 산 선수가 아니라 옛 시대의 마지막 영입이었던 사람이 새 시대의 주장이 됐다. 처음에는 중앙 미드필더로 뛰었고, 2009년 12월 로베르토 만치니가 부임한 뒤 센터백으로 내려갔다. 2011년 여름 완장을 받아 여덟 시즌 동안 찼다. 1970년대의 공격수 프랜시스 리는 2011년에 벌써 그를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이라고 불렀다.

주장으로서 프리미어 리그 4회의 우승을 이끎은 물론 FA컵과 리그컵에서도 영웅이 되던 콤파니였는데 특히 2015-16시즌과 2017-18시즌 리그컵 결승에서는 경기 최우수 선수에 지정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통산 360경기 20골이다.

2011-12시즌 맨유전 헤딩 골. 2018-19시즌 레스터전 중거리 골.

이것으로 설명을 마쳐도 되겠는가?

2012년 4월 30일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전반 추가시간의 헤더

다비드 실바의 코너킥을 머리로 받아 넣었다. 1-0. 두 경기를 남기고 시티가 골 득실로 선두에 올랐다.

2019년 5월 6일 · 레스터 시티전70분의 중거리 슛

25야드 밖에서 골문 위 구석을 뚫었다. 1-0. 한 경기를 남기고 리버풀을 승점 1점 앞섰다.

첫 번째 골이 들어간 밤 관중석에는 아궤로의 장인이던 디에고 마라도나가 앉아 있었고, 맨유는 90분 동안 유효 슈팅을 하나도 기록하지 못했다. 두 주 뒤 시티는 44년 만에 리그를 우승했다.

두 번째 골은 사연이 더 길다. 그는 시티에서 넣은 스무 골 가운데 열아홉 골을 페널티 지역 안에서 넣은 수비수다. 공을 몰고 올라가자 아궤로도, 스털링도, 벤치의 과르디올라도 쏘지 말라고 소리쳤다. 경기 뒤 그는 쏘지 말라는 소리를 다 들었다고 했다.

쏘지 마, 쏘지 마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린 선수들한테 언제 쏴야 하는지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I could hear people saying 'Don't shoot, don't shoot!'

뱅상 콤파니가 레스터전 결승골을 두고

그 골이 박스 밖에서 넣은 처음이자 마지막 골이다. 시티는 다음 경기를 이겨 리그를 지켰고, 일주일 뒤 FA컵 결승에서 왓퍼드를 6-0으로 눌러 잉글랜드의 트로피 넷을 한 시즌에 다 들었다. 그 결승이 그의 마지막 경기였다. 이튿날 떠난다고 발표했다.[6]

2021년 8월 28일 에티하드 밖에 그의 동상이 섰다. 같은 날 다비드 실바의 동상도 함께 섰다. 지금 그는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으로 분데스리가를 두 번 우승했다.

필자가 이 자의 위대함을 축소해도, 이미 독자님들 가슴속에 콤파니는 원형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4. 카일 워커 - 우 스토퍼

카일 워커 우 스토퍼 상세 정보 디자인

음바페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사내.

그는 풀백이 아니었다. 그는 공격수의 도망갈 길을 차단하는 GPS와 같았다.

2020년대 맨체스터 시티의 수비가 두 줄 수비 없이도 세계 최강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의 가장 큰 부분에 카일 워커(Kyle Andrew Walker; 잉글랜드 수비수, 1990-)라는 키워드가 존재한다.

2017년 7월 토트넘 홋스퍼에서 왔다. 4,500만 파운드에 옵션 500만 파운드가 붙은 계약이었다. 디자인에 적힌 별명 데스는 셰필드 유나이티드 시절의 선배가 붙여 준 것이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쉰아홉 경기를 뛴 1990년대의 수비수 데스 워커에게서 왔다.[7]

킬리안 음바페는 물론 비니시우스 주니오르 등을 완봉해버리며, 빈 공간을 통제했던 카일 워커는 프리미어 리그가 속도를 재기 시작한 뒤 처음으로 시속 37km를 넘긴 선수이기도 하였다. 2023년 5월 에버턴 원정에서 찍힌 시속 37.31km이고, 그때 그는 서른둘이었다. 이 기록은 이듬해 1월 미키 판더펜이 넘었다.

음바페와 마주 선 가장 유명한 날은 2022년 12월 10일 월드컵 8강이다. 경기를 앞두고 그는 음바페를 위해 레드카펫을 깔아 줄 생각은 없다고 했다. 비니시우스를 지운 날은 2023년 5월 17일 UEFA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2차전이다. 시티는 레알 마드리드를 4-0으로 눌렀다.

그는 처음에 라이트백으로 활약했으나 주제프 과르디올라는 카일의 유능함을 알아보고 센터백으로 기용도 하였고, 3백의 우측 센터백이라는 새로운 롤의 표본이 되기도 하였었다.

하프 스페이스 방어의 정석, 전진 배치된 풀백 시스템을 지지하는 이동형 스토퍼, 압박 후 뒷공간 커버 1:1 완전 정복. 3가지 키워드는 주제프 과르디올라 감독 수비 전술의 핵심이다.

골문에 선 적도 있다. 2019년 11월 6일 산 시로의 아탈란타 원정, 주전 골키퍼는 하프타임에 다쳐서 나갔고 후보 골키퍼는 81분에 퇴장당했다. 벤치에서 누가 장갑을 낄지 가리다 워커가 뽑혔다. 들어가자마자 프리킥을 막았고, 남은 시간을 실점 없이 버텨 1-1을 지켰다. 시티가 공격하자 하프라인까지 따라 올라갔다가 자기가 골키퍼라는 것을 떠올리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본인이 직접 했다. 시티에서 필드 선수가 골문에 선 것은 1991년 이후 처음이었다.

현대 전술이 가장 두려워하는 공간을 통제한 수비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21세기 라이트백 부문에서 릴리앙 튀람, 마이콩, 다니 아우베스 정도 되는 선수가 2010년대 이후 등장하지 않았던 것처럼 공수 완벽이라는 키워드 속에서 대부분 옅은 존재감을 띄고 있다.

그러나 카일 워커는 레알 마드리드의 다니 카르바할과 함께 가장 으뜸이 되는 수비수로 평가해 볼 수 있겠다.

2023-24시즌에는 동료들의 투표로 주장이 됐고, 잉글랜드 최초의 리그 4연패를 완장을 차고 마쳤다. 여덟 해 동안 319경기 6골, 프리미어 리그 여섯 번과 UEFA 챔피언스 리그 한 번을 들었다. 2025년 1월 AC 밀란으로 임대를 떠났다가 그해 7월 번리로 옮겼다. 2026년 3월에는 아흔여섯 경기를 끝으로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물러났다. 서른여섯이 된 지금은 2부 리그의 번리에서 센터백으로 뛴다. 풀백이 아니라 가운데 수비수, 이 명단이 그를 세운 자리와 같은 줄이다.

그라운드의 에지(edge)를 감각으로 가르는 수비 예술가랄까.

5. 로드리 - 수비형 미드필더

로드리 수비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21세기 볼란치의 신(神).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비형 미드필더 순위에서 필자가 3위에 헌정한 로드리(Rodrigo Hernández Cascante; 스페인 미드필더, 1996-).

그는 이제 우루과이의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 오스트리아의 에른스트 오크비르크, 헝가리의 보지크 요제프, 네덜란드의 프랑크 레이카르트라는 4大 권능의 영역에 감히 도전하는 21세기 볼란치의 신이 되었다.

맨체스터 시티를 관장하는 지성의 사제

축구는 11명의 선수로 진행되지만, 때로는 단 한 명이 경기의 리듬을 장악하고, 그 리듬이 지배력이 된다.

로드리는 이제 더브라위너와 다른 길을 걷는다. 다른 포지션에서 각자의 위대함을 증명하러 말이다.

현대 축구에서 수비형 미드필더가 활동하는 정의는 로드리의 전/후로 나뉜다. 로드리는 라인을 깨지 않으며, 공격의 시작점을 설계하고, 압박을 견디며, 팀 전체의 움직임을 조율하는 유형이다.

그가 없이 시티는 명작이지만 화면이 켜지지 않는 전술적 기기와도 같다. 이 말은 숫자로 남아 있다. 2024년 5월까지 그가 뛴 프리미어 리그 쉰 경기에서 시티는 내리 지지 않았다. 구단 기록이다. 2023-24시즌 시티가 리그에서 진 세 경기는 전부 그가 징계로 빠진 날이었다.[8]

그의 경기 운영은 1박 2박의 완급 조절, 패스 선행 > 2선 침투 > 리턴 전개, 압박 완화 구역 재설계라는 세 가지 차원을 동시에 진행한다. 기이한 선수이다.

출전과 득점
298경기 28골2019-2026
결승골
68분2023년 6월 10일 이스탄불
리그 무패
50경기구단 기록
발롱도르
2024년시티 선수로는 처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팬으로 자라 그 유스에 들어갔다가 밀려났고, 비야레알에서 다시 컸다. 2019년 7월 시티는 6,280만 파운드, 당시 구단 최고 이적료를 치르고 그를 데려왔다. 그는 우승 횟수보다 늘 공격적으로 이기는 방식에 끌렸다고 했다.

조율하는 사람인데 결정적인 골은 늘 그의 것이었다. 첫 시즌인 2020년 리그컵 결승에서 머리로 결승골을 넣었다. 2022년 5월 리그 마지막 날에는 애스턴 빌라에 0-2로 뒤진 76분부터 5분 사이에 세 골이 터졌는데, 그 가운데 2-2를 만든 골이 그의 것이다. 2024년 5월 4연패를 확정한 웨스트햄전의 세 번째 골도 그가 넣었다.

2022-23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이탈리아의 인테르를 꺾은 사례는 그의 축구 인생 가장 큰 하이라이트로 남을 것이다. 2023년 6월 10일 이스탄불, 더브라위너는 햄스트링을 다쳐 전반에 나갔다. 68분, 페널티 지역 바깥으로 흘러나온 공을 로드리가 오른발로 감아 찼다. 1-0. 구단의 첫 유러피언컵이고 잉글랜드에서 두 번째 트레블이었다. 그는 그 경기의 최우수 선수이자 그 대회의 최우수 선수였다.

2024년 9월 무릎을 크게 다쳐 한 해 가까이 쉬었고, 그 사이인 10월에 시티 선수로는 처음으로 발롱도르를 받았다. 돌아와서는 2026년 리그컵과 FA컵을 들었다. 그해 여름 스페인 대표팀의 주장으로 월드컵을 우승하고 대회 최우수 선수상인 골든볼까지 받은 뒤, 8월 18일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떠나며 남긴 말은 내 심장은 언제나 하늘색일 것이라는 한마디였다.

6. 콜린 벨 - 중앙 미드필더

콜린 벨 중앙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489경기 152골은 구단 공식 기록으로 498경기 153골이다.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의 1967-70시즌은 1969-70시즌이고, MBE는 2005년 신년 서훈이다.

맨체스터 시티가 존재하는 이유.

그는 단지 경기를 잘한 선수가 아니다. 그는 시티라는 클럽에 정체성과 품격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새긴 사람이다.

1966년. 맨시티가 여전히 맨체스터의 2등 클럽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던 시절, 버리에서 젊은 미드필더가 도착했다.

그의 이름은 콜린 벨, 그리고 그의 도착 이후, 맨체스터 시티는 클럽에서 기억으로 진화했다.

시대를 초월한 미드필더의 완성체

90분 내내 끊임없이 움직였다. 니진스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는 종횡무진 피치를 누볐고, 그 움직임 속에는 전술의 의도와 공격의 설계, 수비의 복구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드리블은 가볍고, 터치는 정확했다. 그는 날아다녔고, 상대 수비수는 질질 끌려다녔다. 개처럼.

패스의 시야는 당시 기준 감히 톱클래스였고, 경기장 한복판에서 공격을 디자인하면서도 수비 진영까지 내려와 태클을 마무리하는 유일한 미드필더였다.

그는 박지성의 활동량 + 램퍼드의 골 감각 + 모드리치의 시야를 한 몸에 담았던 미드필더의 이론서였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더럼의 탄광 마을 헤슬던에서 자란 그는 뉴캐슬과 선덜랜드의 입단 테스트에서 떨어졌고, 아스널에서는 이 구단에서 뛸 실력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받아 준 곳이 버리였다. 시티에 온 첫 1부 시즌에 그는 한 경기도 빠지지 않고 뛰며 미드필더로 팀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었다.

단순한 레전드가 아닌, 신화의 구심점

맨시티 통산 498경기 153골. 1967-68시즌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1968-69시즌 FA컵 우승. 1969-70시즌 리그컵과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 2004년, 맨체스터 시티 홈구장에 콜린 벨 스탠드 명명.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는 48경기 9골을 남겼는데, 그 48경기는 수십 년 동안 시티 선수의 최다 기록이었다.

그의 이름이 스탠드에 올라간 것은 팬들의 표 때문이었다. 그는 팬이었다. 경기 후 직접 팬들과 이야기하며, 클럽에서 그의 이름을 치켜세우기보다 항상 동료를 먼저 언급했던 사람. 서머비와 리와 도일이 상대와 기자들을 향해 입을 여는 동안 벨은 딱할 만큼 수줍었다고 구단은 적는다. 서머비는 그가 자기가 얼마나 잘하는지 끝내 몰랐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철학이었다. 1970년대 무개성 클럽이라는 비아냥 속에서도 시티는 축구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철학을 그로부터 얻었다.

가장 아픈 가정은 1976-77시즌이다. 시티는 그해 리버풀에 승점 1점 뒤진 2위로 리그를 마쳤다. 벨은 그 시즌을 무릎 때문에 통째로 쉬었다. 돌아온 뒤에도 예전의 그는 아니었고, 1979년 5월 15일 애스턴 빌라전을 끝으로 하늘색 셔츠를 벗었다.

2021년 1월 5일 일흔넷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튿날이 하필 올드 트래퍼드의 리그컵 준결승이었다. 시티 선수들은 모두 등번호 8번이 적힌 옛 셔츠를 입고 경기장에 들어섰고, 2-0으로 이겼다. 과르디올라는 그 승리를 벨에게 바쳤다.[2]

콜린 벨의 이름이 스탠드에 붙어 있고 사람들이 그를 왕이라 부른다면, 그건 그가 특별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주제프 과르디올라가 콜린 벨을 두고

7. 다비드 실바 - 중앙 미드필더

다비드 실바 중앙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작은 마법사.

맨체스터는 노동의 도시다. 그러나 그 안에서 가장 조용한 마법이 일어난 시간, 그 한복판에는 늘 다비드 실바(David Josué Jiménez Silva; 스페인 미드필더, 1986-)가 있었다.

그는 파워도, 스피드도 아니었다. 그저 경기장을 자신만의 언어로 설계하는 플레이메이커였다.

맨시티 통산 436경기 77골 121도움. 프리미어 리그 4회 우승. FA컵 2회, 리그컵 5회. 2010~20년, 하늘색 전성기의 건축가. 팬들이 붙인 별명은 엘 마고(El Mago; 마법사), 동료들이 붙인 별명은 멀린이다.[9]

2010년 7월, 월드컵을 막 우승한 스물넷의 그가 발렌시아에서 왔다. 첫 시즌이 끝났을 때 시티는 FA컵을 들고 있었다. 구단이 35년 만에 든 트로피였다. 그해 10월 올드 트래퍼드의 6-1에서 그가 보여 준 경기를 구단은 모자이크로 만들어 훈련장에 남겼다.

그가 경기장에 있을 땐 볼의 속도조차 달라졌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냥 다비드 실바만의 박자.

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패스의 선행성과 유연성을 통해 공간을 만들어내었던 다비드 실바.

그를 따라가는 수비수들의 발이 굼떠 보이는 것은 그의 플레이를 따라가는 흐름도 리듬을 조절당하기 때문이었다.

가장 조용한 선수의 가장 힘든 시즌은 구단이 승점 100점을 쌓은 2017-18시즌이다. 2017년 12월 아들 마테오가 예정보다 훨씬 일찍 태어났다. 그는 스페인의 병원과 맨체스터를 오가며 시즌을 치렀고, 과르디올라는 가족이 먼저라며 언제든 다녀오게 했다. 마테오는 다섯 달을 병원에서 보내고 집으로 왔다. 2018년 8월 허더즈필드전, 실바는 아들을 품에 안고 에티하드에 입장했다. 그의 프리미어 리그 250번째 경기였고 그날 프리킥으로 골을 넣었다.

콤파니가 떠난 2019-20시즌에는 주장 완장을 찼다. 작별은 쓸쓸했다. 2020년 7월 26일 마지막 리그 경기 노리치전은 감염병 때문에 빈 관중석 앞에서 치러졌다. 경기가 끝나고 회장이 직접 그에게 동상을 세우겠다고 알렸다. 동상은 2021년 8월 28일 콤파니의 것과 같은 날 섰다.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세 해를 더 뛰고 2023년 7월 무릎 부상으로 은퇴했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2026년 10월 7일, 마흔이 된 그가 홍콩 프리미어 리그의 승격 팀과 단기 계약을 맺고 은퇴를 번복했다.

8. 케빈 더브라위너 - 공격형 미드필더

케빈 더브라위너 공격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21세기 맨시티 왕조의 진짜 대장. 한국의 팬들은 그를 김덕배라고 부른다.

왕좌를 차지하려 하는 자. 궤적을 창조했고, 순간을 예언했고, 경기라는 시공간을 편집해 버렸기에 팬들은 그의 경기를 LIVE로 시청함에도 YouTube를 통해 재방송을 시청해야 했다.

그는 21세기 미드필더 중 가장 많은 시야를 가졌다. 그 시야란, 전방을 보는 능력이 아니라 경기 전체의 시간과 구조를 통제하는 지적 장악력이었다. 즉, 똑똑한 인간이었다. 그 말은 사유하는 자고, 철학을 품은 존재라는 것이다.

맨시티 통산 422경기 108골 170도움. 프리미어 리그 도움왕 4회. 2020년부터 네 해 내리 UEFA 올해의 선수 최종 후보 3인. 트레블의 주역. 그리고 프리미어 리그 역사상 최고의 크로서 중 한 명.[3]

무릎을 꿇은 더브라위너의 그림과 KING KEV라는 글자가 그려진 에티하드 스타디움의 대형 통천
에티하드 스타디움 관중석을 덮은 통천. 사진: 맨체스터 시티 FC.

그의 패스는 직선이 아니었다. 수비수를 지나치지 않고 제쳐내는 각도로 하프 스페이스 무너뜨리기를 시도했고, 속도 있는 침투를 유도해 공이 아니라 공간을 통제했다. 낮게 깔려 수비 뒤로 휘어 들어가는 그의 공 앞에서 공격수는 뛰던 길을 고칠 필요가 없었다. 달려가면 공이 거기 와 있었다. 아궤로와 홀란이 차례로 그 공을 받아먹었다.

2019-20시즌 그는 리그에서 도움 스무 개를 올려 티에리 앙리가 갖고 있던 한 시즌 최다 기록과 나란히 섰다. 스물한 번째가 될 뻔한 패스가 있었다. 아스널전에서 상대 수비수의 발끝에 공이 살짝 스치는 바람에 도움이 지워졌고, 그는 그 일로 한참 화를 냈다. 그해와 이듬해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를 연달아 받았다. 시티 선수로는 처음이었다. 프리미어 리그 통산 도움은 라이언 긱스 다음인데, 그는 긱스의 절반도 안 되는 경기로 거기까지 갔다.

유럽의 결승은 두 번 다 그에게 가혹했다. 2021년 포르투에서는 상대 수비수와 부딪혀 눈 주위 뼈가 부러진 채 경기장을 떠났고 시티는 졌다. 2023년 이스탄불에서는 전반에 햄스트링을 다쳐 나갔다. 이번에는 그가 나간 뒤 로드리가 골을 넣었다. 종료 휘슬이 울리고 과르디올라가 그를 끌어안으며 한 말은 우리가 해냈다, 두 마디였다.

그가 공을 잡은 순간, 관중은 눈을 돌리지 못했고, 수비수는 몸을 움츠렸으며, 동료는 이미 침투를 시작했다.

2025년 6월 나폴리로 갔다. 그해 10월 인테르전에서 페널티킥을 차다 허벅지 근육이 크게 찢어져 수술대에 올랐고, 이듬해 3월에야 돌아왔다. 동상은 아직 서지 않았다. 그 동상이 서는 날 에티하드 밖에 동상으로 선 선수는 일곱이 되고, 그 일곱은 전부 이 열한 명 안에 있다.

9. 마이크 서머비 - 세컨드 스트라이커

마이크 서머비 세컨드 스트라이커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378경기는 구단 공식 기록으로 449경기다. FA 채리티 실드 우승은 1968년과 1972년 두 번이고, 세 번은 프랜시스 리의 기록이다.

시티를 예술로 만들어 인기를 끌어올린 공격수.

그가 경기장에 나설 때마다 공은 무게를 잃고 떠다녔고, 관중석은 복수보다 먼저 숨을 죽였다.

마이크 서머비(Michael George Summerbee; 잉글랜드 공격수, 1942-).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맨체스터 시티의 공격을 책임졌던 진정한 사이드의 천재.

그는 속도보단 기술로, 화려함보단 타이밍으로, 수비의 틈을 흘러서 빠져나가는 유형의 윙어였고, 맨시티가 전술적으로 진보된 클럽이라는 인식을 얻게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삼촌도 프로 선수였던 집안이다. 머서는 전쟁 때 그의 아버지와 한 팀에서 뛴 사이였고, 1965년 감독이 되자마자 스윈던 타운의 스물두 살 윙어를 3만 5천 파운드에 데려왔다. 서머비는 첫 시즌에 리그와 컵 쉰두 경기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뛰었고 시티는 1부로 올라갔다.[10]

1960~70년대 머서와 앨리슨이 만든 황금기의 핵심 3인방 중 한 명. 버저(Buzzer)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클럽 문화의 아이콘이 된 자.

원래 자리는 오른쪽 날개다. 1967-68시즌 머서와 앨리슨은 그를 한가운데로 옮겨 최전방에 세웠고, 그는 그 시즌 쉰 경기에서 열아홉 골을 넣었다. 우승을 확정한 뉴캐슬전의 첫 골이 그의 것이다. 이 명단이 그를 측면이 아니라 두 공격수 바로 뒤에 둔 까닭이 그 시즌에 있다.

그는 볼을 흔들기보단 시야를 흔들었고, 양발 크로스 능력이 매우 탁월해 깊은 볼을 배달해낼 수 있었다. 또한, 공격 작업이 전환될 때 가장 빠른 압박을 시도해 수비수로서도 가치를 증명하기도 했었다. 1969년 FA컵 결승의 유일한 골도 그의 발에서 출발했다. 오른쪽을 뚫고 들어가 내준 공을 닐 영이 차 넣었다.

붉은색과 검은색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FA컵을 들어 올린 채 웸블리 트랙을 도는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
1969년 4월 26일 웸블리. 붉고 검은 줄무늬 원정 유니폼을 입고 FA컵을 들고 도는 시티 선수들. 사진: 맨체스터 시티 FC.

얌전한 윙어는 아니었다. 수비수가 걷어차기 전에 먼저 걷어차는 선수였고, 리는 그걸 먼저 보복하기라고 불렀다. 본인의 설명은 이렇다. 어차피 상대는 경기 중에 한 번은 나를 찰 테니 내가 먼저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장난기도 구단 역사에 남았다. 올드 트래퍼드에서 코너킥을 차러 가자 맨유 팬들이 그의 큰 코를 놀리는 노래를 불렀고, 그는 코너 깃발에 코를 푸는 시늉으로 답했다. 맨유의 조지 베스트와는 단짝이었다. 둘이 함께 맨체스터에 옷가게를 냈고, 1968년 서머비의 결혼식에서 신랑 들러리를 선 사람이 베스트다. 서머비는 신부가 들러리를 쳐다보고 있는 결혼사진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자기뿐일 것이라고 했다.

1970년 리그컵 결승에서 다리뼈에 금이 가는 바람에 일곱 주 뒤 빈에서 열린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에는 나서지 못했다. 1975년 6월 번리로 떠났다. 은퇴 뒤에는 맞춤 셔츠 사업을 했고, 1981년 영화 『승리의 탈출』에 실베스터 스탤론, 마이클 케인과 함께 출연했다. 지금은 구단의 앰배서더다. 2022년 OBE를 받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 그는 당시 시티의 영광을 만든 트리오, 콜린 벨과 프랜시스 리와 마이크 서머비의 한 축이었다. 2023년 11월 28일 에티하드 서쪽에 세 사람이 나란히 달리는 동상이 섰다. 벨은 두 해 전에, 리는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났고, 세 사람 가운데 제막식에 선 사람은 서머비 혼자였다.[13]

10. 세르히오 아궤로 - 센터 포워드

세르히오 아궤로 센터 포워드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연도 1912는 2012의 오기다.

아궤로오오오오오오!

딱 한 장면. 영국이라는 온 나라가 요동쳤던 2012년의 어느 날.

맨시티의 역사를 비하인드 클럽에서 영국 축구의 주인공으로 바꿔놓은 영적 선언.

93:20, 세기의 골, 시티의 탄생

맨시티가 퍼거슨의 맨유와 같은 승점을 기록했지만 골 득실에서 앞서 있었던 2011-12시즌.

그러나 마지막 경기에서 90분까지 1-2로 지고 있었던 시티.

93분 20초, 마리오 발로텔리의 패스 투혼. 그리고 아궤로의 오른발 슈팅.

  1. 39분

    파블로 사발레타의 선제골. 1-0.

  2. 48분

    지브릴 시세의 동점골. 1-1.

  3. 55분

    조이 바튼 퇴장. 상대는 열 명이 됐다.

  4. 66분

    제이미 매키의 헤더. 1-2.

  5. 90+2분

    코너킥에서 에딘 제코의 헤더. 2-2.

  6. 93:20

    발로텔리가 넘어지며 밀어 준 공, 아궤로의 오른발. 3-2.

강등권에서 버티던 퀸스 파크 레인저스는 열 명으로 한 골을 지키고 있었다. 같은 시각 맨유는 선덜랜드 원정을 1-0으로 끝내고 우승 세리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가시간은 5분이었다. 시티가 그날 쏜 슈팅은 마흔네 개, 코너킥은 19 대 0이었다. 동점골이 그 열아홉 번째 코너킥에서 나왔다.[11]

마지막 공격에서 아궤로는 발로텔리에게 공을 주고 안으로 뛰었다. 발로텔리는 원래 직접 쏘려 했다고 한다. 수비에 밀려 넘어지면서 발끝으로 공을 밀어 줬다. 그가 프리미어 리그에서 남긴 도움은 그것 하나다. 아궤로는 한 번 접어 수비를 벗기고 오른발로 가까운 쪽 골문을 뚫었다. 중계를 맡은 마틴 타일러는 아궤로가 공을 건드리는 순간 골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가 길게 끌어 외친 이름이 이 절의 첫 줄이다. 아궤로 본인은 골 직후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프리미어 리그가 골 득실로 우승을 가른 것은 그해가 유일하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왔지만, 그 누구보다도 맨체스터의 심장박동을 바꿔놓은 선수였다.

세르히오 아궤로(Sergio Leonel Agüero del Castillo; 아르헨티나 공격수, 1988-). 그의 이름은 기록에서 빛나지만, 그의 진짜 위치는 기억의 한가운데에 있다.

클럽 역사상 최다 득점자. 2011~21년, 맨시티 황금기의 점화 장치. 390경기 260골이다. 에릭 브룩이 일흔여덟 해 동안 갖고 있던 177골의 기록을 넘었다.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275경기 184골을 넣었고, 해트트릭 열두 번은 지금도 리그 최다 기록이다.

2011년 7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구단 최고 이적료로 왔다. 등에 적힌 쿤(Kun)은 어릴 적 보던 일본 만화의 주인공에게서 온 별명이다. 프리미어 리그는 별명을 등에 새기려면 다른 리그에서 쓴 전례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아틀레티코에서 이미 달고 뛴 덕에 허락을 받았다. 데뷔전에서 교체로 들어가 두 골을 넣었고 첫 시즌에 서른 골을 채웠다.

인사이드, 아웃프런트, 칩, 강슛, 골문 앞에서의 사전 계산기, 수비의 무게중심 이동을 한 템포 먼저 읽는 천부적 본능. 이 모든 키워드가 오직 세르히오 아궤로를 향하고 있다.

유니폼 상의를 벗어 휘두르며 달리는 모습으로 만든 세르히오 아궤로 동상. 뒤로 맨체스터 시티 문장과 AGUEROOO라는 글자가 보인다
에티하드 스타디움 밖의 아궤로 동상. 93:20의 세리머니를 그대로 옮겼다. 사진: Christian David, CC BY-SA 4.0.

2021년 5월 마지막 리그 경기에서 교체로 들어가 두 골을 넣고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그해 10월 경기 도중 가슴에 이상을 느껴 병원으로 실려 갔고, 12월 15일 서른셋에 은퇴를 발표했다. 2022년 5월 13일, 그 골의 10주년에 동상이 섰다.

11. 프랜시스 리 - 센터 포워드

프랜시스 리 센터 포워드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308경기 138골은 구단 공식 기록으로 330경기 148골이다. FA 채리티 실드 우승은 더비 카운티에서 든 1975년까지 세 번이다.

왕조를 결정짓는 마지막 조각.

그는 우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이었고, 지지 않는 남자였다.

프랜시스 리(Francis Henry Lee; 잉글랜드 공격수, 1944-2023). 맨시티가 처음으로 우리는 우승할 수 있는 팀이다라고 온몸으로 외쳤던 시기, 그 목소리의 중심에는 그가 있었다.

시티와의 인연은 열여섯 살에 시작됐다. 1960년 11월 볼턴 원더러스의 아마추어로 치른 데뷔전 상대가 시티였고, 그는 머리로 골을 넣었다. 그 골을 먹은 골키퍼가 트라우트만이다. 일곱 해 뒤인 1967년 10월, 머서는 구단 최고 이적료 6만 파운드를 치르고 그를 데려오며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라고 했다. 리는 첫 훈련에서 동료들에게 이기고 싶으면 나한테 공을 달라고, 그러면 내가 넣겠다고 말했다. 시티는 그가 뛴 첫 리그 열한 경기에서 지지 않았고 일곱 달 뒤 우승했다. 뉴캐슬에서 4-3을 만든 네 번째 골이 그의 것이다.[12]

맨시티 통산 330경기 148골. 리그 우승부터 유럽 대항전까지 수많은 트로피. 은퇴 후에도 구단 회장을 역임하며 클럽의 철학 계승.

절제 없는 본능, 거침없는 추진력은 프랜시스 리를 상징하는 플레이 스타일이다.

그는 직선 드리블로서 기술 없이도 뚫었다, 아니 눌러부쉈다. 접촉 유도, 파울 유도, 냉정한 마무리를 통한 페널티 박스 장악력 역시 발군이었고, 당대 수비수들은 그 어떤 선수보다 프랜시스 리를 만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고 회고한다.

디자인에 적힌 별명 리 원 펜은 여기서 나왔다. 1971-72시즌 그는 모든 대회에서 서른다섯 골을 넣고 1부 리그 득점왕이 됐는데 그 가운데 열다섯 골이 페널티킥이었다. 한 시즌 최다 기록이다. 신문의 득점자 칸에 번번이 Lee 1 (pen)이 찍혔고, 사람들은 그 one을 얻어 냈다는 뜻의 won으로 바꿔 불렀다. 일부러 넘어진다는 비아냥이 섞인 이름이었다. 본인은 그 꼬리표가 평생 억울했다고 했다. 내가 얻어 낸 페널티킥이 아니라 팀을 위해 찼을 뿐인 것이 많다는 것이다. 차는 요령은 단순했다. 공을 놓고, 골키퍼가 뭘 하든 있는 힘껏 때려 넣는다.

1970년 4월 29일 빈의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에서도 그는 43분에 페널티킥을 넣었다. 시티는 구르니크 자브제를 2-1로 눌렀고, 그 골이 구단의 첫 유럽 트로피를 정했다. 다음 유럽 트로피까지는 쉰세 해가 걸렸다.[13]

시티 팬들에게 그는 단순한 득점왕이 아니다. 그는 싸우는 방식으로 팀의 성격을 만들었다. 그가 있기에 콜린 벨은 침착할 수 있었고, 서머비는 더 자유롭게 날 수 있었다.

줄무늬 원정 유니폼을 입고 종이컵을 든 채 나란히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는 콜린 벨, 프랜시스 리, 마이크 서머비의 흑백 사진
1968년의 세 사람. 왼쪽부터 콜린 벨, 프랜시스 리, 마이크 서머비. 사진: 맨체스터 시티 FC.

떠나는 방식도 그다웠다. 1974년 8월 구단은 그의 뜻과 상관없이 그를 더비 카운티에 팔았다. 그해 12월 28일 메인 로드에 돌아온 그는 먼 거리에서 결승골을 꽂아 넣고 활짝 웃었다. 저 얼굴 좀 보라던 중계 캐스터의 외침은 잉글랜드 축구 중계의 명대사로 남았다. 더비는 그 시즌 리그를 우승했다. 이듬해 리즈 유나이티드의 노먼 헌터와 경기 중에 주먹다짐을 벌여 둘 다 퇴장당했고, 걸어 나가다가 한 번 더 붙었다.

선수로 뛰면서 차린 휴지 회사로 큰돈을 벌었고, 은퇴 뒤에는 경주마 조교사로 181번을 이겼다. 1994년에는 팬들의 운동을 등에 업고 구단 회장이 됐다. 회장으로서는 실패했다. 1998년 시티가 3부 리그로 떨어지기 직전에 물러났다.

그는 점수를 내는 것이 아니라, 클럽이 점수를 낼 수 있는 팀이라는 인식을 만들어냈다. 2023년 10월 2일 일흔아홉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기 동상의 모형까지는 보고 갔다.

벨, 리, 서머비.세 사람이 함께 뛴 일곱 해에 시티는 트로피 넷을 들었다.

마침내, 한 경기장에 선 열한 명

맨체스터 시티 FC 역대 베스트 11 표제 3-4-1-2 대형으로 배치한 맨체스터 시티 FC 역대 베스트 11 맨체스터 시티 FC 역대 베스트 11 후보 15인 편집물
표제, 열한 명의 대형, 후보 15인. 1928년에 입단한 에릭 브룩부터 지금도 뛰는 후벵 디아스까지 스물여섯 명이 한 흐름에 들어간다.

이 명단은 맨체스터 시티 FC의 성공 시대에 침투한 26인의 명단이다.

트라우트만이 몸을 던져 막은 공을 콤파니가 주워 로드리에게 건넨다. 도일이 왼쪽에서 거칠게 문을 잠그는 동안 오른쪽의 워커는 누구보다 빨리 뒷공간으로 돌아온다. 로드리가 박자를 정하면 벨이 그 박자의 두 배로 뛰고, 실바가 반 박자 늦춰 틈을 연다. 더브라위너의 공은 수비 뒤로 휘어 들어간다. 서머비가 수비수를 먼저 걷어차고, 리가 페널티킥을 얻고, 아궤로가 끝낸다.

구단이 든 리그 우승 열 번 가운데 1968년 이후의 아홉 번에는 전부 이 열한 명 중 누군가가 뛰었다. 에티하드 밖에 동상으로 선 여섯 사람도 전부 이 안에 있다. 트라우트만이 계약서에 서명한 1949년부터 로드리가 떠난 2026년까지 일흔일곱 해다.

하늘색 혁명.맨체스터라는 도시가 품은 스물여섯 개의 이름.

이미지 밖에서 다시 읽는 후보 15인

열다섯 명 가운데는 구단에서 가장 많이 뛴 앨런 오크스와 그다음으로 많이 뛴 조 코리건이 있고, 아궤로가 넘기 전까지 최다 득점자였던 에릭 브룩이 있다. 그림 속 이름을 글자로 다시 적는다. 그림의 글렌 파르도는 글린 파도다.[14]

  • 프랭크 스위프트Frank Swift · 골키퍼

    375경기. 스무 살에 1934년 FA컵을 들었고, 종료 휘슬이 울리자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 조 코리건Joe Corrigan · 골키퍼

    1967-1983년 602경기. 골키퍼로는 구단 최다 출전이다.

  • 토미 부스Tommy Booth · 센터백

    487경기. 1969년 FA컵 준결승 마지막 순간의 골로 시티를 웸블리에 보냈다.

  • 존 스톤스John Stones · 센터백

    2016-2026년. 열 해를 뛰고 2026년 여름 인테르로 떠난 트레블의 수비수다.

  • 후벵 디아스Rúben Dias · 센터백

    2020년부터. 2026-27시즌 주장단 네 명 가운데 한 사람이고 지금도 뛴다.

  • 토니 북Tony Book · 라이트백

    312경기. 1967-68시즌 전 경기에 나선 우승 주장이고 동료들은 그를 스킵이라 불렀다.

  • 파블로 사발레타Pablo Zabaleta · 라이트백

    2008-2017년 333경기. 2012년 그날의 첫 골을 넣은 사람이다.

  • 글린 파도Glyn Pardoe · 레프트백

    1962-1976년. 15세 314일에 데뷔한 구단 최연소 출전자이고 1970년 리그컵 결승의 결승골을 넣었다.

  • 앨런 오크스Alan Oakes · 수비형 미드필더

    1959-1976년 676경기. 구단 최다 출전 기록의 주인이다.

  • 페르난지뉴Fernandinho · 수비형 미드필더

    2013-2022년. 다비드 실바의 뒤를 이어 주장 완장을 찼다.

  • 야야 투레Yaya Touré · 중앙 미드필더

    2010-2018년. 2011년 FA컵 준결승과 결승의 결승골로 35년의 기다림을 끝냈다.

  • 에릭 브룩Eric Brook · 레프트 윙

    1928년부터 493경기 177골. 일흔여덟 해 동안 구단 최다 득점자였다.

  • 베르나르두 실바Bernardo Silva · 레프트 윙

    2017-2026년. 2025-26시즌 주장으로 뛰고 레알 마드리드로 떠났다.

  • 닐 영Neil Young · 센터 포워드

    413경기. 1969년 FA컵 결승의 유일한 골과 1970년 빈의 첫 골을 넣었다.

  • 카를로스 테베스Carlos Tevez · 센터 포워드

    2009-2013년. 맨유의 5년 계약을 거절하고 건너와 2011년 FA컵을 주장으로 들었다.

기록을 확인한 곳

  1. 구단 연혁과 우승 횟수, 2025년 이후의 일 — Manchester City 「Club history」, 「Team honours」, 「Guardiola to step down after incredible decade as City Manager」, 「Enzo Maresca」, Premier League 「Premier League Statement: Manchester City FC」, Manchester City 「Manchester City lodge appeal」. 1880년 세인트 마크스, 1887년 아드윅, 1894년 맨체스터 시티, 리그 10회·FA컵 8회·리그컵 9회, 과르디올라의 트로피 20개와 2026년 5월 퇴임, 2026년 9월 29일 독립 위원회 결정과 10월 1일 항소.
  2. 콜린 벨 — Manchester City 「Colin Bell」, 「Colin Bell passes away」, 「Colin the King」, The Guardian 2021년 1월 6일, England Football Online 「Colin Bell」. 버리와 4만 5천 파운드, 앨리슨의 연극, 498경기 153골, 두 별명, 1975년 부상과 1977년 12월 26일 복귀, 스탠드 투표, 잉글랜드 48경기 9골, 입단 테스트, 별세와 8번 셔츠. 이적료는 자료에 따라 4만 7,500파운드로도 적는다.
  3. 케빈 더브라위너 — Manchester City 「Kevin De Bruyne」, 「De Bruyne to join Napoli」, 「City commission special statue for De Bruyne」, 「De Bruyne is Manchester City's greatest-ever player」, BBC Sport 2025년 10월. 구단이 벨에 견준 문장, 영입 당시의 회의론, 첫 시즌 16골 13도움, 422경기 108골 170도움, 한 시즌 20도움, 두 번의 결승, 2024년 1월 복귀, 동상 발표, 나폴리 이적과 부상.
  4. 베르트 트라우트만 — Manchester City 「Bert Trautmann」, 「The Trautmann Story」, The Observer 2010년 4월 11일, The Guardian 2004년 11월 2일. 공군 공수부대, 수용소와 골키퍼 전향, 1949년 10월 7일 계약과 항의, 알트만의 서한, 풀럼 원정, 100경기 연속 출전, 545경기, 아들의 사고, 고별 경기, OBE, 본인의 말과 야신의 평. 항의 인원 2만 명은 옵서버의 숫자이고 실제 규모는 자료마다 다르다.
  5. 마이크 도일 — Manchester City 「Mike Doyle」, 「Blue Grit」, The Independent 부고, The Guardian 부고, England Football Online 「Mike Doyle」. 출생지, 아홉 살의 편지와 스카우트, 563경기와 출전 순위, 주장 기간, 1967-68시즌, 두 번의 리그컵 결승, 살해 협박, 본인의 말, 별세와 가족.
  6. 뱅상 콤파니 — Manchester City 「Vincent Kompany」, 「Manchester City's greatest captain」, 레스터전 직후 인터뷰, 「Vincent Kompany leaves Man City」, 동상 제막 기사, BBC Sport 2012년 4월 30일, Bundesliga 2025-26. 인수 일주일 전의 계약, 포지션 전환, 주장 여덟 시즌, 360경기 20골, 두 골의 정황, 리그컵 결승 최우수 선수, 마지막 경기, 동상, 바이에른 뮌헨 감독.
  7. 카일 워커 — Manchester City 「Kyle Walker signs for Burnley」, 「Kyle Walker: goalkeeper」, Premier League 최고 속도 기록, BBC Sport 2017년 7월, BBC Sport 2019년 11월 6일, BBC Sport 2022년 12월 7일, England Football 2026년 3월 10일, Reuters 2024년 6월 24일, Burnley Express 2026년 8월. 이적료, 별명의 유래, 시속 37.31km, 골키퍼로 선 경기, 주장, 319경기 6골, 번리 이적, 대표팀 은퇴.
  8. 로드리 — Manchester City 「Rodri leaves Manchester City to join Barcelona」, 「50 Premier League games unbeaten」, 입단 기사, BBC Sport 2019년 7월, BBC Sport 2026년 월드컵 결승. 298경기 28골, 이적료, 결승마다의 골, 이스탄불의 68분, 50경기 무패, 발롱도르, 부상, 월드컵 우승과 골든볼, 바르셀로나 이적.
  9. 다비드 실바 — Manchester City 「David Silva」, 「David Silva announces retirement from football」, 2020년 동상 발표, The Guardian 2018년 1월 3일, Sky Sports 2018년 8월, South China Morning Post 2026년 10월. 436경기 77골 121도움, 두 별명, 2011년 FA컵, 모자이크, 아들 마테오, 주장, 마지막 리그 경기, 은퇴와 복귀.
  10. 마이크 서머비 — Manchester City 「Mike Summerbee」, 「Buzzer」, The Guardian 2008년 9월 5일, England Football Online 「Mike Summerbee」, OBE 기사. 가족, 3만 5천 파운드, 첫 시즌 52경기, 1967-68시즌의 자리와 득점, 449경기, 코너 깃발, 조지 베스트, 1970년의 부상, 영화, 앰배서더.
  11. 세르히오 아궤로 — Manchester City 「Sergio Agüero」, 동상 제막 기사, 발로텔리 인터뷰, 마틴 타일러 인터뷰, BBC Sport 2012년 5월 13일, BBC Sport 2021년 12월 15일, Planet Football. 경기의 전개와 슈팅·코너킥 수, 발로텔리의 유일한 도움, 390경기 260골, 프리미어 리그 184골과 해트트릭 12회, 별명과 등 이름, 은퇴, 동상.
  12. 프랜시스 리 — Manchester City 「Franny Lee」, 「City DNA #115」, 동료들의 추모, The Guardian 부고, BBC Sport 부고, England Football Online 「Francis Lee」. 볼턴 데뷔전의 골, 6만 파운드와 머서의 말, 330경기 148골, 1971-72시즌 35골과 페널티킥 15골, 더비 이적과 메인 로드의 골, 헌터와의 싸움, 사업과 경마, 회장, 별세.
  13. 1968-1970년의 경기와 세 사람의 동상 — The Guardian 1968년 5월 뉴캐슬전 보도, Manchester City 「Bell, Lee and Summerbee: their City story」, PA 통신 2023년 11월 28일, Gary James Football Archive. 1968년 5월 11일의 선발과 득점, 세 결승의 날짜와 득점자, 2023년 11월 28일 동상 제막과 리가 생전에 본 모형.
  14. 후보 15인 — Manchester City 「Legends」, Manchester City 2026년 9월 4일. 스위프트, 코리건, 부스, 북, 사발레타, 오크스, 투레, 브룩, 영, 테베스의 출전 수와 장면은 구단 소개, 2026-27시즌 주장단은 구단 기사.
  15. 디자인의 숫자는 2025년 5월에 적은 것이라 지금과 다른 곳이 있다. 더브라위너 418경기 177도움은 최종 422경기와 구단 집계 170도움, 로드리 260경기 26골은 최종 298경기 28골이다. 워커와 로드리 디자인의 2017년~현재, 2019년~현재는 각각 2025년과 2026년에 끝났다. 다비드 실바 디자인의 136도움은 구단 집계로 121도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