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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mier League
첼시 FC
Chelsea Football Club스탬퍼드 브리지 · 리그 우승 6회 · FA컵 8회 · UEFA 챔피언스 리그 2회
1950년대의 영광부터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 시대까지 찬란한 역사가 가득한 첼시. 그 이름에 공로한 역대 최고의 열한 명과 후보 열다섯, 스물여섯 개의 이름을 골랐다.
런던 블루의 혁명, 푸른 시대의 개막
첼시 FC. 스탬퍼드 브리지(Stamford Bridge; 첼시 FC의 홈구장)를 푸른 성으로 바꿔놓은 수도 런던의 또 다른 심장이자, 21세기 축구사의 격변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설립 초기에는 상징보다 열망에 가까웠던 구단. 1905년 3월 10일 구장 맞은편의 펍 라이징 선에서 거스 미어스(Gus Mears; 첼시 FC의 창립자)가 만든 팀은 첫 리그 우승까지 쉰 해를 기다려야 했다. 1954-55시즌, 테드 드레이크 감독의 우승이다. 아스널 편 후보 명단에 한 경기 일곱 골로 적어 둔 바로 그 테드 드레이크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뤼트 휠릿과 잔루카 비알리가 이끌던 첼시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고, 2003년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인수가 결실을 맺으며 첼시는 유럽 최정상의 DNA를 장착하게 된다. 모리뉴의 혁명, 안첼로티의 품격, 투헬의 전술, 램퍼드의 추억까지.
이 콘텐츠에서는 그 푸른 물결 속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26인의 레전드를 기록했다. 명단은 2025년에 골랐다. 그해 5월 첼시는 UEFA 컨퍼런스 리그를 들어 UEFA의 네 가지 주요 클럽 대항전을 모두 우승한 첫 구단이 됐고, 7월에는 판을 키워 처음 열린 FIFA 클럽 월드컵까지 가져갔다. 그 트로피들이 놓인 선반을 처음 짠 사람들이 이 글의 주인공이다.
오스굿, 램퍼드, 테리: 스탬퍼드 브리지가 섬기는 세 이름
첼시의 역사는 흔히 2003년 여름에서 둘로 갈린다. 아브라모비치가 구단을 산 해다. 스탬퍼드 브리지가 섬기는 이름은 그 선을 가리지 않는다. 구장 앞에 동상으로 선 사람, 구단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사람, 관중석 현수막에 세 단어로 적힌 사람. 열한 명을 부르기 전에 이 셋부터 세운다.



첫 번째는 피터 오스굿(Peter Leslie Osgood; 잉글랜드 공격수, 1947-2006)이다. 구단이 스탬퍼드 브리지에 동상으로 세운 선수는 그가 처음이다. 2006년 3월 1일 쉰아홉 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그해 10월 추모식에서 유골이 셰드 엔드(Shed End; 스탬퍼드 브리지의 골대 뒤 스탠드) 쪽 페널티 스폿 아래에 묻혔다. 4년 뒤인 2010년 10월 1일에는 서쪽 스탠드 앞에 받침을 빼고도 9피트, 2.7m쯤 되는 청동상이 섰다. 웸블리의 보비 무어와 올드 트래퍼드의 맷 버스비를 만든 조각가 필립 잭슨의 작품이다. 동상 밑에는 1970년 FA컵 결승 재경기의 프로그램과 그해 유니폼을 넣은 타임캡슐이 묻혀 있다.[1] 왕이 누운 자리와 왕이 선 자리가 한 구장 안에 있다.
두 번째는 프랭크 램퍼드(Frank James Lampard; 잉글랜드 미드필더·축구 감독, 1978-)다. 648경기 211골. 구단 역대 최다 득점자가 공격수가 아닌 미드필더다. 2013년 5월 11일 빌라 파크에서 두 골을 넣어 바비 탬블링의 202골을 넘어섰다. 프리미어 리그에서 넣은 177골은 미드필더 최다 기록이고, 164경기 연속 출전은 필드 플레이어 최다 기록이다.[2]
세 번째는 존 테리(John George Terry; 잉글랜드 수비수, 1980-)다. 열네 살에 들어온 구단에서 717경기를 뛰었고, 주장 완장을 차고 나선 경기만 500이 넘는다. 첼시가 든 리그 트로피 여섯 개 가운데 다섯 개를 그가 주장으로 들었다. 위 사진에서 그의 머리 위로 보이는 현수막이 팬들이 그에게 붙인 세 단어다. 주장, 리더, 전설(Captain, Leader, Legend).[3]
이 셋을 기둥으로 놓으면 나머지 여덟의 자리가 저절로 정해진다. 오스굿 옆에는 1970년 FA컵과 1971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을 함께 든 주장 론 해리스가 서고, 그 뒤 1990년대 르네상스의 얼굴로 촐라가 온다. 테리와 램퍼드는 아브라모비치보다 먼저 와 있다가 그 시대의 척추가 됐고, 체흐와 드로그바, 애슐리 콜, 아자르, 아스필리쿠에타, 캉테가 그 척추에 붙었다.
선정 전술: 세 시대를 한 줄에 세운 4-4-2
대형은 4-4-2다. 골문에는 체흐가 서고, 그 앞 네 명은 오른쪽부터 아스필리쿠에타, 해리스, 테리, 애슐리 콜이다. 해리스만 1970년에서 오고 나머지 넷은 서로의 시대가 맞물린다. 체흐와 테리, 콜은 2012년 UEFA 챔피언스 리그를 함께 든 수비이고, 아스필리쿠에타는 그해 여름에 와서 2021년의 두 번째 빅 이어를 주장으로 들었다. 골문부터 한 자리씩 부르고, 열한 명이 함께 선 대형은 글 끝에서 펼친다.
중원 한가운데는 캉테가 지우고 램퍼드가 넣는다. 왼쪽은 아자르가 안으로 접고 들어오고, 오른쪽에는 윙어 대신 세컨드 스트라이커 촐라가 선다. 선에 묶이지 않고 드로그바와 오스굿 사이를 드나드는 자리다. 최전방의 둘은 마흔한 해를 사이에 두고 구단의 유럽 결승을 하나씩 책임진 센터 포워드다. 오스굿은 1971년 아테네에서, 드로그바는 2012년 뮌헨에서 넣었다.
1. 페트르 체흐 - 골키퍼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프리미어 리그 역대 최다 클린시트 207경기는 202경기의 오기다. 그 가운데 162경기가 첼시에서 나왔다.
피터 보네티와 에트 더후이 시대를 지나 2004년에 만나, 첼시라는 구단의 운명 자체를 바꾼 골키퍼 페트르 체흐(Petr Čech; 체코 골키퍼, 1982-). 체흐는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 성공 시대의 상징격 존재 중 한 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페트르 체흐는 프리미어 리그 역사상 가장 완벽에 가까웠던 수문장으로 평가된다. 비슷한 반열에서 아스널의 데이비드 시먼, 맨 유나이티드의 페테르 슈마이켈 혹은 에드윈 판데르사르, 리버풀의 알리송 베케르 등이 있지만 체흐는 그중에서도 가장 완벽했던 골키퍼라는 평을 듣고 있다.
스타드 렌에서 700만 파운드에 온 스물두 살은 2004-05시즌 개막전부터 카를로 쿠디치니를 밀어내고 골문에 섰다. 그 시즌 첼시는 리그 서른여덟 경기에서 열다섯 골만 내줬다. 지금도 깨지지 않은 프리미어 리그 최소 실점이다. 체흐는 스물네 경기를 무실점으로 막았고, 1,025분 동안 한 골도 내주지 않았다. 구단이 쉰 해 만에 든 리그 트로피의 맨 뒤가 그였다.[4]
494경기에서 228번의 무실점, 첼시 역사상 최다 클린시트. UEFA 챔피언스 리그 최우수 골키퍼 세 번. 2007-08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맨 유나이티드전의 선방 쇼. 2011-12시즌 결승에서 바이언의 로번을 막아낸 자. 철모를 썼던 기사는 이런 성공 사례들을 통해 첼시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존경심을 받고 있기도 하다.
철모의 사연은 2006년 10월 14일 레딩 원정에서 시작된다. 경기 시작 1분도 안 돼 스티븐 헌트의 무릎이 그의 머리를 쳤고, 두개골이 함몰됐다. 교체로 들어온 쿠디치니마저 경기 막판 쓰러져 실려 나가자 남은 몇 분은 주장 존 테리가 골키퍼 장갑을 끼고 버텼다. 첼시는 그 경기를 1-0으로 이겼다. 생명이 위협받았던 체흐는 석 달 뒤인 2007년 1월 20일 리버풀전에 럭비 선수들이 쓰는 머리 보호대를 쓰고 돌아왔고, 그 후로도 전성기를 이어간 그의 모습은 첼시 팬들에게 기사(Paladin)와 같은 존재로 각인되었다.
그의 가장 위대한 밤은 2012년 5월 19일 뮌헨이다. 연장에 내준 페널티킥에서 아르연 로번의 낮은 슛을 막았고, 승부차기에서 두 개를 더 건드렸다. 바이언이 그날 찬 페널티킥은 여섯 번인데 체흐는 여섯 번 모두 공이 가는 쪽으로 몸을 던졌다.
| 뮌헨의 여섯 번 | 키커 | 결과 |
|---|---|---|
| 연장 | 아르연 로번 | 막음 |
| 승부차기 1 | 필리프 람 | 실점 |
| 승부차기 2 | 마리오 고메스 | 실점 |
| 승부차기 3 | 마누엘 노이어 | 실점 |
| 승부차기 4 | 이비차 올리치 | 막음 |
| 승부차기 5 |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 손끝에 닿고 골대 |
2015년 6월 아스널로 떠날 때 그가 남긴 것은 494경기와 메이저 트로피 열세 개다. 구단의 어느 골키퍼도 가까이 가지 못한 숫자다. 은퇴한 뒤에는 기술 고문으로 3년을 더 일했고, 2019년부터는 아이스하키 골리로 얼음 위에 서고 있다. 막는 일을 그만두지 못한 사람이다.
2. 론 해리스 - 센터백

795경기. 첼시 역사상 가장 많은 경기에 나선 축구선수.[5]
아스널의 데이비드 오리어리, 리버풀의 앨런 한센, 맨 유나이티드의 리오 퍼디낸드가 있다면 첼시에는 론 해리스(Ronald Edward Harris; 잉글랜드 수비수, 1944-)의 이름을 내밀 수 있다.
론 해리스에게 붙은 별명은 초퍼(Chopper; 절단기). 이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태클과 철저한 수비력을 상징하는 별명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풋볼 리그가 지금의 프리미어 리그보다 훨씬 험난하던 시절, 그 시대의 헝그리 정신과 거리의 전투자 감성을 그대로 품고 있던 그는 첼시의 골문 앞을 결코 넘보지 못하게 했다. 팀마다 거친 사내 하나쯤은 있던 시절인데도 그는 유독 눈에 띄었다고 구단은 적는다.
1961년 FA 유스컵을 든 소년은 이듬해 2월 열일곱 살에 1군에 데뷔했고, 그 뒤 열여덟 해 동안 선발 명단의 붙박이였다. 수비라면 어느 자리든 섰다. 1967년 FA컵 결승에는 스물두 살의 나이로 주장 완장을 차고 나갔다. FA컵 결승에 팀을 이끌고 나온 가장 어린 주장이었다. 그 결승은 토트넘에 1-2로 졌다.
1969-70시즌 FA컵 결승.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혈전에서 재경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승을 차지하던 당시, 해리스는 첼시의 주장으로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4월 11일 웸블리의 첫 경기는 2-2였다. 막판 동점골은 해리스가 재빨리 찬 프리킥에서 나왔다. 4월 29일 올드 트래퍼드의 재경기에서는 시작 8분 만에 일이 났다. 리즈의 공격을 풀어 가던 날개 에디 그레이의 무릎 뒤로 해리스의 늦은 태클이 들어갔고, 그레이는 남은 시간을 절뚝이며 보냈다. 연장 끝에 2-1. 첼시가 처음 든 FA컵이다.

그 재경기는 잉글랜드 축구가 기억하는 가장 거친 결승이다. 영국에서만 2,800만 명 넘게 지켜봤는데, 스포츠 중계로는 1966년 월드컵 결승 다음 가는 숫자다. 1997년 심판 데이비드 엘러레이가 이 경기를 요즘 기준으로 다시 채점했더니 퇴장 여섯, 경고 스물이 나왔다. 실제 그날 주심이 경고를 준 선수는 한 명뿐이다.
1970-71시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 레알 마드리드와의 결승에서도 해리스는 첼시를 유럽 무대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리스 피레아스에서 5월 19일 1-1로 비겼고, 이틀 뒤 재경기를 2-1로 이겼다. FA컵을 처음 든 첼시 주장도, 유럽 트로피를 처음 든 첼시 주장도 그다.
그의 수비는 예술이 아닌 의무였고, 폭력 아닌 충성의 칼날이었다. 스타들이 하나둘 떠나고 팀이 두 번 강등되는 동안에도, 주장 완장이 어린 레이 윌킨스에게 넘어간 뒤에도 그는 1980년까지 남았다. 잉글랜드 성인 대표팀에서는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첼시의 수많은 레전드 중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아야 할 사내가 있다면 그는 아마 론 해리스일 것이다.
3. 존 테리 - 센터백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별명 줄 절단기(The Chopper)는 론 해리스 디자인의 것이 그대로 남은 것이다. 테리를 부르는 이름은 JT, 그리고 관중석의 세 단어다.
첼시의 심장, 스탬퍼드 브리지의 주인.
존 테리는 무려 717경기, 5번의 프리미어 리그 우승, 첼시 주장으로 500경기 이상을 출전한 첼시의 가장 길고 깊은 시대를 지탱한 단단한 기둥이었다.[3]
1998년 10월 리그컵 애스턴 빌라전의 교체 출전이 첫 경기다. 2000년에는 노팅엄 포리스트로 임대를 다녀왔고, 돌아와서는 마르셀 드사이와 프랑크 르뵈프라는 월드컵 우승 수비수들 사이에서 자리를 뺏어 냈다. 처음 주장 완장을 찬 날이 2001년 12월, 스물한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때다.
2004년부터 주제 모리뉴 감독의 핵심으로 프리미어 리그에서 단일 시즌 최소 실점(15실점)이라는 신화를 만들며, 현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 라인을 구축했다. 정식 주장이 된 첫 시즌이었고, 시즌이 끝난 뒤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가 됐다.
- 2004-05
- 15실점모리뉴 · 50년 만의 우승
- 2005-06
- 2연패모리뉴
- 2009-10
- 더블안첼로티 · 리그와 FA컵
- 2014-15
- 네 번째모리뉴의 두 번째 임기
- 2016-17
- 다섯 번째콘테 · 마지막 시즌
전술 이상의 존재. 존 테리는 단순한 센터백을 넘어 첼시의 무게 중심이었다. 박스 안에서의 공중볼 장악 능력. 포지셔닝, 라인 컨트롤, 선제적 태클. 후방 빌드업의 시발점이자 감정의 엔진. 그는 단순한 기술이 아닌 신념으로, 내가 막지 못하면 아무도 막지 못한다는 본인만의 철학을 그라운드 위에서 구현해냈다. 넣는 일에도 능했다. 통산 67골, 프리미어 리그 시대의 어느 수비수보다 많이 넣었다.
막는 일이라면 자리를 가리지 않았다. 체흐의 머리가 깨진 2006년 레딩 원정에서 골키퍼 둘이 모두 실려 나가자 마지막 몇 분 골문에 선 사람이 그였다. 무실점으로 끝냈다.
그의 이름에는 유럽의 밤이 두 번 걸려 있다. 2008년 5월 모스크바, 승부차기에서 그가 넣으면 첼시가 유럽 챔피언이 되는 킥이었다. 디딤발이 미끄러졌고 공은 골대를 때렸다. 첼시는 5-6으로 졌고 주장은 그 자리에서 울었다. 4년 뒤에는 준결승 2차전 캄 노우에서 공과 상관없는 자리의 알렉시스 산체스를 무릎으로 가격해 퇴장당했고, 뮌헨의 결승에 뛰지 못했다. 2011-12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당시, 파이널에서 동료들과 함께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장면은 그가 결장 속에서도 주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증명했다. 정장 대신 유니폼을 다 갖춰 입고 올라온 그 모습은 지금도 인터넷이 가장 아끼는 짤 가운데 하나다.
팬들이 기억하는 존 테리. 주장, 리더, 전설. 첼시 팬들이 만든 이 3단 찬가는 존 테리라는 사내를 가장 정확히 설명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마지막 경기는 2017년 5월 21일 선덜랜드전이다. 다섯 번째 리그 트로피를 드는 날이었다. 교체 표지판은 전반 26분에 올라갔다. 그의 등번호였다. 동료들이 두 줄로 서서 길을 만들었고 그는 그 사이로 걸어 나왔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경기장에서 먼저 주저앉는 법이 없던 테리는 여전히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가장 주요한 인사로 기억되고 있다.
4. 애슐리 콜 - 레프트백

아스널에서 완성되고, 첼시에서 영원이 된 애슐리 콜(Ashley Cole; 잉글랜드 수비수, 1980-). 말 그대로 커리어가 조금 특이하기는 하다. 마치 바르사와 레알을 모두 겪은 루이스 피구와 같달까.
건너오는 과정부터 시끄러웠다. 2006년 8월 31일, 이적 시장이 닫힌 뒤에야 서류가 끝났다. 500만 파운드에 윌리앙 갈라스를 얹어 주는 조건이었다. 아스널이 재계약 조건으로 내민 주급 5만 5천 파운드에 그는 분노로 몸이 떨렸다고 했고, 아스널 팬들은 그에게 캐슐리(Cashley; 돈을 뜻하는 cash와 이름을 합친 말)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해 12월 두 팀이 만났을 때 아스널 팬들은 그의 얼굴을 넣은 가짜 20파운드 지폐를 흔들었다.[6]
애슐리 콜은 아스널에서 무패 우승의 레프트백으로 이미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었지만, 첼시 이후 그는 역대급이라는 수식어에 자신을 완전히 맞춰나간 수비수였다.
완벽한 공수 밸런스. 빠르지만 무모하지 않고, 날카롭지만 절제할 줄 알며, 때론 1대1 상황에서 메시조차도 고전하게 만든 대인 마크의 대가.
2011-12시즌 준결승에서 바르사를 상대하며 애슐리 콜이 리오넬 메시를 방어한 장면은 전 세계인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기 충분했다. 1차전 스탬퍼드 브리지에서는 골라인 위에서 공을 걷어내 1-0을 지켰고, 메시는 두 경기에서 한 골도 넣지 못했다. 물론, 메시라는 존재가 당시에도 워낙 어나더 레벨이긴 했기에 콜이 상당히 뚫리기도 했다만.. 2009년 준결승 1차전 캄 노우에서는 정작 그가 징계로 빠져, 주제 보싱와가 왼쪽에 서서 메시를 맡아야 했다.
뮌헨에서는 왼쪽 수비가 본업인데 그날 자기 앞 날개 자리에 선 어린 라이언 버트런드를 데리고 왼쪽을 지켰다. 승부차기에서는 네 번째로 나와 넣었다. 4년 전 모스크바에서도 넣었던 그다.
FA컵 우승 메달이 일곱 개다. 아스널에서 셋, 첼시에서 넷. 이 대회 역사에서 누구도 그보다 많이 갖지 못했다. 2009년 결승에서는 경기 최우수 선수였다.
애슐리 콜은 단순히 잘 막는 풀백을 넘어 공격 진영에서부터 수비 진영까지 선처럼 곧게, 첼시라는 그림에 가장 정확한 윤곽선을 그려준 수비수였다.
첼시의 왼쪽이 위대했던 시절엔 웬만해서는 애슐리 콜이라는 이름이 선발 명단에 마킹되어 있었다.
5.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 - 라이트백

첼시 팬 커뮤니티를 보면 여전히 탕코를 그리워하는 국내 팬들이 수두룩하다. 실력보단 정신력이 월드클래스로 불렸던 스페인의 사내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César Azpilicueta Tanco; 스페인 수비수, 1989-). 탕코는 그의 어머니 쪽 성이다. 영국 팬들은 다른 길을 택했다. 성을 발음하기 어렵다며 그냥 데이브(Dave)라고 불렀다.[7]
아스필리쿠에타 열한 명으로 팀을 짜면 아마 그 대회를 우승할 것이다. 축구는 순수한 재능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A team with 11 Azpilicuetas would probably win the competition.
주제 모리뉴가 아스필리쿠에타를 두고
원래는 라이트백, 필요하면 레프트백 소화, 쓰리백 시대엔 센터백까지 소화. 2012년 8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서 700만 파운드에 온 그는 첫 시즌 UEFA 유로파 리그 우승 팀의 오른쪽을 맡았고, 애슐리 콜이 다치자 왼쪽으로 건너가 콜이 돌아온 뒤에도, 브라질 대표 필리피 루이스가 온 뒤에도 그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전성기엔 스페인의 군인이라 불리며 어느 감독이 와도 첫 번째로 부름을 받던 선수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 특히 쓰리백의 오른쪽에서 최전방 공격수에게 올려주는 크로스 구질만큼은 전 세계에서 최강이었다. 안토니오 콘테가 스리백을 세운 2016-17시즌 그는 리그 서른여덟 경기를 1분도 빠지지 않고 뛰었다. 프리미어 리그 우승 팀의 필드 플레이어로는 역대 네 번째였다.
프리미어 리그 2회 우승과 FA컵, 리그컵, UEFA 유로파 리그 두 번, 그리고 끝내 UEFA 챔피언스 리그와 UEFA 슈퍼컵, FIFA 클럽 월드컵까지. 첼시에서 들 수 있는 메이저 트로피를 전부 가진 선수는 지금까지 그 하나다. 완장은 뒤쪽 절반에 찼다. 2017년 여름 부주장이 됐고, 2019년 바쿠의 UEFA 유로파 리그 결승에 주장으로 팀을 이끌고 나간 뒤 그다음 시즌부터 정식 주장이 됐다. 2021년 포르투에서 빅 이어를 든 그는 뮌헨의 밤에 이어 그 트로피를 든 두 번째 첼시 주장이고, FIFA 클럽 월드컵을 든 첫 번째 첼시 주장이다.
램파드 이후, 첼시라는 이름은 더 이상 강철의 집단이라 부르기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팬들은 그 와중에도 믿을 이름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아스필리쿠에타.
508경기. 잉글랜드 바깥에서 온 선수 가운데 첼시에서 가장 많이 뛴 사람이고, 구단 전체로도 여섯 번째다. 2023년 여름 알레띠로 떠났고, 세비야에서 한 시즌을 더 뛴 뒤 2026년 5월 축구화를 벗었다.
전설이라는 단어가 기교가 아닌 헌신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한 이름이다.
6. 은골로 캉테 - 중앙 미드필더

168cm의 키. 잔디 위에서 은골로 캉테(N’Golo Kanté; 프랑스 미드필더, 1991-)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가 없을 땐 다 티가 났다.
에덴 아자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캉테는 어디에나 있어서 가끔 둘로 보인다고, 쌍둥이와 같이 뛰는 것 같다고. 이 농담 같은 찬사에 대해서도 웃는 이보단 고개를 끄덕이는 이가 더 많았다. 사실이니까..[8]
언성 히어로의 아이콘. 2016-17시즌, 레스터의 기적을 만들고 3,200만 파운드에 첼시로 건너온 캉테는 첫해부터 리그를 지배했다. 서로 다른 구단에서 두 해 연속 잉글랜드 리그를 우승한 필드 플레이어는 1992년과 1993년의 에리크 칸토나 이후 그가 처음이다. 그해 선수들이 뽑은 상, 기자들이 뽑은 상, 리그 사무국이 주는 상이 모두 그에게 갔다.
2017년의 리그 우승, 2018년의 FA컵, 2018 FIFA 월드컵 우승, 2019년의 UEFA 유로파 리그, 2021년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어느 팀이든, 캉테가 있으면 우승은 따라왔다. 2019년 바쿠의 결승에는 부상을 안고 나가서도 경기를 지배했다.
그는 결정적 순간을 만들지 않아도, 경기의 흐름 자체를 뒤바꿨다. 가로채기, 태클, 압박.. 그는 경기장의 공기처럼 어디에나 존재했다. 팬들은 레알 마드리드와의 결전을 중요하게 기억하기도 한다. 2021년 봄의 캉테는 알레띠와의 16강, 레알 마드리드와의 준결승, 맨체스터 시티와의 결승에서 차례로 경기 최우수 선수가 됐다. 빅 이어로 가는 마지막 세 계단의 주인이 전부 그였다.
귀여움 더하기 겸손. 말수는 적고, 광고도 SNS도 거의 없었고, 하지만 훈련장에는 가장 먼저 나오고 팬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스포츠인. MVP의 진짜 모습이다. 영국에 와서 처음 산 차가 미니였고, 월드컵을 든 해에도 그 차를 몰았다.
이 사람의 성정을 설명하는 데는 2018년 9월의 하룻밤이면 된다. 카디프 시티전을 마치고 파리행 유로스타를 놓친 그는 기도할 곳을 찾아 런던의 한 모스크에 들어갔다. 거기서 만난 팬들이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하자 정말로 따라갔다. 월드컵 우승 두 달 뒤의 미드필더가 처음 본 사람 집 거실에서 커리를 먹고, 게임을 하고, 자기가 뛴 경기의 하이라이트 방송을 같이 봤다.
그 후 몇 년간 첼시의 심장이 되어주는 미드필더는 오직 캉테뿐이었다. 일곱 시즌 269경기 13골. 2023년 여름 그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다.
7. 프랭크 램퍼드 - 중앙 미드필더

첼시라는 이름을 이야기할 때, 프랭크 램퍼드의 이름은 결국 거론된다. 그가 없이 첼시의 역사도, 정체성도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211골. 그것도 미드필더가 기록한 구단 최다 득점. 그의 득점은 늘 필요할 때, 가장 무거운 순간에 나왔다.[2]
- 출전
- 648경기2001-2014
- 득점
- 211골구단 역대 1위
- 프리미어 리그
- 177골미드필더 역대 1위
- 연속 출전
- 164경기필드 플레이어 역대 1위
아버지의 이름 아래에서. 프랭크 램퍼드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전설, 프랭크 램퍼드 시니어(Frank Richard George Lampard;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잉글랜드 수비수)의 아들이었다. 축구가 핏줄처럼 흐르던 집안. 그가 웨스트햄 1군에서 뛰던 시절 감독은 이모부 해리 레드냅이었고 코치가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아들로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 자신만의 축구를 원했고, 자신만의 문장을 쓰고 싶어 했다. 2001년 5월 레드냅과 아버지가 한꺼번에 구단을 떠나자 그도 짐을 쌌다. 때문에 그는 1,100만 파운드에 첼시 FC를 택했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시대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시대를 만들어냈다.
램퍼드는 경기장에서 지휘자와 같다. 지네딘 지단 유형이랄까. 오버래핑과 침투 타이밍, 세컨드 볼에 대한 감각, 그리고 비껴가는 중거리슛까지 이성과 감성의 완벽한 교집합이었다. 그는 타고난 것만으로 뛰지 않았다. 여름마다 세트피스, 페널티킥, 순간 속도, 침투 패스 가운데 하나씩을 골라 고쳐 오던 선수였다고 구단은 적는다.
가장 무거운 순간들을 차례로 적으면 이렇다. 2005년 4월 30일 볼턴 원정, 그의 두 골로 2-0. 첼시가 쉰 해 만에 리그를 우승한 날이다. 그해 그는 기자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가 됐고,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모두 호나우지뉴 다음이었다. 2008년 4월 30일 리버풀과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2차전, 어머니를 여읜 지 한 주 만에 경기에 나선 그는 연장 98분의 페널티킥을 차 넣고 젖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모스크바의 결승에서도 전반이 끝나기 직전 동점골을 넣었다.
주제 모리뉴와 함께 시작한 첼시 역사의 서막. UEFA 유로파 리그, UEFA 챔피언스 리그 모두 우승. 테리가 징계로 빠진 2012년 뮌헨에서 주장 완장은 그의 팔에 있었고, 승부차기의 세 번째 킥도 그가 넣었다. 이듬해 암스테르담의 UEFA 유로파 리그 결승에서도 주장이었다. 그 결승을 나흘 앞둔 빌라 파크에서 아자르의 패스 두 개를 받아 202골의 벽을 넘었다.
수비를 찢는 중거리슛, 공간을 읽는 천재적 위치 선정, 무한한 체력과 헌신까지 램퍼드는 폴 스콜스나 스티븐 제라드와 함께 2000-2010년대 프리미어 리그의 위대한 미드필더였다. 2014년 6월에 떠난 그는 2019년 감독으로 돌아왔고, 2023년 봄에는 임시 감독으로 한 번 더 벤치에 앉았다. 구단은 그를 두고 첼시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 가운데 하나, 어쩌면 그중 으뜸이라고 적는다.
8. 에덴 아자르 - 레프트 윙

푸른 심장을 두드린 춤, 에덴 아자르(Eden Michael Hazard; 벨기에 공격수, 1991-), 첼시의 마지막 천재.
공이 발에 붙어 있었다. 그 시절 스탬퍼드 브리지를 채운 수많은 탄성은 하나의 이름으로 귀결됐다. 에덴 아자르.
그는 단순한 윙어를 넘어 작곡가였고, 필드 위의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그만큼 경쾌했고, 팬들은 단순히 눈요깃거리가 아닌 경외로서 아자르를 품고, 사랑했다. 그의 플레이는 전술을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전술이 그를 따라야 했다.
첼시에 입성한 건 2012년. 유럽이 전부 탐내던 스물한 살은 릴을 떠나 어디로 갈지를 트위터에 직접 적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팀과 계약한다는 한 줄이었다. 뮌헨의 밤이 지난 그 여름이다. 조금은 어린 듯, 장난기 어린 미소로 런던에 도착한 그가 7년 후 런던을 떠날 땐, 6개의 트로피와 수많은 하이라이트 장면, 그리고 스탬퍼드 브리지에 남겨진 마지막 천재의 기억만이 조용히 남았다.[9]
장난기는 가끔 사고가 됐다. 2013년 1월 스완지 시티와의 리그컵 준결승, 시간을 끌려고 공을 깔고 엎드린 볼 보이 밑으로 그가 발을 넣어 공을 차 냈고 그대로 퇴장당했다. 나중에 서로 사과했다고 한다.
2014-15시즌. FWA 올해의 선수, PFA 올해의 선수, 프리미어 리그 사무국 선정 올해의 선수를 모두 독식해 내던 최전성기 시절의 아자르는 같은 런던의 알렉시스 산체스를 넘어선 영향력을 과시했었다. 우승을 확정한 2015년 5월 크리스털 팰리스전의 유일한 골도 그의 것이다. 자기가 얻어 낸 페널티킥이 골키퍼에게 막히자 튀어나온 공을 머리로 다시 밀어 넣었다.
팀이 무너진 이듬해에도 한 장면은 남겼다. 2016년 5월 2일 토트넘전, 0-2로 뒤진 경기에 교체로 들어가 2-2를 만든 골. 그 무승부로 토트넘의 추격이 끝났고 레스터 시티가 우승했다. 첼시가 못 든 트로피를 토트넘도 못 들게 한 골이다.
리그 우승, 올해의 선수, 빛나는 아스널전의 솔로 골, 웨스트햄전 솔로 골. 2017년 2월 4일 아스널전 53분, 자기 진영에서 출발해 아스널 수비를 혼자 헤집고 들어가 넣은 그 장면은 아자르가 드리블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무화하는 존재였음을 증명했다. 2019년 4월 8일 웨스트햄전의 골도 같은 종류였다. 둘 다 그달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골로 뽑혔다.
마지막 경기까지 그다웠다. 2019년 5월 29일 바쿠의 UEFA 유로파 리그 결승, 아스널을 4-1로 무너뜨린 경기에서 한 골을 돕고 두 골을 넣었다. 경기 최우수 선수였다. 아흐레 뒤 그는 1억 유로에 레알 마드리드 선수가 됐다. 첼시에서 352경기 110골, 구단 올해의 선수 네 번은 지금도 최다다.
공이 그의 발에서 떨어지는 순간이 단 한 번도 없던, 그런 선수가 이 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9. 잔프랑코 촐라 - 세컨드 스트라이커

그는 작았다. 168cm의 작은 이탈리아 사내 잔프랑코 촐라(Gianfranco Zola; 이탈리아 공격수, 1966-).
이탈리아에서 못한 선수는 아니었다. 나폴리에서는 디에고 마라도나 곁에서 1989-90시즌 세리에 A를 우승했고, 파르마에서는 1994-95시즌 UEFA컵을 들었다. 악몽은 마지막 몇 달이다. 1996년 파르마에 부임한 카를로 안첼로티는 자기의 딱딱한 4-4-2에 그가 들어갈 자리를 찾지 못했고, 왼쪽 미드필더로 돌려 세웠다. 해방감을 느끼기 위해 잉글랜드로 건너온 사내였다. 안첼로티가 측면에 세워 뒀다가 잉글랜드로 보낸 공격수가 아스널 편의 앙리 말고 하나 더 있는 셈이다.[10]
잔프랑코 촐라, 첼시 팬들에게 그 이름은 단지 선수가 아니라 감정이고, 기억이고, 무대 그 자체였다.
1996년 11월, 그가 나폴리와 파르마를 거쳐 450만 파운드에 런던에 도착했을 때, 첼시는 아직 유럽의 거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작은 예술가는 이내 보여주었다. 위대한 구단은, 위대한 선수 하나로 시작된다. 이 진리를 구현해냈다.
시즌 중간에 와서 반 시즌만 뛰고도 그는 기자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가 됐다. 한 시즌을 다 채우지 않고 그 상을 받은 선수는 지금까지 그뿐이고, 첼시 선수로도 처음이었다. 1996-97시즌 FA컵에서만 네 골을 넣었다. 0-2로 뒤지다 4-2로 뒤집은 리버풀전의 25야드 감아차기가 있었고, 준결승 윔블던전에서는 공을 뒤꿈치로 돌려놓고 180도 돌아서 넣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에서 수비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페테르 슈마이켈을 뚫은 골을 두고 알렉스 퍼거슨은 영리한 꼬마 녀석이라고 했다.
1998년 5월 13일 스톡홀름의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 부상 때문에 벤치에서 시작한 그는 후반에 교체로 들어갔고, 30초도 안 돼 데니스 와이즈의 패스를 받아 두 번째 터치로 결승골을 넣었다.
터치 하나, 패스 하나에 이탈리아 예술가의 손끝 감각이 담겼고, 그가 공을 잡는 순간 스탬퍼드 브리지는 숨을 멈췄다. 1996-97시즌 FA컵 결승에서의 활약, 그리고 노리치 시티전의 골. 2002년 1월의 FA컵 경기였다. 코너킥이 날아오자 그는 공중에 뜬 채 뒤꿈치로 공을 돌려 넣었다.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은 촐라는 마법사라서 뭐든 시도한다고, 마법사는 시도해야 한다고 했다.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그는 이미 교과서 밖의 챕터를 창조한 예외의 선수였다.
그라운드 위에서 존재감의 밀도를 증명해 내던 잔프랑코 촐라는 첼시에서만 312경기를 뛰며 80골을 터뜨렸다. 서른여섯 살이던 마지막 시즌에 열여섯 골로 개인 최다를 넣었고, 그해 초 팬 투표에서 첼시 역대 최고의 선수로 뽑혔다. 마지막 경기는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이 걸린 리버풀전이었다. 20분을 남기고 들어간 그의 마지막 플레이는 수비수 넷을 지나는 드리블이었다.
작별에는 사연이 하나 붙는다. 2003년 여름 그는 고향 사르데냐의 칼리아리와 계약하기로 약속했다. 바로 다음 날 아브라모비치가 첼시를 샀다. 새 구단주가 더 좋은 조건의 재계약을 내밀었지만 그는 한번 한 약속을 물리지 않았다. 2003년 마지막 시즌을 끝으로 런던을 떠났을 때, 첼시 팬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정말로 눈물이 나는 작별을 경험했다. 그가 달던 25번은 그 뒤 스무 해 동안 아무도 달지 않았다. 2023년 모이세스 카이세도가 그 번호를 받을 때도 먼저 촐라에게 연락해 허락을 구했다.
10. 디디에 드로그바 - 센터 포워드

검은 예수라 불리던 사내.
프랑스에서 넘어온 그는 골을 넣기 위해 런던에 도착했고, 동시에 민족을 하나로 묶기 위해 움직였다.
디디에 드로그바(Didier Yves Drogba Tébily; 코트디부아르 공격수, 1978-). 코트디부아르에서 온 이 스트라이커는 피지컬과 정신, 기술과 영혼,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완전체였다.
첼시의 유니폼을 처음 입은 건 2004년, 갓 부임한 주제 모리뉴 감독이 영입 1순위로 꼽은 이름이 그였다. 2,400만 파운드, 당시 구단 최고 이적료였다. 팬들은 처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세계 최정상 공격수로 보기에는 2% 부족한 게 팩트긴 하니. 스물한 살에야 프랑스 2부 르망에서 프로 무대에 선 늦깎이였고, 마르세유에서 보낸 좋은 시즌은 딱 한 번이었다. 그 한 시즌의 유니폼은 지금도 마르세유 언덕 위의 성당에 액자로 걸려 있다. 2004년 UEFA컵 결승을 앞두고 그가 직접 바친 것이다.[11]
물음표는 결승에서 지워졌다. 그가 첼시에서 뛴 결승은 아홉 번이고 거기서 넣은 골이 아홉 개다.
| 결승 | 상대와 결과 | 골 |
|---|---|---|
| 2005 리그컵 | 리버풀 3-2, 연장 | 1 |
| 2007 리그컵 | 아스널 2-1 | 2 |
| 2007 FA컵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0, 연장 | 1 |
| 2008 리그컵 | 토트넘 1-2, 연장 | 1 |
| 2008 UEFA 챔피언스 리그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1, 승부차기 패 | 0 |
| 2009 FA컵 | 에버턴 2-1 | 1 |
| 2010 FA컵 | 포츠머스 1-0 | 1 |
| 2012 FA컵 | 리버풀 2-1 | 1 |
| 2012 UEFA 챔피언스 리그 | 바이언 1-1, 승부차기 승 | 1 |
| 아홉 번의 결승 | 우승 일곱 번 | 9 |
2007년의 골은 새로 지은 웸블리에서 열린 첫 FA컵 결승의 유일한 골이다. 연장 116분이었다. FA컵 결승 네 번에서 골을 넣은 선수도, 리그컵 결승 세 번에서 골을 넣은 선수도 그가 처음이다. 표에서 숫자가 0인 줄은 모스크바다. 연장 종료 4분 전 네마냐 비디치의 얼굴에 손을 댔다가 퇴장당했고, 승부차기는 그 없이 치렀다.
2011-12시즌, 뮌헨에서의 그 헤딩 골. 83분에 선제골을 내준 첼시가 88분에 그날의 첫 코너킥을 얻었다. 후안 마타가 올렸고, 가까운 쪽 기둥으로 달려든 드로그바의 머리가 마누엘 노이어를 뚫었다. 연장에서는 프랑크 리베리를 걸어 넘어뜨려 페널티킥을 내줬다. 체흐가 그것을 막았다. 그리고 승부차기의 다섯 번째 키커로 걸어 나와 우승을 끝냈다.
그 한 방은 첼시가 100년 넘게 꿈꿨던 빅 이어(Coupe des Clubs Champions Européens; 유러피언컵 트로피의 정식 이름)를 품에 안기게 한 역사적인 골이었다. 그는 단 한 번의 기회에서, 신의 손이 되어 첼시를 유럽 정상에 올려놨고, 팬들은 그를 아프리카에서 온 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구단 잡지가 팬 2만 명에게 물은 투표에서 그는 첼시 역대 최고의 선수로 뽑혔다.
민족을 묶은 일은 비유가 아니다. 2005년 10월 수단을 꺾고 코트디부아르의 첫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한 날, 그는 라커룸에서 중계 카메라를 향해 내전 중인 고국에 무기를 내려놓아 달라고 호소했다. 그 호소가 휴전으로 이어졌다.
2014년에 돌아와 한 시즌을 더 뛰었고 네 번째 리그 우승 메달을 받았다. 마지막 경기에서는 동료들이 그를 들어 어깨에 메고 경기장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첼시에서의 9시즌, 381경기 164골이라는 기록 속에는 풋내기에서 월드클래스로 향하던 기억과 수많은 트로피, 그리고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나가던 디디에의 땀이 묻어있다. 유럽 대항전 36골은 지금도 구단 최다다.
11. 피터 오스굿 - 센터 포워드

푸른 제단 위의 왕, 팬들에게 스탬퍼드 브리지의 왕(The King of Stamford Bridge)으로 불렸던 공격수.
피터 오스굿은 첼시의 과거 속 신화이며, 현재에는 전통이고, 미래의 약속 같은 공격수이다. 첼시 슈퍼스타의 원형. 이 점만큼은 지미 그리브스보다 위대하다.
1964년, 스탬퍼드 브리지는 아직 진흙 내새가 배어 있는 노동자의 구장이었고, 첼시는 트로피보다 정체성을 먼저 찾아야 할 젊은 팀이었다. 그 속에서 단 하나, 푸른 셔츠를 입고 예술처럼 움직이던 열일곱 살의 소년이 나타났다. 그해 2군에서 스무 경기 서른 골을 넣고 있던 소년이다. 12월 16일 리그컵 워킹턴전에 처음 나가 2-0의 두 골을 혼자 넣었다.[12]
빠르지는 않았고, 화려하지도 않았으나 공이 그의 발에 닿는 순간 골망은 필히 흔들렸다. 빠르지 않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1966년 10월 블랙풀전에서 엠린 휴스의 태클에 다리가 부러졌고 한 해 가까이를 쉬었다. 그 바람에 구단의 첫 웸블리 FA컵 결승이던 1967년 결승도 뛰지 못했다. 돌아온 그는 속도를 조금 잃은 대신 몸싸움과 버티는 힘을 얻어 왔다.
1969-70시즌 FA컵 결승. 그리고 재경기에서의 결정적 골. 론 해리스와 함께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혈전에서 가장 빛나던 존재는 다름 아닌 피터 오스굿이었다. 0-1로 끌려가던 78분, 찰리 쿠크가 찍어 올린 공에 몸을 날려 머리로 넣었다. 그를 맡았어야 할 잭 찰턴은 다른 선수에게 앙갚음하러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그 골로 오스굿은 그해 FA컵의 모든 라운드에서 골을 넣은 선수가 됐다. 대회 역사에 아홉 명뿐이고, 그 뒤로는 아직 아무도 없다.
1970-71시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 레알 마드리드를 무너뜨리는 2골. 첫 경기에서 왼발 발리로 선제골을 넣었고, 이틀 뒤 재경기에서는 팀의 두 번째 골을 넣었다. 두 경기 사이의 하루를 그와 동료들은 아테네 힐튼 호텔 수영장에서 술을 마시며 보냈고, 원정 온 팬들이 온종일 그 자리에 섞여 들었다고 구단의 기록은 전한다.[1]
그는 단지 클럽의 성공을 상징하는 선수를 넘어, 첼시라는 이름이 가지던 자부심 그 자체로서 첼시 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플레이 스타일을 엿보면 동네 소년의 순수함과 전쟁터의 전사 같은 결기가 공존했고, 슈팅 능력은 무자비하여 골 순도가 굉장히 높던 스트라이커였다.
왕의 치세는 길지 않았다. 팀이 기울면서 데이브 섹스턴 감독과 틀어졌고, 1974년 3월 27만 5천 파운드에 사우샘프턴으로 팔렸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는 네 경기가 전부다. 알프 램지 감독이 그의 노는 버릇을 못마땅해했다고 전해진다. 1978년에 돌아왔지만 팀은 강등됐고, 그 시절 넣은 두 골로 통산 150골을 채웠다.

구단은 그를 잊지 않기 위해 스탬퍼드 브리지에 오스굿의 동상을 세웠으며, 이는 첼시 역사상 전례 없는 사례였다. 공을 옆구리에 끼고 선 9피트의 청동상은 이제 스탬퍼드 브리지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마침내, 한 경기장에 선 열한 명
이 명단은 첼시 FC의 성공 시대에 침투한 26인의 명단이다.
체흐가 뒤를 닫고, 해리스와 테리가 가운데를 나눈다. 오른쪽의 아스필리쿠에타가 자리를 지키는 사이 왼쪽에서는 애슐리 콜이 아자르의 뒤를 받치고, 캉테가 빼앗은 공은 램퍼드의 발을 거쳐 앞으로 나간다. 촐라가 선과 선 사이에서 공을 돌려놓으면 드로그바가 수비를 등지고 버티고, 그 옆으로 오스굿이 떨어지는 공을 기다린다.
구단이 든 리그 트로피 여섯 개 가운데 다섯 개, UEFA 챔피언스 리그 두 개, UEFA 유로파 리그 두 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두 개에 모두 이 열한 명 중 누군가의 이름이 있다. 빠진 것은 1955년의 첫 리그 우승 하나다. 그 자리는 후보 명단의 로이 벤틀리가 지킨다.
이미지 밖에서 다시 읽는 후보 15인
스탬퍼드 브리지의 이름은 열한 자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램퍼드가 넘기 전까지 최다 득점자였던 바비 탬블링과, 해리스 다음으로 많이 뛴 피터 보네티도 이 열다섯 안에 있다. 편집물 안의 이름을 검색 가능한 텍스트로 아래에 다시 적는다.
- 피터 보네티Peter Bonetti · 골키퍼
1959-1979년 729경기. 해리스 다음으로 많이 뛴 1970년과 1971년의 골문이다.
- 에트 더후이Ed de Goey · 골키퍼
1997-2003년 179경기. 르네상스 시절의 골문을 지킨 네덜란드 골키퍼다.
- 마르셀 드사이Marcel Desailly · 센터백
1998-2004년 222경기 7골. 어린 테리가 넘어서야 했던 프랑스의 센터백이다.
- 히카르두 카르발류Ricardo Carvalho · 센터백
2004-2010년 210경기 11골. 열다섯 골만 내준 시즌에 온 포르투갈 센터백이다.
- 에디 맥크리디Eddie McCreadie · 레프트백
1962-1973년 410경기 5골. 1970년 결승 재경기의 왼쪽을 맡은 스코틀랜드 풀백이다.
- 스티브 클라크Steve Clarke · 라이트백
1987-1998년 421경기 10골. 열한 해 동안 오른쪽을 지킨 스코틀랜드 풀백이다.
- 브라니슬라브 이바노비치Branislav Ivanović · 라이트백
2008-2017년 377경기 34골. 수비수로 서른네 골을 넣은 세르비아 풀백이다.
- 클로드 마켈렐레Claude Makélélé · 수비형 미드필더
2003-2008년 217경기 2골. 두 골이라는 숫자로는 설명되지 않는 자리의 주인이다.
- 마이클 에시엔Michael Essien · 수비형 미드필더
2005-2014년 256경기 25골. 모리뉴의 중원에 힘을 채운 가나 미드필더다.
- 존 홀린스John Hollins · 중앙 미드필더
1963-1975년과 1983-1984년 592경기 64골. 1970년 웸블리에서 막판 동점골로 이어진 크로스를 올렸다.
- 데니스 와이즈Dennis Wise · 중앙 미드필더
1990-2001년 445경기 75골. 스톡홀름에서 촐라에게 결승골의 패스를 넣은 주장이다.
- 찰리 쿠크Charlie Cooke · 라이트 윙
1966-1972년과 1974-1978년 373경기 30골. 오스굿의 다이빙 헤더로 이어진 공을 올렸다.
- 로이 벤틀리Roy Bentley · 센터 포워드
1948-1956년 367경기 150골. 1955년 첫 리그 우승 팀의 공격수이고 오스굿과 골 수가 같다.
- 바비 탬블링Bobby Tambling · 센터 포워드
1959-1970년 370경기 202골. 2013년까지 구단 최다 득점자였다.
- 케리 딕슨Kerry Dixon · 센터 포워드
1983-1992년 420경기 193골. 램퍼드와 탬블링 다음가는 구단 득점 3위다.
기록을 확인한 곳
- 오스굿의 동상과 추모 — Chelsea FC 「The Peter Osgood statue story」, Chelsea FC 「Peter Osgood remembered: The King's Chelsea story」. 2006년 10월 셰드 엔드 페널티 스폿 아래의 유골, 2010년 10월 1일 제막, 필립 잭슨, 9피트, 타임캡슐, 구단이 세운 첫 선수 동상, 1971년 아테네의 하루.
- 프랭크 램퍼드 — Chelsea FC 「Frank Lampard」. 1,100만 파운드, 648경기 211골과 탬블링의 202골, 프리미어 리그 177골, 164경기 연속 출전, 2005년 4월 30일 볼턴전, 2005년의 수상과 투표, 2008년 4월 30일 리버풀전 페널티킥, 2012년과 2013년의 주장, 감독 재임.
- 존 테리 — Chelsea FC 「John Terry」. 717경기 67골, 1998년 10월 데뷔와 2001년 12월의 첫 주장 경기, 주장 500경기 이상, 리그 5회, 2005년 PFA 올해의 선수, 2006년 레딩전의 골키퍼, 2012년 4월 24일의 퇴장과 결승의 유니폼, 2017년 5월 21일의 26분.
- 페트르 체흐 — Chelsea FC 「Petr Cech」. 700만 파운드, 2004-05시즌 15실점·무실점 24경기·1,025분, 494경기 228무실점과 트로피 13개, 프리미어 리그 무실점 202경기, UEFA 챔피언스 리그 최우수 골키퍼 3회, 2006년 10월 14일 레딩전 부상과 2007년 1월 20일 복귀, 아이스하키.
- 론 해리스 — Chelsea FC 「Ron Harris」. 795경기 14골, 1961년 FA 유스컵과 1962년 2월 데뷔, 1967년 결승의 최연소 주장, 재경기 8분의 태클, 첫 FA컵과 첫 유럽 트로피의 주장, 1980년 이적.
- 애슐리 콜 — Chelsea FC 「Ashley Cole」, FilGoal 「Chelsea's Bosingwa to mark Messi」. 2006년 8월 31일의 이적과 조건, 별명의 유래, 338경기, FA컵 7회, 2012년 준결승의 골라인 수비, 두 결승의 승부차기, 2009년 1차전의 징계.
-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 — Chelsea FC 「Cesar Azpilicueta」, TNT Sports 「Mourinho: A team of Azpilicuetas would win the Champions League」. 700만 파운드, 별명 데이브, 2016-17시즌 전 경기 풀타임, 부주장과 주장 시기, 모든 메이저 트로피, 508경기, 2015년 5월 6일 모리뉴의 말, 2026년 은퇴.
- 은골로 캉테 — Chelsea FC 「N'Golo Kante」, ESPN 「Eden Hazard: Chelsea's N'Golo Kante is everywhere and must play with a twin」, The42 「N'Golo Kante eats curry and watches Match of the Day with shocked fans after missing train」. 3,200만 파운드, 칸토나 이후의 기록, 2016-17시즌 세 개의 상, 2021년 세 번의 경기 최우수 선수, 269경기 13골, 미니, 2018년 9월의 하룻밤.
- 에덴 아자르 — Chelsea FC 「Eden Hazard」, 프리미어 리그 「Hazard shines as Chelsea extend lead」. 2012년의 트위터, 352경기 110골과 트로피 6개, 2013년 1월 스완지 시티전, 2014-15시즌 세 개의 상과 크리스털 팰리스전, 2016년 5월 2일 토트넘전, 2017년 2월 4일과 2019년 4월 8일의 골, 바쿠의 결승, 1억 유로.
- 잔프랑코 촐라 — Chelsea FC 「Gianfranco Zola」. 나폴리와 파르마의 우승, 안첼로티의 4-4-2, 450만 파운드, 1997년 FWA 올해의 선수와 FA컵 네 골, 퍼거슨과 라니에리의 말, 1998년 5월 13일 스톡홀름, 2002년 1월 노리치 시티전, 312경기 80골, 칼리아리와의 약속, 25번.
- 디디에 드로그바 — Chelsea FC 「Didier Drogba」. 2,400만 파운드, 마르세유 성당의 유니폼, 결승 아홉 번의 아홉 골, FA컵 결승 네 번과 리그컵 결승 세 번의 득점, 2005년 10월의 호소, 2012년 11월의 팬 투표, 381경기 164골과 유럽 대항전 36골.
- 피터 오스굿 — Chelsea FC 「Peter Osgood」. 1964년 12월 16일 워킹턴전, 2군 스무 경기 서른 골, 1966년 10월의 골절, 380경기 150골, 1974년 3월 27만 5천 파운드, 잉글랜드 대표팀 네 경기, 1978-79시즌의 복귀.
- 출전 수는 집계 기준에 따라 한 경기씩 다르다. 디자인의 애슐리 콜 337경기, 피터 오스굿 379경기는 구단 선수 명단 기준으로 각각 338경기, 380경기다. 디디에 드로그바 디자인의 381경기 164골에는 디자인에 적힌 2004-2012년과 함께 2014-15시즌의 기록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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