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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문장

리버풀 FC

Liverpool Football Club
LIVERPOOL FOOTBALL CLUB · THE REDS 1892-2026

안필드 · 리그 우승 20회 · 유러피언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 6회 · UEFA컵 3회

콥(The Kop; 안필드의 골대 뒤 스탠드, 거기 서는 팬들을 부르는 이름)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있다. 리버풀 FC 역대 최고의 열한 명과 후보 열다섯, 스물여섯 개의 이름을 골랐다.

You’ll Never Walk Alone

리버풀 FC. 더 레즈(The Reds)라는 이름은 단순한 별명이 아닌, 수십 년간 축적된 신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리버풀은 빈 경기장에서 태어났다. 1892년 안필드의 땅 주인 존 홀딩과 다툰 에버턴이 공원 건너편 구디슨 파크로 떠났고, 남은 경기장을 채우려고 홀딩이 그해 6월 3일에 새로 만든 팀이 리버풀이다.

리버풀이라는 도시에 신화를 써준 빌 샹클리. 붉은 셔츠에 붉은 바지까지 온몸을 빨갛게 입힌 것도, You’ll Never Walk Alone을 구단의 노래로 삼은 것도 그의 시대다. 리버풀에서 가장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린 사내 밥 페이즐리. 그리고 조 페이건 시대를 거쳐 케니 달글리시 경이 이끈 황금기. 2005년 이스탄불에서의 기적과 2020년대 위르겐 클로프의 영광까지.

이 구단은 늘, 패배를 넘어선 자존감과 환희로 축구를 사랑이라는 단어로 바꿔왔다.

이 콘텐츠는 그 붉은 물결 속에서 영원히 노래될 26인의 레전드를 기억하는 기록이다. 명단은 2025년 5월에 골랐다. 통산 스무 번째 리그 우승을 막 확정한 봄이었다. 그 뒤 한 해 반 사이에 이 명단 안팎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2025년 7월 디오구 조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20번은 영구 결번이 됐다. 2026년 5월에는 살라흐가 아홉 시즌을 마치고 안필드와 작별했고, 7월에는 케빈 키건이 일흔다섯으로 눈을 감았다. 판데이크는 주장 완장을 차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케니 달글리시: 안필드가 왕이라 부르는 사람

리버풀 지역 관련 매체에서 신이라는 단어를 쓴다면 웬만해서는 이 인물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콥이 앞뒤 없이 그냥 왕(The King)이라고 하면 그것도 이 사람이다. 열한 명을 부르기 전에 케니 달글리시(Sir Kenneth Mathieson Dalglish; 스코틀랜드 공격수·축구 감독, 1951-) 한 사람을 먼저 세운다. 선수로, 감독으로, 그리고 도시의 어른으로 세 번 왕이었던 사람이다.

1978년 웸블리에서 모자를 쓰고 유러피언컵 트로피를 들어 올린 케니 달글리시
1978 · 웸블리결승골의 주인이적 첫 시즌 서른한 골. 그 가운데 한 골이 유러피언컵 결승의 유일한 골이었다.
1980년대 붉은 유니폼을 입고 두 팔을 번쩍 든 채 웃으며 달리는 케니 달글리시
1985-1991선수 겸 감독감독 첫해에 리그와 FA컵을 함께 들었다. 우승을 확정한 골은 자기가 넣었다.
정장 차림으로 관중 사이에서 환하게 웃는 케니 달글리시 경
2017 · 2018스탠드의 이름, 케니 경안필드의 한쪽 스탠드가 그의 이름이 됐고, 이듬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인연은 엇갈림으로 시작했다. 1966년 8월, 열다섯 살의 글래스고 소년이 안필드에 내려와 빌 샹클리 앞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소년은 계약하지 않고 돌아갔고 셀틱에서 스타가 됐다. 리버풀이 그를 다시 부른 것은 열한 해 뒤다. 1977년 8월, 함부르크로 떠난 케빈 키건의 빈자리에 영국 최고 이적료 44만 파운드를 치렀다.[1]

첫 번째 왕위는 선수의 것이다. 리그 데뷔전에서 7분 만에 골을 넣었고, 첫 시즌에 서른한 골로 팀 최다 득점자가 됐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골이 1978년 5월 10일 웸블리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나왔다. 후반, 한 시간을 막 넘긴 때였다. 그레엄 수니스가 밀어 준 공을 받아 달려 나오는 골키퍼의 머리 위로 살짝 찍어 넘겼다. 1-0. 리버풀은 잉글랜드 팀 가운데 처음으로 유러피언컵을 2연패했다. 그 뒤 열세 해 동안 515경기 172골, 리그 우승 여섯 번과 유러피언컵 세 번이 그의 이름 옆에 쌓였다.

두 번째 왕위는 감독의 것이다. 1985년 헤이젤 참사 직후 조 페이건이 물러나자 구단은 서른네 살의 현역 공격수에게 팀을 맡겼다. 선수 겸 감독의 첫 시즌에 리버풀은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리그와 FA컵을 한 해에 들었다. 리그 마지막 날 첼시 원정의 1-0, 우승을 확정한 그 한 골을 넣은 사람이 감독 본인이다. 감독으로 리그를 두 번 더, FA컵을 한 번 더 들었다.

세 번째는 트로피로 셀 수 없다. 1989년 4월 15일 힐스버러에서 리버풀 팬 아흔일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감독이던 그는 희생자들의 장례식을 찾아다녔고, 하루에 네 곳을 간 날도 있었다. 그리고 1991년 2월, 모두를 놀라게 하며 스스로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뒤의 일은 왕의 귀환이라 부를 만하다. 2009년 유소년 아카데미로 돌아왔고, 2011년 1월에는 쉰아홉의 나이로 스무 해 만에 다시 감독 자리에 앉아 이듬해 리그컵을 들었다. 2017년 안필드의 센테너리 스탠드는 케니 달글리시 스탠드가 됐고, 2018년 그는 케니 경이 됐다.

리버풀에는 왕이 한 사람이다.선수로 유럽을 들었고, 감독으로 도시를 안았다.

선정 전술: 왕 곁에 열 명을 세운 4-3-3

대형은 4-3-3이다. 골문에는 클레멘스가 서고, 그 앞 네 명은 오른쪽부터 닐, 한센, 판데이크, 휴즈다. 닐과 한센, 휴즈는 1978년 웸블리에서 실제로 한 수비선에 섰던 사람들이고, 판데이크만 마흔 해를 건너 2020년대에서 온다. 골문부터 한 자리씩 부르고, 열한 명이 함께 선 대형은 글 끝에서 펼친다.

가운데 줄은 왼쪽에 캘러한, 한복판에 제라드, 오른쪽에 살라흐다. 살라흐는 미드필더 줄에 그려져 있어도 하는 일은 오른쪽 날개다. 맨 앞은 러시가 골문 앞을 지키고 키건과 달글리시가 한 발 뒤에서 그 둘레를 돈다. 달글리시와 러시는 1980년대에 실제로 짝을 이룬 투톱이고, 키건은 달글리시가 오기 석 달 전에 떠난 사람이다. 리버풀 역사에서 한 번도 같이 뛰지 못한 7번 둘이 이 대형에서 처음 나란히 선다.

1. 레이 클레멘스 - 골키퍼

레이 클레멘스 골키퍼 상세 정보 디자인

리버풀에서만 무려 5회의 리그 우승과 1회의 FA컵 우승, 그리고 5회의 유럽 대항전 트로피를 함께했던 사내 레이 클레멘스(Raymond Neal Clemence; 잉글랜드 골키퍼, 1948-2020). 그는 665경기에 나선 리버풀의 레전드 수문장이다.[2]

안필드에 온 날의 사연부터 그답다. 1967년 여름 열여덟 살의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골키퍼는 바닷가에서 접이식 의자를 쌓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집에 급한 전보가 와 있다는 말을 듣고 일을 접었는데, 리버풀이 낸 1만 8천 파운드를 스컨소프가 받아들였다는 소식이었다. 스컨소프 회장이 손수 롤스로이스를 몰아 그를 안필드까지 태워다 줬다.

두 해를 2군에서 보낸 뒤 1970-71시즌에 주전 장갑을 받았고, 그다음 열한 시즌 동안 리그 경기를 여섯 번밖에 거르지 않았다.

눈부신 반사 신경, 각도 계산을 기반으로 한 포지셔닝, 그리고 수비진과의 절묘한 조율 능력. 그는 안정감이라는 단어의 정의였다. 리버풀이 워낙 경기를 지배하던 시절이라 구경꾼처럼 서 있는 날이 많았는데, 어쩌다 상대가 뚫고 들어오는 그 한 번을 놓치지 않는 집중력이 그의 진짜 재능이었다고 구단은 적는다.

유럽의 결승마다 그 한 번이 있었다. 1973년 UEFA컵 결승 1차전에서 묀헨글라트바흐의 유프 하인케스가 찬 페널티킥을 막았다. 그 골이 들어갔다면 2차전을 0-2로 진 리버풀은 원정 다득점으로 트로피를 내줄 뻔했다. 1977년 로마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는 1-1 동점을 허용하고 5분 뒤, 울리 슈틸리케의 슛을 막아냈다. 리버풀은 2분 뒤 다시 앞서 나갔다.

1977-78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전, 그 당시 에른스트 하펠 감독의 유럽 최고의 팀 클뤼프 브뤼허 KV를 상대로 보여준 레이 클레멘스의 침착한 빌드업과 세이빙은 클럽의 정체성을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으로서의 골키퍼를 상징했다. 1-0으로 앞선 경기 종료 10분 전이 고비였다. 한센의 백패스가 상대 공격수에게 끊겼고, 달려 나간 클레멘스가 슛을 몸으로 막았으며, 흘러나온 공을 필 톰슨이 골라인 위에서 걷어냈다.

이듬해에는 다시 깨지기 어려운 숫자를 남겼다. 1978-79시즌 리그 마흔두 경기에 전부 나서 열여섯 골만 내줬고, 안필드에서 내준 골은 네 골이었다. 스물여덟 경기가 무실점이었다.

마지막 경기는 1981년 파리의 유러피언컵 결승이다. 레알 마드리드를 무실점으로 막고 세 번째 빅 이어를 든 뒤 그해 여름 토트넘 홋스퍼로 떠났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는 61경기를 뛰었다. 같은 시대에 피터 실턴이 없었다면 그 숫자는 훨씬 컸을 것이다.

무쇠처럼 단단하지만, 누구보다 겸손했던 사내. 2020년 11월 15일 일흔둘에 세상을 떠났다. 레이 클레멘스 없이 리버풀의 역사는 반쪽으로 반감되는 느낌도 있다.

2. 앨런 한센 - 센터백

앨런 한센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리버풀 FC 역대 최다 트로피 (23개)는 필 닐의 기록이다. 23개는 닐이 든 리그 8회, 유러피언컵 4회, 리그컵 4회, UEFA컵 1회, 유러피언 슈퍼컵 1회에 채리티 실드 5회를 더한 숫자다. 한센의 메이저 트로피는 열여덟 개다.

열여덟 개의 메이저 트로피. 그 가운데 여덟이 리그 우승이다.

앨런 한센(Alan David Hansen; 스코틀랜드 수비수, 1955-)은 어찌 보면 경기장의 지휘자, 압박을 피하는 수묵화, 그리고 공간을 짓는 건축가를 연상케하는 수비수였다.

1977년 입단 이후 620경기 출전, 리그 우승 8회, 유러피언컵 우승 3회.. FA컵 두 번과 리그컵 네 번까지 들어 올리며 리버풀의 황금기를 견인했다.[3]

축구 선수가 안 될 뻔한 사람이다. 열다섯 살부터 두 해 동안은 아예 공을 놓고 골프 선수가 되겠다고 필드를 돌았다. 골프뿐 아니라 배구와 스쿼시에서도 스코틀랜드 청소년 대표를 지냈다. 아버지와 형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공을 찬 그를 1977년 5월 리버풀이 파틱 시슬에서 10만 파운드에 데려왔다.

그를 말할 땐 반드시 덧붙여야 한다. 볼을 다루는 센터백의 시초, 지능형 수비수의 전범, 그리고 침착함의 화신이었다는 것. 공을 빼앗은 센터백이 그대로 몰고 미드필드를 넘어가 동료에게 내주는 장면은 1980년대 안필드에서 늘 보던 풍경이었다. 동료들 눈에는 경기 전에도 태연해 보였지만 본인은 킥오프 전의 긴장이 끔찍했다고 털어놨다.

입단 첫 시즌이 끝날 무렵 그는 이미 유러피언컵 결승의 선발이었다. 1983-84시즌에는 구단이 치른 67경기에 전부 나서 리그와 리그컵, 유러피언컵을 한꺼번에 들었다.

특히 1983-84 유러피언컵 결승전, 로마의 홈에서 AS 로마를 상대하며 120분 내내 수비진을 지휘하고, 승부차기까지 버텨낸 그날. AS 로마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며 아름다운 수비란 무엇인지 전 세계에 증명했다.

1985년 친구 달글리시가 감독이 되면서 주장 완장을 그에게 줬다. 그 시즌 리버풀은 리그와 FA컵을 함께 들었고, 두 트로피를 다 그가 들어 올렸다. 정작 그해 여름 월드컵에는 가지 못했다. 스코틀랜드 대표팀을 맡은 알렉스 퍼거슨이 그를 명단에서 뺐다. 여덟 번 리그를 우승한 수비수의 대표팀 경기가 스물여섯 번뿐인 까닭이다.

마지막 시즌인 1989-90시즌의 우승은 리버풀이 그 뒤 서른 해 동안 다시 들지 못한 리그 트로피다. 무릎이 더는 버티지 못해 1991년에 은퇴했다.

요즘 팬들에게는 해설자로 더 익숙하다. 1995-96시즌 개막전에서 어린 선수들을 내보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애스턴 빌라에 1-3으로 지자 그는 방송에서 애들을 데리고는 아무것도 우승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 애들이 그 시즌 리그와 FA컵을 다 들었다. 잉글랜드 축구가 가장 즐겨 꺼내 보는 헛다리다.

3. 버질 판데이크 - 센터백

버질 판데이크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재앙을 막는 장벽, 2020년대 최정점 수비수.

안필드(Anfield; 1892년부터 리버풀 FC의 홈구장)의 중앙에서 버질 판데이크(Virgil van Dijk; 네덜란드 수비수, 1991-)는 단 한 걸음으로 전방위의 전장을 통제한다. 특히 토트넘의 손흥민이나 맨시티의 엘링 홀란을 방어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예술 그 자체다.

2018년 1월, 사우샘프턴에서 영입된 이래 버질 판데이크는 리버풀 수비의 완성자이자 위르겐 클로프 체제의 종지부이자 시작점이었다. 7,500만 파운드, 그때까지 수비수에게 치러진 가장 큰 돈이었다. 값을 묻는 사람은 나흘 만에 사라졌다. 1월 5일 FA컵 에버턴전, 데뷔전 막판에 머리로 결승골을 넣었다. 머지사이드 더비 데뷔전에서 골을 넣은 선수는 1901년 이후 처음이었다.

2m에 가까운 키, 그러나 민첩함과 유연함으로 공격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발 놀림. 맨투맨, 공중볼, 커버링, 빌드업 그리고 리더십까지 모든 요소가 정점에 올라선 것처럼 보인다.

그는 2018-19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프리미어 리그 1패 준우승, 그리고 UEFA 올해의 선수 수상이라는 수비수로서는 유례없는 커리어를 쌓았다. 그 상을 받은 수비수는 지금까지도 그 하나다. 그해 발롱도르에서는 리오넬 메시 바로 다음이었다. 2020년에는 리그 전 경기를 1분도 빠지지 않고 뛰며 리버풀을 30년 만의 리그 우승으로 이끌어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그해 10월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골키퍼 조던 픽퍼드와 부딪혀 무릎이 망가졌다. 수술대에 올랐고 시즌이 통째로 날아갔다. 돌아온 그에게 2023년 여름 조던 헨더슨이 떠나며 남긴 주장 완장이 왔다. 주장으로 든 첫 트로피는 제 머리로 만들었다. 2024년 2월 웸블리의 리그컵 결승, 연장 118분의 헤더로 첼시를 1-0으로 눌렀다.

특히 2024-25시즌 프리미어 리그를 우승하는 과정에서 모 살라보다 더욱 빛났던 존재는 판데이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5년 4월 27일 토트넘을 5-1로 꺾고 스무 번째 우승을 확정했고, 한 달 뒤 그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살라흐가 떠난 지금도 그는 4번을 달고 안필드에 있다. 2026년 9월까지 380경기 36골이다.

앨런 한센이 품격을 가르쳤다면, 판데이크는 절대적인 존재감을 가르쳤다.

4. 엠린 휴즈 - 레프트백

엠린 휴즈 레프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단순히 레프트백을 넘어서 리버풀의 근본이자 클럽의 정체성을 선수, 주장, 인간으로서 구현한 상징적 존재 엠린 휴즈(Emlyn Walter Hughes; 잉글랜드 수비수·미드필더, 1947-2004).

열아홉 살짜리에게 적지 않은 돈을 줬다. 그 다섯 배를 줬어도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빌 샹클리가 엠린 휴즈를 두고

1967년 2월 블랙풀 FC에서 6만 5천 파운드에 이적한 이후, 안필드를 위해 665경기를 뛰며 리버풀을 클럽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우승(1977)으로 이끌었다.[4]

휴즈가 직접 남긴 이야기가 있다. 샹클리가 모는 낡은 차를 얻어 탔는데 뒤차에 받혀 등이 다 깨졌고, 경찰이 차를 세웠다. 이 차에 누가 탔는지 아느냐고 샹클리가 물었다. 경찰이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하자 샹클리는 자기 말고 옆자리를 보라고 했다. 장차 잉글랜드 주장이 될 사람을 태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휴즈는 훗날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62경기를 뛰었고 그중 23경기에서 주장이었다.

그는 포지션의 경계를 무너뜨린 선구자였다. 기본 포지션은 레프트백이었지만, 센터백, 미드필더까지 자유자재로 소화하며 축구 지능과 투지, 정신력, 그리고 팀을 위한 헌신을 증명해냈다. 처음 몇 해는 왼쪽 수비와 미드필드를 오갔고, 1973년 여름부터 센터백 자리와 주장 완장을 한꺼번에 받았다.

미친 말(Crazy Horse). 경기장 위를 미친 듯이 달렸기에 붙은 별명이지만, 사실은 광기보다 신념으로 가득 찬 질주였다. 별명이 생긴 날도 기록에 있다. 리버풀에서 뛴 다섯 번째 경기, 자기를 빠져나가려는 뉴캐슬 공격수를 럭비 하듯 끌어안고 넘어뜨렸다. 콥은 그날로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빌 샹클리의 철학을 몸으로 실현한 자였고, 리버풀이라는 클럽의 얼굴이었다. 1976-77년이라는 2년간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FA 채리티 실드 우승, 유러피언컵 우승, 유러피언 슈퍼컵 우승,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올렸던 엠린 휴즈. 1977년에는 기자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이기도 했다. 로마에서 빅 이어를 든 그는 이듬해 웸블리에서 한 번 더 들었다. 그 트로피를 두 번 들어 올린 리버풀 주장은 지금까지 그 하나다.

그를 밀어낸 사람이 바로 앞 절의 한센이다. 1979년 울버햄프턴으로 옮겼고, 리버풀에서 끝내 못 든 리그컵을 거기서 들었다. 은퇴한 뒤에는 BBC 퀴즈 프로그램의 팀장으로 온 나라가 아는 얼굴이 됐다. 2004년 11월 뇌종양으로 쉰일곱에 세상을 떠났다.

5. 필 닐 - 라이트백

필 닐 라이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FA컵 우승 4회는 리그컵 우승 4회의 오기다. 필 닐은 리버풀에서 FA컵을 들지 못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게리 네빌과 함께 잉글랜드 축구사 가장 완성형에 가까웠던 라이트백 필 닐(Philip George Neal; 잉글랜드 수비수, 1951-).

필 닐은 리버풀 유니폼을 입고 무려 650경기를 뛰었고, 그중 8개의 리그 타이틀과 4개의 유러피언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1977년부터 1984년까지 리버풀이 든 유러피언컵 네 번에 전부 나선 선수는 그 하나뿐이다. 구단이 역사상 가장 많은 트로피를 든 선수로 꼽는 이름도 그다. 채리티 실드까지 세면 스물세 개다.[5]

1974년 10월, 4부 리그 노샘프턴 타운에서 6만 6천 파운드에 영입되었을 때, 누구도 그가 리버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선수 중 한 명이 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밥 페이즐리가 감독이 되어 처음 산 선수였다. 한 달 뒤 데뷔전은 통보를 받은 지 몇 시간 만에 나간 구디슨 파크의 머지사이드 더비였다. 0-0으로 버텼다.

그는 빠르게 오른쪽 풀백 자리를 차지했고, 무려 417경기 연속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1976년 10월부터 1983년 9월까지 일곱 해 동안 한 경기도 빠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부상으로 세 경기를 쉰 뒤에는 다시 127경기를 내리 뛰었다. 구단이 그에게 붙인 말이 미스터 꾸준함이다.

팬들이 붙인 별명은 지쿠(Zico; 브라질의 10번 지쿠에서 따온 별명)다. 수비수 주제에 골을 너무 많이 넣어서였다. 통산 59골이고 그 대부분이 페널티킥이다.

필 닐은 단순히 수비 잘하는 풀백으로 이해하기는 아쉬운데 유럽 결승 무대에서 페널티킥을 침착하게 성공시키는 정신력의 사나이이기도 했다. 1977년 로마에서 3-1을 만든 쐐기골이 그의 페널티킥이다.

1983-84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전, 같은 로마의 같은 경기장. 이번에는 경기 초반 문전에서 공을 밀어 넣어 선제골을 넣었다. 1-1로 끝나 승부차기로 갔고, 첫 키커 스티브 니콜이 실축했다. 두 번째로 나선 닐이 넣었다. AS 로마와의 승부차기에서 그가 성공시킨 킥은 수많은 리버풀 팬들에게 희망과 승리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 여름 수니스가 떠나며 주장 완장이 그에게 왔다. 주장으로 보낸 단 한 시즌은 1985년 5월 헤이젤의 비극으로 끝났다. 그해 12월 볼턴 원더러스의 선수 겸 감독이 되어 떠났다.

전설적인 우승 메이커로서, 조용하지만 확실한 리더로서, 리버풀 우승기의 붉은 손잡이를 잡고 있던 사내.

6. 스티븐 제라드 - 중앙 미드필더

스티븐 제라드 중앙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이 한 문장으로 모든 서사가 요약되는 이름, 스티븐 제라드(Steven George Gerrard; 잉글랜드 미드필더·축구 감독, 1980-). 지네딘 지단은 2009년 그를 두고 주위 선수들에게 자신감과 믿음을 불어넣는 선수라고, 그런 존재감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고 타고나는 것이라고 했다.[6]

리버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장. 눈부심보단 상처, 찬란함보단 헌신의 커리어. 트로피를 넘어, 전설로 남은 미드필더.

아홉 살에 동네 팀 휘스턴 주니어스에서 뛰다 리버풀의 눈에 띄었다. 그 무렵 그의 집에는 지워지지 않는 일이 있었다. 1989년 힐스버러에서 죽은 아흔일곱 명 가운데 가장 어린 희생자, 열 살의 존폴 길훌리가 그의 사촌 형이다. 제라드는 여덟 살이었다. 훗날 그가 낸 자서전은 나는 존폴을 위해 뛴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1998년 11월 29일 블랙번 로버스전의 교체 출전이 첫 경기다. 2003년 가을 주장 완장을 받았고, 구단 역사에서 누구보다 오래 그 완장을 찼다.

이스탄불의 기적. 그 밤은 겨울에 한 번 예고됐다. 2004년 12월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 탈락 직전까지 몰린 올림피아코스전의 86분에 그가 콥 앞 골문으로 때려 넣은 중거리 슛이 없었다면 결승도 없었다.

2004-05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안첼로티 감독의 AC 밀란에게 전반 3-0으로 끌려가던 리버풀. 그러나 후반 54분, 제라드의 한 골이 기적의 시작이었고, 그는 머리로 골을 넣은 뒤, 두 손을 들고 팬들을 향해 외쳤다.

2005년 이스탄불 결승에서 머리로 공을 받아 넣는 스티븐 제라드와 그가 하프타임 라커룸에서 한 말을 옮긴 글
2005년 5월 25일 이스탄불, 54분의 헤더. 아래 글은 그날 하프타임 라커룸에서 주장 제라드가 동료들에게 한 말이다.

그리고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2분 뒤 블라디미르 슈미체르가 두 번째 골을 넣었고, 다시 4분 뒤 문전으로 뛰어든 제라드가 젠나로 가투소에게 걸려 넘어져 페널티킥을 얻었다. 샤비 알론소의 킥은 막혔지만 튀어나온 공을 알론소가 다시 밀어 넣었다. 6분 만에 3-3. 그는 승부차기 끝에 빅 이어를 들어 올렸고, 그 밤 이후 제라드는 리버풀 그 자체라는 신화가 되었다.

그 여름 그는 하마터면 떠날 뻔했다. 결승 직후에는 이런 밤을 보내고 어떻게 떠나느냐고 했지만 재계약 협상이 틀어졌고, 7월 5일 구단은 그가 첼시로 간다고 받아들였다. 하루 만에 그는 마음을 돌려 새 계약서에 서명했다.

21세기 완성형 미드필더. 710경기 186골은 미드필더로는 기이한 기록이고, 중거리 슛은 잉글랜드 역사상 최강이었으며, 빅 매치에서 유독 강한 심장을 가졌다. FA컵, 리그컵, UEFA 챔피언스 리그, UEFA컵을 모두 우승했고, 그 네 대회의 결승에서 전부 골을 넣은 선수는 그밖에 없다.

결승상대와 결과골
2001 UEFA컵알라베스 5-4, 연장1
2003 리그컵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01
2005 UEFA 챔피언스 리그AC 밀란 3-3, 승부차기 승1
2006 FA컵웨스트햄 3-3, 승부차기 승2

2006년 FA컵 결승은 아예 제라드 결승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2-3으로 뒤진 추가시간, 다리에 쥐가 난 채로 35야드 거리에서 때린 발리가 골문 구석에 꽂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는 늘 무너져가는 팀을 다시 일으켰다는 문장이다. 제라드는 클럽이 무너질 때 가장 먼저 뛰어든 선장이었고, 승리보다 명예와 의리를 먼저 생각했던 리버풀의 영혼이었다.

끝내 들지 못한 트로피가 하나 있다. 리그다. 가장 가까이 간 2014년 4월 27일 첼시전, 수비 진영에서 패스를 받던 그가 미끄러졌고 뎀바 바가 그 공을 몰고 가 넣었다. 리버풀은 0-2로 졌고 우승은 맨체스터 시티에 넘어갔다. 무너져가는 팀을 일으키던 사람이 딱 한 번 넘어진 자리가 하필 거기였다.

맨 유나이티드와의 혈투, 첼시를 향한 복수극, 그 어떤 경기에서도 제라드는 늘 붉은 심장으로 뛰었다.

7. 이언 캘러한 - 레프트 미드필더

이언 캘러한 레프트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이언 캘러한(Ian Robert Callaghan; 잉글랜드 미드필더, 1942-). 리버풀에서 857경기를 뛴 사내.[7]

그의 이름은 클럽의 심장박동과 같다. 리버풀이 하부 리그에 머물던 시절부터, 유러피언컵 우승까지 그 모든 순간에 이언 캘러한이 머물렀다. 2부 리그의 평범한 팀이 유럽 정상에 오르기까지 그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걸은 선수는 그 하나뿐이다.

계약금 10파운드를 받고 들어온 동네 소년이었다. 2군에서 겨우 네 경기를 뛰고 1960년 4월 16일 브리스틀 로버스전에 데뷔했다. 열여덟 번째 생일을 엿새 지난 날이었고, 대신 선 자리가 하필 리버풀의 우상 빌리 리델의 자리였다. 4-0으로 끝난 경기 뒤 양 팀 선수와 관중, 주심까지 박수로 그를 들여보냈다.

한 클럽, 열여덟 해, 무수한 전설 속 중심. 리그 우승 5회, 심지어 2부 리그도 우승, FA컵 우승 2회, 유러피언컵 우승 2회, UEFA컵 우승 2회, FIFA 월드컵 우승 1회.

그는 1960년에 데뷔했고, 1977년 로마에서 빅 이어(Coupe des Clubs Champions Européens; 유러피언컵 트로피의 정식 이름)를 들어 올렸다. 구단이 처음 나간 유럽 대항전 경기를 뛴 선수가 열세 해 뒤 구단의 첫 유럽 정상에도 서 있었다. 이듬해 웸블리의 두 번째 우승 때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말 그대로, 한 명의 선수가 리버풀의 모든 트로피를 품은 시대의 증인이라는 말이다.

경력은 둘로 나뉜다. 앞 절반은 날개였다. 로저 헌트와 이언 세인트 존의 머리와 발에 공을 올려 주던 사람이다. 1970-71시즌 무릎 연골 수술로 긴 시간을 쉬면서 끝났다는 말이 돌았는데, 돌아온 그는 중앙 미드필더가 되어 있었다. 뒤 절반이 더 좋았다. 1973-74시즌에 생애 하나뿐인 해트트릭을 했고, 리델이 갖고 있던 구단 최다 출전 기록을 넘었으며, FA컵을 들었고, 리버풀 선수로는 처음으로 기자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가 됐다.

고요한 품격, 우아한 플레이, 영원한 충성. 이언 캘러한은 대형 선수들과는 달랐다. 그는 스포트라이트보다 유니폼을 선택했고, 영웅이라는 찬사보다 리버풀이라는 이름에 무게를 실었다. 857경기를 뛰는 동안 경고를 받은 것이 딱 한 번이다. 그것도 선수 생활 막바지인 1978년 리그컵 결승 재경기에서였다.

그의 플레이는 침착하면서도 정교했고, 전투적이면서도 품격이 있었으며, 언제나 팀을 먼저 생각했다.

잉글랜드 대표팀과는 인연이 묘했다. 1966년 월드컵 조별 리그 프랑스전을 뛴 뒤로 부름이 없다가 1977년 서른다섯에 다시 뽑혔다. 두 경기 사이가 11년 49일, 잉글랜드 대표팀 역사에서 가장 긴 공백이다. 1966년의 우승 메달은 2009년에야 총리 관저에서 받았다.

이언 캘러한은 리버풀 최다 출장 1위로 기억된다. 이는 단순한 통계라고 정의하기에 심심하다. 그의 무릎, 심장, 땀이 만든 시간의 문장이다.

8. 무함마드 살라흐 - 라이트 윙

무함마드 살라흐 라이트 윙 상세 정보 디자인

이집트의 왕, 리버풀의 검붉은 불꽃.

무함마드 살라흐(محمد صلاح حامد محروس غالى; 이집트 공격수, 1992-). 2017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많은 팬들은 그저 윙어 한 명이 추가되었다고 생각했다. 첼시에서 한 번 실패하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던 선수였으니까. AS 로마에 치른 3,690만 파운드는 당시 구단 최고 이적료였다.[8]

하지만 그 해 8월부터 안필드의 공기가 바뀌었다. 볼을 잡을 때마다 수천 명이 일어섰고, 그가 달릴 때마다 전설이 하나씩 태어났다. 첫 시즌에 모든 대회 마흔네 골. 리그 서른두 골은 당시 서른여덟 경기 체제의 최다 골 기록이었다. 그해 12월 첫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감아 넣은 골로 FIFA 푸슈카시상도 받았다.

최초, 최고, 최다라는 언어는 살라흐의 기록을 상징한다.

출전
442경기2017-2026
득점
257골러시, 헌트 다음 구단 3위
도움
120개아홉 시즌
골든 부트
4회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3회 출전, 2018-19시즌 우승 주역. 두 결승의 사이가 그를 설명한다. 2018년 키이우에서는 30분 만에 세르히오 라모스와 엉켜 넘어지며 어깨를 다쳤고 울면서 걸어 나갔다. 열두 달 뒤 마드리드에서는 경기 시작 106초 만에 페널티킥을 차 넣었다. 그 2-0으로 리버풀은 여섯 번째 빅 이어를 들었다.

살라흐를 단순한 스프린터라고 정의하는가? 정확한 위치 선정, 지능적인 오프 더 볼 무브, 왼발의 감아 차기는 리버풀 공격의 교과서가 되었다. 일곱 시즌 연속으로 스무 골을 넘긴 리버풀 선수는 그가 처음이다. 이언 러시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그는 화려함을 경계하고, 겸손을 무기로 삼았으나 상대 수비에게 있어서는 화려한 어떤 사내가 달려오는 모습과 같다. 때문에 그는 프리미어 리그 수비수들에게 악몽이라는 단어로 불리기도 한다. 가장 많이 당한 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다. 2023년 3월 7-0으로 이긴 날의 두 골로 로비 파울러를 넘어 구단의 프리미어 리그 최다 득점자가 됐다.

가장 좋은 시즌은 뒤에 왔다. 서른둘에 맞은 2024-25시즌, 쉰두 경기에서 서른네 골을 넣고 스물세 골을 도와 두 번째 리그 트로피를 들었다. 그 시즌 후반에 고든 호지슨을 넘어 구단 역대 득점 3위에 올랐다.

그리고 이 명단을 고른 뒤에 그의 리버풀 이야기가 끝났다. 2026년 3월 그는 시즌이 끝나면 떠나겠다고 알렸다. 마지막 시즌에도 아프리카 선수로는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 쉰 골을 채웠고, 마지막 경기에서 기록한 도움으로 제라드가 갖고 있던 구단의 프리미어 리그 최다 도움 기록까지 넘었다.

토레스, 수아레스를 뛰어넘어 리버풀 역대 외국인 최다 득점자(257골). 이언 러시, 케니 달글리시 경, 스티븐 제라드와 함께 리버풀을 대표하는 선수. 위 두 가지 논리는 모 살라가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 중 한 명이라는 명제를 참으로 만든다.

9. 케빈 키건 - 세컨드 스트라이커

케빈 키건 세컨드 스트라이커 상세 정보 디자인

영국(리버풀 FC), 독일 연방(함부르크 SV)에서 팀을 유럽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자 케빈 키건(Joseph Kevin Keegan; 잉글랜드 공격수·축구 감독, 1951-2026).

영국에서는 바비 찰턴 경, 독일에서는 루메니게와 시몬센, 유럽에서는 플라티니, 세계에서는 마라도나, 지쿠와 라이벌리를 형성했던 위대한 리버풀의 킹 케브.

마이티 마우스, 리버풀의 첫 슈퍼스타. 그는 키가 크지 않았다. 근육질도 아니었고, 거대한 언변으로 경기장을 압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공이 발에 닿는 순간 그라운드는 케빈 키건의 세상이 되었다.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던 공격수. 20세기 축구를 잘 모르는 팬들에게도 케빈 키건의 경기 영상만큼은 구독을 권한다. 보는 맛이 있는 스타.. 전형적인 영국 축구 선수와 궤를 달리하는 것이 매우 매력적이다.

전 세계가 주목한 리버풀의 첫 번째 이름. 1971년,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에서 무명의 젊은이가 리버풀에 입단했을 때, 그가 곧 리버풀의 첫 월드클래스가 될 것이라 예측한 팬이 몇이나 되랴. 3만 3천 파운드짜리 스무 살이었고, 원래는 공격수로 산 선수도 아니었다. 무릎 수술을 받은 이언 캘러한의 자리가 불안해서 데려온 미드필더였다. 프리시즌에 존 토샥 옆에 세워 보니 거기가 제자리였다.[9]

1971년 8월 14일 노팅엄 포리스트와의 데뷔전에서 12분 만에 골을 넣었다. 입단할 때만 해도 제 실력을 믿지 못하던 청년을 샹클리가 그 자리에서 나라 최고의 선수로 빚었다. 샹클리는 훗날 자서전의 한 장을 통째로 그에게 내줬다.

결승에서 넣는 사람이었다. 1973년 UEFA컵 결승 묀헨글라트바흐전에서 두 골, 1974년 FA컵 결승 뉴캐슬전에서 두 골, 1976년 UEFA컵 결승에서 또 한 골.

성질도 있었다. 1974년 채리티 실드에서 리즈 유나이티드의 빌리 브렘너와 주먹을 주고받았고 둘 다 퇴장당했다. 채리티 실드에서 나온 첫 퇴장이었다. 둘은 걸어 나가며 유니폼을 벗어 던졌다.

1976년 여름 그는 한 시즌만 더 뛰고 함부르크로 가겠다고 미리 알렸다. 콥은 배신감을 느꼈고 마지막 시즌은 내내 불편했다. 그 앙금을 한 경기로 씻었다. 1977년 로마의 유러피언컵 결승, 그를 전담한 베르티 포크츠를 90분 내내 끌고 다니다 막판에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리버풀의 첫 빅 이어가 그의 마지막 경기다.

리버풀에서 323경기 100골을 남기며, 두 차례의 UEFA컵 우승과 한차례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선사했던 케빈 키건은 50만 파운드에 독일 연방의 함부르크 SV로 이적해 1978년과 1979년에 걸쳐 2년 연속 발롱도르 위너가 되었다.

마라도나 이전, 플라티니, 루메니게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케빈 키건은 1970년대 후반 유럽 축구의 중심이었고, 그의 플레이는 영국 축구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던 시도였다.

킹 케빈, 그 이름은 영국 축구 전체의 페이지를 넘긴 인물이었다. 2026년 7월 20일 그는 일흔다섯으로 세상을 떠났다.

10. 케니 달글리시 경 - 세컨드 스트라이커

케니 달글리시 경 세컨드 스트라이커 상세 정보 디자인

선수와 감독으로 동시에 전설이 되었으며, 구단의 최전성기를 대장으로서 이끈 자.

지배자가 아닌, 구원자. 1977년, 케빈 키건의 후계자로 셀틱에서 이적한 이 스코틀랜드인은 단순한 대체재가 아니었다. 515경기 172골. 풋볼 리그 6회 우승. 유러피언컵 3회 우승. 총 20여 개 트로피 수집.[1]

케니 달글리시는 단지 골잡이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플레이메이커도 아니었다. 이 부분에서는 여타 월드클래스 선수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아쉽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 위치했던 달글리시였는데 그의 패스는 마치 시였고, 움직임은 악보였으며, 그의 골은 붉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과 같았다.

그 사이의 자리가 무엇이었는지는 숫자 대신 짝이 말해 준다. 1970년대 말에는 데이비드 존슨이, 1980년대에는 이언 러시가 그의 패스를 받아먹었다. 도움을 세던 시절이었다면 모두의 판타지 팀 첫 줄에 그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라고 구단은 적는다. 1983년에는 선수들이 뽑은 상과 기자들이 뽑은 상을 한꺼번에 받았고, 그해 발롱도르 투표에서 2위를 했다.

골을 넣고 나면 늘 같은 동작이었다. 휙 돌아서며 두 팔을 번쩍 들고 활짝 웃는 것. 콥이 가장 먼저 부른 이름이 그의 이름이었고, 침대 시트로 만든 현수막이 가장 많이 걸린 이름도 그의 이름이었다.

스코틀랜드 대표팀에서도 왕이다. 102경기는 지금도 최다 출전 기록이고, 30골은 데니스 로와 함께 최다 득점 기록이다.

리버풀의 신. 비극 속에서도 가장 리버풀이었던 사람. 1989년, 힐스버러 참사.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유가족을 위로하고 붕괴 직전의 클럽을 온몸으로 떠받쳤던 사람.

1989년 힐스버러 경기장에서 굳은 얼굴로 경찰과 이야기하는 케니 달글리시
1989년 4월 15일 힐스버러. 재난의 전모가 분명해지자 암울한 표정으로 경찰과 대화하는 케니 달글리시.

그는 단순한 축구인을 넘어 리버풀에게는 하나의 종교적인 존재로 받들어진다. 달글리시는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던 1985년부터도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는데 선수로서도 유럽을 제패했으며, 무너진 도시의 영혼을 다독였고, 전설 그 자체로 숨 쉬었다.

그는 영국 왕실을 통해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리버풀에서는 영원한 왕(King Kenny)으로 남아있다.

11. 이언 러시 - 센터 포워드

이언 러시 센터 포워드 상세 정보 디자인

골은 사라지지만, 이름은 계속된다.

21세기 대미디어 시대에 도래했음에도 글 몇 자, 사진 몇 장, 영상 몇 개에 대한 기억은 늘 흐릿해진다. 하지만 무의식 속에 각인된 기억은 평생을 흐른다. 경영학 마케팅 이론이 보통 이렇게 시작된다.

리버풀에는 수많은 골잡이가 있었고, 그중 몇은 유럽을 호령했고, 또 몇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상징이 되었지만 이언 러시(Ian James Rush; 웨일스 공격수, 1961-)는 그 모든 기록을 갈아치운 남자였다.

346골. 리버풀 역대 최다 득점자. 단 하나의 숫자로 그의 이름은 불멸이 되었다. 시대가 바뀌고 축구의 언어가 변해도 이 기록은 여전히 안필드의 알파요 오메가로 남는다.[10]

출발은 초라했다. 1980년 체스터에서 10대 선수 최고 이적료인 30만 파운드에 왔는데 첫 시즌 아홉 경기에서 한 골도 넣지 못했다. 뛰지 못한 그는 불만이 컸지만 페이즐리는 그를 팔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다음 시즌 그는 마흔아홉 경기에서 서른 골을 넣었다.

달글리시의 동반자, 안필드의 그림자 사신. 유령이라는 별명은 수비수 등 뒤로 소리 없이 돌아 들어가는 움직임에서 왔다. 매 경기가 결정의 미학이었다.

그는 화려한 퍼포머도 아니었고, 드리블 마스터도 아니었다. 그러나 기회가 오면 반드시 골로 바꾸는 스트라이커의 본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팬들은 이런 장면을 보며 러시 스타일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공이 없을 때도 일했다. 쉬지 않고 뛰어 상대 수비를 몰아붙이던 그를 구단은 팀의 첫 번째 수비수였다고 적는다.

1980년대 리버풀 최강기를 이끈 달글리시와 러시 듀오는 킹과 암살자라 불릴 만큼 완벽했다. 달글리시가 상대를 끌어당기면, 러시는 그 틈을 뚫고 골문을 찔렀다. 절정은 1983-84시즌이다. 예순다섯 경기 마흔일곱 골. 그해 유럽의 어느 프로 구단에도 그보다 많이 넣은 선수가 없어 유러피언 골든 부트를 받았고, 리버풀은 리그와 리그컵, 유러피언컵을 한꺼번에 들었다. 로마의 승부차기에서는 네 번째 키커로 나와 넣었다.

가장 많이 당한 팀은 강 건너 에버턴이다. 1982년 11월 구디슨 파크에서 혼자 네 골을 넣어 5-0을 만들었고, 그날은 콥의 응원가 가사 한 절이 됐다. 1986년과 1989년 두 번의 머지사이드 FA컵 결승에서도 두 골씩을 넣었다. 에버턴을 상대로 넣은 골이 모두 스물다섯이다. FA컵 결승 통산 다섯 골과 리그컵 통산 득점도 대회 최다 기록이다.

그가 골을 넣으면 리버풀은 지지 않았다. 그 믿음은 1987년 리그컵 결승에서 아스널에 질 때까지 144경기 동안 깨지지 않았다.

유벤투스에서 돌아왔던 1988년. 1987년 여름 영국 최고 이적료 320만 파운드에 토리노로 갔지만 세리에 A 스물아홉 경기에서 여덟 골에 그쳤고, 한 시즌 만에 돌아왔다. 이탈리아는 외국에 사는 것 같았다고 했다는 유명한 말이 따라다니는데 본인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다시 리버풀로 돌아온 이언 러시는 금메달보다 붉은 셔츠를 선택했다.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충성의 교본으로 남는다.

1992년 10월 올드 트래퍼드에서 로저 헌트를 넘어 구단 최다 득점자가 됐다. 주장 완장을 차고 1995년 리그컵을 들었고, 후계자 로비 파울러를 곁에서 가르쳤으며, 1996년 5월 맨체스터 시티전에서 346번째이자 마지막 골을 넣었다.

이언 러시는 리버풀이라는 클럽의 골격 중 하나이며, 그로 인해 안필드에 붉은 노래가 울려 퍼졌을 때 더욱 아름답게 들리기도 한다. 그는 현역 시절 왕성하게 인터뷰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말 대신 골과 행동으로, 역사로 본인만의 서사를 쌓아가던 존재였다.

킹과 암살자.172골과 346골이 한 팀의 맨 앞에 나란히 섰다.

마침내, 한 경기장에 선 열한 명

리버풀 FC 역대 베스트 11 표제 4-3-3 대형으로 배치한 리버풀 FC 역대 베스트 11 리버풀 FC 역대 베스트 11 후보 15인 편집물
표제, 열한 명의 대형, 후보 15인. 1939년에 입단한 빌리 리델부터 지금도 뛰는 판데이크와 알리송까지 스물여섯 명이 한 흐름에 들어간다.

이제는 반다이크, 살라도 합류할 만큼 많이 왔다.

이 명단은 리버풀 FC의 역사에 침투한 26인의 명단에 대한 헌사이다.

클레멘스가 뒤를 닫고, 한센과 판데이크가 가운데를 나눈다. 닐이 오른쪽 선을 일곱 해 동안 한 번도 비우지 않는 사이 왼쪽에서는 휴즈가 미친 말처럼 오르내린다. 캘러한이 공을 받아 제라드에게 넘기면 제라드가 반대편의 살라흐를 향해 길게 연다. 키건이 수비를 끌고 다니며 틈을 벌리고, 달글리시가 그 틈으로 공을 밀어 넣고, 러시가 유령처럼 나타나 끝낸다.

구단이 든 유러피언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 여섯 번에 전부 이 열한 명 중 누군가가 뛰었다. 스무 번의 리그 우승 가운데 1964년 이후의 열다섯 번도 그렇다. 캘러한이 열고 판데이크와 살라흐가 닫는 예순 해 남짓이다.

You'll Never Walk Alone.붉은 물결 속에서 영원히 노래될 스물여섯 개의 이름.

이미지 밖에서 다시 읽는 후보 15인

안필드의 이름은 열한 자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러시 다음으로 많이 넣은 로저 헌트와, 캘러한 다음으로 많이 뛴 제이미 캐러거도 이 열다섯 안에 있다. 편집물 안의 이름을 검색 가능한 텍스트로 아래에 다시 적는다.

  • 브루스 그로벨라Bruce Grobbelaar · 골키퍼

    1981-1994년 628경기. 1984년 로마 승부차기에서 다리를 후들거려 상대 키커를 흔든 골키퍼다.

  • 알리송 베케르Alisson Becker · 골키퍼

    2018년부터 339경기 1골. 득점 칸에 숫자가 적힌 골키퍼이고 지금도 골문을 지킨다.

  • 필 톰슨Phil Thompson · 센터백

    1972-1985년 477경기 13골. 1978년 결승 막판 골라인 위에서 공을 걷어냈다.

  • 제이미 캐러거Jamie Carragher · 센터백

    1996-2013년 737경기 5골. 캘러한 다음으로 많이 뛴 리버풀 선수다.

  • 앤디 로버트슨Andy Robertson · 레프트백

    2017-2026년 378경기 14골. 아홉 해 동안 왼쪽을 맡은 스코틀랜드 풀백이다.

  •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Trent Alexander-Arnold · 라이트백

    2016-2025년 354경기 23골. 스무 번째 우승을 들고 레알 마드리드로 떠났다.

  • 테리 맥더모트Terry McDermott · 수비형 미드필더

    1973-1982년 329경기 81골. 1977년 로마 결승의 첫 골을 넣었다.

  • 그레엄 수니스Graeme Souness · 수비형 미드필더

    1978-1984년 359경기 55골. 달글리시의 웸블리 결승골을 만든 패스의 주인이고 1984년 우승의 주장이다.

  • 조던 헨더슨Jordan Henderson · 중앙 미드필더

    2011-2023년 492경기 33골. 판데이크에게 주장 완장을 넘겨준 사람이다.

  • 빌리 리델Billy Liddell · 레프트 윙

    1939-1961년 534경기 228골. 캘러한이 데뷔전에서 대신 섰던 리버풀의 우상이다.

  • 존 반스John Barnes · 레프트 윙

    1987-1997년 407경기 108골. 1988년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다.

  • 사디오 마네Sadio Mané · 레프트 윙

    2016-2022년 269경기 120골. 살라흐, 피르미누와 함께 클로프의 스리톱을 이뤘다.

  • 스티브 하이웨이Steve Heighway · 라이트 윙

    1970-1981년 475경기 76골. 1978년 결승에 교체로 들어가 흐름을 바꿨다.

  • 로저 헌트Roger Hunt · 센터 포워드

    1958-1969년 492경기 285골. 러시가 넘기 전까지 구단 최다 득점자였던 월드컵 우승 공격수다.

  • 루이스 수아레스Luis Suárez · 센터 포워드

    2011-2014년 133경기 82골. 세 시즌 반 만에 여든두 골을 넣고 떠났다.

기록을 확인한 곳

  1. 케니 달글리시 — Liverpool FC 「Kenny Dalglish」. 1966년의 입단 테스트, 1977년 8월 44만 파운드, 데뷔 7분의 골과 첫 시즌 31골, 515경기 172골, 1985-86시즌 더블과 첼시전 결승골, 1983년의 수상, 스코틀랜드 대표팀 102경기 30골, 1989년 4월 15일과 장례식, 1991년 2월 사임, 2009년과 2011년의 복귀, 스탠드와 기사 작위.
  2. 레이 클레멘스 — Liverpool FC 「Ray Clemence」, LFChistory.net 「Ray Clemence」. 665경기, 1967년 1만 8천 파운드와 전보, 열한 시즌의 리그 결장 여섯 번, 1973년 하인케스의 페널티킥, 1978-79시즌 16실점과 무실점 28경기, 1981년 결승과 토트넘 이적, 대표팀 61경기, 2020년 11월 15일 별세.
  3. 앨런 한센 — Liverpool FC 「Alan Hansen」, LFChistory.net 「Alan Hansen」. 1977년 5월 10만 파운드, 620경기, 리그 8회·유러피언컵 3회·FA컵 2회·리그컵 4회, 골프와 배구·스쿼시, 1983-84시즌 67경기, 1985-86시즌의 주장, 스코틀랜드 대표팀 26경기와 1986년 월드컵 제외, 1995년 8월의 방송 발언.
  4. 엠린 휴즈 — Liverpool FC 「Emlyn Hughes」, LFChistory.net 「Emlyn Hughes」. 1967년 2월 6만 5천 파운드, 샹클리의 말과 경찰 일화, 별명의 유래, 1973년의 센터백 전환과 주장, 665경기, 1977년 FWA 올해의 선수, 대표팀 62경기와 주장 23경기, 울버햄프턴의 리그컵, 2004년 11월 9일 별세.
  5. 필 닐 — Liverpool FC 「Phil Neal」, LFChistory.net 「Phil Neal」, Liverpool FC 「50 years ago: The story begins for Liverpool FC's most decorated player」. 구단 최다 트로피, 1974년 10월 6만 6천 파운드와 페이즐리의 첫 영입, 구디슨 파크의 데뷔전, 417경기 연속 출전, 650경기 59골, 별명 지쿠, 유러피언컵 네 번 출전, 리그 8회와 리그컵 4회, 1984-85시즌의 주장.
  6. 스티븐 제라드 — Liverpool FC 「Steven Gerrard」. 휘스턴 주니어스, 존폴 길훌리, 1998년 11월 29일 데뷔, 2003년의 주장 선임, 올림피아코스전 86분, 네 대회 결승의 골, 2005년 7월의 재계약, 2006년 FA컵 결승, 2014년 4월 27일 첼시전, 710경기 186골, 지단의 2009년 발언.
  7. 이언 캘러한 — Liverpool FC 「Ian Callaghan」. 857경기, 계약금 10파운드, 1960년 4월 16일 데뷔전의 박수, 연골 수술과 중앙 미드필더 전환, 1973-74시즌, 단 한 번의 경고, 1977년 결승 출전과 1978년 결승의 벤치, 대표팀의 11년 49일, 2009년에 받은 월드컵 메달.
  8. 무함마드 살라흐 — Liverpool FC 「Mohamed Salah」. 3,690만 파운드, 첫 시즌 44골과 리그 32골, 푸슈카시상, 2018년 결승의 부상과 2019년 결승 106초의 페널티킥, 일곱 시즌 연속 20골, 2023년 3월의 구단 프리미어 리그 최다 득점, 2024-25시즌 34골 23도움, 2026년 3월의 발표와 마지막 경기, 442경기 257골 120도움.
  9. 케빈 키건 — Liverpool FC 「Kevin Keegan」. 3만 3천 파운드, 캘러한의 대안으로 온 미드필더, 1971년 8월 14일 데뷔 12분의 골, 세 번의 결승 득점, 1974년 채리티 실드의 퇴장, 1977년 결승, 323경기 100골, 50만 파운드와 발롱도르 2회, 2026년 7월 20일 별세.
  10. 이언 러시 — Liverpool FC 「Ian Rush」, LFChistory.net 「Ian Rush」. 30만 파운드, 첫 시즌 무득점, 660경기 346골, 1983-84시즌 47골과 유러피언 골든 부트, 에버턴전 25골과 1982년 11월의 네 골, FA컵 결승 다섯 골, 144경기, 유벤투스 이적과 1988년 8월 18일 복귀, 1992년 10월의 기록 경신, 별명의 유래.
  11. 디자인의 숫자는 2025년 5월에 적은 것이라 지금과 다른 곳이 있다. 살라흐 398경기 244골 113도움은 최종 442경기 257골 120도움, 판데이크 317경기 28골은 2026년 9월 기준 380경기 36골이다. 집계 기준이 달라 한두 경기씩 다른 것도 있다. 클레멘스 663경기, 한센 615경기, 닐 649경기, 캘러한 852경기, 키건 322경기, 러시 654경기 339골은 구단과 LFChistory.net 기준으로 각각 665경기, 620경기, 650경기, 857경기, 323경기, 660경기 346골이다. 러시 디자인의 1980-86년은 1980-87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