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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널 FC 문장

아스널 FC

The Arsenal Football Club
THE ARSENAL FOOTBALL CLUB · THE GUNNERS 1886-2026

하이버리와 에미레이트 · 리그 우승 14회 · FA컵 14회 ·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회

구너스(Gooners; 아스널 팬을 부르는 이름)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있다. 아스널 FC 역대 최고의 열한 명과 후보 열다섯, 스물여섯 개의 이름을 골랐다.

하늘을 향해 날아간 붉은 탄환

아스널 FC의 별명인 거너스(The Gunners; 포병들)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산업혁명의 포연 속에서 시작된, 런던 북부의 노동자적 정체성을 품은 찬가다. 1886년 10월 템스강 남쪽 울리치의 왕립 병기창 노동자들이 다이얼 스퀘어라는 이름으로 만든 팀이 1913년 강을 건너 하이버리에 자리를 잡았고, 문장 한가운데의 대포는 그 출발을 지금까지 붙들고 있다.

1930년대 허버트 채프먼 감독의 영국 혁명, 1990년대 조지 그레이엄 감독의 실리, 21세기 아르센 벵거 감독의 최전성기까지. 아스널은 늘 변화를 선도하면서도 고유의 품격을 지켜낸 클럽이었다.

이 콘텐츠는 그 아스널이라는 이름 아래 역사상 가장 위대한 26인의 선수들을 선정한 기록이다. 명단은 2025년에 골랐다. 이듬해인 2026년 5월 19일, 아스널은 2003-04시즌 이후 22년 만에 리그 우승을 되찾아 통산 열네 번째 트로피를 들었다. 그 스물두 해의 공백이 시작되기 전까지를 만든 사람들이 이 글의 주인공이다.

채프먼, 그레이엄, 벵거: 아스널을 세 번 만든 감독

아스널의 역사는 선수보다 감독의 이름으로 먼저 나뉜다. 구단이 든 리그 트로피 열네 개 가운데 일곱 개가 이 세 사람의 손을 거쳤고, 아래 열한 명 가운데 열 명이 셋 중 누군가의 선수였다.

대리석 벽감 안에 놓인 허버트 채프먼의 청동 흉상
1925-1934허버트 채프먼Herbert ChapmanWM과 흰 소매, 지하철역 이름까지 바꾼 사람. 리그 2회, FA컵 1회.
1970년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공항에 선 아스널 선수 시절의 조지 그레이엄
1986-1995조지 그레이엄George Graham네 명의 수비수와 1-0. 리그 2회, 컵 대회 4회.
2009년 어두운 경기장을 배경으로 옆을 바라보는 아르센 벵거
1996-2018아르센 벵거Arsène Wenger1,235경기, 한 번도 지지 않은 서른여덟 경기. 리그 3회, FA컵 7회.

첫 번째는 허버트 채프먼(Herbert Chapman; 잉글랜드 축구 감독, 1878-1934)이다. 1925년 6월 하이버리에 온 그는 그해 바뀐 오프사이드 규칙에 맞춰 센터 하프를 수비선으로 내린 WM 포메이션을 세웠고, 1930년 FA컵으로 구단의 첫 메이저 트로피를, 1930-31시즌에는 첫 리그 우승을 가져왔다. 붉은 몸통에 흰 소매를 단 유니폼이 처음 나온 것이 1933년 3월 4일이고, 경기장 앞 지하철역 길레스피 로드가 아스널역으로 이름을 바꾼 것도 그의 시대다. 그는 1934년 1월 6일, 시즌 도중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만든 팀은 그해와 이듬해까지 내리 우승해 리그 3연패를 완성했고, 조각가 제이컵 엡스타인이 빚은 그의 청동 흉상은 하이버리의 대리석 홀에 놓였다.

두 번째는 조지 그레이엄(George Graham; 스코틀랜드 축구선수·감독, 1944-)이다. 1971년 더블을 이룬 아스널의 선수였던 그는 1986년 5월 감독으로 돌아와, 열여덟 해 동안 리그 우승이 없던 구단에 두 번의 우승을 안겼다. 첫 번째는 1989년 5월 26일 안필드에서 나왔다. 두 골 차로 이겨야만 우승하는 마지막 경기에서 마이클 토머스가 추가시간에 2-0을 만들었다. 두 번째인 1990-91시즌에는 서른여덟 경기에서 단 한 번 졌고 열여덟 골만 내줬다. 딕슨과 애덤스, 스티브 볼드, 나이절 윈터번의 포백이 그의 축구였고, 1994년 코펜하겐에서 파르마를 1-0으로 꺾고 든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이 그 축구의 마지막 트로피였다.

세 번째는 아르센 벵거(Arsène Charles Ernest Wenger; 프랑스 축구 감독, 1949-)다. 1996년 10월 1일부터 2018년 5월 13일까지 1,235경기를 지휘하며 리그를 세 번, FA컵을 일곱 번 들었다. 1997-98시즌과 2001-02시즌에는 리그와 FA컵을 함께 들었고, 2003-04시즌에는 서른여덟 경기를 26승 12무로 마쳐 한 번도 지지 않고 우승했다. 2003년 5월부터 2004년 10월까지 이어진 리그 49경기 무패도 그의 팀이 세운 기록이다.

채프먼의 선수가 둘, 그레이엄의 선수가 넷, 벵거의 선수가 일곱이다. 시먼과 딕슨, 애덤스는 그레이엄이 세운 수비를 벵거에게 그대로 넘겨준 사람들이라 양쪽에서 한 번씩 세었다. 세 감독 누구의 시대에도 들지 않는 이름은 리엄 브래디 하나뿐이다.

아스널은 세 번 다시 태어났고,세 번 모두 한 사람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선정 전술: 두 시대의 수비 위에 얹은 4-4-2

대형은 4-4-2다. 골문에는 시먼이 서고, 그 앞 네 명은 오른쪽부터 딕슨, 오리어리, 애덤스, 햅굿이다. 시먼과 딕슨, 애덤스는 1990-91시즌 열여덟 골만 내준 수비의 실제 구성원이고, 오리어리는 그 팀의 벤치와 수비선을 오가던 마지막 시절을 함께 보냈다. 왼쪽의 햅굿만 60년을 건너 1930년대에서 온다. 골문부터 한 자리씩 부르고, 열한 명이 함께 선 대형은 글 끝에서 펼친다.

중원은 비에라가 한 칸 뒤에서 공을 빼앗고 브래디가 한 칸 앞에서 방향을 정한다. 바깥은 왼쪽에 배스틴, 오른쪽에 피레스다. 최전방은 베르흐캄프가 반 칸 내려와 받고 앙리가 그 앞을 달린다. 비에라와 피레스, 베르흐캄프, 앙리는 2003-04시즌 무패 우승의 주전 넷이라, 이 대형의 척추는 그 시즌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다.

1. 데이비드 시먼 - 골키퍼

데이비드 시먼 골키퍼 상세 정보 디자인

토트넘 홋스퍼에서 건너온 팻 제닝스와 21세기 아스널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함께한 골키퍼 옌스 레만, 보이치에흐 슈쳉스니까지 골키퍼 라인업이 화려한 아스널 FC. 그중에서도 중추는 단연코 데이비드 시먼(David Andrew Seaman; 잉글랜드 골키퍼, 1963-)이다.

에미레이트 스타디움(Emirates Stadium; 2006년 개장)으로 옮기기 전 사용되었던 하이버리(Highbury, Arsenal Stadium; 1913-2006년)의 마지막 수호 기사 데이비드 시먼.

1990년부터 2003년까지, 무려 13년. 시먼은 아스널의 골문 앞에서 세 명의 감독을 거치며 리그 우승 3회, FA컵 우승 4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 1회라는 금자탑을 쌓았다.[1]

그 13년의 첫날은 환영받지 못했다. 1990년 여름 조지 그레이엄이 퀸스 파크 레인저스에 치른 130만 파운드는 당시 영국 골키퍼 역대 최고 이적료였다. 하이버리에는 1989년 안필드의 밤에 골문을 지킨 존 루키치가 있었고, 관중석에서는 루키치가 시먼보다 낫다는 노래가 돌았다. 대답에는 한 시즌이면 충분했다. 1990-91시즌 아스널은 리그 서른여덟 경기에서 열여덟 골만 내줬고, 스물세 경기를 무실점으로 끝냈다.

데이비드 시먼의 상징은 다른 그 무엇보다 신뢰라는 키워드 속에 묻어져 있는데, 등번호 1번이 아닌 등번호 1이라는 존재감. 이 존재감 하나로 수비진은 안도했고, 상대는 두려움을 가졌다. 영국 사람들은 그를 세이프 핸즈(Safe Hands; 안전한 손)라 불렀다.

승부차기의 시먼도 이 시절에 만들어졌다. 1995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준결승, 그는 갈비뼈 두 대에 금이 간 몸으로 삼프도리아의 시니샤 미하일로비치와 블라디미르 유고비치, 아틸리오 롬바르도의 킥을 차례로 막아 팀을 결승에 올렸다. 그리고 5월 10일 파리 파르크 데 프랭스의 결승. 1-1로 맞선 연장 종료 직전, 레알 사라고사의 나임(Nayim; 레알 사라고사의 스페인 미드필더)이 40야드 밖에서 띄운 공이 그의 키를 넘어갔다. 하필이면 토트넘에서 뛰던 선수였다. 가장 안전한 손이라 불린 골키퍼의 가장 유명한 실점이 같은 봄에 들어 있다.

시먼의 선방은 화려함보다는 정확했고, 필연적이었으며, 결정적인 한 방을 지니고 있었는데 특히 2002-03시즌 FA컵 준결승에서 셰필드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보여준 한 손 선방은 아스널 팬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미학적 기적이었다. 2003년 4월 13일 올드 트래퍼드, 1-0으로 앞선 경기 막판이었다. 골문 바로 앞에서 폴 페스키솔리도(Paul Peschisolido; 캐나다 공격수, 1971-)가 머리로 받아 넣으려던 공을 서른아홉 살의 골키퍼가 뒤로 몸을 젖히며 한 손으로 긁어냈다. 그의 통산 1,000번째 경기였다.[2] 그날 BBC 해설석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골문을 지켰던 페테르 슈마이켈이 앉아 있었다. 슈마이켈은 자기가 본 최고의 선방이라고 했다.

한 달 뒤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의 FA컵 결승에서 그는 다친 비에라를 대신해 주장 완장을 찼다. 사우샘프턴을 1-0으로 막아내고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것이 아스널 선수로서 한 마지막 일이다. 564번째 경기였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포니테일, 잉글랜드 국기를 품은 유니폼, 그리고 고요한 눈빛. 그것들은 모두 하이버리 시절의 상징으로 남았다.

2. 데이비드 오리어리 - 센터백

데이비드 오리어리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출생일 4월 2일은 5월 2일의 오기다. 데이비드 오리어리는 1958년 5월 2일 런던 스토크 뉴잉턴에서 태어났다.

722경기. 아스널 유니폼을 입고 뛴 역대 최다 출전 기록 보유자.

데이비드 오리어리(David Anthony O’Leary; 아일랜드 수비수·축구 감독, 1958-)는 열다섯 살에 아스널의 수습 선수가 됐고, 1975년 8월 열일곱 살에 1군에 데뷔해 서른다섯 살이던 1993년까지 런던 북부에서 붉은색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한 시대가 아닌 두 세대에 걸쳐 아스널의 수비를 지탱한 살아있는 역사이자 흐름이었던 데이비드 오리어리.

기록은 일찍부터 그의 것이었다. 아스널에서 100경기와 200경기에 가장 어린 나이로 닿은 선수가 그였고, 400번째 경기를 뛰었을 때 겨우 스물여섯이었다. 조지 암스트롱의 621경기를 넘어선 날은 1989년 11월 첫 토요일 하이버리의 노리치 시티전이다. 622번째 경기에서 아스널은 1-3으로 끌려갔고, 따라붙는 골을 넣은 사람이 오리어리 자신이었다. 경기는 4-3으로 뒤집혔다.[3]

그는 거칠지 않았다. 그는 지적인 수비수였다. 빠른 판단력, 이상적인 태클 타이밍, 그리고 무엇보다 위기의 순간을 읽는 눈. 21세기로 치면 브라질의 치아구 시우바나 네덜란드의 버질 판데이크 유형과 비슷하다.

감독이 바뀌어도, 파트너가 바뀌어도, 오리어리는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필드 위에 존재했다.

1989년 5월 26일,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이 걸렸던 리버풀 FC 원정 마지막 경기. 그레이엄은 이날 수비수를 다섯 명 세웠고, 서른한 살의 오리어리는 애덤스와 볼드 뒤에서 스위퍼로 섰다. 두 골 차로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 한 골도 내주지 않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오리어리는 해당 매치의 보이지 않는 MVP였으며, 그것은 단 한 번의 경기가 아니라 722번 반복된 헌신이었다.

그리고 결국 1988-89시즌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아스널 바깥에서 그의 이름이 가장 크게 불린 날은 1990년 6월 25일 제노바다. 아일랜드가 처음 나간 월드컵이었고, 애덤스와 볼드에게 주전을 내주기 시작한 서른두 살의 센터백은 조별 리그 세 경기를 벤치에서만 보냈다. 16강 루마니아전도 연장에 들어가서야 교체로 그라운드를 밟았다. 0-0으로 끝난 뒤 승부차기를 차겠다고 나선 다섯 명이 번호를 하나씩 골랐는데, 마지막까지 남은 번호가 5번이었다고 그는 훗날 털어놨다. 골키퍼 패키 보너가 루마니아의 다섯 번째 키커 다니엘 티모프테를 막았다. 남은 번호를 받은 센터백이 찬 공이 들어갔고, 아일랜드는 8강에 올랐다.

마지막 경기도 결승이었다. 1993년 5월 20일 셰필드 웬즈데이와의 FA컵 결승 재경기에 교체로 들어간 것이 722번째 경기다. 연장 종료 직전 앤디 리니건의 헤더가 들어가 아스널이 이겼고, 그는 트로피와 함께 떠났다.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선수 생활을 마친 뒤에는 그 구단의 감독이 되어 2000-01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까지 올라갔다.

그는 화려한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위대한 클럽이 영속할 수 있게 해준 이유에 해당했다. 아스널이라는 이름의 중력을 만들어낸 센터백.

3. 토니 애덤스 - 센터백

토니 애덤스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아스널이라는 성벽의 가장 안쪽에서, 가장 높은 기둥으로 서 있었던 센터백 토니 애덤스(Tony Alexander Adams; 잉글랜드 수비수, 1966-).

단순히 센터백이라기보다는 정신적 지주이며, 카리스마의 화신, 전장의 리더였다. 아스널에서만 672경기를 뛰었던 그는 입단부터 22년의 시간을 오직 한 클럽에 바친 원클럽맨이었다.

시작은 우스꽝스러웠다. 1983년 11월 5일 선덜랜드전, 열일곱 살의 데뷔전에서 그는 반바지를 앞뒤로 거꾸로 입고 나갔다. 그리고 거의 첫 터치에서 공을 빼앗겨 선제골의 빌미를 줬다.[4]

그가 주장 완장을 찬 시간만 14년. 1988년 1월, 스물한 살에 받은 완장이었다. 2개의 세기, 4명의 감독, 3개의 홈 유니폼이 바뀌는 세월 동안 그의 리더십은 단 한 번도 바래지 않았었다.

어린 주장에게 세상은 친절하지 않았다. 1989년 봄 올드 트래퍼드에서 그는 양쪽 골문에 한 골씩을 넣어 혼자 1-1을 만들었고, 이튿날 아침 《데일리 미러》는 그의 머리에 당나귀 귀를 그려 넣었다. 상대 팬들은 그 그림을 놓치지 않았다. 애덤스의 대답은 여덟 주 뒤 안필드에서 들어 올린 우승 트로피였다.

1988-89
퍼스트 디비전1980년대 · 그레이엄
1990-91
퍼스트 디비전1990년대 · 그레이엄
1997-98
프리미어 리그1990년대 · 벵거, 더블
2001-02
프리미어 리그2000년대 · 벵거, 더블

네 번의 우승이 세 번의 10년에 걸쳐 있다. 잉글랜드 1부 리그에서 서로 다른 세 번의 10년에 우승 팀의 주장을 맡은 선수는 그 하나뿐이다.

그는 수비라는 단어 속에 박제된 축구 선수였다. 그의 인터셉트는 무자비했고, 그의 태클에는 군더더기가 없었으며, 그의 공중볼 장악력은 당시 잉글랜드에서 단연코 최고였다. 그레이엄은 그를 나의 거상이라 불렀고, 벵거는 수비학 교수라 불렀다.

알코올 중독, 부상, 부진. 이 모든 어둠 속에서 그는 항상 돌아왔고, 돌아올 때마다 더욱 강해져 있었다.

어둠은 비유가 아니다. 1990년 5월 그는 혈중 알코올 농도가 기준치의 네 배를 넘는 상태로 차를 몰다 담장을 들이받았고, 그해 12월 19일 징역 넉 달을 선고받았다. 풀려난 날이 1991년 2월 15일이다. 주장이 두 달을 감옥에서 보낸 그 시즌에 아스널은 단 한 번만 지고 우승했다. 술은 그 뒤로도 여섯 해를 더 따라다녔다. 1996년 그는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고,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장 완장을 차고 있던 해였다. 그해 가을 도착한 벵거의 식단과 준비 방식이 서른 살 수비수의 남은 여섯 해를 만들었다. 2000년에는 술과 약물, 도박에 빠진 운동선수를 돕는 스포팅 챈스 클리닉을 세웠다.

그 회복이 한 장면으로 남은 날이 1998년 5월 3일이다.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확정한 하이버리의 에버턴전, 센터백 스티브 볼드가 수비 뒤로 공을 띄웠고, 상대 문전까지 올라가 있던 센터백 애덤스가 그 공을 받아 꽂았다. 4-0. 그레이엄이 키운 수비수 둘이 벵거의 방식으로 만든 골이었다.

2011년 12월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앞에 그의 동상이 섰다. 그 경기장 밖에 동상으로 선 사람은 여섯뿐이고, 채프먼과 앙리가 그 안에 있다.

4. 에디 햅굿 - 레프트백

에디 햅굿 레프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그의 이름은 지금 세대에게는 낯설 수 있다. 하지만 1930년대, 아스널의 첫 전성기를 말할 때 에디 햅굿(Edris Albert “Eddie” Hapgood; 잉글랜드 수비수, 1908-1973) 없이 그 서사는 시작되지 않는다.

출발은 브리스틀의 우유 수레다. 말이 끄는 수레로 우유를 돌리며 동네 팀에서 공을 차던 열여덟 살에게 1927년 브리스틀 로버스가 계약을 내밀었다. 시즌 중에는 주급 8파운드, 여름에는 석탄 수레를 모는 일자리였다. 그는 거절했다. 우유 수레를 모는 것과 석탄 수레를 모는 것 사이에는 신분의 차이가 있다는 이유였다. 대신 주급 4파운드를 받고 논리그의 케터링 타운으로 갔고, 열두 경기 만에 허버트 채프먼이 950파운드를 내고 그를 데려갔다.[5]

하이버리에 도착한 그는 마르고 약한 채식주의자였다. 트레이너 톰 휘터커가 근력 훈련을 시키고 채식을 그만두게 했고, 몇 해 뒤 그는 체격과 힘으로 이름난 수비수가 되어 있었다. 선수 주급에 상한이 있던 시절이라 패션 모델 일과 초콜릿 광고로 벌이를 보태기도 했다. 1930년대 잉글랜드에서 얼굴이 팔리는 축구 선수였다는 말이다.

1930년대 허버트 채프먼 감독이 이끈 황금 세대. 그 중심엔 언제나 햅굿이 있었다. 1930-31시즌부터 1937-38시즌까지 다섯 번의 풋볼 리그 우승과 두 번의 FA컵이 모두 그가 왼쪽을 지킨 팀의 것이다. 알렉스 제임스가 은퇴한 뒤에는 그의 팔에 주장 완장이 달렸고, 다섯 번째 우승은 주장 햅굿의 우승이었다.

그의 리더십은 폭력적이지 않았다. 품위로 통솔했고, 절제된 힘으로 이끌었다. 진짜 리더는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그라운드를 장악한다. 그 말의 원형이 바로 에디 햅굿이었다.

좌측을 지배했던 우아함. 그의 수비는 칼날이 아니라 펜촉에 가까웠다. 세련되고 간결했으니. 당시 수비수 대부분이 육중하고 거친 스타일이었던 반면, 햅굿은 미래형 풀백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특히 잉글랜드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 이탈리아 대표팀과 펼쳤던 격전이 축구사에서는 진정한 세계 선수권 대회 중 하나로 불리는데, 이 경기를 두고 세상은 하이버리 전투(Battle of Highbury)라 부른다. 1934년 11월 14일, 상대는 그해 월드컵을 든 이탈리아였고 경기장은 아스널의 홈이었다. 잉글랜드 선발 열한 명 가운데 일곱 명이 아스널 선수였으며, 햅굿은 이날 처음 대표팀 주장 완장을 찼다. 여기서 햅굿은 코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15분쯤 그라운드를 떠났다가 돌아왔고, 잉글랜드는 3-2로 이겼다.

대표팀 서른 경기 가운데 스물한 경기를 주장으로 뛴 그에게는 코가 부러진 날보다 무거운 경기가 하나 더 있다. 1938년 5월 14일 베를린의 독일전. 영국 외교관들의 압력으로 잉글랜드 선수들은 킥오프 전에 나치식 경례를 해야 했고, 그 줄에 주장 햅굿이 서 있었다. 경기는 잉글랜드가 6-3으로 이겼다. 그는 1945년에 낸 자서전 《풋볼 앰배서더》(Football Ambassador; 축구 선수가 쓴 초창기 자서전 가운데 하나)에서 그 경례를 생애 최악의 순간으로 적었다.

끝은 쓸쓸했다. 축구를 떠난 뒤 형편이 어려워진 그는 옛 구단에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다. 은퇴 기념 경기 한 번 받지 못한 주장이었다. 아스널이 보낸 돈은 30파운드였다. 그는 YMCA 호스텔을 운영하며 말년을 보냈고 1973년에 세상을 떠났다.

5. 리 딕슨 - 라이트백

리 딕슨 라이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조용한 사람일수록, 가장 큰 전쟁을 이겨낸다.

리 딕슨(Lee Michael Dixon; 잉글랜드 수비수, 1964-)은 기교 섞인 화려함보다는 묵묵했고, 강인했고, 때문에 아스널 강철의 포백에 가장 어울리던 수비수였다.

하이버리까지 오는 길이 길었다. 맨체스터 시티의 골키퍼였던 로이 딕슨의 아들로 태어나 시티를 응원하며 자랐지만, 프로 생활은 번리와 체스터 시티, 베리, 스토크 시티를 차례로 도는 하부 리그 순례였다. 그레이엄이 37만 5천 파운드를 내고 그를 데려온 날이 1988년 1월 29일이고, 그해 안에 스토크의 동료 스티브 볼드가 같은 길로 따라왔다.[6]

1988년 1월 팀에 입단해 2002년 은퇴하던 순간까지 무려 14년이라는 기간 동안 헌신, 강인함, 충직함이라는 키워드를 팬들의 가슴속에 새겨 넣었다. 그 14년의 처음과 끝이 모두 우승이다. 1988-89시즌 안필드의 밤에 오른쪽을 지켰고, 서른여덟 살이던 2001-02시즌의 더블을 마지막으로 축구화를 벗었다. 619경기, 구단 역대 네 번째로 많은 출전이다.

안필드의 두 번째 골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발이 나온다. 추가시간, 골키퍼 루키치가 굴려 준 공을 받은 딕슨이 앞으로 길게 찼고, 앨런 스미스가 떨궈 준 그 공을 마이클 토머스가 몰고 들어갔다.

리 딕슨은 근본에 충실했던 풀백이었다. 무리한 오버래핑, 불필요한 쇼맨십? 그런 건 없었다. 오직 팀을 위한 정확한 포지셔닝과 판단.

그는 수비수란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준 사내였다. 단순하고, 침착하며, 90분 내내 미동 없는 신뢰.

그런 그에게도 평생 따라다니는 장면이 하나 있다. 1991년 9월 7일 하이버리의 코번트리 시티전에서 넣은 자책골이다. 기가 막힌 자책골이라는 말로 기록에 남은 그 골로 아스널은 경기를 내줬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는 스물두 경기를 뛰었고 골은 하나다. 1991년 웸블리의 아일랜드전이었다.

잉글랜드의, 그리고 하이버리의 무언의 기둥. 딕슨은 단 1초도 영웅이 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옆에서 토니를 받치고, 세간의 주목 대신 그라운드 끝 라인을 철통같이 지켰던 존재였다.

팬들은 훗날 엑토르 베예린이 리 딕슨의 명성을 이어주길 바랐으나… 윽….

6. 파트리크 비에라 - 수비형 미드필더

파트리크 비에라 수비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1996년 8월, 아직 아르센 벵거가 부임하기 전 런던에 도착한 프랑스의 어느 청년. 파트리크 비에라(Patrick Vieira; 세네갈 다카르 태생의 프랑스 미드필더, 1976-)의 계약은 8월 14일에 끝났고, 벵거가 감독 자리에 앉은 것은 10월 1일이다.[7]

350만 파운드. AC 밀란에서 1군 경기를 다섯 번밖에 뛰지 못한 스무 살의 값이었다. 데뷔는 9월 16일 하이버리의 셰필드 웬즈데이전이다. 레이 팔러와 교체돼 들어갔고, 먼저 한 골을 내줬던 아스널은 이언 라이트의 해트트릭으로 경기를 뒤집었다. 《더 타임스》는 아스널의 중원에 드디어 다른 색이 생겼다고 썼다.

그의 이름은 훗날 압도적 중원의 상징이 되었으며, 프랑스 대표팀에서는 클로드 마켈렐레와 함께 스타덤에 오른 미드필더가 되었다. 기술, 체격, 패스, 시야, 리더십. 모든 것이 균형 잡힌, 아스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드필더.

1998년 7월 생드니의 월드컵 결승, 추가시간에 들어간 프랑스의 세 번째 골은 비에라가 내준 공을 에마뉘엘 프티가 넣은 것이다. 준 쪽도 받은 쪽도 두 달 전 더블을 이룬 아스널의 중앙 미드필더였다.

그라운드 위의 사령관. 비에라의 진가는 통계가 아닌 장면에서 드러났다. 혼자 압박을 벗겨 내고, 전방으로 길게 넘기고, 동료의 역습을 여는 세 가지를 단 한 번의 플레이로 끝낼 수 있었던 사내.

2004년, 무패 우승(The Invincibles; 무적의 팀) 시즌. 4월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우승을 확정한 2-2 경기의 첫 골이 그의 것이다. 그리고 5월 15일 하이버리에서 열린 레스터 시티와의 마지막 경기, 서른여덟 번째 경기는 1-1로 맞서 있었다. 후반 66분, 중원에서 단숨에 전방으로 달려 들어간 비에라가 베르흐캄프의 패스를 받아 골키퍼까지 돌아서 넣었다. 무패 시즌의 마지막 골. 그 모든 게 비에라였다.

경기 중 얼굴을 맞대고 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로이 킨과 아스널의 파트리크 비에라
로이 킨(맨체스터 유나이티드)과 파트리크 비에라(아스널).

프리미어 리그 중원을 양분했던 두 제왕. 그중에서도 비에라는 절제된 야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든 자였다. 고삐가 끊어진 날의 기록도 그의 것이다. 프리미어 리그에서 받은 퇴장이 여덟 번, 리처드 던과 던컨 퍼거슨과 함께 리그 최다다.

두 제왕의 가장 유명한 장면은 공이 구르기 전에 나왔다. 2005년 2월 하이버리의 선수 통로. 비에라가 게리 네빌에게 다가가 따지자 로이 킨이 끼어들어 자기를 상대하라고 했고, 주심 그레이엄 폴이 둘 사이에 몸을 넣었다. 매주 입을 놀리면서 착한 사람인 척한다는 킨의 고함이 중계 카메라에 그대로 담겼다. 아스널은 그날 2-4로 졌다.

석 달 뒤 카디프에서 둘은 마지막으로 만났다. 2002년 여름부터 주장이었던 그가 아스널에서 마지막으로 찬 공은 2005년 FA컵 결승,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승부차기를 끝낸 킥이었다. 그 킥이 들어가 아스널이 우승했고, 그는 그해 여름 1,375만 파운드에 유벤투스로 떠났다.

파트리크 비에라가 떠난 이후 미켈 아르테타, 프란시스 코클랭, 그라니트 자카, 토마스 파티, 데클런 라이스까지 수많은 선수들이 그의 뒤를 잇고 있으나 아직 그 누구도 비에라의 그림자에 속하지는 않고 있다.

7. 리엄 브래디 - 공격형 미드필더

리엄 브래디 공격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신체 스펙 193cm / 90kg은 같은 중원의 비에라 디자인 값이 잘못 들어간 것이다. 리엄 브래디의 키는 175cm쯤이다. 아스널 유스 책임자로 일한 기간도 1996년부터 2014년까지다.

1973년 10월, 열일곱의 나이에 아스널 1군 무대를 밟은 아일랜드의 소년 리엄 브래디(William “Liam” Brady; 아일랜드 미드필더, 1956-). 당시 아스널은 어둠의 터널을 걷고 있었지만, 그의 왼발은 모든 걸 바꾸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그를 치피(Chippy)라 불렀다. 공을 찍어 차는 솜씨에서 온 별명 같지만, 피시 앤드 칩스를 워낙 좋아해서 붙은 이름이다.[8]

시야, 균형, 그리고 리듬. 브래디는 단순한 플레이메이커를 넘어 패스를 문장으로, 드리블을 리듬으로 승화시켜냈다. 어깨를 살짝 흔들고, 왼발로 곡선을 그리는 그 한 동작이 하이버리 전체를 숨죽이게 만들었다.

1970년대 중반 강등권 언저리를 맴돌던 아스널은 그의 왼발이 익어 가면서 1978년부터 1980년까지 3년 연속 FA컵 결승에 올랐다. 절정은 가운데 해다. 1978년 12월 23일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아스널이 토트넘을 5-0으로 눌렀을 때, 브래디는 왼발로 사납게 휘어 들어가는 골을 꽂았다. 북런던의 한쪽이 반세기 가까이 돌려 보는 골이다.

1978-79시즌 FA컵 결승, 그 찬란한 드라마. 1979년 5월 12일 웸블리에서 아스널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전반에만 두 골을 앞섰고, 두 골 모두 브래디의 발에서 시작됐다. 86분과 88분에 연달아 실점해 2-2가 된 뒤의 1분이 이 경기를 전설로 만들었다. 브래디가 공을 몰고 올라가 왼쪽의 그레이엄 릭스에게 내줬고, 릭스의 크로스를 앨런 선덜랜드가 밀어 넣었다. 89분, 3-2. 결승골의 출발점이 된 그 전진은 아스널 역사상 가장 우아한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영웅이란, 가장 조용한 방법으로 팀을 이끄는 존재다.

그해 그는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가 됐다. 잉글랜드 바깥에서 온 선수가 그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다음 시즌이 끝나면 떠나겠다고 미리 알렸다.

마지막 시즌은 잔인했다. 1979-80시즌 아스널은 일흔 경기를 치렀다. 잉글랜드 구단이 한 시즌에 치른 가장 많은 경기다.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준결승에서 유벤투스를 원정에서 꺾었고, 결승은 FA컵 결승에서 웨스트햄에 진 지 나흘 만에 열렸다. 1980년 5월 14일 브뤼셀 헤이젤, 발렌시아와 0-0으로 비긴 뒤의 승부차기에서 첫 번째 키커 브래디의 공이 막혔다. 상대 첫 키커 마리오 켐페스도 넣지 못했지만, 여섯 번째 키커 릭스의 공이 다시 막혀 4-5로 끝났다. 한 해 전 웸블리의 결승골을 만든 두 사람이 한 해 뒤 브뤼셀에서 나란히 실축했다.

그 준결승에서 그를 눈여겨본 유벤투스가 여름에 그를 데려갔다. 토리노에서 두 시즌 연속 세리에 A를 우승했고, 1982년의 우승을 확정한 카탄차로전 1-0의 유일한 골이 그의 페널티킥이다. 그해 여름 미셸 플라티니가 오면서 그는 삼프도리아로 자리를 옮겼다.

브래디는 아스널의 전성기 직전에 등장한 선구자였다. 그가 없었다면 후일의 그레이엄, 윈터번, 팔러도 그렇게 찬란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는 1996년 유스 책임자로 돌아와 열여덟 해 동안 아스널의 다음 세대를 길렀다.

리엄 브래디는 포스트 찰턴 시대의 유럽 축구를 대표하던 미드필더 중 하나였고, 그중에서도 아스널의 정수였다.

8. 클리프 배스틴 - 레프트 윙

클리프 배스틴 레프트 윙 상세 정보 디자인

하이버리의 침묵을 찢던 왼발의 정적.

고작 열일곱 살의 나이에 아스널 유니폼을 입던 1929년. 클리프 배스틴(Clifford Sydney Bastin; 잉글랜드 공격수, 1912-1991)의 존재감은 1년, 1년이 쌓일수록 단단해졌고, 어느덧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

채프먼이 그를 찾아낸 것은 우연이다. 1929년 4월 6일 채프먼은 왓퍼드의 토미 바넷이라는 선수를 보러 왓퍼드와 엑서터 시티의 경기에 갔다. 눈에 들어온 쪽은 상대 팀의 열일곱 살이었다. 리그 열일곱 경기 여섯 골이 전부인 소년에게 아스널은 2,000파운드를 냈다.[9]

허버트 채프먼 감독이 꿈꾸던 과학 축구의 퍼즐 한 조각, 그 퍼즐은 왼쪽 날개에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값은 금방 돌아왔다. 열아홉 살에 그는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 잉글랜드 대표팀 데뷔를 모두 마쳤다. 세 가지를 다 이룬 가장 어린 선수다.

클리프 배스틴은 무려 178골을 터뜨리며, 장장 60년 가까이 아스널 역대 최다 득점자로 기억되었었다. 이 기록은 1997년 9월 이언 라이트가 볼턴 원더러스전에서 넘어설 때까지 이어졌다. 1932-33시즌에는 왼쪽 윙어 자리에서 리그 서른세 골을 넣었다.

하지만 이 선수를 단순히 골잡이로 정의하기에는 설명이 심심하다. 클리프 배스틴의 움직임은 마치 왼쪽 전체를 유영하는 음파. 드리블 하나에 리듬이 실리고, 크로스 하나에 설계가 담겨 있었다.

속도의 천재는 많지만, 타이밍의 천재는 드물다.

배스틴은 무작정 달리던 윙어는 아니었다. 한 박자 빠른 침투, 반 박자 느린 마무리로 그는 상대 수비를 고요하게 무너뜨렸다. 21세기의 라민 야말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당시 WM 포메이션 속에서도 배스틴은 마치 현대 축구의 윙 포워드처럼 움직였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는 스물한 경기 열두 골이다. 햅굿의 코가 부러진 하이버리 전투에 그도 있었고, 햅굿이 경례를 해야 했던 1938년 베를린에서는 한 골을 넣었다.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침묵. 그의 커리어가 절정이던 순간, 전쟁이 찾아왔다. 스물일곱 살이었다. 갈수록 나빠지던 청력 때문에 군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그는 전쟁 내내 톰 휘터커와 함께 하이버리 지붕 위에서 방공 감시원으로 일했다. 1941년 초 이탈리아 신문에는 그가 영국 공군 폭격기를 타고 알바니아 티라나 상공에서 격추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정작 그는 런던의 축구장 지붕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1946년 9월의 한 경기가 마지막이었고, 이듬해 은퇴를 알렸다. 그는 고향 엑서터로 돌아가 펍을 운영했다. 엑서터 시티의 홈구장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단 스탠드가 있다.

그러나 그의 왼발이 남긴 여운은 지금도 하이버리의 벽면 어딘가에 남아 있다. 클리프 배스틴은 아스널을 유럽의 강호로 만든 가장 위대한 시작이었고, 그의 왼발은 축구가 전쟁의 참혹함도 지워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증명한 첫 기억이었다.

9. 로베르 피레스 - 라이트 윙

로베르 피레스 라이트 윙 상세 정보 디자인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파고들며 경기의 흐름을 재단했고, 리듬감 있는 스텝과 여백 있는 패스로 아스널의 공격을 지휘했던 공격수 로베르 피레스(Robert Emmanuel Pirès; 프랑스 미드필더, 1973-).

2000년 여름, 아스널은 레알 마드리드와 유벤투스를 제치고 600만 파운드에 그를 데려왔다. 바르셀로나로 떠난 마르크 오버르마르스의 자리였다. 처음 몇 달은 겉돌았다. 하이버리가 그를 받아들인 날은 2001년 3월 31일 토트넘전이다. 데이비드 로캐슬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고, 로캐슬이 달던 7번을 입고 뛴 프랑스인이 골을 넣어 2-0으로 이겼다. 그 골을 시작으로 그는 토트넘을 상대로 여덟 골을 넣었다.[10]

현대 축구의 인버티드 윙어 개념이 전술 용어로 정착하기 전, 피레스는 이미 선구격 존재였다.

아름다움과 실용성은 양립할 수 있는 개념이다. 로베르 피레스가 완성시킨 문장이다.

그는 예술가의 손끝 같은 터치, 외과의사의 메스 같은 패스, 무희의 발끝 같은 드리블을 가졌지만 그 모든 것을 벵거의 팀을 위해 사용했다. 2001-02시즌에는 리그 도움 1위를 달리다 무릎 인대가 끊어져 시즌 막바지와 FA컵 결승을 놓쳤고, 그러고도 축구 기자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가 됐다. 다친 경기는 3월 뉴캐슬 유나이티드와의 FA컵 6라운드 재경기다. 첫 골을 넣고 두 번째 골을 도운 뒤였다. 5월의 우승 행사에서 그가 프리미어 리그 트로피를 들어 올리자 동료들은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2003-04시즌 아스널이 무패 우승을 차지했을 때, 피레스는 리그에서만 열네 골을 넣으며 티에리 앙리와 완벽한 호흡을 선보였다. 앙리가 번개였다면, 피레스는 그 번개를 부른 바람이었다. 그는 팀 전체를 유기적으로 엮었고, 경기장의 한쪽을 예술관으로 바꾸었다.

그 완벽한 호흡이 딱 한 번 어긋난 장면도 유명하다. 2005-06시즌 맨체스터 시티전, 이미 페널티킥으로 한 골을 넣은 피레스는 두 번째 페널티킥을 차지 않고 옆의 앙리에게 내주려 했다. 둘의 발은 맞지 않았고 기록에는 페널티킥 실축이 남았다.

마지막 경기는 2006년 5월 17일 파리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이다. 18분에 골키퍼 옌스 레만이 퇴장당하자 벵거는 교체 골키퍼 마누엘 알무니아를 넣으려고 피레스를 뺐다. 아스널에서 보낸 여섯 해의 마지막 날이 18분 만에 끝난 것이다. 그는 훗날 그 교체가 자신을 죽였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피네스(finesse; 섬세함), 런던을 물들이다. 아스널의 윙어였지만 실제로는 미드필더, 공격수,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모두 소화하며 완벽한 전환기의 윙어로 남은 선수. 프랑스 대표팀에서는 1998년 월드컵과 유로 2000을 들었고, 유로 2000 결승의 골든골은 그가 건넨 공을 다비드 트레제게가 넣은 것이다.

10. 데니스 베르흐캄프 - 세컨드 스트라이커

데니스 베르흐캄프 세컨드 스트라이커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신체 스펙 188cm / 83kg은 앙리 디자인과 같은 값이 들어간 것이다. 데니스 베르흐캄프의 키는 183cm다.

AFC 아약스에서 세계 최고의 공격수에 올랐고, 호기롭게 신화의 땅 이탈리아로 향했으나 최악의 선수라는 조롱을 당해야만 했던 공격수 데니스 베르흐캄프(Dennis Nicolaas Maria Bergkamp; 네덜란드 공격수, 1969-). 그를 런던으로 데려온 사람은 벵거가 아니다. 1995년 6월, 벵거보다 한 해 먼저 온 감독 브루스 리오크의 아스널이 그와 계약했다. 그리고 이듬해 도착한 벵거를 만나 프리미어 리그의 신화격 선수로 성장했다.

이름부터가 잉글랜드와 닿아 있다. 전기 기술자였던 아버지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스코틀랜드 공격수 데니스 로의 팬이라 아들에게 그 이름을 붙였다. 호적 담당자가 N 하나짜리 철자를 받아 주지 않아 N이 하나 더 들어갔다.

750만 파운드는 250만 파운드였던 구단 이적료 기록의 세 배였다. 그 돈을 치른 공격수가 리그 여섯 경기 동안 골을 넣지 못하자 영국 신문들의 조롱이 시작됐다. 1995년 9월 23일 하이버리의 사우샘프턴전에서 첫 골과 두 번째 골이 한꺼번에 나왔다.

정지된 공중에서, 시선은 그를 향했다. 터치 한 번에 수비가 무너지고, 패스 한 번이 리듬을 바꾸었다. 그의 발끝은 공을 멈추는 게 아니라, 시간을 멈췄다. 그 유명한 베르흐캄프 터치, 베르흐캄프 턴.

그 유명한 1998 FIFA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터뜨렸던 골처럼 베르흐캄프는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마법사였고, 그 마법은 언제나 조용히 시작되었다.

세리에 A에서는 아쉬웠어도, 프리미어 리그의 아스널에서 등장한 데니스는 영국인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등장은 킥 앤드 러시의 시대에서 공간과 시점의 예술로의 진화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베르흐캄프가 오고 나서 아스널은 생각하게 됐다. 1997-98시즌에는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와 기자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를 한꺼번에 받았다.

그 시즌의 문을 연 것이 1997년 8월 레스터 시티 원정의 해트트릭이다. 경기는 3-3으로 끝났는데, BBC 《매치 오브 더 데이》(Match of the Day; BBC의 잉글랜드 축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가 뽑은 그달의 골 1위와 2위, 3위가 전부 그의 골이었다. 한 선수가 세 자리를 다 가져간 일은 그때가 유일하다.

그는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아스널에 온 1995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유럽 원정은 차와 기차로 갔고, 닿지 않는 곳은 건너뛰었다. 논 플라잉 더치맨(Non-Flying Dutchman; 비행기를 타지 않는 네덜란드인)이라는 별명이 거기서 나왔다. 페널티킥도 어느 날부터 차지 않았다. 1999년 FA컵 준결승 재경기에서 찬 킥이 페테르 슈마이켈에게 막힌 뒤로 은퇴할 때까지 한 번도 페널티 스폿에 서지 않았다.

그는 2002년 더블을 포함해 무패 우승까지 아스널의 모든 영광의 서사에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존재했다. 그는 때론 앙리의 그림자를 지휘하는 지휘자, 때론 골망을 흔드는 미세한 천둥이기도 했다. 2002년 3월 2일 뉴캐슬 원정에서는 피레스의 패스를 등진 채 받아 공은 수비수의 한쪽으로 흘리고 몸은 반대쪽으로 돌아 나가 골을 넣었다. 지금도 어떻게 한 것인지 되감아 보게 되는 골이다.[11]

그의 존재는 축복이었다. 내가 부임했을 때 받은 선물이었다.

아르센 벵거가 베르흐캄프를 두고

2006년 7월 22일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이 처음 문을 연 경기는 그의 은퇴 기념 경기였다. 상대는 그가 자란 아약스였고, 킥오프는 그가 아버지, 아들과 함께했다. 하이버리의 마지막 시즌에 축구화를 벗은 선수가 새 경기장의 첫 경기를 받았다.

11. 티에리 앙리 - 센터 포워드

티에리 앙리 센터 포워드 상세 정보 디자인

프랑스 리그에서 가능성을 보였고, 호기롭게 신화의 땅 이탈리아로 향했으나 유벤투스의 안첼로티 감독에게 ‘쟨… 얻다 써야 되냐?’는 취급을 받으며 측면에 묶여 있던 윙어. 하지만 1999년 여름 아르센 벵거를 만나 프리미어 리그의 왕 티에리 앙리(Thierry Daniel Henry; 프랑스 공격수, 1977-)로 성장했다.

둘의 인연은 그보다 다섯 해 앞선다. 1994년 8월 31일 AS 모나코에서 열일곱 살의 앙리를 프로 무대에 처음 내보낸 감독이 벵거다. 그때 벵거는 그를 왼쪽 날개에 세웠다. 1999년 8월 3일 1,100만 파운드를 주고 런던으로 데려온 뒤에는 처음부터 최전방에 세웠다.[12]

출발은 베르흐캄프보다 더뎠다. 첫 여덟 경기에서 골이 없었고, 그는 공격수로 뛰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고 털어놨다. 첫 골은 9월 사우샘프턴 원정에서 나왔다. 교체로 들어가 토니 애덤스의 패스를 골문을 등진 채 받았고, 돌아서며 감아 찼다. 그 뒤로 일곱 해 동안 수백 번 되풀이될 궤적이었다.

하이버리의 영혼. 프리미어 리그의 왕관.

앙리는 단순한 골잡이보다는 경기의 결을 바꾸는 사내, 리듬을 설계하는 왕, 팀 전체를 춤추게 만드는 존재였다. 치명적인 오른발 감아차기, 정확한 인아웃 페인팅, 그리고 속도의 폭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왼쪽에서 중앙으로 파고들며 그라운드를 물결처럼 흔들던 순간, 사람들은 그를 예술가가 아닌 왕이라 불렀다.

득점왕 시즌리그 득점
2001-02 · 더블24골
2003-04 · 무패 우승30골
2004-0525골
2005-06 · 하이버리의 마지막 시즌27골
네 시즌 합계106골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네 번. 2004년과 2005년에는 유럽 전체의 득점왕에게 주는 유러피언 골든슈도 받았다. 아스널에서 뛴 377경기에서 228골을 넣었고, 이것이 지금도 구단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다.

2004년, 무패 우승 시즌. 이 시즌에서 앙리는 단순한 스트라이커가 아니라 전술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아스널은 서른여덟 경기 무패, 그 중심엔 서른 골의 왕이 있었다.

골이 아닌 사유를 남긴 자. 그의 골에는 속도가 있었고, 의미가 있었으며, 침묵을 찢는 감정이 있었다. 아무도 없던 공간을 열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늘 마무리를 지었던 공격수. 228골 가운데 여섯 장면만 꺼낸다.

  1. 2000년 10월 1일 · 하이버리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 1-0

    골문을 등지고 받은 공을 발끝으로 띄운 뒤 돌아서며 때렸다. 공은 파비앵 바르테즈의 머리 위로 넘어갔다.

  2. 2002년 11월 16일 · 하이버리토트넘전 3-0의 첫 골

    자기 진영에서 공을 잡아 혼자 끝까지 몰고 가 넣었다. 무릎으로 미끄러진 그 세리머니가 경기장 앞 동상의 자세다.

  3. 2005년 10월 18일 · 프라하스파르타 프라하전 두 골

    부상에서 돌아와 15분 만에 교체로 들어가 두 골. 이언 라이트의 185골을 넘어 구단 최다 득점자가 됐다.

  4. 2006년 2월 1일 · 하이버리웨스트햄전, 리그 151번째 골

    클리프 배스틴이 쥐고 있던 구단 리그 최다 득점 기록이 이날 넘어갔다.

  5. 2006년 2월 21일 · 마드리드레알 마드리드전 1-0

    47분, 혼자 수비 사이를 뚫고 들어가 넣었다. 아스널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이긴 첫 잉글랜드 팀이 됐다.

  6. 2006년 5월 7일 · 하이버리위건 애슬레틱전 해트트릭

    하이버리에서 열린 마지막 경기. 4-2로 이겨 토트넘을 제치고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가져왔다.

2007년 6월 25일 그는 2,400만 유로에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왕의 귀환. 하이버리도 사라졌고, 왕관도 사라진 그곳에 그는 다시 돌아왔다. 2012년 1월 9일 FA컵 3라운드 리즈 유나이티드전, 뉴욕에서 두 달 임대로 온 서른네 살의 앙리는 0-0이던 후반에 마루안 샤마크와 교체돼 들어갔다. 그리고 알렉스 송의 패스를 받아, 늘 넣던 그 각도에서, 늘 차던 그 발로 골문 반대편 구석에 공을 감아 넣었다. 1-0.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 그 골이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울었다.[13] 왕이 왔다는 것 하나의 상징성은 단순한 월드클래스의 복귀 따위의 형언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감정을 울렸으니.

하이버리의 마지막 왕.228골, 그리고 한 번도 지지 않은 서른여덟 경기.

마침내, 한 경기장에 선 열한 명

아스널 FC 역대 베스트 11 표제 4-4-2 대형으로 배치한 아스널 FC 역대 베스트 11 아스널 FC 역대 베스트 11 후보 15인 편집물
표제, 열한 명의 대형, 후보 15인. 1927년에 입단한 에디 햅굿부터 2012년에 마지막 골을 넣은 티에리 앙리까지 스물여섯 명이 한 흐름에 들어간다.

이 명단은 아스널의 역사에 침투한 26인의 명단에 대한 헌사이다.

시먼이 뒤를 닫고, 오리어리와 애덤스가 가운데를 나눈다. 오른쪽의 딕슨이 자리를 지키는 사이 왼쪽에서는 햅굿이 배스틴의 뒤를 받치고, 비에라가 빼앗은 공은 브래디의 왼발을 거쳐 양 날개로 벌어진다. 피레스가 안으로 접고 들어오면 베르흐캄프가 반 박자 멈춰 세우고, 그 앞을 앙리가 달린다.

하이버리가 문을 닫은 2006년까지, 이 열한 명이 그 경기장에서 든 리그 트로피를 겹치지 않게 세면 열 개다. 채프먼이 만든 팀이 다섯, 그레이엄의 팀이 둘, 벵거의 팀이 셋이다. 2026년의 열네 번째 우승은 이 명단 바깥에서 왔고, 다음에 이 글을 고쳐 쓸 때는 그 팀의 이름들이 후보 명단을 흔들 것이다.

하늘을 향해 날아간 붉은 탄환.런던 북부의 노동자적 정체성을 품은 찬가.

이미지 밖에서 다시 읽는 후보 15인

하이버리의 이름은 열한 자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배스틴의 기록을 깬 이언 라이트와, 한 경기 일곱 골의 테드 드레이크도 이 열다섯 안에 있다. 편집물 안의 이름을 검색 가능한 텍스트로 아래에 다시 적는다. 그림의 존 트래퍼드는 존 래드퍼드의 오기다.

  • 팻 제닝스Pat Jennings · 골키퍼

    1977-1984년 327경기. 토트넘에서 건너와 북런던 양쪽의 골문을 모두 지킨 북아일랜드의 거인이다.

  • 옌스 레만Jens Lehmann · 골키퍼

    2003-2008년과 2011년 200경기. 무패 우승 시즌 서른여덟 경기의 골문이다.

  • 프랭크 매클린톡Frank McLintock · 센터백

    1964-1973년 403경기 32골. 1971년 더블의 주장이다.

  • 스티브 볼드Steve Bould · 센터백

    1988-1999년 372경기. 애덤스 옆에서 그레이엄의 포백을 완성한 이름이다.

  • 케니 샌섬Kenny Sansom · 레프트백

    1980-1988년 394경기. 1980년대 잉글랜드의 왼쪽을 도맡은 풀백이다.

  • 팻 라이스Pat Rice · 라이트백

    1967-1980년 528경기. 1971년 더블의 오른쪽이고, 훗날 벵거 옆자리의 수석 코치다.

  • 세스크 파브레가스Cesc Fàbregas · 중앙 미드필더

    2003-2011년 303경기 57골. 열여섯 살에 데뷔해 스물한 살에 주장이 된 미드필더다.

  • 레이 팔러Ray Parlour · 라이트 미드필더

    1992-2004년 466경기 32골. 그레이엄의 끝과 벵거의 전성기를 모두 뛴 일꾼이다.

  • 데이비드 로캐슬David Rocastle · 공격형 미드필더

    1985-1992년 277경기 34골. 하이버리가 로키라 부르며 사랑한 이름이다.

  • 알렉시스 산체스Alexis Sánchez · 레프트 윙

    2014-2018년 166경기 80골. 벵거 시대 후반의 가장 날카로운 공격수다.

  • 프레디 융베리Freddie Ljungberg · 라이트 윙

    1998-2007년 328경기 72골. 2002년 더블의 봄을 골로 끌고 간 스웨덴 윙어다.

  • 알렉스 제임스Alex James · 세컨드 스트라이커

    1929-1937년 261경기 27골. 채프먼의 WM에서 공을 나눠 주던 인사이드 포워드다.

  • 테드 드레이크Ted Drake · 센터 포워드

    1934-1945년 184경기 139골. 하이버리 전투에서도 골을 넣은 1930년대의 9번이다.

  • 존 래드퍼드John Radford · 센터 포워드

    1964-1976년 481경기 149골. 1971년 더블의 최전방이다.

  • 이언 라이트Ian Wright · 센터 포워드

    1991-1998년 288경기 185골. 배스틴의 기록을 넘어선 골잡이다.

기록을 확인한 곳

  1. 데이비드 시먼 — Arsenal.com 「David Seaman」. 1990-2003년 564경기, 리그 3회와 FA컵 4회, 130만 파운드의 골키퍼 이적료 기록과 루키치를 두고 돈 노래, 1990-91시즌 18실점과 무실점 23경기, 1995년 삼프도리아전 승부차기와 갈비뼈 부상, 나임의 40야드 골, 슈마이켈의 평, 2003년 FA컵 결승의 주장.
  2. 2003년 FA컵 준결승의 선방 — Sporting Life 「FA Cup flashback: Seaman's super save」. 2003년 4월 13일 올드 트래퍼드, 셰필드 유나이티드전 1-0, 페스키솔리도의 헤더, 통산 1,000번째 경기.
  3. 데이비드 오리어리 — Sky Sports 「Ireland's World Cup joy: David O'Leary recalls his penalty v Romania」. 100·200·400경기의 나이, 암스트롱의 621경기를 넘은 노리치 시티전, 1990년 6월 25일 제노바의 승부차기와 남은 번호 5번, 1993년 결승 재경기의 마지막 출전, 리즈 유나이티드 감독 시절의 준결승.
  4. 토니 애덤스 — Arsenal.com 「Tony Adams」, 프리미어 리그 「Wright: Adams goal summed up Wenger's way」. 1983년 선덜랜드전 데뷔, 1988년 1월 스물한 살의 주장, 《데일리 미러》의 당나귀 귀, 네 번의 리그 우승과 세 번의 10년, 1990년 12월의 선고와 1991년 2월 15일 석방, 1996년의 고백, 2000년 스포팅 챈스 클리닉, 1998년 5월 3일 에버턴전의 골, 그레이엄과 벵거의 평,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의 동상 여섯.
  5. 에디 햅굿 — Arsenal.com 「Eddie Hapgood」, Leamington History Group 「Eddie Hapgood」, Arsenal History Society 「Eddie Hapgood」. 1927-1944년 440경기, 리그 5회와 FA컵 2회, 우유 수레와 브리스틀 로버스의 제안, 케터링 타운과 950파운드, 휘터커의 훈련, 대표팀 30경기와 주장 21경기, 1938년 5월 14일 베를린, 30파운드. 자서전의 대목은 Arsenal History Society 글이 옮긴 것을 따랐다.
  6. 리 딕슨 — Arsenal.com 「Lee Dixon」. 로이 딕슨의 아들, 번리·체스터 시티·베리·스토크 시티, 1988년 1월 29일 37만 5천 파운드, 619경기, 1991년 9월 7일 코번트리 시티전 자책골, 대표팀 22경기 1골, 2002년 은퇴.
  7. 파트리크 비에라 — Arsenal.com 「Patrick Vieira」, Guinness World Records 「Most English Premier League red cards」, The42 「Keane/Vieira」. 1996년 8월 14일 350만 파운드, 밀란 1군 다섯 경기, 9월 16일 데뷔, 월드컵 결승 세 번째 골의 패스, 2004년 화이트 하트 레인의 첫 골과 5월 15일 레스터 시티전 결승골, 퇴장 여덟 번, 2005년 2월의 선수 통로, FA컵 결승 승부차기의 마지막 킥, 1,375만 파운드.
  8. 리엄 브래디 — Arsenal.com 「Liam Brady」. 1973년 10월 데뷔, 별명 치피, 3년 연속 FA컵 결승, 1978년 12월 23일 토트넘전 5-0, 1979년 결승 세 골의 전개, PFA 올해의 선수, 70경기 시즌과 1980년 5월 14일의 승부차기, 유벤투스의 두 차례 우승과 카탄차로전 페널티킥, 1996-2014년 유스 책임자.
  9. 클리프 배스틴 — The Grecian Archive 「Cliff Bastin」. 1929년 4월 6일 왓퍼드전과 2,000파운드, 열아홉 살의 세 가지 영예, 1932-33시즌 리그 33골, 대표팀 21경기 12골, 청력과 방공 감시원 근무, 1941년 이탈리아 신문의 격추 보도, 1946년 9월의 마지막 경기, 엑서터의 펍과 스탠드, 이언 라이트의 기록 경신.
  10. 로베르 피레스 — Arsenal.com 「Robert Pires」. 2000년 600만 파운드, 2001년 3월 31일 토트넘전과 로캐슬의 7번, 토트넘전 여덟 골, 2001-02시즌 도움 1위·FWA 올해의 선수·무릎 부상, 동료들의 절, 2003-04시즌 리그 14골, 맨체스터 시티전 페널티킥, 2006년 결승 18분의 교체, 유로 2000 결승 골든골의 도움.
  11. 데니스 베르흐캄프 — Arsenal.com 「Dennis Bergkamp」. 이름의 유래, 1995년 6월 리오크 감독 시절의 계약과 750만 파운드, 1995년 9월 23일의 첫 골, 레스터 시티전 해트트릭과 1997년 8월 이달의 골, 1997-98시즌 PFA·FWA 올해의 선수, 1999년 이후의 페널티킥, 2002년 3월 2일 뉴캐슬전, 2006년 7월 22일 기념 경기, 벵거의 평. 비행과 뉴캐슬전 골의 자세한 기록은 이 사이트 인물관 베르흐캄프 편에 있다.
  12. 티에리 앙리 — Arsenal.com 「Thierry Henry」, UEFA.com 「Henry back with a bang」, UEFA.com 「Arsenal vs Real Madrid facts」, Arsenal.com 「Our last day at Highbury」. 1994년 8월 31일 모나코 데뷔, 1999년 8월 3일 1,100만 파운드, 첫 여덟 경기와 사우샘프턴전 첫 골, 득점왕 네 시즌(24·30·25·27골)과 유러피언 골든슈 두 번, 본문 여섯 장면의 날짜와 전개, 2007년 6월 25일 바르셀로나 이적.
  13. 2012년 1월 9일 리즈 유나이티드전 — The FA 「Fixture in focus: Arsenal v Leeds United」. 샤마크와의 교체, 송의 패스, 결승골.
  14. 출전 수는 집계 기준에 따라 한두 경기씩 다르다. 디자인의 시먼 563경기, 애덤스 672경기 49골, 딕슨 616경기, 비에라 405경기 32골, 베르흐캄프 422경기는 구단 명단 기준으로 각각 564경기, 669경기 48골, 619경기, 406경기 33골, 423경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