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26년의 영국 지면은 센터하프를 세 번째 백으로 내리는 일을 이미 “널리 인정된” 해법으로 적었고, W 포메이션의 이름을 아스널이 아니라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앤디 커닝엄에게 붙였다. 아스널의 1925/26 시즌 42경기는 0-7 전후로 승점 속도가 거의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아스널이 기원의 자리를 얻은 것은 우승이 쌓인 1936-39년 지면에서였고, 호텔 방의 장면을 얻은 것은 그보다 16년 뒤 버컨의 회고록에서였다.
1925년 가을, 30년 가까이 잉글랜드 축구의 휘슬을 불어 온 심판 잭 하우크로프트(John Thomas Howcroft; 잉글랜드 축구 심판, 1874-1962)는 일요 신문 『선데이 크로니클』(Sunday Chronicle; 영국 일요 신문)에 이렇게 물었다. 대중은 축구를 원하는가, 아니면 그저 골을 원하는가. 그해 여름 오프사이드 규칙이 바뀌었고, 새 시즌 첫날 아스톤 빌라는 번리를 10-0으로 이겼다. 하우크로프트는 입법자들이 골에 굶주린 소수의 요구를 대중의 요구로 착각했다고 보았고, 같은 글에서 지나가듯 한 문장을 남겼다.[4]
이제 센터하프가 일종의 세 번째 백 노릇을 해야 한다는 건 널리 인정된 사실이다. 풀백 한쪽이 측면을 막으러 끌려 나가는 순간, 곧장 골문 쪽으로 물러설 수 있어야 하니까.
It is generally admitted that the centre half will now have to play the part of a sort of third back, so that he can fall back into goal the moment either of his backs is drawn out to meet a wing assault.
잭 하우크로프트가 1925년 가을 『선데이 크로니클』 칼럼에서 새 오프사이드 규칙을 두고
WM 포메이션의 기원을 다룬 글은 대개 다른 장면에서 출발한다. 1925년 10월 3일 뉴캐슬의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허버트 채프먼(Herbert Chapman; 잉글랜드 축구 감독, 1878-1934)의 아스널이 0-7로 무너졌고, 그날 밤 호텔 방에서 주장 찰리 버컨(Charles Murray Buchan; 잉글랜드 축구선수·기자, 1891-1960)이 센터하프를 수비 라인으로 내리자고 제안했다는 줄거리다. 극적이고, 그래서 오래 살아남은 이야기다. 허나 하우크로프트의 칼럼을 그 옆에 놓으면 앞뒤가 영 맞지 않는다. 한 사람이 호텔 방에서 떠올렸다는 해법을, 같은 가을 심판은 이미 “널리 인정된” 상식으로 다루고 있었으니 말이다. 둘 중 하나가 틀렸거나, 둘 다 맞되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을 터이다. 하여 질문을 조금 바꿔 쥐어 본다. 누구나 알던 해법이 어쩌다 한 구단, 한 사람의 발명으로 기억되기에 이르렀는가.
- ① 규칙
1925년 개정은 무엇을 겨눴고 무엇을 부쉈나
- ② 숫자
리그 전 경기와 아스널 42경기가 말하는 것
- ③ 당대 지면
1925-26년 신문은 세 번째 백을 누구의 것으로 적었나
- ④ 두 번의 고쳐 쓰기
1936-39년의 아스널 기원설과 1955년의 버컨 회고록
- ⑤ 판정
다섯 가설을 같은 증거로 다시 잰다
1925년 6월, 세 명에서 두 명으로
개정 전 오프사이드 조문은 공이 나가는 순간 공격수와 골라인 사이에 상대 선수가 세 명 이상 있어야 온사이드라고 적었다. 골키퍼 한 명과 풀백 두 명이 늘 그 세 명이었으니, 풀백 한 명이 슬쩍 앞으로 나서기만 해도 상대 공격수는 오프사이드 위치에 걸렸다. 스코틀랜드축구협회(Scottish Football Association, SFA)는 이 숫자를 둘로 줄이자는 안을 1894년부터 국제축구평의회(The International Football Association Board, IFAB; 축구 경기규칙을 제정하는 기구)에 거듭 올렸고, 잉글랜드축구협회는 1920년대 초까지 번번이 반대하다가 1925년 6월 8일 연례 총회에서 개정안을 받아들였다. IFAB는 6월 13일 파리 회의에서 조문의 three를 two로 고쳤고, 새 규칙은 1925/26 시즌부터 적용됐다.[1]
이 덫에는 주인이 있었다. 당시 지면은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풀백 빌 매크래컨(William Robert McCracken; 아일랜드 축구선수, 1883-1979)을 이른바 원 백 게임(one-back game; 풀백 한 명을 끌어올려 상대를 오프사이드에 거는 수비)의 창안자로 적었고, 개정이 확정된 1925년 여름에는 그에게 “공로 혹은 오명”이 돌아간다고 썼다.[3] 요컨대 개정은 뉴캐슬이 공들여 다듬어 온 수비를 정면으로 겨눈 조치였다. 이 대목은 기억해 둘 만하다. 덫이 사라진 뒤 새 해법에 처음 이름이 붙을 때, 그 자리에 불려 나오는 구단 역시 뉴캐슬이기 때문이다.
1936년 『맨체스터 가디언』(Manchester Guardian)의 한 기고자는 10년 전을 돌아보며 개정의 배경을 전쟁 뒤의 공기로 설명했다. 전후 영국이 모든 것에 속도를 요구했고 속도와 밝음을 같은 말로 여겼으며, 가장 보수적인 입법자들조차 “더 밝은 축구”(brighter football)를 바라는 웅성거림을 들었다는 것이다.[13] 11년 앞서 하우크로프트가 미심쩍어한 것이 바로 이 웅성거림이었다. 대중이 정말 골을 원했는지는 그때도 지금도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규칙이 골을 돌려주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그 청구서가 수비에게 날아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센터하프는 중원 한가운데에서 공격과 수비를 모두 이끈다. 뒤에는 풀백 둘뿐이다.
센터하프가 두 풀백 사이로 내려가 상대 센터포워드를 막는다. 인사이드 포워드 둘은 뒤로 처져 연결을 맡는다.
1925/26 시즌 1부 리그에서 사라진 수비의 격차
잉글랜드 1부 리그의 득점은 한 시즌 만에 1,192골에서 1,703골로 뛰었다. 경기당 2.58골이 3.69골이 됐으니 43%가 늘었다. 여기까지는 어느 글에나 나오는 숫자다. 허나 한 시즌의 폭증만 들여다보아서는 정작 궁금한 것이 풀리지 않는다. 골은 언제 다시 줄었는가. 잘 막는 팀과 못 막는 팀 사이의 거리는 어떻게 움직였는가. 두 물음 모두 한 시즌 너머 10여 년을 봐야 답이 나와서, 1부 리그 1922/23 시즌부터 1938/39 시즌까지 7,854경기를 한 경기씩 다시 더했다.[2]
- 1922/232.631,215골
- 1923/242.471,143골
- 1924/252.581,192골
- 1925/263.691,703골
- 1926/273.611,668골
- 1927/283.821,765골
- 1928/293.651,688골
- 1929/303.811,758골
- 1930/313.951,823골
- 1931/323.741,727골
- 1932/333.561,645골
- 1933/343.301,524골
- 1934/353.631,677골
- 1935/363.371,556골
- 1936/373.371,555골
- 1937/383.101,430골
- 1938/393.071,418골
각 시즌 22개 팀, 462경기. 흔히 인용되는 4,700골에서 6,373골이라는 숫자는 1부만이 아니라 4부까지 네 리그 1,848경기를 합친 값이다.
곡선부터가 호텔 방 이야기와 잘 맞지 않는다. 세 번째 백이 1925년 10월 한 구단의 방에서 발명되어 곧장 온 리그로 복제된 해법이었다면, 골은 몇 시즌 안에 개정 전 수준 쪽으로 되돌아왔어야 옳다. 기실 곡선은 거꾸로 가서, 골은 1930/31 시즌에 3.95로 꼭대기를 찍었고 경기당 3.1골 선까지 내려온 것은 1937/38 시즌에 와서다. 그렇다고 하우크로프트의 “널리 인정된 사실”을 과장으로 돌릴 까닭도 없다. 두 기록을 함께 쥐면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1925년 가을에 이미 다들 알았으되 그것을 해낼 사람을 구하고 몸에 익히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다고 읽힌다.
다음은 팀들 사이의 거리다. 각 시즌 22개 팀의 경기당 실점을 두고, 그 표준편차를 평균으로 나눈 값(변동계수)을 쟀다. 값이 클수록 잘 막는 팀과 못 막는 팀의 차이가 크다.
- 1923/240.204
- 1924/250.251
- 1925/260.133
- 1926/270.148
- 1927/280.100
- 1928/290.155
- 1929/300.148
- 1930/310.182
- 1931/320.195
- 1932/330.166
- 1933/340.184
- 1934/350.176
- 1935/360.205
변동계수 = 22개 팀 경기당 실점의 표준편차 ÷ 평균. 1927/28 시즌에는 가장 잘 막은 팀과 가장 못 막은 팀의 경기당 실점 차가 0.76골에 그쳤다.
개정 직전 시즌의 0.251은 1920년대를 통틀어 가장 큰 값이다. 오프사이드 덫을 정교하게 다룬 팀과 그렇지 못한 팀 사이가 그만큼 벌어져 있었다. 그 값이 개정 첫 시즌 0.133으로 반토막 났고, 1927/28 시즌에는 0.100까지 내려앉았다. 덫에 기대 쌓아 온 수비의 우열이 규칙 한 줄에 지워졌고, 격차가 다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다. 1923/24 시즌의 0.204를 넘어선 것이 1935/36 시즌이고, 개정 직전의 0.251에는 그때까지도 닿지 못했다.
그렇다면 누가 가장 크게 무너졌을까.
| 1924/25 최소 실점 순 | 1924/25 실점 | 1925/26 실점 | 증가 |
|---|---|---|---|
| 허더즈필드 타운 | 28 | 60 | +32 |
| 노츠 카운티 | 31 | 74 | +43 |
| 볼턴 원더러스 | 34 | 76 | +42 |
|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 | 34 | 78 | +44 |
| 뉴캐슬 유나이티드 | 42 | 75 | +33 |
| 토트넘 홋스퍼 | 43 | 79 | +36 |
| 리그 22개 팀 평균 | 54.2 | 77.4 | +23.2 |
| 아스널 | 58 | 63 | +5 |
가장 잘 막던 여섯 팀이 하나같이 리그 평균보다 크게 무너졌다. 증가 폭이 평균의 1.4배에서 1.9배다. 잘 막던 팀이 이듬해 평균 쪽으로 돌아오는 통계의 버릇을 덜어 내더라도 가볍게 넘길 차이는 아니다. 매크래컨의 뉴캐슬도 이 줄에 서 있다. 한편 반대편 끝에는 아스널이 있다. 실점은 58골에서 63골로 고작 5골 늘었는데, 아스톤 빌라와 나란히 리그에서 가장 작은 증가다. 득점은 46골에서 87골로 뛰었고 순위는 20위에서 2위로 올랐다. 개정 첫 시즌의 아스널이 무언가를 남보다 먼저, 그리고 잘 해냈다는 것까지는 숫자가 보증한다. 궁금한 것은 그 무언가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느냐다.
1925/26 시즌 아스널의 42경기
호텔 방 이야기는 극의 뼈대를 고루 갖췄다. 위기(0-7), 제안(호텔 방), 반등(이틀 뒤 웨스트햄 원정 4-0). 허나 이 뼈대가 서려면 한 가지가 먼저 참이어야 한다. 0-7 이전의 아스널이 새 규칙 앞에서 비틀대고 있었어야 한다. 그 시즌 42경기를 날짜순으로 잘라 보면 이렇다.[7]
| 구간 | 경기 | 득점 | 실점 | 경기당 실점 | 경기당 승점 |
|---|---|---|---|---|---|
| 8월 29일-9월 26일 | 8 | 14 | 9 | 1.13 | 1.38 |
| 10월 3일 뉴캐슬 원정 | 1 | 0 | 7 | 7.00 | 0.00 |
| 10월 5일-5월 1일 | 33 | 73 | 47 | 1.42 | 1.24 |
| 같은 기간 리그 한 팀 평균 | 1.92 → 1.82 |
승리 2점, 무승부 1점. 리그 평균은 10월 3일까지와 그 뒤의 한 팀 경기당 실점이다.
0-7 이전 여덟 경기에서 아스널은 경기당 1.13골만 내줬다. 같은 기간 리그 평균이 1.92골이었으니, 개정 첫 두 달의 아스널은 비틀대기는커녕 리그에서 손꼽히게 잘 막는 팀이었다. 여덟 경기 가운데 진 것은 개막전 토트넘전 0-1 한 번뿐이고, 위기라 부를 만한 경기는 뉴캐슬 원정 하나다. 정작 곤란한 것은 그다음인데, 새 배치가 들어갔다는 10월 5일 이후 서른세 경기의 경기당 실점은 1.42골로, 도리어 0-7 이전보다 나빴다. 경기당 승점은 1.38에서 1.24로 내려갔고, 0-7을 넣어 계산해도 1.22에서 1.24로 제자리다. 달라진 것은 득점 쪽뿐으로, 경기당 1.75골이 2.21골이 됐다.
그러니 숫자가 허락하는 해석은 대략 셋이다. 아스널이 0-7 이전부터 센터하프를 내려 쓰고 있었거나, 다른 방식으로 뒷공간을 다스리고 있었거나, 10월 5일에 바뀐 것이 공격 쪽이었거나. 공교롭게도 버컨의 회고록이 전하는 안이 마지막 해석과 절반쯤 겹친다. 센터하프가 페널티 지역 앞을 지키고 인사이드 포워드 한 명이 오가며 빠른 역습을 이끄는 배치였다고 하니, 앞의 절반은 숫자와 어긋나고 뒤의 절반은 득점의 증가와 맞아떨어진다. 어느 쪽으로 읽든 “0-7이라는 위기가 WM을 낳았다”는 인과만큼은 이 42경기에서 서지 않는다.
공교로운 숫자가 하나 더 있다. 개정 첫 시즌 리그에서 가장 적게 실점한 팀은 60골의 허더즈필드 타운이었고, 아스널이 63골로 그 뒤를 이었다. 허더즈필드는 채프먼이 1921년부터 1925년 여름까지 맡아 두 번 우승시킨 팀이다. 새 규칙 아래 가장 잘 막은 두 팀이 모두 채프먼의 손을 거쳤다. 그렇다면 그의 몫을 찾을 곳은 호텔 방의 하룻밤 이전, 허더즈필드 시절부터 이어진 수비 조직의 솜씨 쪽일지 모른다.
1926년 『애슬레틱 뉴스』가 물은 다섯 센터하프
당대 사람들은 이 변화를 어떻게 불렀을까. 1920년대 뉴질랜드 신문들은 런던 통신원의 편지와 영국 신문 기사를 몇 주 늦게 거의 그대로 옮겨 실었고, 그 지면이 뉴질랜드 국립도서관의 디지털 아카이브에 남아 있다. 1926년 5월 20일 『오클랜드 스타』(Auckland Star)는 맨체스터의 주간 스포츠 신문 『애슬레틱 뉴스』(Athletic News; 1875년 창간, 주말 경기를 다룬 스포츠 주간지)가 시즌 동안 모은 센터하프들의 의견을 옮겼다. 기사의 전제는 이렇다. 시즌 초에 센터하프의 역할은 논쟁거리였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의견은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5]
센터하프는 세 번째 백이 될 준비를 해야 하고, 거기에 곤란함이 있다. 상대 공격을 누르는 데 온 힘을 쏟으면 자기 공격수를 돌볼 시간이 없다.The centre-half back must be ready to be a third back, and there lies the trouble.
두 풀백 사이에서 뛰는 실험을 두어 경기 해 본 뒤 옛 자리로 돌아갔다. 상대 센터포워드를 그림자처럼 따르면 자기 공격수를 도울 수 없다.After trying the experiment of playing between the backs in a couple of games…
풀백과 계획을 맞추면 공격과 수비를 여전히 함께 할 수 있다. 나는 둘을 겸하려 한다.I seek to combine attack and defence.
방침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물러날 때도 있지만, 물러서는 것을 전제로 계획을 짜는 센터하프는 재앙을 부른다.I have made no change of policy at all.
이제 내 일은 늘 우리 골문과 상대 센터포워드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공을 잡으면 전보다 내 가까이 내려와 일하는 인사이드 포워드에게 준다. W 포메이션은 건전하다고 본다.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쓰기 전에 앤드루 커닝엄이 주창했다.I think the W formation is sound. It was advocated by Andrew Cunningham before Newcastle United tried it.
이 설문에서 먼저 귀에 걸리는 것은 말투다. 카디프의 프레드 키너(Frederick Charles Keenor; 웨일스 축구선수, 1894-1972), 클랩턴 오리엔트의 잭 타운로(John Ernest Townrow; 잉글랜드 축구선수, 1901-1969), 에버턴의 닐 맥베인(Neil McBain; 스코틀랜드 축구선수·감독, 1895-1974), 에어드리오니언스의 J. 맥두걸(J. McDougall; 기사 표기), 레인저스의 아서 딕슨(Arthur Dixon; 잉글랜드 축구선수, 1892-1965)까지, 시즌이 끝날 무렵의 센터하프들은 세 번째 백이라는 말을 이미 제 말처럼 쓰고 있었다. 갈린 것은 받아들이는 정도였다. 타운로는 두어 경기 실험하고 접었고, 맥두걸은 아예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걸린다. 이 설문 어디에도 아스널은 나오지 않는다. W 포메이션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린 이는 스코틀랜드 클럽의 센터하프 한 사람뿐이고, 그가 이름을 댄 것은 레인저스 동료 인사이드 포워드 앤디 커닝엄(Andrew Cunningham; 스코틀랜드 축구선수·감독, 1891-1973)과, 하필 매크래컨의 구단 뉴캐슬이었다.
물론 동료를 두고 한 말이니 딕슨의 증언만으로 발명의 주인을 가릴 수는 없다. 허나 숫자가 그 말 쪽으로 기운다. 뉴캐슬은 개정 첫 시즌 75골을 내주며 무너졌다가, 이듬해 1926/27 시즌에는 58골로 리그 최소 실점을 기록하며 우승했다.[2] 같은 시즌 아스널은 86골을 내주고 실점 순위 16위까지 밀려났다. 1926년 봄에 이름이 불린 구단이 바로 그다음 시즌 리그에서 가장 잘 막았다. 커닝엄은 1929년 뉴캐슬로 옮겨 이듬해 감독이 되었고, 1932년 FA컵을 들어 올린 뒤 1935년 물러났다.[12] 1926년의 지면이 W를 주창한 사람으로 꼽은 그는, 훗날 WM의 기원을 말하는 자리에서는 좀처럼 불리지 않는다.
같은 해 6월, 토트넘의 공격수 지미 시드(James Marshall Seed; 잉글랜드 축구선수·감독, 1895-1966)는 한 걸음 더 나간 관찰을 남겼다. 많은 빅클럽의 방침이 센터하프를 뒤에 머물게 하는 것이고, 그 경향이 워낙 뚜렷해 이제는 센터하프백이 아니라 센터백이라 부르는 편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다.[6] 개정 첫 시즌이 끝났을 때 이미 “많은 빅클럽”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심판의 가을 칼럼, 주간지의 설문, 공격수의 관찰은 쓴 사람도 쓴 때도 다르다. 셋을 겹쳐 놓으면 1925/26 시즌의 세 번째 백은 리그 전체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매달린 실험이었다.
- “널리 인정된 사실”하우크로프트, 『선데이 크로니클』. 특정 구단을 들지 않는다
- “뉴캐슬이 쓰기 전에 커닝엄이 주창했다”딕슨, 『애슬레틱 뉴스』 설문. W 포메이션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 “많은 빅클럽의 방침”시드. 역시 특정 구단을 들지 않는다
- “새 질서의 전술적 의미를 처음 이해한 아스널”『맨체스터 가디언』. 아스널은 이해한 구단으로 등장한다
- “세 번째 백 게임을 창시한 구단”잉글랜드 아마추어 대표 뉴질랜드 순회 보도. 창시자가 된다
- “세 백 게임을 처음 채택한 구단”런던 통신원. 최초가 된다
- 호텔 방과 버컨의 제안버컨의 회고록 『A Lifetime in Football』. 장면과 제안자가 생긴다
이해에서 창시로, 1936-39년 지면의 아스널
아스널의 이름이 기원의 자리에 들어오는 것은 우승이 쌓인 뒤다. 채프먼의 아스널은 1930년 FA컵으로 첫 트로피를 들었고, 1930/31 시즌에 처음 리그를 제패했으며, 채프먼이 1934년 1월 6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1933/34, 1934/35 시즌 우승을 이어 갔다.[11] 그 사이 수비의 숫자는 이렇게 움직였다.
| 시즌 | 리그 순위 | 실점 | 리그 평균 대비 | 실점 순위 |
|---|---|---|---|---|
| 1923/24 | 19 | 63 | 1.21 | 19 |
| 1924/25 | 20 | 58 | 1.07 | 12 |
| 1925/26 | 2 | 63 | 0.81 | 2 |
| 1926/27 | 11 | 86 | 1.13 | 16 |
| 1927/28 | 10 | 86 | 1.07 | 15 |
| 1928/29 | 9 | 72 | 0.94 | 9 |
| 1929/30 | 14 | 66 | 0.83 | 5 |
| 1930/31 | 1 | 59 | 0.71 | 1 |
| 1931/32 | 2 | 48 | 0.61 | 1 |
| 1932/33 | 1 | 61 | 0.82 | 3 |
| 1933/34 | 1 | 47 | 0.68 | 1 |
| 1934/35 | 1 | 46 | 0.60 | 1 |
| 1935/36 | 6 | 48 | 0.68 | 1 |
| 1936/37 | 3 | 49 | 0.69 | 1 |
| 1937/38 | 1 | 44 | 0.68 | 1 |
리그 평균 대비 = 아스널 경기당 실점 ÷ 리그 한 팀 경기당 실점. 1보다 작을수록 잘 막았다.
기실 1925/26 시즌의 우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와 그 이듬해 아스널은 86골씩 내주며 실점 순위 15-16위로 내려앉았다. 표가 다시 꺾이는 것은 1929/30 시즌이고, 1930/31 시즌부터 1937/38 시즌까지 여덟 시즌 가운데 일곱 시즌 동안 아스널은 리그에서 가장 적게 실점했다. 이 곡선은 WM의 상징이 된 스토퍼 허비 로버츠(Herbie Roberts; 잉글랜드 축구선수, 1905-1944)의 이력과 겹친다. 로버츠는 1926년 12월 오스웨스트리 타운에서 200파운드에 왔고, 1927년 4월에 데뷔했으며, 확실한 주전이 된 것은 1930/31 시즌이다. 처진 인사이드 포워드 앨릭스 제임스(Alex James; 스코틀랜드 축구선수, 1901-1953)가 온 것은 1929년 여름이다.[11] 사람들이 WM이라 부르는 아스널은 1925년 10월이 아니라 1929년과 1930년 사이에 제 모양을 갖췄다.
그 몇 해를 채운 것은 돈과 인내였다. 1927년 2월 채프먼은 이사들이 은행 당좌대월을 떠안는 수천 파운드의 지출이 오래 갈 수 없다며 비용을 줄여야 한다고 공언했는데, 1928년 가을 한 통신원은 그가 약 2년 사이에 이적료로 3만 파운드 넘게 썼다고 적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에게 축구는 사업이며, 그는 성공을 결과로 잰다.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10] 결과만 본다는 사람치고는 기이하게도, 그는 1926/27 시즌과 1927/28 시즌에 86골씩 내주던 팀을 뜯어고치지 않고 버텼다. 사람을 사들이며 기다렸다. 필자가 채프먼의 몫을 찾는다면 바로 이 두 해의 기다림에서다.
기원의 문장은 그 뒤에 온다. 1936년 『맨체스터 가디언』의 기고자는 거의 모든 센터하프가 “세 번째 백” 혹은 “경찰관”(policeman)이라 불린다고 쓰면서, 이 방어 체계는 “새 질서의 전술적 의미를 처음 이해하고 알아본 아스널조차”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고 적었다.[13] 이 문장에서 아스널은 아직 “이해한” 구단에 머문다. 이듬해 잉글랜드 아마추어 대표팀이 뉴질랜드를 돌았을 때, 센터하프 버나드 조이(Bernard Joy; 잉글랜드 축구선수·기자, 1911-1984)를 소개한 기사들은 아스널을 “세 번째 백 게임을 창시한 구단”, “세 번째 백 게임을 발전시킨 아스널”이라 불렀다.[14] 1939년 여름 런던 통신원은 한 걸음 더 나가 아스널을 “이제 프로 축구에서 거의 보편적이 된 세 백 게임을 처음 채택한 구단”이라 썼다.[15]
불과 세 해 사이에 아스널은 이해한 구단에서 창시한 구단으로, 다시 처음 채택한 구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사이 1925년에 대해 새로 밝혀진 사실은 하나도 없다. 늘어난 것은 하이버리의 트로피뿐이다. 하면 이긴 쪽이 기원까지 가져간 것인가. 적어도 이 세 해의 지면은 그렇게 움직였다. 1926년에 이름이 불린 뉴캐슬과 커닝엄은 1930년대에 우승을 쌓지 못했고, 해법을 가장 오래, 가장 잘 굴린 구단이 해법의 시작까지 넘겨받았다.
버컨, 기자가 된 제안자
두 번째 고쳐 쓰기는 한 사람의 이력에서 나온다. 1928년 5월 5일 에버턴 원정을 끝으로 버컨이 은퇴했을 때 뉴질랜드 지면은 그가 런던 일간지 스포츠부에 자리를 얻었다고 전했고, 같은 해 여름에는 이미 『데일리 뉴스』(Daily News; 런던 일간지, 뒤에 『뉴스 크로니클』)에 기고한 그의 글이 인용되고 있었다.[9] 그 뒤 버컨은 BBC 라디오의 해설자가 되었고, 1947년 축구기자협회(Football Writers’ Association)를 함께 세웠으며, 1951년 9월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 이름을 건 월간지 『찰스 버컨스 풋볼 먼슬리』(Charles Buchan’s Football Monthly; 1951년 창간한 영국 축구 월간지)를 편집했다. 회고록 『A Lifetime in Football』은 그 한가운데인 1955년에 나왔다.[9]
회고록의 줄거리는 이렇다. 1925년 여름 아스널에 온 뒤로 새 규칙에 맞는 배치를 여러 번 건의했지만 흘려듣던 채프먼이 뉴캐슬에서 일곱 골을 먹고서야 비로소 그를 불렀고, 버컨은 센터하프가 페널티 지역 앞을 지키고 인사이드 포워드 한 명이 오가는 안을 내며 그 역할에 3군 하프백 앤디 닐(Andrew Neil; 스코틀랜드 축구선수, 1892-1941)을 추천했다.[8] 당시 런던 이즐링턴의 지역 주간지 『이즐링턴 가제트』(Islington Gazette)는 0-7에 대해 팀을 재편해 버컨을 묶은 쪽이 뉴캐슬이었다고 적었고, 회고록은 이틀 뒤의 4-0을 기억하는 대신 이어진 홈 2-3 패배와 원정 0-4 패배를 적지 않았다.[8]
기실 이 회고록에서 가장 곱씹을 만한 대목은 따로 있다. 버컨은 그날보다 훨씬 전부터 그런 스토퍼가 많았다고 스스로 적었다.[8] 1926년 설문의 센터하프들이 한 말과 정확히 포개지는 진술이다. 제안자라 자처한 사람이 발상은 다들 알던 것이라고 제 손으로 적어 두었건만, 30년 뒤의 독자 손에 남은 것은 호텔 방의 장면이었다.
물론 버컨이 없는 일을 지어냈다고 몰아세울 까닭은 없다. 참패한 날 밤 주장과 감독이 머리를 맞대는 일이야 어느 구단에서든 있었을 테니. 허나 두 기록을 나란히 놓으면 무엇이 살아남았는지가 보인다. 1926년의 지면에는 장면이 없다. 센터하프 몇 사람의 의견, 심판의 한 문장, 동료를 두고 한 전언이 있을 따름이다. 1955년의 회고록에는 참패와 밤과 호텔 방, 흘려듣던 감독과 마침내 받아들여진 제안이 있다. 게다가 앞의 것은 주간지 설문에 한 줄씩 이름을 건 말이었고, 뒤의 것은 제 이름을 건 월간지 편집실에서 나온 책이었다. 같은 가을을 두고 한 이야기라 한들, 어느 쪽이 30년을 버텼을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만하다.
참호전이 된 축구와 1939년의 후퇴
세 번째 백이 퍼지는 동안 영국 지면은 그 값을 계속 따졌다. 첫 신호는 개막일에 이미 나왔다. 1925년 8월 29일 웨스트햄 원정에서 0-1로 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장 프랭크 바슨(Frank Barson; 잉글랜드 축구선수, 1891-1968)은 공격수를 도우러 올라갈 수 없게 된 센터하프의 처지를 겪고서, 새 규칙을 하프백과 풀백의 “영혼을 파괴하는 법”이라 불렀다고 하우크로프트는 전한다.[4] 1934년 가을 런던의 한 스포츠 통신은 오프사이드 개정이 스토퍼 센터하프와 과장된 W 포메이션을 낳았고 축구가 지금 그 때문에 앓고 있다고 썼다.[16] 1936년 『맨체스터 가디언』의 기고자는 가장 선명한 비유를 남겼다.
종심 방어라는 새 대응은 대체로 구경거리로서의 축구를 깎아 먹었다. 참호전이 기병 돌격의 화려함을 앗아 갔듯이.
The new counter of defence in depth may in general have detracted from the game as a spectacle, just as trench warfare has robbed the cavalry action of its glamour.
『맨체스터 가디언』의 한 기고자가 1936년, 개정 뒤 10년의 축구를 돌아보며
같은 기고자가 글머리에서 개정의 배경으로 든 것이 전후 영국의 속도였음을 떠올리면 묘한 비유다. 전쟁에서 막 벗어나 속도를 찾던 사회가 규칙을 바꿨는데, 10년 뒤 그 규칙이 낳은 축구를 설명하려고 다시 참호를 불러냈으니 말이다. 같은 글은 인사이드 포워드가 때로 “깊은 W를 평평한 M으로” 바꾼다고도 적었다. 훗날 WM이라는 이름으로 굳는 두 글자가 이 무렵 이미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해법에 끝까지 저항한 사람도 있었다. 더비 카운티의 감독 조지 조비(George Jobey; 잉글랜드 축구선수·감독, 1885-1962)는 매크래컨과 같은 시절 뉴캐슬에서 뛴 사람이다. 1934년 가을 그는 과학적으로 뛰는 축구가 더는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고,[16] 잉글랜드 대표 센터하프 잭 바커(John William Barker; 잉글랜드 축구선수·감독, 1906-1982)에게 세 번째 백 게임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대표 선발진은 1934년 11월 웨일스전에 바커를 “세 번째 백 유형이 아니라서” 뽑았고, 이듬해 12월 잉글랜드 리그 대표팀 선발진은 그를 빼고 세 번째 백 정책을 따르는 센터하프를 세웠다. 1938년 가을 조비가 마침내 물러서 바커를 스토퍼로 세우자, 더비는 여덟 경기에서 일곱 골만 내줬다.[17] 1925년 가을 “널리 인정”된 해법이 잉글랜드 1부 리그의 마지막 버팀목까지 넘어뜨리는 데 13년이 걸렸다.
1939년 여름에는 거꾸로 가는 소식이 나왔다. 아스널이 세 백 게임을 처음 채택했듯 이번에는 처음으로 옛 방식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이다. 런던 통신원은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대중은 바위 같은 수비로 이기고 이따금 골을 낚아채는 경기보다 더 재미있는 것을 원하며, 아스널은 1938/39 시즌 관중과 재정에서 부진했다.[15] 같은 해 가을의 한 칼럼은 제목부터 “스토퍼를 멈춰라”(Stop the Stopper)였다.[15] 1925년 가을 하우크로프트가 던진 물음, 대중은 축구를 원하는가 골을 원하는가를 14년 뒤 런던 통신원이 거꾸로 다시 던지고 있었다. 골을 늘리려고 바꾼 규칙에 가장 성실하게 답한 팀이, 이번에는 볼거리를 앗아 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1932년 스탬퍼드 브리지와 다뉴브의 선택
한편 바다 건너 대륙의 사정은 사뭇 달랐다. 잉글랜드 출신 지미 호건(James Hogan; 잉글랜드 축구선수·지도자, 1882-1974)이 빈과 부다페스트에 심은 짧은 패스 축구, 그리고 그것을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문법으로 삼은 후고 마이슬(Hugo Meisl; 오스트리아 축구 행정가·감독, 1881-1937)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헝가리 황금의 팀 편에서 길게 다뤘으니, 여기서는 세 번째 백과 맞닿는 지점만 짚는다.



1931년 마이슬의 오스트리아는 스코틀랜드를 5-0으로, 독일을 원정에서 6-0으로, 홈에서 다시 5-0으로 눌렀다. 빈의 스포츠 신문들이 이 팀을 분더팀(Wunderteam; 기적의 팀)이라 불렀을 때, 마이슬은 1932년 2월 빈의 일간 스포츠지 『스포르트타크블라트』(Sport-Tagblatt)에 “분더팀, 헛소리!”라고 받아쳤다.[19] 배치는 끝까지 2-3-5였다. 센터하프 요제프 스미스티크(Josef Smistik; 오스트리아 축구선수, 1905-1985)는 공격형으로 중원에 남았고, 센터포워드 마티아스 신델라르(Matthias Sindelar; 오스트리아 축구선수, 1903-1939)는 아래로 내려와 공을 받았다.[20]
1932년 12월 7일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두 계보가 만났다. 잉글랜드가 4-3으로 이겼지만, 0-2로 끌려가던 오스트리아가 후반에만 세 골을 넣었다. 이튿날 『데일리 텔레그래프』(Daily Telegraph)의 프랭크 콜스(Frank Coles; 잉글랜드 축구 기자)는 오스트리아가 적어도 비길 자격이 있었다고 쓰고, 잉글랜드의 약점을 전술에서 찾았다.[18]
하트가 세 번째 백을 맡을 줄 알았다. 그런데 좀처럼 그 자리에 서지 않더니, 오스트리아에 한가운데 길을 번번이 활짝 내주고 말았다.
I expected that Hart would have been detailed for duty as a third back. He rarely assumed that position, and as a consequence Austria's down-the-middle route was often wide-open.
프랭크 콜스가 스탬퍼드 브리지 경기 이튿날 잉글랜드 센터하프 하트를 두고
1932년의 잉글랜드 기자에게 세 번째 백은 이미 대표팀이 당연히 갖춰야 할 기본값이었고, 그것이 빠진 자리를 오스트리아가 파고들었다. 경기 뒤 채프먼이 마이슬에게 보낸 편지는 빈 시립·주립 문서고의 마이슬 유고에 남아 있다.[19]
잉글랜드전 결과야 당신들이 남기고 간 훌륭한 인상에 비하면 그야말로 부차적인 일이었습니다. (…) 이 나라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었습니다.
The result of the match v. England was altogether secondary compared with the fine impression you have left … a red letter day in the history of Association football in Britain.
허버트 채프먼이 스탬퍼드 브리지 경기 뒤 후고 마이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 번째 백으로 리그를 휘어잡아 가던 감독이, 세 번째 백을 쓰지 않는 팀에게 보낸 편지다. 인사치레가 섞였을 터이나, 1932년의 채프먼이 오스트리아의 축구를 틀린 축구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만은 읽힌다. 오스트리아는 그 뒤로도 오래 2-3-5를 지켰다. 오스트리아에서 처음 WM으로 바꾼 클럽은 1952년 가을 에디 프뤼비르트(Edmund Frühwirth; 오스트리아 축구 감독)의 바커 빈으로 기록되고, 그는 빈 학파의 무덤을 판다는 비난까지 들었다. 대표팀은 1954 FIFA 월드컵 4강에서도 2-3-5로 서독에 1-6으로 졌다.[20] 그렇다면 다뉴브 쪽은 WM을 거부한 것일까. 필자는 이미 가진 축구를 지켰다는 쪽에 무게를 둔다. 호건과 마이슬의 축구는 1925년 개정보다 먼저 뿌리를 내렸고, 뒷공간이 넓어진 새 규칙은 짧은 패스로 그 공간을 파고들 여지를 오히려 넓혀 주었다.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포초(Vittorio Pozzo; 이탈리아 축구 감독, 1886-1968)는 인사이드 포워드를 내린 2-3-2-3, 곧 메토도로 1934년과 1938년 FIFA 월드컵을 가져갔고, 이탈리아 클럽들이 WM, 이른바 시스테마로 넘어간 것은 1940년대 토리노에 와서다. 그 전환은 그란데 토리노 WM 전술에서 이어진다.
영국 안에서도 세 번째 백을 깨는 길은 일찍부터 궁리되고 있었다. 1933년 8월 뉴질랜드 지면이 옮긴 한 영국 논자의 제안은, 센터포워드가 앞에서 상대 센터하프와 부딪히는 대신 뒤로 처져 V자 공격의 꼭짓점이 되고, 두 인사이드 포워드가 “준 센터포워드”(semi-centre-forwards)가 되어 앞으로 나가는 배치였다. 처진 센터포워드가 상대 센터하프를 제 자리에서 끌어내고, 그 뒤로 두 사람이 파고든다는 것이다. 제안자는 연결이 끊기면 개인 플레이로 흩어질 위험도 함께 적었다.[21] 20년 뒤 이 그림을 실제로 그라운드에 올린 것은 헝가리였다. 부코비 마르톤(Bukovi Márton; 헝가리 축구 감독, 1903-1985)은 1940년대 말 MTK에서 WM의 센터포워드를 뒤로 빼는 변형을 만들었고, 셰베시 구스타브(Sebes Gusztáv; 헝가리 축구 감독, 1906-1986)가 그것을 대표팀으로 가져갔다.[22] 1953년 11월 25일 웸블리에서 히데그쿠티 난도르(Hidegkuti Nándor; 헝가리 축구선수, 1922-2002)가 내려서자, 잉글랜드의 센터하프 해리 존스턴(Harry Johnston; 잉글랜드 축구선수, 1919-1973)은 따라 나설지 자리를 지킬지 끝내 정하지 못했고 잉글랜드는 3-6으로 졌다. 처진 센터포워드가 상대 센터하프를 제 자리에서 끌어낸다는, 1933년 제안서가 그린 바로 그 장면이었다.
다섯 가설의 재판정
1925/26 시즌 리그 최소의 실점 증가, 1930/31-1937/38 여덟 시즌 중 일곱 시즌 최소 실점, 1936-39년 지면의 아스널 기원설
1925년 가을 이미 “널리 인정된” 해법, 1926년 설문에 아스널 이름이 없음, 기원설이 우승 이후에 굳음
발명보다 완성과 지속의 공으로 좁혀진다회고록의 구체적인 줄거리, 10월 5일 이후 득점의 증가(경기당 1.75골에서 2.21골)
30년 뒤 본인의 기록, 0-7 이전 수비가 이미 리그 최상위, 전환 뒤 승점 속도 불변, 버컨 스스로 스토퍼가 전부터 있었다고 적음
아스널 내부의 한 제안으로는 그럴 법하나 기원으로는 닫히지 않는다하우크로프트의 “널리 인정”, 타운로의 실험과 맥두걸의 거부, 시드의 “많은 빅클럽”, 1925/26 시즌 수비 격차의 붕괴
득점이 1930/31 시즌까지 오히려 늘었고 더비는 1938년까지 버텼다
발상은 1925년의 공유재였고, 실행은 13년에 걸쳐 퍼졌다1926년 딕슨의 증언, 1926/27 시즌 우승과 리그 최소 실점, 옛 덫의 주인이 먼저 새 해법을 찾았다는 개연성
딕슨의 말은 레인저스 동료에 대한 전언이고, 뉴캐슬의 누가 어떻게 뛰었는지는 이 증언에 적혀 있지 않다
1926년의 지면이 이름을 댄 구단1926/27-1927/28 시즌 실점 15-16위로의 추락과 1929/30 시즌 이후의 반등, 로버츠와 제임스의 합류 시점
1925/26 시즌 한 해의 수비 우위를 설명하지 못한다
1930년대 아스널 WM의 실체를 가장 잘 설명한다H1과 H2는 같은 줄거리의 두 주인공을 두고 다투지만, 둘 다 1925년 10월의 한순간에 WM을 묶어 둔다는 같은 약점을 안고 있다. 그 순간에 대해 당대 문서가 들려주는 것은 0-7과 4-0 두 개의 스코어이고, 42경기의 숫자는 그 순간을 전환점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반면 H3, H4, H5는 서로 다른 층위를 맡는다. H3는 발상이 어디서 왔는가를, H4는 당대 사람들이 누구를 먼저 보았는가를, H5는 1930년대의 WM이 무엇이었는가를 설명한다. 세 가설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포개진다.
그리하여 필자는 WM을 채프먼의 발명이라 부르지 않는다. 1925년 잉글랜드 축구가 함께 찾아낸 답을,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무너진 수비를 버리지 않고 1929년부터 여덟 해 동안 리그에서 가장 단단한 수비로 굴려 낸 체계라 부른다.
같은 문제에 호건과 마이슬은 짧은 패스로 답했고, 부코비와 셰베시는 WM을 받아들인 뒤 비틀어 답했다. 그리고 100년쯤 지나 펩 과르디올라가 다시 그린 3-2-4-1에서 WM의 뼈대가 비친다. 그 이야기는 펩 과르디올라 맨시티 3-2-4-1 전술에서 이어진다.
자료와 확인 경로
- 오프사이드 조문과 1925년 개정 — «Part 11: Offside», Cairney, 2013년; «Offside (association football)»·«International Football Association Board», Wikipedia. 개정 전 조문, SFA의 거듭된 제안, 1925년 6월 8일 잉글랜드축구협회 총회와 6월 13일 IFAB 파리 회의.
- 잉글랜드 1부 리그 전 경기 기록, 1922/23-1938/39 — engsoccerdata(James Curley 정리 데이터셋)의 경기별 결과로 필자가 시즌·구간·구단별 득실점, 변동계수, 순위를 계산. 시즌 합계는 RSSSF 1924/25·1925/26 순위표 합계와 대조해 일치를 확인.
- 매크래컨과 원 백 게임 — «The World of Sport», 『Taranaki Daily News』 1925년 8월 1일; «Association Football», 『Dominion』 1925년 4월 15일(영국 기사 전재).
- 하우크로프트의 1925년 칼럼 — «Goal-Mad: Soccer's New Off-side Rule», J. T. Howcroft, 『Sunday Chronicle』 기고, 『Southland Times』 1925년 11월 14일 9면 전재. 세 번째 백에 관한 문장과 바슨의 발언.
- 『애슬레틱 뉴스』 센터하프 설문 — «Soccer Code: Problem of Positions», 『Auckland Star』 1926년 5월 20일 13면. 키너, 타운로, 맥베인, 맥두걸, 딕슨의 답.
- 지미 시드의 1926년 관찰 — «Soccer Football: A New Proposal», 『Auckland Star』 1926년 6월 19일 25면.
- 아스널 1925/26 시즌 42경기 — [2]의 경기별 기록으로 구간 계산; «1925–26 Arsenal F.C. season», Wikipedia와 날짜·스코어 대조. 구단 공식 기사의 “1925년 9월 말” 표기는 경기 기록과 맞지 않아 따르지 않았다.
- 버컨 회고록과 1925년 10월 지면 — 찰리 버컨 『A Lifetime in Football』(1955) 95·97쪽을 인용한 Woolwich Arsenal 블로그·같은 블로그; 『Islington Gazette』와 『The Times』 당시 지면, 회고록이 볼턴전 패배를 빠뜨린 점은 같은 블로그(모두 회고록과 지면 인용을 옮긴 2차 자료).
- 버컨의 기자 경력 — «With the Round Ball», 『Manawatu Standard』 1928년 9월 8일(은퇴와 런던 일간지 입사, 채프먼의 구단 운영); 같은 난, 1928년 8월 11일(『Daily News』 기고 인용); «Charlie Buchan», Wikipedia(BBC 해설, 1947년 축구기자협회, 1951년 9월 『Football Monthly』, 1955년 회고록).
- 채프먼의 구단 운영에 대한 당대 평 — [9]의 1928년 9월 8일 기사; «Footballers in America Exploited Openly for Profit» 가운데 「Football League Reform」, 『Star』(크라이스트처치) 1927년 2월 5일 25면.
- 아스널 선수와 우승 기록 — «Herbie Roberts»·«Alex James», Wikipedia; «Herbert Chapman overview», Arsenal. 로버츠의 이적·데뷔·주전 시점, 제임스의 합류, 채프먼의 사망일과 우승 기록.
- 앤디 커닝엄 — «Andy Cunningham», Scots Football Historians Group(1891년 갈스턴 출생); «Andy Cunningham (footballer)», Wikipedia(뉴캐슬 이적과 감독 재임).
- 1936년 『맨체스터 가디언』 기고 — «Modern Tactics: Inside Forwards Important», 『Evening Post』 1936년 4월 24일 23면 전재. 더 밝은 축구, 경찰관, 아스널, 참호전 비유, 깊은 W와 평평한 M.
- 1937년 잉글랜드 아마추어 대표 순회 보도 — «Final Test», 『Evening Post』 1937년 6월 25일; «Last Association Test», 같은 신문 6월 28일.
- 1939년 아스널의 복귀와 “스토퍼를 멈춰라” — «Sport in Britain», 『Evening Star』 1939년 8월 23일(런던 7월 27일발); «No More “Third Back” Game?», 『Evening Post』 1939년 10월 21일.
- 1930년대 비판과 조비의 고백 — «London Sporting Letter», 『Star』(크라이스트처치) 1934년 10월 24일(런던 9월 12일발); «The W Formation», 『Northern Advocate』 1931년 7월 25일.
- 바커와 조비, 대표팀 선발 — «Sport in Britain», 『Evening Star』 1934년 11월 16일; 같은 난, 1935년 12월 13일; 같은 난, 1938년 11월 17일.
- 1932년 잉글랜드-오스트리아 — «International Soccer: How England Beat Austria», Frank Coles, 『Daily Telegraph』 1932년 12월 8일, 『Greymouth Evening Star』 1933년 1월 21일 전재; England 4-3 Austria, englandstats(득점 경과와 명단).
- 마이슬과 채프먼의 편지 — «Wunderteam»·«Hugo Meisl», Wien Geschichte Wiki. 1932년 2월 『스포르트타크블라트』의 발언, 빈 시립·주립 문서고 마이슬 유고(A3.1.1)의 채프먼 편지.
- 오스트리아의 2-3-5 — 오스트리아 대표팀 경기 기록 1930-1959, Wikipedia; ORF Sport, 2026년 5월 26일; Ballverliebt, 2020년 4월 10일; «Edi Frühwirth», Wikipedia.
- 1933년 V자 공격 제안 — «New Attack for Soccer Forwards», 『Manawatu Times』 1933년 8월 1일 4면(영국 논자의 제안 전재, 기고자명 미기재).
- 부코비와 1953년 웸블리 — «Márton Bukovi»·«England v Hungary (1953)», Wikiped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