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 피를로의 코베르차노 논문은 표지와 머리글에 서로 다른 제목을 달고 있다. 이 글은 논문 원문과 같은 해 두 동기의 논문, 선수 시절의 경기 기록, 감독으로 맡은 세 팀의 결과와 기대값을 한데 겹쳐, 탁월한 이론이 왜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는지를 가설별로 따진다.
2020년 9월 16일, 이탈리아축구연맹(Federazione Italiana Giuoco Calcio, FIGC) 기술부(Settore Tecnico; 지도자 교육과 자격을 관장하는 FIGC 기구) 누리집에 논문 두 편이 나란히 올라왔다. 그중 한 편의 표지에는 굵은 파란 글씨로 「IL CALCIO CHE VORREI」, 곧 ‘내가 하고 싶은 축구’라는 제목이 박혀 있다. 그런데 표지를 넘기면 사정이 달라진다. 나머지 스물아홉 쪽의 머리글마다 「IL MIO CALCIO」, ‘나의 축구’라는 다른 이름이 한결같이 붙어 있는 까닭이다. 저자는 불과 한 달여 전 유벤투스 1군의 지휘봉을 잡은 안드레아 피를로(Andrea Pirlo; 이탈리아 축구선수·감독, 1979-)였다.
필자는 이 어긋남을 단순한 편집상의 실수로 넘기기 어려웠다. ‘하고 싶은 축구’는 조건법(condizionale; 조건이 충족될 때의 바람을 나타내는 이탈리아어 서법)에 기대어 선 바람이고, ‘나의 축구’는 이미 제 손에 쥔 것을 부르는 소유의 언어다. 감독 데뷔를 목전에 둔 당대 최고의 레지스타가 한 편의 논문에 이토록 결이 다른 두 이름을 붙였다면, 그 간극이야말로 이후 그의 감독 경력을 읽어 낼 단초일지 모른다. 이 글은 그 간극을 사료와 기록으로 재어 보는 문헌고찰이다.
- ① 기원
선수 피를로는 누가, 왜 수비 앞으로 옮겼고 그 자리는 어디서 막혔나
- ② 논문
논문은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을 비워 두었으며, 왜 호평을 받았나
- ③ 결과
유벤투스와 이후 두 팀에서 논문은 어디까지 구현됐나
- ④ 가설
선수 구성, 시간, 구단, 경험 가운데 무엇이 틈을 만들었나
- ⑤ 통제
같은 해 같은 지도교수 아래 논문을 쓴 두 레지스타 출신과 비교한다
표지의 「하고 싶은 축구」와 머리글의 「나의 축구」
제목이 둘로 갈린 사연은 당시 보도에 남아 있다.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 로마에서 발행하는 전국 일간지)는 2020년 9월 15일, 피를로가 처음 제출한 논문 표지에 「Il mio calcio」가 적혀 있었으며 지도교수 렌초 울리비에리(Renzo Ulivieri; 이탈리아 축구 감독·코베르차노 교수, 1941-)가 이를 고치도록 했다고 전했다.[2] 공개된 PDF는 표지만 「Il calcio che vorrei」로 바뀌었을 뿐, 본문 머리글은 애초의 이름을 고스란히 달고 있다.


2쪽부터 30쪽까지 같은 머리글이 반복된다.
기실 어느 제목이 먼저였는지보다 흥미로운 것은 두 제목이 저마다 가리키는 대상이다. 서론은 “내 축구의 기초가 되는 생각”으로 운을 뗀 뒤, 곧장 “나는 전체적이고 집단적인 축구를 하고 싶다”는 조건법의 문장으로 넘어간다. 결론에 이르러서는 이 축구가 “선수로서의 내 경로와 은퇴 뒤의 공부에서 태어났다”고 스스로 연원을 밝힌다. 저자가 논문의 뿌리를 선수 시절에 묻어 두었으니, 논문을 펼치기에 앞서 선수 피를로의 자리가 어떻게 빚어졌는지부터 복기할 필요가 있다.
브레시아에서 수비 앞으로 내려간 트레콰르티스타
피를로는 애초부터 레지스타(regista; 원래 영화감독을 뜻하며, 축구에서는 수비 앞에서 공격의 방향과 속도를 정하는 후방 플레이메이커)가 아니었다. 인테르에서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하던 시절 그의 자리는 공격형 미드필더, 이탈리아어로 트레콰르티스타(trequartista; 상대 수비와 미드필드 사이에서 공격을 마무리하는 역할)였다. 전환점은 2001년 임대로 건너간 브레시아에서 찾아왔다. 감독 카를로 마초네(Carlo Mazzone;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37-2023)가 그를 수비 바로 앞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마초네는 피를로가 유벤투스 감독에 오른 2020년 8월 『라 레푸블리카』 인터뷰에서 그 결정을 직접 회고했고,[9] 피를로 역시 인테르 소속이던 무렵 마초네의 전화로 새 자리를 제안받았으며 그 자리가 커리어의 분기점이었다고 여러 차례 술회했다.[10]
같은 해 여름 밀란으로 옮긴 피를로는 카를로 안첼로티(Carlo Ancelotti;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59-)와 의견을 나눈 끝에 같은 자리에 섰고, 이후 10년 동안 그 포지션의 전범이 되었다. 한편 2011년 유벤투스에서 만난 안토니오 콘테(Antonio Conte;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69-)를 두고는 2023년 라디오 세리에 A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나를 감독처럼 상황을 분석하게 만든 사람”이라 평했다.[11]
- 브레시아 · 마초네
트레콰르티스타를 수비 앞으로 내려 레지스타로 세웠다.
- 밀란 · 안첼로티
같은 자리를 팀의 중심으로 삼아 두 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함께했다.
- 유벤투스 · 콘테
피를로가 처음으로 감독의 눈으로 경기를 분석하게 됐다고 회고한 시기다.
이 연원에서 먼저 짚어야 할 대목은 피를로의 자리가 그 자신의 설계에서 나온 결과물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마초네는 제 선수단의 면면을 살핀 끝에 한 선수의 위치를 옮겼고, 안첼로티는 그 결정을 밀란의 선수 구성 안에서 다시 활용했다. 요컨대 선수 피를로가 체득한 것은 완성된 자리였으되, 그 자리를 빚어낸 판단의 공정은 스승들의 몫이었다. 이 구분은 논문을 읽는 내내 유효한 잣대로 남는다.
2010년 산시로와 올드 트래퍼드의 180분
공이 한 사람에게 모이는 팀은 그 한 사람이 봉쇄되는 순간 흐름 전체가 멎는다. 피를로의 선수 시절에서 이 약점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무대는 2009-10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두 경기였다. 당시 박지성(대한민국 축구선수, 1981-)과 피를로는 두 경기 모두 선발로 나서 풀 타임으로 경기를 소화했다.[12]
2-3
선발 · 풀 타임
선발 · 풀 타임
4-0
선발 · 풀 타임 · 1골
선발 · 풀 타임
합계 7-2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진출.
피를로는 2013년 자서전 『Penso quindi gioco』(생각한다, 그러므로 뛴다; 알레산드로 알치아토와 함께 쓴 회고록)에서 박지성을 역사상 첫 “핵추진” 한국인이라 부르며, 공이 아닌 자신을 막도록 프로그램된 선수로 묘사했다.[13] 같은 해 알렉스 퍼거슨(Alex Ferguson; 스코틀랜드 축구 감독, 1941-) 역시 자서전에서 박지성을 붙인 뒤 피를로의 패스 성공률을 75%에서 25%로 끌어내렸다고 적었다.[14]
두 회고가 방증하는 바는 분명하다. 한 사람에게 집중된 경기 조율은 한 사람의 수비수로도 얼마든지 끊어 낼 수 있다. 피를로가 이 경험을 논문까지 가져갔는지는 짐작의 영역에 머물 법하지만, 뜻밖에도 논문 안에는 저자 자신의 문장으로 그 연결 고리가 적혀 있다.
논문이 레지스타라는 말을 쓴 두 자리
서른 쪽 분량의 논문에서 “regista”라는 낱말은 단 두 번 등장하는데, 흥미롭게도 어느 쪽도 중앙 미드필더를 가리키지 않는다. 한 번은 센터백을, 한 번은 풀백을 수식한다. 선수 역할을 다룬 장에서 피를로는 센터백이 팀의 “첫 번째 레지스타들”이 되었다고 쓰고, 그 까닭을 “play들이 받는 수많은 대인마크”에서 찾는다. play는 이탈리아에서 레지스타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바로 아래 풀백 항목에는 빌드업 초기에 풀백의 비중이 커져 “어떤 경우에는 레지스타 풀백”이라 부를 만하다는 서술이 이어진다. 2010년 두 경기 내내 봉쇄당했던 레지스타가 10년 뒤 제 논문에서는 레지스타를 중앙의 한 자리에서 떼어 내 뒤와 옆으로 흩어 놓은 셈이다. 이 분산은 공격 전개 장의 도형에서 한층 구체적인 형상을 얻는다.
3-2-5 도형과 숫자로 적힌 압박 기준
논문의 공격 전개는 고정된 대형이라는 관념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피를로는 A. 갈리아르디의 말을 빌려 “현대 축구에서 역할은 위치가 아니라 기능”이라 인용한 뒤, 공격을 세 개의 그릇으로 나눈다. 최대 폭(ampiezza), 수비와 미드필드 사이의 마무리 지역(rifinitura), 뒷공간 침투(profondità)다. 그릇은 누가 채우든 늘 가득 차 있어야 하며, 선수들이 끊임없이 자리를 바꿔 가며 채울수록 바람직하다는 것이 그의 요지다.
논문은 상대가 한 명으로 압박하는지 두 명으로 압박하는지 읽고 중앙 미드필더가 두 센터백 사이로 “춤추듯” 내려간다고 쓴다. 선수 특성과 상황에 따라 2-3-5로 바뀌며 회전도 달라진다.
수비와 전환을 다룬 장에는 구체적인 수치가 등장한다. 피를로는 자신의 스태프와 함께 수행한 분석이라며 정상급 팀의 기준치를 제시했다. 측정 방법과 표본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한계는 분명하나, 감독 후보가 제 팀에 요구할 행동을 계량 가능한 기준으로 번역하려 한 의지만큼은 뚜렷이 읽힌다.
그중 약 70%가 즉시 탈환. 평균 5초 동안 2.5명이 가담
유효 경기 시간 12-14분, 약 60%가 공 탈환으로 이어짐
평균 2회 패스, 세 명 가까운 선수가 관여
나머지 선수를 공보다 아래에 낭비하지 않기 위한 제한된 우위
논문에서 한 문장으로 남은 맥락 만들기
논문을 끝까지 따라가면 채워진 칸과 비어 있는 칸이 선명하게 갈린다. 피를로는 선수의 ‘특성’을 열다섯 차례나 언급한다. 풀백의 특성에 따라 폭을 맡길지 세 번째 센터백으로 쓸지 가르고, 역습 전환에서는 “가용한 선수들의 특성이 감독의 생각과 원칙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줘야 한다”고까지 적는다. 다만 여기서 특성이란 이미 짜인 모형 안에서 어떤 회전을 택할지 결정하는 변수에 머문다.
선수를 대하는 전제는 서론의 한 문장에 응축돼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술적이고 역동적인 선수를 찾을 것이다.” 이어 연습을 통해 선수들이 상황을 인식하고 유동적인 경기 맥락에 적응하도록 돕겠다고 밝히며, 다음 쪽에서는 선수들이 기량을 온전히 펼칠 이상적인 맥락, 곧 전술·기술·체력·정서의 조건을 정의하고 만들어 내는 일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도전”이 되리라 쓴다. 저자는 가장 어려운 과업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허나 그 과업을 어떻게 수행할지는 나머지 스물다섯 쪽 어디에서도 다시 거론되지 않는다.
포지션별 이상적 자질, 특성에 따른 회전 선택
기대에 못 미치는 선수를 모형에 맞게 바꾸는 방법
3-2-5와 2-3-5, 세 그릇, 롬보(rombo; 공 주위의 다이아몬드형 지원 배치), 네 가지 하위 원칙과 열한 가지 세부 원칙
이 구조를 몇 주에 걸쳐 어떤 순서로 입힐지
재압박·높은 압박·역습의 기준값
측정 방법, 자기 팀의 출발점
연습으로 상황 인식을 돕겠다는 한 문장, 맥락 창조가 가장 큰 도전이라는 한 문장
훈련 세션, 실제 경기 장면, 실패했을 때의 수정 절차
크라위프·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 판할의 아약스, 안첼로티의 밀란, 콘테의 유벤투스
본인이 지휘한 팀의 사례
물론 마지막 칸의 공백을 피를로의 흠결로 돌릴 수는 없다. 논문을 쓰던 시점의 그에게는 1군을 지휘한 이력 자체가 없었으니 제 팀의 사례를 적을 방도도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공백 탓에 이 논문은 도착지로 가는 경로보다 도착지 자체를 그린 설계도에 가까워졌고, 설계도를 현장으로 옮기는 공정은 빈칸으로 남았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 같은 교실에는 같은 상처를 지닌 레지스타가 한 명 더 있었으니, 그가 이 빈칸을 어떻게 메웠는지를 보면 공백의 크기가 가늠된다.
같은 교실의 이탈리아노가 쓴 「모두가 레지스타」
FIGC가 피를로의 논문과 같은 날 공개한 또 한 편은 빈첸초 이탈리아노(Vincenzo Italiano; 독일 태생 이탈리아 축구선수·감독, 1977-)의 「선수에서 감독으로의 이행: 기억할 것과 서랍에 넣어 둘 것」이다. 지도교수 역시 울리비에리였다. 이 논문 1장 2절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노는 헬라스 베로나에서 오래 활약한 중앙 미드필더였고, 논문에서 자신을 공격수나 공격형 미드필더의 숨 막히는 대인마크에 시달리던 “play”로 소개한다. 막힌 레지스타를 대신할 공급원이 팀에 없었으며, 수비수들이 빌드업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은 습관이 들지 않은 탓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피를로가 센터백을 첫 번째 레지스타로 부른 까닭과 같은 경험에서 출발해 같은 처방에 도달한 셈이다.
두 논문이 갈라서는 지점은 그다음 질문이다. 이탈리아노는 곧바로 되묻는다. 습관은 경기에서 단번에 생기는가, 매일 반복하는 훈련 과정에서 쌓이는가, 이미 자리 잡은 선수들만으로도 가능한가. 2장 3절에는 아예 적응성의 원칙(principio dell’adattabilità)이 독립된 항목으로 서 있다. 그는 트라파니와 스페치아에서 “내게 맡겨진 인적 자원”에 맞춰야 했다고 고백하고, 같은 4-3-3을 트라파니에서는 수직적이고 공격적인 압박으로, 세리에 B의 강호들을 상대한 스페치아에서는 인내심 있는 점유로 달리 풀어낸 과정을 실제 경기 장면의 시간 표시와 함께 제시한다. 논문의 마지막 장은 매주 활용하는 훈련 세션 열 가지로 채워져 있다.
울리비에리의 호평과 스콘체르티의 비판
피를로의 논문은 107/110점을 받았다. 같은 과정의 최고점은 108점을 받은 티아구 모타(Thiago Motta; 브라질 태생 이탈리아 축구선수·감독, 1982-)의 몫이었다.[5] 지도교수 울리비에리는 발표 이튿날 인터뷰에서 피를로가 “미래를 내다보는 현대적인 시각”을 지녔으며 콘테를 모방하기보다 뛰어넘으려 한다고 평했다.[6] 전술 분석가 미켈레 토사니 또한 역할을 기능으로 보는 관점, 첫 빌드업 지역의 +1 우위, 다섯 개의 세로 통로를 모두 채우는 배치를 이탈리아 축구에서 보기 드문 접근으로 꼽으며, 로베르토 만치니의 이탈리아 대표팀이나 로베르토 데제르비의 사수올로와 같은 흐름에 위치시켰다.[7]
반론 역시 곧바로 뒤따랐다. 원로 기자 마리오 스콘체르티(Mario Sconcerti; 이탈리아 스포츠 기자, 1948-2022)는 이 논문을 작은 수치라 일갈하며, 감독이 되는 최종 시험이 이 수준이라면 이탈리아 축구가 어찌 성장하겠느냐고 물었다. 울리비에리는 대학 논문이 그러하듯 코베르차노의 논문 또한 스로인 하나 같은 소소한 주제로 쓸 수 있다고 맞받았다.[8] 『일 파토 쿼티디아노』(Il Fatto Quotidiano; 이탈리아 일간지)는 코베르차노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무색하게 만든다는 반어적 제목으로 이 논문을 다뤘다.[15]
도착지의 선명함
- 역할을 위치가 아닌 기능으로 정의
- 빌드업부터 전환까지 모든 단계의 원칙을 한 모형으로 연결
- 재압박·압박·역습을 수치 기준으로 번역
- 이탈리아의 새 세대 지도자들과 같은 방향
경로의 부재
- 원칙 상당수가 이미 유럽 정상급 팀의 표준
- 수치의 측정 방법과 출처가 없음
- 자기 팀 사례와 훈련 과정이 없음
- 최종 시험으로서 요구 수준에 대한 의문
기실 두 평가는 서로 다른 칸을 보고 있었다. 울리비에리와 토사니는 논문이 그려 낸 도착지의 완성도를 보았고, 스콘체르티는 그 도착지에 이르는 방법이 비어 있는 시험지를 보았다. 호평이 이론의 탁월함을 방증한다고 해서 비판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남는 물음은 이 설계도가 실제 팀에서 어디까지 구현되었느냐다.
부임 37일 뒤의 논문 발표와 6주의 준비
피를로의 감독 경력은 준비 기간이라 부를 만한 시간 없이 막을 올렸다. 유벤투스는 2020년 7월 말 그를 U23 팀 감독으로 발표했고, 불과 9일 뒤인 8월 8일 마우리치오 사리(Maurizio Sarri;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59-)를 경질한 당일 그를 1군 감독으로 끌어올렸다. 코로나19로 늦게 끝난 2019-20 시즌과 새 시즌 사이의 간격은 촉박했고, 피를로는 그 틈에 코베르차노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시험까지 치러야 했다.[4]
2019-20 세리에 A 최종 라운드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올랭피크 리오네에 탈락
사리 경질, 피를로 1군 감독 선임
코베르차노에서 논문 발표와 UEFA 프로 시험
FIGC가 피를로·이탈리아노 논문 공개
세리에 A 개막전, 유벤투스 3-0 삼프도리아
선수단의 면면도 크게 바뀌었다. 레지스타 자리를 지키던 미랄렘 퍄니치가 바르셀로나로 떠난 대신 아르투르가 합류했고, 곤살로 이과인과 블레즈 마튀이디는 계약을 해지했다. 알바로 모라타, 페데리코 키에사, 웨스턴 맥케니가 새로 가세했다. 이듬해 3월 포르투와의 16강 2차전 선발 11명 가운데 6명은 서른 살을 넘긴 선수였다.[17] 시즌 첫 소집 자리에서 안드레아 아녤리(Andrea Agnelli; 유벤투스 회장, 1975-) 회장은 선수단에게 피를로를 “아주 깊이 믿는 선택”이라 소개했다.[16]
초반 경기에서 논문의 흔적은 어렵지 않게 포착됐다. 2020년 10월 이탈리아 전술 매체 『아레아 코치』(Area Coach; 지도자 대상 전술 분석 매체)는 유벤투스가 다섯 개의 세로 통로를 채우고, 빌드업에서 롬보를 형성하며, 공을 잃은 직후 즉시 재압박하는 장면을 논문의 문장과 나란히 놓고 분석했다. 한편 같은 분석은 공격진의 개인 능력이 워낙 뛰어나 점유를 다지는 대신 곧장 공격으로 치닫는 선택도 잦았다고 짚었다.[18] 수비 국면에서는 4-4-2가 기본 골격이었다. 한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2020-21 시즌 리그 경기의 72%에서 4-4-2 구조가 쓰였다.[19]
기대승점 1위의 4위, 사리의 우승과 겹쳐 본 2020-21 시즌
결과는 널리 알려진 대로다. 공식전 52경기 34승 10무 8패, 2021년 1월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와 5월 코파 이탈리아 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원정 다득점 탈락, 그리고 세리에 A 4위. 유벤투스의 리그 9연패는 그렇게 막을 내렸고, 피를로는 2021년 5월 28일 경질되었다.[17] 경질 성명에서 그는 요청받은 목표를 모두 달성했으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끝이 났다는 소회를 남겼다.
결과만 놓고 보면 실패라는 판정은 손쉽다. 허나 경기 내용을 따로 떼어 보면 사정은 사뭇 달라진다. 기대득점(expected goals, xG; 슈팅 위치와 상황으로 계산한 득점 확률의 합)과 이를 토대로 한 기대승점(expected points, xPTS)을 제공하는 Understat의 세리에 A 경기 자료로 사리의 마지막 시즌과 피를로의 시즌을 합산해 보면, 두 시즌은 마치 거울에 비친 듯 뒤집혀 있다.[20]
2019-20 · 사리세리에 A 1위
기대승점 리그 3위, 실제 승점이 11.8점 많았다
2020-21 · 피를로세리에 A 4위
기대승점 리그 1위, 실제 승점이 1.5점 적었다
막대 길이는 두 시즌 모두 0점에서 95점까지 같은 눈금으로 그렸다.
| 순위 | 팀 | 승점 | 기대승점 | 득점 / xG | 실점 / xGA | 무페널티 xG 차 |
|---|---|---|---|---|---|---|
| 1 | 인테르 | 91 | 77.3 | 89 / 78.3 | 35 / 40.6 | +36.4 |
| 2 | AC 밀란 | 79 | 68.7 | 74 / 75.0 | 41 / 48.8 | +14.5 |
| 3 | 아탈란타 | 78 | 77.6 | 90 / 82.0 | 47 / 39.9 | +42.9 |
| 4 | 유벤투스 | 78 | 79.5 | 77 / 83.5 | 38 / 38.3 | +44.3 |
| 5 | 나폴리 | 77 | 73.8 | 86 / 75.0 | 41 / 41.9 | +30.7 |
Understat 경기별 자료 합산. 굵은 값은 리그 1위 지표. 시즌 전반기 19경기와 후반기 19경기의 무페널티 xG 차는 +21.9와 +22.4였다.
피를로는 논문 결론에서 축구가 득점이 적은 종목인 탓에 이길 자격이 있는 팀이 늘 이기지는 못한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중장기적으로는 경기력과 결과가 수렴한다는 연구가 적지 않으니 처음부터 좋은 경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2020-21 시즌은 바로 이 문장이 가장 가혹하게 시험대에 오른 시즌이었다. 한 시즌 전 유벤투스는 기대값보다 11.8점을 더 거둬들여 우승했음에도 사리는 UEFA 챔피언스 리그 탈락 이튿날 경질됐다. 반면 피를로의 팀은 리그에서 가장 우수한 기대값을 쌓고도 기대득점보다 6.5골을 덜 넣은 끝에 4위에 머물렀고, 경기력이 결과로 수렴할 ‘중장기’는 끝내 주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이 시즌에 한해서라면 논문이 그린 도착지의 상당 부분이 그라운드 위에 실제로 그려졌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이스탄불과 제노바에서 같은 구조를 옮겨 심은 두 시즌
그렇다면 유벤투스의 기대값을 떠받친 것이 선수들의 개인 능력이었다고 가정할 때, 그 능력이 사라진 곳에서 같은 구조는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피를로가 이후 맡은 두 팀이 그 물음의 실마리를 준다. 2022년 여름 튀르키예 쉬페르리그의 파티흐 카라귐뤼크(Fatih Karagümrük SK; 이스탄불 파티흐 지역 구단)를 맡은 피를로는 대형을 4-1-4-1로 바꿨으나, 한쪽 풀백이 안으로 좁혀 들어와 세 명의 수비 라인을 만들고 그 앞에 한 명을 두는 빌드업 구조만큼은 유벤투스 시절 그대로 유지했다.[19]
2023년 5월 24일 트라브존스포르에 1-4로 패한 뒤 팀은 9위에 놓여 있었다. 구단은 다음 시즌을 함께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며 리그 세 경기를 남긴 시점에서 피를로와 스태프의 조기 이탈을 허용했다. 팀은 남은 세 경기에서 2승 1무를 거둬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21] 따라서 이 7위를 피를로의 성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2023년 6월에는 세리에 A에서 강등된 UC 삼프도리아의 지휘봉을 잡았다. 구단은 1-3월 원천세와 사회보험료 미납으로 새 시즌을 승점 -2에서 출발해야 하는 처지였다.[22] 팀은 세리에 B 7위로 플레이오프에 올랐으나 예비 라운드에서 팔레르모에 0-2로 무릎을 꿇었다. 여름 이적시장에서 젠나로 투티노를 영입하며 승격을 겨냥한 두 번째 시즌은 세 경기 1무 2패로 삐걱거렸고, 피를로는 2024년 8월 29일 경질되었다.[23]
유벤투스
- 공식전
- 52경기 34승 10무 8패
- 리그
- 세리에 A 4위 · 기대승점 1위
- 우승
- 수페르코파 · 코파 이탈리아
- 끝
- 2021.05.28 경질
카라귐뤼크
- 리그
- 쉬페르리그 9위에서 이탈
- 시즌 최종
- 7위 (이탈 뒤 3경기 포함)
- 조건
- 빌드업 구조 유지, 대형 4-1-4-1
- 끝
- 2023.05.24 조기 이탈
삼프도리아
- 리그
- 세리에 B 7위 · 플레이오프 예비 라운드 탈락
- 조건
- 강등 직후 · 승점 -2 제재
- 이듬해
- 3경기 1무 2패
- 끝
- 2024.08.29 경질
두 팀에는 유벤투스에 없던 여름 동안의 준비 기간이 있었다. 반대로 유벤투스에 있던 것이 두 팀에는 없었으니, 호날두와 키에사처럼 구조의 빈틈을 개인 능력으로 메워 주는 선수들이다. 선수를 고를 여지가 좁아진 곳에서 같은 구조는 중위권 언저리에 머물렀다. 물론 쉬페르리그와 세리에 B는 Understat의 수집 범위 밖이어서 유벤투스와 같은 방식의 기대값 비교는 불가능하다. 이 한계를 전제한 채, 네 가지 가설을 같은 증거 위에 다시 올려 본다.
네 가지 가설을 같은 증거로 다시 재기
피를로의 이론과 결과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설명하는 통념은 대체로 넷으로 정리된다. 선수 구성이 맞지 않았다는 것, 원리를 몸에 새길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 구단이 여건을 그르쳤다는 것, 감독 경험이 일천했다는 것. 네 가설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으므로 각각이 어느 증거에서 힘을 얻고 어느 증거 앞에서 힘을 잃는지 따로 따져야 한다.
퍄니치 이탈, 30대 수비진, 이후 두 팀의 선수 수준
유벤투스가 리그 최고의 기대값을 만들었다
“선수를 찾는다”는 논문의 전제로 바뀌어 남는다부임에서 개막까지 43일, 그 사이의 논문과 시험
전후반 기대값이 평탄했다. 준비 기간이 있던 두 팀도 중위권이었다
시간 자체보다 시간을 쓰는 절차의 부재로 좁혀진다U23 선임 9일 만의 1군 승격, 사리의 우승 뒤 경질, 기대값 1위 뒤 경질
카라귐뤼크와 삼프도리아의 결과는 설명하지 못한다
유벤투스의 결말을 가장 잘 설명한다1군 지휘 경험 0년에서 시작, 콘테 시절에 시작된 감독의 시선
경험 부족은 세 팀 모두에 같은 상수라 차이를 가르지 못한다
첫 팀의 크기와 결합할 때 의미가 생긴다H1과 H2는 유벤투스만 놓고 보면 설득력이 약해지지만, 세 팀을 함께 두면 다른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유벤투스에서 논문이 도착지의 상당 부분을 구현한 것은 선수들이 이미 그 도착지에 가까운 기량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일 개연성이 크다. 논문 서론이 밝힌 대로 “기술적이고 역동적인 선수를 찾는” 방식은 그런 선수를 고를 수 있는 구단에서라야 작동한다. 선수를 고를 수 없는 구단에서는 주어진 선수를 모형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절차가 필요하고, 바로 그 절차가 논문에서 비어 있던 칸이다.
반면 H3는 정반대의 궤적을 그린다. 유벤투스라는 조건은 피를로 한 사람의 역량 문제와 떼어 놓고 볼 필요가 있는데, 그러한 분리는 같은 해 코베르차노를 나선 다른 감독이 몇 해 뒤 같은 벤치에 앉으면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모타와 이탈리아노, 같은 해 코베르차노를 나온 세 명의 경로
피를로, 모타, 이탈리아노는 2019-20 UEFA 프로 과정을 함께 이수했고 셋 모두 울리비에리의 지도 아래 논문을 썼다. 세 사람 모두 선수 시절 경기를 조율하던 중앙 미드필더였다는 공통점도 있다. 모타는 논문에서 제노아의 잔 피에로 가스페리니 밑에서 자신이 “레지스타 역할”을 맡았다고 적는다.[24] 출발점이 이토록 겹치는 세 사람의 논문과 경로를 나란히 놓으면, 네 가설 가운데 무엇이 사람에게서 비롯되고 무엇이 조건에서 비롯되는지 가려낼 수 있다.
| 항목 | 피를로 · 107점 | 이탈리아노 | 모타 · 108점 |
|---|---|---|---|
| 제목 | 하고 싶은 축구 | 선수에서 감독으로의 이행 | 공의 가치 |
| 출발 질문 | 원하는 축구의 구조 | 나는 왜 감독을 하는가 | 선수와 공의 관계 |
| 레지스타 | 센터백·풀백으로 분산 | “모두가 레지스타”를 1장 제목으로 | 모두가 공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문제로 |
| 선수를 대하는 전제 | 기술적이고 역동적인 선수를 찾는다 | 맡겨진 인적 자원에 적응한다 | 기술이 부족한 선수도 매일 공 훈련으로 끌어올린다 |
| 과정의 서술 | 연습에 관한 한 문장 | 습관 형성, 매일의 반복, 훈련 세션 10가지 | 훈련에서 공 접촉 습관, 스트레스와 자기효능감 |
| 실전 사례 | 영감을 준 팀 이름 | 트라파니·스페치아 경기 장면과 시간 표시 | 리즈 유나이티드, 독일 대표팀 장면 분석 |
| 분량 | 30쪽 | 83쪽 (도판 다수) | 28쪽 |
모타의 논문은 전술 구조보다 사람을 먼저 다룬다. 어린 시절 공을 잃는 일을 일종의 “범죄”로 여기며 자랐다는 기억에서 출발해, 공을 두려워하는 선수는 스스로 기술을 제한할 뿐 아니라 팀 전체에 스트레스를 전염시킨다고 진단한다. 처방은 훈련에서 공과의 접촉을 습관으로 만드는 일이며, 그 과정을 거치면 기술이 부족한 선수도 몇 달에 걸쳐 팀의 표현력에 이바지하게 된다는 것이다.[24] 이탈리아노는 적응과 반복으로, 모타는 선수의 심리와 성장으로 저마다 풀어냈으되, 두 사람이 수십 쪽에 걸쳐 채운 것은 피를로의 논문이 한 문장으로 남겨 둔 ‘맥락 만들기’의 공정이었다.
피를로
- 1군 지휘 경험 없음
- 유벤투스 · 4위, 컵 2개, 경질
- 카라귐뤼크 · 9위에서 이탈
- 삼프도리아 · 세리에 B 7위, 이듬해 경질
- 아랍에미리트 United FC · 1부 승격
모타
- 파리 생제르맹 U19
- 제노아 · 10경기 2승 3무 5패, 경질
- 스페치아 · 세리에 A 잔류
- 볼로냐 ·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
- 유벤투스 · 42경기 18승 17무 7패, 경질
이탈리아노
- 아마추어·하부 리그, 트라파니 세리에 B 승격
- 스페치아 · 구단 첫 세리에 A 승격, 잔류
- 피오렌티나 · 결승 3회 준우승
- 볼로냐 · 코파 이탈리아 우승
- 베식타시
세 경로를 겹쳐 보면 두 갈래의 대조가 드러난다. 먼저 모타는 스페치아와 볼로냐에서 선수를 끌어올리는 과정으로 결과를 증명한 뒤 유벤투스에 입성했으나, 2025년 3월 23일 한 시즌을 채우지 못한 채 경질됐다.[25] 과정을 입증한 감독마저 같은 벤치에서 같은 결말을 맞았다는 사실은 유벤투스에서의 결말을 피를로 개인의 결함만으로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H3가 가장 큰 무게를 얻는 대목이 바로 여기다.
다른 한편으로 모타 역시 첫 1군이었던 제노아에서는 10경기 만에 경질되었다. 충분한 준비 과정 없이 큰 기대 속의 1군을 곧바로 맡았다는 점에서 피를로와 모타의 출발은 포개진다. 반대로 하부 리그에서부터 적응과 반복의 기록을 쌓아 올린 이탈리아노는 트라파니와 스페치아의 승격, 피오렌티나의 결승 세 차례, 볼로냐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으로 한 계단씩 올라섰다.[26] H4, 곧 경험 부족은 그 자체로는 설명력이 약하나 첫 팀의 규모와 과정의 서술이라는 두 변수를 곁에 두면 세 사람을 가르는 선이 된다. 피를로는 두 변수 모두에서 가장 불리한 자리에서 출발했고, 유벤투스 이후 선수를 고를 수 없는 팀에서도 그 과정을 새로 써 내려가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증거의 무게
지금까지의 증거를 종합하면 간극은 단일한 원인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다만 원인의 무게중심은 시기에 따라 다르게 기운다.
구단의 조건
준비 없는 선임과 결과 중심의 판정. 논문의 구조는 개인 능력이 뛰어난 선수들과 함께 리그 최고의 기대값으로 나타났지만, 수렴할 시간을 받지 못했다. 같은 구단은 우승한 사리와 과정을 증명한 모타도 같은 방식으로 내보냈다.
경로의 부재
준비 기간은 있었지만 선수를 고를 수 없었다. “찾는다”를 전제로 한 모형은 주어진 선수를 끌어올리는 절차 없이 중위권에 머물렀다.
경험과 출발점
1군 경험 없이 가장 큰 팀에서 시작한 출발은 모든 시기의 배경에 깔린 조건이다. 단독 원인으로는 약하지만 다른 두 원인을 키웠다.
선수 피를로의 자리가 마초네와 안첼로티의 판단으로 빚어졌다는 연원, 대인마크에 가로막힌 경험이 “첫 번째 레지스타들”이라는 문장으로 옮겨진 흔적, 가장 어려운 과업을 한 문장으로 적고 지나간 논문, 기대값 1위의 4위, 선수를 고를 수 없던 두 팀의 정체, 그리고 같은 교실의 두 사람이 그 한 문장을 수십 쪽으로 풀어낸 방식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피를로의 논문은 도착지를 정확하게 그렸으나, 그 도착지로 선수들을 이끄는 길은 선수 시절 스승들이 대신 걸어 준 길이었다.
「Il mio calcio」와 「Il calcio che vorrei」 사이
이제 처음의 두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선수 피를로에게 논문의 축구는 분명 ‘나의 축구’였다. 브레시아와 밀란과 유벤투스에서 온몸으로 겪어 낸 축구였고, 크라위프의 바르셀로나에서 콘테의 유벤투스에 이르기까지 그가 함께 뛰었거나 맞섰던 팀들에게서 길어 올린 축구였다. 허나 그 축구가 만들어지는 동안 선수의 위치를 옮기고 선수단을 모형에 맞추는 일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는 완성된 자리에서 공을 받는 사람이었다.
감독이 된 피를로에게 같은 축구는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가능한 축구로 바뀌었다. 선수를 고를 수 있어야 하고, 경기력이 결과로 수렴할 시간이 주어져야 하며, 구단이 경기력과 결과를 분리해 읽어 줄 때라야 가능한 축구다. 유벤투스는 첫 번째 조건을 충족시켰으나 나머지는 허락하지 않았고, 카라귐뤼크와 삼프도리아는 첫 번째 조건부터 채워 줄 수 없었다. 울리비에리가 표지를 고치게 한 속내가 무엇이었든, 고쳐진 제목은 이 논문의 성격을 정확히 짚는다. 「Il calcio che vorrei」, 조건법으로 쓰인 ‘하고 싶은 축구’.
2026년 여름 피를로는 아랍에미리트의 United FC를 1부 리그로 끌어올렸고,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다가 선임이 무산된 뒤 구단의 잔류 확인을 받았다.[27] 그의 축구가 다시 ‘나의 축구’라는 이름을 되찾게 된다면, 그 계기는 더 정교한 설계도에서 오지 않을 공산이 크다. 논문에서 한 문장으로 남았던 칸, 곧 주어진 선수들을 설계도의 자리까지 데려가는 길을 그 스스로 써 내려가는 데서 비롯될 것이다.
출처와 기록주
- Andrea Pirlo, 「Il calcio che vorrei」, FIGC Settore Tecnico, Corso per allenatore professionista di 1ª categoria UEFA Pro, 2019-20, 지도 R. Ulivieri. 이 글의 1차 사료. 표지·머리글 제목, 레지스타 서술, 3-2-5 배치, 수치 기준, 결론을 원문으로 인용했다.
- 「Repubblica - Pirlo discute la tesi ma il titolo è sbagliato」, TuttoJuve, 2020.09.15. 『라 레푸블리카』 보도를 전한 기사. 표지 제목 수정 요구의 근거.
- Vincenzo Italiano, 「Passaggio calciatore-allenatore: cosa ricordare e cosa mettere nel cassetto」, FIGC Settore Tecnico, UEFA Pro 2019-20, 지도 R. Ulivieri. “모두가 레지스타”, 적응성의 원칙, 트라파니·스페치아 사례와 훈련 세션 비교의 1차 사료.
- 「Juve, esami per Pirlo: a Coverciano tesi per il patentino Uefa Pro」, Calcio e Finanza, 2020.09.14. 과정 개시 시기(2019년 9월 말)와 시험 일정.
- 「Pirlo, il suo "calcio totale e collettivo" vale 107/110, il migliore è Thiago Motta」, SportMediaset, 2020.09. 피를로 107점, 모타 108점 보도.
- 「Juventus, Ulivieri su Pirlo: 'Non imiterà Conte, credo voglia andare oltre'」, Sky Sport, 2020.09.15. 지도교수의 평가. 이해관계가 있는 호평이라는 점을 감안해 읽었다.
- Michele Tossani, 「Cosa ci dice la tesi di Pirlo?」, Ateralbus, 2020.09.17. 논문의 강점과 일반론을 구분한 전술 분석.
- 「Ulivieri-Sconcerti: volano stracci su tesina Pirlo」, Virgilio Sport, 2020.09.18. 스콘체르티의 비판과 울리비에리의 반박.
- 「Mazzone: "Misi Pirlo davanti alla difesa, così è diventato il regista più forte del mondo"」, il Napolista, 2020.08.11. 『라 레푸블리카』 마초네 인터뷰 인용. 레지스타 전환의 기원.
- 「Pirlo racconta: "Io regista? Ero all'Inter e Mazzone mi chiamò..."」, FCInterNews; 「Pirlo ricorda Carlo Mazzone」, Fanpage, 2023. 피를로 본인의 회고와 안첼로티와의 대화.
- 「Pirlo: su allenare la Juventus non ho rimorsi. Conte è stato un maestro」, Eurosport Italia, 2023.12.06. 라디오 세리에 A 인터뷰. 콘테가 감독의 시선을 처음 심어 줬다는 진술.
- UEFA 공식 경기 기록 2000467(2010.02.16 AC 밀란 2-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000471(2010.03.1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4-0 AC 밀란). 선발 명단과 교체·득점 이벤트.
- Andrea Pirlo, Alessandro Alciato, 『Penso quindi gioco』, Mondadori, 2013; 영어판 『I Think Therefore I Play』, 2014. 박지성 대인마크 회고. 2차 인용: Planet Football, Balls.ie.
- Alex Ferguson, 『My Autobiography』, Hodder & Stoughton, 2013. 피를로 패스 성공률 서술. 수치의 정의가 없어 진술로만 사용했다.
- 「La tesi di Andrea Pirlo "Il calcio che vorrei". E Coverciano oscura Oxford e Cambridge」, Il Fatto Quotidiano, 2020.09.21. 제목의 반어적 논조만 인용했다.
- 「Juve, 'All or nothing' su Amazon: Agnelli attacca Sarri e dà fiducia a Pirlo」, Sky Sport, 2021.11.25. 다큐멘터리 『All or Nothing: Juventus』 속 아녤리의 시즌 첫 소집 연설.
- 「Juventus Fires Pirlo After One Season as Manager, Brings Back Allegri」, Sports Illustrated, 2021.05.28; Bleacher Report, 2021.05.28. 경질, 성명, 포르투전 선발 연령, 여름 이적.
- 「Coach Analysis - Andrea Pirlo. Dalla teoria alla pratica.」, Area Coach, 2020.10.22. 논문 원칙과 초반 경기의 대조 분석.
- 「How Andrea Pirlo has brought his Juventus blueprint to Fatih Karagümrük」, Total Football Analysis, 2022.08.13. 유벤투스 4-4-2 72% 집계와 카라귐뤼크 빌드업 구조의 연속성.
- Understat, Serie A 2019/2020·2020/2021. 팀별 경기 자료(xG, xGA, npxG, xPTS)를 시즌 단위로 합산해 계산했다. 모델 기반 추정치다.
- 「Pirlo lascia il Karagumruk」, Sky Sport, 2023.05.24; Fatih Karagümrük 2022-2023 시즌 기록. 이탈 당시 순위와 최종 순위.
- 「Serie B, Sampdoria penalizzata di 2 punti dal Tribunale Federale Nazionale」, Sky Sport, 2023.07.27. 승점 삭감의 사유와 적용 시즌.
- 「La Sampdoria ha esonerato l'allenatore Andrea Pirlo」, Il Post, 2024.08.29. 경질 시점과 시즌 초반 성적, 투티노 영입.
- Thiago Motta, 「Il valore del pallone: lo strumento del mestiere nel cuore del gioco」, FIGC Settore Tecnico, UEFA Pro 2019-20. 공과 선수의 관계, 스트레스, 기술이 부족한 선수의 성장 서술의 1차 사료.
- 「Thiago Motta non è più l'allenatore della Juventus」, Juventus FC, 2025.03.23; Thiago Motta 감독 경력 기록. 제노아·스페치아·볼로냐·유벤투스 기록.
- Vincenzo Italiano 감독 경력 기록; 「Bologna, l'ex allenatore Italiano firma col Besiktas」, il Resto del Carlino, 2026.06. 트라파니에서 베식타시까지의 경로.
- 「Andrea Pirlo, il Dubai Fc conferma la fiducia dopo il caso Italia」, Sky Sport, 2026.07.29. United FC 승격과 대표팀 선임 무산 뒤의 잔류 확인.
- 「Andrea Pirlo vs Real Madrid.jpg」, Jan S0L0, 2010, CC BY-SA 2.0.
- 2010년 2월 16일 AC 밀란-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 사진, Getty Images. 게재처: Goal.
- 「Palermo FC - UC Sampdoria, 17 May 2024 02.jpg」, SonoGrazy, 2024, CC BY-SA 4.0. 크기를 조정했다.
- 「Thiago Motta Bologna 2024.jpg」, Pietro Luca Cassarino, 2024, CC BY-SA 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