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FINALS · THREE CLUBS · ONE COACH 세 리그에서 바뀐 포메이션, 끝까지 남은 판단의 기준

1970년 페예노르트, 1978년 클뤼프 브뤼허, 1983년 함부르거 SV. 선수와 리그가 달라질 때마다 하펠은 압박의 시작점과 공간의 배치를 조정했다. 세 결승은 그 조정 속에서도 되풀이된 판단의 기준을 드러낸다.

한 감독이 같은 전성기와 같은 선수단으로 결승에 세 번 올랐다면, 그 기록은 강한 한 팀을 얼마나 오래 유지했는지 말해준다. 그런데 나라와 리그, 구단과 선수단이 모두 달라진 상태에서 세 번 같은 무대에 도착했다면 질문도 달라진다. 선수 명단이 바뀌어도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독자는 이 기록을 ‘챔스 결승’이라 검색한다. 정확히 말하면 에른스트 하펠(Ernst Franz Hermann Happel; 오스트리아 축구 선수·감독, 1925-1992)이 세 번 밟은 무대는 유러피언 챔피언 클럽스컵(European Champion Clubs’ Cup; 각국 리그 우승팀이 겨루던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 결승이었다. 1970년 페예노르트로 셀틱을 꺾고, 1978년 클뤼프 브뤼허로 리버풀에 졌으며, 1983년 함부르거 SV로 유벤투스를 이겼다. 세 결승에 모두 다른 구단을 이끈 감독, 그리고 서로 다른 두 구단으로 이 대회를 처음 우승한 감독이 하펠이다.[1]

EUROPEAN CUP FINAL RECORD14년 동안 세 나라의 문법을 통과했다
1970FEYENOORD · NETHERLANDS페예노르트 2-1 셀틱

연장 117분 오베 킨드발의 결승골. 네덜란드 구단 최초의 유러피언컵 우승.

WIN
1978CLUB BRUGGE · BELGIUM리버풀 1-0 클뤼프 브뤼허

주축 세 명이 부상으로 빠진 웸블리 결승. 벨기에 구단 사상 유일한 유러피언컵 결승 진출 기록.

RUNNER-UP
1983HAMBURGER SV · WEST GERMANY함부르거 SV 1-0 유벤투스

8분 펠릭스 마가트의 결승골. 하펠은 서로 다른 두 구단으로 유럽 정상에 오른 첫 감독이 됐다.

WIN

세 팀의 포메이션과 선수 역할은 서로 달랐다. 따라서 결승 세 번을 하나의 고정 전술로 묶으면 기록이 실제보다 단순해진다. 하펠은 상대의 기준점을 흔들고, 공 가까운 곳에서 수적 관계를 만들며, 선수가 그 원리를 직접 실행할 환경을 매번 새로 구축했다. 포메이션의 숫자 아래에서 누가 언제 움직여야 하는지, 그 조건을 먼저 공유한 감독이었다.

후방에서 경기를 읽던 오스트리아의 수비수

하펠은 SK 라피트 빈에서 센터백으로 뛰었고,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는 1954·1958 FIFA 월드컵에 출전했다. 1954년 스위스 대회에서 오스트리아는 3위에 올랐으며, 하펠은 8강 스위스전에서 직접 득점도 남겼다.[2]

당시 오스트리아 축구는 전쟁 전 분더팀(Wunderteam; 1930년대 짧은 패스와 위치 교환으로 이름을 얻은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기억과 전후 세대가 겹치던 시기였다. 마티아스 신델라르(Matthias Sindelar; 오스트리아 축구 선수·센터포워드, 1903-1939)의 세대가 남긴 유동적 공격의 유산을, 하펠은 에른스트 오크비르크(Ernst Ocwirk; 오스트리아 축구 선수·미드필더, 1926-1980)와 함께 뛰는 수비수의 시야로 경험했다.

경기 전 그라운드에 선 잠피에로 보니페르티와 에른스트 오크비르크
유벤투스의 잠피에로 보니페르티(Giampiero Boniperti; 이탈리아 축구 선수·공격수, 1928-2021)와 오스트리아 주장 에른스트 오크비르크. 하펠은 오크비르크와 함께 1950년대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후방을 맡았다.

센터백으로 경기를 읽으며 하펠은 상대의 공격이 어디에서 편해지는지를 후방에서 지켜봤다. 훗날 그의 팀은 수비선을 앞으로 올려 오프사이드 트랩(Abseitsfalle; 수비선이 함께 전진해 상대 공격수를 오프사이드 위치에 두는 방식)을 걸었고, 앞선부터 공을 가진 선수를 쉬게 두지 않았다. 상대의 첫 패스를 방해해야 자기 팀의 다음 공격도 가까운 거리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공격과 수비를 한 구조로 묶는 감각은 이렇게 후방의 시야에서 자랐다.

하펠의 침묵이 지시로 작동하려면

하펠을 따라다니는 가장 유명한 문장은 독일어와 네덜란드어가 뒤섞인 “Keine geloel, fussball spielen”이다. UEFA는 이를 “말은 그만하고 축구를 하라”는 뜻으로 옮겼다.[3] 과묵한 감독이라는 이미지는 이 한 문장으로 완성됐다.

과묵한 성격과 선수의 자율성 사이에는 반복 훈련이라는 단계가 놓여 있었다. 감독이 말을 아끼기 전에 공을 받을 방향과 동료가 움직일 때의 다음 선택이 이미 팀 안에 공유되어야 했다. 그 기준이 몸에 들어간 뒤에야 선수는 매 장면마다 벤치를 쳐다보지 않고 다음 행동을 고를 수 있다.

클뤼프 브뤼허 시절의 증언은 그 과정을 보여준다. 훈련 경기에는 두 번의 터치 제한이 반복됐고, 스프린트 훈련으로 경기 속도를 몸에 넣었다. 하펠은 4-4-2와 4-3-3을 오갔지만, 빠른 패스와 전진하는 풀백, 상대가 먼저 적응해야 할 정도의 강도는 유지했다.[4] 하펠이 경기 중 침묵할 수 있었던 데에는 훈련에서 먼저 만들어 놓은 공통 기준이 있었다.

01 · PRESS공을 가진 상대에게 시간을 주지 않는다

한 사람의 추격보다 전방과 중원이 함께 전진해 다음 패스까지 제한한다.

02 · SPACE사람보다 먼저 공간의 관계를 본다

대인방어에만 매달리지 않고 수비선·중원·전방의 간격을 한 덩어리로 움직인다.

03 · JUDGEMENT훈련한 원리 안에서 선수가 판단한다

고정된 지시를 늘리기보다 동료의 이동에 맞춰 자리를 비우고 채우는 기준을 공유한다.

1970 페예노르트, 4-3-3의 세 줄은 어떻게 연결됐나

하펠이 1969년 페예노르트에 부임했을 때 구단은 이미 리그와 KNVB컵 더블을 차지한 강팀이었다. 그러므로 1970년의 우승을 감독 한 명의 발명품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하펠이 받은 재료부터 대단했다. 수비에는 리뉘스 이스라엘(Marinus David Israël; 네덜란드 축구 선수·수비수, 1942-)과 테오 라세롬스(Matheus Wilhelmus Theodorus Laseroms; 네덜란드 축구 선수·수비수, 1940-1991), 중원에는 빔 얀선(Wilhelmus Marinus Anthonius Jansen; 네덜란드 축구 선수·미드필더, 1946-2022)·빌럼 판하네험(Willem van Hanegem; 네덜란드 축구 선수·미드필더, 1944-)·프란츠 하질(Franz Hasil; 오스트리아 축구 선수·미드필더, 1944-), 전방에는 쿤 물레인(Coenraadt Moulijn; 네덜란드 축구 선수·윙어, 1937-2011)과 오베 킨드발(Bengt Ove Kindvall; 스웨덴 축구 선수·공격수, 1943-)이 있었다.[3]

페예노르트 훈련장의 빌럼 판하네험, 에른스트 하펠, 쿤 물레인
페예노르트 훈련장의 빌럼 판하네험, 에른스트 하펠, 쿤 물레인. 하펠의 4-3-3은 세 줄의 정지 화면보다 이 선수들이 서로의 빈자리를 읽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명단표에서는 4-3-3이었다. 하지만 판하네험이 빌드업의 낮은 지점으로 내려오고 하질과 얀선이 공의 위치에 맞춰 높이를 바꾸면 중원의 모양은 계속 달라졌다. 킨드발은 중앙 수비수 사이에만 머물지 않고 좌우 통로로 움직였고, 물레인은 폭을 넓혔다. 상대는 한 명을 따라가면 그 뒤 공간을 내주고, 자리를 지키면 페예노르트가 공을 받은 채 돌아서는 것을 허용해야 했다.

하펠의 압박(pressing; 여러 선수가 공과 다음 패스 방향을 함께 압축하는 집단 수비)도 훗날의 한 가지 모델과 완전히 같았다고 볼 수는 없다. 어느 구역에서 압박을 시작했는지, 대인 기준과 공간 기준을 어떻게 섞었는지는 경기마다 달랐다. 빅토르 마슬로프(Вик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аслов; 러시아 축구 선수·감독, 1910-1977)와 리뉘스 미헐스 등 같은 시대에 비슷한 문제를 풀던 감독도 있었다. 그래서 하펠을 ‘압박의 유일한 발명자’라고 부르는 것보다, 압박과 오프사이드 트랩을 유럽 정상급 무대에서 안정적으로 결합한 초기 감독으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5]

페예노르트가 압박을 통과하고 수비를 향해 전진하는 움직임을 표시한 영상 전술도
공 주변의 마름모로 압박을 통과하고, 반대편에서 수비선을 향해 전진하는 움직임을 표시한 후대 영상 도해. 4-3-3이라는 숫자보다 공 가까운 곳의 연결과 다음 공간을 함께 읽는 자료다. 화면: Boroboy116 YouTube.

1970년 5월 6일 산시로 결승에서 셀틱이 먼저 득점했지만, 이스라엘이 곧 동점을 만들었다. 연장 종료가 다가오던 117분, 킨드발이 길게 넘어온 공을 받아 결승골을 넣었다. 페예노르트는 2-1로 이겼고 네덜란드 구단 최초로 유러피언컵을 들었다.[6]

1970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셀틱 수비수를 마주한 페예노르트 공격수 오베 킨드발
1970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셀틱 수비수를 마주한 오베 킨드발. 중앙의 골잡이가 측면 통로까지 움직이면서 페예노르트는 수비의 기준점을 흔들었다.

페예노르트는 1970년 네덜란드 구단 최초로 유러피언컵을 우승했고, 리뉘스 미헐스(Marinus Jacobus Hendricus Michels; 네덜란드 축구 선수·감독, 1928-2005)의 아약스는 이듬해부터 대회 3연패를 이뤘다. 순서만 보면 하펠이 앞서지만, 아약스 역시 그 이전부터 강한 압박과 위치 교환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두 감독의 팀이 가까운 시기에 공간을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방법을 각자의 방식으로 밀어 올렸고, 그 가운데 페예노르트가 먼저 유럽 정상에 도착했다. 확인되는 연대는 여기까지이며, 토털 풋볼의 사상 전체를 한 사람의 소유로 돌릴 근거는 되지 않는다.

1978 클뤼프 브뤼허, 벨기에에서 확인된 재현성

클뤼프 브뤼허는 하펠의 방법이 다른 리그에서도 작동했는지 판단할 두 번째 사례다. 페예노르트와 함부르거 SV가 강한 리그에서 유럽 정상까지 오른 팀이었다면, 브뤼허는 하펠이 부임한 1974년부터 세 시즌 연속 벨기에 1부 우승, 1977년 벨기에컵 우승, 1976년 UEFA컵 결승, 1978년 유러피언컵 결승을 차례로 쌓았다. 국내 지배와 유럽 결승 진출이 여러 시즌에 걸쳐 반복됐으므로 한 번의 토너먼트 이변으로 설명하기 어렵다.[7]

WHAT CHANGED · WHAT REMAINED구단이 바뀔 때마다 조정한 것과 유지한 것
구단달라진 조건반복된 작동 원리
페예노르트

유럽 우승을 노리던 네덜란드 더블 챔피언, 기술과 힘이 함께 있던 선수단

4-3-3의 세 줄을 연결한 압박·높은 수비선·위치 교환

클뤼프 브뤼허

유럽 최상위 자본과 거리가 있던 벨기에 구단, 4-4-2와 4-3-3을 오간 구성

두 터치 패스·강한 체력·전진 풀백으로 상대가 먼저 적응하게 만든 속도

함부르거 SV

대인방어와 세계적 개인을 갖춘 유벤투스를 만난 결승, 후반의 압박 변화

상대의 담당자를 이동으로 끌어낸 뒤 빈 공간을 집단이 공격하고 다시 방어

1976년 UEFA컵에서는 올랭피크 리오네·입스위치 타운·AS 로마·AC 밀란·함부르거 SV를 차례로 넘었고, 결승에서 리버풀과 1·2차전 합계 3-4로 졌다. 2년 뒤 유러피언컵에서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유벤투스를 꺾고 다시 리버풀을 만났다. 이미 한 번 유럽 결승을 경험한 팀이 더 높은 대회의 결승으로 돌아온 것이다.

결승 직전에는 선수 구성이 무너졌다. 라울 랑베르(Raoul Lambert; 벨기에 축구 선수·공격수, 1944-)·폴 쿠랑(Paul Courant; 벨기에 축구 선수·미드필더, 1949-)·요스 폴더르스(Jos Volders; 벨기에 축구 선수·수비수, 1949-)가 부상으로 선발에서 빠졌다. 하펠은 구단에서 한 경기만 뛴 헝가리 공격수 러요시 퀴(Kű Lajos; 헝가리 축구 선수·미드필더, 1948-2024)를 투입했다. 비르거 옌센(Birger Jensen; 덴마크 축구 선수·골키퍼, 1951-2023)의 선방으로 버텼지만 케니 달글리시(Sir Kenneth Mathieson Dalglish; 스코틀랜드 축구 선수·감독, 1951-)에게 결승골을 내주며 0-1로 졌다.[7]

1978년 결승의 종착점은 0-1 패배였다. 평가의 범위를 앞선 네 시즌으로 넓히면 세 차례의 리그 우승과 두 차례의 유럽 결승이 함께 들어오고, 주축 공격수들이 빠진 웸블리에서도 디펜딩 챔피언을 한 골 차까지 묶었다. 이 누적 기록은 하펠의 구조가 네덜란드의 특정 황금세대를 떠난 뒤에도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브뤼허에서 보낸 네 시즌 덕분에 결승의 결과와 그곳까지 반복해서 도달한 원리를 함께 비교할 수 있다.

1978 네덜란드, 크라위프의 자리를 여러 경로로 나누다

1977년 하펠은 클뤼프 브뤼허를 맡은 채 네덜란드 대표팀 지휘봉도 잡았다. 요한 크라위프(Hendrik Johannes Cruijff; 네덜란드 축구 선수·감독, 1947-2016)가 불참한 1978 FIFA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2차 조별리그를 통과해 결승에 올랐다. 개최국 아르헨티나와의 결승에서는 정규시간 종료 직전 롭 렌센브링크(Pieter Robert Rensenbrink; 네덜란드 축구 선수·공격수, 1947-2020)의 슈팅이 골대를 맞았고, 연장 끝에 1-3으로 졌다.[8]

1977년 네덜란드 대표팀 훈련장에서 걸어 나오는 요한 크라위프와 에른스트 하펠
1977년 네덜란드 대표팀 훈련장의 요한 크라위프와 에른스트 하펠. 하펠은 이듬해 크라위프 없이도 대표팀을 월드컵 결승으로 이끌었다.

결승 전 팀 토크가 “Gentlemen, two points” 한 문장이었다는 일화는 널리 전해지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동시대 1차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 하펠의 과묵함을 압축한 후대의 전승으로 두고, 판단은 경기에서 확인되는 변화에 두는 편이 정확하다. 네덜란드는 크라위프가 맡던 여러 기능을 아리 한(Arend Haan; 네덜란드 축구 선수·감독, 1948-)의 중거리 슈팅과 렌센브링크의 전진, 전방부터 이어지는 압박에 나누어 공격 경로를 다시 만들었다.

짧은 대표팀 일정에서 새로운 전술 언어를 처음부터 가르칠 시간은 없었다. 하펠은 선수들이 네덜란드의 여러 클럽에서 익힌 위치 교환과 전진 수비의 공통분모를 찾았고, 크라위프가 빠진 자리는 여러 선수의 기존 장점을 연결해 채웠다. 클럽에서 오래 훈련한 방법을 대표팀의 조건에 맞춰 번역한 결과가 두 대회 연속 월드컵 결승이었다.

1983 함부르크, 상대의 기준을 옮긴 결승 설계

함부르거 SV는 하펠 부임 첫 시즌인 1981-82 시즌 분데스리가를 우승했고 UEFA컵 결승에도 올랐다. 이듬해에는 시즌을 가로질러 리그 36경기 무패를 기록했고, 다시 분데스리가 정상에 선 뒤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유벤투스를 만났다.[9]

유벤투스에는 디노 초프(Dino Zoff; 이탈리아 축구 선수·골키퍼, 1942-), 클라우디오 젠틸레(Claudio Gentile; 이탈리아 축구 선수·수비수, 1953-), 마르코 타르델리(Marco Tardelli; 이탈리아 축구 선수·미드필더, 1954-), 미셸 플라티니(Michel François Platini; 프랑스 축구 선수·미드필더, 1955-), 파올로 로시(Paolo Rossi; 이탈리아 축구 선수·공격수, 1956-2020)가 있었다. 1982 FIFA 월드컵 우승의 중심과 당대 유럽 최고의 플레이메이커가 한 팀에 모였다. 선수 이름만 비교하면 함부르크가 열세였다. 그러므로 하펠의 세 번째 결승은 “좋은 선수에게 자유를 줬다”는 설명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상대의 대인방어를 어떻게 이동시킬지 아주 구체적인 설계가 필요했다.

ATHENS · 25 MAY 1983한 명을 옮겨 두 명의 담당자를 빼냈다
  1. ① 바스트루프가 오른쪽으로

    왼쪽 공격수 라르스 바스트루프가 오른쪽으로 이동하자 그를 맡은 클라우디오 젠틸레도 따라갔다.

  2. ② 밀레프스키가 아래로

    위르겐 밀레프스키가 내려오며 수비형 미드필더 마시모 보니니를 중앙에서 끌어냈다.

  3. ③ 마가트가 왼쪽 하프스페이스로

    두 담당자가 비운 통로로 펠릭스 마가트가 전진했고, 8분 약 20m 거리에서 결승골을 넣었다.

라르스 바스트루프(Lars Bastrup; 덴마크 축구 선수·공격수, 1955-)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가자 대인 마크를 맡은 젠틸레가 따라갔다. 위르겐 밀레프스키(Jürgen Milewski; 독일 축구 선수·공격수, 1957-)는 아래로 내려와 마시모 보니니(Massimo Bonini; 산마리노 축구 선수·미드필더, 1959-)를 끌어냈다. 그 결과 왼쪽 하프스페이스(half-space; 중앙과 측면 사이의 세로 통로)가 열렸고, 펠릭스 마가트(Wolfgang-Felix Magath; 독일 축구 선수·감독, 1953-)가 그 공간으로 들어가 8분 결승골을 넣었다.[10]

마이스터샬레를 들어 올린 에른스트 하펠과 함부르거 SV 선수단
함부르거 SV를 독일과 유럽 정상으로 이끈 하펠. 1983년의 팀은 전반에는 상대의 대인 기준을 이동으로 흔들고, 후반에는 더 낮은 수비와 오프사이드 트랩까지 받아들였다.

공간 방어를 선호했던 하펠은 이 결승에서 볼프강 롤프(Wolfgang Rolff; 독일 축구 선수·감독, 1959-)에게 플라티니를, 디트마어 야코프스(Ditmar Jakobs; 독일 축구 선수·수비수, 1953-)에게 로시를 밀착시키는 임무도 맡겼다. 두 핵심 선수를 직접 묶는 편이 팀 전체의 공간을 지키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반에는 높은 선과 압박으로 유벤투스를 밀어냈고, 후반 유벤투스가 중앙을 강화하자 수비 높이를 낮추며 역습과 오프사이드 트랩을 오갔다.[10]

이 결승에서 4-3-3은 선수들의 출발 위치를 정했고, 실제 우위는 유벤투스의 대인 기준을 읽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바스트루프가 젠틸레를 옆으로 데려가고 밀레프스키가 보니니를 끌어내자, 마가트가 공격할 공간이 열렸다. 하펠이 말한 자율성은 한 선수의 이동이 다음 선수에게 어떤 선택을 열어주는지 팀 전체가 이해한 뒤에 작동했다.

세 구단에서 되풀이된 판단의 순서

하펠은 미헐스처럼 하나의 전술 사조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소비되지 않았고, 발레리 로바노우스키(Валерій Васильович Лобановський; 우크라이나 축구 선수·감독, 1939-2002)처럼 과학적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남기지도 않았다. 그의 방법론은 세 팀에서 반복된 원리와 결승마다 달라진 세부 조정을 함께 놓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ERNST HAPPEL ON THE MIDFIELDER
“Ein guter Mittelfeldspieler hat Augen im Rücken, das ist das ganze Geheimnis.”

“좋은 미드필더는 등 뒤에도 눈이 있다. 그게 비결의 전부다.”

FIFA가 기록한 이 문장은 원고에 떠돌던 판본보다 짧고 정확하다.[11] ‘등 뒤의 눈’은 공을 받기 전에 동료와 상대의 위치를 살피고 다음 장면을 미리 정하는 능력을 압축한 표현이다. 하펠이 선수에게 요구한 자율성도 이 시야에서 나왔다.

악수하는 막스 메르켈과 에른스트 하펠
옛 라피트 빈 동료 막스 메르켈(Max Merkel; 오스트리아 축구 선수·감독, 1918-2006)과 에른스트 하펠. “메르켈이 장비 담당을 맡는다면 오스트리아 대표팀 감독을 하겠다”는 하펠의 농담도 FIFA의 인용 기록에 남아 있다.

세 번의 유러피언컵 결승을 한 줄에 놓으면 하펠의 방법이 어디에서 반복되고 어디에서 달라졌는지 보인다. 페예노르트에서는 압박과 높은 수비선, 브뤼허에서는 빠른 패스와 체력, 함부르크에서는 상대 대인방어의 기준을 옮기는 움직임이 앞에 섰다. 표현은 달랐지만 공 주변의 관계를 만들고, 상대의 기준점을 움직이며, 선수가 다음 공간을 스스로 읽게 하는 순서는 이어졌다.

전술판의 숫자는 출발 위치를 보여줄 뿐, 누가 움직일 때 누구의 시선이 따라가고 그 순간 어느 공간이 열리는지까지 말해주지는 않는다. 하펠은 이 관계를 세 나라의 다른 선수들에게 다시 이해시켰다. 새 팀에서 성공을 재현하려면 선수들이 현재의 위치를 읽고 다음 공간을 선택하는 기준부터 공유해야 했다. 세 나라에서 그 기준을 다시 세운 일이 ‘챔스 결승 3회’라는 숫자보다 오래 남는 하펠의 업적이다.

출처와 기록주

  1. 「Mourinho eyes exclusive club」, UEFA. 하펠이 서로 다른 두 구단으로 유러피언컵을 우승한 첫 감독이며, 1978년 클뤼프 브뤼허까지 세 구단으로 결승에 오른 기록.
  2. 「Austria players with most FIFA World Cup appearances」, FIFA. 하펠의 센터백 경력, 1954·1958 월드컵 출전과 1954년 3위 기록.
  3. Berend Scholten, 「First blood for Feyenoord」, UEFA. 1969-70 페예노르트 선수 구성, 하펠의 발언과 결승 진출 과정.
  4. 「In Bruges」, The Blizzard. 쥘리앵 쿨스의 회고를 바탕으로 한 두 터치 훈련, 스프린트, 4-4-2와 4-3-3 운용, 전진 풀백.
  5. 「Who really invented the pressing game – and why it works」, FourFourTwo. 마슬로프·하펠·미헐스를 둘러싼 압박 전술의 복수 계보와 페예노르트의 압박·오프사이드 트랩.
  6. 「Van Daele winner puts Feyenoord on the map」, FIFA. 1970년 5월 6일 결승과 오베 킨드발의 연장 117분 결승골.
  7. 「The Golden Happel Years」와 「Wat is jouw herinnering aan Wembley ’78?」, Club Brugge. 1976·1978 유럽 결승, 3연속 리그 우승, 1978 결승의 부상자와 선발 변화.
  8. 「Menotti gegen Happel: Finale WM 1978」, FIFA; 「Rob Rensenbrink passes away aged 72」, KNVB. 네덜란드의 1978 월드컵 결승 진출과 렌센브링크의 종료 직전 골대 장면.
  9. 「Die Geschichte des HSV」, Hamburger SV. 하펠 부임 뒤 분데스리가 우승, 36경기 무패와 1983 유러피언컵 우승.
  10. Niklas Baumgart, 「Wie Happel Trapattoni auscoachte」, kicker. 1983년 결승의 바스트루프·밀레프스키 이동, 마가트의 공간과 HSV의 수비 조정.
  11. 「Happels beste Sprüche」, FIFA. 하펠의 미드필더관과 막스 메르켈에 관한 발언의 독일어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