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 LEGEND

빌럼 판하네험(Willem van Hanegem)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크라위프의 라이벌과 페예노르트의 컴퓨터

빌럼 판하네험의 왼발과 경기 지배력, 하펠의 페예노르트와 미헐스의 1974 네덜란드, 크라위프와의 경쟁을 읽는다. 밀란·셀틱·토트넘전, 월드컵 불참과 은퇴식까지 당대 사진으로 살피고 스탯·등번호·우승·개인 수상을 정리한다.
네덜란드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빌럼 판하네험과 크라위프를 위협하는 자 문구
크라위프를 위협하는 자, 빌럼 판하네험.
FIFA 로고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네덜란드 국기
NEDERLAND네덜란드 왕국Koninkrijk der Nederlanden
UEFA 로고

유럽축구연맹Union des Associations Européennes de Football

왕관을 쓴 사자 머리와 KNVB 글자로 된 네덜란드 왕립 축구 협회 로고
#KNVB네덜란드 왕립 축구 협회Koninklijke Nederlandse Voetbalbond
오렌지 방패 안에 흰 사자가 선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
#NED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Nederlands voetbalelftal | Oranje (오라녀; 오렌지)
편집자 평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서는 네덜란드 미드필더 계보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는 선수다. 빌럼 판하네험에게는 한 경기를 통째로 자기 속도로 바꾸는 재주가 있었다. 상대가 달려들면 왼발 바깥쪽으로 공을 빼냈고, 동료가 달려 나가면 그 발로 먼 공간까지 길을 냈다. 페예노르트가 아약스보다 먼저 유럽을 제패했을 때도, 두 구단의 천재들이 주황색 유니폼 안에서 만났을 때도 그 경기 지배력은 살아 있었다. 필자에게 판하네험은 크라위프와 나란히 놓고 네덜란드 축구의 전성기를 논할 만한, 슈퍼 SS급 미드필더다.

삥이FC 빌럼 판하네험 평가

  1. 네덜란드 미드필더의 최고봉을 이야기하면 프랑크 레이카르트(Frank Rijkaard; AC 밀란과 네덜란드 대표팀의 수비수·미드필더)나 뤼트 휠릿(Ruud Gullit; 네덜란드의 유로 1988 우승을 이끈 주장), 요한 네이스컨스(Johan Neeskens; 1970년대 아약스와 네덜란드 대표팀의 미드필더) 등이 따라 나온다. 뭐, 어느 쪽을 고르든 거대한 이름이다. 그 반열에서 판하네험을 첫손에 꼽는 판단에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패스의 정교함과 시야, 경합을 버티는 힘, 경기 흐름에 개입하는 범위가 한 몸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2. 필자가 붙이고 싶은 표현은 ‘컴퓨터’다. 공을 빨리 보내는 일에도 능했지만, 더 인상적인 것은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아는 감각이었다. 발바닥 아래 공을 두고 상대가 한 발 더 나오기를 기다린 다음, 비어 버린 옆과 뒤를 찔렀다. 받는 선수의 속도까지 고려하는 패스는 동료를 편하게 했고 수비수의 판단을 늦췄다. 판하네험을 볼 때는 공의 도착점과 함께 그 공 때문에 움직인 사람들을 보게 된다.

  3. 왼발 바깥쪽을 쓰는 능력은 특히 대단했다. 몸을 크게 돌리지 않고도 패스 방향을 바꿀 수 있으니, 상대는 그의 어깨와 골반만 보고 다음 동작을 단정하기 어려웠다. 발 안쪽으로 감아 넣는 킥과 바깥쪽으로 밀어 보내는 킥이 같은 발에서 나왔다. 네덜란드 해설자 프랑크 스눅스(Frank Snoeks; NOS의 축구 해설자)가 한 다리에 양발을 가진 선수였다고 회상한 이유를 알 만하다.

  4. 요한 크라위프(Johan Cruijff; 아약스와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끈 공격수)와의 비교에는 기술 이상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크라위프는 경기가 풀리지 않는 날에도 판하네험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태클에 나서는 점을 높이 샀다. 섬세한 왼발을 가진 선수가 몸싸움까지 피하지 않았으니, 감독으로서는 경기의 형편이 달라져도 맡길 일이 있었다. 잘 풀리는 날의 우아함과 꼬이는 날의 투쟁심을 같이 평가해야 한다.

  5. 빠른 주력이 장점인 선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압박과 전진, 위치 교환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당대 네덜란드 축구의 한가운데서 버텼다. 페예노르트의 유러피언컵과 UEFA컵, 1974 월드컵의 일곱 경기는 그 적응력을 보여 준다. 동료가 어디까지 나갔고 그 뒤에 무엇이 비었는지를 읽는 선수에게는, 남들보다 먼저 출발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 필자가 판하네험의 경기 지능을 그렇게 높이 두는 이유다.

빌럼 판하네험 프로필

네덜란드 국기NEDERLAND네덜란드 왕국Koninkrijk der Nederlanden
본명
Willem van Hanegem
등록명
빌럼 판하네험(Willem van Hanegem)
출생
1944년 2월 20일
출생지
네덜란드 제일란트주 브레스컨스
신장
185cm
주발
왼발
포지션
중앙 · 공격형 · 수비형 미드필더
주요 등번호
10번 · 3번 · 12번
주요 프로 경력
1962-1983년
대표팀
1968-1979년 · 52경기 6골
별명
더 크롬머(De Kromme; 휜 다리와 독특한 움직임, 휘어 가는 왼발 킥을 떠올리게 하는 별명)

벨록스에서 자란 왼발, 크세르크세스에서 터진 득점력

판하네험의 축구는 위트레흐트의 벨록스(Velox; 훗날 프로 부문이 FC 위트레흐트 창단에 합류한 구단)에서 자랐다. 1962년 8월 26일 로다 JC를 상대로 에이르스터 디비시(Eerste Divisie; 네덜란드 2부 리그)에 첫발을 디뎠고, 네 시즌 동안 리그 109경기 39골을 넣었다. 처음부터 중원 한복판에 고정된 선수는 아니었다. 측면과 수비 등 여러 자리를 경험하며 공을 다루고 경기를 바라보는 범위를 넓혔다.

줄무늬 벨록스 유니폼을 입은 젊은 빌럼 판하네험
1964년 11월 17일, 벨록스 시절의 판하네험. 사진: Hugo van Gelderen / Anefo · 네덜란드 국가기록원.

1966년 로테르담의 RFC 크세르크세스(Rotterdamsche Football Club Xerxes; 1967-68 시즌에는 Xerxes/DHC ’66으로 출전)로 옮긴 뒤에는 최상위 무대에서 득점력을 드러냈다. 특히 1967-68 시즌 리그 26골은 훗날의 중원 사령관을 떠올리는 독자에게 꽤 낯선 숫자일 것이다. 왼발로 동료에게 기회를 공급하는 능력 아래에는, 골문 가까이에서 직접 끝낼 수 있는 감각도 깔려 있었다.

그의 이력에서 벨록스와 크세르크세스를 짧은 전사로만 넘기기 아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러 위치에서 뛰어 본 선수는 패스를 받는 사람의 사정도 안다. 측면에서 공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는 동료, 수비수를 등지고 버티는 공격수의 다음 동작이 자신의 경험과 겹친다. 판하네험의 시야에는 그 몸의 기억도 들어 있었을 법하다.

하펠의 페예노르트, 천재를 중원에 앉히다

1968년 판하네험은 페예노르트 로테르담(Feyenoord Rotterdam)으로 이적했다. 첫 시즌부터 리그와 KNVB 베이커(KNVB Beker; 네덜란드 축구 협회 컵)를 함께 차지했다. 이 더블을 지휘한 감독은 벤 페이터르스(Ben Peeters; 페예노르트의 1968-69 시즌 감독)였다. 이후 1969년 에른스트 하펠(Ernst Happel; 페예노르트와 함부르크를 유럽 정상으로 이끈 오스트리아 감독)이 들어오면서, 국내 챔피언의 중원은 유럽의 강호를 상대할 무기로 다듬어졌다.

훈련장에서 대화하는 빌럼 판하네험, 에른스트 하펠, 쿤 물레인
1970년 4월 23일. 왼쪽부터 판하네험, 하펠, 쿤 물레인(Coen Moulijn; 페예노르트의 왼쪽 윙어). 유러피언컵 결승을 앞둔 페예노르트 훈련장이다. 사진: Anefo · 네덜란드 국가기록원.

빔 얀선(Wim Jansen; 페예노르트와 1974 네덜란드 대표팀의 미드필더)과 프란츠 하질(Franz Hasil; 하펠이 샬케 04에서 데려온 오스트리아 미드필더), 판하네험이 이루는 조합을 보자. 공을 되찾고 동료 뒤를 메우는 움직임, 전방과 중원을 오가는 연결, 넓은 방향으로 뻗는 패스가 서로 맞물렸다. 세 명을 같은 유형의 선수로 채우는 것보다 각자의 장점을 이어 쓰는 편이 훨씬 까다로운 상대를 만든다. 판하네험의 왼발은 그 삼각형에서 경기의 방향과 속도를 정할 수 있었다.

다만 하펠과 판하네험이 늘 다정한 사제였다고 생각하면 이 관계의 맛이 사라진다. 판하네험은 훗날 인터뷰에서 달리기가 많았던 화요일 체력 훈련을 두고 자주 다퉜으며, 훈련장에서 쫓겨난 적도 있다고 회상했다. 감독은 그를 필요로 했고 선수는 자기 방식이 분명했다. 경기장에서 보여 주는 이해와 훈련장에서 부딪치는 고집이 한 관계 안에 공존했다.

이런 선수에게 ‘컴퓨터’라는 말을 붙이면 자칫 명령을 정확히 수행하는 기계처럼 들린다. 필자가 판하네험에게서 보는 것은 오히려 현장에서 해답을 고르는 능력이다. 공을 더 오래 가지고 있어야 할 때와 바로 놓아야 할 때를 구별하고, 팀이 흔들리면 자기 자리의 일을 넘어 개입했다. 하펠의 조직력에 그런 판단력을 가진 왼발이 들어갔으니, 페예노르트의 경기에는 감독과 선수가 함께 조절하는 여지가 생겼다.

아약스를 무너뜨린 밀란, 판하네험의 헤더에 멈추다

1969년 유러피언컵(European Cup; 현재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 결승에서 AC 밀란은 아약스를 4-1로 꺾었다. 그해 가을, 이번에는 페예노르트가 디펜딩 챔피언과 만났다. 밀라노 원정 1차전은 0-1 패배. 로테르담에서 반드시 뒤집어야 했다.

하펠은 빔 얀선에게 밀란의 지휘자 잔니 리베라(Gianni Rivera; 1969년 발롱도르를 받은 AC 밀란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기고, 판하네험에게는 조반니 로데티(Giovanni Lodetti; 리베라 곁에서 활동량을 보태던 밀란의 미드필더)를 상대하게 했다. 판하네험은 그 임무를 처음에는 의아하게 받아들였다고 회상했다. 천재에게 공을 잘 주는 것만큼 상대 천재에게 공이 편하게 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도 중요했던 경기다.

밀란전에서 양팔을 높이 들고 환호하는 판하네험
1969년 11월 26일 밀란전의 판하네험. 페예노르트는 2-0으로 승리하며 전년도 유럽 챔피언을 탈락시켰다. 사진: Eric Koch / Anefo · 네덜란드 국가기록원.

1969년 11월 26일, 얀선의 골로 합계가 같아졌고 82분 판하네험의 헤더가 승부를 갈랐다. 왼발의 마술사에게서 결정적인 골은 머리로 나왔다. 중원을 장악한 뒤 마지막에는 직접 골문까지 들어갔다는 점이 이 선수답다. 페예노르트는 합계 2-1로 다음 라운드에 올랐다.

판하네험은 레기아 바르샤바와의 준결승 홈 경기에서도 이른 선제골을 넣었다. 그 시즌 유러피언컵 성적은 8경기 4골. 공격을 설계하는 사람이 토너먼트의 고비마다 득점자로도 등장했다. 결승으로 가는 길을 하펠의 전술적 성공으로 설명할 때, 그 계획을 몸으로 수행한 판하네험의 다면성도 함께 남겨 두어야 한다.

1970년 밀라노, 네덜란드가 유럽을 처음 가진 밤

1970년 5월 6일 결승 상대는 셀틱 FC(Celtic Football Club; 1967년 유러피언컵 우승팀)이었다. 페예노르트는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리뉘스 이스라엘(Rinus Israël; 페예노르트의 주장·중앙 수비수)의 동점골로 따라붙었다. 연장 막판에는 오베 킨드발(Ove Kindvall; 페예노르트의 스웨덴 중앙 공격수)이 결승골을 넣었다. 2-1, 네덜란드 구단 최초의 유럽 제패였다.

셀틱과의 결승이 끝난 뒤 사람들 사이에서 기뻐하는 판하네험과 페예노르트 동료들
1970년 5월 6일 밀라노. 셀틱을 꺾은 페예노르트 선수들이 우승의 순간을 나누고 있다. 사진: Eric Koch / Anefo · 네덜란드 국가기록원.

이 순서를 기억하면 네덜란드 축구사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아약스의 유러피언컵 3연패는 1971년부터 시작됐다. 세계가 훗날 토탈 풋볼(totaalvoetbal; 선수들의 위치 교환과 유기적인 공간 활용을 특징으로 하는 축구)의 상징으로 기억할 아약스보다, 페예노르트가 먼저 결승의 벽을 넘었다. ‘먼저 우승했다’는 사실을 전술 전체의 단독 발명권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하펠과 판하네험이 이미 유럽 정상급 축구를 구현하고 있었다는 순서까지 지울 이유도 없다.

같은 해 페예노르트는 에스투디안테스를 상대로 인터콘티넨털컵(Intercontinental Cup; 당시 유럽과 남아메리카 챔피언이 맞붙던 대회)까지 차지했다. 이듬해에는 네덜란드 리그를 다시 우승했다. 아약스의 대륙 3연패가 펼쳐지던 바로 그 시대에, 국내에서는 그 아약스를 제치고 챔피언이 된 라이벌이 있었다. 판하네험의 위상을 이해하려면 크라위프의 그늘이라는 표현보다 이 경쟁의 밀도를 먼저 보아야 한다.

1974년 토트넘전, 유럽으로 다시 뻗은 왼발

하펠이 떠난 뒤에도 판하네험의 전성기는 이어졌다. 빌 쿠르버르(Wiel Coerver; 페예노르트의 1973-74 시즌 감독) 아래에서 페예노르트는 리그와 UEFA컵을 함께 노렸다. 유러피언컵을 처음 차지했던 팀에서 시간이 흘렀고, 판하네험은 다른 감독과 동료 구성에서도 중원의 기준으로 남았다.

트벤터전에서 상대 골문을 향해 슈팅하는 판하네험
1974년 1월 20일 FC 트벤터전의 동점골 장면. 그해 봄 판하네험은 리그와 UEFA컵을 함께 차지했다. 사진: Anefo · 네덜란드 국가기록원.

5월 21일 토트넘과의 결승 원정 1차전에서 그는 43분 직접 프리킥으로 1-1을 만들었다. 토트넘이 다시 앞선 뒤에도 페예노르트는 동점을 만들어 2-2로 돌아왔다. 홈 2차전은 2-0 승리였다. 판하네험은 2차전에는 출전하지 않았지만, 원정에서 남긴 한 골은 결승의 균형을 지키는 데 보탬이 됐다.

한 선수의 기량을 특정 감독의 시스템 안에만 가두기 어려운 이유가 이 시기에 드러난다. 하펠의 유럽 제패와 쿠르버르의 리그·UEFA컵 더블 사이를 판하네험이 잇는다. 패스를 잘하는 선수를 넘어, 동료와 감독이 바뀌어도 경기를 성립시키는 자원이었던 셈이다. 이제 그 왼발이 향할 곳은 서독 월드컵이었다.

미헐스의 네덜란드, 크라위프와 판하네험이 같은 편일 때

리뉘스 미헐스(Rinus Michels; 아약스의 유럽 제패와 1974 네덜란드 대표팀을 지휘한 감독)가 이끈 대표팀은 아약스와 페예노르트의 경험이 합류한 팀이었다. 크라위프가 앞으로 나가며 수비수를 끌고, 네이스컨스가 전진과 압박을 반복하는 동안 판하네험은 그 움직임에 공을 공급했다. 얀선이 함께 있는 중원, 뒤에서 올라오는 선수들까지 생각하면 패스 하나가 여러 사람의 다음 위치와 맞물렸다.

아르헨티나전을 앞두고 나란히 서 있는 판하네험과 네덜란드 대표팀 선수들
1974년 6월 26일 아르헨티나전의 네덜란드 대표팀. 판하네험은 대회 일곱 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사진: Bert Verhoeff / Anefo · 네덜란드 국가기록원.

흥미롭게도 판하네험은 이 팀을 훗날 완벽한 사전 설계의 산물로 설명하지 않았다. 2018년 인터뷰에서 그는 선수들이 서로를 도우며 큰 공간을 내주지 않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집단 압박이 나왔다고 회상했다. 이스라엘의 부상으로 아리에 한(Arie Haan; 아약스 출신으로 1974 월드컵에서 중앙 수비를 맡은 선수)이 뒤에 서고 얀선이 중원에 들어온 구성이 잘 맞았다는 이야기였다. 미헐스의 강점으로는 선수들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한 점을 들었다.

이 회고를 읽으면 감독의 전술판 옆에 선수들의 사고가 보인다. 경기 중에는 누군가 압박을 시작하고, 다른 누군가 그 뒤의 공간을 닫아야 한다. 한 번의 지시만으로 아흔 분의 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는 없다. 판하네험처럼 공의 앞뒤를 읽는 선수가 여러 명 모였을 때, 포지션 교환은 무질서로 흩어지지 않고 서로 돕는 방식이 된다. 그가 말하는 토탈 풋볼에는 그런 동료에 대한 신뢰가 들어 있다.

크라위프와의 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클럽에서 서로의 승리를 가로막던 두 천재가 대표팀에서는 상대 수비를 함께 괴롭혔다. 한 명이 공간을 흔들고 다른 한 명이 그 흔들림을 읽어 공을 보낼 수 있었다. 라이벌이라는 말과 최고의 동료라는 말이, 이 두 사람에게는 동시에 성립한다.

1974년 결승에 겹쳐진 브레스컨스의 기억

판하네험은 1944년 2월 20일 브레스컨스(Breskens; 네덜란드 제일란트주의 항구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해 9월 11일, 독일군의 이동을 저지하려던 연합군의 폭격으로 마을이 큰 피해를 입었고 그의 아버지와 형이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는 다른 집의 아기를 몸으로 감싸 살려 냈다. 살아남은 아이 벤 더파우(Ben de Pauw; 훗날 혈액학 교수가 된 폭격 생존자)는 오랜 세월 뒤 판하네험과 만나 친구가 됐다.

서독과의 월드컵 결승을 앞둔 판하네험의 감정에는 그 가족사가 겹쳐 있었다. 그는 승리 이상의 감정을 독일에 품었고, 그 기억은 후대에도 반복해서 전해졌다. 아버지를 잃게 한 폭격의 주체와 전쟁에 대한 그의 감정은 서로 다른 층위에 놓여 있다. 한 사람에게 남은 전쟁을 읽으려면 그 둘을 함께 보아야 한다.

결승에서는 네덜란드가 먼저 득점했으나 서독이 역전했다. 베켄바워가 버틴 수비와 포크츠가 크라위프를 따라붙는 경기 속에서, 네덜란드는 끝내 두 번째 골을 얻지 못했다. 판하네험의 패스와 집념도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짊어진 상실 위에, 손끝까지 왔던 월드컵을 놓친 쓰라림이 겹쳤다.

다만 그 결승 한 경기로 판하네험의 월드컵 전체를 읽을 필요도 없다. 그는 일곱 경기를 모두 뛰며 네덜란드가 결승에 이르는 과정을 함께 만들었다. 크라위프가 1974년의 얼굴이었다면, 판하네험은 그 팀이 경기를 풀어 가는 또 하나의 지성이었다.

1978년, 하펠과 다시 만났지만 월드컵에는 가지 않았다

1976년 판하네험은 AZ ’67(Alkmaar Zaanstreek ’67; 현재의 AZ 알크마르)로 옮겼다. 대표팀에서는 유로 1976 준결승에 출전했으나 연장전에서 퇴장당했고, 네덜란드는 체코슬로바키아에 1-3으로 졌다. 팀이 이후 3위를 차지한 것과 별개로, 그의 대회는 씁쓸하게 끝났다.

대표팀 훈련장에서 하펠, 네이스컨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판하네험
1978년 5월 12일 제이스트. 왼쪽부터 하펠, 네이스컨스, 판하네험. 준비 과정에는 함께했지만 판하네험은 아르헨티나 월드컵에 참가하지 않았다. 사진: Hans Peters / Anefo · 네덜란드 국가기록원.

1978년에는 AZ에서 KNVB 베이커를 우승했고, 대표팀 감독이 된 하펠과 다시 만났다. 그러나 월드컵을 앞두고 끝내 불참을 결정했다. 당시 집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판하네험은 정신적으로 대회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하펠이 첫 경기 또는 첫 두 경기에서 기용하지 않을 뜻을 알렸다는 이야기, 자신이 뛰지 못하면 팀에 불편한 존재가 될 것 같았다는 말도 함께 나왔다.

가까운 동료의 부상과 주변의 부재, 뒤에 회고한 상업 수입 분배 문제까지 배경은 여러 갈래였다. 선발 자리 하나에 대한 불만으로 정리하기에는 당사자가 꺼낸 이야기부터 복잡했다. 하펠과의 재회가 두 번째 월드컵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판하네험은 네덜란드에 남았다. 그가 없는 대표팀은 다시 결승에 올랐다.

그의 월드컵은 1974년의 일곱 경기와 준우승으로 남았다. 1978년 대표팀 동료들이 아르헨티나에서 다시 결승에 오르는 동안, 판하네험은 네덜란드에 있었다. 위 사진은 그 갈림길에 서기 직전의 시간을 담고 있다.

은퇴식의 두 현수막, 크라위프를 둘러싼 로테르담의 마음

1979년에는 북미의 시카고 스팅(Chicago Sting; 당시 북미사커리그 NASL 소속 구단)에서 뛰었고, 같은 해 FC 위트레흐트(Football Club Utrecht)로 돌아왔다. 벨록스의 프로 부문이 합류해 탄생한 클럽이었으니, 자신의 출발점과 이어지는 귀환이었다. 1981년에는 페예노르트로 복귀해 마지막 두 시즌을 보냈다.

판하네험의 얼굴과 WvH forever 문구, Cruyff rot op 문구가 나란히 걸린 관중석
1983년 6월 4일 은퇴 경기. 판하네험을 향한 ‘영원히’와 크라위프에게 ‘떠나라’는 현수막이 나란히 걸렸다. 사진: Rob Bogaerts / Anefo · 네덜란드 국가기록원.

1983년 6월 4일, 서른아홉 살 판하네험을 위한 은퇴 경기가 열렸다. 상대는 1974 월드컵 대표팀의 동료들. 판하네험도 주황색 유니폼을 입고 페예노르트를 상대했다. 경기장에는 그의 얼굴과 ‘영원히’를 적은 현수막이 있었고, 바로 옆에는 크라위프에게 떠나라는 문구가 걸렸다. 아약스의 상징이 페예노르트로 온다는 소식에 팬들의 감정이 거칠어져 있었다.

같은 날 그라운드에서는 판하네험과 크라위프가 다시 공을 주고받았다. 관중이 지키고 싶어 한 구단의 경계와 선수들이 공유해 온 축구의 기억은 꼭 일치하지 않았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크라위프의 라이벌’이라는 설명이 얼마나 많은 것을 담고 또 놓치는지 알게 된다. 팬들은 두 사람을 서로 다른 도시의 깃발로 들었지만, 두 선수는 상대의 재능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알고 있었다.

은퇴 경기에서 사람들의 어깨 위에 올라탄 판하네험
같은 날, 동료들의 어깨 위에서 작별 인사를 하는 판하네험. 은퇴 경기는 2-2로 끝났다. 사진: Rob Bogaerts / Anefo · 네덜란드 국가기록원.

판하네험이 떠난 뒤 크라위프는 페예노르트에서 1983-84 시즌 더블을 이끌었다. 판하네험에게도 다른 귀환이 남아 있었다. 감독으로 돌아와 1992-93 시즌 리그를 우승했고, 1994년과 1995년에는 국내 컵을 들었다. 선수로 경기를 읽던 사람이 벤치에서 다시 로테르담의 우승을 만들었다.

필자에게 판하네험의 크기는 그 지속성에도 있다. 하펠의 팀에서, 미헐스의 팀에서, 마침내 자기 팀에서 축구를 읽었다. 페예노르트와 아약스의 경쟁, 네덜란드의 첫 유럽 제패, 1974년의 주황색 혁명에 그의 왼발이 들어 있다. 네덜란드 축구의 정상을 말할 때 이 이름을 오래 붙잡아 볼 이유는 충분하다.

역대 클럽·국대 기록

벨록스 문장벨록스1962-1966109경기 · 39골
에이르스터 디비시
1967-1968년 크세르크세스/DHC '66 문장RFC 크세르크세스 / DHC '661966-196867경기 · 32골
에레디비시
1956-1973년 페예노르트 문장페예노르트 로테르담1968-1976 · 1981-1983372경기 · 107골
97도움
1967-1980년 AZ '67 문장AZ '671976-197992경기 · 13골
20도움
1974-1988년 시카고 스팅 문장시카고 스팅197927경기 · 6골
7도움 · NASL 정규리그
1980년대 FC 위트레흐트 문장FC 위트레흐트1979-198159경기 · 3골
7도움
1973-1979년 네덜란드 왕립 축구 협회 문장네덜란드 대표팀1968-197952경기 · 6골
성인 A매치

페예노르트·AZ·위트레흐트는 FR12의 공식전 집계, 벨록스·크세르크세스·시카고는 리그 기록이다. 크세르크세스는 National Football Teams의 두 시즌 34경기·33경기를 합산했다. 과거 대회와 도움의 수록 범위는 자료마다 다르므로 이 카드들을 단일 기준의 커리어 총합으로 더하지 않는다. 문장은 판하네험이 뛰던 시기에 각 구단과 대표팀이 쓰던 것이며, 벨록스의 칸은 현재 문장이다.

대회별 스탯

대회경기골
에레디비시494126
KNVB 베이커르427
유러피언컵1910
UEFA컵2510
FIFA 월드컵70
UEFA 유로10

주요 대회만 추린 트랜스퍼마크트 경기별 기록의 집계다. 이 시대 경기는 도움 기록이 거의 남지 않아 도움 칸을 두지 않았다. 이 밖의 기록은 친선 경기 24경기 2골, 에이르스터 디비시 22경기 10골, FIFA 월드컵 예선 13경기 4골, 기타 국제 클럽 대회 11경기 2골, UEFA 유로 예선 9경기,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2경기, 인터콘티넨털컵 2경기, UEFA 유로 예선 플레이오프 1경기다. 대회별 합계는 클럽 기록 카드의 공식전 총계와 집계 범위가 달라 그대로 더해지지 않는다.

역대 등번호

클럽

소속팀확인 기간등번호
벨록스1962-1966년확인 자료 없음
RFC 크세르크세스1966-67 시즌8
크세르크세스/DHC '661967-68 시즌10
페예노르트 로테르담1968-69~1975-76 · 1981-82~1982-83 시즌10 · 6 · 5
AZ '671976-77~1978-79 시즌22 · 8
시카고 스팅1979년24
FC 위트레흐트1979-80~1980-81 시즌34 · 10

국가대표팀

대회·확인 시기등번호
1968-69 · 1970-71 · 1972-73 · 1974-75 시즌 기록10
1974 FIFA 월드컵3
유로 197612

트랜스퍼마크트의 등번호 이력을 기본으로 하며, 시카고의 24번은 NASL 선수 기록과 대조했다. 고정 번호가 정착하기 전의 경기별 번호까지 모두 포괄하는 목록은 아니다. 대표팀 3번과 12번은 각 본선 대회의 등록 번호다.

대표 우승·준우승 경력

에레디비시Eredivisie

우승 3회: 1968-69, 1970-71, 1973-74 · 페예노르트

KNVB 베이커KNVB Beker

우승 2회: 1968-69 · 페예노르트 / 1977-78 · AZ '67

유러피언컵European Cup

우승: 1969-70 · 페예노르트

UEFA컵UEFA Cup

우승: 1973-74 · 페예노르트

인터콘티넨털컵Intercontinental Cup

우승: 1970년 · 페예노르트

FIFA 월드컵FIFA World Cup

준우승: 1974년 · 네덜란드

UEFA 유로UEFA European Football Championship

3위: 1976년 · 네덜란드

빌럼 판하네험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국가 수훈

네덜란드 오라녀나사우 훈장 · 오피서Officier in de Orde van Oranje-Nassau · 2024년

  • 발롱도르1970년 공동 14위
  •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선수1971년 · NOS 트로피
  • 네덜란드 세기의 베스트 11요한 크라위프 선정1999년
  • 세기의 페예노르트인서포터 사이트 팬 투표1999년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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